너 자신을 알라
우리는 흔히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 Gnoti seauton "라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를 자신의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알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 말은 그가 아테네에 있는 델피신전에 갔을 때 그곳의 무당으로부터 들은 신탁이었다. 신탁이란 무녀를 통해서 발언되는 신의 말을 일컫는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 플라톤이나 또는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체계적인 철학자는 아니다. 그는 사회가 혼란하고 윤리적으로 타락한 시대에 그러한 타락과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출세와 재물에 치우치는 궤변철학자들(소피스트들)에 대항하여, 옳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대화 통해서 알리고자 한 철인이었다.
당시 소피스트들은 확실한 것이란 없고 모든 것이 의심된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하면서도 자기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오만하였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것은 결국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소크라테스는 작고 똥똥한 몸매에 들창코였다고 한다. 그는 길거리에서 젊은이들과 거리낌없이 대화하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그는 언제나 묻는 입장이었으며 한 번도 자신이 어떤 문제에 대하여 확정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화형식이 바로 소크라테스와 젊은이의 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젊은이는 정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지?
젊은이: 물론이지요. 강한 사람이 행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따라야 하니까 그것은 언제나 정의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강한 자는 사람일까 아닐까?
젊은이: 그것을 말씀이라고 합니까? 강한 자도 역시 사람이지요.
소크라테스: 나는 세상에 정의가 있는가 하면, 불의도 있다고 생각하네. 이 두 가지를 구분하여야 할 것이네. 만일 강한자도 사람이라면, 사람은 누구나 옳게 행동할 수도 있고 나쁘게 행동할 수도 있겠지?
젊은이: 그야 물론이지요.
소크라테스: 만일 어떤 사람이 옳게 행동하면 그것은 정의일 테고 옳지 않게, 곧 나쁘게(악하게) 행동하면 그것은 불의이겠지?
젊은이: 옳은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 강한 자가 옳게 행동하면 그것은 마땅히 정의이겠지만, 강한 자도 사람이니 만큼 악하게 행동했을 때 그것도 역시 정의일까?
젊은이: 그것은 불의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자네가 처음에 강한자가 행하는 모든 것이 정의라고 한 말은 어떻게 되는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아테네의 등애(쇠파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아테네 젊은이들의 무지를 깨우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늪에서 잠자거나 허우적거리는 젊은이들을 마치 등애처럼 날카롭게 쏘아댐으로써 그들을 무지로부터 몰아내어 참다운 지식을 얻게 하고자 하였다.
흔히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을 반어법과 산파술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를 흔들면서 젊은이가 알고 있는 것을 털어놓게 한다. 그러면서 그는 젊은이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젊은이가 스스로 자신의 주장에 반대되는 입장으로 옮아가게끔 한다. 앞의 짤막한 대화에서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잘 알 수 있다.
이 말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로 하여금 허세와 거짓으로 가득 찬 지식, 즉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서 순수한 영혼의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는 뜻을 지닌다. 기독교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을 하고 불교에서 "마음을 비우라"라는 말을 하는데 이 모두 헛된 것을 버리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다.
산파술이란 긍정적으로 참다운 자기 자신의 지식을 찾는 방법을 말한다. 반어법은 헛된 지식으로서의 무지를 깨뜨리는 부정적 방법이었다. 그러나 산파술에 의해서 젊은이는 참다운 자기의 세계를 되찾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는 산파였다. 산파는 자기 자신이 아기를 출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산모를 도와줄 뿐이고 아기를 산출하는 사람은 산모 자신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에, 그리고 젊은이를 산모에, 또 한 참다운 지식을 아기에 비유하였다. 모든 헛된 지식을 파괴한 다음에 참답게 얻는 지식은 바로 산파술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니 만큼 소크라테스는 젊은이가 마치 산모가 아기를 낳는 것처럼, 자신 안에서 스스로 참다운 앎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궤변철학자들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태도에 대항하여 "나는 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안다."고 주장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여러 궤변철학자들의 시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음모에 의하여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제자들이 도피할 길을 다 마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마음으로 독을 마시고 일생을 마쳤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우선 우리들의 마음이 헛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직시하게 하며, 다음으로는 참다운 지식, 참다운 자아를 형성하여야 바람직한 인간, 바람직한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넓은 뜻을 안고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어둡고 혼란하기만 하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입시학원이나 다를 것 없고 대학은 취직학원 같은 인상을 준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며 금전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믿음이 사람들의 영혼을 질식시키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 내가 왜,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알라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나의 적성과 나의 능력 그리고 나의 사람됨을 철저히 알 때, 나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개발시킬 수 있으며 아울러 가치있는 삶을 설계할 수 있다.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통 속의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어느 날 대낮 등불을 켜들고 아테네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어떤이가 그에게 왜 대낮에 등불을 켜고 돌아다니냐고 물으니 그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등불을 들고 다닌다"고 답하였다.
현재 우리들 중 너무 많은 사람이 나를 버리고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것을 서로 '나'라고 주장한다. 사실 가면이 너무 두껍고 무겁기 때문에 그리고 또 너무 꽉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꺼번에 벗어 던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뜻을 두고두고 새긴다면 점차로 가면을 벗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참다운 자아를 찾기 시작할 때, 지식과 윤리가 빛나는 문화의 꽃이 우리 앞에 만개할 날이 올 것이다.
@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