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피언스Scorpions는 1965년 독일 하노버에서 결성된 헤비메탈 밴드다. 독일 북부의 공업 도시인 하노버는 요즈음은 세계적인 전자박람회 체빗CeBit으로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세계 레코드 업계의 심장부라 부를 정도로 음악의 중심지였다. 루돌프 솅커Rudolf Schenker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라는 스쿨 밴드를 결성한 때가 놀랍게도 그의 나이 13세 때였는데, 밴드가 제대로 가동된 것은 1969년 동생인 마이클 솅커Michael Schenker와 클라우스 마이네Klaus Meine가 가입하면서부터ek. 밴드에서 거의 대부분의 곡을 만든 주역이자 팀의 리더인 루돌프 솅커는 당시 거친 리프를 구사하던 스푸키 투스Spooky Tooth나 야드버즈The Yardbirds, 프리티 씽스Pretty Things 등에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마이클 솅커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13세에 기타를 잡았지만, 스콜피언스가 데뷔 앨범을 발표하는 1972년에는 17세의 나이임에도 그와 대적할 사람이 몇 안 될 정도로 타고난 기타 천재였다.
데뷔 당시 스콜피언스는 아직 세계적 밴드로 발돋움하기에는 적잖은 장벽이 있었다. 하지만 클라우스 마이네(리드 보컬), 마이클 솅커(리드 기타), 루돌프 솅커(기타), 로더 하임버그Lothar Heimberg(베이스), 볼프강 지오니Wolfgang Dziony(드럼), 이렇게 다섯 멤버로 구성된 젊은이들은 레드 제플린이나 딥 퍼플 같은 록 밴드들의 영향을 자양분 삼아 음악적인 시야를 넓혀 나갔다.
1972년 데뷔 앨범 <Lonesome Crow>를 발표하고 첫 유럽 순회 공연을 열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스콜피언스는 청중들의 갈채에 힘을 얻어 하나하나의 연주에 온 정성을 쏟았다. 핵심 멤버인 마이클 솅커가 영국 하드록 밴드인 UFO로 떠나버리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이후 처절한 프레이즈를 뜯어댈 명 기타리스트 울리히 로스Ulich Roth가 대신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베이스와 드럼 파트에서도 멤버 교체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스콜피언스는 대중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저 그런 하드록 밴드 중의 하나 정도로 취급받았다. 그럴 수록 밴드 이름 ‘전갈’처럼 ‘독기’를 품었다. Sweet 등 유명 밴드들의 오프닝 밴드로 무대에 서면서 강렬한 무대 매너로 조금씩 이름을 알려나간 스콜피언스는 울리히 로스의 가입과 함께 두 번째 앨범 <Fly To The Rainbow>(1974)와 세 번째 앨범 <In Trance>(1975)를 발표하며 착실하게 기반을 다졌다. 앨범 <In Trance>는 'Dark lady' 'In trance' 'Life's like a river' 'Top of the Bill' 'Night lights' 'Living and dying' 등 주옥 같은 넘버들과 색다른 테크노 메탈 트랙인 'Robot man' 등이 실렸다. 금발 미녀의 도발적인 자세와 표정이 흑백 톤으로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앨범 재킷도 인상적이었다.
스콜피언스는 네 번째 앨범 <Virgin Killers>(1977)를 발표하면서 독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앨범 재킷에 사용된 소녀의 누드 사진이 유럽 일대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사진을 바꾸라는 당국의 명령을 받는 등의 우여곡절이 되레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1978년 초에는 드러마가 Herman Rarebell로 교체됐고 4월에 5집 앨범 <Taken by Force>가 나오면서 ‘전갈사단’ 스콜피언스는 드디어 일본 공연 기회를 잡았다. 당시만 해도 일본 시장을 세계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삼던 시절이었다. 도쿄 선플라자홀Sun Plaza Hall에서 열린 콘서트는 당시까지 일본을 방문한 밴드 중 최고의 수익을 올릴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그때 실황을 담은 두 장짜리 라이브 앨범 <Tokyo Tapes>는 두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의 최고작이다. 울리히 로스가 스콜피언스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처절한 기타 프레이즈를 들을 수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이 앨범은 미국에 역수입돼 첫 골드 앨범이라는 감격을 안기며 미국 시장에서의 무명 설움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일본 공연이 끝난 몇 달 뒤 Matthias jabs가 스콜피언스 새로운 기타리스트로 들어와 ‘기타 귀신’의 계보를 이어받았다.
스콜피언스가 팝-록 음악계의 중심지인 미국으로부터 본격적인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7집 <Lovedrive>(1979)를 발표하고 나서다. 한국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메탈 발라드 'Holiday' 'Always somewhere'가 수록된 이 앨범은 'Loving you sunday morning' 'Lovedrive' 'Another piece of meat' 등 굉장한 헤비메탈 트랙들로 즐비하다. 녹음 당시 마이클 쉥커가 잠시 참여했고 14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성한 또 한 명의 기타 귀신 Matthias Jabs가 신들린 듯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미국의 FM방송국들이 'Holiday'를 선곡표에 넣고 방송을 시작하자 리퀘스트가 쇄도하기 시작했는데, 이 앨범은 결국 스콜피언스의 앨범 중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리게 된다. 이에 힘입어 스콜피언스는 1979년 8월, 대망의 미국 공연에 나섰다.
이후 1980년 앨범 <Animal Magnetism>에서 주춤했지만 1982년 앨범 <Blackout>에서 'Blackout' 'No one like you' 'Dynamite' 등을 히트시키며 독일이 낳은 최고의 헤비메탈 밴드라는 상찬을 미국 시장에서 받아냈다. 이 앨범은 국내서는 'When the smoke is going down'이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통산 10집으로 스콜피언스를 세계적인 슈퍼 밴드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시킨 것은 바로 1984년 앨범 <Love at First Sting>이었다. 미국에서만 더블 플래티넘을 집어삼키며 어마어마한 대박을 기록했다. 이 앨범에서는 'Rock you like a hurricane' 'Big city night' 같은 헤비 넘버도 좋지만, 역시 백미는 불후의 메탈 발라드 'Still loving you'다. 이후 미국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펼친 단독 콘서트에 6만 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미국 음악 매거진 <롤링 스톤>은 이들을 ‘헤비메탈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며 그동안 미국에서 받았던 무관심의 서러움을 완벽히 치료해 주었다.
하지만 이 앨범의 국내 라이선스 판은 재킷의 선정성 때문에 얌전하고 착한 사진으로 바뀌었는데, 사연이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미 <Virgin Killers> 앨범에서 외설스러운 재킷 사진으로 물의를 빚은 바 있는 스콜피언스였다. 당초 <Love at First Sting> 앨범의 재킷은 두 연인이 포옹하고 있는 사진인데, 문제는 사진 속 남자가 포옹하고 있는 여인의 허벅지에 밴드 이름을 상징하는 전갈 문신이 새겨져 있었던 것. 미국 레코드 판매상들은 이 장면이 외설스러울 뿐만 아니라 남성의 여성 학대를 고무하는 이미지로 비춰질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사진을 교체하지 않으면 앨범 판매를 거부하겠다고 집단적 의사를 밝혔다. 결국 레코드사인 폴리그램이 판매상들의 요구에 굴복, 또 다른 표지의 앨범을 발매했고 이 앨범을 둘러싼 선정성 논란은 내내 세간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재발매한 앨범 재킷은 스콜피언스의 다섯 멤버들이 담담하게 서 있는 흑백사진으로 꾸며졌다.
1985년에는 통산 11집이자 두 번째 라이브 앨범인 <World Wide Live>(2LP)가 나왔다. 이 앨범이야말로 스콜피언스가 최고의 정점을 찍었던 것으로, 함께 발매된 라이브 DVD도 최고의 감동을 선사했다. 1990년 나온 앨범 <Crazy World>는 휘파람으로 시작해 냉전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메탈 발라드 'Wind of change'의 히트를 발판으로 나름 성공을 거둔 통산 13집이었다. 40대에 접어든 멤버들의 노련함이 엿보이지만, 파워에서도 혈기방장한 20대에 절대 밀리지 않는다. 국내서는 ‘Send me an angel’이 방송의 전파를 제법 탔다. 이 앨범 이후로는 '전갈' 특유의 맹독성이 사라졌고 치명적인 곡들은 나오지 않았다. 1996년, 그동안의 히트곡을 모은 베스트 앨범 <Gold>가 CD로 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