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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3.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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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은혜
출처 : 『나를 따르라』 디트리히 본회퍼 / 복 있는 사람 2016년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숙적이다. 오늘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값싼 은혜란 투매상품인 은혜, 헐값에 팔리는 용서, 헐값에 팔리는 위로, 헐값에 팔리는 성찬,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무분별한 손으로 거침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 대가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의미한다.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미리 계산을 치렀으니 선급한 계산서를 토대로 무엇이나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은혜의 본질이고, 미리 지급한 대가가 무한히 큰 까닭에 사용 가능성과 낭비 가능성도 무한히 크며, 은혜가 값싸지 않다면 그것이 어찌 은혜이겠냐는 것이다.
값싼 은혜는 교리, 원리, 체계로 통칭하는 은혜, 보편적인 진리로 통칭하는 죄의 용서, 기독교의 하나님 관념으로 통칭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은혜를 긍정하는 이는 자기의 죄를 용서받는다. 그 은혜를 가르치는 교회는 그 가르침을 통해 그 은혜를 공유한다. 그런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은폐해 주는 값싼 덮개를 발견한다. 그러고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지도 않고, 죄에서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 인정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은혜가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 주는 까닭에, 무엇이든 케케묵은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의 행위는 쓸데 없다"라는 것이다. 세상은 언제까지나 세상이고, 우리는 “아무리 최선의 삶을 살아도” 여전히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무슨 일을 하든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하고, 은혜 아래 있을 때 광신의 이단이 될지언정! 죄 아래 있을 때와 다르게 생활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은혜를 거스르지 않도록, 위대한 값싼 은혜에 흠집을 내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들에 순종하는 삶을 시도한답시고 또다시 문자 숭배를 격려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세상이 은혜를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았으니- 이 은혜의 진지함을 위해, 그리고 이 대체할 수 없는 은혜를 거스르지 않도록!- 그리스도인도 여타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비범한 일을 하고 싶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세속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가장 힘든 포기로 여길 게 뻔하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자기부정을 실행하며, 세상과 구별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은혜를 참으로 은혜 되게 하여, 이 값싼 은혜에 대한 세상의 믿음을 파괴하지 말고, 차라리 자신의 세상 속에서, 자신이 세상 때문에 -아니, 은혜 때문에!- 실행해야 하는 이 불가피한 포기 속에서, 모든 것을 홀로 처리하는 이 은혜를 소유하는 것으로 위로받고 안심하라(세쿠루스)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말고, 은혜로 만족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죄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값싼 은혜다. 이것은 죄에서 손을 끊고 전향하여 참회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죄의 용서, 곧 죄와 갈라서게 하는 용서도 아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취한 은혜에 지나지 않는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의 설교요, 공동체의 징계가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찬이요, 개인의 참회가 없는 죄 사함이다. 값싼 은혜는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다.
값비싼 은혜는 밭에 숨겨진 보화다. 사람은 그 보화를 얻으려고 가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팔아서 그 밭을 산다. 값비싼 은혜는 귀중한 진주다. 상인은 자기의 모든 상품을 값으로 내어 주고 그 진주를 산다. 값비싼 은혜는 그리스도의 왕권이다.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기를 넘어지게 하는 눈까지 뽑아 버린다. 값비싼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을 받은 제자는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다.
값비싼 은혜는 우리가 되풀이해서 찾아야 할 복음, 우리가 구해야 할 은사, 우리가 두드려야 할 문이다. 은혜가 값비싼 것은 따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은혜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은혜가 값비싼 것은 사람에게 목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은혜인 것은 사람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은혜가 값비싼 것은 죄를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은혜인 것은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은혜가 무엇보다도 값비싼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소중하기 때문이고, 이를 위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목숨을 대가로 지급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고전 6:19-20). 하나님께 소중한 것이 우리에게 값싼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은혜가 무엇보다도 은혜인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우리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야말로 값비싼 은혜다.
값비싼 은혜는 하나님의 거룩한 것으로 통칭하는 은혜다. 우리는 그것을 세상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도록 보호하고, 개에게 던져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값비싼 은혜는 살아 있는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칭하는 은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하시는 말씀이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라는 은혜로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근심하는 영혼과 지친 마음에 용서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멍에를 씌우기 때문이고, 그것이 은혜인 것은 예수께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두 차례 받는다.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이자 마지막 말씀(막 1:17 요 21:22), 베드로의 생애 전체는 이 두 부르심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의 경우,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자기의 직업인 그물질을 그만두고 말씀대로 그분을 따른다. 마지막 경우에는 부활하신 그분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옛 직업에 종사하던 베드로를 만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라!"
이 두 경우 사이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뛰어든 한 제자의 생애 전체가 놓여 있었다. 그 생의 한가운데에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 자리한다. 그리스도는 주님이시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베드로에게 세 차례, 곧 그가 첫 부르심을 받을 때와 마지막 부르심을 받을 때, 그리고 한 번은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선포된다. "나를 따르라!"며 베드로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 속에서 베드로에게 계시 된 그리스도의 은혜는 동일한 은혜다.
은혜는 베드로의 인생 여정에 세 차례나 임했다. 같은 은혜가 세 번에 걸쳐 다르게 선포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은혜였지, 그 제자가 자기에게 수여한 은혜가 아니었다. 그 제자를 압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신성모독으로 비칠 것이 틀림없는 신앙고백을 그 제자 속에서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은혜, 그리고 불성실한 베드로를 순교라는 궁극적 친교 속으로 부르셔서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같은 은혜였다. 베드로의 생애에서 예수를 따르는 것과 은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짝이었다. 그가 받은 은혜는 값비싼 은혜였다.
값비싼 은혜의 인식은 기독교의 확장과 교회의 점진적 세속화로 점차 사라졌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은혜는 기독교 세계의 공공 자산이 되었다. 그것은 헐값으로 얻을 수 있는 은혜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로마 가톨릭교회는 처음부터 알고 있던 값비싼 은혜에 대한 생각을 유산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수도원 제도는 교회와 결별하지 않았고, 신중한 교회는 수도원 제도를 참아 주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은혜는 값비싼 것이어서 이 은혜에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포함된다는 인식이 바로 여기에 곧 교회의 언저리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버렸고, 일상의 훈련 속에서 예수의 엄중한 명령들을 따르려고 애썼다. 이처럼 수도원 제도는 기독교의 세속화에 맞서고, 은혜를 값싼 것으로 만드는 것에 맞서는 생생한 저항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이 저항을 참아 줌으로써 이 저항이 결정적으로 폭발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그것을 상대화했다. 실로 교회는 이로부터 자신의 세속화된 생활을 정당화할 길을 얻었다. 왜냐하면, 수도원 생활은 이제 소수의 사람이 수행하는 별난 행위, 곧 대다수 교인이 의무로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행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내리신 명령의 유효성을 위험천만하게도 특별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특정한 집단에 국한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된 복종의 행위를 가장 높은 수준과 가장 낮은 수준으로 구분하는 일이 빚어졌다. 이는 로마 가톨릭이 자신들의 세속화에 대한 공격을 받을 때마다 자기 교회 안에서 수도의 길을 걸을 수도 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더 쉬운 길의 가능성도 철두철미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수도원 제도를 통해 초기 기독교가 가졌던 값비싼 은혜에 대한 이해를 유지한 것 같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이는 교회의 세속화를 다시 최종적으로 정당화해 준 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수도원 제도가-예수의 말뜻을 내용상 오해하여- 예수를 엄격히 따르는 은혜의 길을 걸어간 것은 결정적인 실책은 아니었다. 수도원 제도가 참된 기독교로부터 멀어진 것은, 그 제도가 자신의 길을 소수의 사람이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특별 행위가 되게 하고, 이것을 자기의 특별 공로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종교개혁 시대에 자기의 종 마르틴 루터를 통해 순수하고 값비싼 은혜를 다시 일깨우실 때 수도원을 통해 그를 인도하셨다. 루터는 수도사였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한 복종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했다. 그는 세상을 버리고 기독교도의 일을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복종을 배웠다.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수도사가 되라는 부름을 받자마자 자기의 인생 전부를 걸었다.
하지만 루터와 그의 길은 하나님 자신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성서를 통해 그에게 다음의 사실을 알려 주셨다. 이를테면 예수를 따르는 것은 몇몇 사람의 칭찬할 만한 특별한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리신 명령이라는 것이다. 수도원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겸손한 행위가 성인들의 칭찬할 만한 행위로 변질하였고, 따르는 자의 자기부정은 경건한 자들의 최종적이고 영적인 자기주장으로 둔갑했다. 그 때문에 세상이 수도사의 생활 한가운데로 들어와,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다시 활동하고 있었다.
루터는 수도사의 세상 도피가 가장 정교한 세상 사랑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경건한 삶의 마지막 가능성이 물거품이 되자 은혜를 붙잡았다. 붕괴한 수도사 세계 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리 최선의 삶을 살아도 우리의 행위는 헛되다”고 여기며 그 손을 붙잡았다. 그것은 그에게 선사된 값비싼 은혜였다. 그 은혜가 그의 전 존재를 압도했고, 그는 또 한 번 자기의 그물을 버리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도원에 들어갈 때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되,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경건한 자만은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자아(自我)마저 버렸다. 그는 자기의 공로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갔다. “너는 죄를 지었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용서를 받았으니, 네가 있는 곳에 계속 머무르면서, 용서받은 것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이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루터는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는 세상 자체가 선하고 거룩해서가 아니라, 수도원도 세상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고 나서 보인 루터의 행보는 초기 기독교 이래로 세상에 가해진 공격 중에서 가장 맹렬한 공격이었다. 수도사가 세상에 건넨 절교 선언은, 세상이 자기에게로 돌아온 사람을 통해 들은 절교 선언에 비하면 아이들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공격은 전면전이 되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이제는 세상 한복판에서 삶으로 실행되어야 했다. 수도원 생활의 특수 환경과 여러 편익 속에서 특별 행위로 실행되던 것이, 이제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자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되었다. 예수의 명령에 대한 전적인 복종은 일상의 직업 활동 속에서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세상 사람들의 생활 사이에서 충돌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심화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을 공격했다. 그것은 근접전이었다.
'루터는 순수한 은혜의 복음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서 예수의 명령에 대한 복종 의무 면제를 선언했다'거나, '종교개혁자가 발견한 것은 용서하는 은혜를 통한 세상의 거룩함 선언, 세상의 칭의였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루터의 업적을 치명적으로 오해하는 것도 없지 싶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세속 직업은 세상에 대한 맹렬한 저항을 표명함으로써만 그 정당성을 얻고, 예수를 따르는 가운데 수행되는 직업 활동만이 복음으로부터 새로운 권리를 얻는다고 여겼다.
루터가 수도원을 뒤로하고 세상으로 귀환한 것은 죄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터가 선물로 받은 것은 값비싼 은혜였다. 그 은혜는 메마른 땅 위에 흐르는 물, 불안을 해소하는 위로, 스스로 택한 종살이로부터 해방됨, 모든 죄의 용서였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값비쌌던 까닭은, 그것이 행위를 면제해 주기는커녕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끝없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 은혜는 값비싸서 은혜였고, 은혜여서 값비쌌다. 이것이 종교개혁자가 찾아낸 복음의 비밀이었고, 죄인의 칭의가 간직한 비밀이었다.
그런데도 순수하고 값비싼 은혜에 대한 루터의 인식이 아니라, 은혜를 가장 싼 값에 얻을 수 있는 곳을 찾아내는 인간의 용의주도한 종교적 본능이 종교개혁사의 승리자 행세를 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남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강조점을 살짝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 결과, 가장 위험하고 가장 해로운 일이 빚어지고 말았다. 루터는 아무리 경건한 길을 걷고 아무리 경건한 일을 해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이는 인간은 항상 자신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루터는 이 궁지 속에서 은혜를 붙잡았다. 믿음 안에서 모든 죄를 값없이,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는 은혜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이 은혜가 그의 생명을 요구하고, 그것도 날마다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서 예수 따르기를 면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예수 따르기 속으로 밀어 넣는 은혜였기 때문이다. 루터는 은혜에 관해 말했는데, 이는 그 자신의 삶이 은혜를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하게 되었음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었다. 그는 은혜에 관해 그런 식으로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었다. 루터는 오직 은혜만이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그의 제자들도 그 말을 똑같이 되풀이했지만, 다른 점은 그들이 루터가 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아주 빨리 생략한 채, 그것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루터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은 예수 따르는 것이었다. 그가 예수 따르기를 딱히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자신을 일컬어, 은혜로 말미암아 가장 중대한 예수 따르기에 들어선 사람이라고 늘 말했기 때문이다.
루터의 제자들이 세운 교리가 루터의 가르침에서 왔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교리는 하나님이 지상에 내려 주신 값비싼 은혜의 계시인 종교개혁을 끝장내고 무효화시키고 말았다. 세상 안에 있는 죄인의 칭의가 죄의 칭의와 세상의 칭의로, 이를테면 값비싼 은혜가 예수를 따르지 않는 값싼 은혜로 바뀌고 만 것이다.
루터는 우리가 아무리 최선의 삶을 살아도 우리의 행위는 헛되며, “죄를 용서하는 은혜와 은총이 아니면” 하나님께는 그 어떤 것도 가치가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가 그 순간까지 그리고 이미 그 순간에 예수를 다시금 새롭게 따르라는 부름을 받고 있음을 의식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린 한 사람으로서 한 말이었다. 그에게 은혜의 인식은 자기 삶의 죄와 최종적으로 철저히 단절하는 것이었지, 결코 죄의 칭의가 아니었다. 은혜를 안다는 것은 용서를 붙잡되, 제멋대로 살기를 최종적으로 철저히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만 은혜는 "나를 따르라"는 진지한 부르심이 될 수 있었다. 그에게 은혜는 그때그때의 “결과”였다. 물론 그것은 인간이 일으키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결과였다.
그런데도 루터의 후예들은 이 결과를 추정의 원칙적인 전제로 삼고 말았다. 바로 여기서 모든 재앙이 시작되었다. 은혜가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사하시는 기독교적인 삶의 "결과"라면, 이 삶은 한순간도 예수를 따르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은혜가 나의 기독교적인 삶의 원칙적인 전제라면, 이는 내가 세상에 살면서 짓는 죄가 이미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은혜를 믿고 죄를 지어도 될 것이고, 세상 또한 원칙적으로 이 은혜를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종래와 같이 나의 속물적이고 세속적인 생활을 계속하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감싸줄 것이라고 믿어도 될 것이다. 온 세상이 이 은혜 아래서 “기독교화”될 것이고, 기독교는 이 은혜 아래서 전례 없는 방식으로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직업 활동과 시민의 세속 직업 활동 사이에 일던 갈등이 중지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세상 속에서 세상과 똑같이 살고, 세상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고, 실로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과 전혀 구별되지 않아도 되며, 그러면서도 적당한 시간에 세상의 구역에서 교회의 구역으로 찾아가 자기 죄의 용서를 확인받고, 예수 따르기의 숙적, 곧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는 것을 증오하고 모욕하는 값싼 은혜를 통해 예수 따르기를 면제받는 것이다. 전제인 은혜는 가장 값싼 은혜이고, 결과인 은혜는 값비싼 은혜다.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지, 복음의 진리가 어떻게 표현되고 사용되는지를 아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오직 은혜로만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씀은 동일한 말씀이다. 하지만 동일한 문장을 잘못 사용하면 그 문장의 본뜻을 완전히 파괴하게 된다.
파우스트(Faust)가 인식 활동에 종사하다가 생의 말년에 “나는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 말은 결과로써 한 말이다. 그것은 한 학생이 첫 학기를 마치면서 자기의 태만을 정당화하려고 인용하는 동일한 문장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키르케고르). 그 문장은 결과로서는 참말이지만, 전제로서는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인식이 그것을 획득하는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의미한다.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만이 자기는 오직 은혜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 자체를 인식하고, 은혜를 이 부르심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예수 따르기를 면제받으려고 하는 자는 자기를 기만하는 자다.
그러나 루터 자신도 은혜를 파악하다가 이처럼 완전한 왜곡에 가장 아슬아슬하게 다가가지 않았던가? “대담하게 죄를 지어라. 그러나 더 대담하게 그리스도를 믿고 즐거워 하라!”는 루터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말은 이런 뜻이다. '여러분은 원래 죄인이며, 죄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여러분이 수도사는 세속의 사람이든, 여러분이 경건한 사람이 되려고 하든 악한 사람이 되려고 하든 간에, 여러분은 세상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를 짓는다. 그러니 이미 입은 은혜를 믿고 대담하게 죄를 지어라! 이것은 값싼 은혜의 적나라한 선포, 범죄 특별 허가증, 예수 따르기의 파기가 아닐까? 이것은 은혜를 믿고 일부러 죄를 지으라는 악마적 요구가 아닐까? 하나님이 선사해 주신 은혜를 믿고 죄를 짓는 것보다 더 고약한 은혜 모독이 있을까? 이것을 성령을 거스르는 죄로 여기는 가톨릭교회의 교리문답서가 옳은 게 아닐까?
여기서 결과와 전제를 구별하는 것이 이해에 전적으로 중요하다. 루터의 명제를 은혜 신학의 전제로 삼으면, 이는 값싼 은혜를 부르는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루터의 명제는 처음이 아니라 끝으로, 결과로, 완결로, 최후의 말로 이해해야 옳다. 루터의 명제를 전제로 이해하면, “대담하게 죄를 지어라”가 윤리적 원리가 되고, 은혜의 원리에 “대담하게 죄를 지으라”는 원리가 따라 붙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죄의 칭의다. 이는 루터의 명제를 정반대로 왜곡한 것이다.
“대담하게 죄를 지어라” 이 말은 예수를 따르는 길에서 자기가 죄 없는 자가 될 수 없음을 아는 사람, 죄를 무서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는 사람에게 루터가 주는 최후의 정보이자 다정한 충고였을 뿐이다. “대담하게 죄를 지어라” 이 말은 루터가 자신의 불순종하는 삶을 원칙적으로 확인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우리에게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복음, 무엇보다도 죄인인 우리를 찾아와 의롭다고 인정하는 복음이다.
이를테면 “대담하게 그대의 죄를 인정하고, 그대의 죄에서 벗어나려 하지 마라. 그리하되 ‘훨씬 더 대담하게 믿어라.' 그대는 죄인이다. 그러니 여전히 죄인이 되고, 죄인 이외의 무언가가 되려고 하지 말고, 날마다 다시 죄인이 되고, 대담하게 그 속에 머무르라”는 것이다. 이것이 날마다 죄를 진심으로 거절하는 사람, 예수를 따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것을 날마다 거절하는 사람, 자신의 일상적인 불성실과 죄에 대해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는 말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주는 말이겠는가? 그러한 위로를 통해 자신이 다시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부름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자기의 믿음을 위해 그런 말을 안심하고 들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루터의 명제는 결과로 이해될 때 값비싼 은혜가 된다. 값비싼 은혜만이 은혜다.
원리로 통칭하는 은혜, “대담하게 죄를 지어라”를 원리로 인식하는 은혜, 곧 값싼 은혜는 결국 새로운 율법, 곧 도움도 주지 못하고 해방도 주지 못하는 율법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말씀으로 통칭하는 은혜, 불안 속에 주어진 위로와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으로 통칭하는 “대담하게 죄를 지어라”, 곧 값비싼 은혜만이 순수한 은혜, 실로 죄를 용서하고 죄인을 해방하는 은혜다.
까마귀처럼 우리는 “값싼 은혜”라는 시체 주위에 모여, 그 시체로부터 독을 받아 마셨다. 그 결과, 예수 따르기가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다. 순수한 은혜에 관한 교리가 비할 데 없이 신격화되었고, 은혜에 관한 순수한 교리가 하나님 자체, 이를테면 은혜 자체가 되었다. 루터의 말들이 곳곳에서 인용되고 있지만, 진리인 그 말들이 자기기만으로 변질하고 있다. 흔히들 '우리 교회는 칭의 교리만 가지고 있으면, 확실히 의롭다 인정받는 교회가 된다!'고 한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은혜를 아주 값싼 것으로 만든 것에서 루터의 진정한 유산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은혜를 위해 예수 따르기를 율법적인 사람들과 개혁교회 신자들과 신자들에게 전적으로 떠넘긴 것, 세상을 의롭다 인정한 것, 따름의 길에 들어선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만든 것이야말로 루터교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한 민족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루터교도가 되었지만, 정작 이는 예수 따르기를 희생하고 가장 싼 값을 치러서 된 것이다. 결국, 값싼 은혜가 이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값싼 은혜가 우리에게 극도로 무자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오늘날 헐값에 얻은 은혜의 필연적인 결과로 제도권 교회가 붕괴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치를 수밖에 없는 대가가 아닐까? 말씀 선포와 성례전을 헐값에 제공하고, 묻지도 않고 무조건 세례를 주고, 견신례를 베풀고, 한 민족 전체의 죄를 용서하고, 조롱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인간적인 사랑으로 거룩한 것을 주고, 은혜의 강물을 끝없이 흘려보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엄중히 부르는 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세례 지원 기간에 교회와 세상의 경계에 대해, 값비싼 은혜에 대해 꼼꼼히 가르치던 옛 교회의 인식은 어디에 있는가? 불경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을 안심시키는 복음 선포에 대한 루터의 경고들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이 지금보다 더 끔찍하게, 지금보다 더 절망적으로 기독교 세상이 된 적이 있었는가? 카를 대제가 3,000명의 작센 사람들을 죽인 것과 오늘날 수백만 명의 영혼을 죽게 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아비들의 값으로 삼사 대 자손까지 벌을 받는다는 말이 우리에게서 참말이 되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개신교회에 대단히 무자비했다.
값싼 은혜는 실로 우리 대다수에게 무자비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지 않고 도리어 차단하기만 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를 따르라고 부르기는커녕 우리를 둔하게 만들어 불순종하게 했다. 언젠가 예수를 따르라고 부르는 소리를 그리스도의 은혜의 부르심으로 알아듣고, 명령에 대한 복종의 규율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첫발을 과감히 떼었을 법한 곳에서 우리가 값싼 은혜의 말씀에 기습당한 것은 무자비하고 가혹한 일이 아니었는가? 값싼 은혜의 말씀은 우리의 길을 막고서 세상의 가장 온건한 길로 우리를 부른다. 그것은 모든 것이 은혜 안에서 이미 마련되고 성취되었으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가 스스로 택한 불필요하고 실로 가장 위험한 길, 힘의 낭비, 노력과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싹터 오르는 예수 따르기의 기쁨을 질식시키고 말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값싼 은혜의 말씀을 다른 식으로 들었단 말인가? 값싼 은혜의 말씀은 희미하게 타오르던 심지(불씨)마저 무자비하게 꺼버리고 말았다. 인간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었다. 인간은 그러한 헐값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져서, 그리스도께서 걸으라고 하신 길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값비싼 은혜에 대한 인식을 영원히 차단하는 값싼 은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약해서 속아 넘어갔으면서도 인간은 값싼 은혜를 소유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자기가 강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실제로는 복종의 힘과 따르는 힘을 잃고 말았다. 값싼 은혜의 말씀은 공로(선행)를 요구하는 그 어떤 계명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을 더 많이 파멸시켰다.
우리는 이어지는 모든 장에서 바로 이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든 이들, 은혜의 말씀을 대단히 공허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값싼 은혜 때문에 그리스도 따르기를 잃어버리고, 이와 함께 값비싼 은혜의 이해도 잃어버렸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정직하기 위해서다. 요컨대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 우리가 은혜를 순수하게 가르치는 정통 교회의 일원인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의 일원은 아니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은혜를 다시 올바른 관계 속에 놓고 이해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더는 회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 물음만큼 우리 교회의 곤경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걷고자 하는 길의 끝에 이미 도달하여,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 곧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그것이 순수한 은혜이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직하게 따르는 가운데 이 은혜에 압도되어, 유일한 효력을 지닌 그리스도의 은혜를 겸손한 마음으로 찬양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한 은혜를 깨달아 세상에서 살아가되, 그 은혜 때문에 길을 잃지 않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하늘 아버지의 나라를 확신하며, 이 세상에서 참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따르기를 은혜에 의한 삶으로 여기고,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 따르기로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은혜의 말씀을 받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이들은 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