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조 韓流] 朝鮮第15代王, 光海主 383周忌,文城郡夫人401週忌 忌辰祭享 초라한 무덤, 내리는 비, 역사 재조명을 위한 뜻깊은 행사삼태극의 3, 삼신의 3, 이를 88하게하는 날이 닥아오고 있다
기득권의 부패와 척결을 시도한 광해의 정신은 자포자기로!
선혜청 대동법, 동의보감, 명청 균형외교, 의병정신의 부활!
초라한 광해의 묘앞에서 우리는 역사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한다. 허위와 광기의 교조성이 가져온 극명한 이 시대의 결과물을 다시 인조의 전란이 우려돠는 미음으로 383의 의미를 되새겨야한다. 사진 권태운
2024년 8월 7일,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광해군 묘소에서 제15대 조선 왕 광해군의 383주기 기념 제향식이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의 주최와 전주이씨대동종약원 광해주숭모회의 주관, 남양주시 남양주문화원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광해주숭모회 이창용회장은 봉행사에서 광해군의 출생과 통치 업적을 회고하며, "광해군은 왕권 강화와 정치 개혁, 대동법 시행 등으로 민생 안정과 국가 발전에 기여했지만, 기득권의 반발과 당파의 정치적 격랑 속에 1623년 49세의 나이로 폐위되고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1641년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마감한 광해군은 무덤이 남양주 송릉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회장은 "광해군의 평가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며 역사적 재평가와 무덤 정비를 촉구했다.
남양주시 주광덕시장은 기념사에서 "현재의 세계적 갈등 상황 속에서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되새기며, 그 정신이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제향식이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계승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기를 희망했다.
남양주시의회 조성대 의장은 제향식이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 계승과 선조의 위업을 기리는 뜻깊은 행사"라고 강조하며, 대한민국 역사의 뿌리와 정신을 후손에게 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남양주문화원 김경돈원장은 광해군의 재임 기간 동안 "동의보감" 간행과 대동법 시행 등으로 민생 안정을 도모한 업적을 소개하며, 제향식이 지역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선조의 위업을 기리는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그는 "남양주문화원은 앞으로도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와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광해군은 1575년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592년 세자로 책봉된 후 1608년에 조선 제15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왕권 강화, 궁궐 복원, 대동법 시행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으나, 정치적 갈등과 반발로 1623년에 폐위되었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광해군의 정책과 업적은 그의 통치 시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국가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 평가와 역사적 의미는 오늘날에도 재조명이 필요하다.
한때, 2002년 11월 15일에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사이트에서 광해군 부부에게 각각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 (惠宗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과 소온사헌혜장왕후(昭溫思獻惠章王后)이라는 묘호 및 시호를 올려 추숭 복위하는 일이 있었을 때, 이 묘 역시 열릉(烈陵)이라는 능호가 올려졌지만, 말 그대로 가상 사회에서 있었던 일이라 정식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행사는 무더운 날씨에도 많은 참석자들로 가득 했지만. 초라한 무덤, 좁은 공간의 문제,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이나 광해군의 묘는 그냥 방치된 상태이다.
봉인사(奉印寺) 이 절이 주는 의미는 광해의 일생과 함깨 기구하다. 창건도 모르고 광해가 진신사리를 봉안하라하고 1700년대에 중건하고 동구릉 재건시 이모씨가 파괴하고 일제가 부도를 가져가고 다시 찾고 햔데에 순한글 같은 법명 '한길로 법사'가 재건하고 다시 스리랑카에서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등등 파란 만장하다, 이제 광해와 험께 중흥이 대원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진 권오철
광해군은 1608년 즉위 후 외교와 내정 개혁을 통해 조선의 국가 기틀을 다지려 했으나, 정치적 갈등과 외부의 압박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에는 대동법의 시행과 대규모 궁궐 복원, 서적 간행 등 여러 가지 개혁 조치가 있었다. 특히 대동법 시행은 조선 시대의 중요한 세제 개혁으로 평가받는다.
광해군의 유배와 사망 후, 그의 역사적 평가가 엇갈려온 가운데, 이번 제향식은 광해군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며, 그의 역사적 위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다. 이 행사는 또한 광해군의 묘소 정비와 역사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인근에 봉인사(奉印寺,주지 적경스님)는 광해군11년 중국으로 부터 진신사리를 가져오자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봉인사에 부도암(浮圖庵)과 석가법인탑(釋迦法印塔)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래서 봉인사에서도 광해군을 추도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봉은사 앞으로 계속 도로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봉인사도 새로운 면모로 일신할 대원력이 넘쳐날 때이다.
인근에 광해군의 모친 공빈김씨의 성묘(成墓)가 있고 건너편에 광헤군의 형 임해군의 묘가 있다. 성묘는 광해군시절 성릉으로 까지 되었으니 규모가 상당하다. 밑에 풍양조씨 시조 조맹의 묘가 있는데 이 조맹묘가 우여곡절 끝에 남아있는 스토리도 대단하다.
임해군의 묘는 요양원 뒷 편인데 접근이 쉽지 않은데. 임해군 후손은 양자로 이어져서 그래도 제사가 이어지고 있으나 광해군묘소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을 것이다.
김포의 인조 부모의 장릉은 아파트 문제로 시끄러웠고, 그가 결국 수구들의 난동에 의해 백성을 어육으로 만들고, 그 부친 선조의 악행으로 고려 멸망이후 은든한 선비들의 후예들로 이루어진 막강한 인재풀을 이용하지 못한 것 처럼, 그 또한 개혁군주가 될 소헌세자를 죽임으로서 망국으로 가는 단초를 만든 암군의 1등이 되었음은 아이러니다. 병자호란에는 그 많던 의병이 나서지 않았다. 일부 사대부의 시늉만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인조의 부친 선조의 의병 홀대와 왜곡 시기 질투에 기인한다. 승병들에 대한 하대는 더욱 그러했다.
그 뿐 아니라 원종(청원군, 인조부친)은 평소 형인 광해군이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매일 술로 잠이 들다 40살에 사망하고 그 몇년전 아들 능창군이 사사되는 사건이 있었다.
오늘날 이와 바슷한 상황에서 광해와 같은 묘수를 가져야 함에도 기득권은 광해를 몰아낸 서인과 노론의 후예로 지금도 나라를 농단하면서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 있다.
광해의 어머니 공빈김씨 25세에 졸하고, 성묘가 한때 성릉이 되면서 밑에 고려초 풍양조씨의 시조 조맹묘는 평장으로 하는 조건으로 이전을 막아내고 조선말기 조씨세도가로 잠시 나타난 발복(?) 길건너 돌고 돌아 어미 곁으로 온 맏아들 암해군의 묘, 또 어미 곁에 묻히고 싶다던 광해군의 묘 그 얽힌 사연을 알고 있을 까? 앞의 사릉의 단종비 송씨의 무덤, 그리고 후에 인조의 아들 효종의 빈인 안빈묘가 곁에 있으니 효종은 겨우 1자를 얻으니 모처럼 정통성 있는 적정자 현종, 그러나 노상 상복만 입고 그 어줍잖은 노론 수구들의 예송논쟁, 부인도 1인만, 변덕스런 명성왕후 그 아들 숙종, 제2의 연산군 급이나 역사바로 세우기등 치적이 있었으나 변덕으로 정국을 혼미하게 하기도 했다, 사진 권오철
이즈음 광해의 위민정신 즉 이원익 대동법, 허준의 동의보감, 정인홍의 의병정신, 강홍립의 현실적 판단등의 혜안이 필요하다. 선혜청 복구하라! 의료산업을 정상화하라! 의병정신인 촛불혁명정신을 다시 부르라! 주변 4대 강국 속에서 균형있는 실사구시,실사구익의 정신을 살리라!
그리고 초라한 광해의 무덤을 정비하라! 라는 시대적 소명을 절감하는 383주기가 주는 교훈이다. 삼태극(三太極)의 3, 삼신(三神)의 3, 그둘을 88(勃發)하게하는 날이 닥아오고 있다.
참석자들은 광해군의 유산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이번 제향의식이 단순한 기념을 넘어서, 역사적 교훈과 현대적 적용의 중요성을 느끼는 자리였다고 입을 모았다. 행사 종료 후, 참석자들은 광해군의 무덤 주변을 둘러보며 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앞으로 그의 유업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계속될 것으로 기대된다. (글 권오철 기자)
風吹飛雨過城頭 滄海怒濤來薄幕 날리는 빗줄기 바람에 날리는 이 성채의 모퉁이, 푸른바다의 성난 파도는 얇은 장막을 때라는 구나, 제주도로 가기전 네겹 장막속에 같힌 베위에서 광해의 시구절, 제주 7.1 그의 기일에는 비가 내린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