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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나는 1976년 1월28일 대구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같은 해 12월 14일 내환산부인과(원대동3가)에서 우리 딸이 태어났다.
이름은 아버지께서 조성희(趙誠姬)로 지어 주셨다.
아내와 나를 닮은 예쁜 공주님이었다.
그때는 산후조리원은 따로 없었고 집에서 삼칠일 쉬었다.
가게가 바쁘니…. 갓난쟁이를 업고 일손을 거들었다.
신혼집은 남구 대명 7동 대덕시장 상가주택에서 전세로 살았는데…. 점포를 서구 원대동 시장 입구로 옮겨 오니까 출퇴근이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다.
가게 건물에는 빈방이 없어서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싼 월세방을 구했었다.
재래식 화장실이 있는 한옥, 부엌은 없고 연탄아궁이만 있는 문간방 한 칸이었다.
그 집에서 1년 여을 살았는데 마침 가게 2층에 방이 비어서 이사를 왔죠.
나와 아내는 참 억척스럽게 생활했습니다.
딸은 아내의 정성으로 무럭무럭 자라서 본동의 교회 부설 유치원(원대)에 2년 다니고 본동 초등학교(달성초등학교) 6년, 상서 여중 3년, SM여고 3년, 계명대학교(4년:미대-한국화과)를 졸업 했습니다.
지금은 외손녀 1명 키우며 3식구 경산에 살고 있습니다.
*아들*
내 나이 28세에 아들이 태어났다.
딸하고는 세 살 차이지만 28개월 차이가 난다.
아내가 첫째 딸을 낳고 무척 걱정했었다.
나는 아내와 아들 낳는 서적도 찾아서 읽고…. 나름 노력도 했었다.
아들은 1979년 4월 14일에 중앙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부모님도 무척 기뻐해 주셨다.
대구 누님도 아들딸 남매 잘 낳았다고 축하해 주셨다.
아들은 정말 떡뚜꺼비 같은 큰애기 였다.
누나와 같은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마치고 경일중학교(남자)를 졸업하고 누나와 같은 계명대학을 졸업했다.
전공과는 컴퓨터 공학과였다.
현재는 성남에 아들만 3명 낳고 다섯 식구가 살고 있다.
*딸 성장기*
딸(조성희)은 내 나이 25세, 아내 24세 때 원대동 내환의원에서 태어났습니다.
딸은 우리 내외의 성격을 닮아서 조용하고 차분한 아이로 유아기를 보냈다.
자라는 환경은 열악했다.
딸이 돍이 되기 전 이었는데 아내는 아기가 자니까 이층 방에 누워놓고 가게에서 2~3시간 바삐 일하고 있는데 아기가 크게 우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가파른 계단 아래 문 앞에서 아기가 울다가 지쳐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놀라서 온몸을 살펴보니 다행히 다친 데는 없더군요.
걷지도 못하는 아기가 문을 열고 가파른 계단을 한 계단 두 계단 내려온 모양입니다.
다음부터는 옆에 꼭 데리고 있었습니다.
딸이 5살 때 방에서 뛰어놀다 넘어지면서 화장대 모서리에 볼이 입안까지 찢어져서 다섯 바늘집었습니다.
좀 더 커서 유치원에 들어가니 친구도 만나고 좋아하더라고요.
제일 걱정은 큰 도로가에 살다 보니 아기들이 다칠까 봐 늘 노심초사했었다.
곧 달성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큰길 안 건너고 생활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했습니다.
딸이 4학년이 되고, 아들도 달성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해서 같이 등교했습니다.
딸은 경상여중을 졸업하고, 신명여고에 진학 했습니다.
그림에 소질을 보여서 제3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진로를 정했죠.
계명대학교 동양화과에 진학해서 대명동 캠퍼스로 통학했습니다.
*아들 성장기*
아들(조성옥)은 내 나이 28세, 아내 27살세때 4월 14일 중앙산부인과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부부는 나름 둘째는 아들을 원했습니다.
첫째가 딸이니 아들과 딸, 2명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약속 했었죠.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튼튼했습니다.
갓난쟁이가 머리칼이 엄청 검고 길었습니다.
아내는 젓이 너무 많이 나와서 아들이 다 먹지를 못했습니다.
유축기로 짜서 냉장 보관을 해서 기증도 했습니다.
급할 때는 내가 먹기도 했습니다.
아들이 태어났을 땐 일층 가겟방에 살 때 입니다.
우리 부부는 진짜 열심히 살았습니다.
363일을 일했습니다.
아들은 혼자 걸어 다니며 집 주위를 관심 있게 살피곤 했죠.
하루는 가로수(수양버들)그루 터 기에서 불개미 집을 나뭇가지로 쑤셔서 고추하고 불알이 물려서 병원도 갔다 왔습니다. 불알이 엄청 부어서 오줌이 잘 안 나왔습니다.
또 그떄는 전부가 재래식 화장실이었는데 골목으로 오물 수거 통로가 있는데 그곳을 넓적한 돌을 세워서 막아놓는데 아들이 벌레 기어다니는 걸 구경한다고 돌을 당겨서 돌이 발등을 찧어서 발에 깁스했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딸은 4학년 한 달간 등교를 도왔습니다.
바쁜 세월은 아들이 중학생(경일중)이 되니 딸은 고등학교에 입학 했습니다.
아들이 중학교 2학년일 때 학교에서 학부모 호출을 합니다.
급우하고 싸워서 그쪽 학생이 다쳤다고 해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학교에 가보니 사연인즉 우리 아들이 의자를 던져서 머리가 찢어져서 병원에 치료받고 있다고 합니다.
상대방 학부모와 선생님께 사과하고 선처를 부탁하고 치료비는 일체 부담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집에 데려와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어째서 그냥 치고받고 가 아니고 '의자를 던질 수가 있느냐'라고 혼을 냈습니다.
상대 학생이 놀리고 얼굴에 침을 뱉어서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의자를 던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번이 아니고 자주 괴롭혔다고 합니다.
나는 잘 알죠.
우리 아들이 천성이 착하고 약해서 남한테 당하고는 살아도 남을 괴롭히지는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아들의 사회생활1*
아들은 대구고등학교에 입학 했다.
고2 때도 학부모 호출을 받았다. 대구고등학교가 위치가 높았는데 아들이 민가에 돌을 던져서 민원이 들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에게 '네가 그런 짓을 했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 적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선생님께 아들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무슨 근거로 우리 아들이 그랬다고 합니까?'
선생은 김00이 말했다 했습니다. 나는 삼자대면을 하자고 했죠!
아들이 김00에게 '네가 한 짓을 왜 나한테 덮어씌우냐?' 고하면서 평소에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김00이 언덕 아래 민가에 작은 돌멩이를 던진다고 했습니다. 나는 한창 공부해야 할 학생이 양아치같이 행동 한다고 야단을 쳤습니다.
아들은 경일대학 산업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적성이 안 맞다고 하면서 2년 후 계명대학 인터넷공학과로 편입했습니다.
제 나이에 군에 입대해서 00사단에서 훈련받고 전경으로 편입해서 통영 00초소로 발령받았죠.
아내는 떡과 음식을 싸 들고 면회를 하러 갔었죠! 아들은 엄마를 보더니 대성통곡을 했다, 고 합니다.
해군함정 보초를 서면서…. 시간이 흘러 제대 후 복학해서 무사히 졸업했습니다.
이때부터 아들의 진로가 불투명했습니다. 나는 IT 기업에 취업하라고 했고 아내는 공무원 하라고 권했습니다.
대구 여건상 정보통신 회사가 별로 없기도 했습니다.
아들이 공무원 입시학원(노량진)에 등록하고 1.5평 고시원에 숙소를 정했습니다. 1년에 2번, 시험에 실패하고 한 번 더 도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 했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일어학원에 다니더니 일본 IT 기업에 1차 서류심사에 통과해서 일본행에 나셨죠. 대구에서 김해공항으로 이동해서 일본 나리타행 비행기를 태워주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짐이 혼자 들기도 어려울 만큼 무거웠습니다. 얼마 후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아들이 불법 입국자로 일본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도 많군요!
아들은 노심초사했습니다.
얼마 후 아들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는 말이 "아버지! 교수님 추천으로 여의도 정보통신 회사에 입사했어요!" 했습니다.
나는 반기면서 아들의 거처를 마련하려고 영등포 신길동 누님에게 부탁해서 그 주말 아들과 자취할 살림을 화물차에 싣고 신길동으로 가서 짐 정리를 해주고 아들이 출근할 여의도 회사도 탐색하고 대구로 내려왔습니다.
몇 달 후 영등포 누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누님 : 동생인가?
나 : 네 - 누님!
누님 : 성옥이가 회사에 안 가고 집에 있는 것 같다!
나 : 네?
누님 : 연락 한번 해봐라!
나 : 알겠어요!
아들에게 전화해서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아무 말도 없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들아?
무슨 일이 있기는 한 거냐고 재차 물으니, 발령을 안 해주고 대기상태로 3개월을 견디고 있었다고 합니다. 교수 전화번호를 달라고 해서 통화를 했습니다.
교수 친구의 회사인데 두 사람이 동업하고 있고 동업자끼리 사이가 나빠져서 상대방이 고용한 우리 아들을 거부한 것입니다.
교수가 죄송하다고 사과합니다. 나는 당장 서울로 올라가서 아들과 짐을 화물차에 싣고 대구로 내려왔습니다.
아유!!
엄청나게 후회도 하면서 한편으론 화가 났습니다.
아들은 대구에서 선배 한 명과 컴퓨터학원에 다니면서 오라클 실무 자격증 공부를 했습니다. 단과반 수료 후 대구 정보통신 회사(검단동)에 취업했습니다.
그때 아들 나이가 31세, 결혼 중매회사에 신청했습니다.
순진하고 착하기만 아들은 여자 친구 한번 사권 적도 없고 남자 친구는 아직도 딱 3명, 동네 중학 동기입니다.
중매회사의 선을 2~3번 봤고 지인의 소개도 2번 봤습니다.
그중에 후보는 지인 소개, 유치원 교사 한 명과 부모 학원에서 영어 강사인 아가씨, 중매회사 소개 도예과 나온 아가씨, 이렇게 3명인데….
아내는 유치원 교사를 밀고, 아들은 우유부단한 성격대로 아무 생각이 없는 듯, 그래도 남자라고, 영어 강사(미인)가 참 예쁘더라고 합니다.
아내는 부자고, 너무 잘생긴 영어 강사는 순해 빠진 아들하고 안 맞다는 주장이고, 아들은 유치원 교사는 너무 못생겼다고 합니다.
3명 다 아들이 괜찮다고 애프터를 신청했습니다.
지금의 며느리는 중매회사가 소개한 도예과 나온 아가씨입니다.
아들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자주 찾아오더라고요. 사돈 내외는 중,고등 교사입니다.
아들은 한 가정을 이루려고 하니 책임감이 커졌는지 대구회사에서 포항회사(포스코 자회사)로 이직했습니다.
숙직실에서 생활했습니다.
나는 급히 포항에 삼성빌라 5층을 신혼집으로 사서 공동명의로 해 주었습니다.
혼사는 그 순서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대구 웨딩캐슬에서 2010년 4월 24일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아들의 사회생활2*
아들은 포항 지곡동 삼성그린빌라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공원속의 전원주택 같은 주거환경과, 포스코와 가깝고 롯데마트 등 생활 편의시설이 인접해서 살기 좋은 동네였다. 2010년 4월 말에 입주했는데…. 아들이 같은 해 연말에 서울강남구 서초동으로 갑자기 전근을 갔었다. 포항에 혼자남은 며느리가 외롭다고 하소연을 해왔었다. 빌라를 전세 놓고 상도동 쌍용예가 아파트에 전셋집을 급히 구해서 서울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큰 손자(조대희)가 태어났다. 떡두꺼비 같은 남자아이다. 양가에서 대만족이었다. 2년후 전세 만기로 또 이사(아파트)를 하였었다. 이사 갈 때마다 힘들고, 전세가는 상승하고, 해서 포항집 팔고, 전세금과 조금 보태서 판교 한림 25 平을 6억에 매입했다. 곧 큰 손자가 학교에 가야 했었다. 올해 3월에는 현대아파트 44 平으로. 이사했다. 아들 직장생활도 안정이 되고 집 문제도 해결되니 안심이 되었다. 그동안 사돈댁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 또 경사가 겹쳤다. 며느리가 쌍둥이 손자 2명을 낳았다. 조장희, 조정희, 해서 손자만 3형제가 되었다. 4살 터들이다. 현재 큰 손자 조대희는 낙생중학교 1학년이고, 쌍둥이들은 낙생초등학교 3학년이다. 아들, 며느리가 참 사랑스럽다, 직장에 성실하고, 자상하고 착한 아들은 가정에도 충실하고 정이 넘친다. 며느리는 내조 잘하고, 남자 아이 3명도 잘 돌본다. 자식 욕심이 많아서 신랑한테 딸도 한명 놓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다. 아들이 척추 디스크수술 2번, 시술 3번 했는데 불안 불안하다. 매일 의자에 앉아서 보는 업무에 통증이 가시질 않는다, 며느리도 젊은사람치곤 몸이 건강한 편이 아니다. 적당한 운동과 바른생활로 건강챙기고, 자식들 건사 잘 하고 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
*딸의 사회생활1*
딸(조성희)은 오목조목하고 예쁘장하게 생겼다. 중학생 때 통통한 몸과 외모에 엄청 신경을 썼었다.
대학 3학년 때 어느 가을날 깊은 밤 집 앞 골목에서 남자 친구와 있다가 엄마와 마주쳤었다. 아내가 '누구냐'라고 물으니 같은 과 선배라고 했었다. 아내가 하는 말이 '딸이 그 남자와 이성으로 사귀는지 당신이 좀 알아보세요' 하고 말했다.
해서 딸한테 그 친구에 관해서 물었죠.
나 : 성희야?
성희 : 네!
나 : 그 학생을 남자 친구로 사귀는 거냐?
성희 : 네!
나 : 언제부터냐?
성희 : 제3학원에 강사로 있을 때 수강생으로 만났었고, 그 친구가 복학해서 2학년 때 만났어요!
나 : 어디 사는데?
성희 : 사수동에 살아요!
나 : 부모는 ?
성희 : 다 계세요!
나 : 이름은?
성희 : 조영득 이예요!
나 : ??…!!…! 조 씨라고? 어디 조 씨야?
성희 : 함안조씨요.
나 : 같은 동성(성)끼리 애인은 될 수 없다! 친구 이상은 안 된다! 함안조씨와 우리 풍양조씨는 선대가 같은 집안이다!
나 : 알았지?
성희 :…. 네!
나 :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넌 경을 칠 거다! 될 수 있으면 교제하지 말거라!'
마지못해 수긍하더라고요.
나는 사람 됨됨이 보다 집안끼리의 혼인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나보다 더 강경하게 반대했습니다.
한 1년여 후에 계명대학교를 졸업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죠.
진로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어느 날 아내가 퇴근할 때 딸이 조영득과 집 앞에 같이 있는걸 또 목격했습니다.
두 사람은 2년 가까이 몰래 사귐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딸의 외출도 불허 했습니다.
*딸의사회생활2*
누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같은 조씨는 절대 안됀다고 했는데....
딸이 부모의 반대에도 끝까지 4년을 사권 남친(조영득)과 못 헤어 진다고, 동성이지만 동본도 아닌데, 오래사귀고, 둘이 다 사랑하는 사이라서 결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단식을 했다. 방문도 걸어 잠구고,
바쁜 일손도 멈추고 우리 내외는 달랬다가, 야단도 치고 몇날 며칠을 전전긍긍 했다,
나는 극단의 조치로 '부모말 안듣는 자식은 필요없다.' 하고 '집나가라' 하고 고함을 쳤다.
딸이 울면서 "알았어요 내가없어져 줄께요!" 하면서 뛰쳐 나갔었다.
지켜보니....!
옥상으로 뛰어 올라 가고 있었다. 급히 따라가 보니 옥상난간에 올라서고 있었다. 놀라서 '성희야 꼼짝마' 하며 잰걸음으로 뛰어가 딸을 뒤에서 꽉껴안았다. 나도 딸도 통곡을 했다. 딸을 안고 3층으로 내려와서 등짝을 때리며 같이 또 울었다.
알았으니....
다시는 나쁜 마음 먹지 말라고....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일가 친척보기에는 면목이 없지만, 나는 마음을 비웠다.
사위는 5남매. 막내로, 사돈 내외는 연세가 많았다.
이듬해 내가 50세, 딸이 25세때 금성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했다.
사위는 남산동에서 아르누보미술학원을 하고 있었다. 학원은 경북공고 앞이었고, 나는 한동네에 가까운 신축 빌라(화진빌라301호)를 신혼 집으로 사주었다.
사위는 업장을 3번정도 옮겼었고 직업의 만족도를 높이려고 안동 대학원에 다녔다.
그후 영천영동고 미술교사로 이직해서 지금까지 현직에 있다.
우리는 사위 따라 영천의 아파트 매매해서 이사가기를 권했지만, 딸부부는 손녀. 통학 등, 여러 여건을 고려해서 20여년. 살던 화진빌라를 팔고 경산에 전세로 아파트에 경북대학교 졸업반 손녀와 3식구 현재까지 살고 있다.
3식구 단란하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희망한다!
*누님은 여장부시다*
누님은 여장부시다.
40세에 홀로 되어
5남매 다 훌륭하게 키우고
기업도 경영하시고...
그 많은 자식, 손주들
차별없이 다들 사랑해 주신다.
지금은 八旬 이시다.
생신
*손녀(조희영)졸업*
경북대학교 캠퍼스에서 손녀 조희영이 오늘(8/23) 졸업을 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조희영은 전통적인 가운을 입고 꽃다발을 들고 있으며, 가족들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축하했습니다.
배경에는 대학의 로고와 졸업을 축하하는 배너가 걸려 있어, 특별한 순간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성취를 기뻐하며, 졸업이라는 새로운 출발을 함께 축하했습니다.
캠퍼스의 푸른 잔디와 맑은 날씨가 분위기를 한층 더 밝게 만들어 줍니다.
친구들도 축하의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손자들*
딸은 결혼한 그해 11월28일에 예쁜 공주를 낳았다.
조희영(趙姬渶)24세
경북대학교 4년
♧♧♧♧♧
며느리는 2011에 맏 손자를 낳았다.
조대희(趙大熙)
14세
낙생중학교 1학년
며느리는 2015년에 쌍둥이 형제를 낳았다.
둥이 형 조장희(趙場熙) 10세 낙생초등학교 3학년
☆☆☆☆☆
둥이 동생 조정희(趙政熙) 10세 낙생초등학교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