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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부지역 지연작전(호남지역)
1. 작전 개요
가. 개 요
여기서는 1950. 7. 10일 전후 호남지역에서 제5사단(광주), 제7사단(전주)이 재편성 되는 과정에서부터 알아본다. 아울러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지역으로 진출하고 국군과 경찰이 지연전을 전개하며 악전고투끝에 7월 31일 영남 서부지역까지 물러나는 상황을 알아보고자 한다.
북한군은 제1군단이 1950. 7. 11일 제3.4사단을 공주-대전선에 투입하고 후속하던 제6사단을 호남지역으로 우회토록 하여 16일 제4사단의 논산 장악과 때를 맞추어 금강을 도하하여 이리-전주로 남진하고 예하 제13연대는 군산으로 우회하여 전북을 위협한다.
반면 국군은 호남지역 방어를 위해 7월 17일 서해안지구사령부(사령관 신태영 소장)를 편성하나 예하부대인 전북.전남지구 편성관구및 기타 부대가 개인화기도 제대로 없는 유명무실하여, 그래도 제7사단 예하 독립대대(대대장 김병화) 300명과 경찰 700여 명이 강경으로 진출하고 해병대 고길훈 부대가 군산에서 장항으로 진출하여 적을 저지하였다.
정부는 7월 21일 전라남북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적의 진출에 대비하였으나 7월 23일 적은 정읍-남원-광주일대를 장악한다. 이날부터 남원에서 운봉으로 물러난 민부대(민기식 대령)가 이영규. 김성은. 오덕준. 김병화 부대 등 군소부대를 통합하여 지휘하며 북한군 제6사단은 25일 순천에서 합류하여 하동방면으로 지향한다.
한편 미 제8군사령부는 대전-영동에서 물러난 제24사단을 재편성이 완료되기도 전에 예비대가 없기 때문에 진주-함양-거창 방면으로 투입하여 적과 접촉을 유지하며 축차 지연전을 하다 7. 31일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방어준비를 한다.
2. 양측의 상황
가. 양측의 부대상황
북한군 제1군단은 대구~부산으로 진출하기 의해 주공부대인 제3사단과 제4사단을 제105전차사단 지원 하에 공주~대평리 일대를 공격케 하고 제6사단을 제603모터싸이클연대의 지원하에 서해안과 호남지역으로 투입시켜 목포~여수~마산 일대를 점령토록 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12일, 주력부대가 충남 유구에 집결하여 제13연대가 1개 포병대대와 협동으로 소수의 경찰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예산, 홍성, 청양을 12일가지 점령한다. 이무렵 사단 주력은 군단의 명령으로 군단 주공을 지원하러 연기군 전의로 갔다가 14일 다시 돌아왔다.
북한군 제6사단은 이동한 후 16일 금강 북안으로 진출하여 별 저항없이 금강을 도하하여 이리~전주~광주로 공격을 개시하여 19일에 이리와 군산을, 3일 뒤에는 전주를 점령하고 다음날 광주까지 진출하여 24일까지 호남 전지역을 유린하여 지방공비들과 유착하여 양민학살을 비롯한 온갖 잔학행위를 자행한다.
반면 미 제8군사령부는 7월 18일부터 실질적으로 한국군을 작전통제하며 서해안으로 우회기동하는 북한군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제4사단의 일부로 판단했다가 7월 말경에 제6사단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편 전쟁 이전부터 호남지역에 배치된 제5사단(이응준 소장)은 예하 2개연대중 제15연대(최영희 대령)를, 전주에 제20연대(박기병 대령)를 광주에 주둔중 전쟁으로 전방으로 진출시키고 호남지역에 부대가 없음을 감안하여 호남지구전투사령부(이형석 대령)를 신설하여 27일 광주에 부임한 이 대령은 전남북도 일원에 제대 군인과 구 호국군 요원, 청년방위대를 소집하게 된다.
그런데 '50.7. 7일에 육본은 이미 5일부로 단행된 부대개편으로 해체된 제5,7사단을 재건하기 위해 새로이 제5사단장에 이형석 대령을 임명하고 사단사령부를 전주에 설치하고 제3연대를 전주, 제9연대를 남원에 급편하라고 하였으며 제15연대장에 김병휘 중령, 제26연대장에 이백우 중령, 제3연대장에 박 현수 중령, 제9연대장에 유해준 중령을 임명한다.
그리고 7월 8일에는 전남북도에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여 전남지구편성관구사령관에 이응준 소장을, 전북지역 편성관구사령관에는 신태영 소장을 임명한다.
따라서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의 주요 지휘관관계는 사령관 겸 전북지역편성관구 사령관에 신태영 소장, 신편 제7사단장에 민기식 대령(육군 참모학교 교육생), 여기에 제3연대, 신편 제9연대, 30연대, 해병대 고길훈 소령(7.22부 김성은), 민부대 (7.20일 개칭), 독립대대 소령 김병화(7.20부 김부대, 보병교 교도 대대), 오부대(오덕준 대령)가 편성된다.
전남지구편성관구사령관에 이응준 소장, 신편 제5사단장에 이형석 대령, 신편 제15연대(순천), 이 부대(이영규 중령), 신편 제26연대(광주, 8. 24일 제3사단 재편성시 편성되어 포항지구전투 참가. 일시적 수도사단에 배속 되다 9. 10일부터 다시 제3사단. 이후 '50. `12. 10일 청진-백암에서 함흥 동쪽으로 철수하여 해상철수간 수도사단으로 배속), 전남전투경찰사령부가 편성 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에 육본은 아무런 진행상황이나 실제 얼마의 병력이나 장비 등이 있는지는 알 수도 없었고 다만 전세의 유동치는 모습에 허겁지겁 지시만을 하달하다보니 그것이 제대로 전달 되기도 전에 그 다음 것이 오기도 하고 더 늦게 오기도 하는 등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한 예로 당시 제5사단(제15,20연대 예속)은 봉일천, 창동에서 제1,7사단을 지원한 후 6. 28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 과정에 대부분 병력이 분산되고 7. 17일 사단해체, 10월 8일에 다시 제27(대구), 제35(마산), 제36(부산)연대를 근간으로 재창설 된다.
따라서 제15연대는 '48. 5. 4일 마산에서 창설되고 '49. 5. 12일 광주에서 창설한 제5사단에 예속된다. 그리고 전쟁전에 전주에 위치하고 있다가 전주-의정부-문산-봉일천-미아리-노량진에서 6.28일 혼성 제7사단에 편성되어 수도고지-평택을 지나 7월 5일 제1사단에 들어가 제13연대에 통합된다. 하지만 8월 25일 다시 제15연대로 재편되고 제 13연대는 8월 27일 신편되는 제11사단에 예속 된다.
또한 제20연대는 '46. 2. 15일에 전남 광산에서 4연대로 시작하여 '48. 11.20일에 광주에서 개편하고 '49. 5. 12일 제5사단에 예속 되며 전쟁 중에는 광주-봉일천.미아리로 6월 29~7. 4일까지는 혼성 제7사단에 편성되고 7월 5일 제2사단에 편성되고 증평-진천 봉화산전투-청주-조치원-고은-보은/문의를 거치며 7월 24일 사단이 해체되어 제1사단 제12연대에 편입되어 상주-함창지구전투에 참가했다가 8월 27일 제11사단 창설시 재창설 되어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다 '51. 4. 6일 제8사단에 임무를 인계하고 제1군단에 배속되어 설악산 부근 전투에 참가한다.
반면 제2사단은 제5(대전), 제16(청주), 제25(온양)연대로 의정부 일대로 진출 저지선 구축 후에 창동을 경유 한강 이남으러 철수하여 7월 27일 충북 황간에서 미 제25사-27연대에 작전지역 인계 후 사단이 해체 되며 11월 7일에 제17,31,32연대를 기간으로 서울에서 재 창설 된다.
제5연대는 원래 '46년 1월 29일 부산에서 창설(연대장이 참위 박병권)하여 '49년 5월 12일에 대전에서 제2사단에 예속된다. 그러다 전쟁중에는 대전-의정부,축석령-창동-신사리-역삼동-95고지(도곡동)- 증평-고은리-보은/문의 전투에 참가하고 7월 24일 사단 해체시 해체되었다가 다시 8월 20일 제7산단 예하연대로 재창설 되어 다부동, 영천지구전투 등에 참여한다.
제16연대는 '8년 10월 28일에 마산에서 창설되고 '49. 5. 12일에 창설된 제2사단에 예속되어 청주에 위치하다 전쟁중에는 청주-의정부-창동-신사리/말죽거리-도곡동 95고지-평택-증평-고은리-보은/문의 전투에 참가하고 사단이 해체된 이후에는 바로 제8사단에 예속되어 죽령-안동전투에 참여한다.
이러다 보니 제5-20연대의 경우 전선에 올라와 있는 연대장 박기병이 이소동 소령에게 광주에 내려가 제3육군병원에 수용중인 환자들은 회복즉시 규합하여 유격전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7월 8일에 광주로 내려가 임무 수행중에 이형석 대령이 사단을 신편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넘겨주게 된다.
"무등산에 남겨진 제20연대의 추억"
황대형 제1사단 참전용사께서 연락이 왔다. 무등산에 전투가 있고 그 당시에 부상병동에서 전투한 실제 참전용사님이 미국에 살고 있는데 광주에 와서 흥국사에 와서 당시 지역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바로 탐사팀을 데리고 광산에 내려가 용사님을 만나고 함께 운림동에 흥국사로 향했다. 절에서 바라보면 앞에가 바랑산이다.
"어떻게 전투 했다고 하는지 들으셨습니까?"
"제3병원에 있던 병사들과 제20연대 병력중 전방에 가지않고 남아 있던 병사들을 규합해서 무장을 해서 북한군과 저 바랑산 사이에서 전투를 했다는 겁니다. 함게 들어가 보았는데 실제 개인호가 있어요."
"그렇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르신은 이곳에 계시면서 우리의 이동루트를 보고 잘못가면 연락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우리는 무전기를 메고 일행이 산속으로 들어갔다. 가는 도중에 삼국시대 철을 생산했다는 푯말을 발견하였다. 철을 생산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장소다. 길에서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 곳은 아닌데 철생산지가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 안으로 더 들어가니 지금이야 활엽수로 꽉 들어찬 밀림처럼 되어 있지만 그 안을 세밀히 관찰하니 개인호가 보인다. 탐지기를 가동시켰더니 발신음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환자들이 걸을수만 있으면 총을 들고 싸웠다니 진정한 충성이다!"
아무런 상황도 받을수 없었다. 이미 북한군이 광주시내에 들어와 휘젖고 다니는데 우리 제20연대 잔류병력은 흩어지면 죽는다는 신념으로 함께 이곳으로 들어와 사주방어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북한군의 위력에 눌리어 많은 인원이 자결을 하기도 하고 일부는 화순으로 보성으로 탈출하였다. 얼마를 가서 이응준 소장을 만나 합류하여 하동으로 해서 부산으로 철수해 살아났다는 것이다.
나. 양측의 작전계획
북한군은 우리 국군이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에 신속히 금강-소백산맥을 돌파하여 울진-문경-논산-전주선을 점령하기 위해 천안-조치원-대전 방향에 주공을 지향하고 포위 섬멸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군 제3사단은 제4사단과 같이 7월 7일 천안에서 남진하여 대전을 포위공격하고 제2사단은 진천-청주 북쪽으로 진출한 다음 보은을 거쳐 황간으로 진출한다. 제6사단은 같은 날 천안에서 분진하여 금강을 도하한 다음 전주로 지향한다.
이에 반해 국군은 해체된 제5,7사단을 재편성하고 전남북지역편성관구사령부를 편성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만 사실은 아무런 무기나 장비도 없고 명목상 조치에 불과하였다. 부대간의 횡적인 연락이나 종적인 지휘체계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3. 호남지역 전투
서부전선에서 대평리-공주사이의 금강 방어선이 1950. 7. 16일을 고비로 붕괴되기 시작하고 북한군 제4사단이 대전 남쪽으로 우회하고 있었다. 제6사단은 유규에서 강경~장항으로 남진하고 제13연대가 홍성에서 서천방면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군은 아무런 조치나 지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전북지역은 새로 편성중인 제7사단 예하 2개 연대(제3.9연대)는 비무장이고 7월 16일을 기해 병력보전책으로 부산으로 이동하고 독립 1개 대대(300여명)만이 군산에 상륙한 해병대 고길훈 부대(제주항에서 7. 15일 출항하여 7월 16일 08:00에 군산항에 입항, 500여명)와 도섭이 부가능한 금강 하류지역에서의 결전의 의지를 가다듬게 되었다. 당시 군산에는 해군 경비부와 인천 경비부에서 철수한 48명, 그리고 제17연대 요원 59명으로 혼서우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전북경찰 700여명, 공주로부터 기갑연대의 기병중대가 마필 100두와 함게 전주로 이동해 있었다.
이에 따라 7월 16일 북한군 일부가 강경에 진출했다는 보고에 따라 신태영 사령관은 제7사단 일부병력을 독립대대로 명명하엿고 전주 및 광주의 편성관구사령부를 전북 및 전남 편성관구사령부로 각각 개편하고 이형근 준장이 전남, 원용덕 준장이 전북지역 사령관에 임명 되었다.
전북 편성관구사령부에 신편 제7사단을 흡수, 그 예하 제3연대를 제1교육대로 그리고 제9연대를 제2교육대로 개칭하여 직할부대로 하였으며 , 전남지역에서는 신편 제5사단을 흡수 그 예하 제15연대를 제5교육대로, 제26연대를 제3교육대로 하여 그 지휘 하에 두었은나 그 조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했다.
방어진지 편성은 전북 편성관구 사령관 원용덕 준장은 7월 17일 08:00시 무렵 강경에 진출한 북한군의 상황을 입수하자 이리에 대기중인 전북경찰 2개 대대, 그리고 충남경찰 혼성부대(중대규모)를 망성, 용안지역으로, 기마중대를 황등으로, 독립대대를 웅포~나포로 추진하여 진지를 점령토록 하였다.
한편 금강 북안에는 동월 12일 이래로 충남경찰 1개 대대가 청양을 경유하여 금강을 도하하여 통제하에 들어오고 충남특경 200여명이 장항으로 진출한 해병대의 지휘로 장항 북쪽에서 적과 조우하다 17일 군산으로 물러났다.
전날 전주에서 이리로 전진한 기병중대는 17일 이리 북방으로 진출하고 배동걸 소령이 지휘하는 27명의 육군본부 요원이 17일 이리로 이동하였다. 16일에는 제7사단 병력인 독립대대가 300여명이지만 제대로 장비도 없는 상황에 17일 웅포로 진출하여 금강 남안을 경계하고, 17일 제30연대(보병학교 참모장 김용주 중령이 임시편성)가 남원에서 낙오병 등을 규합하여 1,500으로 편성하였다.
가. 군산-이리 전투
(1)개요
1950. 7. 17일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 예하병력인 제7사단 독립대대, 해병대 고길훈 부대, 기갑연대 기병중대를 비롯한 국군 병력과 전남북 경찰 혼성병력 등이 망성, 용두, 웅포 지역에 출동하였다.
북한군 제6사단은 당시 대전을 공격하는 제4사단의 일부가 논산을 공격하는 사이, 청양을 거쳐 부여~강경 대안에 이른 병력으로 금강을 도하시키고 서천부근으로 남진한 제13연대 병력을 금강하류에서 도하시켰다.
(2)장항~군산 전투
7월 16일 군산 해양대학에서 7월 16일 밤을 보낸 해병대 고길훈 부대는 장항 북쪽의 진출하는 적정에 따라 5척의 민간선박 편으로 17일 장항에 상륙하여 장항 북족 3.5km 옥산동 부근 50고지를 점령하고 그 바로 앞의 102고지 일대에서 진지를 편성하여 적을 공격하였지만 적 20명을 사살하고 해병은 20명 전사에 10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입고 군산 해양대로 복귀한다.
이에 따라 18일 해병 전병력을 강안에 배치하였으며 이 시간에 다른 병력은 안동호에 정부미 반출작업을 마치고 외항에 대기하였다. 그리고 1개 중대를 이리로 보내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 통제를 받도록 하고 19일 적의 압력이 가중되어 결국 이리로 간 제3중대를 제외하고 11:00에 안동호에 승선하여 목포를 향해 출항한다. 군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남산 148고지 일대의 해병대 격전지"
나는 계룡대에 근무하던 시절에는 주말이면 혼자서 차를 몰고 가까운 격전지를 찾는 것이 취미였다. 물론 어떤 경우는 가족과 함께 김밥을 해서 들고 평창, 다부동, 함안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장항은 금강하구둑 관광지가 있어 겨울에는 철새를 보러 몇 번은 가보았다.
그런 어느날에 본인이 마서면 산정말에 산다며 남산일대에서 해병대가 전투를 하고 갔다는 이야기를 한다. 기록에는 남산보다는 그 밑에 중태산이나 동태산, 서태산 있는 곳이지만 해병대가 무려 20여 명이 전사한 것을 보면 혹시나하는 마음에 남산에 가보니 오래된 성이 있고 문화재 발굴 지역이었다. 여기저기 호의 흔적이 있지만 그렇게 많은 분포는 아니다. 그 후에 실제 발굴 계획에 포함하여 발굴을 시도했지만 유해는 찾지 못했다.
"이어니재에 경찰을 발굴하라"
내가 마서 어리에서 탐문을 하던중에 한 어른이 여긴 없다며 보령 옥서리에 가면 경찰이 묻혀 있다고 하신다. 그래서 하루는 주말에 무창포 해수욕장 독산리에 살고 있는 동기생 장집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이어니재를 찾았다. 경찰묘가 크게 꼭 왕묘처럼 조성되어 있다. 묘비에 내용은 이렇다.
1950년 7월 17일에 천안 철도 경찰대 소속 16명이 북한군 1개 중대와 격전에서 6명이 전사하고 10명이 포로가 되어 7월 21일 이 이어니재 고개에서 총살 당했다는 내용이다.
그 당시에 나는 국군전사자 발굴이기에 묵념을 올리고 대천해수욕장에 가서 한여름밤을 파도소리에 귀를 열어놓고 1박을 하고 돌아옸다.
그후에 우리의 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발굴 대상에 군인뿐만 아니라 전쟁에 동원된 학도병이나 참여한 모든분들로 대상이 확대되어 다시금 검토하게 되었다.
"공화국 만세부르다 죽은 프락치들, 대한민국 만세 부르다 죽은 사람들~!"
법률적 근거 마련에 따라 우리는 이곳의 유해를 발굴할 가능성이 있는지 보령 남포면 옥서리에서 지역주민 간담회를 가졌다.
10여 명의 지역주민이 참석하여 들어본 내용은 전투는 없었으며 서천과 군산지역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한다. 사실 전쟁이 일어난지도 잘 모르고 있는데 이미 시골에 프락치들이 할동하여 많은 인원들이 동조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송광무 어르신 등 일부인원이 참 의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공화국 만세, 공화국 만세, 그리고 죽어간 프락치"
아니 국군이 내려가는데 프락치들이 잘못알고 북한군이 오는지 알고 길거리에 나와서 공화국 만세를 불렀다. 집집마다 나와서 만세를 부르라하니 일부가 나가서 불렀다. 어떻게 되었겠는가. 군인들이 총을 갈겨 주민들이 죽었다. 기막힌 이야기였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그리고 죽어간 사람들"
그러다 9월의 어느 날에는 북한군이 밀려올라가는 때였다. 그런데 7월에 공화국 만세를 불렀다 국군에 혼난 주민들이 누군가가 국군이 올라온다고 하니 이번에는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태극기도 들고 나온 할아버지도 있다. 그런데 또 총을 갈겨 많이 죽었다. 알고 보니 국군이 아니라 북한군이 퇴각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북한군 소년단이었다."
박완규 어른은 14살에 전쟁이 났다. 그런데 북한군이 오더니 소년단 완장을 채워줘 졸지에 소년단이 되었다. 하는 임무도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세워서 라이터가 있으면 다 회수하는 일인데 밤에 비행기에 신호를 하여 폭격을 유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국군에 죽은 프락치 시신을 발굴하여 유족에게 인계하는 일도 하였다 한다.
하지만 북한군 점령시기에 프락치 시신은 전부 유족들이 찾아가고 국군이나 경찰, 일반 주민들이 죽었을 때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국군이 미군과 함게 왔을 때에 찾아갔다.
본인은 누구에게 해코지하여 목숨을 뺏는 일은 없었으며 국군이나 경찰이 왔을 때도 심부름을 하여 부역자나 프락치로 몰리지않고 살았다 한다.
"쇠스랑을 개조하여 시신의 목을 걸어 끌어내렸다."
동네 이장 등 여러 명이 말하길 당시에 이곳에 철로가 지나다 보니 피난민도 많이 움직이고 군인이나 경찰이 철로를 따라 내려가고 올라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장항선 철로 주변과 21번 도로와 77번 도로 주변에 엄청 많은 시신이 뒹굴고 있었다. 워낙 여름이라 부패 속도가 빨라 얼마나 냄새가 나는지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 한다. 이걸 치워야 하는데 처음에는 손으로 끌어서 단가에 옮기거나 파인 구덩이에 집어넣기도 했는데 누군가 머리를 써 외양간에서 사용하는 쇠스랑을 가운데 뽀족한 것 하나를 쇠톱으로 잘라내고 그것으로 죽은 사람의 먹덜미 위치에 들이 밀면 턱이 기막히게 끼게 되어 끌어내리는데 아주 안성마춤이라 한다. 이걸 이용하여 주변의 시체를 끌어내려 길 주변 고랑에 묻게 되었다.
하지만 이 유해들은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 모두 훼손 되었고 일부는 야밤에 유족들이 찾아가기도 했다.
"그럼 이어니재에 있는 경찰 묘역은 어떻게 된겁니까?"
"이 지역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이 일대에서 죽어서 모아서 묘역을 별도로 조성했어요"
"그럼 경찰은 맞습니까?"
"그건 맞아요. 당시에 포로가 된 경찰을 북한군이 동네 프락치를 시켜서 사살하도록 해서 죽이기도 했고 북한군이 도망간 후에 3~4개월 지나서 여기저기 발굴하여 지금 자리에 합장한 겁니다."
"경찰이 두 유형이 있어요. 철도를 경계하는 철도경찰이 있고 우리가 말하는 일반 경찰이 따로 있는데 이 분들은 어디에 속하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알기로는 주산역에 당시에 본부가 있는 철도경찰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묘역에 남겨진 경찰들의 실제 기록은 조금식 전사 날짜가 다르다. 또한 정철모 총경의 유해는 '76년 7. 28일에 서울 현충원으로 이장되어 안장되어 있다.
"우리 포도밭에도 죽은 시체들이 있었다."
종전 후에 해병대 병기 4기로 군에 갔다온 윤형중씨(당시 20세)는 지역개발로 많은 시체가 다 훼손 되었고 유족이 없어 찾아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 지금의 대천읍에 북한군 대대가 주둔하다 밀려 올라갔고 본인 포도밭에도 죽은 시체들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전사편찬연구소('66년도) 기록(1권 267~268p)에 의하면~"
북한군 제6사단은 사실 중공군 정예사단이었다. 웅진.개성.김포.인천을 점령한 후에는 제4사단을 후속하여 7월 13일에 천안에서 서남진하여 예산을 점령에 이어 군산을 점령하고 20일에 전주를 공격한다.
그런데 제6사단의 진로를 저지하고 있던 부대는 패전부대인 제7사단 뿐이어서 저지부대가 없는 것과 다름없어 23일에 광주로 진입했다고 한다. 여기서 이들은 제13연대를 목포로, 제14연대를 보성으로, 제15연대를 순천-여수로 투입하여 해상보급을 받기위한 것과 유엔군의 상륙을 저지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라 한다
이때 지리산에서 내려온 공비들이 사단의 전진을 유도. 엄호하고 정보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유선망을 차단했다. 또한 공비들은 전잔중 도처에서 반공인사에 대한 보복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어느 공비가 갖고 있던 7월 29일자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오늘 체포한 12명 중, 국회의원. 경찰. 반공청년단 간부 등 4명은 현장에사 사살하고 나머지 8명은 인민재판 후 처형했다."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나 미군이 발행한 전사내용이 아닌 일본 육상자위대 간부학교에서 발행한 전사는 한국.미국.중공.북한공간사와 기타 많은 사료를 참조하여 제3자의 입장에서 그래도 비교적 객관성을 가지고 기술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미 전쟁전에 많은 프락치들이 전국에 퍼져 있고 이미 지리산은 그 본거지였으며 점령지에서 벌어지는 유력인사 납치와 처형, 군경가족 타살등은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내용에서 중요한 것은 국군 제7사단 잔류병력이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였다는 점이다. 우리의 기록은 사실 제7사단은 한강선 방어이후 해체된 부대로 그 명맥이 없는데 왜 제7사단이 언급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소련군 라조파예프의 기록"(1권 199p, 209~212p)
서천 방면으로 진격하는 북한군 제6-13연대는 7월 12일 예산부근에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적 항공기들이 제6사단의 이동대열을 발견하고 강력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단은 야간이 될 때가지 기동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199P)
제6사단은 1개 모터사이클연대와 함께 서해 방면의 적을 계속 격파하면서 목포와 여수항을 점령하고 마산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제6사단은 7월 19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적으로부터 별다른 저항없이 금강을 도하하였으며 개별 경찰부대들을 격파하면서 7월 19일 오후 늦게 만경강까지 진출하였다.
제15연대는 7월 20일 새벽 3시에 김제를 점령하고, 제1연대는 이리 동산동지역에서 경찰 수비대 200여 명을 격파하고 오전 11시에 전주를 점령한다.
제1연대는 7월 23일 고창을 점령하고 영광 및 고창 점령전에서는 목포로부터 투입된 적 3개 해병대대 병력을 격파하였다.ㅣ
제15연대는 영광으로부터 나주를 진격하는 과정에 7월 23일 저녁 8시에 삼학리에서 적 1개 대대 병력과 조우하였다. 24일 아침까지 전투가 지속되어 적 병사 및 장교 200여 명을 살상하고 오후 늦게 나주를 점령하였다.
제1연대는 24일 오전에 남원을 점령하고 구례를 점령한다. 25일 하루를 휴식하고 26일 구례를 출발하여 바로 순천을 점령하였다. 27일 아침에 여수를 점령하게 되는데 적 병사 및 장교 500명을 전사시켰으며 야포 및 박격포 8문, 차량 50대를 노획했다.
하동으로 진격한 제3대대가 섬진강 서쪽강변의 적을 격파하고 강을 도하하여 7월 27일오전 10시에 하동을 점령하며 광양지역에서 이동 중이던 적 포병대열을 발견하고 105mm곡사포 12문과 박격포 9문을 노획했다.
7월 29일 아침부터 마산방면으로 진출하였으나 남강 동쪽 강변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한 미 제1해병사단 2개 대대 병력의 저항을 받았다. 7월 30일 야간에 진주의 남쪽과 서쪽으로 도하하기 시작했다. 한편 남쪽으로 진출한 제15연대는 상촌리(진주동쪽 12km)에서 진주-마산간 도로를 차단하였다.
이상의 내용 비교에서 우리의 제7사단이란 말은 나오지않으나 일본 자료에 나온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해보니 바로 민기식 부대(신편 제7사단)를 그렇게 표현한 모양이다. 하지만 실제 전투력을 발휘한 부대는 해병대와 경찰이 주였다.
실제 7월 13일까지 각 지역에서 학도들이 지원하여 전주의 제7사단은 제3연대 2,55명, 제9연대 3,600명이고, 광주의 제5사단은 제15연대가 800명, 제26연대가 1,000명에 달했으나 이들중 무기를 소유한 자는 실제 각 연대장을 따라 철수한 병력이나 병원에서 퇴원한 자들로 20%도 못미치고 거의 맨손의 신병이었다. 사실 유명무실한 부대였으나 약간 과하게 평가해준 느낌이다.
(3)강경~익산 전투
강경에서는 7월 15일 전주부근으로 물러났던 강경경찰서 병력 67명이 16일 역습으로 강경을 탈환하게 된다 그러나 17일 적 편의대의 유인전술에 녹아나 포위가 되고 18일 67명이 전원 전사하고 강경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7월 18일 강경이 떨어지면서 전북경찰 1,3대대와 충남경찰 혼성병력이 진출하는 적 연대규모와 맞서다 중과 부족으로 여산을 거쳐 19일 익산일대로 물러났다. 이무렵 전남 편성관구사령부에서 전남경찰 1개 대대(400~500)규모가 전주에 도착하고 익산으로 추진중에 적과 조우하여 물러나며 설상가상으로 아군 공군기로부터 오인 폭격을 받아 손실이 가중되며 삼례 남쪽 동산지역으로 물러난다.
(4) 웅포-이리 전투
국군 제7사단 기간 병력으로 구성된 독립대대는 7월 18일 웅포로 전진하여 금강 남안에 진지를 편성한다. 하지만 저 15연대 병력 일부가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도하하여 정찰을 하고 이어서 공격을 받아 30분만에 무너지고 이리로 철수하고 만다. 이때 이리의 고길훈 부대 1개 중대와 올라오고 있는 경찰이 철수하는 부대를 엄호하였으며 기갑연대 소속 기병중대도 황등에서 장신리로 왔다.
그러나 결국 적의 숫적 우세에 밀려 이리에서도 밀려나고 각각 분산되어 철수하게 되며 배동걸 특공대도 적 12명을 사살하면서 해병대를 따라 김제로 철수해 갔다.
"그러나 웅포에서 강 남안에는 아군의 전투진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이 서남부 지역 지연전은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솔직히 말한다면 전후에 살아남은 용사님들의 무용담 그대로 옮겨진 느낌이 없지않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전사적 내요을 확인하러 서해안 축선을 수번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많은 제보를 들었지만 해병대가 장흥 위 남산 일대에서 전투한 사실과 강경경찰이 전투한 사실을 제외하곤 크게 부각할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어니재의 경찰 16명 전사도 정식 조직이 아닌 철도경찰이 제대로 상황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일방적 피해를 입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 웅포에 가서 주민들을 만나보니 군 병력은 보지도 못했다는 분들이 대다수 였다. 또한 그당시에 신태영 소장과 민기식 대령의 보이지않는 통제권한의 해프닝으로 제대로 명령계통이 서지도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제7사단이 전북지역을 방어한 것이 아니라 후퇴하다 지휘관을 따라 몰려든 일부 병력이 건제없이 독립부대를 임시 편성하여 일시적으로 적과 마주치다 바로 물러나고 만것이다. 하지만 전사에는 너무 그렇듯하게 축차 방어를 한 것처럼 되어있다. 총 몇 방 쏘면 그대로 다 도망가고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5) 삼례-김제 전투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 예하 독립대대와 경찰 혼성부대들은 7월 19일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의 이리 점령으로 각개 분산하여 전주를 향해 철수한다. 전주로 철수하며 일단 삼례에서 저지선을 구축하고, 전남 경찰 또한 익산에서 철수하여 삼례로 철수하였으나 제대로 진지편성 한번 못하고 19일 저녁에 공격을 받아 전주 외곾으로 물러난다.
한편 적의 추격을 받고 있는 해병 제3중대와 경찰 혼성부대, 그리고 배동걸 특공대는 19일 적이 전주로 쇄도할 무렵 김제로 철수하였다. 같은 시기에 북한군은 영광 용대리(법성포 북쪽 7km)에 민간인 복장 50명을 해안 상륙시켜 부근의 경찰지서를 스벽하게 되며 일단 여기서는 적들을 토벌하였다.
북한군 제6-1연대는 이리에서 김제로, 제15연대는 삼례에서 전주로 밀어붙이고 아군은 전남지녁 이응준 소장이 전남경찰 1개 중대를 김제로 급파하지만 적의 포화에 물러나 정읍으로 철수하게 되고 20일 김제가 함락 된다.
"효자동 공동묘지의 대왕묘"
전주 형무소에서 북한군이 철수하기전에 엄청난 국군 포로와 경찰, 그리고 지역 유력인사를 처형해서 우물에 집어 넣었다는 익명의 제보가 왔다. 형무소에서의 이러한 실태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나 대전형무소에서도 있었던 일이나 우리는 그 가능성을 믿었다.
하지만 대부분 아군이 진격하면서 가매장된 인원들을 발굴하여 처리를 하였는데 모두가 화장되어 현충원에 왔는지 아니면 유족에게 보내졌는지는 모른다.
우린 과거 전주교도소르 찾아가서 실태를 분석하여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 뜻밖의 실제 유족이 나타났다. 송경섭 유족인데 부친께서 이리경찰서에 근무중 전쟁이 발발하여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 전주 형무소에 수용되었다 포로로 와 있던 군인들과 총살되어 지역에 매장 되었다는 것이다.
우린 당시 전주교도소에 근무한 한 익명의 인원을 추적하여 만났다. 하지만 그 인원들은 북한군이 내려온 이후에는 북한군 통제를 받아 그놈들이 임명한 인원들이형무소를 장악했다고 한다. 그러니 본인들은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어느날 또 한사람의 제보자가 나타났다. 본인이 성묘를 하러 다니는데 "대왕묘"가 효자동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거에 달려가 안내소를 찾아 내력을 조사했다. 마침 추석이 다가오고 있어 벌초를 하는 인원이 예초기를 돌려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다 한곳에서 다리야 날 살려라고 뛰는 모습이 보인다. 땅벌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도 얼른 창문을 닫고 한참을 기다려 땅벌이 모두 소멸된 후에 그곳에 갔다. 애국자의 묘라 명명된 곳에는 큰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데 오래 되었다고 한다. 성묘객도 있다고 한다. 사연을 알아보니 전주교도소 우물에서 나온 유해를 이곳으로 옮긴 것인데 신분은 정확히 모르고 북한군과 지역 프락치들이 붙들어간 지역 유력인사와 일부는 경찰이나 군인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함부로 우리가 굴토하기도 어렵다.
"전국 교도소 인명 피해 현황비교"
전국 교도소의 당시 보도연맹 및 복역자 피해현황을 숫자만으로 비교해 보기로 한다. 이 자료는 정확한 것이라기 보다는 제보와 증언에 받침하여 과거사 조사위에서 발표한 내용에 준하여 나열한다.('05.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 한울 아카데미)
1)서울 불광동 소년원 학살(소년원 뒤산, '50.8.7) : 인민군이 제소자 200여명 총살
2)서대문 형무소 하살(서대문 형무소, '5010~12월) : 군경, 우익 청년단이 부역혐의자 34명(*서울일원에서 2만6천명 사망했다는 설이 있음)
3)마포형무소 학살(마포형무소, '50.10~12월) : 군경, 우익 청년단이 부역혐의자 4천여명
4)육군형무소 학살(육군형무소, '50. 10~12월) : 군경, 우익청년단이 부역혐의자 1천여 명
5)인천형무소 학살(인천형무소, '50.10~'51. 1월초) : 군경이 부역혐의자 2천여명
6)원주형무소 학살(원주 형무소 뒷산, 50.6.30) : 국군, 헌병이 제소자 180명
7)청주형무소 학살(형무소에서 이동, '50. 7.7) : 군경이 재소자 수백명
8)대전형무소 산내 학살(형무소에서 산내이동. '50. 7.8~10.) : 제소자 3천여명(혹은 1천800), 제소자/ 보도연맹 7~8천여명
9)대전형무소 우물학살(구 형무소 우물 4개, '50.9.28) : 인민군이 1천 300명
10)김천 형무소 학살(혀무소에서 돌고개, '50.7.10~8일) : 헌병대, 특무대가 재소자/보도연맹 1천300(유해발굴)
11)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평산동 코발트 강산, '50.7~9월) : 국군,경찰이 재소자, 부역자, 보도연맹 등 3천 500명이상
12)대구형무소 학살(형무소에서 코발트 광산, 삼천포 등) : 특무대, 헌병대, 경찰 이 재소자 3천명
13)거창 신원리 학살(신원리 4개소, '51. 2.9~11) :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 제3대대가 제2전선 719명
14)진주형무소 학살(형무소에서 5개솢역, '50.7.29) : 미군, 특무대, 대한 청년단이 재소자 500명
15)부산형무소 학살(부산형무소, '50.7~9월) : 특무대, 헌병이 재소자/보도연맹 3천500명
16)군산형무소 학살(군산형무소, '50.7) : 경찰이 재소자 수백명
17)군산죽동 학살(죽동 복숭아밭. '50.9. 27) : 인민군이 우익인사.지주.경찰 등 300여명
18)옥구미면 학살(미면신관리. '50.9.26~28) : 인민군이 6개부락 630명
19)전주형무소 학살(형무소에서 황방산/건지산/솔개재. '50.6.26~7.20) : 헌병대, 방첩대, 경찰(미군입회)) :재소자 1천 4백명(전주 인근에서 예비 검속으로 5천~1만명 주장도)
20)전주형무소 인민군에 의한 학살(형무소, '50. 9. 26) : 인밈군이 정부요인, 우익인사, 경찰과 가족 등 500여 명
21)여수.순천 학살(여수일대. '48) : 국군.경찰이 5천여 명
권흥식(64,'09) 경찰 유가족의 제보/민원이다.
"경북 의성 거주중인 권선생의 아버지 권학도님은 무주경찰서 순경으로 근무중 '50.12. 13일 적상면 마산안 골짜기 토벌작전에서 전사하여 지역에 가매장 되었다가 '8년도에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낙수정에 군경묘지에 경찰전사자 5인(김훈태.김종상.권학도.이근석.최형진)이 합장으로 이장되었으니 이걸 현충원에 안장할 방법은 없는지?"란 내용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나머지 4인의 유족의 동의가 필요하고 설영 발굴하더라도 DNA감식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과연 뼈가 존재하고 있느냐는 문제가 대두된다. 뼈란 한번 발굴되면 그 산화속도가 무척빠르게 진행되어 감식조차할 수 없는 경우가 된다. 이런 경우에 묘의 신뢰성도 문제가 되기에 지금의 상태로 보존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상담해 드렸다.
낙수정의 군경묘지는 6.25전쟁때 희생된 국군의영령들을 모신 묘지다. 처음에는 국군전몰장병들만 안장하는 국군묘지였는데 그뒤에 경찰묘역을 증설하여 군경묘지가 되었다.
이곳의 경찰묘역은 지역내 다가공원 및 금암동 공동묘지에 안장된 전사경찰관 유해를 이장한 이후 고창군 충성의 묘에서 2기, 무주군 싸리재에서 5기를 이장하고 순직 경찰관을 추가 안장하는 등 2000. 10월 현재 99기가 안장 되어 있는 곳이다.
이러한 곳은 전국에 경찰 충혼탑이 지자체별로 별도로 관리 되고 있다.
1)논산의 강경경찰 순국 합동묘지: '50년 7월에 전원 전사한 강경경찰서장등 안장
2) 화순의 경찰묘지 : 이십곡리 밑에 '50. 10. 24일 동면 기습으로 전사한 16인의 경찰,10.29 남면지서 기습, 10. 12일 동면지서, '51 4.26, 7.8일 청풍지서 기습등에서 전사한 경찰 32명 안장, 그후에 유족이 12기는 인수해 가는 등, 지금은 무연고자 20기만 관리 되고 있다.
이외에도 함양경찰묘지,모슬포충혼묘지, 한림충혼묘지 등 제주도에 다수 분포(섬지역 특성)되어 있다.
"비비정의 총소리-1개 분대가 옥쇄하다"
삼례읍 비비정 일대에 갔다. 독립대대와 혼성경찰이 이곳으로 내려와 저지진지를 구축하려 했다는 제보에 따라 삼례읍에서 관련 제보 획득을 하려고 노력했다.
만경강과 전주천이 만나는 곳이며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 병력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하다. 먼저 하리에 가니 한 집에 대나무 숲이 조금 있고 강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주인을 찾으니 마침 연세가 많으신 분이다. 실제 본인도 한두명 죽은 사람을 보았다며 나서서 안내하는데 밭언저리들로 탐지기 반응은 없다. 언제 보았느냐는 질문에 북한군이 와 있을 때에 보았고 그 당시에 마을 사람들이 이장들 통제를 받아 묻었는데 그후에 군대를 갔다와서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동네에서 인민재판이나 프락치들이 날뛰는 행동은 없었나요?"
"그 당시야 잘못하면 죽으니 벙어리로 살아야지. 시키는대로 해야 되니 참 거시기 했지요."
누가 누굴 고자질했다고 말도 못하는게 사실이다. 모두가 살기 위해 무슨 짓을 못했겠는가. 별별 짓을 다 했다고 한다. 먹을 것을 갔다대고 부역을 나가고 아낙을 프락치에게 받치고 딸을 보내야 했던 무서운 세상이란다. 아차하면 끌려가 매맞아 죽던가 살아도 병신이 되고 국군이 와서도 경찰들이 보복이라도 하듯 부역자 색출을 위해 별짓을 다했는데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안했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저기 비비정에 가 보았소? 거기서 1개 분대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비비정에 가니 명당자리다. 무슨 학방이 있고 대나무 숲에 주변은 경치가 좋았다. 강을 건너지 못한 군과 경찰이 여기서 결사항전을 해서 처음에는 북한군이 바로 점령을 못했다 한다. 하지만 강을 건너려 해도 마침 비가 엄청내려 범람하는 바람에 건너지 못하고 있다 적들이 다시 공격해와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이 동원되어 묻었다고 하는데 그후에도 몇번의 물난리가 나 실제 위치는 잘 모른단다.
몇몇 사람이 같은 제보를 했기에 이일대는 면밀히 탐사를 하고 몇군데 탐지기 소리가 울려 표식을 했다. 하지만 그후 발굴에서는 탄피 몇점은 찾았는데 유해는 발굴하지 못했다.
"덕진동 우리 문중산 교통호에 20명이 묻혔어요"
삼례지역 탐사 및 탐문을 하는 과정에 덕진공원을 찾았다. 이곳에 제8사단 사단장인 최영희 장군의 공덕비가 있다는 제보를 확인하러 갔다. 대부분 이곳 지역의 정서가 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인데 당시에 공비토벌작전으로 들어와 있는 사단장의 공덕비가 있다니 의외였다.
공원에 들러 공덕비를 확인하고 나오는 길에 한 어른이 등을 뒤에서 두드린다. 돌아보니 나이가드신 분인데 넥타이도 메고 말숙한 신사분이다.
"어떻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나요?"
"TV에 나오는 발굴단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공원애 들러 최영희 장군 공덕비 내용을 보고 나오는 길입니다."
"우리 문중산에 국군이 죽어서 묻혀 있는데 한 20명은 된다고 들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6.25전투 당시에 이곳 가련산에 교통호를 파고 방어 작전중에 전사하여 현지에 묻었다는 것이다. 본인은 전쟁에 참여하여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갔다오니 산에 나무는 한그루도 없고 능선을 이어서 교통호가 쭉 이어지고 군데군데 매워져 있었는데 그대로 있다 한다.
우리는 전주지역에서 이와같이 교통호를 파고 적과 전투를 했다는 내용은 접하지 못했다. 북한군 제6-1.15연대의 압력으로 19일 구만리-삼례선 무너지면서 제대로 방어편성도 못하고 주로 경찰병력이 물러났는데 7월 19일 22:00시에 전주 외곾으로 그리고 김제로 물러났다.
우린 어른을 따라 산을 올랐다. 지금도 덕진 중학교에 출근하는 어른은 건강이 좋아 보였다. 가련산은 길게 전주천을 등지고 남북으로 뻗어있는 능선이 1.5km는 되었다. 올라서니 정말로 교통호의 흔적이 길게 남아 있다. 탐지기를 돌려보니 일정구간은 반응도 보였다. 처음은 교통호라 안하고 산을 오르는 중간에 편편한 곳이 몇군데 있는데 그런 곳에 매장시킨 것 아니냐고 물어온다.
"선생님, 누가 묻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전쟁통에 한 곳에 모아서 땅을 파고 묻기는 힘듦니다."
거의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가련산을 발로 걸어서 그 실태를 확인하려 했으나 쉽지는 않았다.
"이곳 전투는 한번이 아니고 미군이 9월 말에 와서 탱크로 사격도 했다는데?"
"반격작전시 미 제25사단 일부 부대가 이곳으로 진출해서 논산-강경으로 올라갔습니다."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충혼탑이 있다. 탑을 건립한 인원이 이존일 전북지사인데 농림부 장관도 했다. 이분은 다부동 전투시 부대대장으로 참전하였으며 소장출신이다. 우리는 묵념을 올리고 주변을 둘러본다음 내려왔다. 오는 도중에 참전용사 사무실이 보여 들어가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이 가련산 관련 이야기를 좀더 상세히 들었다.
"청방, 경찰 등 우익세력이 전사했다."
산 위에 교통호를 판 것은 국군이 아니고 북한군이 점령시에 판 것이란다. 그러면 여기서 전투한 인원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애매하게 되는데 이 관련하여 전투는 미군이 진입하면서 동산동 방향에서 탱크포로 이곳에 사격을 한 것은 사실이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지역에서 활동하던 청방이나 경찰 등 숨어서 있던 우익 세력들이 국군이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 일대에서 은거하여 활동하다 프락치들에게 들통이 나서 기습을 받아 다수가 전사했다는 이야기다. 우린 몇번의 지역주민 탐문을 통해 실제 매장된 위치를 알아냈다. 더 많이 죽어 있었는데 일부는 유족들이 찾아가고 안찾아간 인원을 교통호에 넣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전사했느냐가 중요한 현실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ㅡ이념전쟁의 비극인 것이다.
탐사 및 탐문을 하면서 내린 가정은 이곳 전사자는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찰이나 군인, 아니면 청방들로 비밀리에 활동을 하다 탄로가 나서 전사한 것으로 결론을 냈다.'08년도에 7구를 발굴했다.
"영광 삼학리 : 경찰이 용맹성을 발휘하다."
전사 지료에 의하면 7월 19일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북한 유격대원 50여명이 고창 상하면 용대리로 침투했지만 영광경찰이 출동하여 토벌하였다고 한다.
반면 소련군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보고서(1권 210~211p)에는 7월 23일 북한군 제6-15연대가 저녁 8시에 진격을 개시하여 밤 11시경에 삼학리에 도달하여 그 곳에 적(아군) 1개 대대 병력과 조우하였다. 7월 24일 아침 7시가지 전투가 지속 되었고 적 병사 및 장교 200여명을 살상하고 야포 및 박격포 12문을 노획한 후에 24일 오후 늦게 나주를 해방시켰다고 기록한다.
같은 시기에 적 제6-1연대는 아무런 저항없이 남쪽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7월 23일 정오에 고창을 점령한다. 영광 및 고창 점령전에는 목포로부터 투입된 적 3개 해병대대 병력을 격파하였으며 차량 14대와 박격포 7문을 노획했다고 한다.
이와같은 사실 비교에서 어떤 사실이 맞는지는 확인하기 곤란하지만 실제 우리가 삼학리에서 발굴한 유해는 명확히 경찰관 40여명 이었다면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의 군병력 운운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그 당시에 이쪽에 투입된 군부대가 없이 경찰이 자체적으로 방어했다.
일본측이 발행한 한국전사(1권 266p~269p)에도 미군은 이쪽으로 기동하는 부대를 북한군 제4사단의 일부로 보았고 우리 측에는 공군과 경찰대 이외에는 이를 저지할 수 있는 부대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기동하는북한군은 제4사단이 아닌 제6사단으로 웅진.개성.인천을 점령했던 중공의 제166사단의 정예군대로 천안까지는 제4사단을 후속하다가 천안부터 서남진하여 7월 13일에 예산을 통과하고 이어 군산을 점령한 후, 20일에 전주를 공격했다. 그런데 이사단의 진로를 저지하고 있던 부대는 패전 부대인 국군 제7사단(민부대라 함이 타당)뿐이어서 저지부대가없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실제 전투는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신태영 소장)의 통제를 받는 충남경찰과 전북경찰, 그리고 기갑연대 소속 기마1개중대, 해병대 고길훈(이후 김성은)부대, 이영규부대(제5사단 일부와 청방대를 포함 약 500여명), 오덕준부대(진주에서 학병 700명으로 편성된 민병대),배동걸 특공대 등이 있었으나 미 제8군은 이러한 실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일본측 한국전사 2권 18p) 따라서 한국측 경찰로부터는 많은 정보가 입수되었으나 단편적이고 막연하며, 모순된 것이 많아서 과장된 정보라 취급하여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을 사전 대비하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를 발굴해 현충원에 안장해 주시요."
2006년도에 한 경찰관 유족이 본인의 아버지가 영광 삼학리에 묻혀있으니 발굴해 달라고 전화가 왔다. 우리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지금도 연세많으신 분들은 0씨와 0씬 상종을 안한다?
나는 먼저 장성에 있는 태청산 밑에 제병본부가 있고 포병학교 포술학 과장겸 교관으로 3년간을 재직한 장성 바로 옆이라 남다른 감회를 들고 어느날 일요일에 이 지역에 춘란을 구하러 왔다가 동네에 들어와 가장 어른이라는 강00, 당시 82세('06)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 도중에 마을 저 입구에 누가 들어오는데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하고선 이내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분이 오씨로 연세도 한살이 더 많은 분이였다.
그러나 0씨들이 이 0씨들의 밀고로 많은 인원이 피해를 입었고 다시 국군과 경찰이 들어와서는 반대편이 피해를 입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집안간에 원수지간이 된 것이다.
물론 지금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것이 없지만 공비들이 출몰한(불갑산과 태청산일원)지역은 대다수 이런 비극이 남아 있다.
오어른이 지나가고 다시 강어른이 나왔다.
"뭐라 합디까?'
"아무런 말없이 인사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세상이 무섭다. 그리고 그 원한은 오래간다.
강어른은 직접 경찰유해를 경찰지소 울타리 경계호에서 발굴하여 옮기는 것은 모른다. 왜냐하면 전쟁이 나고 10월에 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 후에 돌아와 동네이야기를 들으니 무슨 전투화가 한가마니 나오고 많은 경찰뺏지가 그대로 나와 해남, 영암등지에서 유가족이 발굴해가고 일부가 남아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어른과 함께 멀지않은 그곳에 올라가 뭉개진 몇군데의 매장위치를 확인하고 묵념을 올린 후에 돌아와 전사를 뒤졌다. 하지만 많은 내용이 없다.
소련군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보고서(1권209~ 211p)에는 7월 19일 아침부터 별다른 저항없이 금강을 도하하고 , 개별 경찰부대들을 격파하면서 20일 전주를 점령한다. 고창-영광 점령간 국군 3개 해병대를 격파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특히 제15연대가 영광으로부터 나주로 진격하라는 지시를 받고 7월23일 저녁 8시에 진격을 개시하여 밤 11시 무렵에 삼학리에 도달하였으며 이곳에서 아군 1개 대대와 조우하여 24일 아침 7시까지 전투가 지속 되었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아군 병사 및 장교 200명을 살상하고 박격포 12문을 노획하였다고 한다.
"국군이 전투했다는 기록은 우리측에 없고 적군 자료에는 나오는데 실제 현장은 경찰만 나왔다."
2007년도에 실제 국방부 차관이 현장을 찾기도 하고 언론과 학계의 비상한 관심속에 몇번의 조사를 더 실시한 후에 발굴 작전이 경찰이 입회한 가운데 시작 되었다.
"관심이 미흡한 경찰, 관심이 너무 높은 나."
여러번의 탐사와 탐문을 거쳐 아군으로 판단하고 또한 실제 경찰 유가족의 현장증언과 많은 동네분들의 제보로 경찰이 명확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전남 경찰청을 통하여 합동발굴 제안했으나 본인들은 정확한 전사가 없기에 발굴에 참여하기가 곤란하다 한다. 서울 본청에 직접 찾아가 사실관계를 알리고 언론에 경찰은 관심이 없는 것으로 하겠다고 하니 그래도 이곳 담당자는 혼이 살아있어 참여하겠다고 한다. 결국은 현장 입회만 하고경찰이 명확할 때에는 걍찰에서 유가족 찾기와 DNA 감식을 책임진다는 조건하에 '07년도 초에 발굴이 시작 되었다.
"지서에 파있는 교통호안에 처음 매장되었다가 다시 학동 야산에 지게로 져다가 묻었다."
발굴 당시에 노역에 참여한 인원이 있었다. 이 가매장은 처음은 북한군 통제로 전투가 벌어진 경찰지서 주변에 구축된 교통호에 모두 묻었다.
이 교통호는 여수.순천사건시 공비들이 이곳 불갑산이나 태청산에도 숨어들어 기습을 하기에 그 당시에 굴토한 것인데 전쟁 당일에도 경찰들이 활용하였다.
"마지막 한명까지 최선을 다한 전남서부지역 경찰들~!"
지역주민 강대린((77.'09)의 이야기다.
"아니 전쟁이 났다는데 뭐 조용해. 그런데 용대리인가 법성포 위에 전북고창하고 경계되는 곳인데 무슨 유격대 100여 명이 올라왔다는 거야. 그래서 경찰들이 출동하는데 그걸 다 봤어요. 올라간 경찰이 다시 내려오고 우리는 전쟁이 끝난나 싶어 지서에 가보았더니 마을 사람들이 몇몇 와 있는데 무슨 북한군이 왔느니 국군이라느니 요란하게 시끄러워요.
나는 별로 할 이야기도 없고 나오려고 하는데 그때가 저녁먹고 얼마되었으니까 한 8시는 되었는데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잖아. 얼른 지서안으로 들어가 총소리 난다고 하니 벌써 연락을 받고 어디에 보고를 하더라고. 잠잠해지나 해서나는 나와서 집으로 오는데 우리 경찰이 줄맞춰서 영광읍쪽에서 들어오고있더라고. 모두 지서쪽으로 갔는데 한 100명도 넘어요.
집에 와서 얼마 있으니 무슨 밤하늘에 조명탄인가가 올라가더니 갑작스레 난리가 났어요. 전쟁이 난거야. 이 때가 밤 10시를 훨씬 넘긴 시간이야. 전쟁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어 동네는 쥐새기도 안움직이고 집에 숨어있는데 조용해. 그런데 누가 빨리 곡갱이들고 단가들고 나오라고 소리질러 나는 안가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갔는데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어요. 나중에 오셔서 하시는 말이 시체를 옮겨서 묻었다는 겁니다. 바로 경찰이지. 교통호에 줄줄이 끌어다 넣고 옆에 흙을 걷어내려 묻는 작업을 하고 왔다는 겁니다. 얼마나 묻었느냐고 물으니 200명도 넘는다는거야. 아침나절에 법성포로 올라갔던 경찰인데 영암, 해남, 강진경찰들인데 다 죽었다고 했어요. 그러다 나는 여기에 있다가는 안되겠다 싶어서 요리저리 피해가며 대구로 도망쳤지요. 그때는 모두 대구나 여수로 가야한다고 했는데 대구로 가서 10월에 군에 들어갔으니 그 다음은 잘 몰라요.
지역주민 할머니 안기순(81.'09)의 이야기다.
시집와서 줄곧 여기서 살았다. 피난도 안가고 동네에 있었다. 임신하여 있는데 전쟁이 났다고 하는데 이미 북한군이 동네에 들어와 있었다.
지서에서 적군과 싸워 경찰이 모두 죽었다. 북한군은 3명인가 죽었다. 북한군이 지역주민들을 데려다 방공호에 다 묻었다. 그리고 아군이 들어와서는 다시 파서 야산으로 옮겼는데 이때는 주로 부역자 집안에서 끌려가 지게지고 날랐다. 우리도 새로 집을 짓다가 땅을 파니 경찰이 나와 뒤에다 묻어주었는데 그대로 있다. 경찰 혁대도 나오고 전투화도 나왔는데 다 버렸다.
그런데 경찰지서에 묻혀 있을 때에 영암사람들과 해남사람들이 와서 교통호를 파서 형제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여수.순천 사건이 끝난지 얼마 안되어 경찰이나 군인에 대한 인식이 아주 안좋았다. 저기 있는 불갑산에도 빨치산도 군경도 많이 죽어 한참 때는 해골이 골짜기에 쌓여 있었다.
지역주민 오진봉(78세,'09)의 이야기다.
이 지역은 전쟁전에부터 좌우익의 편가르기가 심했다. 4.3 제주도 사건이나 그해 10월의 여수.순찬반란사건이나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곳도 많은 사람이 경찰에 붙잡혀 갔다. 사실 경찰도 그런 사상범이 많았다. 여기 죽어서 묻혀있는 경찰들도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런 와중에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완전히 지서를 감싸고 박격포를 퍼부어 비참하게 죽었는데 제대로 총도 한번 못쏘고 죽었다. 당시에 지서에 아낙네들도 몇 있었고 어린아이도 있었지만 다 죽었다. 지서에 가 있으면 사는지 알아서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 다시 국군과 경찰이 들어와 여기 묻힌 사람을 다 파내라고 하여 동네 부역자들을 색출하여 파내고 지게에 져서 묻게하였다. 지금 그 자식들이 살고 있는데 서로가 피해없도록 아무런 말을 못하고 산다. 분명 당시 부역에 참여한 인원이 있는데 모른척하는 모습에 울화통이 올라오지만 참는다. 그때는 그렇게해야 살았다. 남을 죽이고 내가 살아야 한다. 부모형제간에도 일가친척간에도 그랬으니 더 물어서 무엇하겠는가. 우리 산에도 보니 있어서 개간하다가 다른 야산에 갔다 묻었다. 지금 이주변 모든 곳에 그때의 죽은 사람들이 묻혀있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를 뿐이다. 영광이 집인 사람들이야 대부부누 파갔다. 하지만 타지방 사람은 어떻게 알겠는가.
유가족 오몽룡의 증언이다.
아버지는 앞 윗니 4개가 일본에서 브러찌를 했다고 한다. 당시에 해남경찰서에 근무하다가 이곳으로 북한군을 제압하러 왔다가 전사했다. 하지만 경찰 기록에는 전사지역이 없다. 그 당시에 누가 제대로 적었겠는가. 나살려라하고 모두 도망가기 바빴을 것이다.
"여기에 묻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들으셨나요?"
"영암 경찰서에 가면 도포에서 죽은 경찰비가 있다. 화순읍에도 경찰묘가 있는데 아버지를 찾으려 많이도 찾아다녔는데 한 30년을 걸렸다. 그런데 해남경찰서에 어느날 갔는데 아버지가 영광법성포지역에 출동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법성포에 찾아와 물으니 아무도 모르고 경찰이 많이 죽은 곳이 삼학리라하여 설마하고 학동에 와서 물으니 경찰이 몇백명 죽어 이 일대에 묻혀 있다고 하여 발굴단에 연락했다. 그리고 이과장이란 팀장을 만나 직접 대화도 나누었다."
"그럼 아버지가 어디에 묻혀 있다는 것은 모르시네요?"
"그렇지요. 그러나 분명 여기에 있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정중하게 발굴을 할 것이니 지켜봐 주세요."
이곳에 관련된 제보는 처음에는 한건인 것이 발굴이 시작되고 언론에 관련내용이 보도되자 몇건이 더 들어왔다.
이윽고 지난 '07.5월에 발굴이 시작되고 최초제보자 오몽룡씨는 현장에 와 있었다. 4개의 크고 작은 뭉개진 봉분에서 쏟아져 나오는 유해와 실탄 등 유품들!
"경찰 마크, 요대 등 생생하게 처음처럼 나오는 유해와 유품, 저기 우리 아버지다!"
몇삽 들어내지않아 바로 전투화가 나오고 발뼈부터 보였다.
유해가 거꾸로 들어가 있기도 하고 지게 바작에 올려져 부려버렸으니 그 행태가 그대로 나온다. 그런데 한구덩이에 유해 얼굴에서 금니로 4개를 브러찌한 모습이 보였다. 오선생이 바로 소리쳤다. "우리 아버지다" 그리고 정말 감식결과 아버지가 맞았다.
이렇게 이곳에서 발굴된 38구 중 지금까지 10구 이상이 유가족을 찾았다. 대부분이 해남경찰 소속이다.
이런 와중에 실제 그날 부역을 한 분이 현장에 왔다. 혹시라도 있을 불이익을 감수하고 오신분은 본인은 경찰이 나오라하여 끌려서 나와 유해를 지서 교통호에서 발굴하여 지게에 지고 교동(지서에서 500m거리) 야산에 부렸는데 야산에는 또 다른 인원이 구덩이를 여기저기 파놓고 있더라고 한다.
"지게로 시신을 지고 나르는데 한구한구 확인도 없었겠네요?"
"경찰이 총을 들고 감독을 하는데 "너희놈들이 죽였으니 너희들이 옮겨야 한다"고 강변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러니 나는 이유도 모르는데 붙잡혀 와서 험한꼴 당하고 억울하지요."
"지게로 한구씩 옮겼나요?"
"툭 떨어져 나가는 허벅지, 그 살이 그렇게 미끄럽다."
"무슨 소리요, 삽이나 갱이로 파낸 시신을 가마니에 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그냥 가마니 위에다 올려서 가는데 가다보면 허벅지가 툭 떨어져 나가면 어떻해요 사람인데 다시 지게를 받치고 들어서 지게에 올려 그래도 한곳에 갔다 넣었어요."
"별별 일이 다 있었겠네요?"
"그럼요, 머리가 가마니에서 삐져 나와 데굴데굴 굴러가질 않나, 어떤 사람은 팔만 지고오다 보니 손가락이 출렁거리며 꼭 누굴 오라고 하는 것 같아 옆에 사람이 '왜 불러요?'하고 묻기도 하고 참 꼴이 아니였지요."
"묻은 곳은 여기가 다 인가요?"
"이 일대가 전부라고 봐야돼요. 동네사람들 여럿이 구덩이 파고 묻었는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거든요. 대부분 여기 야산이지만 저 집 뒤에도 있었고 지서 뒤에 지금 보니 밭이 되었는데 그곳에도 일부 묻었어요."
"믿을 수 없는 전사자 200여 명의 진실?"
결국 우린 이분들이 이야기하는 곳을 다 발굴하여 2구를 더 찾아냈다. 그러면 소련 군사고문단장의 보고서를 비교하면 1개 대대병력과 주우하고 병사 및 장교 200여 명을 살상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의문이 간다.
제보자들의 200여 명도 소련군의 200여 며우 살상과는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살상이란 전사와 부상등을 다 합치는 결과이니 말이다. 제보자들은 전투화가 마대자루에 몇개를 담아냈다고 하는데 사실 마대자루에는 15켤레 들어가면 가득 찬다. 전쟁중 기록은 오차가 심하다.
"불갑산의 위패 375위를 증명하라"
그런데 나는 여기서 또 다른 중요한 자료를 검토하게 된다. 바로 위패카드다. 현재 동작동 현충원에 보관중인 위패카드에 이곳 불갑산에서 찾지못한 유해가 375위나 된다. 불갑산은 '50년 말부터 전쟁이 종료되는 싯점까지 공비들이 우굴거리는 거점의 한 곳이다.
"불갑산을 중심으로 수 없이 죽어간 빨치산토벌작전의 피해자들이 1,000명이 넘는 이곳"
그런가 하면 함평 해보면 산내리와 광암리에서 민간인 피해자들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굴하여 현재 그 진상이 조사중에 있다. 일명 "영광 불갑산학살"로 제11사단 제20연대에서 이곳에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 발생한 민간인 피해사건을로 '51.1~2월에 불갑면 모악리와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일대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많은 민간인 2,000여 명이 피해를 봤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좌익들이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게 되고 이에 전남북 일대의 주민들은 낮에는 국군치하, 밤에는 빨치산 치하의 이중생활을 하다보니 빨치산에게 먹을 식량등을 주게 된다. 이러니 다음날 낮에 국군이 들어와 동조자와 부역자를 색출한다며 주민들이 즉결처분된다. 이런 과정에 빨치산들의 선동에 속아 산으로 들어간 인원들이 또한 토벌작전간에 죽게 되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상황이 일시적이지만 있었다.
"우리 가족 9명이 다 죽었소"
나는 불갑산을 3회에 걸쳐 탐사를 했고 탐문은 거의 2주가량 했다.
과연 이 경찰 유해가 정말 우리가 발굴해야 할 대상인지 아닌지와 또 다른 발굴대상지(불갑산:518m)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해보에서 최종남씨등 몇분을 만나 불갑산의 비화를 거의 3시간이상 청취하였다. 그런 차원에서 빨치산과 인민군 잔당들이 판을 친 전남북지역의 일반적 실태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불갑산의 비화를 길게 엮어보기로 한다.
*전쟁전후 불갑산 지역 정치상황
1)해방직후 정치사회상황
일제 통제로부터 벗어난 조선민중은 새로운 사화체제 건설을 위한 기대와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마을주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반봉건체제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면 그 몇몇의 증언을 통하여 사회현상을 보도록 하겠다.
당시지역 생산유격대장을 한 빨치산 출신의 유옥(87세.'09)의 증언이다.
"마을분위기는 좋았지요. 만나면 서로 만세부르고, 서로 그냥 이쟈 살길생겼다고 해쌌고. 아니 시방 ㅐ놈들한테 공출 당했다고 이렇게 해도 젊은이들은 몰라요. 생긴 거는 다 공출했어요. 첫째는 사람, 돌째 쌀, 보리, 미역, 심지어는 나무 겁데기까지 벗겨서 소나무 또 거시기 기름 짠다고 해갖고 그루터기 다 파내고, 산놈은 뺑 둘러 요렇게 해가지고 송탄, 저 송진 빼가고. 다 했어요. 밤낮 그 짓거리만 하다가 아무것도못해. 풀 베다가 또 마초, 왜놈들 말 마초 또 댄다고 또 베어가고. 얼마씩 내라고 하면집집마다 얼마씩 내야되고요."
빨치산 연락병 김영승(75세.'09)의 증언이다.(묘량면 사람)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우리세상이 왔다"며 반겼다. 반며누 일제 때 부일협력한 사람들은 쥐구멍 찾듯이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해방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마울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치안대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건준에 이은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탄압을 받았으며 좌익들은 '46년 들어 미군정과의 갈등과 우익단체의 테러에 맞서 저항의 길을 선택했다. '46년 당시 좌익운동은 지역사회에서 커다란 지지를 받았고, 특히 미군정의 농업정책에 불만이 많았던 젊은 농민층의 지지는 컸다. 묘량면 삼학리 주민들은 저녁마다 동네 사랑방에 모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면소재지에서 온 지식인들로부터 새로운 사상을 접했다.
당시 사랑방에 동네청년들이 많이 모이면 일제 때 투쟁한 사람들 영향도 받고 청년들이. 우리들 이야기도 듣고 내중에는 다 죽었지마는. 그 영향을 받으니까. 그러고 우리들도 감수성이 빨랐잔하요. 감수성이 예민할 때이니까. 그러니가 그런 영향을받으면은 아~그렇구나. 그리고 참 속된 말로 똥구녕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니가. 반드시 우리 세상을 만들어야 된다는 그 청년들이 얘기하는 것이 귀에 솔깃할 수밖에 없잖아요. 없이 사니까 우리세상이 돌아와야 된다는. 사랑방에 모인 청년들은 면소재지로부터 온 사람들로부터 하의도 농민가를 배웠는데 이 노래는 하의도 농민들이 소작쟁의를 하며 부른 노래였다. 또한 청년들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배우기도 했다.
2)1948년 이후 지역 상황
'48년 이후 구내외 정세는 급격하게 변하여 갔다. 남한의 정부수립과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 명받은 여수의 제14연대가 출동을 거부하고 군사반란을 일으킨 여순사건이다. 14연대 병력중 일부는 불갑산으로 입산하면서 인근 영광군, 함평군, 장성군 일대에서 한국전쟁과 '작은 전쟁'을 치른다. 이러다 보니 불갑산 주변 일부 주민들이 빨치산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고 지하활동을 하기도 했다.
"빨치산 연락병 김영승의 이야기다."
1948년도 여수 14연대, 우리가 말할 때 애국봉기라고 그러지. 일어난 후에 불갑산에도 빨치산 무장대들이 한 30여명이 있었어요. '49년도 월가지. 이 불갑산에. 그러니 저녁이면 내려오잖아요. 내려오면 부락에서 천상 접촉이 되잖아요. 접촉이. 그래서 빨치산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우리누나하고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때만 해도 심부름같은 것을 많이 했어요." 이러다 보니 대부분의 주민들은 불갑산에 있는 빨치산을 토벌하려고 하는 군경과 이에 저항하는 빨치산과의 대결 사이에서 이중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소위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공이 된 것이다.
3)전쟁전후 군경에 이한 민간인 피해
전쟁 전 빨치산과 지방좌익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차원이라면 군경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보다 광범위하게 진행 되었다.
첫째는 합법적인 절차없이 좌익운동가나 혹은 일반주민을 즉결 처형한 것이다. 둘째는 빨치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처형 또는 폭력을 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군경이 토벌과정에서 주민들에게 끼친 경제적 민폐이다.
한 예로 '46년도에 함평경찰서는 좌익활동가를 연행해, 트럭에 실고 장소미상의 곳에서 즉결 처형했다. 해보면 광암리 윤석갑의 큰아들은 '49년도에 큰아들이 모두 동네에서 나오라는 말을 듣지 않고 집에서 방아를 찧다가 총맞고 죽었다.
그런가 하면 제11사단 제20연대가 토벌작전차 묘량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을 때에 삼학리 주민들은 군인들의 식량을 제공해야 했다.
"닭을 몇마리 잡아라. 돼지를 몇마리 잡아라. 그러면서 배당이 들어오면 준다고. 그러나 제대로 이행된 적이 없고 안 해 주면 빨갱이로 몰리게 되어 불이익을 받게 된다."
4) 군경의 소개령과 방화
죽고 사는 문제는 주민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주었다. 하지만 가장 큰 피해는 군경에 의한 소개령과 가옥 및 살림살이의 방화였다. 이곳 함평의 불갑산 용평사 밑의 광암리는 남서쪽에 있는 신광면 삼덕리로 소개 당한다.
소개된 지역은 모두 불타버리고 만다. 그러니 마을에서 여유가 있는 몇집을 제외하고는 임시방편으로 움막을 집터의 구들장 위에 설치해야 한다. 그러니 어던 가정은 뿔뿔이 흩어져 일가친척이나 잘 알고 지내는 집에 기거하면서 기구한 삶을 살아야 했다.
군경의 토벌이란 명분에 조금이라도 잘못 보이면 집안이 끝장이 나버리고ㅜ이제는 빨갱이로 몰리는 것도 예삿일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작전지역내 청년들은 보이면 사살 되기도하고 전쟁전후 불갑산지역의 주민들에게 대한민국 군경은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주는 공적 집단이 아니라 공포대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갑지구 형성과 5중대 사건, 대보름 작전
1)불갑지구 형성
북한군 제6사단이 '50. 7. 3일에 함평을 점령했다. 23일(삼학리 전투가 24일 새벽까지 진행됨) 오전 함평초등학굥에서 인민군환영대회가 개최되고 8월 2일에는 함평공원에서 인민재판이 개최되어 12명이 사형선고를받았다. 소위 인공시대가 시작되고 노동당 조직이 복구되면서 인민위원회, 여맹, 민청, 소년단, 치안대 등의 각급 기관이 조직 되었다.
그러나 인공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50. 10월 15일에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가 광주에 진주했으며 함평경찰서 경찰이 10월 19일에 함평읍에 진주해 구금된 우익인사를 피신시켰다. 같은 날 인민군 잔당들과 지방좌익들이 함평읍에 진주해 방화와 살해를 하고 산으로 들어가게 되고 인민군에 함락된지 3개월만인 '50. 10. 28일 함평을 수복하게 된다.
인민군이 패퇴하고 북으로 오르자 전남도당은 9월 25일 모든 조직을 지하당 조직으로 개편하라는 특별지시를 받고 전남도당은 10월 5일에 백아산 새목에서 조직위원회를 개최하여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와 6개 지구 창설에 과한 결정서를 채택하는데 여기서 6개 지구중 불갑 지구는 불갑산을주거점으로 영광, 장성 남부, 나주서부, 함평, 무안을 토대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불갑지구가 형성되자 본격적인 토벌을 위해 다시 불갑사 일대 주민들은 소개령이 내려지고 방화의 반복으로 아무것도ㅜ 남는 것이 없는 황폐화가 되고 피난살이에 눈물흘리게 된다.
"그런데 외갓집으로 가니까 안 받아줘요. 즈그도 죽는다고 그러고. 가라고 그러고. 거기서 밥만 얻어먹고 저녁에 나와서, 어디 남의 집 인쟈 그 허튼 거시기에서 잠을 자고~" 피난살이 모습이다.
2) 5중대 사건(일명 함평사건)
5중대 사건은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함평군 월야, 해보, 나산면에서 '50. 12. 6일부터 '51. 1. 14일 어간에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제11사단 제20연대 제2대대 5중대 군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민간인 524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가옥은 1천 454채를 불태웠다.
이 사건의 발단은 '50.12.2일 5중대 3소개 군인들이 월야면 정산리 장교마을과 동촌마을을 경유하여 장성읍으로 가는 보급로를 확보하고자 순찰활동중 월야 계림리 시목마을 앞 지하보 부근 하천에서 공비들과 전투중 군인 2명이 전사하게 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2월 6일 새벽 5시쯤 장교마을을 점령한 군인들이 남녀노소를 구별하지않고 사살하고 집과 볏더미에 불을 질렀다. 동촌 마을에서는 주민들을 도로변에 앉혀놓고 어린애만 빼고 군경가족을 포함해 모두 학살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6.25전쟁 피해자중 전남지역 피해자 4만 3511명 중 영광지역 사람이 2만 1천 225명이니 그 정도를 알 수가 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국회에서 '양민학살특위'가 구성되어 조사한 사건으로 공식적인 인명피해가 524명에 이른다. 이 5중대 사건으로 주민들은 불갑산이 안전한 곳으로 인식되어 좌익-우익이라는 사상과는 무관하게 불갑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한다. 동네에 있으면 죽으니까.
당시 유족의 증언을 들어보면 참 어이없는 학살이다.
1)정응모, 일가 7명 희생
그때 나도 현장에서 죽을 뻔봤어. 그 때 구덩이가있어서 내가 거기 섰는데 같은 토또래 중에서도 얕차와. 그래서 나더러 나오라고 그래가지고 노인들 틈에 섰어. 그대 나오라고 그래서 살았제. 그찮으면 나도 그대 죽었을거야. 바로 현장에서 10m 나왔을 때 총을 발라버려.
2)정남식, 유족
한 동리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린거야. 반란군을 죽여야 하는데. 농민들을 죽여버린께 군대는 뭐 먹고 사냔 말이여. 전체 여기 일곱 동네를 싹 죽여버린겨. 우리 못갓이라는 마을은 여그 있다가 쩌그로 내려갔어. 저그서 휫가락(휘파람)을 부니께 거그다 다 모아서 죽여부렸어. 저그 마을을 다 불질러 버렸어. 학생들 시켜서. 쌀도 다 불질러 버리고.
3)대보름 작전(군경합도에 의한 민간인 학살)
1951년 2월 20일 불갑산 민간인 학살사건은 제1사단 제20연대 제2대대와 연재 중포중대, 대전차포중대, 수색소대가 "대보름작전"이라 불른 불갑산 빨치산토벌 작전과정에 발생했다.
당시 불갑산에는 인공시절 각급기관에서 활동을 하거나이들의 기족인 경우, 군경 토벌작전에 불안감을 느긴 주민들, 국군의 소개령에 이주했다가 외지인 배척으로 다시 입산한 민간인 들이 있었다. 따라서 용천사 주변을 감싼 골짜기에는 군경과 총검을 피해 모여든 주민들로 가득차 있었다.
토벌부대에는 청년방위대, 지역 우익단체까지 동원되어 연대 작전을 펼치면서 포위망을 좁혔다.
하지만 이미 반군들은 대보름 작전이 있기전불갑산을 벗어나 장성의 태청산으로, 일부는 나주의 금성산으로 숨어들었다.
따라서불갑산에 토벌군을 기다리는 것은 비무장의 민간이였다. 민간인들이 빨치산은 모두 도망갔다고 하였으나 군은 이들을 빨치산, 또는 동조자로 간주하여 보이는 즉시 사살하고 광암리 가정마을 뒷산 부근의 방공호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그대로 난사하였다.
*당시 그곳에서 살아난 문만섭씨(당시 17세)의 증언이다.
"300여명이 매장되었고 가족단위로 불갑산에 올랐다가 총살당한 사람이 많다"
*김영승씨의 증언이다.(당시 빨치산 연락병)
불갑산에서 1천500~2천명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해 다사하면서 최종남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 가족 9명이 그 현장에서 학살당했다. 현장에서 곡갱이로 30cm 파보니 해골이 수십개 겹쳐 있다. 파묻혀 있는 유골이 1백미터 거리이기 때문에 적어도 400~500명은 될 것이다.
묘량면 삼학리 왕촌주민들은 토벌작전 2~3일 전에 빨치산을 따라 용천사 인근으로 피난을 갔다. 이들은 작전이 끝나고ㅜ마을로 돌아와 영과우경찰서 삼학출장소에 나가 자수를 했다. 이 자수한 인원을 삼학리 시산재에서 총살시켰다. 그런데 시산재 근처에 있는 흘루개재에서도 집단학살이 있었다. 묘량면 사람들이 상당수 죽었는데 특히 여자들은 죽지 전에 모두 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군경합동으로 이루어진 불갑산 빨치산 토벌작전은 대량의 민간인 집단학살이라는 재앙을 몰고왔다. 군경은 비무장한 피난민들에게 무차벼루 총격을 가하고 심지어 기간총과 포탄을 쏟아부었다. 군겨의 진압과정에 빨치산과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어쩔수 없는 희생이었다고 변론도 하지만 너무한 과잉 토벌이었다.
*당시 토벌에 참여한 월야지서 오정인(토벌대 1중대장)의 증언이다.
군인은 죄 있고 없고 상관없다. 빨치산이고 뭐고 안 보인다. 애들이고 뭐이고 안 가린다."고 회고하며 "불갑산 주변의 공비나 주민들을 잡아다가 지서에 별도로 격리를 시킨 적은 없다. 잡아 올 수도 없고, 잠아 와 봤자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박득수, 장재수(유족, 현장목격자)의 증언이다.
군경작전에 검거된 피난민들이 여러 장소에서 무더기로 학살되었다. 실제로 산야 곳곳에 죽은 자들이 많이있다. 죽어가는 피난민의 모습이 마치 사냥꾼이 쏜 총에 짐승들이 쓰러지는 모양이었다.당시에 불갑산이 울음소리로 진동했다.
박득수는 '51년 3월 경에 학살당한 어머니와 형수를 수습하러 현장에 갔는데 함부로 수습할수 없어서 함평경찰서장의 허가를 받고서 장소에 깃대를 꽂아놓고 발굴을 하는데 총상이 두개골에만 있는게 아니라 온몸에 다 있어 성한 곳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 수습하지 못한 시신들은 이곳저곳에 방치되었는데 일부 사람들이 벼 담는 마대에 뼈를 담아다가 팔았다. 온전한 사람 뼈 한사람 분이면 그때 돈 15만을 받았다 한다.
*이근신(당시 삼서 여맹 위원장)의 증언이다.
그러고 엄마가 죽으면 애기도 죽을 것 아닌가요? 그래서 불갑산 작전에 이곳에 애기 울음, 저곳에 애기 울음. 참 배고파도 울고, 참 얼마나 거기 가 쪼깐 있는 동안 참 눈물 바다였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인쟈 그보름날 새벽에 그 난리가 나갖고. 한발도 못 가요. 시체 때문에. 그냥 계곡에 물이 흐르면 순 피 물만 이렇게 흘러 내려가고. 오매 세사에 이것도 이러고도 살아야 쓰까."
*김진현 증언(당시 빨치산 함호대 사령관. 유족)
대보름작전 다음날인 2월21일에 군유산에서 불갑산으로 돌아온 김진현은 대원들과 시신을 수습했다. 오두재에 도착하여 ㅜ시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길게 파인 전호에는 시신들이 거꾸로 집어 넣어져 있었는데 손은 새기로 묶여 있었다. 여자 시신에는 자궁에 죽창이 꽂혀 있었고 일부 남자 시신에는 항문에 죽차이 곶혀 있었다. 김진현은 대원들과 죽창을 빼고 인근마을에서 괭이와 삽을 갖고 와서 시신을 매장했다.
해남 나주부대 사건, "지역 주민 80여 명 피해"
전남방어선이 무너지자 경찰은 7월 24일 후퇴를 결정했다. 경찰과 공무원, 지역유지들 대부분이 피난을 떠나 해남은 행정과 치안공백상태였다. 그러면서 인민군이 곧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50. 7월 26일 해남읍에 10여대의 스리쿼터에 분승한 인민군들이 붉은 완장에 붉은 머리띠를 둘러멘 한 부대가 인민가를 부르며 해남시내로 진격해 들어왔다.
인민군을 접해보지못한 해남사람들은 이들이 진짜 인민군이줄 알고 "인민군 만세"를 외치며 이들을 맞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환영나온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기관총 탄환이 발사됐다.
"바로 영광 불갑산전투(삼학리 경찰지서전투로 판단 됨)의 참여자, 해남경찰이다."
인민군으로 가장한 무장부대는 사실은 현직 경찰병력이었다. 나주경찰서 소속 대원들로 일명 "나주부대"로 불렸다. 나주부대는 나주군 경찰과 극우청년 혼성부대로 허모대장이 지휘하고 해남 출신 나주경찰서 사찰주임 제갈덕수가 참모엿다고 한다. 이들은 영광작전으로 일컬어지는 영광 불갑산 전투에 투입됐다가 패배하고 부산으로 퇴각하기 위해 해남을 경유하던 상황이였다. 옥천면소재지에서 만세소리를 듣고 멈추었다가, 사람들은 처음에는 인민군인줄 알고 만세를 불렀으나 가까이 보니 경찰이어서 "대한민국만세"로 둘러대 화를 모면했다.
이후 나주부대는 목천면사무소에 주둔하면서 해남읍의 상화을살핀후에 인민군으로 가장하고 해남읍에 진입하여 2~3일간 주둔 후에 부산으로 이동하기 위해 완도를 향해 북평 남창쪽으로 더났다. 일부는 진도로 향했다고 한다.
"북한군으로 위장된 나주경찰의 계속되는 학살"
해남읍에서 수많은 주민을 무차별 난사한 나주부대는 해남을 지나 완도 등 전나무 일대의 민간인 수천명을 학살하게 된다. 이들은 바로 해남에 이어 완도, 진도를 거쳐갔다.
나주부대는 완도경찰과 함께 해남일대에 주둔한 북한구누부대와 한 달 가량 대치한 뒤 9월 경 청산도로 후퇴하고 9월 말에 다시 나주경찰서로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이들은 해남,완도,진도 일대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했다. 나주부대가 가는 길은 학살의 피로 물들었으며, 그 숫자는 실로 엄청났다.
나주부대(인솔자 김형동 경위)는 완도 도착과 동시에 완도중학교에 인민군을 환영나온 수십 명을 처형했다. 그러나 베일에 가렸던 진실은 '93년도에 유족 진정에 따른 완도경찰서 자체 조사결과 일부 시인 되었다. 또 사안, 횡간, 신지, 노하, 청산, 보길도에서도 나주부대의 학살은 생생하게 증언되고 있다. 이 지역 섬마을의 제삿날이 동일하다. 다시 말해 나주부대의 기동로는 학살경로였다.
*최인섭(완도군 노화면 새넙도 거주)의 증언이다.
음력 7월 7일 낮 12시, 하얀 운반선이 새넙도에 들어왔다. 당시는 전쟁중이라 마을 주민들은 모두 산으로 도망쳤다. 이에 나주부대로 알려진 이들이 총질을 해댔고 , 대밭 속을 찾아다니며 주민을 찾아냈다. 빨리 산에서 안나오면 가족을 모두 몰살시키겠다고 목소리를 높혀 주민들이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경찰은 주민들은 선착순에 집결시키고 한명 한명 호촐하면 마을 주민 김모씨의손가락질이 시작 되었다.
이중 9명을 새기줄로 묶어 끄집어냈다.경찰은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두둘겨 팬 다음 끌고가서 동네 옆산 숲에서 총살시켯다. 아버지와 형님이 죽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인원이 수없이 많으며 선착장 앞바다는 피범벅이었다. 운반선이 더날 때 동네사람들이 돼지를 잡아 운반선에 올렸다고 한다.
*영암 금정면 차네동 학살
목포 유달부대와 목포 해병대(대대장 박종옥)가 '50.12. 18일 빨치산 토벌을 위해 차네동으로 진격중에 마을 어귀에 매복해 있던 빨치산에 기습을 받아 3명이 전사한다. 교전이후에 빨치산은 모두 마을을 빠져나가고 마을 앞산에 진지를 구축한 토벌대들이 3일 동안 대치를 하다 18일 학살을 자행했다.
'50.12. 18일 오전 9시부터 바격포로 동네를 강타하고 집밖으로 모두 나오라하고 안나오면 무도 죽이겠다고 위협에 주민들이 나오면 불을 질렀다.
그러나 집에서 나오지않은 김옥룡씨 일가족 5인이 모두 불타 죽고, 임신을 햇던 김남수의 처는 아들과 손을 잡고 문턱을 넘다 토벌대의 총을 맞고 죽었다.
또한 산에 올라간 사람들도 4명만이 살아 돌아왔고 이후 죽은 시체들은 빨치산들이 수습해 한구덩이에 묻었고 마을 사람들은 빨치산을 따라 화순 능주의 국사봉 중턱까지 피난 갔다.
*김순덕(유족, 일가 7명 몰살)의 증언이다.
토벌대들이 죽지않으려면 마을 앞으로 모이라해서 신작로에 엎드려 있는데 무조건 학살했다. 토벌대들이 마을 어귀에 모인 사람을 향해 '너희들이 빨갱이를 키워 우리 동료가 죽었다'며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게 한 뒤 모두 학살했다.
*백형기의 증언이다.
당시 화순 능주의 국사봉에는 동서남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군경의 토벌작전으로 이들 대부분이 학살 됐다. 차네동 마을은 10여 호가 남아 있으며 11월 9일(음력) 동네 모듬제사를 모시고 있다.
*나주 세지면 동창교 학살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제2대대 5중대(중대장 권준옥)가 '50. 12. 6일부터 '51.1.14일까지 함평군 월야,해보,나산면의 빨치산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양민 525명을 집단 학살하였다. 그 후 이 부대는 '51. 1. 20일 영산포를 경유하여 세지면 쪽으로 진군해왓다. 당시 나주에 피난해 있던 세지면장을 비롯 기관단체장들을 불러 세지면을 수복하러ㅜ 간다며 면장, 구국연맹원,청년단,유지,경찰 4명과 세지에 들어가 140여 명을 학살했다.
마을에 도착한 토벌군은 주민들을 동창교 위쪽 자갈밭으로 모이게 하고 주민들은 국군이 들어온다며 환영하러 면사무소 앞으로 모여 들었다.
제5중대는 주민이 모이자 '군경가족은 나오라'고 외치고 청장년 140여 명을 한 곳에 모이게 했다. 그러더니 만봉천 북편 나시 집 뒤 보리밭으로 이들을 끌고 가는데 대열에서 백모시가 도망치려하자 중대장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살해 당하자 대열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대장이 "놈들은 공산 도배들이니 전부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리니 불과 5분만 100여 명이 죽고 확인사살까지 하고 다녔으며, 동창 ,섬말 주변 야산에서 작업을하던 농부 40여 명도 사살했다.
죽은이들은 보름간이나 가마니에 덮어씌워져 있다가 유가족들이 이장했으며 학살을 자행한 부대는 다시 민가로 들어와 소와 돼지, 가구를 닥치는 대로 약탈해 갔다.
*염기열(시국수습 주동체인 구국총력연맹 소곡 총무부장)의 증언이다
본인은 그 당시에 우익인사 약간명과 영산포에 구국연맹을 만들어 거처하였다. '51. 1. 20일 오전 9시 조금 넘어 나주 경찰서 직원 강성은이란 사람이 세지에 진주하니 함께 가자고 권유해 군인 150명의 뒤를 따라 갔다.
동네에 들어서니 군인들이 집집마다 호별 방문하여 주민을모은 뒤 2열 종대로 약 12명씩 서서 M1총으로 쏴버렸다.(중략)점심을 위해 구국 총연맹은 장준성씨 집에서 소 1마리와 돼지 3마리를 잡았다. 학살 동기는 영암군 금정면 국사봉에 인민군 빨치산 부대가 주둔하였고 그 부대를 상대로 전투하여 전과를 올린 것으로 보고한 것 같다.
"6.25전쟁은 원래 '50.5.25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별 이상한이야기도 다 듣는다. 전국울 19년 6개월 돌았으니 참 많이도 돌았다. 그런데 생뚱맞은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로 끝내버리기에는 좀 아쉬운 이야기다.
내가 삼학리에서 발굴을 통제하다 도대체 염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염전을 가보게 되었다. 멀지않은 곳 바닷가가 이곳은 다 염전이다. 차를 달려 염전 입구에 갔는데 4거리에 동네 분들이 나와서 소주한잔이다. 그래서 차를 세우고 혹시나 모르기 때문에 전쟁이 없었는지 물어보았다.
"저기 5분간 더 가면 엄청 많은 인원이 묻혀있소. 그거 북한군이요."
"어떻게 여기에 묻혀 있게 되었는지 혹시 아시면 좀 알려주시지요."
동네분들이 들려준 비하인드는 이렇다.
"전쟁전 5월 25일 새벽염산면 학산리는 잠들어 있었다"
염산면은 곤하게 잠에 취해 있었다. 이 시간에 무동력선을 타고 모선에서 분리된 배 한척이 해안가에 다았다. 이미 이전부터 여수.순천 반란사건 때부터 반란군을 잡으려 동네마다 방공호가 굴토되고 지서에는 청방까지 합세하여 순찰을 돌고 있는 상항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해변가에 아무런 제재없이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출한다. 마침 동네 형제가 일찍 바다로 고기잡이를 하러 나갔다가 동네에서 보지못한 배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 이게 뭐지. 누구 배인데 여기다 대놓았어."고개를 갸우뚱한 형제는 아무래도 이상해서 동네 청방대장을 찾았다. "대장님 지금도 주무십니까?"
"누구쇼. 벌써 일어나 나도 논에 좀 나갈려고 그러요." 하면서 문을 연다. "아니 바닷가에 가니 좀 이상한배가 들어와 있어요. 한번도 보지않은 배요."그러자 대장은 바로 전화기를들었다.
"드르륵 드르륵, 나 오대장이요, 우리 해변가에 요상한 배가 정박해있다는데 아쇼?"
그 시간에 이 배에 타고 온 인원들은 무사히 배에서 내렸다. 그러나 발길이 멈췄다. 나중에 포로가 된 한명이 말하길 북에서 교육받기를 배가 도착하면 동네에서 인공기들고 주민들이 맞이한다고 햇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나오지않으니 뭐가 이상한 것이다. 전화를 받은 청방대와 지역 경찰은 즉시에 비싱망을 가동하여 바닷가에서 면으로 오는 길목에 매복을 들어가려 병력 이동이 시작 된다. 북한군 특공대도 움직여 거의 같은 시간에 면소재지 입구까지 진출했다. 벌써 농부들이 하나 둘 나와 논.밭에는 일을 하고 있다.
"동무 누구요?" 지나가는 한 농부에게 질문을 던졌다. 알아주지 않으니 말이다.
"핫다, 어디서 왔는지 동무라 한데요?" 이 순간 저 멀리에 스리쿼터 가 진입하는 모습이 보인다. 북한군 들은 졸지에 달려들어 이 농부를 돌로 쳐 죽이고 논으로 시체를 밀어 넣어버렸다. 모두 분리되어 다가서는 차량을 에워쌌다.
"너희들 누구냐?"
하지만 이미 탈로간 그들이 답할 일 없다. 순식간에 육박전이 벌어졌다. 웃기는 것은 이놈들만 총이 없는게 아니고 우리도 몽둥이와 삼지창으로 대결이다. 한참을 대결을 벌여 숫자가 우세한 우리가 이겼다. 한놈을 포로로 잡고 10여 명을 죽였다. 아군은 2명이 운명을 달리했다.
"우리는 북에서 내려올 때에 오늘 뭍에 상륙하면 남한은 봉기가 일어나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고 했는데 웬 몽둥이와 삼지창(쇠스랑)이 날아와 깜짝 놀랐소"
포로가 된 인원의 심문내용이다. 그런데 이 놈을 어디로 보내야 하는데 동네에서 경찰이 미적거린다. 한 청방이 빨리 보고하고 처리하시지 뭐 합니까라고 묻자 그때서야 경찰은 차에 실고 지서로 갔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느지 모른다.
"상계리 돌팍재에 묻힌 북한군?"
동네에서는 이들을 단가에 담아 들고 상계리 길 옆에 갔다 버렸다(?)
무장한 것은 없는데 어떤 놈들일까? 지금 판단하며 사전에 교육받은 내무서원이나 기관의 장을 할 인원들이 들어왔다고 판단된다.
우리가 동네분의 안내를 받아 버려진 그 위치로 갔다. 돌팍재에 도착하니 우측으로 들어가 바로 입구에 임금님 묘처럼 큰 무덤이 허물지고 있다.
"바로 이곳이요" 동네 분의 답변이다. 원래 묻히지 않고 있었는데 나중에 북한군이 들어와 동네에서 부역으로 나가 잘 묻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북한군의 묘이니 우리야 발굴 대상이 아니라고 말없이 물러나 해안가 염전에 가서 처음으로 염전을 봤다.
사장님이 마침 있었는데 나이 90이 다 되어간다는데 자가용을 끌고 다녔다. 차가 외제인데 대한민국에 2대밖에 없다고 한다.('07) 사장님은 이곳 사람이었다. 며느리가 유치원을 운영하는데 이 유치원도 사장이 많은 돈을 들여 이 일대에서는 가장 우아하게 지었다.
"사장님 혹시 상계리에 있는 왕무덤같은 곳에 묻혀 있는 대상이 누군지 아세요?"
"잘은 모르오. 다만 그것이 전쟁 전에 5월 25일 발생한 사건에서 죽아간 사람들인데 자세한 것은 나보다 상계리 사람이 잘 알터이니 거기가서 알아보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역시 사업가라 교과서 같은 답변으로 잘 피해 가셨다." 좌우익의 세대결이었다는 말을 하기곤란했던 것이다.
우리는 발굴 대상이 아니기에 지나쳤는데 어느날 삼학리 유해발굴이 방송에 나가던 날 밤에 어떻게 나의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 나는 영광 염산 사람인데 혹시 상계리 유해자리 가보셨나요?"
"네 가보았지만 국군이나 경찰이 아니라 돌아왔습니다."
"그러세요. 그거 함부로 건들면 안됩니다."
나는 혹시 그 사건, 아니 전투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느냐고 물었다. 본인은 골치아픈 건이라고만 말하고 잘모른단다. 어떤 제보나 증언자가 나타나더라고 함부로 파지 말라는 부탁을 하고 끝었다. 참 요상한 전화도 다 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나 내가 다시 불갑산 위패현황을 점검하는 과정에 영광에 갈 기히가 잇어 가보았더니 언제인지는 몰라도 묘가 잘 단장되고 이벽용 돌을 화강암으로 해서 멋지게 묘역을 꾸며 놓았다. 도대체 귀신이 하는 일인지 아니면~~. 더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이상의 사례에서 나는 국군이나 경찰이 저지른 만행은 빨치산이나 인민군이 저지른 것과 다르바 없었다는 것과 그토록 많은 공비토벌 전과의 숫자에 허구성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나는 지난 '09년 10월부터 '17년2월까지 그 수많은 기간을 전국의 전쟁터는 다 내발로 걸어보았고 웬만한 민간인 피해지역도 비공식으로 찾아보았다.
현재 불갑산의 그 많은 위패들의 진실여부가 바로 이 양민학살과 관련이 있다면 문제일까~!
위패를 만들 때에 전투현장이 아니였다. 전후에 신고등 여러 정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나. 정읍-목포 전투
1)양측의 상황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19일 승세를 몰아 공격방향을 전주와 광주에 이르는 양개 국도를연해 지향하였다. 북한군은 금강을 도하하여 경찰만이 배치된 진지를 공격해 왔으므로 이를 감당하지못한 경찰 혼성부대가 접적만을 유지하였을 뿐이엿다. 또한 아군 항공기는 기상 악화로 출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7월 20일 북한군이 전주에 진입하고 서해사와 민부대, 기병중대도 남원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서해사 사령관인 신태영 장군과 제7사단장인 원용덕 장군이 대구로 육군본부의 지원을 논의하러 떠나고 민대령이 낙오병과 편성중인 제30연대 병력을 통제하여 600여 명을 편성하였으며 무기는 겨우 경기관총 4정, 박격포 7문, 소총탄은 거의 고갈된 상태였다.
2)상급부대 조치
대구의 정일권 총참모장과 국방장관은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대구에 예비로 보유한 김병화 부대(소대 규모)를 긴급 투입하였다. 또한 전남지구 편성관구사령관과 경남지구 편성관구사령관에게 병력의 일부르르남원에 투입토록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남원에 투입된 김병화 부대는 민부대의 통제를 받게 되는데 신소장과 민대령의 알력관계는 계속 되고 있었다.
이 후 육군본부에서 급파한1개 대대규모의 병력은 김용기 중령의 지휘로 남원에 이르러 민부대를 지원하고 7월 20일 전남 편성관구 사령관 이응준 소장은 순천에 배치된 제5연대장 김병휘 중령에게 지시하게 되고 당시에 부대에 있던 부연대장 이영규 중령이 명령을 수령하여 병력 300명을 데리고 남원으로 북진하게 된다.
한편 제30연대장 김용주 중령은 남원에서 1,500명의 신병을 모아 훈련에 주력하고 있었다. 당시 연대는 제3.9.15.26 4개 연대가 제1~제4교육대로 개칭되는 조치에서 벗어나 원래의 명칭를 그대로 사용하엿고 후방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에 따라 21일 남원을 떠나 도보로 구례-진주를 경유 28일에 구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3)부안~신태인 전황
'50.7.22일 피아간에 소규모 탐색전만 계속 되는 가운데 해병 1개 대대가 여수에 상륙, 다시 북상하여 민부대를 지원 하였다. 민부대는 해병대와 부산에서 지원된 오덕준 부대를 통합하여 지휘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에 맞설 전투력은 갖지 못해 거의 무방비로 북한군의 진출이 이루어 지고있었으며 겨우 비통제된 경찰이 그나마 접촉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이때 여수에 상륙한 고길훈부대는 해군의 명령을 기다리고, 남원역에서 승차한 채로 밤을 새운 이영규부대는 민부대로부터 상황을 듣고 22일 열차편으로 임실 북쪽까지 북상하였다. 임실에서 하차하여 용운치일대를 점령하고 있었다.
고길훈 부대는 군산에서 20일 해상철수하여 목포에 입항하여 제3중대를 인수하였다. 21일 목포를 떠나 22일 08:00에 여수항에 입항한 후에 제주도에서 들어온 김성은 중령(제천호FS)이 당일 여수항에 입항하여 고길훈 부대를 접수하여 김성은 부대로 개칭하였다. 이때 해군에서는 부산에서 영등포호호 M1소총과 박격포, 탄약 등을 보내 무장하게 한다. 7월 23일 김성은 부대, 오덕준 부대가 남원에 합류하여 민부대의 통제를 받고 이때부터 미 8군도 민부대 상황을 인지하게 된다.
3-1) 잊어서는 안되는 사건들
익산역 폭격사건('50.7.11~20) : 구이리역 부근에 미 공군이 폭격하여 350여 명 인명피해 발생
전쟁초기 북한의 진출을 지연하고자 미군이 공중폭격을 감행하는데 천안을 잘못 알고 구이리역을 '50.7.11일 오후 2시 40분경 강타하여 200여명이 죽고 100여 명이 부상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기관차사무소에 전시비상상황 교육을 받고 있던 기관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민간임을 알렸지만 이리력, 송학동 민가, 평화동 호남선철길과 변전소 사이를 10분간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이리역 근무자 84명이 사망하고 송학동 가옥 50채 전소 하면서 일대에서 그 수는 35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그 후에도 7.15일에 걸쳐 이리역 철길 주변 마을에 미군기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는데 북한군은 이 시간은 수원에 이르렀고 이리에는 20일에 진입했다.
피해자 유족들의 증언이다.
1.목격자 이덕구
난 그당시 17세고 형은 23세였는데 우린 그날 논에서 일을 하는데 비행기가 두바퀴 돌더니 철길과 변전소에 폭탄을 부었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논이고 도로로 솓아져 나오고 이때 군에 입대하려는 젊은이들이 이리역쪽으로 가는 모습을 봤는데 많은 피해를 받았을 것이다.
2.유족 남편 희생된 강순애
워낙 시신이 많아 형체를 알 수 없어서 찾지 못했다. 결국 사흘 뒤에 스테인레스 반지를 끼고 까맣게 그을려 쓰러져 있는 남편을 확인했을 땐 미군이 밉고 무척 원망스러웠다.
3.부모 희생 유족 이창근
어머니 시신을 찾지 못해 당시에 시에서 일괄 처리해 공동묘지에 한꺼번에 매장했다는데 위치도 잘 모른다.
전주형무소 피해('50.6.26~7.20) : 1950. 6. 말부터 북한군이 전주 점령이전에 퇴각하는 군경이 전주형무소에 있던 좌익사상범등 1천 400여 명을 4차례에 걸쳐 사살했다는 내용이다.
군경은 '50. 6. 26일부터 3년이상 복역중인 좌익사범을 사살하게 되는데 전주 인근 항방산 골짜기와 건지산,솔개재 등 4곳에 죽였으며 일부 사살 현장에는 미군이 입회한 것으로 기록됐다. 이는 당시 형무관으로 재직한 인원들의 확인 됐고 이들의 증언으로 황방산 일대에서는 유골이 일부 발굴도 되었다.
또 6월 28일에는 국군 제3사단 헌병대가 서대문 형무소에복역중이던 좌익사상범 158명을 데리고 와서 낮시간에 재소자들이 파놓은 고랑에 들어가 모두 죽었다.
최학봉 형무소장은 처음에는 재소자들을 내어주지 않으려 했으나 군경이 강요하여 넘겨주었고 황방산 일대에 400여 명이 묻혔는데 이곳은 마지막 죽은 인원이다.
이러한 군경의 사살에 북한군 역시 보복으로 퇴각하면서 9월말경 전주 지역 유지등 민간인 400여 명을 학살하고 떠났다.
정읍 산내면 종성리 피해 ('51. 2. 20) : 국군 제11사단 13연대 제1대대가 회문산지역 토벌작전시 지역주민 60여 명 사살했다.
'51.2.20일에 마을에 들어온 군인들이 전 가옥에 불을 지르고 14세 미만과 노약자는 집으로 보내고 14세 이상 50세 이하 남녀는 30분 간격으로 사살하고 군에 부역으로 나갔던 인원마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사살했다.
고창 해리면 신동호 피해('50.12. 22) :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2대대 6중대에서 피난나온 사람 50여 명을 사살했다.
'50. 12. 22일 오전 11시에 군경이 마을로 들어와 피난 나온 마을 주민을 소금창고에 가두었다. 다음날 새벽 1시경에 차례로 끌어내서 해수래 성교에 1줄씩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쏘았다. 썰물에 시신이 떠내려 갔으며 왕촌리 1,2,3구에서 확인한 주검만 13명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곳 골프장이 염전에 세워진 바닷가 근처에 해송 숲이 있는 부근에 호미로 모레를 긁어도 유해가 나오는 곳인데 북한군이 북에서 온 피난민을 반동분자라 죽인 곳이다.
북한군 점령 당시 감찰부장(직접 2회 증언청취)을 역임했으나 해코지를 않해서 손가락질을 안받아 살아난 인원이 현장 증언을 해 주었는데 이 사람들은 피난민인데 해방 당시에 북에서 자유를 찾아내려와 당시 삼양염전에서 먹고 살고있다 북한군이 진입하여 반동분자라 하여 모두 총살했다는 사실은 과거사 조 사위원들도 들었던 내용인데 이런 것은 슬며시(?) 제외 되었다. 그 수만도 엄청나다 한다.
고창 해리면 구동호 피해('50.12.22) :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2대대 6중대에서 지역 야산에 피신해 있는 지역주민 50여 명 사살한 내용이다.
'50. 12. 2일 오전 11시경 군경이 마을에 들어와 움직이는 피난민 10여 명을 사살하고 마을 뒷산 굴에 피난 가 있는 사람들을 나오면 살려주겠다고 유인하여 37명을 오후 5시경 선창가에 세워놓고 사살했다.
고창 심원면 피해('50. 12. 22) :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2대대 6중대가 어디서 많은 피난민을 몰고 마을에 들어와 300여 명이 사살됐으며 대부분 바닷물에 쓸려갔다
군경이 수미상의 피난민을 몰고 마을로 들어왔다. 군경은 마을 뒤 개명산 입구에서 피난 와 있던 타지역 주민 50여 명을 사살하고 외죽도와 독우녀 섬으로 피난 가 있던 주민들을 추적하여 독우녀 섬으로 간 인원은 사살 되었다.
고창 고음면 피해('50. 1. 5) :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2대대 6중대가 피난민과 지역주민 590여 명을 사살했다.
당시 공음면은 미수복지구로 빨치산이 활동하고 있었다. 부대는 공음면 선동리 마을에서 피닌민과 지역주민 500여 명을붙잡아 선인봉 아래 옥산저수지 앞 밭에 모아놓고 중기관총으로 사살 했다. 1차 학살에서 살아남은 인원을 다시ㅡ마을 앞 느티나무에다 5명씩 세워놓고 다시 사살했다. 연고가 있는 유해는 수습되었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는 유해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안장했다.
고창 상하면 택동마을 피해('51. 3. 13) : 국군 제111사단 제20연대 3대대 8중대, 경찰이 지역 주민 50~100명 사살한 내용이다.
군경이 마을에 들어와서 피난가지 못하고 있던 어린이, 노약자, 부녀자들을 모으고 다른 곳에서 피난 온 주민을 합쳐 마을 앞 논으로 끌고 났으나 이미 논에 많은 수가 죽어 있어 마을 입구 여산으로 집결하여 사살하는데 어린이나 노인은 칼로 죽이기도 했다 한다.
고창 무장면 피해('51. 5. 10) : 제18전투경찰이 공산당이 있다는 마을을 급습하여 100여 명 사살한 사건으로 원한과 좌우익 대결의 결과다.
이 사건은 마을간 헤게모니 싸움이 화를 자초한 결과인데 전쟁 발발 직전 용전마을 사람들이 인접 죽림마을 천씨들이 공산당을 조직한다고 경찰에 밀고하여 천씨들이 경찰에 잡혀가 고초를 당했다. 그러자 전쟁이 나고 '50. 9. 20일 밤 천씨들이 용전마을을 습격하여 50여명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용전마을 김씨 일가 중 김용식이 '51. 5.10일에 전투경찰을 끌고 와서 죽림마을을 에워싸고 100여 명을 죽였다.
순창 쌍치면 피해('50. 8.1~'53. 7. 5 : 국군 제11사단, 제8사단, 수도사단, 경찰이 참여한 사건으로 쌍치면은 산간오지의 미수복 지역으로 복흥 하리 바로 위에 있다.북한군 잔당과 빨치산이은거하고있던 지역으로 공비토벌 작전이 진행되어 확인된 희생자만 206명이다.
'51. 10월부터 본격적인 작전이 개시되어 쌍치면 일대의 마을이 군경에 피해를 입게 되는데 전쟁 발발시 1만 2천여 주민이 4천명만 남았고 가옥 소실도 1천여 호 이상이다.
임실 덕치면 피해('50.12.14) : 국군 제11사단 제13연대가 암치마을의 가옥과 축사를 소각하고 지역주민 100여 명이 사살되며, 순창 경찰도 피난민을 실고 와 50여 명을 사살했다.
암치 마을앞 당산나무 밑에서 40여명, 구담리 인게면 면사무소 교회 논에서, 511고지에서 군인이 내려와 50명을 사살 하였다.
임실 청웅면 폐광 피해('51. 3. 15일) : 국군 11사단 제13연대 2대대에서 마을 가옥이 불타 폐광 속에 들어가 생활하고 있던 피난민들을 폐광 입구에 고추대와 소나무 가지로 3일간 불을 질러 질식사 시켰다.
남원 주천면 고기리 피해('49.12월경) : 국군제12연대가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시기에 '49. 11. 24일 여수.순천 반란 사건의 잔당들을 소탕하는 과정에 전맘 구례군 산동면으로 이동하는 고정에서 14대이 차량에 분승한 대규모 병력이 반군의 매복에 걸려 산동면 송평마을 어귀에서 몰살당하고 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그 책임을 통감하여 자결한다.
이 작전이 빌미가 되어 고기리 마을 학살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작전 13일 후 제12연대가 고기리 마을을 급습하여 주민을 모이게 한뒤에 마을청년 35명을 통비로 몰아 그중 26명을 사살했다. 또 한국전쟁 당시에도 마을청년과 부녀자를 사살했다.
남원 대강면 강석마을 피해('50. 11. 7일) : 국군 제11사단 예하 1개 대대 병력(일부 증언은 205경찰)이 공비와 내통한 이유로 90여 명 사살
부대는 남원주둔 1개 대대병력이 기러기재를 넘어 강삭마을을 점령하여 주민 500명을 마을 앞에 집합시켜 성분조사, 통비분자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일본도와 M1 소총 등으로 90명 사살했다.
군은 군인이 부족하니 부대에 입대하라고 선전하여 남자들을 유인하여 나오게 한 후에 뒷산으로 데려가 총살하고 부녀자 7명을 마을회관 뒤 으슥한 숲 속에서 대검으로 죽이고 19명은 마을회관 앞으로 데려가 수건으로 눈을 가려 일본도로 목을 쳐 죽였다.
4)정읍~장성의 전황
북한군 제6사단 예하 제15연대는 7월 20일 김제를 점령한 후 고부-고창-광주 방면으로 공격 기도하고 있었다. 정읍 일대의 아군은 7워루 19일 김제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정읍으로 물러난 해병 제3중대(군산으로 이동 고길훈 부대 합류)와 배동걸 특공대, 전남경찰 1개 중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군은 통제력도 없고 탄약도 없고 실제 전투력이 미미했다. 또한 전남경찰은 원대복귀했다. 여기에 전날 19일 전남지역에서 신편된 제5사단 예하 제15, 제26연대가 무장할 방법이 없자 양 연대를 교육대로 전환시켰다. 15연대를 제5교육대, 26연대를 제3교육대로 광주지역에서 1,000여 명을 모집하여 3개 대대로 편성했으나 무기라고는 경찰로부터 입수한 99식 소총 10정과 광주병원(제3육군병원)에 입원중인 환자가 휴대하던 M1소총 몇 정이 전부였다. 대대는 10% 정도만이 소총을 소지한 실정이였다.
사실 아군은 정읍 북쪽 말고개, 장성 갈재(전남경찰도 참여)에서 일시적 전투를 했으나 사실 전투다운 전투를 한 것이 아니고 바로 물러났으며 경찰 1개 소대 병력은 영광 북쪽 11KM 용대리로 침투한 적을 격멸하러 갔지만 북한군 제15연대의 증원으로 실패하고 유격전을 위해 불갑산으로 들어간다.
"갈재에 남아 있는 개인호"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전남북 지역에 정규전이 있었다는 전사는 그렇게 흔치않았다. 겨우 건재없는 개인부대(민부대, 오부대, 김부대, 이부대 등)와 지역경찰이 겨우 접촉을 유지하는 정도로 인식 되었다.
하지만 강경경찰서 67명의 전원 전사와 고길훈 해병대의 서천에서부터 군산항에서 철수까지의 축차적인 소규모 전투가 빛을 보면서 영광 삼학리에서 전남경찰 연합군이 이틀에 걸쳐 삼학지서를 거점으로 불갑산 일대에서 전투를 하여 우리가 38구의 유해를 찾아 내면서 정상적인 탐문과 탐사가 이루어졌다.
사실 이전가지의 인식은 전남북 지역은 공비토벌과 빨치산의 소굴(지리산일대)이라는 그리고 여수.순천 반란사간의 좋지못한 전례만 뇌리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경부선을 따라 내려가는 유엔군과 그 좌측의 한국군이 북한군의 주력을 유인하여 시간을 끌고 여기에 전투력을 집중했다면 금강이남의 충남과 전남북지역은 총도 제대로 없는 예비전력(지역단위 모집, 도는 일부 징집된 현역)과 지역경찰이 부산의 서측방으로 기동하는 북한의 제6사단의 질주를 막아내는 브레이크 역활을 하여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 되고 미 제25사단의 낙동강 돌출부로 이동과 미 제24사단의 하동-안의-합천-김천 방어선이 형성되는 시간을 확보했다는 면에서 매우 그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갈재에 올라서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단 한구의 국군이라도 더 찾기위해 아무리 소규모 전투지역이라도 탐사 및 탐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다. 여기 갈재는 이미 나는 포병학교 시절에 등산을 좋아하는 학교장이신 조장군님을 따라 2번에 걸쳐 산행을 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소나무숲과 탁 트인 전망이 좋아서 걸었으며 종종 있는 개인호를 보고 공비토벌 작전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이곳이 6.25초기전투시 밀려내려가는 서해사령부 예하의 소규모 통제된 부대들이 북한군과 격전을 치뤘던 곳이였다. 여기는 지금의 호남터널 위부터 동쪽으로 이동하면 입암산에 백양사 뒷산 백암산-백양사, 순창군 봉덕리 위 순창새재-까치봉-내장산-내장사가 나오는 산행의 요지며 역사가 숨쉬는 곳이다. 바로 장성에서 순창-남원으로 측방기동하며 전투를 한 곳이다.
그러나 우리가 탐사한 갈재지역은 그리 많은 개인호나 교통호가 없다. 일부 있긴 했지만 생각외로 적었다. 그렇다면 공비토벌 작전시에도 주요 목인데 어디서 싸웠을까?
"순창새재에 대규모 개인호가 있다."
나는 현장에서 발굴하는 팀을 찾아 KTX로 정읍에 갔다. 팀장을 기다리는 동안 어느 한분이 자건거를 타고 역전앞을 지나고 계시는데 내가 보기에 뭔가 느낌이 온다.
"어르신, 혹시 정읍이 고향이신가요?'
"뭣 때문에 물으쇼, 내가 80토백이요."
"예, 혹시 용화사 절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지요?"
이렇게해서 이야기가 시작 되었다. 사실 나는 계룡대에 근무시절 이 용화사에 와서 원주스님과 무려 3시간이상 그분의 수도고지전투 용맹담을 카메라에 담고 기록한 적이 있다. 그러다 점심 시간이 되어 내장산 입구 산채비빔밥 집에서 식사를 얻어먹었던 생생한 기억이 잇다. 이 내용은 차후 수도고지편에서 언급하련다.
"용화사는 왜 찾으쇼. 그 절 큰 스님 얼마전에 죽었는데."
"네? 큰 스님이 입적하셨습니까? 그럼 지금 절은 누가?"
"그 아들이 이어서 하는데 뭐 스님이 자식을 낳고~~. 그런데 어떻게 큰 스님을 알았습니가?'
"제가 사실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을 통제하는 군인입니다. 스님이 참전용사였거든요."
"그래요? 그럼 왜 저기 순창재는 발굴안한대요? 사람이 널너리 죽어 발을 내딛지도 못했는데"
"그렇습니까. 그럼 저희와 함께 한번 그 곳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우린 이곳 발굴 팀장인 박상사의 차량으로 순창군 복흥면 봉덕리로 이동하여 계곡을 따라 순창재를 올랐다.
"혹시 올해 연세가 얼마나 되시는지요?"
"전쟁 때에 15살이요. 그러니 지금 8학년1반이요. 우리 부모가 공비에 살해 당해 나도 의경으로 갔다 왔는데 참전용사로 인정을 안해줘요. 인후보증을 서오라 하는데 그 당시에 함께 했던 사람은 죽었는데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니 이제 몸도 아파오고 참 한숨만 나옵니다."
"참전용사시네. 그게 행정의 오만함이거든요. 벌써 70년이 다 지나가는데 뭐루 어떻게 증명해요. 증명은 의자에 앉아있는 본인들이 정황을 참작하여 판단해야지. 그걸 들어보면 몰라~. 저나를 모르니 그러는거야. 전사에 해박하면 들어보면 거짓인지 아닌지 느낌이 와요."
"그럼요. 그런데 벌써 지역 재향군인회에서도 힘써준다고 기다리라더니 10년이 넘어갑니다."
"의경이라는 것이 실제 경찰신분은 아니고 경찰을 따라다니며 잡역을 도와주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총을 들고 공비를 토벌하기도 하고 그런거지요?"
"맞아요. 일부는 또 어떻게 선발이 되었어요. 그런데 부모가 죽고 형이 붙들려가 행방불명된 나는 원수를 갚으려 경찰을 따라다녔는데 이 순창재에 골백번도 올랐어요."
"여기요. 여기 호속에 시체가 있었어요. 공비인지, 민간인지는 몰라요?"
"그럼 이곳에서는 경찰이나 군인은 죽지않았습니까?"
"무슨 말씀이어요. 경찰, 말이 경찰이지 우리 총도 99식 소총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요. 10에 3명만 있어요. 그러니 우허니 몰려갔다가 대부분 도망치는게 다반사요. 그러니 붙들려 그놈들이 나무에 빨가벳겨서 나무에 묶어놔요. 군인도 어쩌다 그놈들이 붙잡아가지고 눈알도 뽑아버리고 반동자 처단한다며 대창으로 찔러죽여요. 총알값이 아깝다고 말이요. 소리나면 군경이 쫒아오니 무성무기로 죽여버려서 개인호에 밀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어르신도 공비를 죽여봤습니까?"
"그럼요, 안죽이면 내가 죽는데 그냥 쏴버려요. 처음에야 좀 머뭇거리지만~~!"
"어르신이 본 것중 가장 비참하다할까, 이건 너무하더라는 것이 있다면은?"
"지금 이곳이 관광지인데 사실은 사람죽이는 산골이요!"
순창새재, 장성새재, 까치봉은 그 당시에 사람들이 넘나드는 중요한 고개였다. 6.25당시에는 피난민이 꽉 들어차 있어 골짜기나 능선에는 움막을 치고 피난민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한다.
문제는 이 피난민들이 외지에서 온 사람(일가친척들)도 있고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불갑산 골짜기와 같은 모습이었다.
"밤손님, 낮손님"
그런데 이속에 소위 게릴라가 변복으로 숨어들어와 있다가 밤이면 "밤손님"되어 마을로 내려와 먹을 것을 돌려 가 버린다. 만약 제대로 안따라주면 소리없이 반동분자라며 죽여 버린다. 국군과 경찰은 낮에 들어와 밤에 있었던 일을 확인하고 또한 "낮손님"처럼 있는 것을 다 돌려간다. 그러니 결국 불쌍한 주민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살벌한 세상이었다.
이것 순창새재는 발을 디딜 틈도 없이 움막이 처져 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많은사람들이 올라와 있는데 사실 국군의 편보다는 빨치산의 편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억압과 가난에 찌들려 살았던 민중들이 해방을 많이 하여 뭔가 달라지나했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고 그때 그 경찰놈이 다시 경찰이 되고 일부는 군에 들어가 군인이 되고 지주들은 결탁하여 이익을 챙기기바쁘다 보니 자생적으로 내부에 민중해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이것을 이용하여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버젖이 인공기를 걸기도 하고 일정한 장소에 모여 교육도 받고 김일성장군가를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군경은 아직 걸음마 단계의 창설 냄새가 나고 신분들이 대부분 일제시대 경찰이나 군인들이 다시 높은 지위에 앉고 배우지 못한 인원들이 배고파서 들어와 일원이 되는 말이 광복이였지 생활고와 36년간의 착취경제에 모든 제대로 된 공업도시 하나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결국 북한지역은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위한 중화학공장 지대를 만들고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우리보다 10배나 잘사는 실정이니 자연 민심이 흉융하여 쉽게 저들의 선전선동에 녹아들어 산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르신이 가리킨 호를 탐지기로 스캔해보니 탐지음이 경쾌하게 울렸다. 주변에 많은 호들이 그런 상황이다.
"어르신이 혹시 이 일대에서 군인이나 경찰이 죽어있는 모습을 본적이 없습니까?"
"많이는 없고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다 발각되어 죽은 군인이 3~5명 되고 경찰도 몇명은 있지요."
"군인이 어떻게 민간인 복장으로 숨어 있다 걸리나요?"
"국군이 밀려 내려가는데 본대는 가버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동네에 숨어들어 옷을 갈아입고 골방이나 외양간 등에 꼭꼭 숨어 있다가 결국 밀고 되어 잡히게 됩니다. 경찰이나 청방출신들도 산속에 숨어 활동하다 결국 대부분 잡히어 공개 처형 됩니다."
"눈알빼고 가라하니 보여야 가지, 결국 옆에 파놓은 구덩이에 빠지면 몇 삽 올리고 만다."
산속 집단수용소는 수시로 인민재판이 벌어져 보란듯이 망치를 들어 뒤통수를 쳐서 눈알을 빼버리고, 어떤 사람은 불알을 발라버리고, 여자인데 홀딱 벗겨놓고 여기저기 찌르다 죽이고, 발목을 자르기도 하고, 손을 잘라 버리기도 하고, 이미 옆에는 구덩이가 파있어 그곳에 집어넣고 생매장 해버리고, 잘린 목을 달아서 산 중턱에 매달아 놓기도 하고, 눈알을 나무꼬챙이에 끼워서 움막 한가운데에 보란듯이 세워놓는다고 한다. 저기 영광 함평일대에서 군경이 민간을 상대로 저지른 것과 전혀 다름이 없다. 하기야 같은 일본의 악정을 경험한 민족이니 같은 악행을 배웠으니 그대로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밤이고 낮이고 한곳에서는 첩자를 찾는다는 미명하에 유부녀도 관계없이 여자라면 데려다 겁탈하고~
우리는 혹시나 모를 이 한두명의 경찰이나 군인, 청방등을 찾기위해 이곳에 대한 발굴작전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결국 내장산 주요 고지군을연결하는 능선을 발굴하기로ㅜ하고 개인호 실태를 조사해 보니 신선봉에서 까치봉사이가 집중적으로 형성 되어 내장산에 400여개가 있다.
순창새재는 새재에서 백암산 방향으로, 새재에서 까치봉 방향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여 호 거의 700여 개가 구축되어 있고 순창새재 정상에서 500m 구간은 움막을 지은 굴토흔적이 광범위 하게 분포 되어 있다.
"순창새재에서 나오는 유해는 민간이다?"
발굴이 개시되어 어느 움막터에서 유해가 발견되었는데 여자의 뼈와 어린아이 뼈가 발견되어 아마도 움막에서 박격포탄을 맞아 숨진 것으로 판단되어 그자리에 다시 곱게 잘 안장해 드렸다.
나는 어른을 모시고 순창새재 반대편 정읍 신정동으로 찾아가 마을 사람들을 찾아서 간담회를 가졌다. 정말 이곳 순창새재의 수수께끼는 풀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이 들었다.
1)지역주민 심대섭의 제보다
나는 6.25전쟁 당시에 공비들에게 부모형제가 살해당해 경찰의경으로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내가 원래 거주했던 순창 대가마을에 전북도당사령부가 있었다. 순창새재에 전투가 있었는데 이곳에 피난와 있는 장성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하지만 공비 총에 죽었는지, 국군 총에 죽었는지는 모른다. 군인들은 전사자 발생시 바로 후송이 되는데 경찰은 현장에 방치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내장사 주지스님이 공비토벌 작전이 종료된 어느 싯점에 많은 유해를 모아서 화장했다.
2) 이인수(86, '14)의 제보다
국군이 갈재에서 방어선을 형성 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후퇴해 갔다. 여수.순천 반란사건 잔당들이 내장산에 은거하다가 정읍을 먼저 점령했다. 남하하는 국군이 이들을 격퇴했는데 다시 인민군이 뒤따라와 정읍을 점령 했다. 포로가 된 국군들을 자수시켜서 인민군으로 편입했음며 공비토벌 막바지에 순창새재 입구까지 몰아붙인 후 지뢰를 매설하여 공비들이 사상자가 발생했고 민간인도 피해를 봤다.
3)김재남(76)의 제보다
전쟁 기간 중에 낮에는 대한민국이고 밤에는 인민 공화국이었다. 철도경찰이 낮에 철도를 부설하면 밤에 공비들이 파괴한다.
4)김대수(76)의 증언이다.
공비토벌 작전간 사살된 공비는 목을 잘라 전시했다.
다음은 복흥면 하리에 가서 지역주민을 만나 대담을 하였다.
나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문건을 하나 선물 받았다. "복흥지역의 해방직후 치안"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집필된 책이다. 여기서 기가막히는 것은 해방전부터 이미 공산당원 배가운동이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소의 남도당은 해방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남로당 입당원서를 받기 시작하는데 이곳 복흥도 '46.4월경에 벌써 연판장을 돌려 받아갔다.
이들은 주로 밤에 활동하는데 주로 동네 뒷산이나 대범한 곳은 동청, 개인 사랑방을이용하여 교육을 시켰다. 주요 내용중 일부를 보면 아래와 같으며 선전선동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당원 여러분 잘들 왔소. 우리는 참으로 좋은 세상이 왔고 좋은 기히가 조용히 다가서고 있소. 그간 우리는 일만 해주고 혹사 당했소. 우리는 못배우고 못먹고 헐벗고 살아왔소.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바꿔져 우리가 저 부자놈들의 땅과 집을 차지하고 그 부자놈들은 토굴을 파서 살도록 한다우. 그리고 부자놈들을 우리의 노예로 하여 우리 마음대로 시켜먹고 살 세상이 왔소. 상부에서 지시가 왔는데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김일성 장군을 앞세워 주자놈들의 집과 재산과 모든 것을 압수하여 소련 시베리아 벌판으로 차내였다요~~~" 이런 내용으로 교육이 되어 선동과 반항심을 길러주고 있었다. 그러다 체포활동이 시작되자 많은 인원이 산으로 들어가 사상무장과 테러활동에 동참하게 되었으며 결국 전쟁 발발시 살아남은 자들이 앞잡이가 되어 날뛰게 되었다.
1)최상열(72, '12)의 증언이다
공비토벌작전시 제11사단이 들어왔는데 제대로 훈련이 안되어 엉망이었다. 공비들은 주요고지를 선점하여 매복 공격을 감행하고 국군 23명이 전사했는데 동네 대나무숲에 13구가 유기 되었다. 이후 동네 뒷산에 옮겨져 보로받지 못하다가 일부 지역 주민들이 약으로 쓴다고 거둬가고 멧돼지등 동물들에 훼손 되었다.
2)윤용호(86. '1`2. 경찰 참전)의 증언이다
군인들이 경찰까지 통제하여 작전했으나 오인사격도많이 발생하였다. 군인 2명이 공비들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홀딱 벗겨 도망치게 하니 전쟁이며 죽고사는 상황이지만 참 거시기 했다. 군인들이 수습하러 와서는 제대로 수색정찰도 안하고 산속에 놓고 그냥 가버리더라.
3)설영근(71.월남참전)의 증언이다
군인들 죽는 것으르직접 목격했다. 밀재-쌍치재-송정재전투에 군인들이 많이 희생되었는데 대부분 수습해 가지만 공비들이 한쪽에 밀쳐놓았거나 본인들이 직접 사살한 군인은 방공호같은곳에 방ㅊ하고 흙으로 덮어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전쟁이 나기전에 이미 전국의 주요 거점이라할 수 있는 산악에는 '48년도에 발생한 여수.순천 반란 사건의 잔당들과 토착 빨갱이들이 숨어들어 있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활동을 개시했다는 내용이다.
다. 광주-목포 부근 전투
신편 제5사단장인 이형석 대령은 7월 23일 강주가 단시일 내에 적의 위협에 직면하리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광주방어에 필요한 병력과 탄약이 없는 상황에 국방장관에게 ㅣㄴ속한 조치를 요망하자 장관의 답변이 기막히다. "육탄으로라도 용감하게 싸우시오"였다. 이에따라 이 사단장은 제주도 해병대사령관인 신현준 대령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제주도에서 공비토벌작전을 한 서북청년단원 150명을 선발하여 비록 비무장이지만 급히 민간선박으로 제주항을 떠나도록 하였다. 이들은 23일 여수에 상륙한 후에 이 사단장이 고흥반도로 철수한다는 이야기에 다시 승선하여 다시 고흥반도 서남단 봉암리로 직행하여 합류하게 된다.
결국 23일 광주가 피습되고 이에따라 전남지구 주요지휘관들은 지프로 광주를 탈출하여 화순을 거쳐 벌교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제5사단 해체소식을 듣고 각 참모들에게 각자의 판단에 따라 행동할 것을 전달한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온 서북청년단 150여 명이 목숨을 함께 하겠다고 하고 제26연대 일부병력도 벌교에 남겠다며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하여 결국 대형선박 5척을 이용해 욕지도 빠지고 광주는 피탈된다.
한편 영광일대는 23일 저녁 북한군 15연대 주력은 나주를 점령하려 23:00경 삼학리가지 진출한다. 이곳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던 국군 1개 대대는 적의 공격을 맞이하여 고분분투하였으나 다음날 아침에 적의 공격으로 진지가 돌파된다.
영암에서는 24일 경계중인 경찰을 돌파하여 14:30분 경에 폭포에 접근하였다. 목포를 경비중인 해군경비부와 경찰 병력은 적이 도착 전에 15:00 경 시급히 LST로 철수하는 바람에 목포항에 보관된 정부미를 반출하지못해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영암경찰은 월출산으로 물러나 유격전을 전개하다 다시 해남으로 철수하여 해남경찰과 합류하여 적의 포위공격에 산길을 따라 우실재 동쪽 10km지점인 도암만으로 철수하여 어선을 이용, 청산도로 향하였다.
"건재나 단대호도 없는 국군 1개 대대의 진실은 ?"
여기서 앞서 삼학리 불갑산관련 '5중대 사건'과 '대보름 작전' '나주부대사건(경찰)'을 통하여 경찰이 삼학리 지서전투와 불갑산에서 일부 전투를 한 것으로 양민학살 사건 진상규명간 많은 증언자들이 실제 본인들이 참여한 뼈아픈 상황을 통하여 진실을 고했는데 여기서 갑작스레 군인 1개 대대라는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소련 군사고문단장의 기록에 슬쩍 맞춰 놓은 것인지 건재나 단대호도 없는 부대는 누구인지?
"무등산은 말이 없다, 광주 형무소에서 실려나간 시신은 어디에?"
'10년도에 88세인 한 할머니분께서 전화를 하셨다. 본인의 남편이 전쟁 당시에 광주형무소에 근무했다고 한다. 형무소내에서 죽어간 국군과 북한군을 차로 실어서 무등산 골짜기에 묻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형무소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미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도 전주형무소, 대전형무소, 의정부 형무소 등 대한민국의 모든 형무소에는 그 당시에 공비나 프락치들이 도는 반국가이적단체들이 사형언도를 받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인원은 전쟁 발발과 동시에 비록 그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서 그렇지 일정 장소나 내부에서 사형이 집행 되었다.
또한 북한군이 진주해서는 이러한 감옥에 국군 포로나 경찰, 아니면 지역 유력인사 등을 감금하고 있다가 북으로 퇴각하는 싯점에 보복적 차원에서 총살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곳이 남한에서는 대전형무소 내부였다. 국군이 진입했을 때에 형무소 우물 속에도 가득하고 형무소 공터에 고랑을 파고 붙잡혀 있던 인원을 쓸어넣다시피 하고서 총을 무자비하게 갈기고 떠나 버렸다. 그런 곳은 대전의 탄천 강변에도 수천명이 그렇게 죽어갔다. 북으로 올라가면서 그 숫자는 헤아리기 어렵다.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소위는 무등산 골짜기에 실제 죽어있던 모습을 모윤숙 여사가 피난시절에 보고서 느낀점을 옮긴 것이라니 얼마나 죽어갔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에겐 기록이 부실하다.
정규작전이 없었던 이곳 무등산은 제5사단 예하 20연대의 잔류병력과 제3육군병원에 있던 입원환자들이 있는 총과 탄약을 가지고 저항을 하다 대부분 전사하거나 탈출에 성공하여 화순.보성쪽으로 빠져서 전남편성관구사령부 이응준소장의 일부부대와 합류하여 후퇴하기도 했던 지역이다.
"화순쪽 무등산 밑에 많은 전사자가 있다?"
광주 산수동에 78세이신 분이 '10년도에 TV를 보고 제보전화를 하셨다. 본인이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우린 이곳의 조사에는 많은 조심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요즈음도 이슈가 되는 광주교도소에 '80년도 5.18광주민주화 운동시 많은 인원이 형무소에 갇혀 있다 행방불명이 되는데 바로 화순쪽 너릿재 터널 일대에 끌려가 죽어 묻혔다는 이야기가 많다. 오면서 이곳에 있는 저수지에 집어넣어 황소 개구리가 정말 황소처럼 크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많은 지역이다.
실제 이 일대 저수지는 다 물을 빼고 바닥을 긁어내는 조사가 다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구도 없다. 나는 이미 '01년도에 이런 경험을 했다
"너릿재 이십곡리에 국군이 26명 묻혀 있다."
광주에 한약방을 운영하는 강동원 한의사가 우리를 찾았다. 듬직한 자료를 들고 오신 강의사는 너릿재 밑에 좌측으로 이십곡리 들어가는 입구 길목에 국군 용사 26명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역 지도와 요도를 가지고 오셨다.
나는 바로 광주로 달렸다. 가서보니 애기묘처럼 조그맣고 아담한 봉분이 오와 열을 맞추어 두줄로 정열되어 있고 비석이 크게 서 있다. 자세히 보니 이름도 일부 있고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 3대대 10중대란 소속도 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남아 있는데 알려지지않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되었다. 그런데 이때 시골분이 지나다가 하는 말이 "그거 광주사태때 죽은 부랑아들인데~"라고 하며 떠나갔다.
"광주사태 부랑아라~?"
나는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졌다. 강의사도 그럴리 없다하면서 주춤거린다. 묘를 다시 보기좋게 만든 것이 80년 이후라고 한다. 본인이 화순을 왔다가다 하다 뭔가를 느껴서 차르를 몰아 와보니 볼속볼속 가묘같은게 있는데 들어보니 군인이란 지역주민들 이야기에 본인 돈으로 이곳을 사서 묘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아니 그러면 계속 여기에 놓아두면 이 지역에서 추모행사를 할 텐데 왜 파내려고 하는지요?"
"보기도 않좋고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이런 사업을 하시 국립묘지로 가는 것이 맞지않나 합니다."
"여기 비석이 있는데 이건 누가 만들어 놓은 겁니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 묘지를 만들고 언제 와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조금 전에 지나가던 사람이 광주사태 부랑아라고 하잖아요. 그건 어떻게 해석해요?"
"그거야 나도 잘모르지. 하지만 분명히 아닐거요. 내가 만들 때에는 동네에 살아계신 분이 많았어요. 그분들이 다 이야기한 것입니다. 지금 동네에는 그 당시에 있던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더 의심이 되지요. 이거는 우리 맘대로 건들면 안되고 언론, 기관, 우리가 참여하는 3부합동 조사결과로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31사단에 헌병, 전남경찰청,언론은 31사에서 출입하는 언론사에 연락하여 오고싶은 언런사 자유, 우리는 충북대 인류학과 박선주 교수팀이 참여하기로 하고 '01년 3월의 어느날 다 모였다.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시굴은 박선주교수팀이 하게 됩니다. 26개 봉분중 7개를 1/4씩 개방하여 실태를 보고 정하되 국군이라 판단되면 바로 발굴에 들어가고 아니면 지역 경찰에 인계하고 저희는 물러나겠습니다."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국군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하느냐 등의 질문은 별 무게가 없는 질문이다. 우리에게 전문인력이 있고 조선대에서도 인류학자가 참여했다. 드디어 언론사들의 카메라가 돌아감며 시굴이 이루어진다.
"어, 이과장님 전투화가 보입니다."
충북대 이혜진 조교의 목소리다. 모두들 얼굴을 내밀어 서로 보려고 난리다. 모두들 물리치고 나와 박교수가 현장을 지배했다. 그리고 전투화를 좀더 파보니 온전하게 다리부분이 보이고 전투화는 미제 전투화다.
"어, 여긴 철모가 보입니다."
형태가 보이도록 발굴을 좀더해보니 미제 철모다. 당시 국군은 초기전투시는 철모지급이 50%수준이었지만 7월 이후에는 거의 100%수준이었다. 미군이 참전하면서 지원이 된 것이다.
시굴된 모든 묘에서 전투화는 전부 미제로 발굴 되었고 철모가 두군데, 수통이 보이는 곳이 한곳, 앞 가슴 호주머니 부분에 지갑이 그대로 있는 곳이 한 곳 등 모든 묘에서 유품이 나오는데 군인임에 틀림 없다. 다만 북한군인지 아군이지의 문제만 남았다.
"저희는 일단 발굴대상지역으로 선정하고 발굴을 전반기에 하겠습니다."
참석한 모두가 아무말이 없다. 그래서 부연설명을 했다. 발굴기간에도 모든 것은 오픈입니다. 질문이 있다던가 새로운 정보를 얻게되는 분들은 저희에게 알려주시면 저희는 바로 참고하여 적용토록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부랑아가 전투화를 신고 철모를 쓰고 있을리는 없잖아요?"
나의 질문에 무등일보, 광주일보등 언론사 취재기자들도 동의한다. 강의사님은 침묵이다.
"KBS 다큐팀이 현장에 왔다. 그리고 찾아낸 실제 그 현장 참전용사 박00님~"
나는 세워진 비석에 촛점을 맞추어 대전현충원에 있는 강중사에게 위패카드에서 유호식 유호석 등 이름을 주고 10,000장의 매화장 기록서를 샅샅이 뒤져보도록 업무협조를 했다.
지역 방송에서는 이곳의 발굴사실을 공개했다. 나는 하순읍과 이양초등학교근처에 대한 탐문을 적극적으로 했다. 분명 무언가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이 숨어있을거라는 나만의 예감이다. 발굴이 개시되고 몇일이 지났는데 박안식이란 참전용사님이 들꽃을 가지고 현장에 오셨다. 무슨 연고가 있는지 바로 내가 용사님을 만나 사연을 들었다.
"내가 유일한 생존 소대장이요."
말못할 사연이 있어 항상 매년 종전 후에는 4월이면 들꽃을 들고 찾아와 전우들의 영면을 빌었다는 용사님.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소대원이 다 죽었다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화순읍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사연을 들었다.
"비 내리는 날, 기습을 받아 중대장과 본인은 살고 장교 모두 전사하고 병들이 대부분 전사하였다는 것이다. '51년 2월 횡성전투에서 사단이 무력화 되어 대구로 내려가 재편성의 과정을 거쳐 대구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재편성 신고를 마쳤다. 모든 장비는 100% 미군 장비로 지급받았다. 그리고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되기 위해 4월6일 열차로 이곳 화순 이양역에 도착하여 이양초등학교 뒷편 평편한 곳에 숙영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날, 보초는 잠이들고 나 10중대야~?"
여름날 오후 늦게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모기는 기성을 부리고 열차이동에 대한 피곤함과 아직 가시지않은 횡성의 악몽, 그리고 신병들의 전쟁에 대한 기대치들이 뒤범벅되어 이양의 밤은 깊어가기 시작한다. 마침 동네에서 군인들을 위해 위문도 오고 나름의 상호인사도 이루어졌다. 드디어 밤 10시가 지나가고 있다. 모두가 깊은 꿈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그 순간이다. 일부 병력이 초등학교 입구에 나타나 숙영지로 이동한다. 하지만 누구도 막아서는 군인은 없다. 이윽고 숙영지 앞에 도착한 단대호 미상의 군인, 숙영지 바로 앞에 보초가 수하한다
"멈춰라, 누구냐?"
"10중대다"
"까치?"
"이 새끼, 보초를 그따우로 서?" 바로 대검이 날고 보초는 입에 재갈이 물려졌다. 저멀리에 후레쉬가 비쳐온다. 이 검은 병력은 재빠르게 텐트마다 뛰어서 돌며 수류탄을 까넣고 튀었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 26명이 전사다."
비는 내리는데 핏물이 숙영지를 덮는다. 비를 맞으며 나머지 병력은 뜬 눈으로 밤을 지켰다. 소대장1, 부중대장1 등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사한 용사들!
중대장은 화순에 있는 화차를 이양역으로 보내도록 하여 화차에 실어 화순읍까지 이동하고 그곳에서 스리쿼터에 실어서, 이곳 22번도로 29번 도로가 교차하는 이십곡리 입구에 동네 노무자를 동원하여 묻도록하고 떠났다. 그리고 하루지나 이름이 새겨진 푯말을 박았다.
이것이 전부다. 사건보고를 안했다. 전투중 전사한 것으로 추후 보고된다. 정상적인 전투행위로 된 것이다. 그것은 처벌이 두려운 중대장 이중위의 판단이며 조치였다.
"사형으로 끝난 중대장의 조치는 잘못되었다."
나는 육군본부 법무감실의 협조를 얻어 어렵지않게 사건의 진상을 파악했다. 허위보고와 잘못된 전투지휘로 수많은 인명피해를 낸 것이 죄명이었다. 전쟁 중에 준엄한 심판이 내려진 것이다. 하지만 잠들어 있는 전사자들에 대한 조치는 이루어지지않고 있었다. 오히려 다리밑에 살고 있는 넝마보이들이 불쏘시개로 각 묘마다 있던 이름이 적혀진 푯말을 전부 빼내어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가고 개울물 소리에 역사는 잠드는데 어느 날 광주지역 보안부대장으로 온 황모중령이 이 사실을 어디서 듣고 차후 전역한 이후 화순재향군인회 회장을 하면서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이 황모 중령은 ROTC출신으로 전방 20사단에서 대대장 월북사건시 지역 보안부대장으로 근무하다 이 사건으로 보안부대에서 물러난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 20사단 자리에 제5사단이 들어가 지금도 전방이다. 여기에 대해 더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줄이겠다. 다만 그 대대장은 다방의 마담과 그 딸을 동시에 사랑한 덫에 걸려 북으로 넘어가버리고 만 것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해는 결국 매화장 보고서에 모든 이름이 다 나와 그 유가족을 추적하여 현재까지 14명의 신원이 확인 되었는데 기막힌 사연이 많다.모두가 소설같은 이야기들이다.
1.2)고 유석오.유석환 형제님( 여동생과 유석오 일병의 딸 유영희 DNA일치)
여주 처리에 있는 자가 봉송된 묘지에서 이미 화장재를 발굴하여 현충원 안장 진행 중에 이런 사실이 밝혀져 유가족을 놀라게 했고 자가봉송의 진위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 되었다.
아버지는 큰아들과 작은 아들의 전사 소식에 실성한 사람처럼 되어버려 내내 병을 앓타가 전쟁 종료 후 얼마 있어 운명하셨다. 어머니는 북한군이 진주시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도록 방공호 등에 자식을 숨겨왔는데 국군으로 가서 전사했고 자가봉송으로 왔는데 묻을 땅도 없어서 마을 입구 국가땅에 몰래 살짝 묻었다고 한다.(우리가 처리에서 발굴한 자가봉송 7인의 묘역이 국가땅이었다.)
3)안만수 일등중사님(여동생의 현장 확인으로 판단, 앞 윗니의 브리치모양))
신원이 확인된 유해중 유일하게 현충원에 가지않고 부모님 묘소가 있는 밀양의 선영 묘소에 안장
4)서석원 일등중사님(남동생, 자식이 있어 유전자 검사 일치)
발굴 유해중 특이하게 철모를 쓰고 있었고, 철모안에 머리카락이 다량 남아 있었다. 판쵸우의로 덮혀 있는데 꼭 살아있는 사람의 가슴처럼 보였다. 계급장도 선명하게 녹슬지않고 있었다.
5)임용구 하사님(형이 살아 있어 그 자식들 유전자 검사일치)
철모를 쓴채 판쵸우의를 입고 있었고 호주머니에 연필심이 남았고 가슴부위에 신분증이 있었다.
6)봉필구 일병님(동생의 자식들과 유전자 검사로 일치)
이 유해가 제일 먼저 발굴 된 유해로 토양에 습기가 많아 뼈가 많이 부식되어 마음을 아프게 했다.
7)이문재 일병님(동생 2명의 유전자와 일치)
신원확인된 유해중 안만수 유해와 경남지역으로(대다수는 여주와 인천이다) 유족을 찾는데 거의 6년이 걸렸습니다. 유일하게 전사한 배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유족이었다.(대구에서 도착하여 지역에서 군인들 환영대회가 있었고 먹고 마실 것이 준비되어 순진한 군인들이 여기에 속았다)
8)윤용복하사님(형의 자식들과 유전자 검사 일치)
전투화는 오른쪽 한발에만 신겨져 있고 왼팔은 배 위에 얹어진 채로 발굴되어 아마도 순간에 튀쳐나와 전투를 하려는 모습이 떠올라 우리를 울게 하였다.
9)이상현 하사님(남동생. 여동생 유전자 검사 일치)
전투화를 신고 철모를 쓰고 있었으며 수통에 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 현장을 찾은 여동생 등의 울음바다가 되었다.
10)이두삼 하사님(형의 자식들과 유전자 검사 일치)
위의 용사님은 이미 서울 현충원에 안장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화순에서 실제 유해가 나노다 보니 참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쟁의 진상이다. 동명이인도 있고 봉송하는 군인들이 잘못 가기도 하고 별별 일이 많았다.
유가족측에서 그러한 사실을 혼쾌히 받아들여 파묘를 하고 서울 현충원에 다시 안장했다.
11)신영진일병님(남동생 2인의 자식들과 유전자 검사 일치)
판쵸우의를 입고 반듯하게 누워 계셨다. 이 유해도 이미 유가족에게 자가봉송된 후에 서울 현충원에 안장된 유해였다. 따라서 다시 파묘하고 제대로된 묘를 다시 썼다.
12)김유혁일병님(이복동생이 있어 이모를 찾아 유전자 검사 일치)
2001년 발굴당시 최초로 매화장 보고서에서 찾은 유가족 주소에서 유족을 찾았지만 전쟁 당시의 애틋한 가정사로 바로 유전자 검사를 못하고 2년여의 기간에 이모를 찾아 일치되어 '03년 안장.
13)이인영 일병님(남동생을 찾아 그 자식들과 유전자 검사 일치)
발굴 당시에 거의 살아있는듯이 완벽하게 발굴된 용사님으로 판쵸우의를 입고 전투화를 신고 있는 상태로 계셨다.
14)홍순달 일병님(형의 자녀와 유전자 검사일치)
발굴된 유해 26구중 유일하게 머리부분이 없는 유해로 각인된 선배 용사님이다. 전투화 판쵸우의, 제8사단의 박클이 함께 발굴 되었다.
이상의 유해는 내가 근무하는 동안 밝혀진 유해와 유가족상황이고 아마도 몇명은 더 확인이 되었으리라 본다. 내가 지역 탐문간 이양의 오래된 이발소에서 연세가 많은 분을 만나 그날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은 고 이문재일병으 유족들이 밝힌 내용과 거의 일치하며 당시는 이 화순의 화학산, 장흥의 봉미산, 장평등지에는 몇천명의 공비들이 판을 치고 있어 밤에는 그들 세상이고 그들에게 동조를 안하며 가차없이 죽어나가는 형국이었다 한다.
그러니 낮에는 우군의 경찰.군인에 당하고 밤에는 공비들에게 당하고 주민들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기에 철새가 되어야 했단다.
"발굴간 우리를 펑펑 울게한 안만수님의 유족, 형수, 여동생과 일가친척들"
지금은 사는 곳이 부산이지만 선영은 밀양이다. 살아 생전에 부모님들 가슴타는 이야기야 그렇다 치고 이 여동생분이 발굴현장에 오셨는데 앞니의 브릿치 모습을 보고 바로 오빠라 한다.
그러면서 "이 문딩아 여기 있으면서 꿈에도 한번 안나타났느냐"며 울기 시작하는데 우리도 다 울어야 했다. 현충원 안장 이야기에 지금까지 나라위에 싸웠고 여기 있었으면 됐다며 그토록 보고싶다며 눈물만 흘리다 돌아가신 어머님 곁으로 간다며 유해는 유족의 뜻에 따라 선영으로 모셨다.
"형 백옥칠을 찾는 동생의 아련한 마음"
이곳에서 전사한 인원중에 가장 높은 계급이 선임부관인 부중대장 백옥칠 중위다. 실제 명단에 들어 있다. 그런데 서울 현충원도 묘비가 다른 두분과 같이 있다.
발굴되는 26인의 실태중에 한분의 수첩이 나왔는데 백옥칠이란 이름은 없어도 부간이란 글씨는 나온다. 발굴간 유족을 추적하여 부산 김해에 살고 있는 동생분을 모셨다. 그런데 유전자가 맞질 않는다. 이분은 자식을 형민에게 양자보내 대를 잇고 있는 뼈대가 있는 집이다.
"만약 형님이 찾아지면 현충원 유해는 어떻게 할까요?"
"걱정마세요. 비록 아니라 하더라도 지난 50년간 형님으로 모셨는데 아니어도 형님입니다. 유전자가 맞게 되면 화장하여 합봉해 주세요." 그러나 아직 일치되지 못하고 있다.
"박용선 선임소대장(육사8기), 그리고 그 아버지!"
살아난 소대장, 박안신용사님은 대위까지 달고 군대를 그만두었습니다. 정신적 피로에 약간의 부상을 당하여 후방으로 치료차 내려와 군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종전 후에 5.16혁명 이후에 문화공보부에 간부로 들어가 평생을 근무하고 정년 퇴임합니다. 마음에는 언제나 이양이 자리잡아 그해 4월이면 이곳에 들꽃을 들고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기에 26구 유해중 키가 제일 큰 분이 박용선 중위라고 합니다. 맨 앞줄 첫번째 매장된 분이랍니다. 북한에서 월남하여 육사 8기로 들어온 기골이 장대한 용사님은 살아계신 아버지가 있다고 합니다. 박안신 용사님은 왜 그날 밤 모두 전사되어야 했는지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평생 침묵으로 무덤까지 갈 것이고 저승가서 동료들에게 용서를 빌겠다고 합니다. 살아 남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벌받아 마땅하다 합니다. 지금 예산에서 사과 과수원을 합니다. 우린 그 집에도 가 봤습니다. KBS 제작팀이 집까지 찾아왔지만 노코멘트였습니다.
우린 박용선 용사님의 아버지를 경기도 의왕에서 찾았습니다. 독거노인으로 아주 작은 아파트에 간병인의 도움으로 살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사연은 눈물납니다."
평양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아주 부자집안에서 자라 평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합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들어오면서 사유재산을 강탈해가는 모습을 보고 분명 이곳은 살수 없는 공산치하가 된다며 월남할 것을 결심하고 독똑한 큰아들인 용선이를 데리고 누이들과 먼저 내려오고 다음에 할머니가 내려오기로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최초로 개인택시 법인을 운영하고 아들인 용선이는 청운의 꿈을 품고 육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나버려 가족의 재회는 무너졌습니다.
할아버지는 악착같이 부산으로 해서 버티고 버티어 다시 서울에서 사업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아들 용선이는 전쟁터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중대장의 과오로 누구에게도 전사통지서는 가지 못했고 나중에 중대장이 총살되면서 일부 유가족에게 믿기 어려운 자가봉송 형식으로 유해가 전달 되었으나 할아버지는 아무런 것을 받지못하였습니다. 전쟁이 진행중이니 살아 있어 나라를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종전이 되어도 소식이 없고 평양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도 없고 나중에 들리는 소문은 38선을 넘다 모두 죽었다는 비보였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큰아들 용선이를 기다리며 재혼도 안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다 삶에 지쳐 병이 들고 오지않는 자식을 기다리며 술로 인생을 다스리다 큰 사고도 났습니다. 모든 사업을 접고 병원신세가 되었으나 자식이 돌아온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50년이 되고 지금 화순에서 우리가 그 아들 용선이를 발굴 했습니다. 이모들이 인천에 있다는 소문에 찾으려 헸으나 찾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꼬옥 쥐었습니다. 간병인이 심심 당부하길 절대로 저사사실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할아버지는 "용선이, 용선이"를 반복하여 부릅니다.
"눈물로 돌아서 나오고 끝까지 알리지 못했다."
나는 절대 말할수가 없었습니다. 나니 90이 넘어 혼미하신 할아버지는 내 할아버지 입니다. 나는 손을 꼬옥 쥐고 소리없는 눈물을 뜨겁게 흘려야 했습니다.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할아버지 오래 사세요!"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습니다. 당시는 DNA 감식 비용이 아직 책정되지않아 시료만 채취하고 있는데 이모등의 거주지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우리가 감식비를 책정하고 너무 좋아서 할아버지를 찾았을 때는 이미 운명하시어 연고자가 없기에 화장처리 되고 말았습니다. "박용선 소대장님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러고 세월이 흘러 나는 너릿재 이십곡리 발굴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흔적도 없다. 복차선으로 새길이 뚫리고 용사님이 50년을 지키셨던 지역은 흔적조차 없으니 과연 최초 제보하신 강한의사의 진실은 무엇인지~, 마음이 변하여 땅값을 챙긴 것은 아닌지 ~~~
여기에는 타당한 의구심이 있다. 우리가 발굴을 위한 개토식을 진행할 무렵 화순 재향군인회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전남대 국문과 교수로 있는 전 제20사단 전방 보안부대장 출신 황모중령이 나타났다.
"야 누가 여길 파라고 했어? 누구야 현장 통제하는 놈이?"
"접니다. 육본의 통제장교 이과장입니다."
"너 누가 니멋대로 파라 했어. 이곳 내가 다 만들어 놓았는데."
"이미 관련 사실을 다 조사했고요. 땅의 소유권은 제보자인 광주 한의사 강선생입니다."
알고 보니 땅을 구입하여 모양을대충 갖춘 분은 강의사이고 실제 비석을 세우고 주변을 정리하여 묘지답게 꾸민 분은 황박사였다.
어쩌랴, 용사님은 현충원에 가셔야 하는걸 막을 사람은 없다. 황박사는 추모식에 추모글을 본인의 글로 낭독한느 걸로 협상을 마쳤다. 비는 주룩주록 내렸다.
"무안군 일로면 상신기리 야산에 국군 20명과 경찰 40명이 죽어있다."
상신기리는 나주에서 신몽탄대교를 건너 상신기리가 있다. 서울의 장충동 노인정에 갔을 때에 이곳에 사는 분이 무안 일로 상신기리에 가면 국군과 경찰이 많이 죽어서 묻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따라서 삼학리에서 발굴 작전중에 이곳을 찾았다.
"김석원씨('07), 전쟁중에 북한군이 국군 20명, 경찰 40명, 부역자, 민간인 등 수 많은 인원을 사살하여 마을 산 7부 능선에 동네 부역자를 동원하여 묻었다.
당시 내가 5~6세인데 직접 목격했고 3개 구덩이에 첫번째는 군인.경찰, 두번째는 부역자, 3번째는 민간인을 묻었다."
우리는 현장에 접근하여 위치를 확인했으나 쉽지가 안했다. 제보자는 분명 여기라 했지만 기초굴토 해보면 아니였다. 그러다 일시 중단하고 다음을 기약하고 일단 나왔다.
그러다 '10년도에 해당지역에서 조0호(77세)란 분이 전화를 해왔다. 내용이 우리가 '07년도에 확인한 내용과 동일했다. 그래서 관련 내용을 설명하고 새로운 사실이 있는지 물었지만 김석원씨가 함께 했다면 됐다고 한다. 국군 20명, 경찰 40명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이곳 일대는 워낙 프락치들이 많아 손가락 한번에 죽어나가는 시절이니 과연 그 유해도 어떻게 나중에 처리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삼학리도 분명 경찰이 전사해 있는데도 50년을 서로 아무말도 안하고 결국 그 자식이 민원을 제기함으로써 발굴된 것이다.
"영암 시종에는 포로, 도포지서 일대에는 경찰 27명이 전사하여 묻혀 있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전남 지역은 국군이 전투를 안했다. 물론 자생적인 지역방위대(청방비슷)나 일부 본대를 이탈한 군인중 일부가 싸웠을 수는 있지만 미미했다.
그러나 경찰은 군별로 지역경찰 성격을 띄고 있었기에 그래도 잘 싸우지는 못했어도 북한군과 접촉을 유지하고 지역 공비들의 준동과 프락치들을 억제하는데는 많은 기여를 했다고 본다.
우리는 삼학리 경찰전사자 신원확인을 위해 영암, 나주, 해남, 강진, 장흥 등 경찰서를 방문하여 관련된 명단을 확인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영암 경찰서에 들어가니 서안에 경찰 추모비가 있어 내용을 보니 영암경찰소속으로 전쟁에서 전사한 인원의 명복을 비는 추모비였다.
사실 전남지역은 경찰과 군인에 대한 애환이 겹칮다. 무자비한 토벌에서 오는 혐오의 대상이고 그래도 치안을 유지하고 자유대한의 자본주의를 지켜준 은인이기도 했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주부대(나주경찰)의 잘못된 행군길에 엄청난 피해를 본 지역 주민이다. 그렇다면 도포에서 숨져간 군인은 어떻게 된것인가?
이곳에서 전사한 김용환경찰의 유가족인 동생분 김옥희씨로부터 제보가 왔다.
"오빠 김용환이 도포지서 근무중 전사하여 도포면 지역에 27구가 묻혔는데 25구는 유족이 찾아가고 2구는 그대로 있다.
1구는 내 오빠 김용환이고 1구는 완도 약산전투에서 전사한 경찰로 오빠의 친구인 유재참 경찰이다. 완도 전투에 참전환 유경찰관은 약산지역에 무명용사 묘로 2구가 관리되고 있는데 영암읍 역리거주 당시 생존한 경찰관 손덕환씨가 잘알고 있다" 는 제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현장에서 확인한 결과는 유족의 강력한 요구로 유해는 없지만 그 혼이라도 모아놓는다고 머리카락을 넣고 묻었다는 제보를 얻었다. 다라서 유족도 이 제보내용에 수궁하여 아프지만 그소원을 접어야 했다.
영암 시종 와우리도 공비들이 와우리 동네주변 야산 몇군데를 점령하고 어디서 군인인지 경찰인지 포로로 잡아서 신발을 벗기고 끌고 다니며 고지에 꿇쳐 놓았다는 제보다.
나는 이곳을 거의 4번에 걸쳐 직접 참여하에 지역조사와 탐문을 실시했다. 동네 주변의 산도 다 올랐고 웬만한 주민은 다 만났고 제보를 한 아저씨를 대동하고 군인이 죽어서 묻혀졌다는 동네 입구 우측의 묘지 옆에 큰 소나무 일대도 다 탐사했다. 그러고 실제 소나무 일대를 주변으로 발굴도 시행토록 하여 1개 지역소대병력을 투입하여 발굴을 했지만 아무런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어느 지역 주민이 던지는 말은 공비들이 어디서 잡아오는지 신분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끌고와서 야산 꼭대기에서 20고개 넘기 수수께끼도 하고 그러다 귀싸대기 쳐대고 빨가벗으라 하고 남자들 뭐해보라 하고 정말 비인간적 행위를 하다 기분내끼면 쏘아버린단다. 그러면 옆에 있는 인원이 시신을 굴려 묻는데 바로 소나무위치는 맞다는 것이다. 본인이 어린 나이에 현장에서 보기도했단다.물론 어느 지역 주민이 발굴해 갔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김완수씨(서울 서초거주)는 '50. 8월경 강진 경찰들이 북한군과 교전하다 완도 약산방면으로 후퇴중 마량 앞바다에 수장되었다며 뻘지대를 발굴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아서 뻘지대를 우리가 조사할 수 있는 장비가 없다. 지역주민의 제보를 받으러 가보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약산 전투와 관련하여 다른 한 유족(딸과 전 강진지역 군의회의장등)은 장용리에 아버지가 묻혀 있다며 민원을 올려 2회에 걸쳐 조사를 해야 했다.
이분은 워낙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많으셔서 전화만 하시면 울기부터 시작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용하다는 무당까지 동원하여 위치확인에 참고 하였다. 그 결과로 실제 무명 경찰의 푯말이 있었다는 묘지를 공동묘지에서 찾아냈다.
당시를 기억하는 지역제보자도 찾아내 현장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약산까지 밀린 경찰들이 배를 이용하여 평일도로 탈출을 하려다 일부는 배를 못타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마침 썰물 때라 뻘에 빠지면서 뒤로 밀리는데 결국 모두 전사하였는데 함께 있던 다른 분의 시신은 뭍으로 올라와 가매장되었다 나중에 유족이 찾아 갔다. 하지만 한분은 찾지를 못했는데 해당 집이 위세가 있는 집이라 큰 굿을 이곳에서 했다."
나는 직감으로 알았다. 분명 이 묘소안에는 시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형상이 그려진 나무가 들어 있을거란 것을 유족에게 알리고 발굴 하지 말고 지금처럼 관리하고 ㄸ대가 되면 마음은 아프지만 한번씩 찾아보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더니 않된다고 막무가내다.
그렇다면 만약 찾고 싶은 유해가 한조각도 않나오고 화장재도 없다면 그 뒷일은 어떻게 하실거냐고 물었더니 받아드리겠다고 한다.
그래서 백성기 팀장에게 통보하여 발굴 토록 하였다. 간단한 제례의식을 마치고 파묘를 해보니 역시 내가 판단한대로 묘 안에는 칠성판이 있고 그 위에 비단으로 썩지않도록 감싸진 나무로 된 사람이 나왔다. 펑펑 우시는 따님을 큰아버지등이 달래고 대책을 논의 한다.
"이과장님, 이것으로 현충원 안장추진이 안될가요?"
"법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현충원 초기에는 무슨 일부 유품으로도 묘비를 세웠다는데 그때만 해도 행정이 미비할 때고 지금은 대통령도 할 수 없습니다."
냉정한 나의 답변에 유가족들은 역시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분들이라 수궁을 하고 다시금 원형대로 묘소를 잘 만들어 달라하여 석양이 지는 순간까지 복원공사를 마무리하고 떠났다.
또 오산에 거주하는 배성애씨는 본인이 딸이라며 완도군 금일읍(평일도) 포구에서 전투하여 4명이 전사하고 1명이 현장에 남아 있는데 발굴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을 발굴하기 위해 여러번 우리 조사팀들이 현장을 조사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지역 제보자김종묵(74. '07)씨가 현장을 알고 있었고 본인들도 그 지역에 살아서 사실 자가봉송 된 경우와 같았다. 신빙성이 높아 묘를 파묘하여 본 결과 유해 1구가 나왔고 감식결과도 일치하여 정말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찾았다. 사실 이분은 경찰이 가지고 있는 매화장 보고서에도 명확하게 위치가 나와 있었다.
"목포 허사도(위폐107위) 비밀을 밝혀라(목포 항만 식당 주민 현장 제보포함)?"
목포 허사도에 전사자 위폐가 107위로써 작은 섬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인원이 전사하여 찾지 못했나 하는 의문을 해결하려 섬을 찾았다. 허나 지금은 목포 신항만 공사로 모두 섬이 아닌 육지로 변하였으니 그 엤날의 흔적은 없다. 허사도와 고하도는 충무동이 되었다.
우리는 도서지역의 전투와 유해발굴 가능성을 분석하기 시작하고 주요 위폐현황중 100인이상의 지역은 현장 탐문과 탐사를 통해서 알아보기도 했다.
나는 우리나라 남단의 가장 큰 항구인 목포의 허사도를 찾기로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나에게 길명도는 왜 조사하지 않느냐, 그곳은 보도연맹이나 부역자뿐만 아니라 민복을 입은 겨앛과 군인이 북한군에 포로되어 들어가 수십명이고호늬 객이 되었다는 제보를 확인하려 했다.
먼저 허사도를 찾았다.
목포에 KTX로 도착하여 지역 부대의 차량을 지원 받아 허사로 간다. 이곳은 폭포 해방사가 있다. 마침 도착한 시간이 점심시간대라 우린 목포항 인근에서 간단한 국밥 한그릇으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한 곳을 들어가니 시끌벅적하게 항구맛이 난다. 운전병과 이곳 안내간부등 4명이 들어가 식사를하는데 복장이 처음보는지라 한 아저씨가 자꾸만 눈짓을 준다. 식사중이지만 내가 자리로 찾아가 우리의 부대성격을 말해 드리고 혹시라도 아시는 것이 있으면 좋은 제보가 될 것이고 나중에 유해가 나오면 포상금까지 드린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자리로 이동하여 빨리 식사를 마치고 눈치것 저쪽 어른과 비슷한 싯점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 대면하게 되었다.
"아, 우리땜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신것 아녀요?"
내가 직접 목격을 한것은 아니고 지금은 배를 안타지만 젊은 시절에 배를 타고 연안어장을 돌았는데 허사는 모르겠고 고하리라고 허사에서 조금더 북쪽으로 가면 있어요 거기한번 가보쇼. 허사는 개발한다고 대부분 사람들이 다 고하리로 나와 있고 그 고하리 바다속에 시체가 겁나게 많다고 하는데 아니 항에서 사람을 거 큰 장비실고 다니는 배 선상에 실고 아서는 쪽 밀어 넣어 버렸다고
하는데 요즈음은 그런 이야기 없는데 내가 그 시절에는 가끔 그물에 사람이 걸려 나오는데 사람 손목이 묶여 있어 팔이 어떻게 두개식 나란히 나오기도 합디다."
"그럼 그때 그것을 어떻게 하셨어요?"
그야 우리는 다시 바다에 던져버리지. 뭔지 알간. 오히려 재주없다고 하며 "저승에 잘가라"며 명복은 빌지. 지금 그런 사람들 찾으러 온 것이다. 이거지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고맙다고 인사를 올리고 고하리로 향했다. 고하리 마을회관ㅇ는 무려 23명의 마을 주민이 모여 들었다. 이장님으 따듯한 영접(?)을 받으며 나는 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 했다.
"우리 고하도, 허사도, 달리도에는 전투가 없었어요~!", 공통의 이야기다.
목포에서 바지선에 사람을 태워 오는데 못 도망치도록 발목이 묶여서 오는데 복장도 민복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찰이나 군인도 복장도 아니다. 생김새로 보아 민간인은 아닌듯 했는데 나주에 들리는 소리가 도망치다 붙잡힌 경찰이라 했다.
목포항에서 몽하도를 거쳐 고하리 석화도 사이에 오면 물쌀이 어마어마하게 빠른데 여기와서는 앞에 있는 한명을 밀어서 떨어뜨리면 줄줄줄 누에고치가 딸려나가듯 바닷물 속으로 사라져 나오지를 못한다. 이렇게 다 죽였다고 한다.
발에다 무거운 돌도 메달아 놓았다고 한다. 고하나 달리는 전쟁이 없었다. 군인도 고하에서 2명이 갔는데 실종되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1)장봉익(72. '12)님의 증언이다.
60년대에 해병대로 강화도에서 근무했다. 고하는 신씨와 고씨 집단촌인데 북쪽이 신씨촌 지역으로 순찰로 상에 유해를 목격한 적이 있다. 남쪽은 고씨촌인데 미군들이 잡혀와 많이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김남석(80)님의 증언이다.
목포에서 북한군이 경찰들을 잡아 지역 빨갱이들이 발에 돌을 묶어 달리도와 해남 사이에 수장시켰다고 들었다.
3)이효란(71,여)님의 증언이다
"일로, 나주의 다시.문평 지역 저수지 뒤산에 전투화.총.유해 등 다수를 직접 목격 하였다."
일로는 상신기리등에 해당이 되고 다시나 문평은 영산강 동쪽에 있으면서 함평에 가까운 곳으로 일로는 감돈리의 국사봉 아래에 많은 저수지가 있는데 많은 지역이 보도연맹이나 프락치를 지역경찰이 데려다 사살한 지역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발굴 영역이 아니라 제보주준으로 처리는 하되 지역 탐문은 하여그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었다.
4)김행호(83. 참전용사님)님의 증언이다.
해병대로 '51.12월에 서화계곡 까치봉 일대에서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 자강도 지역 포로 수용소에 있으면서 탄광촌이나 학교 건물로 옮겨다니는데 비행기 포격으로 다수가 사망하게 되는데 인근에 매장하고 만다.
국가적 차원에서 포로수용소의 실태를 조사하고 인도적차원으로 접근하여 더 늦기전에 우리의 전우를 발굴하여 달라.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결국 허사도의 위폐 107위는 해당지역에서 전투에 의해 전사한 인원의 것이 아니고 차후에 북한군의 소행으로 목포에서 바지선에 실려 죽어간 경찰 또는 군인의 숫자에 대한 기록이고 따라서 실제 발굴 하기란 곤란한 것으로 판단 되었다.
"진도 갈명도 피해"
나는 20여년을 유해발굴에 매진하며 몇번의 민망한 질책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나의 자존심에 걸린 문제로 속상한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철없는 욕심이 빗은 결과라 생각하여 크게 가슴속에 돌주먹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그 하나는 의왕에서 만난 어느 신사분이 과천 문원동에서 응봉을 넘어 이수봉-국사봉으로 해서 서울 외곽순환도로에 이르는 구간에 소대병력이 죽어서 시신이 있는데 왜 찾지 않느냐의 제보인지 항의성 민원인지 모르지만 듣게 되었다.
그래서 존함을 알려주시면 확인하여 연락하겠다고 하니 "너희 군바리들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별 신상을 알려고 그래. 됐어 이사람아~"하고 가버렸다.
물론 이구간은 한강선이 무너지고 후퇴시 제2사단과 제7사단 병력이 타고 퇴각하게 되는 곳이고 1.4후퇴이후 재반격으로 서울 수복간에는 구군 제1사단이 모락산 전투등을 중공군과 치룬 곳이기에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는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등산로 등의 발달로 눈에 보이는 것이 발견되지 않은것은 없다고 본다.
두번째는 제주도 북제주시 지역 국민방위군 피해를 현장 조사가서 우리 운전병이 카메라를 승인없이 들이댔다고 몰상식한 놈들이라고 화를 내고 가버린 신사분이다.
물론 사전양해를 구하진 않은 문제는 우리가 잘못했다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받는 증언이나 제보내용이 반국가적 이적행위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도 아니고 전쟁에 숨져간 호국용사님들의 유해를 찾는 일인데 참 거시기한 잔혹한 말씀에 눈물이 나야했다.
세번째가 바로 갈명도건으로 내가 뭐루 알려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영광 삼화리에서 발굴 작전간 법성포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려는데 우리 복장을 본 한 노신사께서 책임자를 보자고하여 내가 앞으로 나서 갔더니 아주 비웃는 말투로 "당신들 출장비 축내고 다니는구만, 왜 갈명도는 조사하지 않고 있는거요? 경찰과 군인이 얼마나 죽어 있는데" 라 한다.
하지만 같이 기분나쁜 소릴 할 수는 없어서 선생님 연락처를 알려주면 저희들이 확인하여 연락을 드리겠다고 하니 "자네들은 무슨 뚝하면 연락처야 난 그런 것 필요 없어요. 빨리 가서 조사나 해"하고 가 버렸다.
그런데 마침 충북대 박교소팀이 과거사 진실위원회의 통제로 갈명도 유해발굴을 들어간다고 하여 들어 봤더니 보도연맹 피해 지역이란다.
"진도 갈명도 피해('50.7.14)" : 해남 각지에서 끌려온 보도연맹원들을 경찰이 무인도인 갈명도(갈매기섬)로 끌고가 학살했다. 이렇게 끌려간 인원이 260여 명인데 당시 현장에서 산이면 사람 2명이 생존하여 유족들에게 전달되고 유족일부는 '64년 4월에 몰래 갈명도를 찾아 시신을 수습하였다 한다. 이것이 다시 2002년 조사위에서 일부를 발굴하였는데 정확힌 실태조사는 중간에 중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
라. 남원-여수 부근 전투
1)남원 부근 상황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는 장성을 점령한 뒤 7월 24일 이른 아침부터 차량으로 남원을 목표로 기동하여 민부대 방어진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민부대는 주력부대인 김병화 부대를 비롯하여 이 영규 부대와 오덕준 부대, 그리고 해병 김 성은 부대 등을 통합하여 임실 북쪽에 배치하고 남원 서축에는 경찰 일부 병력만을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이 남원으로 지향함에 따라 모든 부대들을 남원으로 다시 불러 들이지만 이 영규 부대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남행열차 편으로 남원을 경유하여 구례로 철수하고 이 후 통신두절로 부대행동은 임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졌다.
남원 운봉 덕산리 지역주민 간단회 내용이다.
처음 초기전투관련 내용은 별로 없다. 전사에 나와 있는 지역에 가서 물어보면 군인이 온지도 잘 모르고 그저 얼굴만 내밀다 함양쪽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다 다수다. 그러나 공빝토벌과 관련된 내용은 한도 많았고 할 이야기도 많았다.
이지역 사람들은 전쟁 당시에 국군과 북한군이 복장을 바꿔입어 도대체 누가 적군이지 아군인지 구별이 힘들었다 한다. 공비토벌 작전시 부역등의 이유로 애매한 주민만 피해를 많이 보았는데 빨치산을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준 것이 아니고 살려니 어쩔 수 없이 도와주게 되었다 한다.
1)이동식(65.'12)
달궁, 세걸산 일대에서 전투가 치열했고 전투경찰이 많이 희생 되었다. 그 당시는 군경이고 빨치산이고 마을에 내려오면 부역으로 강제로 잡아서 데려간다.
2)이양형(81)의 증언이다.
본인은 노무자로 18일 동안 국군을 따라 다녔다. 반야봉 일대가 전투가 치열했는데 본인은 주로ㅜ야전선을 지고 다녔다. 그당시에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동상에 걸려 많은 인원이 부상도 되고 죽기도 했다. 주로 능선상 보이는 유해는 어느해인가 수거하였다.
3)김길주(77)의 증언이다
원평(가재)에서 빨치산과 내통했다고 민간인이 많이도 죽었다. 그리고 군인들이 불을 질러버려 집들이 다 타버렷으며 민간인 희생자는 다이에 유족들이 찾아서 묘를 썼다.
참전용사 박진옥(75. '08)의 제보 내용이다.
"제11사단 의무대 수송중대 소속으로 남원에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다. 당시 사단 지휘소는 남원 농림학교에, 의무대는 도립병원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사자 15명의 유해를 남원에서 함안 방향으로 가는 도로상의 강이 흐르는 언덕 왼쪽에 유해를 매장했다."는 것이다.
현장조사결과 흐르는 강은 요천이고 함양에 이르는 길은 24번도로와 12번 도로, 19번 도로등이 발달 하고 있었다. 마침 또 다른 참전용사님이 증언을 해주시어 광한루에서 보이는 강가 언덕이라고 하시며 80년대에 전우들이 나서서 현충원에 안장을 추진하였다고 하여 아름다운 결말이 났다.
김영남(남양주)의 민원이다. "선친이 애국 청년단 단원으로 임실 전투에서 전사하여 경찰들이 임실지역 공동묘지(옛 경찰서 뒤) 초입에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생전에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유해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민원이다.
우리가 애국청년단등 비군인전사자 명단에 찾아보니 아버지 "김창용"은 없다. 그러니 비군인 전사자의 처리문제가 사실 엄청난 과제인데 지금 아무도 모르는체 하고 지나간다.
따라서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님을 양해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먼저 우리가 발굴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민원은 이미 다른 곳에서 접수하여 조사가 되어 있었다. 그 민원은 왜 나라위해 사운 인원인데 국립묘지에 못가고 동네 공동묘지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임실호국원과 업무협조를 해보니 지역기관장의 동의가 있으면 안장이 된다고 한다. 분명히 묘역에 전투요원이라고 되어 있으니 지역경찰서장과 군수, 제35사단장의 협조가 있으면 가능하다는 유권해석이 주어져 우리가 발굴을 지원하여 8구의 유해를 호국원에 보내드렸다. 그러니 이분의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한가지 참전용사 유가족의 헤택은 아직 주어지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전쟁기간에 지역에서 군인이나 경찰이 없는 전투력을 복구하기 위하여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활용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만해도 행정망이 갖추어지지 못하다 보니 실제 참여한 인원들의 명단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 육본 부관감실에 비군인전사자 처리과가 있을 정도로 많은 자료가 있지만 한문 실력도 요즘 인원들은 부족하고 분석내용을 작성못해 지하에 수장된체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솔직히 말해 많은 인원이 전투에 참여했으면서도 행정미숙으로 참전용사가 되지 못하고 있고 반대로 많은 인원은 엄밀히 전투경력이 없는데도 똑똑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인후보증이 되어 참전용사로 만들어진 인원도 부지기수다고 봐야 한다.
"국방부와 육군은 하루빨리 비군인전사자 실태를 관련자료를 면밀히 검토.분석하여 공개해야 한다. 언제까지 끌어안고 있을 것인지 이미 그 부모님과 형제세대는 다 돌아가시고 2세데가 나이 60이 되어가는데 기막힐 뿐이다."
2)구례 부근 상황
일부의 적이 섬진강 상류를 도하하여 남진하고 있었다. 7월 24일에 북한군 기동부대가 남원 시내에 들어 오고 남원을 방어하던 민 부대, 오 부대, 김 성은 부대는 운봉 일대로 미리고 서해사는 함양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23일 제1연대가 담양에서 동진하여 순창에서 남원 방향으로 진출하고 24일에는 남원이 피탈된다. 이때 열차편으로 구례로 빠졌던 이 영규부대가 구례 신월리에서 부대를 수습하고 있었다.
전남지역 사령관 이 응준 소장은 각 지역에서 물러난 경찰 1,500여 명을 3개 부대로 편성하여 구례 신월리에 1개 부대, 1개 부대는 장흥으로 출동, 1개 부대는 순천 서북방 12km 지점인 학구 부근으로 진출시켜 적을 방어토록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적의 위력앞에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며 이 영규부대는 하동에 이르는 도르를 따라 일단 화개장터러 철수한다.
적이 24일 늦게 구례를 점령하고 25일 하룻동안 부대정비를 한 후에 다시 국군을 차량으로 추격하게 되는데 이 영규 부대의 김 필상 소령은 화개장터 지서 돌담을 이용하여 적을 기습 일시적으로 격퇴시키고 하동으로 철수하게 된다.
"화개장터에서 여수.순천학도병이 전투를 했다는데 이 기록은 어디가고 김필상 소령 부대가 전투했다니 어떻게 된 것인지?"
화개장터에서 전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유해발굴 작전을 하면서 하동 계동마을에서 들었다. 전사책에는 학도병의 이야기는 없고 이영규부대의 김필상 소령이 지휘하는 부대가 전투했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이 전투에 참여한 참전용사 정호영씨는 학도병 참전 최초의 전투라 하는데 과연 맞는 이야기인지?
또 어느 기록에는 정래혁(전국방장관)부대가 이곳을 지나갔다는 등 많은 의문점을 나타낸다.
먼저 탑리에 있는 학도병 추모비의 내용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 당시에 전남 여수.순천18개중학교에서 15~18세의 어린 학생 180명이 자원 입대한 뒤 7월 25일 전력적 요충지인 하개장터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70여 명이 사상 도는 실종돼 그중 27명의 영령이 묻혀 있다고 되어 있다.
이 학도병 이야기는 1950년 7월 13일 전남 순천에서임시 주둔하던 제15연대에 학생들이 대거 지원, 입대하는것으로 시작된다. 이 학생들은 입대할 의무가 없던 전남 여수, 순천, 광양,보성,고흥,강진 등지 17개 중학교 183명이었다. 독립 학도중대로 편성되어 9일간 기초군사훈련만 받고 전투에 참여하며 최초의 학도병이라 한다.
이상의 기록에서 김필상 부대에 결국 편성된 학도병이라 유추되며 다만 전사에 학도병이란 관련 사실이 전혀없는데서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물론 최초의 학도병이였는가는 사실 많은 검토가 주어져야 한다. 수도사단의 진천 잣고개 전투시 새로운 사단장으로 부임해간 김석원 장군을 따라간 학도병결사대는 이보다 2주 빠른 7월 초의 전투라면 오히려 여기가 더 빠른 전투다. 하지만 이곳에 학도병은 대다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산화해 갔고 하동 탑리는 여수의 정호명이라는 참전용사가 살아계셔 추모제가 이어지는 등의 호국보훈행사를 하동군과 협조하여 매년 진행하기에 조명을 받는 전투가 되었다면 어떨까. 나는 이곳의 발굴지역을 결정적인 제보자를 만나게 됨으로써 10구의 유해를 발굴해낸 장본인이다. 정호명씨도 최소한 5회 이상은 대면하여 그 내용을 들었다.
결론적으로 제15연대 소속 학도병이고 김필상 소령의 지휘하에 있던 독립 학도중대란 사실과 입대할 의무가 없는 전남 여수.순천 등 지역의 학생 183명이 화개장터 전투에 참여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초전투 참여는 검토해야 한다. 명확히 나와 있는 전사내용만 봐도 춘천지구 전투시 참여가 있고 국군 1사단에도 7월 13일에 학도병이 자원입대하고 같은 시기에 수도사단에 학도병이 참여한다고 한다.
다만 탑리는 단위부대를 형성했다는 것에서 차이가 나는데 이 문제도 단순하게 넘어갈 것이아니라 당시의 제15연대의 병력모집 할동을 들여다 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그러면 탑리지역의 발굴배경을 알아 보고자 한다.
화개장터는 탑리지역 전투가 있기 전에도 바로 앞의 섬진강을 건너면 백운산이 자리잡는다. 이 백운산은 공비들의 아지트일 뿐만아니라 '48년도 여수.순천 반란 사건시 반란군들이 가장 많이 숨어들은 곳 중 한 곳이다. 바로 동북방에는 쌍계사가 있고 지리산이다.
나는 하동 쇳고개전투(7월27일 미 제24사단 제19연대에 배속된 미 제25사단 제29연대 3대대가 하동을 공격하려 기동을 하다 선발대가 쇳고개에서 나머지 본대는 계동 밑에 있다가 두전동 방향으로 밀리면서 횡천강 지류인 무명하천변에서 349명이 행방불명이 되고 그 해 9월 말 미 제25사단이 하동을 탈환시 유기된 시체 313구를 발견했는데 대부분이 무명천변에 잠들어 있었던 엄청난 전투)에서 전 총참모장인 채병덕 소장이 직격탄을 맞고 전사한 지역을 탐사하려 왔다가 현장을 탐사하고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이미 정효명이란 탑리지역 참전용사의 민원이 제기된 내용을 파악하고 정확한 발굴지역 선정을 위해 화개장터에 들어섰다. 비가 조금씩 뿌리고 있는데 저 앞에 한 어른이 자건거를 타고 오시기에 물어보았다.
"혹시 어르신, 이곳에서 6.25전쟁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시는지요?"
"내가 학교 다니며 그곳에 가서 매장된 흙더미 속을 낫으로 긁어서 시계를 걷어내 차고 다닌 장본인이요."
"네? 그러면 지금 그 위치를 바로 아시겠네요."
"그야 바로 알지. 저기 차밭 위로 오라가면 고개넘어 바로 야."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함께 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직접 이 김영근 어르신('07년도에 72세)을 모시고 바로 현장을 올랐다. 매장 위치를 가리키는 곳에 강변쪽으로 위령묘가 사철나무를 울타리로 형성 되어 있다.
고지 정상은 아직도 돌로 만들어진 개인호가 원형대로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면 섬진교와 백운산, 섬진강, 남원에서 구례를 거쳐 내려오는 19번도로가 훤하게 보였다.
어르신이 매장위치에 서시며 당시를 회상한다.
"그때는 무서움도 없어요. 형들보다 더 좋은 시계를 가지려 몰래 이곳에 낫을 들고 와서 흙속으로 집어넣고 이리저리 긁어대요."
"그렇게 해서 뭐가 나오나요?"
"나만 그런게 아니고 이미 여럿이 그짓을해서 구멍이 뻥하게 뚫려 있어요. 안을 들여다 보면 죽은 사람 팔이나 허벅지가 보여요."
"아니 비록 국군은 아니지만 학도병이란 사실을 마을에서는 몰랐나요?"
"처음에야 몰랐지. 솔직히 이님군이 내려와 해방군이 왔잖소. 그러니 여기 묻힌 사람이 어덯게 되는거요.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고 동네에서 부역으로 가서 시체를 굴려서 파인 물고랑에 집어넣고 흙으로 덮어버리고 만거야."
"참전용사님 이야기가 본인들 한 70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70명이 있을리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규모가 적어서."
"그렇지 않아요. 여기서부터 저기 주도로 있는 곳까지는 상당한 넓이야. 그리고 북한군이 떠나간 이후에 전라도 여수.순천에서 유가족이 와서 파 가기도 했으니 지금 얼마 있는지 모르지."
"그래서 어르신은 시계를 어떻게 하나라도 꺼낸나요?"
"하하하, 그럼 바로 한두번 시도에 따각하고 걸리는 소리가 나서 팔을 깊숙히 집어넣어 찾았지. 그런데 팔둑이 하나 같이 나오는거야. 그러니 시계만 빼고 밀어넣고 말았서요."
나는 어르신을 모시고 하개장터로 이동해 점심을 먹으려했다. 그러나 어른이 아는 집이 있다하여 화개초교쪽으로 이동하여 매운탕 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여럿이 있다. 그래서 바로 다시 여러 사람들의 관련 제보를 듣기로 했다.
주민들의이야기는 대체로 북한군이 아군 복장을 하고 이미 진주해 하개천 맞은편에 은거하고 있었고 학도병이라고 하는 군인은 현 파출소 근처와 고지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점심시간대에 전투가 벌어져 많은 피해가 발생했는데 일방적으로 적이 박격포를 퍼붓고 기관총으로 쏘아대 북한군은 죽지않고 우리 학도대만 여기저기 다 죽었으며 살아난 사람은 다시 남쪽으로 도망쳐 갔다고 한다. 그러고 지역 주민이 동원되어 유해를 파인 계곡에 집어넣고 흙으로 덮었다는 것이다. 그 후 아군이 들어왔을 때에 유족들이 들어와 일부 수습해 갔다고 여럿이 말을 했다.
1)이광섭(77)의 증언이다.
순천 학도병이 모여들어 점심 시간대에 인민군이 기습하여 많이 죽었는데 당시에도 유족들이 일부 찾아갔고 찾아가지 않은 유해를 옮겨서 매장했다.
하동 쇳고개는 미군이 얼마나 죽었는지 걸어다니지도 못하게 죽었다.
2)주우호(71)의 증언이다
나는 직접 부역에 참여했는데 여기가 아니고 지리산이다. 지리산 세석평전, 대피소 있는 약수터자리에 공비들이 가장 많이 죽었고 공비는 목을 잘라서 처리한다. 현재 쌍계사 좌측의 칠불사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 상태에서 아군이 불을 질렀다. 공비들이 골짜기로 이동해 다니다 대량 피해를 입더라.
3)이강문(68)의 증언이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 때도 진압하러 9연대가 왔다가 정금리 앞산에서 아군이 11명 전사했는데 보이는 유해는 일부 처리했고 일부는 그대로 있었다. 주변에 철모,대검,M1소총도 있더라.
우리는 이곳 탑리에서 '07년도에 10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특이한 것은 학교별 뺏지가 나왔고 특활관련 복싱부, 탁구부 박클로 나왔다. 훈련을 받지못해 실탄을 탄포에 넣어 어깨에 맨체로 전사해 있었으며 예수상도 나왔다. 특히 DNA 감식으로 '송원종'이란 학생이름이 알려져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하지만나머지 9명의 유해는 당시의 학교 학적부에서 참여인원을 분석하고 그 유족을 식별하는 활동이 늦어져 계속 진행형이다.
마을분들의 제보에 따라 정금리 야산을 샅샅이 탐사하고 발굴했지만 철모와 반합, 탄피, 탄창 등 유품은 많이 발굴 했으나 유해는 찾지 못했다.
"19번 도로 좌우측에 국군이 여기저기 죽어서 부역으로 다 길옆 고랑 등에 묻었다."
발굴도중에 지역 탐사간 소설 토지의 활동장인 악양에 악양초교 뒤에 많은 유해가 묻혔다 해서 현장으로 달렸다. 가는 도중에 최참판댁에 잠깐 들어가 입구에서 문화해설사를 만나 유래를 듣는 과정에 바로 맞은편 집에 90먹은 할아버지가 살고 게시다 하여 바로 찾았다.
"어르신 대화를 나눌수 있으세요?"
"그럼, 뭘 알고 싶으세요?"
"저희는 6.25전쟁 전사자를 찾는데 동네분들 이야기가 저기 토지에서부터 길에 죽은 군인인지 민간인지 많았다고 하던데 혹시 아시나요?"
"내가 바로 북한군 부역으로 참가하여 19번길 옆에 죽어있는 군인이나 경찰뿐만 아니라, 피난민들이 많이 죽어 있어서 지역민들이 단가나 괭이.쇠스랑 등으로 바로 길옆에 고랑이나 푹 파인 곳에 한구에서 몇구씩 집어넣어 묻어버렸지"
"그럼 거동이 가능하시면 현장을 가서 지정해 줄 수 있습니까?"
"가능하지요. 그런데 그 길이 그때는 달구지 길인데 이제는 넓은 고속도로처럼 실태가 바뀌어버려서 많이 변했지요. 지금 길 옆으로 걸어가 보면 주변에 볼속볼속 튀어나온 곳을 한번씩 파보면 될까 싶은데요"
"악양초등학교 뒷산에 죽은 국군 묘가 있습니다."
문화해설사와 계속적인 이야기중에 또 다른 분이 참여하여 하나의 정보를 주었다. 본인이 알기로는 악양초등학교 주변에 가면 아마도 국군이 죽은 지역을 알 수 있을거라 한다.
나는 할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여 우리끼리 탐사하기로 하고 악양 면소재지로 갔다. 바로 초등학교로 들어가니 학생들은 대부분 집으로 가고 마침 안전지킴이 분이 계셨다. 연세가 들어보여 인사를 들이고 온 목적을 말했더니 본인이 월남전 참전용사라 하며 토백이라 한다.
"그럼 학교에 6.25전쟁 당시에 북한군 지휘부가 있고 야전병원도 있었다는데 보셨습니까?"
"내가 그당시에 5학년으로 북한군하고 놀았어요. 옆에 가서 심부름도 하고, 밥도 얻어 먹고, 병원도 보았지요."
"그럼 혹시 국군이나 경찰이 부상당해 있는 모습은 본적이 없으신지요?"
"그때 부상병들은 복장을 대부분 벗고 있어서 누군지 알 수 없어요. 여기 학교가 미군 폭격기에 얻어맞는 것, 포탄이 날아와 건물 일부가 날라가는 것 보았어요. 그러고 집에 갔다가 어머니한테 얼마나 혼이 났다고~."
"지금 건물은 증개수가 이루어졌을 것이고 같이 학교뒤 소나무가 있다는 곳으로 우릴 안내해 주시겠어요?"
우린 안전지킴이 아저씨를 따라 학교 뒤로 차를 돌렸다. 그리고 의중이 가는 곳으로 가니 밭을 개간하여 옛 모습이 아니였다. 그래도 동네분들의 묘소가 몇개 있어서 지형만은 변하지 않했지만 가매장 될만한 곳은 모두 밭으로 되었고 감나무가 심어져 있다.
정확히 아군인지 북한군인지 알 수없는 곳에서 당장 발굴하기란 곤란하다. . 우리는 죽은자에 대한 묵념을 올리고 현장을 나왔다. 유해발굴 사업의 한계점이다.
이곳 하동지역의 보도연맹은 150여명이 육십령 고개와 바로 앞 백운산자락 매티재에서 죽었다.
1950년 7월10~24일 어간에 경찰과 특무대(CIC)에서 주관하여 하동군 일대는 이미 파악돼 있는 사찰결과를 이용하여 1차로 80여 명이 경찰서에 집합하여 트럭 2대로 실어서 산청군 육십령에서 학살되었다는 소문, 2차로 50여 명이 하동 유치장에서 섬진강 건너 광양 진월면 백운산 끝자락 매치재로 데려가 총살되었다는 소문만 무성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파악된 하동의 보도연맹원은 3,000여 명이 넘는데 이들 대부분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3) 순천 부근 전투
북한군 제6사단의 제603모터사이클연대의 지원하에 제13연대 및 제15연대가 보성 일대에서 순천으로 향하고 있는데 국군은 전남지구전투사령관 이 응준 소장 휘하에 군.경 혼성병력 1개 중대규모 밖에 전투력 발휘가 어려웠다.
따라서 여수에 있던 김병휘 중령에게 순천방어를 지원토록 한다. 김 중령은 여수에서 제15연대(제5교육대)의 잔류병력과 정부자산을 소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작업을 김 종오 소령에게 맡기고 즉시 탄약 한 상자를 짚차에 실고 순천으로 달려갔다.
이대 순천 북방 365고지에는 박창록 대위가 30명을 지휘하여 전투를 하고 있는바 여기에 탄약을 건내주었다. 그러나 순천 시내에는 약 500명의 경찰이 집결해 있었으나 탄약이 떨어져 오합지졸이엇다. 이때 북한군이 시내로 진입하는 상항이라 365고지는 독단적인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지휘부는 여수로 후퇴해 갔다. 그리고 여기서 며칠후 민간선박을 이용하여 삼천포로 향했다.
"순천 조곡동의 경찰 유해 17구를 발굴하다."
순천시 유족회 지회장인 권귀안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경찰이 18명이 묻혀있다는 것이다. '50. 7.30일경 순천시 조곡동 죽도봉 부근에서 경찰과 북한군이 교전중에 황인주 경위외 23명의 경찰관이 전사하여 아무도 거둬주지 않는 상황에서 그래도 누군가 그 완장들의 감시망을 피해 죽도봉 산기슭에 매장하였다. 그러다 '82.5.31일 지금의 조곡동 627번지에 땅을 기부체납받아 유해를 옮겼으며 갈수록 관리가 어려우니 발굴하여 현충원에 안장해 달라는 소원이었다.
나는 유족회에 찾아가 좀더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현장에 갔다. 기찻길을 건너 산 밑에 아담하게 만들어진 곳인데 상태가 매우 양호하였다. 주변에는 삼나무가 방풍을 두르고 있어 지역 현충지로써는 아주 안성마춤으로 보였다.
"이런 형태의 현충지가 앞으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가 했다."
좀더 부연하면 전사내용과 일치하는 증언들이다. 경찰들이 어디로 탈출할 곳도 없고 누가 지휘도 안하고 하동교가 폭파되어 거기까지 갔던 경찰들이 다시 뒤돌아 오고 총은 이미 총알이 없어 사용할 수도 없어 버렸다. 몽둥이 들고 산모퉁이나 길모퉁이에 숨어서 어쩌다 재주없는 북한놈 지나갈 때 한방 갈기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 총 한방 맞으면 쓰러져 죽는다. 도망가지 못하고 전전하던 군인도 어쩌다 죽어있는곳도 보인다. 북한군이 발로 차버리면 데굴데굴 마지막 숨이 끝나는 순간까지 헐덕이다 숨졌다. 그 다음은 모른다.
동네사람들이 어떻게 손대지도 못한다. 파리들이 몰려들고 한 3일지나니 코에서 귀에서 무슨 벌레가 기어 나온다. 까마귀가 날아들고 동네 개들이 벌건 입을 들고 컹컹거리며 온다.
산속에 여우도 달겨든다. 언제 경찰이라했던가. 옷도 누가 다 벗겨가버리고 신발도 벗겨가 버렸다. 펜티마저 없으니 정말 기막힌 현장이 지나간다. 그러다 소문에 하동에서 미군이 당하고 북한군이 강을 건너 들어갔다. 어쩐지 동네에 군인이 안보이고 완장찬 놈들이 설친다. 자전거를 타고 호르라기를 물고 완전 일본놈 순사다. 여성동맹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인구조사를 한다. 숨어있는 남자를 색출하고 집안에 있는 양식이나 돈될만한 것 빼앗아 가려고 조사하는 것이다.
"무심한 삼나무는 잘 자라 아늑한 정원같다."
이런 시간이 지나는데 밤이면 누구도 모르게 이 경찰들을 한곳에 매장하는 이가 있다. 이곳 저곳에 아기묘같은 것이 생겨난다. 하지만 문제도 생긴다. 마침 열병이 돌아 제대로 먹지못한 어린애들도 죽고 어른들 중에도 죽는 이가 생겨 묻혀진다. 이중에는 유족이 없는 떠돌이 분도 있다.
드디어 아군이 다시 올라오고 빨갱이들이 도망간다. 지하에 숨어있던 토착 반공대원들이 어떻게 알고 튀어나와 빨갱이들을 죽인다. 밤에 몰래 짐싸서 어디론가 도망가는 빨갱이와 추종자들(부역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다시 또 여수.순천사건이 재발되는 느낌이다.
"82.5.31일에 지금의 위치로 통합해서 묻었다."
그러다 숨진 경찰의 한 유족이 본인의 땅을 기부채납하여 주변에 흩어져 있는 유해를 모두 이곳에 안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호국행사를 이곳에서 해왔다. 그러다 한 30년 흘렀는데 해당 유족이 땅을 돌려달라고 한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새로운 땅을 찾기도 힘들고 발굴하여 현충원에 모셔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증명이 되어야 하는데 이름이 푯말에 있는 몇몇을 경찰기록에서 조사하니 다 맞다. 그렇다면 발굴 후에 처리는 경찰이 하는 것으로 하고 발굴하게 되었다.
"아~, 이런 고통 또한 처음이다. 삼나무 뿌리에 휩싸인 유해!"
조그만 봉분으로 되어 있는 묘를 발굴하니 땅속에는 시멘트 불럭으로 묘모양을 갖추었다. 그런데 이게 엔일인가 하얀 목화솜같은 이불이 봉분안을 휘감고 있다. 우린 놀라서 잠시 발굴을 중단하고 안을 지켜봐야 했다."아이고 용사님, 죄송합니다!"
아니 나무뿌리가 시멘트블럭사이로 들어와 아주 가느다란 실뿌리로 갈라져 온통 안을 감싸버린것이다. 유해는 2차 수습시 원형대로 펴지안고 이장 관에 모아서 옮겨진 모습이다.
나는 지난 15여년을 유해발굴 했지만 이런 모습은처음이다. 모두가 눈시울이 불거졌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삼나무가 겉에서는 잘 자라 멋있게 보였는데 한 10m차이가 나는데도 그 뿌리가 이렇게 파고든 것이다. 묘소지역 가까이에 나무를 심지않는 이유를 바로 알았다.
푯말에 경찰이라고 쓰여진 분은 경찰에서 처리하고 그렇지 않은 분은 우리가 처리하는 수순으로 감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상한 경우회와 순천 경찰서 대립?"
'12년도에 광양경찰서에서 협조공문이 왔다. 광양에 경찰 묘 9기가 있는데 발굴을 해주면 본인들이 처리하겠다는 취지의 협조 공문이다.
그래서 광양경찰서에 가서 경무과장을 만나 관련사실을 들었다. 내용은 이런 것이다.
6.25전쟁 당시에 광양 주변에 경찰이 많이 전사했다고 한다. 하동대교가 폭파되면서 섬진강을 건너지 못한 경찰이나 군인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몰려 다니다 빨갱이나 북한군에의해 총을 맞고 죽었다. 그러나 그때는 어떻게 손을 못대고 있다가 보기가 거북하고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다 보니 북한군 통제하에 여기저기에 몇삽씩 올려 묻었다. 그러나 유족이 나타나지 않아 수복이후에도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80년도에 강주일보 김재원기자의 건의로 한곳에 옮겨져 매장(덕례리)되어 관리해오다 수해로인한 침수등으로 다시 '90년 5월에 해당 위치에서 침수되지 않는 곳으로 옮겨졌다.
"우리 추모행사 위해 행사비를 지원해 주세요?"
이러다 보니 충혼탑이 있는데도 별도로 이곳에서 경찰들만의 추모행사가 이곳 지역 경우회 주관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경찰서 입장에서는 참 애로사항이 많다며 이번 기회에 현충원에 옮겨야겠다는 것이다.
"광양 경우회에서 경찰서에 왔다."
송기현(80, '12)의 의견이다.
이부락 저부락에 전사한 경찰이 흩어져 있는 것을 '80년 8월에 광주일보 김재원 기자가 한곳으로 모아서 매장하자고 하여 광양읍 전역에 흩어져 있던 경찰 전사자 가묘를 덕례리로 이장했다.
이장 당시에 탄피 및 장구류등 군관련 유품이 다수 나왔고 군수와 지역유지들도 안장식 때 참여 했다. 그러나 자주 수해로 흙이 실려 나가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90.5월에 지금의 위치로 다시 했는데 그때나 차후에나 경찰은 꼼짝도 안하고있었다. 그런데 뭘 지금 파겠다는 건지~~.
우동현, 참전졍찰의 의견이다.
'90년 5월에 옮길 때에 내가 직접 가매장 지역에서 이장하는 것을 참여했고 이장 당시에 9기의 묘에서 몯 유골이 나왔다.
장영석, 광양경우회장 의견이다.
발굴하지말고 현 장소에 그대로 놓고 현충시설로 지정하여 관리 및 보호와 지방행사로 호국행사를 치뤄야 한다.
우리는 함께 현장에 갔다. 대로변에 위치한 묘역은 잘 가꾸어져 있고 주차장도 있다. 경찰서는 파내어 불필요한 행정소요와 예산낭비를 막겠다는 취지고 경찰경우회는 현충시설로 등록하여 계속 지방 호국보훈행사를 치뤄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듣고보니 경찰의 고충도 이해되고 경우회원들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다. 나는 겨우회 편을 들고 오면서 나는 결정권한이 없으니 경찰서와 경우히간에 잘 타협하여의견을 내면 행동하겠습니다라고 여운을 남기고 떠나왔다.
"보성 보성읍 주봉리에 묘가 있고 대대장이 경례를 하고 갔다."
'07년도에 하동지역 탑리(하개장터)를 발굴하는 기간에 전남편성관구사령부의 이동경로를 따라 탐사를 해보았다. 그러는 과정에 이곳 주봉리 4거리에 이르러 빵과 콜라를 마시려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땀을 줄줄 흘리는 나를 보고 남자 사장님이 한마디 하신다.
"익모초를 즙내서 마시세요. 내가 해보니 당귀도 아니고 황귀 백숙도 아니고 그게 최고 입니다."
"감사 합니다. 우선 달라는 것 빨리주세요."
"그런데 그렇게 땀흘리며 어디다녀 오시는 거요?"
"아니 누가 이곳 4거리에 가면 옛날 화장터가 있는 곳이 있는데 그 안쪽에 보면 이상하게 생긴 묘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6.25전쟁 때 전사자란 겁니다. 그런데 숲이 우거져 보이질 않아요."
"아 저기 바로 우리집 뒤잖아요. 내가 그 자리 가르켜 드리지요."
"네? 그걸 알고 계세요?"
"뭔지는 모르지만 전쟁때가 아니고 우리가 알기로는 백선엽장군이라는데 그분이 사령관으로 왔을 때에 공비토벌하러 왔는데 이곳에 태극기를 싼 관을 4개 묻고 중령이 지휘봉 옆구리에 차고 와서 경례하고 가는 것을 내가 직접 보았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괜히 고생했네. 그럼 함께 가셔서 알려 주실래요?"
"지금은 가게를 볼 사람이 없으니 해질 무렵에 한번 다시 와 주시면 함께 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보성에서 1박을 하며 정확한 장소를 직접 목격자를 모시고 찾게 되었다. 강혁식씨인데 정말 우린 그곳에서 3구의 유해를 찾았다. 1구는 도중에 누가와서 이장해 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여기에 당시에 소문이 높은 분이 한 분 있다고 했단다. 그 당시는 얼마나 죽는지 바로 이 길옆이 화장터로 매일 화장이 벌어져 사장님은 그 냄새에 취할 정도였다고 한다. 11살이다 보니 누가 막지도 않고 어떤 때는 화장하는데 유족이 왔는데 먹을 것을 많이 해와서 실컷 얻어 먹기도 했다니 세상은 돌고 도는 물레방아다.
"승주읍 조계산(위폐카드 405위)의 비밀을 밝혀라"
섬진강을 넘기전 순천과 광양 일대는 많은 국군과 경찰이 방황하고 있었다. 하동교가 폭파되어 도강하여 하동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러니 이제는 거꾸로 공비아닌 공비처럼 백운산에 숨어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체질이 않맞아 오래 버티기도 못했다.
마을로 내려와 민복을 입고 부랑생활을 하며 전전하다 붙잡여 북한군이 되기도 하고 일부는 죽어서 그 시신이 유기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에 오기전 단계가 바로 화엄사란 절이 버티고 있는 승주 선암사등 고찰이 줄지어 있는 조계산 일대가 은거하기에 좋은 장소가 된다. 바로 여수.순천 반란군 사건시에도 공비들의 소굴이니 6.25전쟁 때도 소굴이었다고 판단 된다.
따라서 우린 승즈읍 노인회관을 찾아 간담회를 갖기로 한다. '12년 5월에 우리가 승주를 찾기전에도 우린 승암사 입구마을에서도 화엄사(구례위치, 지리산 자락)나 송광사 입구 마을에서도 2~3회 정도의 지역주민 탐문할동은 가졌다. 그러나 결과는 정규작전간 군인이나 경찰의 피해정도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대부분 보도연맹등 지역주민의 의문미상의 피해당한 내용과(100이상의 대규모 피해 현황은 모두 언급됨) 공비토벌작전에 관한 백운산이나 백아산 등에 얽힌 이야기가 주류였다.
이곳 조계산에 관련된 우리가 지난 오랜 기간동안 가졌던 지역 탐사(3회), 간담회 4회(사면에서 증거확보노력)등의 결과는 정규전은 없다. 불갑산 처럼 비슷한 내용으로 산 정상에 오르면 거의 평지처럼 되어 주변의 주민들이 피난하기에 좋고 바로 이곳에 공비들이 아지트를 구축하고 자유스레 활동하며 이 지역일대의 활동을 진두지휘 했다고 보여진다.
또한 이를 소탕하기 위한 토벌부대의 노력은 결국 미군의 비행기로 네이팜탄을 퍼부어 끈이 났다. 이에 따라 많은 공비들이 죽어나갔다고 보여지는데 사실 우린 구체적 흔적도 찾지 못했고 주민들의 이야기로 시체가 뒹굴고 있었지만 멧돼지가 대부분 먹어버려 안보이고 오히려 멧돼지가 이상한 병에 걸려 다 떼죽음 당하면서 일정기간 이 지역에는 멧돼지가 안보였단다.
간단회 결과('12.5.17). 승주읍 노인회관에서 적극적으로 7명의 어르신이 참석했다.
지막기(70)님의 증언이다 : 선암사에서 오르던 조계사에서 오르던 정상에 이르면 평탄하고 장군봉이 우람하게 눈에 띄는데 선암사쪽에서 오르다 보면 무선암(현재)이 있는데 그 큰 굴이당시의 공비소굴 이었다. 이 동네의 웬만한 사람은 짐을 지고 한두번은 부역으로다 올라다녔다.
정상부근에서 공비들과 토벌군간에 연일 전투는 있었지만 그때마다 토벌군은 점령하지 못하고 밤이면 내려와야 했다. 멧돼지가 떼로 죽었다.
최만홍(80,노인회장)님등 다수의견 ; 조게산에 대규모로 전투가 벌어져 지금도 올라서면 정상을내려다 보이는 능선 일대로 개인호나 교통호가 많이 남아 있다. 멧돼지는 사람을 먹고 병들어 집단으로 한꺼번에 다 죽어버렸다.
장박골 등 물이 나는 곳 위주로 집단생활이 이루어졌고 장군봉 안 넓은 터에 피딧줄까지 설치하여 방앗간도 있고 어린이 학교도있고 병원도 있고 마을 사람들이 현혹되어 오른 사람들 생할터였다.
여러곳에 죽은 시신들이 당시부터 얾마기간은 허혛게 뼈가 다 보였는데 언제부터인지 안보였다. 송광사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는 승암골 목재에 많은 피난민등이 죽어가고 재를넘을 때에 목격도 되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오스옥(82)님의 증언이다 : 나는 사실 의경을 따라다녔다. 말하자면 나도 참전 경찰이다. 하지만 내가 의경과 같이 다닌다 하면 집안에 당장 동네 프락치들의 밀고로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당시 이곳의 실정이다. 나는 실제 공비도 1명 사살도 했지만 공적을 남에게 주었다. 보복이 두려웠다. 여기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곧바로 어떻게 저 공비놈들에게 다 중계방송 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에서 결국 가장 힘든 것이 먹고사는 문제다 이걸 해결하려 저놈들도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처음에야 거둬갔지만 동네도 줄 것이 없는데 , 거기다 경찰이나 군인이 반대로 감시자를 심어놓아 내통자를 찾고 있는데 맘대로 주기도 가져가기도 어려웟다.
그러니 이젠 약탈로 빼앗아 가고 그 흔적을 따라 우리는 토벌에 나섰다. 전쟁이 끝나지 직전에 '53년 초에 아예 군인으로 들어가 현역으로 제대했다.
4) 여수 부근 상황
전남편성관구사령관 이 응준 소장은 7월 25일 여수로 철수한 후 이곳을 고수하고자 하였으나 방어할 전투력이 없었다. 있어봐야 군과 경찰로 편성된 1개 대대가 여수 북쪽에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다만 여수에서 편성된 제15연대 제3대대(대대장 김종오 소령)가 정부미를 비롯하여 정부자산을 반출하는 작업을 수행하엿다. 김 소령은 부대 편성 임무를 부여받고 즉시 육사생도 1기생(7월 10일 임관)과 호국군에서 현역으로 복귀한 장교들을 중대장으로 임명하여 학도병 등 신병 700~800여 명을 징집하여 훈련을 실시하였으며 26일 대기 중인 함대를 통해 대피하였다.
반면 경찰은 전투력이 약하여 방어진지가 조기에 무너지고 결국 전남관구편성사령부와 경찰병력 600여명은 적의 포탄이 시내에 떨어지자 해군이 지원한 문산호(LST)에 승선하고 백두산호의 엄호로 26일 07시 30분경 내항을 벗어났다.
"여수시 오륜동에 호국 용사를 현충원에 모셔라(민원)."
지역마다 현충시설이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이는 서울의 현충원이 지리적으로 너무 멀고 (특히 제주도는 동서남북으로 다 있음) 전쟁 당시에는 이런 시설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역별로 뜻있는 분들이 보통 사유지를 무상으로 내놓아 지역의 자가봉송이나 지역전시 숨져간 지역민방위대원, 신원이 파악하기 곤란한 무연고 등을 모시기 시작한다.
원래 이곳도 최초에는 '54. 8월 20일 대한 전몰 유족회 여수분회에서 도지사의 허가로 여서동 산 1번지에 있었으며 도시계발지구로 변하는 바람에 1976년8월 20일에 57기를 쌍봉면 화장리 소재 시립 공원묘지로 옮겼다.
현재 여수시에는 자산공원과 선원동에는 현충탑이, 화장동에는 국군묘지, 삼산면 서도리에 전몰용사 위령비가 있다. 일반적으로 유해는 묘지에 있고 위령비(탑)은 유해가 일반적으로 없거나 있더더라도 소규모이고 화장 유해나 식별이 곤란한 일부 유족의 요구로 조성된 묘비나 묘역이 있는 경우도 혹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뼈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고 우리가 나라사랑하는 충혼의 넋이 잠들어 계시며 언제나 우국충절로 나라를 지키고 계신 곳이라면 모두 현충지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이 민원은 이러한 내용을 설명 함으로써 해결 되었다. 그러나 분명히 참고하고 있어야 할 문제는 섣불리 이러한 묘지를 현충원에 옮기고 지역개발로 활용하려는 불순한 의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행법상 현충원에는 유해나 이에 준하는 화장된 유해(재료 되어 흔적이 있어야 함)라는 것이 입증 되어야 하는데 유해는 토질의 종류나 환경(지하수, 이차 매장)의 변화로 쉽게 부식되어 단 몇년만에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실무자가 많은 상식을 갖고 있어야 하고 유족 및 해당 지역 보훈단체나 지자체와도 충분한 토의와 결론에 도달한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