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내 변변한 시설이 없던 시절, 안양유원지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시는 분들 많으실겁니다.
세상이 점점 넓어지면서 안양유원지의 유명세는 하락을 면치 못했는데요.
아래는 1968년부터 그곳에 터잡아 온 '봉암식당' 주인의 그때 그시절 구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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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안양유원지 역사를 가볍게 보고 가시겠습니다.^^
먼저 옛 안양유원지를 알아봐야겠다. 오래전에도 삼성산 계곡물에서 탁족을 했으나, 돌을 쌓은 인공 풀을 만든 때는 1932년이다.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하여 안양역장, 서이면장, 시흥 군수 및 지역유지가 힘을 합쳐 계곡물로 안양풀을 만들었다.
초석에 새긴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으로 알 수 있다. 안양유원지의 시작이다. 지금은 초석 바위 아랫부분이 콘크리트에 묻히고, 일제강점기 일본 연호였던 소화(昭和)는 지운 흔적이 있다.
경부선 안양역에서 안양유원지까지 도보로 가는 것은 약간 불편했다. 안양역장이 1935년, 1939년 여름에 안양풀장역을 임시 개통했으나, 단발성이었다. 1960년대부터 여름에 물놀이하는 문화가 성행하며 안양유원지는 더욱 유명해진다. 1966년에 안양풀장역을 다시 열어 여름철 주말과 공휴일에 평일 4만명, 주말 10만명이 타고 내렸으나 1969년 여름을 끝으로 안양풀장역은 사라진다.
행락객이 줄어들던 중에 1977년에 큰 수해가 있었다. 삼성산에서 내려온 바위와 돌이 안양대교를 반파할 정도였다. 이 피해로 아름다운 경관이 사라져 계곡은 특색을 잃고, 음식점만 무질서하게 난무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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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분의 구술작업중 중요부분만 모셔오고, 제가 각주를 달겠습니다.
전문은 맨 하단에 있습니다.

안양유원지 깊숙히 '논밭도 없는 험지에' 자리잡게 된 계기에는 월남인이라는 것도 있을 것이다.
1960년 전후 설악산 깊숙히 들어가 '설악동'을 만든 이들 중에도 월남인이 적지 않을 거라 추정한다.

당시 산입구에서 영업의 가장 원형은 과자와 빵 그리고 소주 등속이었던 것 같다.
소주 안주로 무료김치에 만족하지 않고 주문한 닭도리탕은 아마 싼 건 아니었을 것이다.

'예전부터'라고 했는데, 여기서 조선시대까지는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유산문화가 완비되어 있었을 금강산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시대 양반들은 무엇을 자시면서 금강산에들 가셨나 ㅁ1, ㅁ 2 를 보면 닭이야기는 없다.
저명한 민속학자인 송석하가 1940년경 설악을 찾아 온천이 있는 오색으로 내려와서,
'영계백숙과 맥주'를 마셨다라는 기록이 있다.
일제때부터 영계백숙과 등산이 매칭되기 시작했으리라 짐작한다.

1970년대 안양유원지는 나무를 해서 불을 땠다고 하고 있다.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도봉산의 큰절 망월사 역시 주변의 나무를 베고 패서 불을 지폈다.
'옛날에는 등산객이 없어요. 여름에 이 주변으로 왔던 사람들한테 음식을 제공해서....'
일제 때 안양 '포도'와 함께 개발된 안양유원지는 서울에서 한참 먼 곳이었다.
안양유원지가 관악산 등산의 출발점이 된 건 등산의 붐과 함께일 것이다.

안양 유원지의 기본 골격은 1968년, 그리고 1971년임을 알 수 있다.

'80년대 중후반부터 손님이 확 늘었어요'
'80년대로 가면서 차량도 다니고 길도 잘 닦이고 그러면서
손님들이 놀러와서 백숙먹고 물롤이하고 고스톱치고 하는 문화가 자리잡았다...'

삼부토건과 장작불로 70~80마리 영계 백숙하느니라,
한쪽에는 먹는데 다른 쪽에서는 아직 입맛만 다시고....
영원히 남을 그시절 이야기일 것이다.

안양 유원지는 말그대로 유원지였다.
안양역 주변의 1번지도 나이트 등이 많았고....놀기 좋았을 것이다.
최무룡도 오고...한혜숙도 오고......

'돈을 내니까...입구에서 대충 놀지 않고 계곡 깊숙히 들어와 놀더라..그래서 안쪽 식당은 돈벌었다.'
어떤 정책이던 다 똑같을 것이다....~~~

1977년 안양 대홍수로 인해...
당시 봉암식당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계곡쪽으로 수백명이 앉을 천막과 평상이 있었다니....
봉암식당 위치는 여기입니다.


그 시절 안양 유원지의 풀장에서 돈주고 빌리려면 남자 수영복 100원, 여자 수영복 200원 했다.
관광지는 물론이고 등산로 입구에서도 기념품으로 수건이 있던 이유는 바로 이거다.
당시 사람들은 계곡에서 물놀이 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食堂(식당)·각종娛樂(오락)시설 갖춰 安養遊園地(안양유원지)
관악산골짜기의 수려한 풍치를 배경으로 서울도심에서버스로 1시간이면 갈수있는곳.
안양관광호텔을 비롯 13개의 여관,식당 13개소 매점 77...
1972년 당시 안양 유원지에는 식당이 13개였구나.

지금은 안양유원지에서 떠났는데....옥미주'에 관해서 더 읽으시려면 ㅁ1, ㅁ2


20년전에 북한산성 유원지에 가서 막걸리를 마신적이 있는데,
그때 여자 주인이, 자기는 이곳에 시집온지 3,40년이 지났는데 한
번도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에 올라본적이 없다라고 들은 게 기억난다...
그때는 며느리에게는 그랬던 시절이다....
책에는 아래와 같이 당시 봉암상회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있다.


젊은 부부 뒤쪽에 평상과 파라솔이 있다.
건물은 좌측에 있는 걸로 보인다.

지금의 봉암상회 앞 계곡.
간판에는 since 1968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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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주제는 '굴뚝도시 안양의 기억 1970-198'(안양박물관)

속초에 있는 국립산악박물관이 꼭 좀 하시라 부탁할 게 바로 이런 거입니다.
산속에서 청춘을 바친 이나, 산아래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구술작업 말이죠.
이를테면 '설악산'이라는 그림의 완성은 전문산악인 뿐 아니라 그들이 함께 해야 가능합니다.
안양유원지와 관련해서는 봉암식당 주인이 맡았습니다.
봉우리의 '봉'과 바위 '암'을 따서 만들었다는 봉암식당은 지금도 성업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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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유원지에 관해 더 읽으시려면...ㅁ1, ㅁ2
첫댓글 아,,, 안양 유원지...그래도 서울 촌놈이라 삼각산 풀장- 북한산성, 정능,그리고 지금은 북악 무슨 호텔자리에 있던 세검정 풀장만 다녀봐서...ㅎㅎ
그래도 안성 포도가 아니라 포도하면 안양!1 였던 시절을 살아봤고 중앙청-안양을 오가던 103번, 104번을 70년대 무지 애용하던 터라... 애착이 가지요. 80년대 서울대 수목원에 자주가던터라...당시 안양유원지 풍경은 물론 푸~울~징 각자도 봤던 기억이...
안양 포도 사진도 사실 귀하긴 하지만...수목원 사진을 기대합니다....~~~
모든게 너무 쏜살같이 지나갈 줄 누가 알았을까요...~~
초등학교시절 굴레방다리에서 친구들하고 103번 안양교통 타고 안양풀장가서 놀다가 물에 빠져 죽을뻔한 기억만 나는 유원지고요....
여지껏 물하곤 그리 안친합니다....
그후론 성인이된후 관악산 등산후 하산해서 지나온게 기억나네요....ㅎ
굴레방다리라고 하시니..이대부고까지 연결지어...본토박이 서울분이시네요...~~~
안양풀장 물에빠질뻔한 이야기는 의외로 많네요. 그때는 구명보트가 없던 시절이라...
사진으로 만나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