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1931 - )
경북 예천 출생으로 1954년에 홍대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홍익대에서는 당대 최고의 동양화가인 청전 이상범과 고암 이응노를 은사로 만났다. 그러나 1학년 첫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학교가 통째 부산으로 피란을 갔지만 그 두 교수는 함께하지 못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양화과로 이적해 만난 스승이 수화 김환기다. (박서보는 김환기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1961년 이후에 세계청년작가 파리 대회에 참가한 후에 많은 국제전에 참가하였다. 1960년대에 한국에서 나타난 엥포르멜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62 -1997년까지 홍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1970년대에는 백색 묘법 연작을 하였다. 70년대의 한국 모노코롬 회화는 백색과 연계시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는 한지를 물에 담궈 두었다 반죽하여 질감고 모노크롬을 나타내는 특유한 작업을 하였다.
단색조의 색채는 일상 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색을 선택하였다.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7-80년대는 모노크롬의 추상회화가 주도하였다. 단색과 평면에 동양의 전통을 결합한 박서보의 작업이 단연 돋보였다.
그는 60년대의 앵포르멜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앵포르멜은 서양 미술의 영향이 다분히 강하다. 한지를 사용하여 앵포르멜적인 작품 제작을 한 것은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추구한 것이다.
작품은 한 달 넘게 물에 불린 한지를 캔버스에 붙이고 수 만 번 밀어내고, 긁어내고, 갈아내고, 덮어씌우고, 잘라내는 등 이와 같은 행위가 끊임없이 이어져 탄생된다. 이른바 ‘묘법’으로, 이는 보통 손이 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수 명의 조수를 두고 작업을 진행한다. 박 화백이 조수를 두고 작업하는 것은 억제와 ‘무화’無化시키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이다. 오히려 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그는 말한다
미술 아카이브 기관인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최근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한국 추상미술의 대표작가’를 설문한 결과 김환기와 박서보(85·사진), 이우환 순으로 의견이 모였다(2016). 생존 작가 중 최고로 꼽힌 박서보는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주도하고 한국 미술의 세계화에 이바지한 공이 높이 평가됐다. 김환기가 한국적 추상미술을 개척했다면 박서보는 한국적 미술 유파로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는 ‘단색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런 작품은 팔리는 작품은 아니었다. 60-70년대는 한국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 시기였으므로 한지 작업은 각광을 받았다.
“한평생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그린 게 뒤늦게 빛을 보네요. 고생했던 아내는 수십 년 쓰레기더미처럼 천대 받던 그림이 세계적 전시장에 걸린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더군요. 1958년 덕수궁미술관에서 현대미술가협회 전시가 있었는데 당시 1,000호짜리 서너 점을 붙인 초대형 작품을 내놓았어요. 그런데 셋방살이 전전하며 이사 다니는데 둘 곳이 없어 결국 태웠건만 물감이 두꺼웠던지 잘 안 타더라고요. 몇 년 뒤 그 동네를 지나는데 무허가 판잣집의 지붕이 된 내 그림이 보이지 뭡니까. 비록 가난한 판잣집에 살지만 덮고 사는 그림을 위로로 삼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랬어요.”
2000년 대에는 백색에서 선홍색, 분홍색, 파랑, 연두 등 색채가 드러가는 모노크롬 회화 작업을 하였다. 한지를 며칠 간 물에 담궈 두었다가 캔버스에 올려 놓는다. 긁은 연필로 그으면 골이 파진다. 한지가 마르기 전에 반복하여 연필로 긁으므로 요철을 만든다.
저녁에도 새빨갛게 불타는 단풍을 보고 탄복한 그는 자연의 위대함에 압도됐다고 한다. 다음 날 다시 본 단풍은 전날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이렇게 보면 빨간색이고, 저렇게 보면 보라색을 띄는 자연의 오묘함으로 인간의 정서를 치유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색은 정서치유의 도구였던 것. 이후 그의 작품은 강렬하면서도 우아한 색으로 표현된다.
첫댓글 다시 태어나도 화가로 태어나고 싶은 생각과
하두 고생을 해서 문화 건달로 태어나 남의 좋은 작품을 사서 그걸 감상하고 즐기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이 충돌한다는 박서보 작가의 말이 가슴을 울렸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생판 모르고 있던 박서보를 쬐끔이라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