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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참의 바통올 받을 것인가?
信天함석헌
창조 이전부터 내려오는「바통」
인생의 역사는 릴레이 경주와 같다. 날 때는 바통을 받아들고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고, 갈 때는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여러분은 아직도 바통 넘길 생각까지는 안할거다. 보통으로 말하면 아직도 몇 십년 더 살아야 할꺼니까. 나는 이제 죽을 날이 가까왔기 때문에 요새는 그 생각만 한다. 바통, 아무래도 넘겨줘야 하잖아? 한 바퀴를 다 달리고 마지막이 가까워 지면 저 사람이 보기쉽게 바통을 내들어야 한다. 나도 변변치 않은 거지만 바통이 이건 줄 분명히 볼까하고 지금 이 말을 한다. 이제! 뛰는 사람이 내들어서 이럭해야 하지, 저 사람에게 암만 쥐도 못보면 소용이 없잖아? 그러니까 뛰기는 실컷 뛰었다가도 바통 넘겨주지 못하면 소용없고, 저 사람도 아무리 뛴다해도 바통 받아쥐지 않고 뛰면 소용이 없다.
우주창조 이전부터 우리에게 물려오는 뭣이 있다 그말이다. 그 바통은 내 것만이 아니라 저 우주 창조하던 때부터, 아담이란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대대로 오는 것이 있다. 사람은 받는 것이요 주는 거다. 받아 가지고는 거기 한 걸음을 더해가지고 다음 사람께 준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됐다. 그래도 동물과는 다른, 요것이 그래도 뭣과도 다른, 요것이 인간적인 거다. 요렇게 보면 그게 그래도 없어지지 않고 이렇게 와서 그걸 받아서 나도 그래도 이날까지 완전치도 못하지만 인간이라 그랬으니까 죽는 순간이 가까왔을수록 내 죽는 걸 보 면 옆에 사람이「그렇다! 저거 그랬군!」그런게 있어야 하겠는데, 그게 바통 넘겨주는 건데, 그러려면 이걸 이렇게 분명하게 내 들어야 한다. 될 때는 뛰느라고 보이지 않게 쥐는지 모르지만 마지막 순간이 올수록 이걸 내들어서「이게기다!」하고 보기쉽게 하여야 할게 아닌 가. 그래서 받을 사람도 될 수 있으면 주의해서 자기의 금을 지키면서, 시간을 놓치지 않으면서, 될수록이면 분명히, 될수록이면 빨리, 될수록이면 아주 확실히 받아들어야 한다. 빠르게 받아든다고 하는 것 하나, 확실히 받아든다고 하는 것 하나, 그리고 그것이 내 줄의 사람인지 다른 줄의 사람인지 확인하는 것이 하나, 그것이 중요 조건이다. 다른 것 받으면 또 못쓰니까. 그런 것 생각을 해서 분명히 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치보다도 더 중요하다. 나라가 문제 아니라 나라보다 그게 더 중대한 거다. 나라 이제 없어지면 또 다른 나라 세웠으면 그만이지 뭐야. 옛날에 있던 나라 다 망했지 뭐. 이집트 망했다 다 결단났지만, 이집트란 나라는 망했지만 이집트에 있으면서 그 인간답게 살았던 그 넘겨준 바통은 안 없어졌어. 그래서 그것이 로마로도 갔고 희랍으로도 갔고 지금 유럽으로도 갔다. 그렇잖아? 그게 중요한 거다. 그것은 사람에서 사람으로만 된다. 그 껍데기에 있던 모든 제도는 다 떨어져 나가고 알속되는 것만이 바통 모양으로 개인에서 개인으로 전해져 왔다. 그건 제도적으로는 넘어가지 못해. 개인으로 되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넘어오는 거지. 양심이 있다면 지금 이자리에서도 뜨끔할꺼예요.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은.
죽은 모양을 보여준 예수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 돼서 바통 생각 잊고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알고 있단 그말이야. 당연한 것처럼 해. 그거는 이 문명이 어느 잘못 된 데가 있어서 그래. 개인적으로 만나면 그 사람들이 다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그 지금 제도라는게 있어서 거기 속해 있어서, 다 그 종노릇을 하고 있어, 그 점은 뭐 미국도 마찬가지. 소련도 마찬가지. 중공도 다 그래. 세상에 크다는 나랄수록 더해요. 그래 나는 언제부터 하는 말이 내 대적은 국가주의다. 소위 대국주의라는 것, 큰 나라라는 것이 있어 가지고 사람에게서 인간성을 뺏아 버린다. 바통이 없어졌단 말이다. 인간이 인간노릇 하자면 그런 주의 없어져야 할 것이다. 국가라는 이름하에 그것이 이 국가라고 해서 수백만명을 마구로 죽인다든지, 그런 일을 20세기의 문명이 아주 당당하게 자행을 하고 있어. 그러한 다음에는 인간이 무사하게 옳게 살아갈 리가 없어요. 어느 구석에 됐다고 하지만.
그 바통은 제도도 아니지만 또 학문조차도 아니다. 무슨 철학으로. 됐다는거 아니다. 인간적으로 생각을 할 때 도리어 학문했다는 사람은 거기에 뭘 뭘 변명을 해가면서 어찌구어쩌구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 난 사설 보시오. 어떻게 어떻게 직접 말 은 아니고 요렇게 요렇게 교묘하게 했지. 무슨 말? 그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없이 그렇게 그렇게 살자는 것이요. 답답한 세상이야. 글 배웠기 때문에 그러는거야. 도리어 무식한 사람은 솔직해서 좋아.
영어로 심플(simple)이 양쪽으로 단순하다는 말도 되고 어리석다는 말도 되는 것은 진리, 사실이야요. 심플한게 진리지. 심플해야 사람이지. 교묘하게 요렇게 요렇게, 그러니까 그런데 갈수록 말 가지 자꾸 따지는 것, 말에 말을 따서 요건 뭐냐, 조건 뭐냐, 그러다 보면 인 간은 없어져. 조사당할라면 어려운게 거기 있어요.
그러니까 참을 위하면 위할수록 겉에 보기에는 아주 악한 놈인 것처럼, 나라를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받아야 했으니 어떡하나?
그렇지만 오해를 받으면서도 참을 증거해야 한다. 그게 예수님의 생애가 우리에게 가르켜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잠잠하고 말 안했다는 것은 그래 그런 거다. 말해서, 변론해서, 그 사람에게 들어가나? 이 담에 다 느껴보면 알 것이지만, 이렇게 단절이 있기 때문에 설득이란 있을 수 없소. 다리가 안놓여. 안돼. 겉은 인간이지마는 인간끼리 만난 것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그 인간성을 잃고 앉아서 그러는 그 사람을 내가 인간답게 만들 수 있나? 내가 어떻게 하면 고통을 면할 수가 있나. 그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의 인간성을 눈을 뜨게 해줄 수 있나? 예수가 그때 생각하신 것, 당했던 문제는 그것이었다. 빌라도를 미워했다든지 그런게 아니라 빌라도를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의 인간성을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나, 말은 성경에 그렇게 나온 것이 없지만 문제가 거기 있다 그말이야. 그길이 다른 길이 아니고 십자가의 길이지. 하나하나 말로 할 수 있다면 하지만 말로 할 수 있는 지경 벌써 다 지나갔거든. 다 지나 갔으니까 그 전에 말 다 해줬는 데도 저가 듣지 않고, 그걸 왜곡을 해 가지고 저 자식 없애야 된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름을 빌기를 하나님의 율법이라든지 조국이라든지, 그런다 그말이야. 그러니까 예수 편에서는 그걸 미워하면 마찬가지니까 미워할 수도 없고, 그 사람의 양심을 때려야 되겠는데, 양심 때리려면 어떡하지. 말로만 될 수 있으면 하지만, 말로 하다 안되면, 양심대로 내가 지키다가 죽어서, 죽은 모양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 밖에 길이 없다. 그렇게해도 안 깨닫는 놈도 있지만 그래도 인간인 다음에 대개는 된다. 예수가 죽음으로 인해서 도리어 이겼다는 것, 거기 있는 거다. 지금도 수천년이 됐는데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자꾸 생기는 것은 그때문이다. 약하다면 아주 한 없이 약했는데 그래도 역시 그게 이긴다. 지금도 예수님에 가깝게 지내면 지내는 만큼 이론으로는 설명이 못되지만 역시 사람의 마음을 열고 사로잡는데는, 건져주는데는, 그게 제일 힘이 있다. 내가 희생이 되는 지경에 가면서라도 미운 생각이 없이 거기 잘못을 잘못이라는 것을 아주 당당하게 고해 줘서, 그럭하고 죽으면, 애매하게 죽었을수록 당장은 죽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 때 가서라도 양심은 깬다. 당장 하던 그 사람의 마음은 안될런지 몰라도 적어도 그 주위에 많은 나라의 양심은 깨게 된다. 목적이 어느 개인이 아니라 이 나라의 양심을 깨우는 것, 이 인류의 양심을 깨우는 거니까 그것은 한 사람만 깨워도 좋 아요. 참으로 깬 사람이 있기만 하면 가망이 있는 거야요. 그러니까 아주 어려운 말이지만 베드로가 저희 앞에서 “우리가 사람의 명령에 복종할 거냐,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할 거냐,판단해 봐라”한 거다. 예수와 그의 제자는 십자가에서 바통을 주고 받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요새 이렇게 모양이 어려워지는 것은 다른게 아니고 우리 마음을 단련하느라고 되어지는 일이다. 이것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지. 이런 말은 너무 이렇게 말이 많아서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울꺼요. 하지만 생각해 보시오.
우선 첫째는 사람 봐야 돼. 그 사람을 봐야 돼. 여기 무슨 사건이 일어났다 하자. 사건이라는게 속이는거요. 사건 보고는 모른다. 사실이라 하지만, 그 사실이 사실이 아니요. 가령 어느 운전사가 어떻게 했다, 차가 무슨 충돌이 됐다든지, 사람이 죽었다든지 그것도 큰 일이지만, 그 운전자의 마음, 그때 마음이 어쨌느냐, 어떻게 됐는지 그걸 알아야만 일이 바로 해결될 것 아니예요? 살인강도를 했다 한다 하더라도 살인강도라도 똑같은 것 아니니까 어떻게 돼 그랬나, 그놈의 심정을 알아야만, 정말 사실을 알아요. 또 그것은 그사람의 일만 이 아니라 우리 전체의 일인거다. 그러니까 요걸 어떻게 바로 처결하느냐가 문젠데, 바로 처결하려면 그 사람과 사회를 봐야지. 사건만을 보다가는 안돼.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사건, 사건, 사건하지만 큰 일은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또 하나 죽고 살고 그 것이 문제다. 그러니까 첫째는 사람 생각해야 해요.
그렇지만 다른 하나는 뭔고하니 사람을 보다가는 또 안된다. 그 사람이 나와 무슨 원수가 돼서 그랬어. 나와 원수될 것 아무 것도 없거든. 그 사람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세상에 히틀러가 한동안 권력을 쥐었다, 히틀러가 아주 그럼 제 잘나서 그랬냐, 그런 것도 아니라 그말이야. 크게 보면 그것도 역사에 한 고리로 났던 것, 나도 역사와 한 고리. 커다랗게 보면 역사가 이렇게 굽이를 쳐가는 데 너도 나도 나서 마치 냇물이 흘러가는데 나뭇잎이 떠내려가는 모양으로, 너도 떠 흘러가고 나도 떠 홀러가고, 잠깐동안 만나서 같이 가는 것 같지만 늘 가는 것도 아니고, 높아진 것 같지만 늘 높은 것도 아니고, 낮은 것도 같지만 늘 낮은 것도 아니고, 크게 보면 그런 것은 한동안 내려오다가 마지막엔 다 없어지고 말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는 냇물만이 쭉⎯흘러가는 그것만이 있는 거. 그런 모양으로 개개인의 한 그 꼴은 없어지고, 그건 잠깐동안 나타나는 거고, 남는 것은 영원한 역사의 흐름이, 생명의 흐름이 흘러가는 거니까 될수록이면 그걸 바로 파악을 해야 그게 정말 바로 본 사람이지.
그러고 나면 이제까지해서 사람 꼭 봐야 한다고 했던 그것과는 또. 다르게 사람 그 안에 뭣이 있다. 그 말을 종교에선 뭐라고 하는고하니「하나님이 하시는 거다」한다. 전쟁이 뭐냐? 히틀러라는 놈 나빠서 일으킨 전쟁이지. 레닌이나 맑스가 고약해서 주장해서 나오는 싸움이지. 그렇지만, 또 깊이 들어가면 그게 왜 그러느냐, 그 사람들이 무슨 잘난 사람들이 돼서 온 세계를 자기 맘대로 한 것 아니다. 그들은 죽었고 그 한 사업도 다 망해버렸다. 그놈의 재주로 온 세계가 이렇게 됐다는 것 보다는 이 무슨 역사가 이렇게 될 까닭이 있어 그런 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적인 태도에서 모든 사건을 보는 사람은 작은 인간의 좋다 언짢다를 초월해서 절대적인 하나님이 무슨 까닭에서 나온다고 본다. 문제는 그렇게 정해놓고 그걸 풀도록 해보는 데서만 뭣이 나온다. 유다의 예를 든다면, 예수님은 생각다 못해 마지막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려고 그런다 했다. 그러나 유다 개인을 미워하진 않거든. 유다 잘못이지. 잘못인줄 알지만 그것을 미워하기에는 역사는 너무 크다. 잘못을 아는 것과 그 사람 미워하는 것과는 별개 물건이요! 죄가 있으면 죄는 벌해도 좋지만 죄 벌하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을 죽여버리면 소용이 없잖아? 병을 고치는 것은 좋지만 병을 고치다가 약을 너무 써서 애가 죽으면 소용이 없잖아? 애는 죽이지 않고 병을 내 쫓는 것이 의사지 말이야. 병을 없애기 위해 독약 먹이면 좋기야 하지만 독약을 먹이면 애도 병도 다 없어지니 무어 좋을 것이 있느냐, 그게 무슨 의사냐? 사람을 살려가면서 할라니까 그게 어려운 것이요, 그러니까 이건 모두 하나님의 하시는 것이다. 당장 나보기에 이치와 도덕적으로 어그러지는 일인듯 하나 일이 이렇게 되는 거는 어떤 큰 이유가 있을 거다. 첫째는 내가 내 마음을 깨 끗이 해야 해. 내 욕심이 없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놓고 그래도 일이 그렇게 될 때에는 이것은「하나님의 하시는 것이다.」예수님, 유다에게 대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대로 극진히 했어. 그랬어도 안변해져. 안변해지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이 이럭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당장은 모르지만 이 다음에 가게 되면 왜 그랬는지를 알게 되는 거. 모순이람 모순인 것 같지만 예수가 보여주신 길은 그 길이야요. 그러고 지금까진 몰라, 나는 다른 것은 경험 못해봐도 예수님의 역시 그 길이 옳지. 그 밖에 그 이상 더 다른 길이 없다. 암만해도 우리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길이 있으니까 그런 때는 내 지혜로는 판단은 못하지만 하나님이 모르고 한 게 아니라 까닭이 있어서 했을 꺼라. 우리 보기에 아주 비합리적이요, 내가 보기에 지독히 해가 되는 일이라도, 그렇게 해서만 거기 구원의 길이 생긴다. 이것이 절대 긍정의 태도다. 그러니까 이게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받아들이기 참 어려운 것이요.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은 역사가 이렇게 어려워지는 것을 당하고는 이길 밖에 다른 길이 없소. 절대 믿음의 길, 이 믿음을 넘겨주어야 할 것이요.
복음을 믿어라 !
몇달 전에 내가 번역해 냈던, 제임스 다글라스 그 사람의 말 좋지 않아요. 재판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나를 재판하는게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의 재판정에서 지금 재판을 받고 있다는 거야.
내 오늘 아침에 난 생각이, 시간이 또 많이 갔소만, 오늘 아침에 새삼스럽게 난 생각이, 예수님이 와서 말씀할 때에 “회개하고 복음 믿어라” 그랬어. 「회개」하란 말은 알겠는데, “복음 믿으라”는 말은 지금 우리에겐 아주 감각이 없어졌어.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말을 살려내도록 하시오. 복음이란 말이 죽었어. 이것들 형편없는 것들이 복음주의라고 그래서 복음이란 말이 별별거로 아주 더럽게 지금 사용이 되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그말이 당초 어디서 시작이 됐나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복음을 믿어라”. 자기의 생애와 자기의 하는 말이 복음인데, 한문자로는 福이란 그 福자 아주 나빠, 우리 복이라고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을 연상하지만 본래 말대로 하자면 “기쁜 소식”이라 그말이야. 좋은 소식이라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라, 그러면 “좋은 소식”이라 기쁜 소식이라 그 말이야.
왜 그럼 좋은 소식이라고 그랬나? 요새 조금 어려우니까 그게 새삼스럽게 고맙게 느껴졌어. 오늘 아침에 생각이 나 아주 좋아요. 오늘은 주로 내 마음이 주로 거기 있어요. 아, 참 그렇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말 하게된 것은 어째됐나 그러면 내가 알기로는 적어도 이사야를 찾아 올라갈 거다. 이사야 40장에서 나왔을 꺼예요. 몰라, 그런지 안그런지는 모르지만, 예수님 이라는 이가 이사야서를 잘 읽은 것만은 사실이야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이사야 인용한 것 많거든. 그러면 예수께서 어려서 성경 많이 보셨나봐. 그 중에서 아마 크게 거기서 이렇게 얻으신 것이 40장 이하 그 사상 아닌가. 그래서 복음 쓰는 사람도「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그것도 다 이사야에서 나온 말 아니요. 외쳐라, 가서 무엇을 외치리까,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죄를 받던 시대는 다 지나갔고 하나님이 배나 갚아 주셨다고 하는, 이사야 40장 이하, 요새는 권하고 싶소. 나는 일본시대 이걸 많이 읽었어. 마음이 답답할 때는 주로 40장 이하를 펴 놓고 읽으면 참 좋아요. 마음이 많이 풀려요. 성경 이런 때 볼 때야요. 다른 데 가서 뭘 한댔자, 커피 암만 마신댔자, 동무끼리 암만 만나 얘기한댔자 시원한 것 없어요. 그럴 때는 가만 마음먹고 앉아서 새삼스럽게 옷깃을 여미고 앉아서 성경을 펴놓고 읽어보세요. 그러면 반드시 마음에 위로가 오는 겁니다. 목적은 어디 있는고하니 죽게 됐던 내 영이 살아나는 것이 문제야. 이 내 속에 있는 영이 살아나기만 하면 겉에 뭣이 있든지간에 괜찮아요. 전쟁이 났더라도 전쟁이 나서 천 만명이 죽었다고 해도, 거 회복할 수도 있고, 나라가 망했다고 해도 어느 때 가서 도로 찾을 수도 있고, 문제는 내 속에 있는 영이 살았나? 그게 큰 문제예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은 그걸 더 중대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라 망하는 것보다도 내 속에 오시는 영이 끊어졌나, 이거 안끊어지면 어떤 멸망 속에 갔더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허지만, 이게 끊어진다면 문명이 있다고 해도 소용없다. 몇시간 못가고 마는 거지. 그런 점에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 이때 현실주의를 하는 사람 그런 거 어디 있나? 있으면 좀 보여다오. 뵈줄 수 없지. 안뵈줄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못보지. 왜? 누가 숨겨서 못보는게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못보는 거니까 제가 눈을 떠야 돼. 눈을 또 감을라고 해 감는 거 아니라, 욕심 때문에 눈이 어두워지는 거니까 욕심 버리면 그 사람도 그 순간에 눈이 잘 떠질꺼예요. 학문은 없어도 그건 다 보는거야요.
불우(不憂),불구(不懼), 불혹(不惑),수양(修養)
그러니까 중한 것은 이 속에「바통」으로 받아왔던, 이 죽지 않는 이 영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내 마음에서 시들어가면 큰일이야. 그러니까 그럴 때는, 바깥에 근심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평안치 못할 때는, 이 정신력이 쇠약한 증거예요. 이 속에 있는 정신이란 결코 시드는 법 없는 거야요. 그건 근심도 안하는 것, 걱정도 안하는 거, 무서워도 안하는 거고, 비겁도 안하는 거야요. 그래 공자님은 그것을 세 조건으로 애기하시지 않았어요.
근심없다. 仁者 不憂라, 仁한 사람은 근심없는 것, 또 勇者 不懼라, 용감한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뭐라고 그랬지? 知者 不惑, 아는 사람은 혹하지 않는다.
몸은 의사한테 가야하지만 정신도 정신 상태를 아는 선배한테 가서 진단받지요. 진단받아야 하지만 그것보다도 자기가 진단해. 내가 요새 건강상태가 어드런가. 자꾸 속에 근심·걱정이 많으면 내 이 뭣이 틀렸다, 속에 정신이 죽어간다. 동양에선 옛날에는 氣라고 그랬어. 요 새 기독교의 말로 하면 성령이라 그 말이야. 靈인데. 영이란 죽지않는 물건이야요. 이건 不死體,임모탤리티(immortality) 죽지 않는거야요. 죽지 않는거지만, 기운이 죽어들어가 거의 죽은 상태, 그러면 못 쓴다 그말이야. 문제는 거기 있어. 그러니까 나라가 이렇게 위태한 지 경에 갔다 해도, 적국의 침입을 받았다 해도, 내 속에 산 영이 있으면 두려워 안해. 두려워 아니하니까 그건 살아나는 길이 있어. 두려워도 않고 혹하지도 않고 근심도 아니하고. ……정신이란 분석을 말 하면 知·仁·勇 이렇게 셋으로 말할 수 있다. 좋은 생각 아니예요? 꼭 무슨 셋이야만 되는 건 아니지요, 유교에서 설명한 것도 좋아요.
내가 테스트를 해볼 때 근심·걱정 많으면 이 내 잘못이라. 또 뭔지 몰라서 이럴까 저럴까 이때 이럭하는 것이 좋은지, 저럭하는 것이 좋은지 결단 못해하면, 그 내가 역시 건강이 문제. 본래 정신이 살아 있으면 곧 눌러 알아요. 시비판단이 있지. 혹하는 거는 뭔지 좀 잘못 있어. 두려운 마음, 거 무서운 거 있어서는 못써. 벌써 순사만 온다면 가슴이 두근두근, 그게 뭔지 내가 잘못된 데가 있어. 내 속에 정신이 살아있으면 그렇지 않아요. 도둑놈이 온다고 해서, 바깥에 무슨 문소리만 나도 말이야 아이쿠! 뭣이나 오지 않나, 그럼 이 속에 기운 없어요. 정신 없어요. 살아있는 것 있으면 끄덕 없다. 그런데 그거는 거저는 안되거든. 길러야돼. 이 친다고하는 것,「養」이라고. 수양이라고 닦아서, 하나는 닦아야 하고 길러야한다. 修는 마치 구슬같아서 자꾸 닦아야 빛이 나지. 아무리 구슬이라도 닦잖으면 안나니까, 내 마음도 자꾸 닦아야 한다. 내버려두면 티끌이 앉아요. 내버려 두면 못써. 내 마음 내버려두면 못써. 마음이란 자꾸 닦아야해. 가만 두면 못써. 그게 수양이라는 거야요. 방안에 거울이 아무리 좋아도 그 놈의 거울 쓰지 않고 놔두면 티끌이 앉아서 뿌옇게 돼서 안보이잖아 요. 날마다 날마다 거울은 자꾸 닦아야 거울이 되잖아요. 내 마음도 그렇다 그말이야. 그럼 뭘로 닦나? 무슨 일을 만나면, 사건에 부딪치면 자연히 닦겨져요. 내가 그만 내버려 뒤, 무심하고 이러고 있으면, 나는 있는 줄 알았는데, 가본댔자 거울이 보이지 않는다. 그 마음이 그렇게 되면 못써요. 산 물건이니까 자꾸 먹이면서 길러 쥐야하지 그대로 뒤두면 그만 시장해서 그만 기운이 빠져 죽어요. 그건 다 맹자도 그 얘기했고, 공자도 그 얘기했고, 그전에 살았던 사람 다 증거해주는 거요. 기르지 않고는 안된다.
이말 들었으니 다행 아니냐?
그럼 기독교인의 말로 하면 그걸 뭐라고 그러나? 기도 아니하고는 못 산다. 그것을 등과 기름으로 비유해요. 등만 아니라 기름이 있어야지. 불을 켜면 기름이 달아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기름을 자꾸자꾸 넣어줘야 불이 올라간다. 아무리 불이 밝다고 해도 기름 떨어지면 불이 없어지는 거니까.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氣라, 정신이라, 영이라는 거다. 그게 육체는 이건 있다가 썩어지지만, 나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영의 세계로 돌아가지요.
내가 어저께 들으니 이해영 목사 돌아갔다, 돌아갔다 그러면 그 돌아간 걸로 인해서 이해영 목사에게 있던 영이 내 속으로 와요. 그이 돌아가서는 안됐는데, 아까운 이 돌아갔는데, 그러면 각별한 말을 못 들었다 그래도 그 영이 내 속에 들어오는거요. 그러니 내가 예수 생각을 늘 하면서, 예수가 몸으로는 없지만,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이 나 속에 기름 방울이 떨어져 예수 예수, 또 깨나고 또 깨나고, 그런고로 오늘까지 이렇게 인간의 면목을 가지고 있지. 거기 돈 아무리 많이 있었고 직위가 아무리 있다고 해도 언제 공자 소리도 한 번 듣지도 못 했고, 맹자 소리도 한 번도 하지도 않고, 한다는게 밤낮 기관에서 어떻하고 어떻하는 그것만 하고 있지 말이야. 당초 마음에 이 공부 아니한다. 그러면 기운이 죽을 밖에 없지. 요몸 튼튼해 갈꺼야. 밤낮 보약먹고 핑핑해서 힘있고 그러니까 나쁜 짓은 잘할꺼야. 하지만 속에 기운없으면 사람노릇을 못한다 그 말이야.
속에 기운 없는 놈일수록 자꾸 보약 먹을라고 그래. 보약 먹어가지고 나쁜 짓만 하려고, 천하에 있는 보약은 다 갖다 먹을꺼야. 나이 90이 돼서도………
하지만 속에 기운있는 사람은 그게 무섭지 않다. 문천상이, 나는 한 가지 기운 가지고 밖에서 오는 일곱가지 기운 그거 문제없다. 이일적칠(以一敵七)이라, 하나 가졌으니까 일곱 개 대적하는 것 문제없다. 세상에선 일곱을 가지고 하나를 대적하는 것 문제없다고 그러지만, 문천상이 나 하나 가지고 일곱을 대적하는 것 문제가 없지 않아? 하나 일수록 옳은 거고, 수가 많을수록 거짓말이예요. 그래도 세상에 살아났다가 이 말 얻어들었으니까 이게 다행 아니냐? 그 말이야. 다행 아니냐? 벼슬은 하나도 못했어도, 돈도 없어도, 이제 있다가 감옥에, 갈런지 모르지만 말이야. 이거 얻어들었으니 이런 다행이 어디 있냐? 그말이야. 죽어도 한없다 그말이야. 공자 내 친구됐고, 예수 내 친구 됐고, 소크라테스 내 친구 됐으면 누가 뭐라고 그래도 좋잖아? 그 기쁨을 누가 막느냐? 그게 없으니까 허기가 져서 자꾸 무서운 생각이 나고, 혹하는 생각이 나고 두려운 생각이 나고 그러는데, 내가 내 속에서 내 양심이 나를 허락을 하는데 왜 기운이 쭈그러지나?
불행한 시대지만 불행한 시대기 때문에 좋아요. 이때 한 번 기운이 있나 없나를 발휘해볼 시대니까. 미국 놈은 이런 기회 없을꺼야요. 소련 놈도 없을런지 몰라. 솔제니친 그러니까 좋지 않아요. 소련에 마음 하나 있다는 게 증거될라면 레닌도 필요했고 스탈린도 필요했어. 그놈들 숫돌 돼가지고 그 하나 닦아내지 않았어요? 요새 사하로프니 몇개 닦아내는 거야요. 이 다음에 그건 다 망해 없어져도 솔제니친이니 사하로프니 톨스토이니 그건 살아날꺼야요. 그건 영원히 안없어질 꺼예요. 그거 없어진다면 이놈의 세상 살아 뭘하겠어요. 난 살고싶은 생각 없어요. 아무 때 죽어도 좋아요!
좋은 소식을! 좋은 소식을!
이런 것은 다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예요. 나라 전체의 생명의 문제예요. 나라만 아니라 인류전체의 생명의 문제예요.
그러니까 아까 얘기대로 예수님도 복음 얘기를 왜 했나 그러면 아마 이사야의 생각이 나서 그랬어. 그럼 이사야는 또 왜 그랬나, 그적이 아주 어려운 때거든. 나라가 아주 형편이 없어. 그러니까 그 이사야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이사야 40장 이하는 보통은 제2이사야 라고 그러잖아요. 같은 저자가 아닐꺼라고 그러잖아요. 아마 그런지도 모르지요.
하여간 그 사람은 나라의 일에 대해서, 요새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 볼려고 그러지만 본래 종교와 정치가 분리가 됩니까? 본래 안되는 거지만, 나라 일이 건질 길이 없어 걱정 많이 되는데, 이 세상을 건질 길이 없어 고민 많이 했을꺼야. 왜 그런고하니 사회를 봐야 저, 놈의 종자들 썩어진 놈의 종자야, 이사야 1장을 보시요.「이 놈들아 원래 종자가 그렇습니다. 이 독사 같은 놈들이고, 소도 제 주인을 알고, 말도 제 구유를 아는데, 이놈의 백성은 도대체 제 하나님도 모르는 놈이요.」그렇지 않아요? 사회를 보면 그러고 싶거든. 그렇잖아요? 인심이고 뭐고 다 결단이 나지 않았어요? 정치가 본래 잘못됐기 보다는 이 민족이라는게 당초 양심이 썩어져 먹었어. 요새 하는 꼴 보면 알잖아요. 여기 명동거리 이제라도 우리가 나가면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기가 막혀 그러는데, 그럭하면 어드렇지. 그런 생각을 해서 그래 그전의 선지자들이 오면 자주 책망해서 이놈의 나라 어서 망하라고 그러고, 어서 뿌리도 없어지라고 그러고 그러다가, 그런다고 그렇게 실컷 아버지가 자식을 책망을 하다가는 누그러지는 시간 이 오지. 그래 다시 그 누그러지는 시간에 “야, 이리와, 이 자식아” 그래 그 이제 복음 얘기 나오는 거야요. 좋은 때 다 됐고, 왜 그런고. 하니 자꾸 때리기만 한다고 사랑하는 것 아니야요. 때릴 때는 때리지만, 그 다음엔 또 이제 정말 참 사랑으로 품어주고 그러야. 그래 그 제2이사야가 위대한 거 그거야요. 좋은 소식을! 좋은 소식을! 좋은 소식이 뭔고하니 바깥으로 이건 아무리 말이 못됐더라도, 말이 못 됐을수록 이 속에는 이 기뻐하는 이 정신이 살았어야 된다 그말이야. 그게 구원이야요. 이게 있어야 되는데, 이걸 깨워줄려고 그런 생각에 그래 가서 걱정말라고 자꾸 그랬을꺼야요. 산에 높은 데 올라가서 어서 크게 외치라고 한 말 그래 그랬을 꺼고. 예수님도 그때 모양을 보고 생각을 하시다가 그런 생각을 하셨을 꺼야요. 「그렇다! 때가 다 됐다」……
나많은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세요. 일제시대와 비교해 어드렇습니까? 지금 세상이 지금 더 어렵다 그럴꺼예요. 인심이 당초 이렇게 하고 어떻게 되겠냐? 이데올로기는 무엇이었든지간에, 체제야 무슨 체제가 됐든지 간에, 그까진 것 별 문제로 해 놓고 인심이, 사람의 마 음이 도대체 이렇게 될 수가 있느냐? 어느 놈도 신문에 나는걸 봐, 전기회사가 불켜줄 줄 알았더니 석탄은 속여먹었다고 그러지. 그놈만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큰게 서정쇄신이라, 이걸 다 한다면 마지막에 수술 어디까지 하겠는지 나 몰라. 수술을 하다가 다리 자르다가 손가락 자르다가 다 자르다가 마지막엔 어디를 자른다는지 나 모르겠어요. 생각해 보시오. 어디까지 자르면 될 것 같은가. 이거 참 알 수 없는 나라요.
한 사람이라도 된다
그러니 이 무슨 더 깊은데 근본에 들어가야 하지 않나? 그래서 그걸 살리기 위해서, 그 소리를 하니까 그게 복된 소리라, 복음이라, 나온 게 아닌가 해서 우리 속에서도 무슨 그런 새 생명이 밖에 조건 여하에 불구하고 용솟음치는 그런 것만 나오면, 그건 한 사람이라도, 나는 요새 오니까 간디의 말대로 그건 한 사람이라도 된대. 한사람이라도 참으로 진정으로 그런 정신에 솟음쳐서 오르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 생명의 길이 있다. 거기 살아나는 길이 있다 그말이야. 그게 글자가 문제 아니라 내 마음이 그걸 확신하게 되는, 거기 있어요. 글자 아니야요. 글자는 옛날부터 있는 글잔데 그것은 내 기분이라 그럴까. 내 느낌이 오기를「그렇다!」그러는 순간이 내게 와야 해. 그러니 그게 기도 없이 오겠어요? 그것은 현실과 싸움을 해야지 내가 약하지만, 진지한 태도로 나는 생각말고, 나 생각을 하게 되면 그만 안돼요. 이 조그마한 나 생각을 하게 되면,눈 위에 티끌이 붙은 거야. 티끌이 지극히 적은 거지만 눈에 앉으면 천지가 안보이잖아요. 세상에「나」라고 하는게 셀프(self)라고 하는게 티끌같은 거야. 그것이 딱 와서 붙으면 천지를 볼 수가 없어. 고것 하나 때버리면, 나 하나만 없어지면 천지가 환하게 보이는 모양으로, 사실을 사실대로 파악을 하게 돼. 그러면 아 이렇다, 이거 큰일났다. 그래서 고「나」란 생각은 떼고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노라면 어느 순간에 기쁨이 솟음치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이제 내일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람인데도 걱정이 없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걱정마라, 그게 기분에 취해 한 말 아니야요. 기분에 취한 거라면 수천년 내려오도록 생명을 가지겠어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건 예수를 우리의 선생으로 삼고 주로 삼고 믿는 다는 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인데, 우리가 아는 한도로는 하나님의 진리 그대로를 전해줬다고, 그 이상으로 말할 수 없으리 만큼 우리에게 증거를 그렇게 주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 정말 처녀가 낳습니까? 그따위 문제 한가한 사람더러 토론하라고 그래. 난 그거 상관없어. 처녀가 낳겠으면 낳고 갈보가 낳겠으면 낳고 문제가 없잖아요? 누가 낳았으면 어쨌다는 말이야! 그 말이 그것 전하자는 것이 아니라, 처녀라고 해도 더럽기는 마찬가지고 마음이 달라졌으면 갈보라 해도 아주 깨끗한 사람이라 그렇게 될 수도 있지.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성신이라 그러지, 그것 때문에 결정이 된다면 역사가 어디 회개고 뭐고 새로운 역사라는 것이 가능성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건 그것대로 딴 시간에 토론할 수 있지. 동정녀가 낳았다는 것은 뭣을 의미하는 거냐? 그건 또 깊은 진리가 있지요. 있지만, 이제 문제로 지금 새로워지는 것을 생각을 한다면, 육신에 거기 있는 거 아니고 어느 때 가서라도 내 마음속에 그 정신이 살아나냐, 살아나는 것을 조금 체험을 해본사람은 적어도 그 순간에 근심이 없어지고, 혹한 것도 없어지고, 두려운 것도 없어진다. 가령 나는 이 순간에 잠깐 지나가는 이 순간에 완전히는 아니지만 근심 별로 없어요. 혹하는 생각도 조금 없어요. 두려운 것도 조금 없다 그런 말이야. 그건 원고하니 내 속에 그만큼 그게 원지 모르지만 그 정신이 살아나니까 그러지. 그런게 좋은 증거 아니예요.
그런데는 세계역사 전체를 놓고라도 결러대. 전체가 다 잘못된다 해도 그 때문에 그 수를 보지 말아요. 그래서는 못써요. 옳으냐? 그르냐? 그 판단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권세를 주었으니까. 예수님 말하기를 “이제 너희가 나와 같이 천하 심판한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리냐? 이 다음에 어디 가서 하는 거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내가 앉아서 이 세상을 심판할 수 있잖아? 소련은 왼편으로 가라! 가령 누구는 바른 편으로 가라! 내가 내 판단에 따라 할 수 있지 않아요. 그게 예수님이 너가 나와 같이 앉아서 천하만국을 심판한 다 그거이지 별거 아니요. 이다음에 어느 딴 자리가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라, 마음이 깨끗해서 정말「나」라는 생각이 없어지고 딱, 영을 받아 앉으면 개인도 할 수 있어. 이 사람은 잘못, 누구는 옳은 것, 이 사람은 원통해 죽은 사람, 이 사람은 살기는 살았지만 공연히 살아 있는 놈, 그리고 그 판단을 내가 꼭꼭 할 수 있지 않아요. 그 권세가 사람에게 없다면 뉘게 있겠소! 그러나 사람은 다만 사람이 하는게 아니라 그 영을 받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영이 늘은 못있더라도 어느 순간에 오는 걸 우리가 경험할 수 있지 않아요? 헌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잘하면 어느 순간만 이 아니라 그 영 속에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이「바통」을 받아라!
기도 많이 해야 돼. 뭐 입으로 중얼거리거나 아니거나 그건 상관없어. 길을 가면서라도 할 수 있고, 학교 어느 시간이라도 마음의 어느 순간에든지 그건 기도해야 돼. 하시오. 될수록 몸 똑바로 하면 좋지만, 아무렇게 해도 괜찮아. 어쩌다 마음 한 구석에 하면, 미미하게 아 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어느 시간에 가면 그건 증거가 와요.「아, 이렇다. 이런 것이 있군, 나도 몰랐던 것 이런 것이 있군.」그래 그건 따른 사람의 증거가 아니라 그 자체 속에 어느 것 있어요. 이런 때일수록 감옥에 가 있는 분도 생각을 하고, 그 사람이 실지로 잘못이 있 다 하더라도 잘못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돼. 나는 그들이 다 모두, 나도 관계됐던 거니까, 그렇지만 국가 전복, 천만에 그런 생각 하지도 않았어. 그런 것 글자도 안 써봤어. 써본 일 없어. 어디 가서나 내 증언할꺼야. 하지만, 설혹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기도해쥐야 돼. 살인강도를 하고 들어간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줘야 돼. 그거 살아나야 이 나라 살아나지. 그건 망해도 좋다, 그런다면, 제자식 내다 버리는 놈의 부모가, 아무리 못났더라도 못난 자식을 내다버리는 부모가 부모야? 자식도 못생겼지만 부모도 사람 이 아니 되잖아. 못난 자식일수록 거두어서 기르려고 하는 게 부모지. 살인 강도하는 자식일수록「이자식아, 그러지 마라」고 울면서라도 그러지 말라고 하는게 부모지. 저 자식은 말 안들으니까 죽여버려라! 죽여버리는 것이 그 무슨 부모겠어요. 부몰 수가 없어! 부몰수가 없어! 잘못하는 자식이라고 죽여버리는 것, 부몰 수가 없어! 애빌 수가 없어! 에밀 수가 없어! 천지 간에 그런 거 없어요. 이 천지의 근본이 그렇지 않아요. 죄가 있더라도 부모는 저놈 그래도 사람 만들어야지. 마지막 순간까지 그래도 야, 그러지 마라, 제발 그러지 마라, 제발 돌아오너라. 그러는 마음 고것이 이 천지를 낳았고, 이 역사를 낳은 거지. 어디 그 마음을 한번 내 마음으로 받아보자, 그것이지.
그러면 이 다음에 내가 죽으면서도 그「바통」이 있지 않나. 다른 것 몰라도 이것만은 네가 받아라, 자신있게 줄 수 있지 않아요. 지금 내 마음에도 조금 분명해지니까 자주 이러는 거야요. 별거 없어요. 이런 거야요. 나는 이거 흔들었으니까, 생각있는 사람 바짝 붙잡아요. 지금 이 순간도 바짝 붙잡을 생각만 있으면 그다음에 곧 알꺼야요. 뛸 용기가 날꺼야요. 나는 다른 큰 노릇은 못해봤어도 그건 나는 확신을 가지고 증거할 수 있어요.
이때까지 나이 70을 살았지만, 잘못도 많이 저지르고 살았지만, 요것만은 내가 보긴 본거야요. 있어요, 그런 거 있지. 이거 있으니까 이 민족도 이만큼 왔고, 이 인류라는 것, 소위 역사라는 것이 이만큼 왔지. 그거 없었으면 저놈들이 저 욕심부리는 저 인간들이 있는 이 세상이 옳게 되겠소? 그런데 문명한답시고 약을 자꾸 써서 사람이 죽지는 않고 나쁜 놈들이 오래 살아가니까 역사가 이렇게 어려워져. 약이 없었을 때는 일찍일찍 죽으니까 비교적 옳은 것이 다시 살아나기가 쉬워서 문제가 간단했는데, 이 문명이 다른 편으로 기울어져 쓸데 없는 것만 자꾸 약을 썼기 때문에 그러니까 병균은 둬두고 자꾸 그것만 길러가니까 말이야……
그래 그게 옳게 되면 이상적인 것, 정상적이 아닌 건데, 세상이 이렇게 비관적이 아닐꺼요.
나는 지금까지, 이 다음 순간은 모르겠소마는, 지금까지 내가 붙잡은 것이「나는 얻어들은 사람이다.」실지로 사는 데는 약한 사람이지마는 얻어들은 걸로 하면 이건 분명하다, 그건 어느 정도 확신이 있어요.
씨알의소리 1976년 4월호 52호 (금지된 씨알의소리 생각사)
저작집30; 14-77
전집20; 12-204
이글은 1976년 3월 28일 주일성서 모임(명동가톨릭 여학생회관)이라는 약20여명이 모인자리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아까운 말씀이라 편집실에서 녹음, 정리하여 4월호에 실었으나 찢기고 상처 받은대로 덮혀져 나갔던 것이다. (씨알의소리 편집실)
말을 하는 사람은 한 마디 말을 ; 밑줄로 쓰여진 글은 박정희 정권의 사전검열에 의해 삭제 당했던 부분을 다시 살려서 당시의 원문 그대로 싣는다. (ssialso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