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포해수욕장과 해녀들의 용왕제
태안군 안면읍 승언8리 방포 해변은 수산물이라는 귀중한 보배와 즐거움을 품고 있지만, 검은 바위들이 드디어 제 몸을 드러낸 왼쪽 해변은 더 특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이 바다에서 물질을 하며 살고 있는 해녀들 이야기다.
“방포항이랑 방포해수욕장 사이를 딱 막고 서 있는 산 보이죠?
저게 봉우리가 세 갠데, 가운데에 제일 높은 봉우리를 옛날부터 당산이라고 그랬어요.
당집은 없었고, 팽나무 한 그루 있는 데에다가 정성을 드렸대요.
지금은 나무도 죽고 당제도 안 해요.
당제 안 한 지 좀 지나서 용왕제를 시작했는데 그게 해녀들이 주가 돼서 지냈던 거예요. 당산 아래 바닷가에서 지냈죠.”
(이장/마을 주민)
해녀들이 용왕제를 올렸던 해변의 남쪽 바다이다
방포해수욕장의 남쪽,
당산 바로 아래 바위가 많은 바닷가에서 해녀들은 용왕제를 지냈다.
승언8리에 제주도 해녀들이 정착한 것은 60여 년 전의 일.
당시에는 제주도 해녀들이 동해, 서해, 남해 곳곳을 가리지 않고 다니며 물질을 했다.
그 무렵 방포를 오가던 해녀들도 있었다.
그중 두세 명이 아예 고향 제주도를 떠나 이곳에 정착했다.
1960년대 초 방포에 들어온 해녀들은 현지인들에게 물질하는 법을 가르쳤고, 해녀의 수는 점점 늘었다.
오늘날 방포에 살고 있는 해녀는 20여 명. 오래도록 물질을 해온 60대 중반의 토박이 해녀들과 30년 전선배들로부터 물질을 배운 해녀들, 2년 전부터 물질을 배운 해남(海男)들도 있다고 한다.
“원래는 해녀들만 있었는데, 2년 전부터는 남자들도 몇몇이서 물질을 배워 가지고 하더라고요.
한 일고여덟 명쯤 되나? 열 명이서 배웠는데 계속 물질하고 있는 건 그쯤 된다고 들었어요.
여기야 워낙 어촌계가 해녀들 중심이니까, 해녀들이 없으면 안 돌아가니까 남자들도 물질 배워서 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죠.”
(이장/마을 주민)
꾸준히 물질을 새로 배우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승언8리에서 해녀의 존재는 그 자체로 귀중하다.
양식으로 전복과 해삼을 키우는 지금도 전복과 해삼을 따려면 물 밑에 들어갈 수 있는 해녀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해녀들의 위상이 높은 만큼 용왕제는 해녀들을 중심으로 꾸려졌고, 그 규모 또한 대단했다.
“5년인가 그전까지도 용왕제를 올렸어요. 봄에, 3월이나 4월쯤에.
그때가 어장 개시해서 해삼하고 전복 딸 때거든.
해녀들 사고 안 나게 해달라고 정성을 드린 건데 정말 크게 지냈어요.
사나흘, 일주일씩 다른 데서 유명한 법사를 불러서 계속 경도 읽고 제사상도 차려놓고 그랬으니까. 해녀들 무사고 빌면서 마을도 다 안녕하라고 빌었죠.”
(이장/마을 주민)
해수욕장 개장 전부터 사람들은 아름다운 방포 해변에서 추억을 쌓아간다.
해녀들이 정착하기 이전, 고기잡이를 주로 했던 승언8리에서는 당산에 올라 만선과 배들의 무사 귀환을 비는 제를 올렸다.
그러다 고기 잡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고 당제가 끊길 즈음, 마을은 새로 정착한 해녀들로 인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제주도 해녀들에게 물질을 배운 후배 해녀들이 늘어나면서 사라진 당제 대신 용왕제가 시작됐다.
무당이 일러준 용날(辰日)이면 평소에 모이기 어려웠던 해녀들과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당산 아래 해변에 모여 제사상을 차리고 법사를 기다렸다.
제사상은 소고기, 시루떡, 사과, 배, 감 등 푸짐하게 차려지고 물이 들어오는 시간에 맞추어 법사가 축원을 하면 그것이 제의 시작이었다.
당시 용왕제는 하루에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적어도 사흘에서 길게는 일주일간 경을 읽었다.
마을 전체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은 물론이고, 해녀들 개개인의 무사안녕을 빌었다.
큰 굿판인 만큼 법사도 혼자 오지 않고 제자들 대여섯 명을 함께 데려왔다.
그리하여 제자들과 법사가 돌아가며 밤새도록 경을 외웠다.
용왕제가 시작되면 법사의 독경 소리와 양판의 쇳소리가 어우러져 바닷가에 온종일 울려 퍼졌다고 한다.
이처럼 20여 년간 계속되어온 용왕제는 참여하는 주민 수가 줄면서 근래에는 지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해녀들은 바다에 정성을 드리지 않는 것이 못내 서운하여 개인적으로 정월마다 작게 용왕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싱싱한 수산물과 이를 캐는 해녀들, 어선들로 활기 넘치는 바다의 마을. 승언8리는 이경신 이장의 말대로 어디 하나 부족한 데 없이 알차게 구성된 마을이다.
풍요롭고 생동감 넘치는 자연 덕분에 매년 찾아오는 사람들 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고, 주민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이들과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나눈다.
바다를 부지런히 오가는 마을 사람들도, 설레는 마음으로 바다를 찾아온 사람들도 모두 풍경이 되고 이야기가 되는 마을. 승언8리의 파도는 오늘도 마을로 즐거운 소란을 실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