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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 8기 경주 답사기행
I. 첫째날
2009. 4. 6. CAP 8기 입학식을 치룬 후 6개월 동안은 문화와 예술의 향기에 푹 취해 보낸 행복한 반년이었다. 이제 마지막 수업도 끝내고 긴장 속에 특별활동반(타악기반) 발표도 무사히 마치고 보니 졸업을 앞두고는 이제 1박2일의 경주 답사여행만이... 10. 16. 07: 40경 같은 동네에 사는 이태화 원우와 함께 예술의 전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오르니 반가운 원우들의 따뜻한 웃음 맞이. 지난 4. 24. 남도 답사여행을 떠날 때만 하여도 아직은 서로를 잘 몰라 버스 안에서는 서먹서먹한 기운이 흘렀는데, 지금은 환한 웃음과 여유 있는 농담 속에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한다.
가. 한독의약박물관
10시가 못 되어 음성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온 버스는 한독약품 공장 경내로 들어간다. 한독의약박물관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경주유적을 답사하러 가는데 웬 생뚱맞게 이런 곳을 들르나 했더니 한독약품의 전무님이 CAP 7기 선배님이시라 경주 가는 길에 자기네 박물관도 한 번 둘러보고 가라고 한 것. 한독의약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박물관이자 전문박물관으로 1964. 4. 27. 개관하였다. 이경록 박물관장의 안내를 받아 박물관으로 들어가는데, 입구에는 이제마 선생이 자기가 쓴 '동의수세보원'을 들고 허준 선생은 '동의보감'을 들고 우리보고 어서 오라한다.
이관장님은 음성군 내에는 보물이 6개 있는데, 그 보물 모두가 자기네 박물관에 있는 거라며 자랑이 대단. 상감청자 1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의학책으로 그중 대표적인 것은 세종 때 간행된 의학백과사전인 의방유취(醫方類聚). 그런데, 이관장님은 의방유취중에 재미있는 내용 하나 소개해준다. 내용중에는 인간에게 있어 성욕은 끊을 수 없는 것이라, 정기적인 섹스가 중요하다는 내용도 있다나?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은 똑 같은 것. 그리고 삼강청자는 청자삼강상약국명합(靑磁象嵌尙藥局銘盒)이라는 환약을 담던 용기로 청자에는 '尙藥局'이 상감기법으로 새겨져있다. '상약국'은 고려 초에 약 300년간 존속한 왕실담당 의료기관인데, 시대와 용도를 알 수 있는 이러한 글씨 때문에 보물로서의 가치가 더욱 높아진 것이라 한다.
돌아본 유물중 눈에 띄는 것 몇 가지만 얘기해보자면, 우선 추사가 쓴 처방전. 역시 추사 김정희답게 처방전의 글씨도 명필인데, 예전에는 기본 의술은 양반의 필수적인 소양과목이라 추사도 아픈 하인을 위해 이러 이러한 것으로 약을 달여 먹으라고 처방전을 써준 것이다. 그런데, 추사가 쓴 처방전이니 처방전으로서의 사료적 가치보다도 추사 글씨라는 것을 더 쳐주지 않을까? 배가 아플 때 배 아프지 말라며 배를 밀어주는 도기인 배밀이 도기도 재미있다. 왜 예전에 할머니가 손자가 배 아프다고 하면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하면서 손자의 배를 밀어주지 않았는가? 그 할머니의 손을 대신하는 도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차가운 도기로 그냥 배를 밀면 오히려 역효과일 테니, 어느 정도 도기를 데워 배를 밀어야했겠지?
또 재미있던 것은 침을 넣어두던 침통. 침통 속에 새털이 같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침이 습도에 약하기에 습도 조절을 위해 침통에 새털도 같이 넣어둔 것. 새털 중에는 까투리 털을 많이 넣었는데, 이는 까투리가 워낙 조심성 있는 새라 침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까투리처럼 조심하여 침을 다루라는 의미에서 까투리 털을 넣은 것이라 한다.
태(胎)를 넣어두는 백자 항아리도 있었다. 이런 고급의 백자에 일반인의 태를 넣어두지는 않았을 것. 바로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그 태를 이렇게 백자에 넣어 이를 다시 커다란 돌항아리에 넣어 전국의 풍수 좋은 곳에 안치하였다. 만약 이렇게 안치한 태의 주인공이 왕이 되면 그 태를 안치하였던 고을은 한 단계 승격이 되었다나? 서울 시내에도 이러한 태항아리가 있다. 시내 한가운데인 창경궁에 성종 태실이 있는 것. 그러나, 이는 원래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에 있던 것을 창경궁으로 옮긴 것이라, 바로 제자리에 있는 것으로는 우면산 형촌마을의 작은 봉우리에 있는 월산대군의 태실이 있다. 그래서 봉우리 이름도 태봉이다. 물론 태가 담겨져 있던 백자항아리는 일본놈이 도굴해갔다.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의약관련 유적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유럽, 미국 등의 의료관련 기구들도 있었고, 제석홀이라는 특별한 전시실도 있었다. 제석(濟石)은 한독약품 창업자 김신권 명예회장의 아호인데, 제석홀에는 김회장님이 평생을 모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의학 관련 유물뿐만 아니라 일반 유물도 있다. 단순히 약품회사를 하여 돈을 버는 것에만 눈독을 들이지 않고 대한민국이 먹고 살기 힘들던 시기에 이렇게 훌륭한 의약박물관을 만들고, 자기가 평생 모은 유물도 박물관에 기증하신 김신권 회장님 -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알고 이를 실천하신 멋진 분이시구나.
나. 독락당
점심을 먹고 고속도로를 달려 이제 본격적인 경주 유적 답사에 오른다. 다들 경주에는 몇 번씩은 가보았을 것이나 보통은 이름 있는 곳만 찾아갈 뿐. 그러나, 경주는 도시 전체가 유적지라 가보지 못한 곳이 훨씬 많을 것이다. 김봉렬 교수는 그런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첫 번째 들른 곳은 6. 25.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안강벌에 자리 잡은 회재 이언적 선생(1491-1553)의 독락당. 회재는 퇴계 영남학파의 뿌리가 된 분으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함께 동방5현으로 불린 분이며, 보물 413호인 독락당은 회재가 사간원 사간으로 있을 때에 김안로의 중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40세에 낙향하여 직접 설계하여 거처하던 곳이다. 원래 회재는 다음에 들를 양동마을에서 태어나 양동마을에 첫째부인을 두고 있었지만, 낙향하면서는 첫째부인을 찾지 않고 둘째 부인인 석씨 부인의 독락당을 찾았다.
독락당(獨樂堂)이라면 홀로 즐긴다는 것인데, 이는 송나라 사마광이 왕안석의 개혁정치를 거부하고 낙향하여 독락원(獨樂園)을 짓고 은거생활을 한데서, 회재 자신도 사마광의 심정으로 독락당이라 이름 지은 것. 회재는 은거하러 이곳에 온 것이라 집은 철저히 은거형으로 지었다. 즉, 건물은 지붕을 낮게 깔았으며,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노비집이 먼저 우리를 맞이하고, 그 옆의 문으로 다시 들어가도 앞은 담으로 막혀 오른쪽으로 돌아야 비로소 회재가 거처하는 독락당으로 통하는 문이 나온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어 그대로 담과 담 사이의 좁은 골목을 지나오니 앞은 계곡에 물이 흐르고 있다.
계곡으로 내려가 뒤를 돌아보니 이곳에선 독락당이 전체적으로 보인다. 즉 회재는 독락당을 세상으로는 닫혀 놓고, 이곳 자연으로는 열어놓았다. 회재가 거처하던 독락당을 쳐다보니 그 앞의 담엔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다. 회재가 독락당 자기의 거처에서 계곡을 내려다보기 위하여 담에 구멍을 낸 것. 독락당 오른쪽으로는 계정(溪亭)이 담 밖으로 몸을 내어 두 발은 계곡의 바위 위에 그대로 걸치고 있다. 회재는 독락당 자기 방에서 좁은 담구멍으로 계곡을 내려다보는 것이 성에 차지 않으면 계정으로 나와 자연을 마음껏 자기 가슴으로 받아들였으리라.
계정이 발을 내리고 있는 바위는 관어대(觀魚臺). 회재가 이곳에서 개울 속의 물고기들을 들여다보며 이름 붙인 것. 회재는 독락당을 둘러싼 자옥산, 도덕산, 무학산, 화개산과 관어대를 비롯한 영귀대, 탁영대, 세심대, 징심대의 5바위를 4산5대(四山五臺)라 부르며 나름대로의 은거의 세계를 거닐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 계정 앞마당으로 가는 곳에는 약쑥밭이 있는데, 둘째부인이 낳은 회재의 아들 이전인이 회재가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강계에 귀양 갔을 때 따라가 회재의 시중을 들다가 갖고 온 중국산 약쑥을 재배하던 밭이다.
양재역 벽서 사건이란 지금의 양재동에 누군가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 일파(소윤)를 비난하는 벽보를 붙여놓자 윤원형 일파가 이를 빌미로 윤임파(대윤)와 사림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일부러 사건을 확대시킨 것인데, - 벽보도 이런 사건을 일으키기 위하여 일부러 붙였다는 얘기가 있다. - 회재도 여기에 말려들어 강계로 귀양 가 그곳에서 죽었다. 이전인은 회재가 독락당으로 낙향하고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볼 수 있었는데, 이런 무심한 아버지임에도 그 먼 강계 땅까지 따라가 아버지를 봉양하며 회재의 임종을 지켰다.
회재는 주리적 성리설을 주장하여 퇴계가 이를 계승하여 영남학파를 이룰 정도의 유학자였으나, 이곳에 낙향하여 있으면서는 독락당 근처의 정혜사 주지스님을 집으로 불러들여 - 물론 남의 눈이 있으니 뒷문으로 몰래 들어오게 했다지 - 한담을 나눌 정도로 불교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시간이 있다면 국보 제40호로 지정된 정혜사 13층 석탑도 둘러볼 겸 정혜사 터에도 가보고 싶으나, 애초 일정에 두었던 회재를 모시고 있는 옥산서원도 가지 못하는데, 그저 마음뿐임을...
다. 양동마을
이제 독락당을 나와 회재의 고향마을인 양동마을로 간다. 양동마을은 월송 손씨와 여주 이씨의 씨족마을로 현재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 신청중인 마을로, 설창산에서 뻗어 내린 4줄기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150여 채의 옛집들이 굽이굽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보통 씨족마을은 한 씨족만이 거주함이 보통일 텐데 이곳은 어떻게 오늘날까지도 번성하고 있는 두 씨족이 한 곳에 살고 있을까? 원래 이곳에는 양민공 손소가 풍덕 류씨 집안 여자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월송 손씨가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번에는 찬성공 이번이 손소의 사위가 되면서 여주 이씨가 이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된 것.
그럼 애초 이곳에 터를 잡았던 손소의 처갓집인 풍덕 류씨들은 어떻게 되었나? 손소의 장인 류복하에게 아들이 없어 손이 끊긴 것. 하여 지금도 손씨 집안에서 풍덕 류씨에 대해서도 제사를 지내주는 외손봉사(外孫奉祀)의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하여튼 이후 월송 손씨에서는 우재 손중돈, 여주 이씨에서는 이언적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어 두 집안이 이 골짜기에서 서로 경쟁과 협력관계를 이루며 번성해 왔다. 지금도 두 집안은 서로 그해에 자손들을 서울대, 연고대에 몇 명이나 보냈느냐를 따지며 은근히 경쟁한다는군.
차에서 내려 보니 저 안쪽으로 휘어진 골짜기의 집들은 보이지 않으나 당장 눈앞에는 낮게 뻗어 내려온 능선과 골짜기마다 집들이 들어서 있는데, 낮은 곳에는 외거노비들이 살던 초가집이 높은 곳에는 두 집안의 양반들이 살던 기와집이 보이는데, 한쪽에 손씨 집안의 집들이 들어서면 저쪽에는 이씨 집안의 집들이 들어서는 등으로 세월이 지나면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두 집안의 집들로 채우면서 발전해왔다. 누군가 양반들이 언덕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려면 힘들었겠다 하자, 김교수는 노비들이 다 가마 태워 올려다주고 물 길어다 주고 밥 지어다 주는데 뭐가 힘들었겠냐고... 하긴...
(1) 향단
양동마을의 집들을 다 돌아보려면 하루 종일 걸려도 모자랄 정도이므로 우리는 먼저 제일 눈에 띄는 보물 412호 향단으로 발길을 옮긴다. 향나무에서 이름이 유래된 향단(香壇)은 안내문에는 회재가 1543년경 경상감사로 부임할 때 중종이 회재가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서 지어준 집이라는데, 김교수는 글쎄올시다 하면서 의문을 표시. 집이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또한 보통의 사대부의 검소함과는 거리가 있게 우람한 것을 보면 뭔가 경상감사라는 자리의 힘도 있지 않았을까? 문이 잠겨 있어 집 뒤로 돌아 올라가 향단을 내려다보니 집안의 마당은 안채 마당과 노비들 마당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안대청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행랑채의 지붕과 하늘뿐이라니, 밖에서 보면 향단은 우람해 보이지만 정작 안채에 거주하는 여인네들은 사방의 꽉 막힘에 좀 답답하였을 듯. 향단은 회재 이언적이 직접 설계한 집이라는데, 글쎄... 첫째 부인과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회재가 안채를 이렇게 설계한 데에는 뭔가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 관가정
향단을 나와서는 회재에게 공부를 가르친 회재의 외삼촌 우재 손중돈이 거주하던 보물 442호인 관가정으로 향한다. 관가정으로 오르는 길 왼편 밑으로 양동교회가 보이는데 무슨 크게 지은 토치카 같기도 하고 좀 특이하게 생겼다. 원래 저 교회는 우리가 차를 세운 주차장에 있던 함석으로 지은 교회였다는데, 그 외관이 양동마을에 어울리지 않아 목사님을 설득하여 이리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교회를 지을 때 김교수가 지휘를 하였다는데, 김교수는 후배 건축가에게 무조건 교회가 보이지 않게 지으라고 하였다나? 그래서인가 마을로 들어올 때 교회는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고, 이곳에서야 납작 엎드린 교회의 뒷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관가정(觀稼亭)이라... 이곳에서는 들녘의 곡식 익어가는 모습이 잘 보이는데, 우재는 이곳에서 곡식 익어가는 들녘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다행히 관가정은 열려있어 안마당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답답하게 꽉 차 있는 향단과는 달리 관가정은 대청마루도 필요 이상으로 널찍한 게 시원시원한 느낌. 관가정은 400년간 대종가로서 빈번한 봉제사에 찾아드는 종원들로 공간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노비들도 외거노비로 밖에 살게 한 데서도 그 차이가 있는 모양. 김교수는 대학원 다닐 때 이곳에 와서 한국적 건축의 단순미와 자연미에 매료되어 앞으로 이 분야의 연구에 매진하겠다고 결심을 하였었단다.
손중돈은 여기서 조카 이언적을 가르쳐 이언적을 큰 인물로 만들었기에 월송 손씨 일가에서는 이언적의 학문의 뿌리는 손중돈에 있다고 주장하고, 여주 이씨에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고도 하더군. ㅎㅎ 조금이라도 자기 가문을 더 빛내기 위해 후손들이 애를 쓰는구먼. 해는 점점 기울어가나 우리는 계곡 안쪽에 있는 초기에 이곳에 자리 잡은 양동마을 선조들 집도 보러 간다. 그러나,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늦은 시간에 문을 열어줄 것 같지 않아 계곡을 걸어가며 양옆으로 나타나는 가옥들을 바라보다 돌아 나온다.
(다) 서백당
그런데 손씨 집안의 대종가인 서백당은 어느 건물인가? 종가집으로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 참을 '忍'자를 백번 쓴다하여 서백당(書百堂). 이곳에서 손중돈과 이언적이 태어났는데, 풍수설에 의하면 서백당에서 큰 인물 3이 나온다고 하였다나? 현재 두 인물이 나왔으니 앞으로도 한 인물이 이곳에서 태어날 것이라, 손씨 집안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이언적이 여기서 태어나 한 인물을 이씨 집안에 빼앗겼기에 시집간 딸들이 친정에 와서 아이를 낳으려고 해도 서백당에서는 절대 못 낳게 한다는군. ㅋㅋ 앞으로 나올 또 하나의 큰 인물은 언제 나올 것인가?
이제 어둠이 짙어지며 버스는 우리를 이풍녀 구로쌈밥집으로 안내한다. 주인장 이름을 그대로 가게 이름으로 한 모양인데 '풍녀'라고 하니까 먼저 바람난 여자가 연상되는데, 간판을 보니 명인장(名人匠)이라는군. 명성에 걸맞게 식당 안은 바글바글. 배를 불리고 숙소인 경주 현대호텔에 짐을 풀었으나 이대로 잠자리에 들 수 있나. 우리는 카페 하나를 통째로 빌려 하루의 피로를 춤과 노래로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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