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언 / 박선애
90세가 넘으셔도 아버지는 청년이었다. 목소리는 크시고, 정신은 총총하시고, 눈과 귀는 밝으셨다. 허리까지 꼿꼿이 펴고 걸음도 성큼성큼 걸으셨다. 하고 싶은 것과 가고 싶은 곳도 많으셔서 늘 새로운 계획을 세우셨다. 백 살까지 충분히 살 수 있다고 큰소리치셨다. 누구나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전보다 약해지는 걸 느꼈지만 연세가 많아 그러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밤에 화장실을 자주 간다고 말씀하셨다. 병원에 가보니 전립선암이었다. 병원에서 권하는 대로 약을 먹는 호르몬 치료를 했다. 금방 수치가 낮아지고 별일 없이 1년이 지났다. 다시 몸이 안 좋다고 하시는 날이 많아졌다. 의사가 이제 그 약은 내성이 생겨서 안 된다고 방법을 바꾸자고 했다. 다음 단계는 항암 치료인데 건강하다고 해도 나이가 있어서 감당하기 힘들 거라고 표적 치료를 권했다. 보험이 안 되어 비싸기는 해도 효과가 좋다고 했다. 이것을 하자 암이 다 나은 것처럼 좋아졌다. 그런데 두 달째 약을 먹자 염증 수치가 오르고 면역력이 떨어지는 등 다른 곳에 더 많은 이상이 생겼다. 폐에도 물이 차서 빼내는 시술을 받으면서 급격히 쇠약해졌다. 조금 나으면 퇴원해서 집에서 지내다가 안 좋아지면 입원하기를 반복했다.
병원에 계실 때는 가족들이 돌보기도 하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집에서는 방문 요양사가 오는 시간 외에 계속 간병할 사람이 없어서 애가 탔다. 우리 남매들이 시간을 낼 수 있는 대로 아버지 곁을 지켰다. 아버지는 겨우 화장실을 오가고, 힘들게 식탁에 앉으셨다. 따뜻한 날은 거실에 나오셔서 앉아 있다가 힘들면 소파에 누워 있기도 했다. 염증 수치가 높아지면 열이 오르면서 힘들어하셨다. 그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이제는 병원에서 열이 오를 때 주사로 응급 처치만 해 주고 집에 돌려보냈다.
그렇게 강하고 활동적이던 아버지가 힘없이 누워만 계시는 것을 보면 안쓰러웠다. 스스로 회복은 어려울 것 같다고 하시며 서서히 받아들였다. 가족들이 동동거리는 것을 보고 요양 병원을 알아보라고도 하셨다. 아들을 데리고 은행에 가셔서 통장을 정리하셨다. 전처럼 우리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면 안타까웠다.
다리를 못 쓰겠다고 하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셨다. 조금씩 드시던 것을 거의 받아 드시질 않았다. 그날 아침에도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 드렸다. 손을 내게 맡기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니 “고맙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고맙다는 흔히 웃으면서 하고 듣는 말이 그렇게 슬플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말은 내 마음에 새겨지듯이 남았다. 그것이 내게 하신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 후로는 숨이 가빠지고 힘이 없으셔서 말이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 알아듣기 어려웠다. 일주일 쯤 후에 아버지는 막내아들 품에 안겨 기도 소리 들으며 조용히 가셨다.
집에 계시는 것처럼 여겨져 아무렇지 않은 날도 있지만, 언제 오냐고 기다리시고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텅 빈다. 그리움보다 더 괴로운 것은 후회와 아쉬움이다. 안 했으면 좋았을 말들과 행동을 했던 것이 후회된다. 했어야 할 표현과 미뤄 두었던 일들은 하지 못해서 아쉽다. 그런 날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꺼내 들으며 스스로 달랜다. 아버지는 내가 잘못한 것도, 서운하게 했던 것도 다 용서하셨다. 아버지는 지금도 내 마음에 살아 계셔서 내가 아파하면 위로하신다. “고맙다.”라고.
첫댓글 글을 읽고, 제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이 생각 나서 울다 갑니다.
효녀 딸이군요. 오래오래 사실 것 같지만 풀잎에 이슬처럼 부모님은 그렇게 떠나시던 기억을 하면 서러워요. 누구에게나 그리운 부모님이지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가시는 모습을 자세히 그리셨네요. 글을 읽으며 울컥했습니다.
글을 읽고 걱정이 앞섭니다. 이별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아픔입니다. 건강하게 살다 가시면 더 없이 좋으련만 가슴 한켠이 쓰라립니다.
그리움보다 더 괴로운 것은 후회와 아쉬움이다. 요즘 제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 합니다. 이별은....어떤 이별이건 슬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