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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도 길은, 섬진강의 유역을 따라 남원을 거쳐서 진주를 지나고 공
주로 접어들어 서울로 가는데, 비교적 순탄한 길이라, 한양에서 뻗는 팔도 길을 통틀어 말할 때, 남원을 통하는 전라도 길이 가장 부드러운 길이라고 일컬어 말했다.
예전에는 이런 길목의 요소마다 찰방이 있었고, 찰방이 있는 곳을 역이라 하였다.
찰방은,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풍의 외관직으로, 세조 8년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찰방과 역승을 각 3인씩, 경상도에 각 5인씩, 황해도에 역승은 없이 찰방만 2인씩 두었는데, 이들은 역승의 잘잘못을 규찰하거나 주군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고통을 살펴서 엄히 다스리는 것이 주 임무였다. 또한 전시에는 봉화를 올리고, 언제나 급한 관용, 공용에 대비하여 역에다 역 마와 역졸을 챙겨 두었다.
찰방은 대체적으로 역리를 포함한 역민을 관리하고, 역마를 보급하며, 사신 접대 등을 총괄하는 역정의 최고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며 북방지역에서는 군사적 성격의 역촌을 순행하면서 부방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도로는 나라의 뼈대요 핏줄이며 강토의 국방 기밀이기도 하며, 평상시에는 운송의 수단이지만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징발하는 말또한 나라의 일급 재산이어서 찰방은 각별히 신임받는 관리를 임명했다. 거기다가 행정면에서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이나 정랑직의 명망 있는 문신을 차출하여 지방 주현에 파견, 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질병까지도 상세히 고찰 했으니, 민생의 안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에 따라 나라에서는 역의 관리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특별히 역둔토를 역에 딸려 내려 주었다.
찰방 있는 곳은 한양으로부터 그 고을에 들어가는 첫 머리 초입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세상 돌아가는 일과 시정의 소식에 빨랐다. 그래서 장사하는 시정아치들이 자연히 사방에서 모여들고, 물산의 교유가 저절로 이루어져 큰 장이 서게 되었다. 이것이 다 역을 중심으로 되는 일이라, 찰방이 있는 역은 흥성거리게 마련이었다.
조선 시대, 남원진 도호부의 찰방은, 오수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때, 남원진의 입구는 오수였던 것이다. 이 오수역에는 역사와 찰방의 관사, 그리고 역의 소유인 둔전이 있고, 역마 스물일곱 필이 역졸과 함께 항상 대비되어 있었다. 역마를 갈아타거나, 역졸을 부려 관물을 나르거나, 공문
서를 전달하려고 먼 길을 가야 하는 관리들이, 말과 마부를 이용하고 또 숙박도 하는 곳이 '역'인지라, 여기는 늘 사람들이 북적북적 넘치었다.
이 역이나 비슷한 곳으로 원이 있었다. 먼 길 가는 사람이 이용하고 묵는 것은 같았으나, 오로지 관용이었던 것이 역이라면, 원은 민간의 나그네 길손이 숙박하거나 머물기도 하는 곳이었다. 이곳도 사람의 통행이 많고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원에 본거를 두고 오수 찰방이 관할하는 곳은, 십일역, 십오원이었다. 그러니까 오수역 찰방은, 역과 원을 다 합하면 모두 스물여섯 군데나 맡아 관장하였던 것이다.
매안에서 오수역까지는 시오리 길이요, 원이 있는 밤두내 율두천원까지는 십리 길이고 남원 읍내까지는 삼십 리 길이었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져서 찰방도, 역마도, 역졸도 모두 없어지고 그 대신 철도와 정거장이 생겼다.
그것이 벌써 칠팔 년 전 일인데 다만 아직도 역이라는 옛말은 그대로 남아 뙈애액, 검은 연기를 온 하늘에 뿜어 내며 시커멓게 달려드는 철갑차를 맞이하고 보내고 하였다.
찰방이 있던 역만큼이야 법석거리지 않지만, 그래도 정거장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와 어우러져 있었다. 상행으로 서울로부터 하행으로 여수에 이르기까지 기차를 타려고, 여러 마을 여러 골에서 이곳으로 나온 사람들이 보퉁이를 하나씩 안고 들고 앉은 대합실은, 오수 장날이나 남원 장날이면 으레 더
많아지게 마련이었다. 예전부처 오랫 동안 그래 왔듯이, 시오 리 오수는 물론이고 삼십 리 남원장에도 걸어다니는 사람이 태반이었지만, 무슨 이기지 못할 큰 짐이 있을 경우에는 놉을 사는 것보다 차비가 더 적게 먹혀, 처음에는 낯설고 무서워서 쭈밋거리던 기차를 타게 되는 것이다. 이고 지고 나온 보퉁이와 꾸러미를 들고 장으로 가려던 사람들은, 이 정거장에서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그만 저절로 물건을 바꾸고 사고 파는 일들이 이루어져, 굳이 장에까지 안 가고 여기서 셈이 끝나 버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 자연히 장날이면 이 정거장 마당에 작은 장의 시늉이 서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장날이라고 해도, 매안의 이씨 문중 사람들은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장 길에 익숙한 머슴이나 재바른 하인을 시켜 심부름을 보내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은데 피치 못할 급한 일이 생긴 누가 있다 하더라도, 장에 가는 일만큼은 정거장으로 나오지 않고, 오수, 남원까지 걸어서 소롯길로 혼자, 눈에 뜨이지 않게 다녀왔다.
장바닥이란 원래 선비가 나설 곳이 아닌데다가, 반상이 마구 뒤섞이어 물건을 고르고 흥정을 하는 광경은 더구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그런 일을 만부득이 하러 가는 경우라 할지라도
"팔도 모산지배가 위아래도 없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정거장."
은 매안의 성품에 맞지 않은 탓이었다. 행세가 빠지는 집이라면 모를까, 넓은 갓쓰고 두루마기 떨쳐입은 양반이 상것들하고 나란히 앉아 한자리에 가야 하는 철갑차는 도무지 비위에 맞지 않았다.
어디의 누구네 집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행동거지 모색으로 보아 상것이 분명한 사람도 이쪽을 보고는 멀뚱멀뚱 하고 있거나, 토방에도 못 올라서고 뜰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하정배를 올려야 마땅한 신분의 것들이, 장소 핑계를 대고 마주선 채로 우물쭈물 인사를 때우는 것도 도무지 아니꼬워, 차라리 그 꼴 안 보고 내 다리 품을 팔지 싶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디 원행할 일이 생겨 만일 정거장으로 나오게 되면, 웬만한 사람들은 먼 발치에서도 이씨 문중 누구인지를 알아보아 그쪽에서 먼저 미리 조신하게 몸가짐을 고쳤다. 더욱이 혹 거멍굴이나 고리배미 사람들이 문중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두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깊이 수그리고 들지 못하였다. 거멍굴은, 정거장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철도와 이만큼한 거리에 나란히 길이 난 산 밑을 따라 한 식경쯤 걸으면 보이는, 근심바우 옆, 몇 가호 옹색한 마을이다. 그저 다박솔이나 옻나무, 잡목들이 생긴 대로 우거진 나직나직한 동산들로 이어지던 능선의 풍경이 문득 출렁 높아지는가 싶은 무산 봉우리 아래 자리잡은 거멍굴은, 소쿠리 하나 안에 들만치 도래도래 모여 앉은 납작한 초가집들의 마
을이다.
깊은 산간의 벽지는, 농사를 지어 먹고 살 만한 한 뙈기 땅을 구할 길이 없으니 결국 불을 놓아 일구는 화전민 생활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반대로 산이 전혀 없는 허허 벌판은 또 땔나무를 얻기에 힘이 들 것이므로, 산과 들이 알맞게 어우러진 지형이 살기에 제일 좋다는 생각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예로부터, 사람이 모여 살아 마을을 이루는데 제일 좋은 명당은, 비산비야, 산중도 아니고 들도 아닌 곳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 곳이라야 인물이 나고, 마을이 번성하며, 오래 오래 자손이 이어져 향화가 끊이지 않는다 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이런 곳이 피난에 가장 적지라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매안의 지형이 바로 비산비야였다.
노적봉의 영기가 벋어 내린 발등에 터를 잡아서 그 발 아래 논을 밟고 서 있는 형국이 매안의 지세였던 것이다. 그곳에 처음으로 입향한 현조 한 몸의 자손이, 몇 백 년 동안 나고 또 나서 온 매안에 가득 차고, 잔등이 너머 다시 작은집 마을 하나를 더 이루도록 창성
한데. 이런 벌족한 동성 마을의 이만큼에 외따로 멀리 물러앉은 여남은 집 산성촌 거멍굴은, 서로 생업이 달라 세 무더기로 끼리끼리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처음에야 그렇게 길이 나뉜 곳이 아니었지만, 철도가 생기면서, 저만큼 있는 몇 집과의 사이에 금이라도 그은 것같이 된 대여섯 가호는, 언덕배기만한 동산 아래 엎드려 있었다. 발치에 작은 개울을 끼고 있는 그 동산은 얼른 보면 무심 한데, 뜻밖에도 제 키와 덩치에 맞먹을 만큼 시커멓고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제 가슴에 덜컥, 안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바위 덩어리의 형상이었다.
마치 한없이 큰 사람이 무슨 근심스러운 일이 있어 웅크리고 앉은채, 이마를 무겁게 수그려 제 가슴 쪽으로 기울인 형상이 분명한 바위였다. 높이는 올려다 보아 서너 길이 넘을 것 같고 넓이는 장정 대여섯이 팔을 있는 대로 벌린 만한데, 가슴이라 할 곳은 우묵하게 패여 들어가 있어 더 거멓게 보였다. 검은 근심.
그것을 쓸어 내리지 못하고, 웅크린 무릎 위에 시름 없이 얹어 놓은 두 팔도 모양이 확연하였다. 그런데 이 바위 덩어리는, 앞 모습만 그렇게 역력할 뿐, 뒷등은 무덤을 업은 것처럼 동산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동산의 한복판에 검은 바위 덩어리가 어둡고 깊게 박힌 것도 같았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이 바위를 두고 '근심 바우'라고 불렀다. 그리고 숯덩이리 같은 검은 이 바위의 빛깔을 빌어 생겨난 동네 이름이 '거멍 굴'이었다.
거멍굴 어귀 근심바우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은 백정 택주였다.
그는 눈이 바늘같이 가늘고 온 낯바닥에 누런 수염이 소털처럼 가득 덮여 있는데다가 어깨가 쩍 벌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그 나이 수월치 않아 흰 머리가 더북한 택주는, 대대로 그 집에 나고 죽고 하면서 살아온 세습 칼잡이다.
택주 옆에 모여 사는 대여섯 집들은 모두 택주의 살붙이로 아우와 조카들인데 다 같이 칼 잡는 일을 했다.
그는, 남원 읍내 천거리, 천삼백여 평 넓은 광장에 장날마다 열리는 우시장에 가서 소를 골랐다.
장날이면 삼도 팔군에서 삼백 마리 이상이 몰려오는 이 우시장에는 암소보다 황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래서 좋은 황소를 사거나 팔려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그 거래 규모가 첫째 아니면 둘째에 이르렀다. 그러니 성수기에는 집채만한 황소가 무려 오백여 마리나 누렇게 물결을 이루며 광장을 채웠다.
전라북도의 남원, 순창, 장수, 임실, 그리고 전라남도의 곡성, 구례, 경상남도 함양, 거창에서는 모두 이곳으로 왔는데, 도야지는 백오십이나 이백 마리 가량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돼지나 개는 백정의 손까지 빌리지 않고 보통 자기들이 집에서 잡는지라, 택주는 주로 소를 잡았다.
소를 잡는 것은 개를 잡는 것보다 더 쉬웠다.
어떤 황소도 택주 앞에서는 용을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도수장으로 쓰는 헛간의 천장에 있는 높은 가로대 중동에 동아줄을 걸고, 늘어진 줄 끝을 둥그렇게 고리 내어 소의 목에 걸면, 소는 주루루 눈물을 흘렸다.
가로대에 걸린 동아줄 한쪽을 잡아당겨 도수장 귀퉁이에 박힌 기둥에다 단단히 묶으면, 소는 앞발이 들리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때 소 머리의 양 뿔 사이 고지통을 도끼나 참나무 몽둥이로 단 한번만 내리 치면, 그 큰 소는 그만 힘없이 죽었다.
동아줄을 풀어내릴 때, 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쓰러지는 소를, 네 다리가 공중으로 가게 반듯이 눕혀 놓고는 재빨리 목에서부터 날렵한 칼로 배를 갈라 껍질을 벗긴다. 시뻘건 피 뭉치나 다를 바 없는 창자 내장을 다 들어 내고 부위별로 고기를 발라 내는 손은 칼끝보다 정확하다.
가죽은 다시 기름을 완전히 벗겨 내고는, 털을 불에 그슬려 잘 비벼낸 다음, 떡 치는 안반처럼 두껍고 넓은 나무판에 좌악 펴서, 사방에 못을 박아 팽팽하게 말린다.
오그라지거나 틀어지지 않게 말린 가죽은 바로 갖신 짓는 갖바치한테로 갔다.
만일 가죽으로 안 쓰려면, 털을 그슬린 뒤에 기름을 얇게 벗겨 내지 않고, 도톰하게 그대로 둔 채 덩어리 덩어리 썰어서 장을 붓고 끓이며 졸인다. 이것이 '껍데기 자장'인데, 그 맛이 담백하고 졸깃졸깃해서 상등 반찬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음식을 갖추어 먹고 잘 지내는 집에서 해 달라고 할 때만 만들었다.
머릿고기, 살코기, 앞다리, 뒷다리, 꼬리뼈에 온갖 뼈를 다 추리고 나면, 택주의 아낙 달금이네는 살코기만 골라 광주리에 담는다.
갈고리가 달리고 점점이 눈금이 찍힌 긴 저울대를 꾹 찔러 넣고 달금이네는, 고기 담긴 광주리를 보자기로 덮어 머리에 이고서, 이 마을 저 마을 집집마다 다니며 고기를 파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네가 자주 가는 곳은 매안이었다.
그곳에서는, 무슨 큰일이 아니면 미리 기르던 소를 내주어 택주한테 잡으라고 하거나, 아니면
"어디에 쓸, 얼마만한 소를 잡아 오너라."
하고 전갈을 보내 왔다. 그럴 때는 택주가 알아서 소를 구하고, 잡고, 손질까지 다 해서 가지고 올라갔다. 그러나, 보통은 달금이네가 이고 간 광주리에서 필요한 만큼 내려놓곤 하였다.
젊어서부터 머리가 회색이 된 오늘까지 이고 다닌 걸음이라, 달금이네는 이제, 어느 날 어느 때쯤 어떤 양반의 댁에 어느 만큼의 고기가 필요할 것인지 먼저 꿰고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대개 기제사나 어른들의 생산이 주였다. 또 매안에서도 어느 날 어느 시쯤 달금이네가 고기 광주리에 저울을 꽂아 이고 나타날 것인지를 미리 짚어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럴 줄 안다."
는 것이지, 서로 꿈에라도 한자리에 마음을 나란히 두어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엄중하고 준절한 신분의 벽이 까마득한 절벽의 아가리처럼 벌어져, 달금이네가 아닌 거멍굴의 그 누구라도 그것은 건너뛸 수가 없었다. 건너뛰다니. 바라보기에도 너무나 아뜩한 곳이었다. 아니, 그냥 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달금이네가 서 있는 이쪽은 낭떠러지 아래
쪽이요, 매안은 천 길 단애 깎아지른 저 암벽 위 꼭대기였다. 누가 무슨 재주로 그 꼭대기까지 날아올라가, 다시 또 그만큼이나 되는 저쪽으로 건너뛸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는 제일 천한 것이 종이라는데, 그 종만도 못한 처지의 백정 아낙 달금이네는 한숨 지었다.
종이나 호제, 하인, 머슴들조차 하대하여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누구라도 그네한테는
"해라."
를 붙였다.
머리가 쉬어빠진 회색으로 재를 뒤집어쓴 것처럼 된 이날 이때까지 그네는 세상 누구로부터 공대를 받아 본 일이 없었다.
거꾸로 달금이네는, 아무리 상민한테라도 말을 놓지 못한다. 그러니 매안 문중 어른들한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어린 아이들한테라도 그네는 반드시 말을 바쳐서 했다. 그것이 법이었다.
마님, 아씨, 새아씨, 작은아씨, 애기씨 하고 평생 동안 양반의 부인과 따님들에게 바쳐 부른 그 호칭들은, 달금이네 그 자신은 언제 지나가는 미친년한테라도 들어 본 일이 없었으며, 언감생심 그 말들을 넘본 일도 없었다.
매안에 올라가 고기를 내놓은 집에서는 셈만 하고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쓰일 소용에 따라서, 정성껏 썰고, 뜨고, 저미고, 다지는 일까지 다 해 주었다.
"아씨들이 이런 일 허시면 쓰간디요? 손 베린디."
달금이네는 그렇게 말했다.
"그럴라먼 먹지도 말어야지. 이빨로 도구질을 어뜨케 허능고? 귀찮허고 천해서."
달금이네 하는 일을 보고 언젠가 거멍굴 옹구네가 오금 박는 소리를 한 일도 있었지만, 달금이네는 엷은 미소를 머금는 듯 마는 듯.
"그렁 거 뇌꼴시럽고 서러우먼 이런 일 못허고 사네잉. 그렁 거잉갑다 허고 살어야제. 또 법도가 그렇고. 어쩌겄어.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났는디. 날 쩍에야 사람으로 난 것을 같을랑가 모르겄지만, 앞앞이 사는 시상이 다른 것을 어쩌."
"시상?"
"조상 공덱이 그거뿐이라 우리 조상은 대대로 소만 잡고 괴기 장시만 했는디 자손한티다가 멀 물려줄 거이 있겄능가. 벌그런 괴기 뎅이나 일펭상으 주무르는 거빼끼."
"그렇게 사람은 ㅃ다구를 잘 타고나야 하여."
"그것도 맘대로 못허는 일이고."
"아 머 매안 양반들은 거 가 낳고 자퍼서 맘 먹고 났간디? 어쩌다 봉게 씨가 글로 떨어징 거이제."
"다 전상으 진 인연이 있어서 그러겄지 머, 나는 먼 죄를 져도 졌고. 몰라서 그렇제, 안 그러고야 누구는 왜 어디가 나고 누구는 또 어디가 나고 그려? 해필 이먼."
"아이고, 그 속을 누가 알어? 이놈으 시상 어쩌능가 보게 꼭 한 번 꺼꿀로 되야서 대그빡으로 걸어댕기는 것을 ㅂ으먼 쓰겄는디. 아니 무신 놈으 시상이, 감나무도 해갈이를 허니라고 한 해 많이 열먼 한 해는 ㅁ 개 안 열고 그러능 거인 디 말여. 사램이란 것은, 왜, 여는 낭구는 가쟁이가 찢어지게 그쪽으로만 열리고, 없는 낭구는 말러 죽고 말제, 떠런 땡감 한 개 못 달고. 제 당대에만 그러고 만다먼 또 몰라. 무신 웬수를 졌다고 그 존 팔짜를 대 물리고, 대 물리고. 몇 백 년, 몇 천 년을 그러고 가능가 모리겄어."
"참말로."
그러나, 팔자 타령을 하면 무엇하랴.
어제 살아온 세상도 아니요, 하루 이틀 살아갈 세상도 아니었다. 그저 속으로 바라느니 고기라도 좀 많이 팔려서 남모르는 돈이나 좀 늘어났으면 싶을 뿐이었다.
"아이, 일년 가야 꼬드라진 말괴기 한 점 못 먹음서도 성짜 빤듯헌 양반 허능 거이 낫을랑가아, 괄시받는 백정것이라도 한 펭상으 괴기 하나는 여한없이 많이 먹고 사능 거이 낫을랑가아."
옹구네는 그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달금이네는 무슨 대답이 얼른 떨어지지 않았다.
자기가 잡는 짐승이나 별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으면서 사람 시늉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는, 서럽고 원통한 처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행세하는 대갓집의 씨종을 살고 말지 이 노릇은 못하겠다, 싶은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마는, 허구 한 날 배를 곯고 누렇게 뜬 빈 속으로 앉아 있어야만 된다면 그 또한 과연 어떨는지.
그럴 양이면 무엇이 좋아서 양반을 하려 할 것이며, 또 양반은 무슨 힘으로, 굶고 앉아서도 카랑카랑하게 호령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들이, 얼른 가닥이 잡히지 않는 때문이었다.
"아니 내가 왜 그런 말을 허능고니, 그래도 달금이네는 칼일 헝게로 머 꼭 챙게 먹자고 앙 그려도, 아 팔고 남은 부시레기만 줏어 먹어도 다 못 먹잖이여, 빽다구는 고아 먹고, 껍데기는 쫄여 먹고, 저 뱃속으 답북 들었는 그 창시는 다 멋히여? 지져 먹고, ㄲ여 먹고. 참, 꼬랑지도 먹제잉?"
"하이고오, 먹을 것 많아서 오지겄네에. 왜 볶아는 안 먹는당가?"
그 말끝에 달금이네는 옹구네 말 속뜻을 알고는, 옹배기에 걷어 담던 내장 한 칼을 베어 냈다.
어느 때는 고기가 쉽게 팔려 금방 광주리가 가벼워지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팔리는 것은 좀 더디지만 다행히 날이 추워 고기 상할 걱정이 덜한데, 더운 여름 같은 때.
"여름 소는 풀을 먹고 가을 소는 여물을 먹는데, 풀 먹은 소는 고기에 독한 기운이 있고 맛이 없다."
고 하여 잘 팔리지도 않는데다가 날은 더워 고기가 상하려고 하면, 달금이네는 다 못 판 고기 광주리를 들고 근심바우 아래로 갔다.
사시 사철을 두고 거기 그렇게 웅크린 모습으로 이마를 무겁게 수그린 근심바우는, 바위 살 속까지 얼어서 쪼개지는 엄동 설한에도, 온몸이 다 타 부슬부슬 껍질이 부스러지는 오뉴월 뙤약볕에도, 단 한 걸음 어찌하지 못하고, 근심으로 패인 검은 가슴속을 시름없이 들여다보면서 한데 나앉아 있었다.
"아이고오, 내 신세야아. 어찌 그리 너 허고 앉었는 거이 똑 나맹이냐. 너는 대 체 먼 근심이 그렇게 많허냐."
달금이네는 타령조로 한숨을 쉬고 바위한테 말을 건네면서, 이미 화덕같이 뜨겁게 달구어진 근심바우 무릎 위에 얇게 썬 고깃덩어리를 널어 말리곤 했다.
검은 바위에 벌겋게 널린 고기 무더기는, 작은 산 모롱이 하나를 돌고도 얼마를 더 들어가야 하는 매안에서야 보일 리가 천만 없었지만, 고리배미 마을에서는 멀리 희미하게 붉은 치마를 씌워 놓은 것처럼 보였다.
고리배미는 거멍굴에서 남쪽으로 한 식경쯤 걸어가는 곳에 있는 마을인데, 눈앞에는 들판이라 아무것도 거치는 것이 없어서 그만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달금이네는 고기 광주리를 이고, 이 고리배미로도 갔다. 그리고 고리배미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지게 작대기 끝에 갈라진 알구지같이 두 길로 나뉘어진 다른 쪽 길로도 갔다. 그것은 비얌골로 가는 길이었다.
바위에 빨래처럼 널려 있던 고기가 뙤약볕에 바싹 마르면 이제는 그것을 잘게 여러 조각이 나게 두드려 깬다. 그리고는 다시 몽글게 바수어 가루를 주머니 주머니에 나누어 담아 여러 개를 만들었다.
이 고기가루는 확독에 갈아 낸 쌀가루를 섞어 죽을 끓여 먹으면, 다시 없는 맛이 났다.
노인이 계신 집이나 환자가 있는 집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밥맛 잃은 사람들과 별미 찾는 사람들이 반가워할 것이었다.
이런 저런 일들이 대강 마무리져질 때쯤이면 택주는 으레 남원 장날 우시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날이 저물 무렵 소 한 마리를 몰고 거멍굴로 돌아왔다.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택주는, 일이 끝나면 근심바우 발치의 개울물에 피 묻은 손과 칼, 도끼들을 담그고 꼼꼼이 오래오래 씻어 냈다.
고기기름에 범벅이 된 피는 씻어도 씻어도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노랑내를 풍기며 연장과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들판에 어스름이 내려앉고, 근심바우는 더욱 검은 빛으로 어둠 속에 잠겨 들어가는데, 천민 중의 천민이라 상투도 법으로 못 틀게 하여, 쑥대강이 봉두난발로 쭈그리고 앉아 묵묵히 피를 씻어 내는 쇠백정 택주의 손등에 무심한 달이 푸른 빛으로 떠오르는 때도 있었다.
노비, 승려,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 여덟 가지 종류의 팔천 천민을 나라에서 정하여 구분한 세월이 얼마나 되었는가.
그 중에서도 가장 천한 것이 백정과 무당이다.
이 세상에서 짐승말고는 노비보다 더 심한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이 백정인지라, 일반 양인들과는 같이 섞여 살지도 못하고 성문 바깥 멀찌감치 물러나 저희들끼리 모여 사니, 다른 사람들한테 '성 아랫것'이라는 비칭 낮춤말을 들었다. 그것은 부성 고을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였다. 사부 반촌의 마을에는 말을 꺼낼 것도 없고, 민촌이라 할지라도 그 마을 안에 버젓이 섞여 살 수는 없었다. 안에는 그만두고 언저리도 안되었다. 그래서, 매안을 바라보고 그 서슬 아래 살 것이면서도 그쪽으로는 감히 허리 들고 들고 지나갈 엄두조차 못 내고는 산 모롱이 하나를 꺾어서 한참이나 내려와 돌아앉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리라. 그래도 민촌 고리배미까지는, 그보다는 좀 가까웠고, 길도 조옥 나있어 가기도 쉬웠으며, 서로 아득하게나마 바라보이기라도 하였다.
옛날에는 백정들이, 한 자리에 정착하지 못하고 떼지어 떠돌아 다니면서 패악 한 짓을 많이 했었던가.
택주의 저 먼 몇 대 할아비 때 일인데, 방방 곡곡 흩어진 백정들을 조정에서 한꺼번에 모조리 조사하여, 서울과 각 지방에 골고루 나누어 배치를 했다고 한다. 한 번만 그러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들의 명부를 작성했다.
각 고을에서는 백정의 거처를 한곳에 정해 주어 못박아 두고는, 그 사는 모양을 엄격하게 감독하니, 어디로 마음대로 떠날 수도 없고 일반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갈 수도 없이, 외딴 곳 이만큼에 떨어져 엎드려서 대대로 살아온 것이다. 사람들의 마을은 멀었다.
하기는, 제 몸 제 살에서 나는 피도, 피는 끔찍하고, 살아 꼼지락거리는 목숨은 개미 한 마리라도 무단히 죽여서는 안되는 것인데, 이 세상에 아직 나기도 전부터, 아비와, 아비의 아비가 오직 도살로 평생을 보내고 피 냄새에 살 가죽이 깊이 절어 버린, 그 아들은 또 어찌 그 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겠으며, 누구라서 그런 무리를 어여삐 여기리.
우리나 우리끼리 비비고 살 뿐. 그래서 백정들 사이에서는 근친혼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거멍굴의 근심바우 아래 맨 처음 자리를 잡은 할아비는, 산천 경개 명당 산수를 보고 이곳에 기둥을 박은 것이 아니었다. 아니면 무슨 연고가 있어 이곳으로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살라."
고 나라에서 말뚝을 박아 놓으니 여기서 살기 시작한 것이었다.
택주네 붙이들이 오물오물 모여 앉은 대여섯 집 옆이 금생이네 '성냥간'이었다. 대장간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누구는 '불무간'이라고도 했다.
본래 짐승 잡는 일에 쓰이는 칼이나 도끼는 그 날이 조금만 무디어져도 안된다. 늘 새파랗게 잘 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가죽을 벗기고, 그 큰 짐승의 고기를 다 썰고, 가르고, 발라 내느라면 아무리 잘 들던 칼도 대나무 잣대처럼 되고 만다. 거기다가 뼈를 자르고 쪼는 일이며 온갖 자질구레한 일에 쓰이는 연장들은 이빨이 빠지거나 망가지기가 쉽다. 그래서 늘 칼을 갈고, 날을 벼리고, 못 쓰게 된 쇠는 불에 녹여서 새것으로 만드는 대장간이 꼭 있어야 한다. 늘 쓰는 그 많은 연장을 일일이 남의 손 빌려 할 수도 없고, 집안에 대장장이가 느닷없이 날 리도 없어서, 집 옆에다 조그맣게 성냥간을 하나 만들어 그들은 제 필요한 것은 제가 손질하고 또 만들어 썼다. 그저 오두막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시늉은 갖춘 성냥간은, 저 위에 할아비 때부터 있던 것인데 이제는, 사정이 있어 이곳으로 들어와 눌러앉은 대장장이 금생이한테 아예 성냥일은 맡겨 버린 것이다.
불에 쇠를 불리는 것을 '성냥한다'고 하니, 대장장이가 쇠를 다루어 대장일 하는 것을 '성냥일'이라 하는데, 이 일 역시 팔천 중의 하나였다.
원래 백정은 신분을 바꾸어 평민이 되거나 생업을 바꾸어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었지만, 천민이어서 멸시를 받을 뿐이지 나라에 매인 종은 아니다. 그래서 일반 평민이라도 생활이 궁핍 곤란해지고 다른 살 길이 없으면, 백정
으로 들어가는 수가 있었다. 또, 같이 그 일을 하지 않더라도 금생이처럼 서로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대로 수수하게 생긴 딸년 얌례를 여의살이 시키고 부쩍 늙어버린 벙어리 금생이는, 그래도 여전히 이글거리는 화덕 앞에서 웃통을 벗어부치고 쇠를 달구었다.
그는 일년 내내 택주네 푸네기 대여섯 집에서 쓰는 칼과 도끼를 손보고, 그 외엣일로 심심치 않게 낫이며, 호미, 괭이, 쇠스랑 같은 것들을 달구고, 벼리고, 녹이고 만들었다.
제대로 된 대장간이 아니어서 아주 이 길로 나설 수는 없었지만, 할줄 아는 일이라, 매안의 농기구 손질도 하고, 건너 고리배미 같은 데서 소소하게 부탁을 하면 택주네 일하던 중에 조금씩 해 보는 것이다. 그런 것은 어쩌다 맞돈을 받는 수도 있었지만 대개는 외상 일이어서, 그는 섣달이 되면 농가를 한 바퀴 돌며 그 동안에 해 준 일의 품값을 받는 '성냥노리'를 나갔다.
그럴 때말고는, 밤이고 낮이고 거의 꾀를 벗다시피 벗어부친 채로 쇳덩어리를 두드려대면, 시뻘겋게 이글이글한 불 속에 쇠를 달구었다가, 또 물 속에 푸지지지 요란스럽게 집어 넣고, 또 다시 내려치는 금생이의 성냥간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 쇠 치는 소리는 바로 눈앞에 무산 골짜기로 파고들었다.
택주네 무더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올리면, 저쪽에서부터 남실남실 흘러오던 동산 능선이 여기 와 출렁하고 솟으면서 물살 또아리를 이루는 무산이 눈에 들어왔다.
감시르르 봉우리를 감아 올리는 듯도 하고 깊은 한숨을 무겁게 삼킨채 토해 내지 못하고 앉아 있는 것도 같은 산. 늘 달은 이곳에서 떴다.
무산 위에 떠오른 달은, 토월, 이상하게도 토해 내는 것처럼 보였다. 제 눈앞의 근심바우 검은 덩어리가 그대로 가슴에 와 박히고, 또 그 아래 흐르는, 피 노린내 배어든 개울물이 땅 속의 실핏줄로 스며 스며들어 무산의 온몸에 차 오르는데, 대장장이의 쇠 치는 소리까지 그 속에 꼬챙이를 지르니. 더는 참치 못하고 밤이면 캄캄한 하늘에다 토해 내는 숨.
그것이 무산의 달이었다.
이 무산 기슭 바로 밑에, 제멋대로 자라나 스산하게 어우러진 대나무로 울을 두른 초가집 서너 채가, 꼭, 산의 오지랖 자락에 대가리를 모두고 깃들인 것처럼 옹송그리고 있었다.
당골네와 점쟁이, 그리고 고인 잽이들이 사는 집이다.
꼬막조개 껍데기보다 더 클 것도 없는 지붕이 동고마니 덮고 있는 황토 흙벽과 지게문, 그리고 겨우 시늉이나 하고 있는 손바닥만한 마루와 토방.
여기에도 무산의 달은 푸른 물 소리로 떠오르고, 뭉친 먹물 같던 대나무 울타리는 이파리 낱낱의 비늘을 검푸르게 씻으며 몸을 솟구쳐
쏴아아
귀신이 쓰다듬는 소리로 달빛 소리를 받았다.
이 거멍굴에 누구네가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왔는지 아니면 같은 때 나란히 묶여서 이곳으로 던져졌는지 알 수 없지만, 무당도 백정이나 마찬가지로 팔천 중의 하나요, 그 여덟 가지 천민 중에서도 백정과 동무해서 제일 업신여김을 받아온 것만은 같았다.
마을 사람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들한테도 반드시 말을 바쳐 써야만 하고, 절대로 일반 사람들과는 혼인할 수 없다고 금지되어 있는 무당 당골네는 아무리 사람들한테 천대 하시를 받아도 무업을 그만둘 수 없었다. 다른 일로 바꿀 수도 없었다. 거꾸로 보통 사람이 이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었
다. 그래서 당골네들은 동파들끼리만 서로 혼인하고, 저희들끼리 판을 나누어 대대로 세습하여 이 업을 이어왔다.
어디고 한 마을에는 한 당골만이 있는데, 이 당골은 마을 한 개, 혹은 두 개, 많으면 너덧 개까지 혼자서 맡는 '당골판'을 가지고 거기서만 굿을 했다. 결코 남의 판을 넘보아서는 안되었다.
거멍굴 무산 밑의 세습무 당골네 백단이는, 두 마을을 합하면 이백여 호가 훨씬 넘는 매안과 고리배미를 자기 당골판으로 하였다. 그것은 본디 당골네의 시어미가 보던 판이었는데, 이제 그녀가 죽고 그 판을 물려받은 것이다.
백단이는 이리로 시집오던 그날부터 두 마을의 어느 집에서 굿을 할 때마다 시어미를 따라가, 잔일, 큰일, 겉의 일, 속의 일들을 속속들이 배우기 시작했었다.
전라도에서는, 굿을 여자만이 할 수 있었으니, 당골네의 아들들은 어려서부터 장구를 치고, 피리를 불며, 구음 넣는 가락을 배웠다.
장가든 다음 무부가 되면, 제 아낙이 하는 굿에서 악기로 반주하는 잽이 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안이면 격이 높은 곳이요, 고리배미는 민촌이라도 가호 수가 많아서, 무산 밑의 당골네는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한없는 설움으로 구천을 떠돌며 흐느끼는 가여운 귀신, 원한 맺힌 귀신, 갈 곳을 모르는 귀신들을 서럽게 서럽게 불러서, 그 맺힌 고를 풀어 주는 굿의 사설을 뼈에서 우러나오게 노래 부르는 일부터, 춤의 가락과 굿상 차리는 절차, 그때 입는 옷 같은 것들을 세세 낱낱 배운 당골네는, 마을에서 으레 철 따라 하는 굿이며 집집마다 경우 따라 해야 할 굿들을 정확하고도 흐드러지게 다 배워야 한
다.그러나, 가령 아무개가왜 그렇게 아픈지 그 원인을 점치고, 굿하기에 좋은 날짜를 받는 것은 점쟁이가 하였다. 점쟁이는 그 몸에 신이 실려 접신한 사람이니, 어리석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계의 일을 점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굿을 잘하는 당골네라도 알 수 없는 점쟁이의 세계였다.
헌데 점쟁이가 아무리 점을 잘 쳐도 굿를 맡아서 할 수는 없다. 굿은 하루아침에 홀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 꼼꼼이 배우면서 외우고 익히고, 드디어는, 귀신이라도 이 당골네의 정성과 솜씨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지붕의 이마를 맞대고 앉아 점쟁이는 점을 치고, 당골네는 점괘 나온 대로 굿을 하였다. 그리고 무부와 함께 악기 반주를 하는 잽이가 사는 집이 바로 그 옆이었다.
잽이는 남자들이다.
남자들은 굿상에 꾸미는 종이꽃을 만들거나, 굿에 쓰일 물품들을 사러 장에 다녀오고, 봄에는 보리 때, 가을에는 나락 때, 당골판에서 주는 보리나 벼, 혹은 쌀을 거두는 일도 한다.
당골은 제 당골판인 마을에는 굿을 할 때 일일이 그때마다 떡 값 얼마, 초 값 얼마, 하고 받는 것이 아니라 일년 내내 으레 그 마을에서 무슨 굿할 일이 생기면 제 일로 알고 그냥 했다. 그러면 마을에서는 봄, 가을로 보리나 쌀을 거두어 일년 먹을 곡식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이 '동냥'이었다.
점쟁이 집에는 이른 새벽부터 해 넘어갈 때까지, 문복하러 오는 아낙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코빼기만한 토방에 짚신짝들이 어지럽고, 당골네 집에서는 굿에 쓸 창호지 혼백을 하얗게 오리고 있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는 어찌 그리 맺힌 일이 많은가, 남의 귀신 피멍도 풀어 주는 당골네가 막상 그 자신의 그 무엇도 풀지 못하면서, 흰 무명필을 펼치어 마디마디 일곱 개의 고를 맺는다. 오늘 밤 굿에서 풀 '고'이다.
대개 굿은 그 당사자 집에 가서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만부득이 무슨 사정이 있어 여의치 않을 때는 당골네 집에서 대신하는 경우도 있어서, 밤이면 어둠의 갈피를 헤집어 에이는 시누대 피리 소리에 장구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데 데 데 뎅
지이 징 지리 징 지잉 징
놋쇠 징소리가 거멍굴의 검은 하늘 깊은 가슴을, 말로는 다 못할 애원으로 두 드렸다.
그럴 때 무산은 달조차 토해 내지 못하고 오직 흐느끼듯 캄캄하였다.
이 무산과 저 근심바우 사이에 거진 한가운데쯤 되는 곳이 바로 옹구네와 평순네, 그리고 공배네, 또 조금 떨어진 동산 기슭에 춘복이가 살고 있었다.
이곳은 길가였다.
어느 옛날부터 있어 온 것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다져 놓은 소롯길이 제법 탄탄한 이 길은, 북쪽에서 벋어와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잔잔한 동산들을 데불고 발길이 여기가지 오면, 동그라니 옴막한 거멍굴, 오른 쪽은 근심바우요, 왼쪽에는 무산이 보였다.
가던 걸음을 이 자리에서 멈추고 하나씩 하나씩 주저앉은 사람들이 백정도 당골도 아니면서 머뭇머뭇 정착하게 된 이들의 윗대에서는, 금방이라도 다 떨치고 일어서서 다시 길을 가려고 이렇게 길가에 자리를 두었는지도 모른다.
본디 어디서 무엇 하던 사람들이었건 간에 다른 어디에는 아무래도 몸을 붙이고 살 수가 없는 궁색한 형편들이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가 어디라고 팔천들 사이에 끼여, 아낙은 당골네 일을 돕고 남정네는 백정의 칼질을 도와 그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살겠는가.
그래서 걸핏하면 옹구네는
"안 듣는 디서는 상감님 욕도 허다는디 머 시께잇 것들 말을 못하여? 아이고 그 당골년 낯빤대기."
하고 당골네 욕을 평순네한테 찰지게 하기도 하고
"저런 순 백정놈이."
하고 택주네 무더기 누구를 마구 잡아 몰아붙이곤 했다. 물론 듣는 데서는 어림없는 일이지만, 그러면서도 일손은 재발라서 산 밑으로 가나 바우 밑으로 가나, 어서 오라는
말을 듣지 왜 왔느냐는 말을 듣지는 않는다.
그런데 일 봐 주는 집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면 꼭 그렇게 뜯어 내는 소리를 하 는 것이다.
그것은 매안으로 일하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뜸의 대갓집이거나 문중 사람들의 집이거나 허드렛일은 많았고, 눈치껏 몸을 놀리면 얻어먹을 것이 생기는데다가, 농사철이나 추수할때나 놉이란 언제나 필요한 것이어서, 이 사람들은 매안으로 올라가곤 하였다. 고리배미, 거멍굴에서나 매안에서나 날삯도 삯이지만 어디로 밀어내지 않고, 오면 오는가, 가면 가는가, 해 주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의지가 되었던 것이다.
날마다 날품을 팔아 그날 먹을 것 그날 벌어야만 한다면, 얼마나 멱이 막힐 노릇인가.
근본도 모르고, 가진 땅 한 뙈기도 없는 이들이 이렇게라도 어떻게든 살아 보는 것이, 아슬아슬한 세상에 발을 붙일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늘, 길바닥과 발바닥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물 막이 있어 발이 땅에 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은 공배네는,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길가에 앉은 공배네 집 이쪽 저쪽으로 좀 들어가고 좀 나오면 모여 있는 이들은, 나름대로 동산 기슭에 채마밭을 일구어 그저 반찬거리나 걷어 먹었는데, 샘은, 모두 한 우물을 썼다.
그저 사람 사는 것이 이런 것이려니 하고 하루하루 넘기다가 한번은 공배가, 몹시 무거운 얼굴로 쪼그리고 앉아서 늙은 볼따구니를 주먹으로 받친 채 고개를 기울이고는,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애초 백정도 아니고, 차라리 그러면 포기나 허제, 배운다고 당골일을 헐 수 있능 것도 아니고오, 그러먼 머 땅이나 한 쪼객이 있능가 허먼 그것도 아니고. 다른 재주 머 맹글찌 아능 거이 있는가 하먼 그것도 아니고, 그러먼 또 종이냐 허먼 그것도 아니고오. 우리 아부지, 오직허먼 이런 팔천놈으 복판으다 나를 나 놨겄어. 그러고는, 나 이레 지내먼 뜰라고 그릿겄지. 그러다가 걸어댕기먼, 장개 가먼, 손지 보먼, 헝 거이 제머. 아이고, 몸썰 난다. 자식 없기 잘했제. 에에이. 던지런 놈으 시상. 이러고 살어도 이게 무신 사램이여?"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좀처럼 그런 말 안하는 공배의 푸념에 공배네는 속이 뜨끔하여 헐끗 낯빛을 훔쳐보았다.
무슨 조상을 타고나서 시방 어떻게 살든, 또 부모 죽은 다음에 제가 어찌 살아가든, 그네는 '자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부모가 비록 백정이고, 당골네일지라도, 아니면 떠돌이 동냥아치일지라도, 자식은 마땅히 그 핏줄을 받아 부모의 대를 이어주어야만 한다고 그네는 믿었다.
부모의 껍데기가 무엇이고, 하는 일이 무엇인가, 양반인가 상놈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귀하면 귀한 대로, 천하면 천한 대로, 제 생김새를 갖추게 해 준 부모와 그 부모의 부모를 거슬러 더 까마득히 올라가면 만나게 될 할아비를 공배네는 그리워했다. 또 실같이 가느다라면서도 살과 뼈의 심지 속에 또렷하게 박혀서,
아들을 넘고 손자를 건너 증손자에게 흘러내려가는 할아비의 넋이, 그대로 그네의 살 속을 지금 꿰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아서 그네는 가슴을 오그렸다. 그러나 그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어쩌다 하나 얻은 아들을 꿈에도 믿지 못할 순간에 놓쳐 버리고, 다시는 더 낳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한 것일까. 그네는 자신의 몸에 갖힌 채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는 할아비의 넋이 핏줄을 동여매는 것 같은 아픔에 어금니를 문다.
"자식 소리는 또 왜. 머 잘난 사람만 사램이랍디여? 못난 사람은 또 못났다고 사램이 아니고? 아 꼭 멋이 돼야야만 사람이간디, 기양 사램이먼 돼았지."
혼자말처럼 대꾸하며 눈을 돌린 사립문간에,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온 길인지는 모르나, 이곳을 지나 또 어디론가 끝간 데 없이 흘러 갈 소롯길이 누워 있었다.
9 고리배미
만일 낫을 놓고 이야기를 한다면, 날카로운 날끝이 노적봉 기슭의 매안이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한참을 걸어와 낫의 모가지가 기역자로 구부러지는 지점이 새로 생긴 정거장이며, 그 목이 낫자루에 박히는 곳쯤이 무산 밑의 근심바우 거멍굴이다.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와 맨 꽁지 부분 손 잡는 데에 이르면, 고리봉 언저리 민촌 마을 고리배미가 된다.
이름 그대로 둥그런 고리의 등허리같이 생긴 산이 모난 데 없이 수굿하게 앉아서 좌우에 나직나직한 능선을 그으며 마을을 보듬고 있는 이곳에는, 어림잡아 백이십여 호가 넘는 집들이 집촌을 이루고 있었다.
산중도 아니요, 들도 아닌 비산비야의 난양지지, 따뜻하고 양지 바른 터에 처음으로 들어온 한 헌조, 어질고 덕망 있어 이름이 높이 드러난 할아버지의 자손들이 그곳에서 오 대, 십 대, 그리고 몇 백 년씩 살아오며 같은 조상의 가지로서 동족 마을을 이룬 것이 집성 반촌이라면, 고리배미는 제 각기 이 마을에 들어온 내력이나 성씨가 서로 다른 각성바지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무간하게 섞여 사는
산성촌 민촌이었다. 물론 이 중에는, 고리배미에 맨 먼저 자리를 잡아 대대로 살면서 거의 삼십여호 가까운 일가붙이를 데리고 있는 집고 있고, 그보다 한 발 나중에 들어와 이
십여 호 되는 집, 또 그보다 더 이만큼 중간에 정착하여 여남은 가호가 생겨난 집들도 있었지만, 그들을 빼고는 많아야 예닐곱, 아니면 너댓 집들이 같은 성씨 로 형제 분가하거나 혹은 아재비, 조카를 부르면서 살았다. 그리고 그 나머지들은 그야말로 각동박이, 한 성씨에 한 집씩이고 기껏해야 늘어나서 두 집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수효가 많다고 해서 집안을 내세워 텃세를 한다거나, 한 집만 산다고 얕잡아 업신여기는 일은 별로 없었다.
"외나 우리 동네는 타촌서 들은 사램이 더 잘되는 디 아닝가. 기양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 들와도 얼매 안 가서 심 짚고 일어나잖등게비."
"먼 짓을 허든지."
하는 말이 꼭 빈말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조상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부지소종래'라 하여, 자기가 비롯되어 온 곳을 모르니, 그 자신의 근본이 어디에 있으며, 조상은 누구인지, 또 어떻게 살아왔는지, 집안 내력을 도무지 모르는 사람들이 산다고, 고리배미는 반촌으로부터 하시를 받았다. 비록 그곳이 판박이 천민인 무당이나 백정, 갖바치들이 사는 수악한 마을이 아니라 할지라도, 상인, 상민, 상한, 상놈, 상것, 상사람, 나라에 매인 종은 아니지만 그 신분이 낮아서 곤궁하고, 가지가지 불리는 이름도 많은 상민들이 살고 있거나, 향교 출입을 할 수 없는 신분인 중로들이 살고 있는 곳은 민촌이라 하였다.
중로는 중인이다. 그들은 양반 다음가고 상민 위에 있는 사람들이라, 행세는 할 수 없었지만 천한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실리에 밝았다. 그래서 오직 공리와 효용에 가치를 두고, 자신이 가진 기술로 생업을 삼아 재물을 모았다. 이 세상에 재물보다 확실한 기둥은 다시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물로 그들은 많은 전답을 사들였다. 물론 모든 중로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부자는 민촌에 많다."
는 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고리배미에는, 이 중로와 상민들이 서로 어우러져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신분의 구분은 있어서, 그들은 아무리 허물없이 이웃하고 살아도, 쓰는 말만은 마구 섞지 않았다. 그 사는 형편이나 나이와는 상관없이 중로는 상민에게 '하게'나 '하소'로 말을 놓았고, 상민은 중로에게 '합니다', '하지요'하며 말을 올려 했다. 지금이야 옛날 같지 않아서, 그런 신분을 정하여 옮도 뛰도 못하게 만들었던 조정도 망하고, 이제는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겉옷 밑에는 여전히 오래 오랜 세월 동안 묵고, 가라앉고, 엉겨붙은 관습이 소금 버캐 켜켜이 자욱한 몸뚱이처럼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새로 난 철도가 마을 뒷산 고리봉의 저 뒤쪽으로 벋어 지나가듯이, 개화 개명이라는 새 문물은 마을 바깥 저 뒷등허리로 저희끼리 지나가고 있을 뿐. 이 마을 안 고리배미는 예전부터 나 있는 길을 그대로 끼고 앉아, 변함없이 걸어서 다니는 사람들 모양 어제 살던 대로 오늘도 살고 있는 것이다.
양반들이야 민촌이라고 웃든지 말든지 여기서는 여기서대로 그런 것을 가리면서, 중로는 체신과 실속을 챙기려 하였고, 상민은 자신들이 쇠백정 도한이, 고기 잡는 어한이, 소금 굽는 염한이에 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스스로 위로하였다. 이는 삼한이라고 하여 몹시 천대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갯가에 났드라면, 도한이는 몰라도 어한이, 염한이 중에 하나가 되ㅇ을 거잉만, 우리 같은 상놈이 무신 근본이 있어야 말이제. 떨어진 디서 기양 목심 부지허고 살었을 거잉게. 앙 그렁가? 불행 중 다행이여, 농사 짓는 디서 나서 농사 짓고 상게 말이여."
"옘병하고 앉었네, 도통을 헐랑가, 지 땅이라고는 단 한 볼테기도 없음서 머이 그렇게 다행이냐, 다행이."
"긍게나 말이다. 아이고, 옘벵이나 엄벵이냐, 천지에 깔린 땅 도지 받어서 다머에다 쓴다냐."
"논 사지."
"그놈 도지 받으먼?"
"밭 사고."
"또 그놈 받으먼?"
"첩 딜이고."
"핫따, 어뜬 놈 좋겄다. 비오리 지금 살잉가?"
"한 삼십 안되이까?"
"넘었지맹."
"넘어? 아이고, 아까워라."
거개가 농사일을 하는 이 마을에서 제 논 가진 집은 얼마 안되지만,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농사를 크게 짓는다고 소문난 사람은 엄서방, 엄병곤이었다. 그는, 경술국치 이전에, 자못 위세가 당당하던 오수역 역리 엄구용의 손자로 나이 오십이 벗어진 사람이다.
고리배미 토박이인 병곤은 키가 땅딸막하고 어깨에 살이 올라 바라진 체구에 목이 굵고 짧은 외양이 좀 훤칠하지 못한 것이 흠이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기호성은 대단하여 그의 몸에는 늘 팽팽한 바람이 차 있었다.
거기다가 이곳에서 대를 물려 살아온 집안인지라 일가붙이도 넉넉하여 삼십여 가호나 되는 그는, 사위도 그다지 고단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주로 이 마을의 동편쪽에 모여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엄씨네를 두고 '동엄'이라고 하였다. 이 동엄의 머리에 앉은 것이 병곤인 셈이었다.
그들 일가 중에는 병곤의 논을 부치고 있는 집도 몇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염병' 소리 끝에 '옘벵'이냐 '엄벵'이냐고 한 말은, 엄병곤의 이름을 두고 빗댄 말이고, '비오리'는 마을 어귀 삼거리 주막의 매초롬한 술어미이다. 그리고 둘러앉아 한 마디씩 한 것은, 매안 원뜸의 소작인들이다.
엄병말고는, 농사 지어 자기 앞 가리면서 곳간에 찬 바람 나지 않을 만한 서너 집을 제하면, 그저 근근이 굶지나 않을 정도의 논 뙈기에 온 식구 목구멍을 의탁하는 사람들과, 그나마도 없어서 소작을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같은 일가붙이인 엄병곤의 논을 부치는 엄씨 들이나, 매안에서 소작을 얻는 사람들은 그래도 나았다. 이도 저도 못하여 동척에 소작 계약을 한 여러 집은
"차라리 동냥아치가 낫다."
고 말라 붙은 한숨을 모질게 쉬었다.
앞앞이 사는 형편도 다르고, 모양도 다른 고리배미 사람들은, 대개는 농사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 다른 생업을 가진 경우도 많았다.
이 마을의 한쪽 끝에 사는 부칠은 나이 오십의 나무꾼인데, 그는 오직 한 가지, 나무를 하고, 그것을 장에 내다 파는 나무장수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지게 하나 짊어지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소나무 가지를 낫으로 쳐내 동이로 묶어 나뭇짐을 만들거나, 가을이면 발치에 수북히 쏟아져 쌓이는 마른 솔잎을 갈퀴로 긁어 가리나무 다발을 만들거나, 혹은 나뭇간에 쟁일 장작단을 만들어, 장날이면 부칠의 아낙은 머리에 이고 사내는 등에 지고, 읍내로 나갔다.
읍내 나무전 거리에서도 그의 나뭇단을 알아 주었다. 어려서부터 나무 일로 뼈가 굵은 그는 이제 그 뼈에 바람이 스며들어 예사로
운 날씨에도 쉽게 속이 시리지만, 나뭇짐만큼은 여전히 바윗돌 같이 단단하고 무겁게 묶어 내는 때문이었다.
부칠과 이웃에 살면서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 온 모갑이는, 박달 방망이, 빨래 방망이, 홍두깨들을 깎아서 팔았다.
"에레서 팽이를 깎어도 말이여, 우리는 기양 대강 숭내만 내 갖꼬는 울둑울둑헌 대로 치잖이여, 왜. 근디 모갭이 이 사램이 깎어 논 것은 달르드라고. 맨드로 옴허니 태가 나서 아조 이뻤제잉."
그것은 부칠의 말만은 아니었다. 유난히 솜씨가 곰살가워 일 맵시가 남 다른 그의 손으로 만드는 것 중에 일품은 아무래도 나막신이었다.
보통 '나무께'라고 하는 이 나무 신은, 비 오늘 날 진흙 땅에서 신는 진신과 마른 날 신는 마른신 두 가지인데 어느 것이든 높은 굽이 달려 있었다. 이 굽이 서툴게 달리면 높이가 맞지 않아, 신고 나서면 뒤뚱거리고 걸음이 불안하여 넘어지기 좋았다. 그런데 모갑이의 나막신 굽은 맨땅을 디딜 때보다 오히려 더 상큼한 기분이 들게 알맞았고, 먼 길을 가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으며 아무리 오래 신어도 굽이 쪼개지거나 빠지는 일이 없었다.
"사람만 양반 상놈이 있는지 아능가? 나무깨도 있네이. 어뜨케 달르냐고? 우선 나무가 달체. 개법고 보드람서도 단단헌, 좋온 나무는 양반신으로 가고, 상머 심 괭이 백인 마당발맹이로 심 좋게 막 생긴 나무는 상놈 신으로 가고. 근디, 외나는 어디가 달르냐먼 뫼양이여, 뫼양."
퉁퉁하니 뭉시르르하여 둔한 코빼기는 볼품이 없어 막신밖에 안된다. 동그스름하고 매끈하게 다듬어져 계란이 오히려 거칠게 느껴지는 뒤꿈치도 말할 것이 없지만, 그 뒤꿈치에서부터 쪼옥 곧은 선으로 유연하게 벋어난 선이 콧부리에 이르면서 날렵하게 위로 휘어 오를 때, 여기서 그 나막신의 모양과 품이 결정났
다.
"코빼기 멍청허먼 신 베려. 딴 거 다 잘해도 헛짓해 부리능 거이여. 자, 바라, 코빼기는 요러어케, 닭 대가리가 발등으로 고개를 홰애 돌림서 모가지 따악 쉭인 것맹이로 이뿌게 깎어야여."
그는 옆에서 일을 배우는 아들한테 번번이 일렀다. 그렇게 다 된 나막신의 신총에, 가늘고 검은 먹줄을 선명하게 두 줄로 그리기도 하고, 인두로 지져서 수를 놓듯이 고운 꽃잎이나 구름 무늬, 넝쿨 같은 당초문을 새겨 넣기도 하는
"모갑이 나무깨."
는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나씩 가지고 싶어했다."
"갖신 부럽잖다."
는 말을 듣는 그의 나막신은, 그 결이 비단같이 부드럽고, 신었을 때 발을 오무려 감싸 주는 느낌이 안정되면서 편하고, 깎고 꾸민 모양이 발에 신기 아깝게 어여뻤다.
모갑이는 장날이면, 방망이, 홍두깨와 함께 한 죽, 두 죽, 솜씨를 다해 파 놓은 나막신을 어깨에 메고 읍내로 나갔다.
갖신이야 거멍굴 백정 택주네붙이 중에 갖바치가 있어 거기서 짓지만, 모갑이의 나막신도, 운혜, 당혜, 비단 입힌 갖신 못지 않게 가지고 싶은 물건이었다. 그러나 갖신이고 나무깨고 다 그만두고, 그저 짚신짝이라도 아쉽지 않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라은, 방물장수 서운이네였다.
그네는 마치 함을 지듯이 뚜껑에 손잡이가 달린 버들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낡은 무명 멜빵을 멘 채로 장날이면 읍내로, 아닌 날은 이 마을 저 고을로 찾아다니며 행상을 했다.
윤이 반들반들 나고 손때가 버들 속으로 깊이 배어 들어 투명하게 얼비치는 가방 뚜겅을 열어 세우면, 그 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었다.
위짝 아래짝 칸에는 올망졸망 형형색색 여자한테 소용되는 용품들이 가득 차 있는데, 그 앙징맞고 영롱한 모양이나 색깔들이라니. 하얀 무명실, 다홍, 연두, 노랑, 남색 명주 푼사실, 꼰사실, 가위, 바늘, 골무, 그리고 쟁가랑거리는 은단추, 호박 단추, 앵두 단추, 막단추, 거기다가 참빗, 얼레 빗, 화각빗이며 빗치개에 귀이개, 그리고 비취 물빛 영락없이 흉내낸 사기 비녀와 검은 비녀, 술이 달린 노리개, 반지. 그 옆에 숨막히게 보얀 향을 뿜어 내는 분통이며 반드르르한 머리 기름병. 구리무 곽.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를 곱게 놓은 경대보와 매화 꽃 벙그는 비단 수저집, 바늘집, 댕기, 이런 것들이 빼곡 들어 찬 가방을 지고, 서운이네는 걸어서 걸어서 마을과 마을을 하염 없이 떠돌아 다녔다.
"참말로 나 다리 품 하나는 여한도 없게 팔었그만, 긍게 내 다리가 나 멕에 살링 거이제, 나 그런 생객이 들등마잉. 지가 갖꼬 나온 지 몸뗑이 사대육신이라도 저허고 진 인옌이 다 각각 달릉 거잉가아. 어쩡가. 아 왜 어뜬 사람은 손으로 먹고 살고 어뜬 사람은 발로 먹고 살아아. 또 어뜬 사람은 소리 하나로 살고. 그게다 지 몸뗑이허고 저허고 진 인옌이제잉."
젊은 날부터 방물장수로 나서서 한평생을 길바닥에서 햇빛 아래 돌아다닌 탓으로 이제는 정수리 머리가 버슬버슬 부스러져, 고시라진 옥수수 수염같이 되어 버린 서운이 할미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면 외눈백이 곰배팔이는 머이고?"
이야기 듣던 노파가 한 눈을 찌그리며 말을 받았다.
"내 말이. 그렇게 그게 요상타고. 어뜬 것은 한펭상을 부레 먹고 또 그거이 나를 멕에 살리고잉, 어뜬 것은 그렇게 써 먹능 건 고사허고 달려 있도 안허냐고.
긍게 그 눈구녁허고는 무신 웬수 갚을 악연을 지었등게비지. 당최 그 몸뗑이에 는 달려 있고 싶도 안헌."
"아이고, 안 달린 것으로 웬수 다 갚었그만 그리여, 그런다먼."
"그렇게, 작고 크고, 잘 났고 못 났고 무신 원망을 말어야 히여. 그것다 지가 진 인옌이 모다 뫼아 갖꼬 사대육신 생게 났을 거잉게."
"사주 팔짜 낯바닥도 그렁 거이나 똑같겄그마잉."
"아이고오, 내 팔짜야아."
한숨을 쉬던 서운이 할미 곁에서 어린 서운이는 조작조작 걸어 다니며 놀고, 나이 젊은 서운이네는 시어미한테서 물려받은 방물 가방을 등에 지고 나섰다. 그 서운이도 어느덧 아홉 살이 되었다.
시어미가 다니던 길을 따라, 다니던 집을 찾아 다니고, 한 속처럼 그집에 필요한 물건을 꿰어 알게 된 서운이네의 머리 정수리도 벌써 먼지를 뒤집어쓴 당나귀 갈기처럼 빛이 바랬다.
서운이네는 가까이 매안으로부터 숲말, 밤두내, 수월, 덕평, 매내골, 풍촌, 어의 터, 황새터, 화정리, 계동을 고루고루 더터서 날짜를 가늠하여 돌았다.
단골이 된 집의 안방에 방물 보따리를 내려놓으면, 소식을 듣고 안사람들이 모여 오고, 혼기에 달한 처자를 둔 집에서는
"아무 만한 아무 것을 구해다 달라."
고 주문을 하기도 했다. 한 집에 길게 머무를 수 없어 마을의 집집을 꼼꼼이 도느라면 해가 저물기 일쑤였다. 여자가 사는 물건이란 한없이 섬세한 것이어서, 단추 한 개 사는 데 한나절 걸리는 것도 예사인, 아예 그럴 줄 알고 마음을 누그럽게 먹어야 한다.
"단초 한 개가 그거이 단초 한 개만이 아닝 거이다. 첨에는 서 푼짜리 단초 한 개로 시작이 되지마는 거그서 고리가 걸리먼 삼십 년 단골이 되는 거잉게. 그러고 그 한 사람만 나허고 걸리능 거이 아니여. 그 사램이 하늘서 떨어졌겄냐? 성지(형제) 있고 친척 있고 동무 있고, 그 동무는 또 동무가 있고. 그 사람덜하고다 연줄 연줄 거무줄맹이로 얽어지먼 그거이 대관절 ㅁ 멩이냐. 나는 그 생각을 잊어 부린 일이 한번도 없었니라. 방물 짐 이고 댕김서. 그렇게로 시방 나 대기든 질을 니가 또 댕길 수 있는 거이고. 장사는 내일을 바야 히여."
시어미는 며느리 서운이네한테 방물 가방 속에 든 앵두 단추 한 개를 지어 들며 말했었다. 저승꽃이 거멓게 번진 늙은 손의 두 손가락 사이에서, 영락없이 앵두 모양을 한 단추가 투명한 진홍으로 빨갛게 빛났다. 그것은 어린아니 조끼에 다는 단추였다.
"여그다 너를 걸어야 히여. 가문 좋고 문벌 존 사람은 거그다 저를 걸고, 재산이 많은 사람은 또 거그다 저를 거는디, 이도 저도 아무것도 없는 너는, 여그다이 단초 한 개에다 너를 걸어야 히여. 무신 교옹장 헌 넘의 껏, 체다보도 말어라, 넘의 껏은 암만 좋아도 다 쇠용없는 일잉게로. 니 꺼이나 놓치지 말어."
시어미는 그 빨강 앵두 단추를 서운이네 눈앞으로 바짝 들이밀며 오금박듯 말했었다.
"사램이 옷을 입는디. 옷고룸이나 단초가 없으면, 앞지락이 이렇게 벌어져 갖꼬 미친년이나 농판맹이로 요러고 안 댕기냐? 다 벗어지게. 그런 중도 모르고 헐레벌레 기양 댕기먼 어뜨케 되야? 꾀 벗제잉. 망신허고, 동지 섣달에 그러고 댕기먼 얼어 죽고, 그거이 먼 짓이겄냐. 옷고룸 짬매고, 단초 장구고, 앞지락 못
벌어지게 붙들어 걸어야제. 근디 그거이 쉽들 안헝 거이다. 니 인생 미친년 안되고, 꾀 안 벗을라먼, 요단초 한 개 수얼허게 보지 말어라. 이?"
한평생 동안 햇볕을 맞받고 다닌 시어미의 낯빛은 바짝 말라 물기 없이 검붉은 대추색이었다.
서운이네는 먼 길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