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며 자라는 아이들 / 박선애
2월 새 학기 준비 기간이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부르시더니 안내장을 한 장 내놓으셨다. 백범기념사업협회에서 하는 ‘『백범일지』 독서 감상문 쓰기 대회’ 참가 안내였다. 신청해서 선정되면 책을 보내 주고, 학교 자체적으로 감상문 쓰기 대회를 해서 우수 작품을 뽑아 주면 시상한다는 요지였다. 큰 부담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잘 쓴 학생 여덟 명에게 상장과 장학금을 준다. 우리 학교 학생들끼리 경쟁하는 것이라 누가 되든 우리 애들에게 제법 큰 혜택이 돌아간다니 솔깃했다. 그러나 그 책을 읽으며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기억 때문에 망설여졌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해 봤으면 하시는데, 우리 아이들의 수준에 맞지 않아 읽겠냐는 이유를 들어 부정적인 생각을 비췄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고등학교에 계시면서 이 대회를 하셨던 경험을 말씀하시면서 아이들의 반응이 좋았다고 나를 설득하셨다. 그래도 괜히 아이들에게 억지로 읽히려고 하다가 책 읽는 것을 더 싫어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감상문 쓰기 대회까지 해야 하는데 애들이 안 읽으면 효과도 없이 형식적으로 하게 될 것이고, 성과도 없이 일만 많아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교장 선생님의 경험과 착한 우리 아이들을 믿고 전교생이 하겠다고 신청했다. 얼마 후 우리 학교가 선정됐다는 연락이 오고, 학생 수만큼 책을 보내 주었다.
책은 신경림 시인이 쉽게 풀어 쓴 『청소년을 위한 백범일지』였다. 다행이다. 그래도 애들의 흥미를 끌어내는 것이 우선 해야 할 일이다. 먼저 눈길을 끄는 데는 영상이 좋을 것 같았다. 유튜브에 역사 강사가 한 ‘백범일지 설ㅇㅇ 강독 풀버전’이라는 30분짜리 영상이 있었다. 책 내용을 일화 중심으로 재밌게 소개하니 아이들이 흥미를 보였다. 1주일에 한 시간씩 하는 독서 시간에 다 같이 읽었다.
앞부분의 백범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재미있게 잘 읽었다. 위인이 자신들과 다를 것 없다는 동질감이 생겨 즐거워했다. 그런데 백범이 성장하며 배우고 활동하는 내용이 쭉 나열되니 지루해한다. 우리 반은 아침마다 꾸준히 읽으니 그런대로 잘했다. 그러나 2, 3학년 대부분은 독서 시간에 30분쯤 읽고 던져 놨다가 그다음 주에야 가져온다. 이미 읽은 부분의 내용도 생각이 안 나고 흐름이 끊기니 재미를 잃어 지루해한다. 꼭 해야 하냐, 다른 책 읽으면 안 되냐, 하며 불평하는 몇몇의 아이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같이 해 보자고 달래면 나를 봐주듯이 슬그머니 읽는다.
여름 방학 숙제도 이 책을 읽는 것으로 냈다. 요즘에는 방학 숙제가 거의 없어졌다. 도시의 학생들은 방학이면 과외를 받거나 학원에 다니며 자신의 계획에 맞춰 공부하느라 숙제를 오히려 방해물로 여긴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시간은 많아도, 과제로 수행 평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해 오지 않더라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아는지라 가볍게 넘긴다. 몇 명만 해올지라도 나는 방학마다 꿋꿋이 책 두세 권 읽어 오라는 숙제를 낸다. 우리 애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 듣는 데서는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전교생 모두 백범일지와 학년별로 각각 다른 책 한 권 해서 두 권씩 읽어 오라고 했다. 개학 후에는 확인하고 안 한 사람은 자신이 읽을 수 있는 기간을 스스로 정해서 마치도록 약속했다. 그것도 못 지킨 사람은 점심시간에 도서관으로 불러서 같이 읽었다.
2학기가 되면서 감상문 쓰기 대회를 잊지 않도록 자주 이야기하며, 이제 감상문 주제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더 읽으라고 강조했다. 감상문 쓰기 대회는 계획했던 대로 지난주 11월 11일에 했다. 대회 방법을 미리 안내해도 흘려듣다가, 막상 하면 질문이 많아 다시 설명해 줘야 하므로 시작할 때는 내가 있어야 한다. 그날 오전에 수업이 없는 반까지 국어 시간을 만들어서 시작해 오후에 있는 자율 활동 시간까지 이어서 써내야 한다. 그렇게 주어진 두 시간으로는 부족할 것이라 미리 생각해 오라고 했다. 몇 명은 주제를 무엇으로 할지, 어떤 순서로 글을 풀어갈지 고민한 흔적의 메모지를 내놓고 바로 시작한다. 정말 소수지만 초고를 써 와서 여유 있게 고쳐 옮겨 쓰는 아이도 있다. 써온 것은 없어도 머릿속으로 생각해 왔는지 술술 쓰는 아이, 연필을 돌리며 빈 종이만 바라보는 아이, 내용도 생각이 안 나는지 책만 뒤적거리는 아이 등 각양각색이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들 열심히 쓴다. 나중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서두른다.
심사는 다른 두 분 선생님께 부탁해서 나와 셋이서 했다. 아이들의 글이 걱정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윤호는 무슨 일이나 열심히 하는 성격대로 네 번을 읽고 미리 써 와 다듬어서 매끄럽고 좋은 글을 완성했다. 김구 선생의 사상을 배워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중학생답지 않은 수준 높은 글을 써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하준이는 김구 선생이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쳤던 것처럼 자신에게는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원희는 김구 선생이 아니라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조명했다.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는 아들을 면회하러 가서 아들이 경기 감사가 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했던 어머니의 남다른 면모가 충격적이었나 보다. 아들이 바른길을 가도록 지지하고 격려하면서 돕는 어머니이면서, 자신도 뛰어난 독립운동가로서 사신 곽낙원 여사에게서 받은 감명이 잘 나타나 있다. 아이들은 김구 선생의 행적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새롭게 깨닫고, 비판하는 내용 등으로 글을 썼다. 긴 글, 짧은 글, 잘 쓴 글, 엉터리 글, 내용과 수준은 천차만별이지만 글에 공통으로 흐르는 것은 책을 읽고 대부분 애국자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 수업을 시작하면서 행사하고 난 소감을 짧은 글(한 문단 쓰기)로 정리해 보게 했다. 지루하고 싫었다는 아이도 몇 명 있었지만, 이 활동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감상문을 쓰려고 다시 읽다 보니 처음과는 달리, 내용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보지 못한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고도 했다. 김구 선생과 『백범일지』가 있다는 것만 알았는데 책을 읽으며 김구 선생의 삶, 백범일지에 나온 여러 역사적인 사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찾으려고 한 고생 등을 알게 되었다고도 했다. 여기에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느낄 만한 내용이 많았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가능성을 품고 있다. 못 읽을 거라고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전교생 여든다섯 명에서 대여섯 명 빼고는 다 끝까지 읽어 냈다. 그중에 여덟 명은 세 번 이상을, 서른한 명은 두 번 이상 읽었다고 하니 놀랍다. 감상문을 쓰려고 하니, 그냥 읽기만 할 때와는 달리 더 자세히 보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기특한 말로 나를 기쁘게도 한다. 또 다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니 든든하다. 내년에 다른 학교에 가면 또 해 볼 생각이다. 미심쩍어하며 시작한 ‘『백범일지』 독서 감상문 쓰기 대회’로 아이들이 훌쩍 자란 것 같아 뿌듯하다.
첫댓글 우리 아파트 옆에 백범 기념관이 있어 몇 번 들렸습니다. 독서 감상문 쓰기 과정을 잘 설명했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나도 지루해하며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줄글 읽기를 싫어할 텐데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둬서 뿌듯하셨겠습니다.
박선생님 대단합니다. 중학생이 '백범일지' 두세 번 읽었다니 놀랍습니다.
어제 저녁에 아들이 김구 책을 가져와서 읽어줬는데 선생님의 좋은 글로 또 만나 반갑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저도 이 사업했습니다. 작년에요. 학교 독후감 대회가 9월에 예정되어 있어서 기말고사 끝나고 5명의 교사들이 4시간씩 같이 읽었답니다. 선생님처럼 더 오랜 시간을 잡고 읽혀야 했는데, 저는 조금 아쉬웠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썼으니 완벽한 마음의 양식이 되었네요.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가까이 하면 좋겠어요.
부끄럽네요. 중학생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데(그것도 '백범일지'로) 저는 한 편도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답니다.
선생님도 학생들도 모두 대단합니다.
하나를 끝까지 해봐야 다른 것도 완성해 낼 수 있는데. 이루어 내셨네요, 대단하십니다.
백범일지는 저도 읽다가 만 책입니다.
중학생이 그것도 그리 여러 번 읽었다니 선생님의 끈기와 노력에 놀랍니다.
저절로 되는 일은 없지요.
무르익어서 열매가 되는 데 들인 선생님의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아마도 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백범일지 읽은 것을 커다란 자랑으로 삼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