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치는 남자에게 / 정선례
정이었을까요, 사랑이었을까요? 학벌이 좋거나 부자는 아니었지만, 손이 따뜻하고 술을 마시지 않은 점이 좋아 다들 반대한 결혼을 했지요. 노할머니까지 모시는 대가족의 장남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암 투병 중인 어머니와 알코올중독 아버지, 동생 두 명은 아프고 그나마 건강한 막내는 초등학생. 한데 모아 놓기도 힘든 극악한 조건에 누군가 그러더군요. 연민이 생기면 못 헤어지니 빨리 그만두라고요. 그럼에도 그 시절의 저는 겁 없이 당신과 결혼을 결심했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무래도 정이 아닌 사랑이었나 봐요.
그간 부부에게 당연한 호칭인 ‘여보’, ‘당신’이 쑥스러워 장난으로도 불러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글로나마 불러봅니다. 글을 쓰며 창밖을 바라보니 정원에 6월의 수국이 연분홍, 보라, 흰 빛깔로 풍성하게 피었네요. 나무 박사로 불리는 당신이 꽃이 필 때 물을 흠뻑 줘서 탐스럽게 피었나 봐요. 이 꽃이 담 밑에 서른세 번 피는 동안 우리에게 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당신도 십여 년 전 그 일은 못 잊지요? 산자락 골짜기 외딴곳에서 양돈업을 할 때가 엊그제처럼 눈에 선해요. 새벽닭 울 때 일어나 일찌감치 가축들 챙기고 텃밭으로 달려가 찬거리를 가져와 뚝딱 아침상에 올렸지요. 농약 방에서 나눠준 챙 넓은 일 모자를 눌러쓰고 토시에 장갑을 끼고 밭으로 나갔어요. 고추밭 이랑에 불청객처럼 자라는 쇠비름과 바랭이 강아지풀을 뽑느라 새로 나온 세 발 호미로 풀뿌리를 내리찍어 무릎을 땅에 대고 고랑을 기어다니며 일했지요.
밭일을 마치니 마침 골바람이 불어왔어요. 땀을 식히면서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지요. 그때 개집 지붕 위로 무성한 넝쿨이 가뿐하게 타고 올라 마디마디 달린 호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돼지고기 두어 점 넣고 찌개를 끓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걸 상에 올리면 당신이 밥 한 그릇 뚝딱 비울 테니까요. 정화조 시멘트 뚜껑 위에 발을 내디뎌 손을 뻗는 순간 집채만 한 탱크 속으로 빠졌어요. 눈 깜작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는. 정말 칠흑이었습니다. 대낮이 틀림없는데 햇볕 한 줌이 들지 않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어요. 사방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정화조는 잿빛의 두꺼운 어둠이 가득 차 있었죠. 곧장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어요. 겨우 모가지만 내밀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요. 우습지만 키가 커 망정이지, 얼굴까지 잠겼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몰라요.
이 일이 있고 사고 예방 안전 수칙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던 거 기억나지요?. 며칠 동안 눈, 코, 입, 몸의 뚫린 구멍으로 들어갔던 까만 분뇨 찌꺼기가 계속 나왔고 씻어도 씻어도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어요. 이런 나를 태우고 바닷가로 나갔잖아요. 갯내 물씬 풍기는 바닷바람이 불어왔어요. 고개를 들고 가슴을 내밀어 두 팔을 뒤로 한껏 젖혀 바람을 맞이했어요. 음, 나도 모르게 깊은 신음을 내뱉었지요. 일순 내 몸에 배어있는 고약한 냄새를 훅 날려버릴 것 같은 느낌. 여자 치마폭처럼 펼쳐진 노을을 뒤로 하고 우리는 드라이브하듯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지요. 마치 연애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이 불그름히 물들었다는.
남남이 만나 살면서 어찌 좋은 시간만 있을까요. 힘든 걸 겪어야 하는 게 사람 사는 일이지요. 그때마다 당신은 내게 든든한 뒷배였어요. 벼랑 끝에 서 보고서야 뼈저리게 깨달았지요. 당신과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이 일을 당하고 옛날 초등학교에서 쓰던 커다란 종을 구해와 처마 끝에 매달았잖아요. 서로가 안 보이거나 급할 때면 그 종을 치자고요. 지금도 대롱대롱 매달려있네요. ‘종 치는 남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고 가끔 놀리듯이 부르면 까만 얼굴에 흰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당신 얼굴이 보기 좋답니다.
내 친구 ‘영이’ 알지요? 그 애가 당신을 소설 <<토지>>에 나오는 ‘용이’를 닮았다고 하네요. 천성이 올곧은 성품에 든든하고 뭉근한 사람이라는 뜻이겠지요. 그 말을 듣고 ‘토지’를 읽으니, 공감이 되더군요. 이제는 우리도 노년기에 접어들었어요, 은퇴를 생각해야 할 나이지요. 그럼에도 여전히 젊었을 때와 같은 양의 일을 하니 몸이 배겨나지를 못하는 거 아닌가, 걱정됩니다. 체격이 다부져서 일 무서운 줄 모르던 당신이 매일 밤 등이며 허리 팔 무릎에 파스로 도배를 해야 잠이 드니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는 제발 일 좀 줄이고 건강을 맨 앞에 두기를 바래요.
살림이 넉넉해 남부럽지 않게 살거나 기념일을 챙길 줄도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넬 줄 모르는 당신. 35년의 세월이 마냥 행복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처럼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하루 세 마디면 족하고 침묵이 익숙한 우리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애잔하고 마음은 겨울 군불 가득 넣은 아랫목처럼 따뜻하다는 것도요. 주변에서 부자라고 다들 부러워하고 있으니 말이죠. 손익계산서를 굳이 뽑아본다면 초반에는 손해였지만 끝엔 이익이니 우리 가정을 수년 동안 잘 경영한 당신 덕이에요. 없는 살림 이만큼 일구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요. 인적 드문 적막한 성배 골짜기에 밤식이가 목청껏 제 존재를 알리느라 분주하네요.
첫댓글 남편을 향한 정답고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연애편지. 너무 아름답습니다. 용이 닮은 남편이라니요. 너무 멋져요.
저도 서정적이고 군불 넣은 아랫목처럼 따뜻한 글을 쓰는 선생님의 팬입니다.
이 연서를 받을 분의 표정까지 그려지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코가 시큰합니다.
용이랑 사시는 군요. 하하.
한 편의 서사시 같습니다. '종 치는 남자'라 해서 부정적인 면을 떠 올렸는데
완전 반전입니다.
선생님글만 원문이 안 보이네요. 핸드폰도 마찬가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