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인생이 짐이 무겁거든 주님께 오라
12/26화(火) 마 11:28-30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 11:28).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서 저자는 현대인의 빠름이 선이고 느림은 게으름으로 정죄할 수 있지만, 저자는 오히려 느림이 미덕이라고 주장합니다. 느림은 삶을 훨씬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으며 모든 사물을 관찰할 때도 허상에서 벗어나 실체를 보게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감동을 아는가? 그리고 저녁마다 어둠을 맞아드리는 행복을 아는가? 연못에 어두운 물과 밤이 뒤섞일 때 그것을 느긋이 들여다보며 조금씩 늙어가는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본 적이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속도문화의 가장 큰 비극은 ‘안식의 상실’이란 현대병을 촉진 시킨다고 합니다. 작가의 철학적인 상상력과 혜안은 우리가 사는 현대의 병리적 원인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가장 편리하고 빠른 문화에 살면서 안식을 상실하여 삶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져 그것으로 인해 현대인은 질병(고혈압 심장마비, 위궤양, 당뇨, 불면증, 강박증, 알콜 중독, 게임 중독, 마약, 성도착증, 우울증, 심지어 자살)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공감이 됩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는 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려면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모두 주님께 나오라고 합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안식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여가나 휴식, 놀이, 술, 도박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이신 주님만 인간의 짐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실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의 실체는 육체적인 노동이나 일이 아닌 죄(罪)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롬 6:23).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려면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배우면 무거운 인생의 짐에서 벗어나 참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 주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마음이 급변하지 않는 평온을 찾아 안식하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목적과 용도에 맞도록 자리를 지키고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질 때 어려운 일도 주님이 역사하여 감당하게 되며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단은 사명을 잊게 하고 남의 자리를 넘보게 하며, 다른 사람과 삶을 비교하여 겸손의 자세를 깨트리게 합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려면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매야 합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마 11:29-30)
새끼소는 어미 소의 어깨에 매인 멍에로 그냥 함께 매여 있으면 됩니다. 함께 매여 있을 때 안식과 쉼이 있습니다. 인간은 주님과 연합되어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짐을 지려고 하니 신앙도 짐이 됩니다. 멍에는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편승할 때 그 멍에를 주님이 져 주시기에 우리에게 안식이 있습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 이 세상은 아무리 찬란해 보여도 광야입니다. 주님 안에만 생수의 강이 흐르고, 주님 안에서만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 평안과 참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And...
지난주에는 장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택하시고,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세밀한 계획을 세우시고 일하셨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지만, 마지막은 주님의 택하심으로 인생 자체가 아름답고 복된 삶이 되었습니다.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것을 깨닫게 하시고, 은혜이신 하나님을 보여주신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가끔은 계획을 세우지 않고 여행을 할 때 주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합니다. 시간을 정하지 않고, 흐름대로 사는 것이 우리 마음을 평온하게 합니다. 주님과 연합 안에서 날마다 주님 뜻대로 산다고 고백하지만, 어느 순간 내 틀에 갇혀 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나오라’라는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됩니다.
왜? 라는 사고(思考) 때문에 한동안 힘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마음인 ‘온유’가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늘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신앙 승리의 관건인 것 같습니다.
근래 들어 많은 사건 사고의 소식을 접하며 참으로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버스를 기다리다 갑자기 차가 돌진하여 생명을 잃는 것을 보며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시한부 인생이 축복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한부라는 그 자체만으로 이 생애를 아름답게 마무리할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얻어 하나님과 관계회복, 사람과의 관계회복, 자신의 흔적을 잘 마무리할 기회를 얻습니다.
더더욱 오늘 하루를 잘살자는 말씀이 가슴에 새겨집니다. 암으로 투병하던 한 집사님이 더욱더 생각납니다. 어려운 환경과 시모, 그리고 남편에 대한 원망이 참으로 컸습니다. 그런데 시한부라는 환경이 그녀를 하나님 가까이 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유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들은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가교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에 대한 원망이 사랑으로 변한 후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한때 미래를 꿈꾸며 현재에서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오늘 하루를 승리해야 나의 미래가 아름답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낼 때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날입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낼지에 대한 선택은 나에게 있습니다. 주어진 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낼지, 못마땅한 현실을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낼지, 그것은 내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선택에 의한 상급 심판이 기다릴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 다른 형태의 삶이 주어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 경쟁하는 것은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그릇입니다. 어떤 그릇은 접시, 어느 그릇은 국그릇, 어느 그릇은 간장 종지로 다 쓰임새는 다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릇이 깨끗이 비워졌을 때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릇에 다른 내용물이 들어있다면 쓸 수가 없습니다. 깨끗이 비워진 그릇은 그 내용물 전체가 주님으로 담깁니다. 크고 귀한 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편하고 자주 쓸 수 있는 그릇이 귀한 것입니다. 주님이 쓰기 편한 그릇이 되도록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안식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주님만 주실 수 있는 안식은 그 인생을 주님께 맡긴 사람에게 오는 평안입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나의 공로’가 아닌 ‘주님의 은혜’임에 더더욱 감사합니다. 아마 내가 이룬 선행으로 나를 심판한다면 나는 천국에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그 사실을 믿고, 주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사실 만으로 지옥을 면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나를 통해 사시는 일에만 승리할 수 있다면 천국에 상급이 클 것이라는 확신도 감사합니다. 인생의 짐이 무겁습니다. 주님께 그 짐을 내어드리고 안식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난이 유익이라
https://youtu.be/GKe6494REts?si=ifLT80u4ch62sHs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