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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이 있는 안동 천등산 봉정사 (天燈山 鳳停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
672년 신라 문무왕 12년 의상 제자인 능인 스님이 창건.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 방문시 1999년 4월 21일에 봉정사를 다녀가면서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다’라는 글귀를 남기며 봉정사에 스토리를 더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안동의 옛 이름은 고창(古昌)이었다. 후삼국 때 왕건과 견원은 서로 신라를 쟁탈하려고 그 외곽을 둘러싼 진주, 상주, 고창(안동)을 연결하는 전선에서 치열하게 대결을 벌였다. 그런데 이 팽팽한 대결이 왕건 쪽의 승리로 기울게 된 결정적인 전투가 930년에 벌어진 고창 전투였다. 당시 왕건은 앞서 공산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이 전사하는등 참패를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고창 북쪽으로 도망해 왔는데, 다행이도 이 지방 토호인 권행, 김선평, 장길 등의 도움으로 대승을 하였다. 이로써 왕건은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고, 후삼국 통일 후 ‘동쪽을 안정시켰다(安於大東, 안어대동)는 뜻으로 이 고장 이름을 안동이라 지어주고 3인의 호족에게 각각 태사 벼슬을 주었고, 그들이 곧 안동 권씨, 안동 장씨, 안동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들 세 분의 묘소를 안동 삼태사 묘라고 부른다.
봉정사의 최초 창건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의 창건이라는 기록과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능인(能仁) 대덕의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대체로 능인대덕의 창건으로 보고 있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大望山)이라 불리었다.
1971년 극락전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672년(문무왕 12)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또한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천등굴에서 수학하던 능인 대덕(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에서 종이 봉을 만들어 날렸다고도 전함)이 수도를 한 후 도력으로 종이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종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는 전설도 있다. 시기상 부석사보다 4년 먼저 창건되앞,뒤가 맞지 않는다.
창건 후 능인은 이 절에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전법(傳法)하였다 한다. 또 일설에는 능인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 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혔고, 청마(靑馬)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 굴은 천등굴, 대망산은 천등산(天燈山)으로 불리었다는 전설이 있다.
목조건물의 역사 또한 200년 이상 오래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는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등을 모두 불태워 봉정사의 역사에 대하여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지닌 곳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창건에 관한 사실도 전설에 상당한 부분을 의존하고 있고 그 이후의 역사적 사실도 몇 차례 중수한 것을 제외하면 알 수 있는 사실은 전무한 편이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志)』에, ‘부(府)의 서쪽 30 리에 천등산이 있다.’고 하였으며, 1566년(명종 21) 퇴계이황(李滉)이 시를 지어 절의 동쪽에 있는 낙수대(落水臺)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도 계속 존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조선시대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였고, 500여 결(結)의 논밭을 지녔으며, 당우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임을 알 수 있다.
봉정사의 주요 문화재로는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우화루(雨花樓)· 덕휘루, 무량해회(無量海會: 僧房), 만세루(萬歲樓)삼성각 21동의 건물이 있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총 높이 3.35m의 삼층석탑이 있고, 경판고(經板庫)에는 대장경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창건 후 6차례에 걸쳐 중수를 하였으며, 고려 태조와 공민왕도 이곳을 찾은 유명 사찰이다
봉정사 대웅전은 봉정사의 주불전으로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과정에서 사찰 창건 연대를 확인해주는 상량문, 1435년에 쓴 「법당중창기(法堂重創記)」 과 대웅전 내 목조 불단에서 고려말에 제작했다는 4종의 묵서가 발견되었다.
대웅전 지붕의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종보 보아지에서 발견된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 (중국연호인 선덕 10년, 을묘년, 1435년, 조선조 세종 17년에 쓴 글) 라고 적힌 상량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가 직접 썼고 자사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 (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이라는 사찰 건축연대를 밝혀주는 내용과 당시 봉정사의 사찰 규모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있어 대웅전 창건 연대가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 (지정 21년, 1361년, 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 시주하다. 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처음 확인되어 대웅전 불단이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새로 발견된 상량문에는 2층 누각 신축, 단청을 한 시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 사찰규모 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초 당시 봉정사는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결(1만여평)의 논밭에다 안거스님 100여명에 75칸의 대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자연석의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이다. 겹처마 팔작지붕에 다포양식을 한 이 건물은 원기둥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려 놓았으며, 주간이 넓고 오포작(五包作)이라서 포벽(包壁)이 넓게 보이는 반면 기둥은 짧게 보여 매우 안정감을 준다.공포의 짜임은 내외 모두 2출목으로 외부쪽으로는 쇠서형이며 내부쪽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짜여 그 수법이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예는 툇간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전면 3칸은 전부 개방하고 문비를 설치하였는데 궁판 받친 띠살무늬의 사분합문이다. 이 문짝은 앞의 쪽마루와 함께 후대의 구조물이다. 가구(架構)는 일고주구량가(一高柱九樑架)인데 천장이 우물천장이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네 귀의 추녀끝에는 활주를 받쳐 추녀마루를 지탱하고 있다.
대웅전 편액의 관지 내용은 '光緖八季壬午夏 改彩空蘤之中(광서팔계임오하 개채공화지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光緖'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 때의 연호인데, 서기 1875년부터 1908까지 사용하였다. 즉 1882년(임오년) 여름에 색을 다시 칠하였다는 뜻이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석탑과 석등 등 일체의 장식물이 없고 반듯한 축대와 반듯한 돌계단이라는 정면성이 강조되어 있다.
대웅전의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10대 제자 사천왕 등을 배치하였다.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는 강희(康熙) 52년(1713) 윤(潤) 5월 1일 제작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80cm, 세로 360cm이다.
후불탱화를 보수하기 위하여 불사를 할 때에 희귀한 벽화 형태의 후불탱화가 하나 더 발견 되었는데 이 탱화는 주불 뒷벽에 채색으로 그려진 가로 세로 약 417cm 크기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관무량수경을 설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의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 변상도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꽃비의 표현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고려 변상도의 상단부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구도, 벽화 테두리의 연화 당초문의 색상과 기법이 건물 내부 단청과 유사한 점, 벽화가 훼손되어 1712년에 새로이 후불탱화를 제작하여 봉안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대웅전 초창기 때 그려진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 초기 불화자료가 희귀하고, 조선 전기 이전의 후불벽화도 1476년에 그려진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도가 유일한 것임을 감안할 때, 이번에 발견된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화(보물 제1614호)는 우리나라 불화의 도상과 양식 연구 뿐 아니라 회화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대웅전 내부의 바닥은 널마루를 전면에 깔고, 고주(高柱)를 이용하여 후불벽(後佛壁)을 만들었고 고주 앞에는 불단을 짜서 불상을 모셨다. 불단 청판에는 연화문을 조각되어 있고, 불단 위에 연화좌를 놓고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다.불단 위쪽은 아름다운 소란반자를 설치하고 그 중심에 따로 보개형 닫집을 구성하여 장엄미를 추구하였다. 보개형 닫집의 천장에는 구름이 둥실 떠 있는 하늘에 두 마리의 황룡과 백룡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 하늘의 신비함과 권능을 표현하였다.
봉정사 극락전 몇 가지 특징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계승된 이른바 고식(古式)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이 안쪽으로 굽어 있는 점, 대들보 위에 산 모양에 가까운 복화반대공을 배열하고 있는 점, 첨차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1972년에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1625년(인조 3)의 상량문(上樑文)에는 1363년(공민왕 12)에 건물의 지붕을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서, 적어도 고려 중기인 12∼13세기에 세운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경상북도 의성 탑리의 오층석탑, 경주 불국사 청운교 돌난간의 기둥, 전라남도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 기둥 등은 봉정사 극락전의 가구형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교자료가 된다)
일주문 자연석 허튼층쌓기 한 기단 위에 둥근 기둥을 나란히 일직선상에 세우고 그 위에 공포를 짜서 결구하고 도리를 걸친 다음 서까래를 걸어 완성시켰다.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측면에 풍판을 설치한 구조이다. 공포의 구조는 다포양식을 사용하였으며 처마 밑에는 '天燈山鳳停寺'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편액은 은초 정명수(隱樵 鄭命壽, 1909∼1999) 선생의 글씨
일주문 지나 봉정사로 가는 산길 좌우로는 참나무류 중의 한 종류인 굴참나무들이 높이 솟아 하늘을 가린다. 숯 중에는 참나무 숯이 최고이고, 콘크리트 제품이 생산되기 전인 옛날에는 강하고 탄력이 있어야 하는 철도 침목에도 참나무를 썼다. 수많은 나무 중에서 진짜 나무란 뜻의 참나무라는 이름을 차지한 이유도 알 수 있다. 참고로 서울 종묘의 숲도 70퍼센트가 참나무류이다.
보호수 소나무 지정되어 있는 수령 180년
봉정사 만세루 경북 유형문화재 제325호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맞배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2층이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하였다. 아래층 가운데 칸에 출입문을 두었으며, 위층은 네모난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다. 조선 숙종 6년(1680)에 건립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된 만세루는 17세기 후반의 건실하면서도 당당한 건축수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만세루 부처의 법이 영원하다' 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로 이층 누각식 구조로 일층인 아랫부분은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츳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누하주는 누상주에서 사용한 것보다 더 굵은 부재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보이며 사찰의 중정(中庭)으로 오르는 통로의 구실을 한다
만세루에는 '덕휘루(德輝樓)'라는 편액이 하나 더 있어 언제 만세루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1680년에 건립된 만세루는 덕휘루라고도 부르는데, 누각 안에 걸려있는 ‘덕휘루(德輝樓)’ 현판은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되어있다. 테두리는 연꽃 문양 위주로 장식돼 있다. 왼쪽에 ‘계축중하(癸丑中夏)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낙관 글씨와 ‘인장이 새겨져 있다. 계축년(1913) 음력 5월에 쓴 글. 또 만세루 정면에 걸린 '天燈山鳳停寺' 라는 편액 김가진의 글씨.
덕휘루의 ‘덕휘’는 '덕이 빛난다'는 의미로, 나라가 태평하면 하늘에서 봉황이 내려온다는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 중국 전한시대 가의(賈誼:BC 200~168)가 지은, 굴원의 절개를 기린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봉황새는 천 길 높이로 날면서 덕이 빛나는 곳을 보고 내리고, 덕이 없고 험악한 조짐을 보일 때면 날개를 거듭 쳐서 멀리 날아가 버린다(鳳凰翔于千兮 覽德輝而下之 見細德之險微兮 遙增擊而去之)’ 바로 ‘덕휘’는 이 글귀의 ‘남덕휘이하지(覽德輝而下之)’ 중에서 따온 것이다.
누각 이름 덕휘의 의미는 유교적인 성격이 강한데. 대웅전 앞에 사대부가의 건물처럼 쪽마루 난간을 둔 것도 다른 사찰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부속암자인 영산암은 전체적으로 사대부가의 한옥 구조와 흡사하다. 극락전 건물도 현재의 건물과는 달리 복원 전 건물은 앞쪽에 툇마루가 있었다. 1680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하는 덕휘루는 현재 ‘만세루(萬歲樓)’로도 불린다. 누각 위의 ‘덕휘루’ 맞은편에 ‘만세루’ 현판도 걸려 있다. 덕휘루는 1913년 여름에 썼고, 같은 해 가을에 쓴 것으로 되어있는 만세루 현판은 석능(石能) 김두한(金斗漢)낙관 글씨. 석능은 이 현판과 함께 ‘화엄강당(華嚴講堂)’ ‘무량해회(無量海會)’ 편액도 쓴 것으로 되어있다.(자료 출처 : 영남일보–이야기가 있는 옛 현판을 찾아서 ‘안동 봉정사 덕휘루’)
만세루에서 누하진입의 의미
신성한 종교건축인 사찰의 백미는 누하진입이다.
임금이 직접 제례에 참석하는 종묘의 바닥은 넓은 판형의 울퉁불퉁한 판석으로 되어 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바닥이 평평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바닥을 불안정하게 해서 임금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면서 조심하라는 의미이다. 즉, 선왕들 앞에서는 임금도 낮은 자세로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하려는 계산된 설계인 것이다.
유럽의 성당들 역시 높은 건물과 빛의 처리를 통해, 신도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최대한 신성함을 이끌어내려는 건축구조를 취하고 있다. 인간 역시 동물이기 때문에 크고 높은 대상을 만났을 때 자신도 모르는 위압감을 느끼게 되고, 이것이 종교에서는 경외감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낮고 넓은 건축구조에서는 이를 확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서 사찰건축에서는 의도적으로 누하진입을 배치한다. 절을 찾는 사람은 누각 아래라는 폐쇄되고 음침한 공간을 통과하게 된다. 이럴 경우 인간은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때 누각아래의 계단공간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된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고개를 들게 되면, 멀리 대웅전의 열린 문을 통해 금빛 불상을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누각의 폐쇄성이 붓다를 통해서 해소된다는 느낌을 준다. 이를 통해서 붓다에 대한 경외감이 확보되는 것이다. 즉, 누각 아래라는 어두움과 대웅전 앞마당의 밝음, 그리고 멀리서 보이는 금빛 붓다가 상호 대비와 조화를 이루어 인간의 종교심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또한 누하진입을 통한 어두운 공간과 빛이 들어오는 사각형의 밝은 공간은 액자식 구조를 연출한다. 여기에 멀리 보이는 대웅전의 열린 창은 다시금 이중액자가 되는데, 바로 그 안의 조금 어두운 공간 안에 금빛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건축적으로 의도된 것이지만, 일반인들은 그 구조에서 오는 치밀함을 의식적으로 느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으로 건축의도에 따라오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시선이 자연스럽게 불상에 집중되게 된다. 또 그러한 상황에서 대웅전 쪽으로 다가가다 보면, 불상이 역으로 다가오는 듯한 착시현상에 빠지게 된다. 이는 내가 다가가는 동시에 붓다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 맞이해 주는 인상을 주게 되어 인간의 심성을 감화시킨다.
또 누각아래의 계단은 누각과의 높이가 낮고 상당히 가파르게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사찰에 따라서는 폭이 좁게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이럴 경우 머리가 누각에 닿는 것은 아니지만, 공간이 좁아지면서 자연히 허리를 숙이고 겸손을 저절로 보이게 된다. 이는 붓다를 뵈러 감에 있어서 낮은 자세를 취하라는 의도된 건축형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누하진입 구조는 산지라는 지형과 종교적인 특수성을 고려한 매우 치밀한 건축구조라고 할 수가 있다.
만세루는 예불이나 법회 등이 거행되는 건물로 대웅전과 마주한 남쪽에 위치해 있다. 별도의 불이문(해탈문)이 없는 사찰에서는 사찰에 들어가는 쪽에서 보면 불이문이 되는 누각이 대웅전 쪽에서 볼 때에는 만세루가 된다. 즉, 동일한 건물이 내외의 인식판단 차이에 따라서 불이문이 되기도 하고, 만세루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 ‘관계에 의한 규정’이라고 하며, 불교적으로는 ‘연기의 논리’라고 한다. 마치 동일인이 어떠한 관계 속에서 규정지어지느냐에 따라 자식인 동시에 남편이고, 아버지이면서 삼촌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주불전인 대웅전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대웅전과의 연결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지금이야 예불과 같은 불교의식에 신도들도 의례히 참석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과거에는 신도들뿐만 아니라 위계가 낮은 스님들도 참석하지 못했다. 위계가 낮은 스님들은 대웅전이 아닌 주변의 부속전각에서 의식에 참석했고, 신도들은 만세루에서 법당을 보며 동참했다.
봉정사의 진여문(眞如門). 편액은 고려 공민왕 글씨.무량해회 건물의 우측에 보이는 작은 문
'無量海會' 편액의 관지(款識)를 보면, '隆熙四年庚戌肇夏'와 '金斗漢印'이라고 적힌 낙관이 있다. 융희는 대한제국 순종 때의 연호로, 1907∼1910년까지 사용하였으므로 이 편액은 1910년(경술년) 음력 4월에 쓰여진 것이다.
요사채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집에 전면과 남쪽에 마루를 놓고 양쪽의 중앙에 칸벽을 설치하여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이다. 남쪽 면에는 축단 밖 단하로 튀어나온 열주(烈柱)로 받쳐진 누와 후면 내정 쪽에 쪽마루가 연결되어 통로는 3면에 이어졌다.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은 스님들이 교학을 공부하는 곳으로 온돌방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극락전과 대웅전이 17세기에 중수되었는데 스님들의 강학공간인 화엄강당도 함께 중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華嚴講堂' 편액의 관지를 보면, '庚戌瑞場書'와 '石能 金斗漢'낙관으로 만세루와 무량해회 화엄강단도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고금당(古金堂) 화엄강당과 함께 양쪽에서 극락전을 시립하듯 서 있는 건물로 이름의 뜻이 ‘옛 금당’이다. ‘금당’은 삼국시대에는 절의 가장 중요한 중심건물로, 불상을 봉안한 건물을 이르는 명칭이었다. 만약 이 건물의 전신이 금당이었다면 이 금당 자리에는 본래 극락전이나 대웅전이 들어서기 전인 봉정사 초창기에 수도하던 암자가 있었을 것이다. 암자가 있던 그 자리에 금당이 지어졌고 그 금당은 절의 구조와 중심이 대웅전으로 옮겨지면서 다시 ‘고금당’이란 이름으로 남았을 것이라 추측되는 것이다. 이 고금당은 요즈음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