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후주 이욱은 좋은 황제가 아니었지만, 예술가였다.
南唐后主李煜不是好皇帝,却是艺术家
남당후주 이욱은 강산과 미인을 잃었고, 이욱은 좋은 황제가 아니라 예술가지만 이욱은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
이욱, 초명은 종가(从), 자는 중광(钟光), 호는 종은(号). 남당(南唐)은 3주(三主), 이욱(李。)은 마지막 주자로 알려져 있다.그는 남당 중주 리의 여섯째 아들로, 적장자가 엄습한 봉건 전통에 따라, 그는 절대 황제가 될 가망이 없었으며, 또한 그 자신도 이런 공상을 하지 않았다.의 지향점은 풍류의 문인묵객이 되거나 경륜이 넘치는 고인은사가 되는 것이다.이욱통음률선사장정서화이욱의 그림은 깃털 묵죽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상큼한 멋이 있다.그는 부지런하고 학문이 풍부하여, 장서가 풍부하여 송태조가 강남을 평정할 때 금릉관각에서 십여만 권을 얻었으며, 교정도 정교하고 편찬도 잘 되어 있어, 이것은 5대 10개국의 황무리에서 매우 혼란하였다.
이욱은 18살에 아름답고 다채롭고 노래와 춤이 뛰어난 아황을 아내로 맞아 결혼 후, 하루 종일 아황과 함께 유유히 연회를 즐기며 밤을 지새우며 춤을 추었다.중, 성정을 방종하고 성색에 탐닉하며 그가 이 시기에 쓴 시 '완계사'를 읽다.홍금의 옷은 걸음마다 구겨지고, 가인은 금비녀를 타고 뺑소니를 친다.이욱은 봄의 상심, 가을의 눈물, 긴 밤의 환음 등을 하나하나 써내려가며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그의 작품은 온갖 풍류를 다 썼다기보다 훈훈함 속에서 일종의 정신적 위안을 찾고, 정치생활에서 심하게 뒤틀린 자신의 의식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욱의 급작스러운 등위, 국권 상실
이욱이 물처럼 부드러운 몽환에 취해 있을 때, 한 번 천둥소리를 내며 남당의 국토 위에 울린 힘센 후주 왕조가 갑자기 용병에게남당회수 이남, 장강 이북의 14개 주를 공략하였다.이씨에게 교태년호 사용을 중지하라고 명하고, 후주 정삭으로 개봉하여 현덕 5년이라고 하였다.이처럼 까다로운 굴욕조건에 대해서는 모두 순종하였으며, 서기 960년, 후주전 앞에서 조광윤이 진교역에 병변을 일으켜 후주정권을 탈취하고 북송, 이련을 급파하였다.정치적 폭풍이 몰아닥쳐 남당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재위와 맏형 홍기대위를 두고 있는 이욱은 눈앞의 나를 향해 나라 잃은 줄 몰랐다.
서기 959년에 태자 홍기가 그의 숙부, 진왕 이경수를 독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도 죽었고, 이욱의 다른 몇몇 형들도 모두 조졸하였다.이욱은 먼저 오왕으로 봉인되어 상서령으로 지정사가 동궁에 있었으나 서기 961년에 다시 태자로 세워졌고, 같은 해 이병이 사망하고 25세의 이욱경은 피신하였다.정치무대를 밀어올렸다.
이욱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호부 상서를 도쿄에 파견하여, '금기 이천냥, 은기 이만냥, 사라복채 삼만필'로 공물로 송나라에 보냈다.태조는 낮은 말로 남당이 북송납공에게 신하라고 불렀는데, 이 예가 열리자 북송의 온갖 협박과 변이 쇄도하여 온순하고 유약한 이욱이 북송을모든 치욕스러운 나라의 요구는 깨끗이 받아들여져야 한다.태각전당에 장식된 입맞춤을 뜯어내고 북송사신이 떠난 뒤 복원하라는 말도 했다.
이욱은 북송에 굴욕적인 후퇴를 일삼아 잠시 부귀영화를 누리며 구차하게 살며 안정을 취하려 했다.그는 여총에 빠진 것을 잊지 않고 연찬회를 읊었다.밀정유회("會) '얼굴이 환하게 웃고, 한없이 아름다운 정을 보다'.
이욱은 사납납납공을 파견하든, 부처의 가호를 구하든 남송을 멸하고 남당을 멸망시키겠다는 기존 방침을 조금도 흔들지 못했다.서기 974년 북송대군이 세 갈래로 나뉘어 남당을 침공하자, 나약하고 무능한 이욱은 한편으로는 김릉성과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며 "왕사가 토벌을 보면, 외롭게 친독사 졸이 된다.사직에 존치하라.조광윤은 서현을 초치하고 서현은 "이욱은 무죄, 폐하사는 무명, 욱은 사소한 일로 아버지의 일을 하는데 과실이 없다.조광윤은 "부자(父子子)를 양가(谓家)라고 하는데, 그런가"라고 냉랭하게 대답했다.서현은 할 말을 잃고 앙앙불락했다.조광윤은 "강남이 무슨 죄가 있건만, 천하의 한 집안이, 침상의 곁에서 어찌 다른 사람이 코를 골며 자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라고 호통을 쳤다.서현은 당황한 나머지 물러났다.
이욱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화해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고, 전쟁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비로소 마음을 열고 성을 수리하고, 전선을 교습하며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서기 975년, 북송대군병이 남쪽 경성 아래에 임하여, 이욱은 홍주절도를 파견하여 주령으로 하여금 15만 병마창을 이끌고 급히 맞서 싸우게 하였으나, 결국 장병들은 평소에 준비가 없었다.훈련이 부족해 북송 장병들에게 일소당했고, 주령도 전쟁터에 피투성이가 됐다.얼마 지나지 않아 금릉성파(金陵城破)로, 애초에 보물을 모아 스스로 분신(焚)하겠다고 맹세했던 이욱(李。)은 이때 문무백관을 이끌고 '육두출하(肉)'해 15년간의 제왕생활을 접고 당나라 39년을 떠났다.
울적하게 살다가,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서기 976년 정월, 이욱 등 일행이 도쿄로 압송되었고, 이욱은 백의사모가 명덕루 아래를 기다리자, 조광윤은 그의 부름으로 불응하고,모욕적인 직함인 "위명후"를 붙여 같은 해에 조광윤이 죽고 태종은 왕위를 계승하여 이욱을 陇서군공으로 개칭하였다.서기 977년에, 이욱은 자신의 가정에 부담이 크다고 스스로 말하여 수입이 지출되지 않자, 송태종은 그 월봉을 늘리고, 별도로 3백만 원을 주었다.객관적으로는 이욱을 괴롭히지 않았지만 태종은 신변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격과 존엄을 짓밟았다.한 번은 이욱을 숭문원(,文院)으로 불러들여 "문경은 강남에서 독서를 잘하는데, 이 간책은 다경의 고물이다.남의 장서를 빼앗고 독서 여부를 묻는 것은 간교한 조소요, 자존심에 대한 고의적인 상처다.'강남록'은 "이국주는 소주(小周) 직후 주(主)귀향해 정(郑)나라 부인을 봉(封)하고, 명부(。)를 따라 입궁했다."강남에 이화만 남고 왕에게 강절당했다"는 원인 풍해비 학사의 글도 있다.그 일은 풍문에 속하지만, 반드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영은 다시 한번 심한 상처와 부끄러움, 분노, 통분, 후회 등 온갖 감정에 휩싸여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임화는 봄의 붉은 꽃에 감사하고, 너무 바빠서, 어쩔 수 없이 겨울비에 저녁 바람, 연지눈물, 서로 취하여, 몇 시무렵, 자연히 물이 자라는 것이 한스럽다."이 한은 그렇게 깊고, 그렇게 강렬하여서, 그는 벗어날 수 없고, 끊을 수 없고, 이치는 아직 어지럽다.그러나 그의 마음은 때때로 매우 평온해 보여, 천상인생을 경험했다.그는 격변에 이어 가문은 조상이 열었고, 산하는 아름답고 다채로운데 자신은 어찌 고검극을 알겠는가.깊은 궁에서 태어나 부인의 손에서 자랐다는 성격의 나약함이 한 나라를 망칠 수 있을까.그는 자신의 무능에 죄책감을 느꼈고, 고국이 자기 손으로 전락하는 것에 불안을 느꼈으며, 그도 성이 무너질 때 일찍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때때로 그는 정말 옥쇄주침하고 피로써 혼미함과 나약함, 그리고 범속함을 씻어내고 싶어 한다.낙불사촉의 유선이 천년을 다 누리지 않았는가? 네, 타인은 살지만 영혼은 이미 죽고 콧김과 염치가 없으면 진짜 혼군입니다.이욱은 이 부류에 속하지 않고 부지런하고 문학적 재능을 지닌 인물로, 악부사장으로 마음의 불평을 털어내고 능욕과 파괴에 항거하며 비뚤어진 인생을 고친다.
"봄꽃과 가을 달이 언제인지, 옛일은 얼마인지.그대에게 묻는 것은 근심이 얼마나 많은가.이 곡은 '우미인'을 불렀고, 송태종은 용안대노, 전지하주, 이욱이 명대로 술을 마시고 그날 밤 중독에 빠져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괴로워하다 다음 날 새벽에 운전하였다.
이욱은 짧고 다사다난한 생애를 마쳤다., 소동파가 나란히 달렸다.
현재 하남개봉 서북성벽 옆에는 손이당장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남당후주 이욱이 포로로 잡혀 이곳에 구금되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