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좁은 방 / 나희덕
무언가 덜 익은 냄새와 물러터진 과육의 냄새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방에서 나는 냄새
다른 세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냄새
어제의 피로와 오늘의 불안이 공기 속에서 몸을 섞는 냄새
책상에 머리를 묻고 있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묵은 종이처럼 자신에게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스며 있다는 것을
길고 좁은 방 옆에는
똑같은 크기의 길고 좁은 방들이 있지만
옆방 사람과 마주친 적은 없다
기침 소리나 의자 끌리는 소리로 그 기척을 느낄 뿐
이 방에 머물렀다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페인트칠로 덮여버린 못자국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길고 좁은 방은
표정을 지우고 서서히 사라지기에 좋은 구조다
먼지가 쌓여가는 책들과
바닥 위에 조금씩 늘어나는 얼룩들,
단단한 바닥재는
늪의 수면처럼 어룽거리는 무늬를 지녔다
각자의 흔들림을 감수하며
사람들은 이 늪에서 굳이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흔들림에 쉽게 익숙해지면 안 된다
흰 벽 위에
대여섯 개의 못을 박으려 한다
그림을 걸고 달력을 걸고 수건을 걸고 얼굴을 걸고 마음을 걸고
뭐라도 걸어야 뿌리내릴 수 있다는 듯이
매일 메일로 전송되는 공문들,
그 출력물이 길고 좁은 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공기청정기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제가 빨아들이는 먼지와 냄새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이따금 깜박이며 위험신호를 보낸다
삶은 조금씩 얇아져가지만
그렇다고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이 방에서 익혀가야 할 것은
사라짐의 기술
문밖에서 누군가 이 길고 좁은 방을 노크하고 있다
[2109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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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좁은 방 / 나희덕
시냇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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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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