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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마의 백광현_조현명의 <백지사묘표>
고리아이 추천 0 조회 51 12.12.19 07:5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2. 조현명의 <백지사묘표>

성은 백씨, 이름은 광현, 자는 미숙이며, 임천 사람으로 근세에 신의자라 불렸다, 어릴 때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우림군*) 보충역으로 편입되었다가 말에서 떨어져 상처가 나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비로소 의술에 뜻을 두었다.

君姓白氏, 諱光玹, 字微叔, 林川人, 近世所稱神醫者也? 少時習騎射, 補羽林軍, 墜馬傷病久, 始有志爲醫?

 

*) 우림군 : 별자리이름. 서양의 물병자리에 있음. 병영 별자리를 뜻하는 누벽진壘壁陣(서양의 염소자리) 앞에 있음. 임금의 친위군 또는 일반 군대의 기마대에 대한 별칭으로 쓰임. 신당서병지 참조.

 

활터에 나갈 때마다 쉴 때면 주머니 속에서 침을 꺼내 갈았다. 사수 동무가 놀리면서, “사람을 죽이려고?”라고 하자, 백광현이, “너희들은 장차 나에게 살려달라고 청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每出射?, 暇則出囊中鍼磨之? 偶射者戱曰: “若欲殺人耶?” 君答曰: “若曺將求活於我耳?

 

부스럼을 앓는 이가 있다고 들으면, 언제나 몸소 가서 고쳤다. 이와 같이 오램이 쌓여 스스로 마음에 깨달음을 얻어 능히 형성되는 증세를 판단하여 죽어가는 생명의 병을 치료해, 그 효험은 정확했지만,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聞有病瘡瘍者, 輒自往治之? 如是積久, 自然有悟於心, 能審症於形聲之間, 所爲治病死生, 驗者如契, 然未甚知名?

 

저잣거리에 앉은뱅이 병자가 있었는데, 백광현을 따라 다니며 고쳐주기를 청하니 치료해 주었다. 하루는 그 절뚝거리던 자가 보통사람의 걸음으로 시장에 들어오니, 시장 사람 하나같이 크게 놀랐으며 이때부터 이름이 날로 알려졌다.

有市人病?者, 從君求治, 君治之? 一日, ?者平步入市, 一市人大驚, 於是名日起?

 

백헌 이 상국(이경석李景奭, 1595:선조281671:현종12)이 천거해 내의원에 들어갔는데 실로 현종조 계묘년(현종 4:1663)이다. 이때부터 현종과 숙종 두 임금 30여년을 섬기었다. 계속 신통한 효과를 내었고, 그때마다 벼슬이 더해져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白軒李相國薦入內醫院, 實顯廟癸卯也? 自是歷事顯肅兩朝三十餘年, 累奏神效, 輒加階, 至崇祿大夫知中樞府事?

 

중간에 강령 현감을 제수 받아 서울에서 멀리 떠났다. 포천 현감과 금천 현감을 거쳤는데, 모두 임금의 특별 명령을 받은 것으로 극진한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間除康翎縣監, 以去京遠, 換抱川, 換衿川, 而皆出特旨, 所以寵遇之者甚渥?

 

백광현이 병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임금께서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병세를 묻고, 약재와 귤을 내리셨으며, 내전에서도 진귀한 찬과 타락죽을 내리셨다. 부음을 듣고는 대전과 내전이 각각 부의를 후하게 내렸으니, 이 또한 특별한 예우였다.

君病將死, 上數使人問之, 間賜藥物黃柑, 內殿亦以珍饌駱粥賜之? 訃聞, 兩殿各致賻優厚, 亦異數也?

 

조현명의 <백지사묘표>_한국고전종합DB에서 얻음

 

백광현의 의술은 스승에서 전승받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마음을 이해하고 손으로 응용해서 신비하게 받은 것이다. 이따금 침으로 사람을 찔러 위를 완치시켰고, 갈고리는 회충을 빼내는 기묘한 것이었으니 그 신비한 방법과 오묘한 운용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君之術不由師承, 自能心解手應, 若有神授? 往往鍼刺人完膚, 鉤出?蛇奇?物, 其神機妙用, 有不可測者?

 

숙종이 배꼽의 부스럼이 아주 위중하여 환부 주위의 색깔이 검붉어지고 약해지자 모든 의원들이, “이미 곪았으니 침으로 터트리겠습니다.”고 했다. 백광현 만이 홀로 반대하면서, “이것은 고름이 아닙니다. 뜸으로 배꼽혈을 처방하면 사흘 뒤 반드시 누런 기운이 오른쪽 주변에 나타날 것이고 병은 스스로 그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배꼽혈은 백광현 자신이 생각하여 지은 이름이다. 임금께서 뜸을 명하니 사흘이 지난 뒤 과연 배꼽 오른쪽에 누런 기운이 둘러졌다.

肅廟患臍腫甚重, 四圍色紫黑柔軟, 諸醫皆曰: “已膿? 將鍼破之?君獨抗爭曰: “此非膿也? 灸對臍穴, 則三日後必有黃氣見於右邊, 而病自止矣?對臍穴君自以意創名者也? 上命灸之, 過三日, 果有黃氣繞臍右?

 

임금께서, “백광현은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 뒤, 이날로 약원의 직제를 명하니 주위에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백광현은 고마워하면서, “이것은 하늘이 한 것이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했다. 그 기묘한 효험은 이처럼 많았다.

上曰: “白光玹可謂神矣?卽日命罷藥院直, 或問其故? 君謝曰: “此天也, 非我也?其奇驗多類此?

 

식암 김 상국(김석주金錫胄, 1634:인조121684:숙종10)은 언제나 탄복하면서, “백군은 세인 속에 있지만, 오히려 공은 사직에 있다고 말함이 마땅하다고 칭찬하였다. 백광현은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며, 효성이 있고 우애가 있었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베푸는 일을 좋아하였으니, 그 이름 또한 한 시대에 무겁게 떨쳐서 의술로써만 스스로 높아진 것이 아니다.

息庵金相國每歎賞曰: “白君間世人, 雖謂之功存社稷, 可也?君忠信孝友, 輕財喜施, 聲名重一世, 而不以術自高?

 

문전성시를 이루어지는 사이에도 오직 병의 가볍고 중한 것을 보았지, 부귀로 선후로 하지 않았다. 아침에 관복을 입고 저자를 지나면, 비록 가난한 아이가 아픔을 알려 도와 달라 하면, 곧 반드시 그리하였으니, 말에서 내려 진료하여 싫어하고 힘든 기색은 추호도 없었으니, 그 덕성 또한 이와 같았다.

車馬日盈問, 惟視病輕重, 不以貴賤爲先後? 朝衣冠過市, 雖?人?兒, 以病告, 則必爲之, 下馬診視, 無絲毫厭苦色, 其德性亦如此?

 

! 편작이 그 의술로써 재앙을 드러내고, 창공이 마땅히 진흙의 형을 면제받은 이 모두를 취했으니, 백광현은 목숨과 부귀, 복덕과 봉록이 다했도다! 그 절제된 의술은 겸손하였고, 덕을 심는 일이 넓었다. 따라서 나는 특별히 여기에 적는다. “백세의 의원들은 이와 같이 부지런히 할 따름이다.”

嗚呼! 扁鵲以技見殃, 倉公當刑?免, 是皆有以取之, 而君能以壽貴福祿終焉者? 以其操術謙而樹德博也? 故余特書之: 以爲百世醫者之勸云爾?

 

증조부의 휘는 서용으로, 광흥창 주부로 판결사에 추증되었고, 조부의 휘는 인호로 좌윤으로 주층되었으며, 선친의 휘는 철명으로 첨추인데, 판윤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 창녕 조씨로 첨추 덕건의 딸이다. 백광현은 을축년(인조 3, 1625)에 태어나 정축년(숙종 23, 1697)에 돌아갔다. 아내는 청주 한씨, 아들 흥성도 또한 침술로 세상에 이름은 남겼다.

君曾祖諱瑞龍, 廣興主簿贈判?事; 祖諱仁豪, 贈左尹; 考諱哲明, 僉樞贈判尹? ?貞夫人昌寧曹氏, 僉樞德建之女? 君生於乙丑, 卒於丁丑? 配淸州韓氏? 子興聲亦以鍼術名世?

 

정내교의 <백태의전>에서 태의의약醫藥의 일을 맡은 벼슬인데영. , “왕조 시절 임금 내외와 궁궐 관원으로 복무하는 의원이라 풀 수 있겠습니다영. 갈벌(中國)의 경우 주의사醫師, 한 이후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태의령승太醫令丞, 태의서령太醫署令, 의관원醫官院, 금 이후 청 시기에는 태의원太醫院이었지영 송대 이후에는 일반에서 의생醫員의 높임말로 쓰였습니다영

한편, 이 땅 역사의 경우 고구려에는 시의侍醫’, 백제에는 의박사醫博士채약사採藥士, 신라의 경우 내공봉의사국의공봉복사 등이 있었습니다영. 발해의 경우 아쉽게도 전하지 않고, 신라는 삼국시기에 이어 국의공봉의사내공봉의사의관의박사 등이 있었네영. 고려에서는 태의감(원간섭기에는 전의사’)를 비롯하여 혜민국과 동서대비원, 그리고 제위보 따위를 베풀었지영. 조선에 들어와서는 서울에 내약방전의감혜민국동서활인원제생원중약색의학 등이 있었고, 지방에 의원의학교수원의학교유의학원의학승 등을 베풀었다고 하네영

조현명의 <백지사묘표>에서 지사는 백광현의 벼슬이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랐기에 그 줄인 표현인 듯합니다영. 사극에서는 白光炫으로 쓰고 있는데, 왕조 공식 문서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숙종실록보궐정오(위 숙종 21년 기사 참조)를 빼고, 승정원일기에서처럼 白光玹으로 쓰여 있네영. 아마도 마의는 정내교의 야사에 무게를 둔 듯하네영(정내교는 백광현이 '마의'에서 출신하였고, 조현명은 '군사'로 출신한 것으로 볼 때, 정내교의 전승을 따랐음을 알 수 있지영. 그리고 아마도 이 부분은 좀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백광현의 아들이 출연하게 될 경우 정내교는 '흥령', 조현명은 '흥성'이라고 하였으니까, 이 즈음에서 결정이 날 듯하네영). 그런데, 요즘 회자하는 역사적인 사실historic fact”에는 조현명의 <백지사묘표>에 점수를 더 주고 싶네영

그리고 그의 침술이 아주 이름났던지, 영조 즉위년(1724) 승정원일기에는 이제부터 약은 허임許任만 못하고 침술은 백광현白光玹만 못하다면 모두 선조 때 수교受敎대로 지방의 유의儒醫로 하여금 의약의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라.”는 임금의 비망기가 전하네영

끝으로 2012년 장웅진에 의해 마의 백광현(황금책방)이라는 소설이 나왔네영^_^))

 

 

MBC 월화사극 마의 홍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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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1.02 20:56

    첫댓글 잘 봤습니다.
    내용이 훌륭하고 흥미있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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