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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보여준 적이 없는 방식의 연기를 저마다 훌륭하게 해낸 배우들에 대한 찬사를 일일이 열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간조차 캐릭터처럼 담아내는 촬영을 비롯해 다양한 기술적 성과에 관해 감탄사를 연발해도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무력감이 배어 있는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그걸 매만지는 손길에는 전능감이 팽배한 연출력 앞에서 박수를 쳐가며 환호할 만도 하다. 그러나 이 소름 끼치는 걸작을 보고 난 관객은 스토리의 여백을 하나씩 거의 다 메워본 후 결국 골똘히 생각에 잠길 것이다. 이건 대관절 어떤 영화이고 이게 대체 무슨 얘기란 말인가.
‘곡성’(5월11일 개봉)은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과 사뭇 다른 작품으로 보인다. ‘추격자’와 ‘황해’는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빠르게 휘몰아치는 화법을 지닌 사실적인 영화였으니까. 하지만 이 세 영화는 그 뿌리를 공유한다. 시스템은 철저히 무기력하고, 인간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필사적으로 몸을 놀린다. 그리고 두려움은 늘 밖에서 온다. 나홍진이 바라보는 악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마성이 아니다. 그건 외부로부터 지금 이곳에 불쑥 끼워진, 삶의 이해할 수 없는 기본 조건이다.
하지만 불행 앞에 선 인간은 결사적으로 묻는다. 우리로 하여금 질문하게 만드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니까. “요렇게 소문이 파다하면 무슨 이유가 있는 거야”라는 대사가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인간이란 해답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독버섯이 일으킨 환각작용이라는 공식 설명에 납득할 수 없는 인간은 결국 소문을 통해서라도 기어코 웅성거린다. 종구는 남들로부터 네 차례 말을 전해 듣고 난 후에야 문제의 그 일본인과 직접 대면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소문을 통해 들은 게 없으면 종구는 그 일본인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 영화 속 표현을 빌어 이를 다시 말하면, 인간은 과학이든 종교든 소문이든 ‘현혹’의 틀이 없으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 거기에 인식의 비극성이 있다.
그리고 그런 틀의 안과 밖에서 인간은 못내 의심한다. 심지어 그 의심이 작동하는 방향도 종잡을 수 없다. 종구(곽도원)는 일본인(쿠니무라 준)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말이 사실인 것으로 의심(suspect)하고, 무명(천우희)에 대해서는 그녀의 말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의심(doubt)한다. 무속의 세계를 오컬트 장르에 접목시켰다고 볼 수 있는 이 영화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예수의 당대 상황을 악마로 뒤집어서 시각화해보고, 완전한 신성뿐만 아니라 (약한 육체를 지닌) 완전한 인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예수처럼 극중의 초자연적인 존재를 역설적이고도 이례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대담한 상상력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 그런 상상력을 눈덩이처럼 굴려간 끝에 의심이 도달한 지옥도를 그려낸다.
‘곡성’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이삼(김도윤)이 맞이한다. (이삼이 동굴 속에서 겪게 되는 일은 이 영화 속의 사실감 넘치는 다른 장면들과 달리 신화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왜 결정적인 순간에 일본인을 만나는 사람이 종구가 아니라 이삼인 것일까. 이전에 종구에겐 대답해주지 않던 일본인이 왜 이삼에겐 입을 여는 걸까. 만일 이삼이 아니라 종구가 그 동굴에 갔으면 일본인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다른 말을 했을까. 동굴에서 일어났던 일은 의미적으로 텅 비어 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보려는 것을 기어이 본다. 가톨릭 성직자인 이삼 역시 그랬다. (교차 편집된 종반부, 동굴 안에서 그는 ‘악마’로 불리고 동굴 밖에선 ‘귀신’으로 지칭된다.)
‘곡성’의 전편에 짙게 깔려 있는 것은 무지에 대한 탄식과 무력감이다. “뭣이 중한지도 모르면서 캐묻고 다니는” 종구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경찰은 뒷짐을 지고 종교는 팔짱을 낀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예수의 말씀을 신봉해야 할 가톨릭 신부는 종구에게 “직접 보지도 않고 어떻게 확신을 하십니까”라고 책망하면서 “의사를 믿고 맡기라”고 말한다.) 환자의 이상 증세 앞에서 서양의학은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고 한의학은 술 좀 그만 마시라고 한가롭게 타박한다. 종구 역시 이전에 건강원 남자가 산에서 봤던 것에 대해 증언할 때 술을 마셔서 그랬던 것 아니냐고 엉뚱하게 굴었다. 인간은 자신에게 무력하고 타인에게 무지하다.
종구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일본인의 편인 일광(황정민)은 낚시와 미끼에 빗대어 말한다. 그건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행복과 불행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행복과 불행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무명은 참극의 원인이 의심이라고 단정지어 말한다. 그건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행복과 불행이 우리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행복과 불행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러니까 일광은 모든 게 우연이라며 카오스(혼돈)를 말하는 셈이다. 무명은 모든 게 업보라며 코스모스(질서)를 말하는 셈이다.
마지막 숨을 들이쉬며 ‘곡성’은 카오스의 공포를 묘사하는 동시에 코스모스의 폭력을 암시한다. 가족이 죽어가는 실존적 위기 앞에서, 해답이 없다는 말뿐만 아니라 이것만이 해답이라며 위압적으로 제시된 말 역시 납득하기 어려울 때 인간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력하고 무지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의심밖에 없지 않을까. 종구는 끝내 의심한다. 그리곤 허울 뿐인 선택의 순간, 집으로 달려갔다가 참극을 목도한다.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렸다면 과연 아무 일도 없었을까. 종구는 필사적으로 되뇌인다. “괜찮아, 우리 효진이. 다 꿈이야. 아버지가 다 해결할게.”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지 않은가.
★★★★★
글쓴이 : 이동진 영화평론가
첫댓글 이글을보니 어렵고 복잡한 영화가 더욱 어렵고 복잡해지네ㅎㅎㅎ
에공 그러셨군요 ㅎ
근데 중요한건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력, 시나리오는 관객들을 2시간30분동안 쉼없이 끌고갈 큰힘이 있다는것, 못보신분들 꼭 시간내서 보길 추천합니다.
의심이 젤 무선거라는거~~
인트로에 인용된 성경 구절에도 '의심'이란 단어가 나오더라구요.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