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머니
최월성
사회활동 함께 하는 동료의 어머님상을 조문하였다.
상가에는 의례 곡소리가 들리고 조문객들은 슬픔에 젖은
상주를 위로함이 자연스런 이치이런데, 시간이 흘러 밤이
깊도록 곡소리는 들을수 없었다. 상주의 슬픈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일행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인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세드신 고인께서 고생하느니 가시길
잘했다는 이야기 끝에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고 상주도 역시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들 생각은 상주를
위로하기 보다 짐을 벗어 홀가분 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고인께서는 옛날분이신지라 어려서는 부모를 따르고
혼인해서는 지아비를 따르고 나이들어서는 자식을 따른다는
신념으로 사시던 분으로 알고 있다. 20년전 영감님을 먼저
떠나 보내고 아들의 뒷바라지를 낙으로 삼으시고 손자들을
돌봐가며 집안 살림을 거들어 오셨다. 얼마전 갑자기 앓아
누우시더니 치매까지 드셔서 아들며느리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고인의 노고가 그댁의 풍요로움을
제공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2·3개월 수발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지! 상주와 일행들 생각대로 치매까지 드신 고인은
떠나길 잘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식이 아무리 잘했다
한들 어머니가 자식에게 쏟은 사랑의 반이나 채울 수 있을까!
남들은 쉽게 말할 수 있더라도 상주의 마음은 찢어지게
아픈 것이 정한 이치이런데 상주도 남의 이야기 하듯 함이
웬지 석연치 않았다. 남의 속사정이야 내 알바 아니나 허리가
휘이도록 수고했던 고인의 처지가 안스럽게 여겨지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과연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어떻게 대했을까? 남편과 사별 후 젖먹이와 두식구 살기도
힘든 때였다. 병환중이던 어머니를 병원으로 모셔놓고
생업에도 매달려야 했지만 병원비 마련하느라 비싼
사채이자라도 얻기위해 동분서주 해야 했다. 남에게 돈빌리는
행위를 철저하게 반대 하셨던 어머니의 철칙이 내 인생의
좌표가 되었었다. 그러나 발등에 불떨어지면 뛴다더니
어머니 병원비 마련을 위해 온갖 노력 다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나 자식의 의무일뿐 애틋한 사랑으로 간호해 드리진
못했다. 끝내 알 수 없는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나는 장지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긴 했으나 그 눈물도 어머니에 대한
슬픔보다 내 설움의 눈물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마지막까지
나만 힘들게 하고 가셨다는 생각에 너무도 억울했다.
군인이셨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내 나이 일곱 살적 나를
잘 키워주겠다는 총각과 결혼하신 어머니는 내가 걸림돌이
되어 시댁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의부눈에 가시가 되어버린
나는 8~9세부터 노비처럼 일해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께선 너무나 포악하게 변하셔서 내가 어쩌다 잘못하는
날엔 심하게 때리고 내 몫의 밥도 남기지 않으셨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은 혹여 계모냐고 의심할 정도였다. 두분이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엔 괜시리 눈치가 보여 스스로 굶어야
했던 심정, 날이 갈수록 냉정했던 어머니 앞에 내색도 못하고
진눈깨비 내리는 날도 나무하러 나서던 어린 심정, 어떻게 다
표현 할수 있으랴!
그러던 어느날인가, 어머니께선 나를 데리고 고아원 문앞에
다가섰다. 그러나 한숨만 푹푹 내쉴뿐 나를 그곳에 두고 올
용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죽도록 일하더라도 배부른 밥 마음편히 먹을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해봤지만 어머니께선 차마 나를
맡기시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나도 혼자서 딸을 키우다 보니 그 옛날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내 딸,
남달리 강하게 키울수밖에 없기에 냉정하고 엄하게
대하면서도 가슴이 찢어질 듯 한데 내몫의 밥을 남기지
않았던 어머니의 심정과 심히 때려주시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몇 년 전부터 육아원 아이들을 만나러 다닌다. 어쩌면 내
처지와 비슷한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은 어머니라는
단어조차 사용한 적이 없고 고향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사실을
알았다. 그 옛날 고아원 문밖에서 그냥 돌아섰던 어머니, 그
순간이 너무도 다행스럽고 어머니께 감사하여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병환중에 계시던 어머니에게 좀더 애뜻한
사랑으로 병간해 드리지 못했음이 후회스러워진다. 이미 이
세상사람이 아닌 어머니, 나보다 더 많은 눈물을 어찌 다
감당하셨을까!
당신께
나의 아픔보다
더 괴로웠을 당신이여
후세에는
내가 좋아하는 꽃으로
환생하소서
깊은 산 오두막집일지라도
앞들에 피어나는
당신을 가꾸며
흐르는 시간과 세월도 잊은채
오로지
당신위해 이 한몸
바치리이다
1998
첫댓글 당신께
나의 아픔보다
더 괴로웠을 당신이여
후세에는
내가 좋아하는 꽃으로
환생하소서
깊은 산 오두막집일지라도
앞들에 피어나는
당신을 가꾸며
흐르는 시간과 세월도 잊은채
오로지
당신위해 이 한몸
바치리이다
당신께
나의 아픔보다
더 괴로웠을 당신이여
후세에는내가 좋아하는 꽃으로 환생하소서
깊은 산 오두막집일지라도
앞 뜰에 피어나는 당신을 가꾸며
흐르는 시간과 세월도 잊은 채 오로지
당신 위해 이 한 몸 바치리이다
당신께
나의 아픔보다
더 괴로웠을 당신이여
후세에는
내가 좋아하는 꽃으로
환생하소서
깊은 산 오두막집일지라도
앞들에 피어나는
당신을 가꾸며
흐르는 시간과 세월도 잊은채
오로지
당신위해 이 한몸
바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