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세가 십계명을 다시 받다
신 10:1-11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2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3 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6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러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7 또 거기를 떠나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를 떠나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으며
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9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10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
신 10:1-11 / [두번째 돌판과 계약궤] 그때 여호와께서 내게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똑같이 다듬어 가지고 산으로 올라와 내게 나오너라. 또 너는 나무로 상자를 하나 짜두어라. 2) 네가 깨뜨렸던 첫번째 돌판에 쓰여 있던 말씀을 내가 다시 그대로 새 돌판에 써줄 터이니 이번에는 새 돌판을 나무 상자에 잘 보관하여라.' 3) 그래서 나는 아카시아나무로 상자를 하나 짜두고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서 산으로 들고 올라갔습니다. 4) 그러자 여호와께서 첫번째 돌판에 쓰셨던 말씀과 똑같은 십계명을 새 돌판에 써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이 산기슭에 총회로 모였을 때에 이미 여호와께서 불꽃 속에서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5) 나는 곧장 산에서 내려와 내가 만들어 두었던 상자에 새 돌판 두 개를 넣어 두었습니다. 그 돌판 두 개는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그대로 오늘날까지 그 나무 상자에 있습니다. 6) [아론의 죽음] 이스라엘 백성이 브에롯 브네야아간 후손의 우물들에서 출발하여 모세라에 이르렀을 때에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의 뒤를 이어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였습니다. 7) 그들은 또 거기서 떠나 굿고다로 갔다가 굿고다에서 다시 물줄기가 많은 욧바다 땅으로 갔습니다. 8) 이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 가운데에서 구별하여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계약궤를 메고 다니며 제사장이 되어 항상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며 주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는 직분을 맡아 오늘날까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9) 그러므로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들처럼 자기들 몫으로 땅을 나누어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차지한 몫은 바로 여호와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에게 약속하신 대로 주께서 친히 그들을 먹여 살리십니다. 10)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시다] 내가 40일 동안 밤낮 산에 머물러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자 주께서 이번에도 내 호소를 들어주시고 여러분을 멸하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하셨습니다. 11) 여호와께서는 내게 `너는 어서 일어나 내려가 이스라엘 백성의 맨 앞에 서서 여행을 계속하여라.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그곳을 차지하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세우시고 사명을 잇게 하십니다.
순종하는 모세(1-5) 신명기 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범한 엄청난 죄를 범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섬긴 것입니다. 그 일로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의 두 돌판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철저한 회개기도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만들고, 나무궤 하나를 만들어 다시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1-2). 모세가 처음에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을 때는 하나님이 산에서 친히 준비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는데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로 주셨습니다. 하지만 범죄한 후 모세는 직접 돌판을 다듬어서 만들어야 했고,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들고 산에 올라야 했습니다. 범죄하였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힘쓰고 애써야 하지만, 수고가 뒤따라야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붙잡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명을 잇다(6-11)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렀을 때 죽습니다. 아론이 죽어 장사된 후 하나님은 아론의. 후계자로 엘르아살을 세우십니다. 민수기 20장 26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 그리고 엘르아살이 함께 산에 오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론이 입었던 옷을 벗겨 엘르아살에게 입혀 주십니다. 그 후 아론이 죽습니다. 출애굽한 후 40년 만입니다. 그 때 아론의 나이가 123세였습니다(민 33:39). 출애굽 1세대가 죽었지만 하나님은 2세대를 세우십니다. 제사장의 직임이 끊이지 않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레위 계통의 사람들을 구별하여 세우시고 제사장을 돕게 하십니다. 본문에서는 특히 레위 지파를 세운 이유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야 합니다(8).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주어진 분깃도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십니다(9).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다음 세대를 일으키시고 사명을 잇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적용: 하나님이 다음 세대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니 주 안에서 일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노력과 고민들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는 찬양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 오직 찬양의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드려진 제사로서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열납하시는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인으로서 드려지는 찬양의 제사를 지속해야 합니다. 찬양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신앙도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 설 교 >
항상 간직해야 할 것들
신 10:1-22./ 양인국 목사(서산교회)
1. 우리가 출애굽의 여정을 살피며 깨닫게 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한다면 시간이 더해갈수록 우리는 더욱 온전함으로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무지와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하기보다는 탐욕에 이끌려 삶으로 인하여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와 같은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로 하여금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혜들을 허락해 주셨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이 은혜들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기 원한다.
2. 우리가 허락된 환경이 어떠하든지 항상 인도의 말씀에 따라 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는 정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정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를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서 찾을 수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홍해 앞에서 큰 위기를 만났다. 이때 모세와 백성들이 위기에 대하여 보여준 반응은 각각 달랐다. 백성들은 출애굽한 것을 후회하며 모세를 원망했지만 오히려 모세는 약속의 땅을 향하기 위하여 홍해를 향해 앞으로 나갔다. 여기 백성들과 모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정도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 했기 때문에 위기를 만났을 때 출애굽한 것을 후회했고 모세는 하나님의 어떠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약속의 땅을 향했던 것이다.
우리는 동일한 예를 신약에서도 찾을 수 있다. 로마로 항해하던 배가 폭풍으로 인하여 침몰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 배에 탄 사람들 가운데 바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이처럼 바울은 동일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지만 오히려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27:25)” 바울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 역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유무와 정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과 그 지식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폭풍으로 인한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대로 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절망과 좌절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예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인도의 말씀에 따라 살도록 이끌어 준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 때 이처럼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인도의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는가? 본문이 이 물음에 대하여 주는 대답들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모든 능력의 원천이 되신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14절의 말씀이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기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 “땅과 그 위의 만물” 등과 같은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主)이심을 말해 주고 있다. 17절도 동일한 사실을 말해 준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은 모든 신(神) 가운데 신이시고 모든 주(主) 가운데 주이심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유(萬有)의 주시며 모든 능력의 원찬이 되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계시의 말씀은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하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
또한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복의 원천이 되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10:1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된 삶을 위하여 말씀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계시의 말씀들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복들은 제한이 없다고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되 동서남북 보이는 모든 곳을 다 주신다고 말씀하셨고(창13:14,15) 선지자 말라기를 통하여 복을 주실 것을 말씀하실 때에도 하늘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말3:10). 다윗은 이처럼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고백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1,12)”
22절은 하나님의 능하심과 복의 원천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 준다.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여기 “겨우 칠십 인”이라는 말은 매우적은 수를 상징하고 그리고 “하늘의 별”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많은 수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22절은 능하시며 복의 원천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해 주실 때 우리는 자신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넘치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능력의 원천이 되신다는 것과 복의 원천 되신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어 주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의 말씀이 임하면 언제 어디서나 또는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그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힘써 알 되 특별히 하나님께서 모든 능력의 원천이 되시고 모든 복의 원천이 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와 같은 지식을 가지고 언제나 믿음 안에 살 수 있도록 필요한 은혜의 수단들을 허락해 주셨다(10:1-11) 그것들은 십계명과 제사장과 레워인들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십계명(말씀)을 주셨다. 1-5절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시내산을 내려올 때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십계명을 던져버림으로 깨드린 첫 번째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다시 두 돌판에 처음 말씀과 동일한 말씀을 기록해 주셔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본문에서 모세가 처음 받은 십계명을 깨뜨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과 동일한 것을 만들어 주심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제나 십계명과 함께 하도록 하셨다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이유로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 있을 때(십계명을 깨뜨렸을 때), 그 말씀을 회복하기 전까지(다시 십계명을 만들 때까지) 약속의 땅을 향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이 항상 십계명을 가지고 그 말씀에 따라 살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가운데 자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마찬가지로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해질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 약속해 주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제나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은혜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제사장이다.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러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10:6)” 이 말씀은 대제사장 아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세워 아버지의 제사장직을 이어가도록 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처럼 제사장 직이 계속 자녀들에게 계승됨으로 이스라엘은 언제나 제사장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여기 제사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중재해 주는 자로서 중보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가운데 언제나 제사장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중재를 통하여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도 대속의 은혜로 인하여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즉 믿음의 사람들도 삶의 여정에서 연약함으로 인하여 낙심하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대속의 은혜는 그때마다 믿음의 사람들을 붙들어 일으켜 줌으로 믿음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까지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할 은혜들 가운데 하나는 대속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제나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은혜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레워인들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10:8)” 레위인들은 언약궤를 메는 자들이다. 여기 레워인들이 언약궤를 메는 자들이라는 것은 말씀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자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에게 영적 교사야말로 레위인들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는 말은 레위인들 역시 이스라엘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언제나 그들 가운데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말씀에 따라 살도록 안내해 주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영원히 함께 해야 할 세 가지 은혜들이 있었다. 하나는 십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중보자인 제사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레위인이었다. 만일 이스라엘 가운데 여기 언급한 셋 중의 하나라도 결(訣)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인도의 말씀과 대속의 은혜 그리고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 줌으로 말씀에 따라 살도록 이끌어 주는 영적 교사가 없다면 믿음의 삶을 계속하여 이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십계명과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있을 때 언제나 성전 예배가 가능했고 또한 성전예배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우고 확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해 갈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말씀과 대속의 은혜와 영적 교사가 있을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식은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다 더 깊이 신뢰하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고 이로 인하여 언제나 인도의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믿음의 사람들이 여기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도 그들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시간이 더해 갈수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보다 더 온전함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베풀어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셨사오니 이로 인하여 항상 이 은혜 안에 살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언제나 복된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여호와가 우리의 기업이다
신명기 10:8-9, 베드로전서 1:1-4 / 이성희 목사
여호와가 우리의 기업이다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상속하기 위하여 두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들들은 다 말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말을 달리기 경주하여 늦게 들어오는 말의 주인에게 상속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서로 늦게 들어오려고 경기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죽기 전에 경기를 끝낼 수 있을까요? 두 아들이 서로 말을 바꿔 타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서로 빨리 달려 자신의 말이 늦게 들어오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은 누구나 더 많은 상속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상속권은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상속권은 아들에게 주어지는 권리입니다. 상속권은 아들이라면 누구나 정당하게 주어지는 권리입니다. 그 중에서도 장자권은 대단한 권리입니다. 아들들이 다 상속권이 있지만 그 가운데도 장자는 다른 아들들과는 차별성을 가진 특별한 상속권을 가집니다.
잠언 19:14에는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고 합니다. 상속권이 아들에게 있음을 성경도 말씀합니다. 구약시대의 상속은 가정적 이치이며 아들의 권리이며 동시에 부모의 의무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상속을 주고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야곱이 약간의 차이로 동생이 된 것이 억울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자와 다른 아들과의 상속권은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발의 차이로 먼저 태어난 에서는 장자권이라는 큰 권리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에서의 치명적 실수가 무엇입니까? 장자권을 소홀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에서는 장자가 받을 이익을 동생인 야곱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야곱은 12아들이 있었습니다. 르우벤이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를 제치고 장자권을 차지하였습니다. 장자권을 가지고 있던 유다가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되었고, 다른 지파보다 인구도 제일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자손이 번성한 것이 가장 큰 축복의 하나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아들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그런데 차남인 에브라임은 장자인 므낫세의 장자권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두 손자에게 손을 얹어 기도할 때에 오른 손을 에브라임에게 얹었습니다. 오른 손은 축복과 능력의 상징인데 에브라임에게 장자권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받을 때에 벧엘과 실로가 있는 좋은 땅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여호수아 갈렙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12지파의 대표자들이 가나안을 정탐할 때에 크게 공헌하였던 인물입니다. 많은 지파의 대표자들이 있었지만 이 두 사람이 특별히 좋은 지혜를 가지고 가나안 입성을 도우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던 이유는 여호수아는 장자권을 가진 에브라임 지파였고, 갈렙도 장자권을 가진 유다지파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 지파가 복을 받은 것입니다.
아들이 아무리 많아도 장자는 아버지의 유산 가운데 전체의 절반을 상속 받았습니다. 이것이 장자권입니다. 장자권의 혜택은 다른 아들들이 가지고 있는 권리와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장자권이란 아들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고 성경은 장자권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라고 합니다. ‘분깃’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헬레크’인데 동산(動産)과 관련된 할당물을 의미합니다. ‘기업’이란 ‘나할라’인데 부동산(不動産)과 관련된 상속물을 뜻합니다. 영어성경에서 분깃이란 ‘몫’(part, portion)으로, 기업이란 ‘상속 재산’(inheritance)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레위지파는 돈으로 받는 유산이나, 토지로 받는 유산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탈무드에는 “부모가 나의 마음에 남겨 주었던 것을 나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물려받았으며 어떤 것을 물려주려고 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유산을 물려받고 좋은 유산을 물려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기업입니다.
신명기 10:8에는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고 합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특별히 성막 봉사의 직임에 선택된 지파입니다. 왜 레위지파에게 그 일을 맡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봅니다. 민수기 1:49-50에는 “레위지파 만은 계수하지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그들로 증거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고 합니다. 지파를 계수한다는 말은 전쟁에 나갈 사람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레위지파 사람들은 전쟁이나, 농사나 그 외의 세속 직업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세속 직업 대신 그들이 한 것은 언약궤를 메게 하였는데 특별히 레위지파 중에서도 고핫 자손이 한 일입니다. 언약궤를 메게 한 것은 언약궤에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하기 위하입니다. 성경에 보면 레위지파가 한 일은 첫째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게 하고, 둘째는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게 하고, 셋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레위지파의 세 가지 사역을 말할 때마다 ‘여호와’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위한 것이 레위지파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역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 중심의 사역입니다. 이것 하나만 알아도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의 자격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솔로몬은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하고”, 예레미야는 “이 성을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역은 모두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실 때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근대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위대한 찬송 작곡가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그의 작품 첫 머리에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즉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썼습니다. 모든 곡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여호와를 위한 작곡이 그의 기업이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우리의 일이어야 합니다.
신명기 10:12에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 삶의 우선법칙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섬김이 우선되지 않으면 어떤 일도 무가치합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 섬김보다 앞선다면 과감히 없애야 합니다.
‘청소부 밥’이라는 책에 보면 “얼마나 오래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죠. 내가 깨달은 지혜를 후대에게 물려주는 삶, 그것만이 진정 가치 있는 삶입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혜를 상속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 책에는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지침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지침은 지쳤을 때는 재충전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지침은 가족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지침은 투덜대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지침은 배운 것을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지침은 소비하지 말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지침은 삶의 지혜를 후대에게 물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여호와 섬김을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 세상 기업 대신 여호와가 기업입니다.
신명기 10:9에는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고 합니다.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 사람들과는 차별적인 기업을 받았습니다. 토지나 물질 대신에 다른 지파들로부터 48성읍들과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이 레위인의 거주지와 생활필수품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섬긴 대가를 이렇게 받은 것입니다.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는 말은 비록 할당된 물질의 기업은 없으나 여호와를 섬기는 봉사의 직임에 충실할 때,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의 모든 생계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대가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충실하고, 하나님 제일로 살면 세상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어릴 때 제가 밖에 있다가 들어가면 두 아이가 저에게만 매달렸습니다. 한 번은 두 아이가 다 제게 매달릴 때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참 안 됐다.” “왜요?” “아이들이 다 내편이니까.” “괜찮아요. 당신이 내편인데 뭐.” 믿음이 참 좋데요. 그런데 요즘에 보니 애들이 다 엄마 편인 것 같아요. 하나님이 내 편이시면 세상의 모든 것 다 내 편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편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기업이 되시면 세상의 모든 물질적 기업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역대상 29:11에는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만 소유하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됩니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면 자식을 망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재산의 85%를 자선재단에 기부하였습니다. 그의 전 재산 440억 달러 중 약 370억 달러를 기부한 것입니다. 한화로 환산하면 약 40조원을 기부하였습니다. 자식에게 물려 줄 것이 따로 있습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돈이 아니라 믿음,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4에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간직한 하늘의 것, 없어지지 않는 것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없어지지 않고 가장 든든한 유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유산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이민교회를 목회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 이민교회를 목회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이민목회자들 가운데는 목회와 일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을 하면 살림살이가 좀 나아질지 모르지만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생활을 책임져야 하고 목회자가 목회에 전념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8년을 살았지만 저의 아내가 일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려웠지만 목회자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내도 목회 협조자가 아니라 목회자로 함께 교회를 섬기고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미국에 있는 8년 동안 한국에 한 번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984년에는 선친께서 목사 안수 받으신지 40년이 되어 모든 재산을 교회에 다 바치셨습니다. 선친께서 쓰신 성경주석이 많이 팔려서 돈을 좀 버셨는데 그 돈이 다 목회자들의 돈이고 신학생들의 돈이라고 하시면서 교회에 환원하는 것이 옳다고 바치셔서 그 돈을 기본으로 하여 대구제일교회 원로원을 건립하셨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돈이 없어 고생했고, 유산도 없지만 저의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제게 가장 귀한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셨고, 세상의 물질 대신 하나님을 저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것보다 믿음의 유산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은혜이고 감사의 조건입니다. 세상의 분깃도, 기업도 없지만 여호와가 저의 기업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기업입니다. 최고의 유산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안 바꿉니다.
찬송으로 우리는 고백합니다. “세상에 헛된 우상 버리고 인간의 모든 부귀영화와 거짓과 불의 모두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세”. 여러분은 어떤 유산 받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유산을 물려주시렵니까? 돈이나 땅입니까? 우리 모두가 레위인 다운 유산을 받읍시다. 레위인 다운 유산을 물려줍시다.
매주 로또 당첨자가 몇 명인지 당첨금이 얼마나 되는지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보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부러워합니까? 전도서 3:22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전 성경에는 “이것이 그의 분복이라”고 합니다.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세상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즐거워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결 론
어떤 젊은이가 의사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때문에 제가 얼마나 큰 혜택을 받았는지 설명 드리려고 찾아 왔어요”. “죄송하지만 당신은 내 환자가 아닌데요”. “알아요. 저의 삼촌의 주치의였지요. 제가 바로 삼촌의 상속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재물을 상속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재물을 상속하고 나면 자녀들 사이에 갈등요인이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상속은 모든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2:9에는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분깃은 여호와이고, 기업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성경에는 하나님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야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분깃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기업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분깃이며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성도는 신령한 의미의 레위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는 돈이나 땅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유산으로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가장 부요한 상속자로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깨어진 언약의 회복
신명기 10:1-11 / 목회 아카이브
언젠가 어느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더 많은 유혹을 받았고, 더 많은 시험에 넘어졌다는 의미라고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경험한 후 약 4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스라엘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였지만, 출애굽 이후부터 지금까지 지난 40년의 역사는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실패의 역사 출애굽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 모세는 신명기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그런데 신명기의 처음, 곧 1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고생을 해야 했던 이유를 알려줍니다. 곧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사건입니다. 출애굽 이후 약 1년여의 시간이 흘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라는 지역에 도착했지요.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명씩을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보냈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자 정탐꾼들이 돌아왔고 그들 대부분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는 백성들의 마음에 절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불과 1년 전,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40년 동안 보류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신명기의 말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큰 범죄를 저질렀던 또 하나의 사건을 회고합니다.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셨던 사건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이유가 있으셨지요.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들을 위해 두 가지 선물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첫 번째 선물은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약속, 곧 언약을 채결하려는 계획이셨지요. 그리고 두 번째 선물은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더욱 깊이 만나며 교제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내산 정상에서 모세에게 성막의 설계도를 전해주시는 바로 그때, 시내산 아래에서 백성들은 금으로 송아지의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며 거기에 제사하였습니다.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이 이제 마쳐갑니다. 바로 그때, 모세는 신명기의 말씀을 전하며 지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악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여, 결국 하나님을 배반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성막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시는 바로 그때, 금으로 송아지의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 제사하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요. 구약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미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분명 출애굽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언제나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을까요? 출애굽을 경험하였지만,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 채, 유혹과 시험에 걸려 넘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아닐까요? 다시 작성하는 두 돌판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과의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1-5절) 여러분, 똑 같은 문서를 두 번 작성하는 것이 얼마나 번거로운 지 아십니까?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동일한 글씨를 두 번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미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이 적힌 돌 판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금으로 송아지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 제사하자, 모세가 돌 판을 깨트렸습니다. 돌판이 깨어진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파기되었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약을 어기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의 언약을 파기하셔도,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이라 항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돌판을 만들어서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돌판에 십계명을 ‘다시’ 적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돌 판을 다시 가져오라고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난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하셨나요? 괜찮아요. 우리의 마음 판을 그대로 하나님께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판에 언약의 말씀을 다시 적어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저는 우리가 이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깨어진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시옵소서. 이미 깨어진 마음이지만,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오니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새겨 주시옵소서. 저는 동일한 기도의 제목으로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가정이 깨어지고, 우리 교회의 성도들 마음이 깨어졌다면, 그 깨어진 마음을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리오니,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회복의 일꾼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두 번째 메시지는 깨어진 언약이 회복되기 위해 쓰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8절)레위 지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의 설계를 말씀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 아래에서 금 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에 제사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이 파기될 위기에 놓였지요. 바로 그때, 모세가 온 백성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그러자 레위 지파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 사람들은 모세의 말에 따라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에 제사한 자기 민족 약 3,000명을 죽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트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 지파 사람들이 앞장을 선 뒤에, 이제는 모세가 나섭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10장 10절과 11절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으로 송아지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 위기의 상황에서 다시 시내산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40일 동안 밤낮으로 자기 민족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의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레위 지파가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것이요, 둘째는, 모세가 간절히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시간 우리가 레위 지파가 되기를 바라고, 우리가 모세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하시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때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의 가장이 되십니다. 우리 가정을 주님의 가정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때 우리 가정 가운데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시지 않은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간 동안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한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 시간 함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삶이든, 우리의 가정이든, 혹은 우리의 교회이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언약의 관계를 다시금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 밤낮 쉬지 않고 기도하는 모세를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모세의 자리, 레위 지파의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신 10:1-11
오늘 말씀은 신명기 10장:1절-1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누군가에게 질책을 받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굉장히 무겁게 하는 일이죠. 자녀가 부모에게 질책을 받거나, 직장에서 실수로 인해서 상사에게 질책을 받거나 하는 일들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질책을 받는다면 그 마음의 짐은 이루 말할 수 없겠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그들을 모두 멸하시겠다고 하실 만큼 노하였습니다. 또한 모세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악함을 지적하였습니다.
9장의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해서 죽음의 고통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큰 슬픔에 빠져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책은 멸망을 위한 질책이 아니라 죄에서의 돌아섬과 회복을 위한 질책인 것이죠.
이제 10장에 이르게 되면, 9장에서의 이스라엘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크게 3가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5절은 모세가 처음에 깨뜨린 돌 판을 대신하여 다른 돌판에 십계명을 기록하여 언약궤어 넣어 보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고요. 6-9절은 아론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인 엘르아살이 대제사장 직을 계승하고, 레위 지파가 언약궤를 섬기는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10-11절은 이스라엘의 악행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계속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내용이죠.
오늘 본문에서 두 돌판을 새로 만들어 언약궤에 보관하게 하시는 장면과 아론의 죽음 그리고 레위 지파의 섬김은 모두 동일한 주제를 보여 주기 위해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죄악을 청산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용은 9장의 금송아지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음으로 인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다고 핑계를 대었죠. 모세가 산에서 어떠한 일을 당하였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움에 금송아지를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고, 생사를 알 수 없고, 행방도 알 수 없다고 불안해 하는 이스라엘에게 눈에 보이는 돌 판을 주심으로 확실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을 보여주신 것이죠.
언약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장소가 바로 언약궤이죠.
모세의 부재로 인해 두려워하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아론의 죽음과 레위 지파의 봉사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섬김이 새롭게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론은 금송아지 사건이 있은 후 오랜 뒤에 죽게 됩니다. 금송아지 사건은 출애굽 초반부에 있었던 일인데 반해, 아론은 광야 40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죽게 됩니다.
아론의 죽음은 금송아지 사건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론은 금송아지 사건의 주범이었으며, 스스로 우상을 만들었죠. 그런 아론이 죽음으로 인해서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한 징계가 일단락되는 것이죠.
그리고 레위 지파가 언약궤를 섬기는 직분을 맞게 됨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형태가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죠.
결국 아론의 죽음과 레위 지파의 섬김은 금송아지를 섬겼던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예배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악을 참으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으로 이스라엘에게 회복이 허락되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모세는 9장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단오하게 지적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죄악을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회복케 하시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요단강 앞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과 은혜로 그들을 인도하셨는지를 바라보고 깨달아 알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보여주신 사랑과 부활의 능력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며 은혜인 것이죠.
때로 우리가 우리의 죄악으로 낙심 될 때, 또는 세상에서의 자그마한 성공으로 교만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항상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합니다.
죄악에서도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며 회복케 하시고, 새로운 관계를 다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은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의 능력을 보게 하는 것이죠.
바라기는 오늘도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순간순간에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죄악에서 회복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오늘도 기쁨과 감사로 하루를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10:1-11
◑ 오늘의 말씀 묵상 ◑
※ Hallelujah!!
- 오늘은 벌써 새해 들어 둘째 주말 아침입니다. 다소 따뜻하게 출발하지만, 미세 먼지가 많은 만큼 호흡기 관리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 죄악으로 절망 가운데 있었던 죄인을 구원하신 은혜 주심에 감사와 감격이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 해 보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은 성도 된 우리를 더욱 귀히 여기시며 능하신 손으로 붙드시고 항상 보호하시는 은혜를 삶 가운데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내는 주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본 문 ◑
◗◗ 십계명이 기록 된 새돌판과 하나님의 권면
◑◑◑본문 이해와 요약 ◑◑◑
◗ 모세는 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할 뻔한 역사를 서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본문 10장에서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셨던 계속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잊지 말고 기억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 언약의 증거인 첫 번째 십계명 돌판은 백성의 금송아지 숭배로 말미암아 깨어져 버렸습니다.
- 본문은 모세가 첫 번 돌판을 던져 깨트린 것은 거룩한 분노이며, 이 분노를 하나님도 눈감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것입니다.
- 하나님께로부터 두 번째 돌판을 받는 것은 사랑이요, 긍휼 가운데 받은 것이며, 이스라엘 신정 왕국의 제사 제도를 정비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킬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늘날의 우리 성도에게 동일하게 이웃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 모세는 지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들도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생활을 하라고 합니다.
- 이 이웃 사랑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과거에 겪었던 애굽에서의 고달픈 생활을 상기하라는 말씀과 함께 주어져서 더욱 실제적인 교훈이 되었습니다.
- 언제나 이 이웃 사랑의 교훈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명령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아울러 모세는 애굽에 내려갔던 이스라엘의 선조는 겨우 70명이었으나 이 제 400여 년 만에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오직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릴 것을 요구합니다.
- 이러한 주제는 오늘날도 동일하게 유효한 메시지가 되는 것이므로 우리 성도들도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련하여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광란은 친 것은 하나님의 첫 번 언약을 받을 자격이 없기에 파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 그래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하여 사랑하시므로 그들은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겸손으로 순종하고 섬겨야 할 것을 모세가 권면합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은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뇌물을 원치 않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 또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은 크게 공의와 사랑으로 표현되어지므로 이 중에서 한 가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성경적인 균형을 잃는 잘못된 신관을 가지게 됩니다.
- 아울러 이웃을 사랑하실 것도 요구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큰 은혜로 구원받고 날마다 그분의 은총으로 생활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분께만 찬송을 돌릴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 적용한다면 ◖◖◖
◈ 오늘의 핵심 (P.S)
◗◗ 말씀에 순종이 능력이며 행복이다. (신명기10장1-3절)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할 일을 친히 지시 하시며, 성도는 변함없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
- 1-3절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처음에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두 돌 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올 것과 싯딤 나무로 궤를 만들도록 지시하셨습니다.
- 모세는 두 돌 판을 다시 만드는 것이나 언약궤 만드는 것을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행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의존하여 시행하였습니다.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처음 돌 판과 같은 두 돌 판을 다시 다듬어 만들게 하신 목적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처음 판에 쓴 말씀을 다시 기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 한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듯이 그분의 입에서 내신 말씀 또한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 이 세상 행적은 지나가고 사람이 만든 것들은 얼마든지 바뀌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들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 또한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받는 즉시 순종하여 싯딤 나무로 궤를 만들고 두 돌 판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으로 올라간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이 모세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 때에 지체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 이러한 모세의 태도가 바로 성도가 하나님께 대해 취해야 할 합당한 자세와 태도입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일을 모세에게 지시하여 주셨고 모세는 그 지시에 순종하여 행하였습니다.
-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인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친히 지시하여 주실 때에 우리는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복이요, 미덕입니다.
- 우리가 성도로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면 무슨 일이든 그분이 알려 주시고 지시하시는 바를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 그렇다면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 말씀을 보고 듣고 있지만, 여전히 현실에 따라 내 생각에 행동하고 말씀 따로 삶 따로 판단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 무엇이든지 자기 임의로 하려는 신앙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하고 아무런 칭찬도 듣지 못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신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 기도하면서 마태복음26장39절에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한 것처럼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올바른 삶의 태도입니다.
- 그런데 성도들 중의 상당수가 신앙의 경주에서 실패하고 낙오자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 바울은 자신이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달리 말씀하시면 그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 특별히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던 선교여행 계획을 바꾸어 마게도냐로 간 것도 그 한 예가 됩니다.
- 사도행전16장 6-10절에서 그는 비두니아 선교를 위해 나름대로 준비했을 텐데 하나님의 계획은 마게도냐로 그를 보내시는 것이었으므로 바울은 이를 깨닫게 된 순간 가지가 노력하고 애써 준비했던 모든 것을 즉시 포기했던 것입니다.
-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모두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봉사와 나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삶은 나의 기준과 판단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 아모스3장 7절에서 “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명하심을 좇고 그분의 뜻에 복종해야 하며, 설사 그분의 계획이 비합리적으로 보이고 나에게 생소하게 느껴진다 해도 이의를 제기한다든지 회의적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됩니다.
- 시편32편 8절에서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 누가 하나님의 지혜나 지식을 능가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 앞에서 미련하고 우둔한 자일뿐입니다.
- 제한 된 지혜로 전능자를 판단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든지 온전히 따르는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 특별히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말씀으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요한복음16장 13절에서“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은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데 그 행복은 주의 말씀인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할 때에 누리게 되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내가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과 뜻과 지시하심에 순종으로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나의 자아를 비우는 삶이 되도록 쳐서 복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열심을 품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신명기 강해 29
신 10:1-11 / 푸른교회
두 번째 십계명 돌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처음 돌판은 모세가 화가 나서 백성들을 향해 던져서 깨졌습니다. 40일간 밤낮 단식하며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께 받은 첫 번째 십계명은 그렇게 깨져버렸습니다.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는 모습을 보고 모세가 의분이 일어 그렇게 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모세를 산꼭대기로 부르십니다. 처음처럼 돌판 두 개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돌판을 만든 것은 모세가 만들었습니다. 십계명을 적은 것은 하나님 작품입니다. 이번에는 돌판 두 개 외에 나무궤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는데, 아카시아나무입니다. 그 궤가 결국 언약궤, 법궤가 됩니다. 이것이 언약궤의 기원입니다.
하나님이 만들라고 명령하신 언약궤 안에는 이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십계명 두 돌 판입니다.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입니다. 각 지파 대표를 소집해 지팡이를 던지라고 했는데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납니다. 아론이 속한 레위지파가 제사장직을 수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만나 항아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백성의 일용할 양식을 친히 챙긴다는 사실입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이야기는 민수기 17장에 나옵니다. 아론은 레위지파입니다. 아론이 장자였기에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레위지파 중에 장자만 제사장이 됩니다. 레위지파의 장자 이외의 사람은 성전 안에서 성직을 감당했습니다. 레위인들이 성가대도 했습니다. 성전을 관리하였습니다. 성전에 필요한 모든 노동력을 레위인이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에게는 분깃이 없습니다. 9절입니다.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그래서 가나안 땅을 레위족속에게는 분배하지 않았습니다. 레위인은 백성들의 십일조로 살았습니다. 성경 전통에 따르면 성직자들은 세속 직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십일조와 헌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대신 전적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성직자들은 세속 직업을 갖지 않습니다. 교회 일에만 전념합니다. 언약궤 관리 같은 것도 하나님이 직접 레위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신명기에는 안 나옵니다만,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40일간 주야로 단식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40일 단식 후에 하나님이 기록해 주신 돌판을 들고산 아래로 내려왔는데, 모세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얼굴에서 광채가 나니 두려워 범접을 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입니다.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과 40주야를 함께 한 나머지 하나님의 영광의 잔영이 모세 얼굴에 남아있었던 겁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광채가 납니다. 그것은 무슨 빛일까요? 같은 빛입니다. 천사가 빛을 발하는 게 아니라, 그들은 늘 하나님 가까이에 있기에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은 광명의 세계입니다. 더는 해나 달이 필요 없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시내산 꼭대기에서 40일간 함께 지냈기에 모세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 얼굴 가까이에서 살면 우리도 하나님 영광의 빛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얼굴이 그늘지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얼굴은 밝아야 합니다. 빛이 나야합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참 빛이신 주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빛을 받은 우리는 반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에서 하나님 영광의 빛이 드러나야 합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10]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 모세가 첫 십계명 돌판을 깨뜨린 후 그는 백성의 사죄를 위해 비장한 각오로 기도했습니다. 만일 백성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려거든 자기 이름도 생명책에서 제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고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산에 올라가 40주야를 단식하며 백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고 참고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기에 표정도 밝고 빛이 나야 할뿐 아니라 또 하나의 역할은 중보의 사명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나라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십니다. 내 가정과 내 교회를 위해서도 중보의 기도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중보의 기도는 위대합니다. 한 사람의 중보기도가 그 민족, 공동체의 운명을 바꿉니다. 우리는 물량주의에 익숙해서 나 한 사람의 기도가 무슨 도움이나 힘이 될까 하며 과소평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중보의 기도를 들으시고 공동체의 죄악을 용서하십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단 한 사람의 중보자라도 있다면, 그 기도를 접수해 이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제발 한 사람의 중보자를 찾아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거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호소입니다. 에스겔 2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29]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31]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전체의 운명에 단 한 사람의 중보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중보의 기도가 그 가정, 사회, 교회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나 한 사람의 중보기도가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가졌는지를 깨닫고 중보기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중보기도를 절대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기도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모세처럼 중보기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은 불 같이 진노하시다가도 모세가 절절히 매달려 기도하면 항상 그 분을 가라앉히십니다. 모세에게 져주신 겁니다. 여러분의 중보기도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용서와 복으로 바꾸기를 기원합니다.
돌판과 언약궤
신 10:1-11
사람은 항상 자기 입장이 먼저입니다. 내 입장이 곤란해지고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지 나 때문에 누군가의 입장이 곤란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주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입장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어려움이 없을 때 자기에게 문제가 없다는 여유 속에서 비로소 상대방을 생각해 줄 수 있는 것이지 자기 입장보다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자기 입장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은혜갚음을 하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으로 살기 때문에 은혜갚음도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고 피해가 주어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또 그 은혜를 안다고 해서 과연 은혜를 갚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람들의 착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잘못됨은 하나님의 은혜를 갚겠다고 설치는데 있습니다. 교회의 타락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신자가 되라고 강조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여러분, 도대체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자기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죽일 수 있습니까? 자기를 죽일 수 있습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갚겠다고 하는 행동들은 모두가 자신이 손해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것들입니다. 이정도의 것은 자신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입장을 철저히 지키는 가운데 신자로서의 도리를 지켜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존심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니까 은혜를 갚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면 먼저 '내가 과연 하나님 때문에 내 입장을 모두 포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 가족도, 내 소유도, 내 지위도 모두다 포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은혜 갚겠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십자가도 알고 하나님의 은혜도 알고 사랑도 알고 있지만 나는 내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라는 것을 인정하신다면 감히 은혜 갚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은혜를 갚겠다고 나서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한 것만큼 은혜에 대한 부담감을 덜게 됩니다. 가령 A란 사람이 B란 사람에게 10,000원짜리 점심을 대접받았습니다. 그럴 때 A란 사람은 '내가 점심을 대접받았으니까 나도 대접을 한번 해야지'라는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부담을 덜기 위해서 B란 사람에게 5,000원짜리 점심을 한번 대접했다고 할 때 5,000원만큼의 부담을 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 봉사하고 헌금했다고 할 때 필경 그 사람은 자신이 한 것만큼의 부담을 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것이고 다만 옛날에 잠깐 도움을 받은 정도로 생각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옛날에 받은 것에 대해서 조금씩 갚아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옛날에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한꺼번에는 못 갚고 평생토록 살아가면서 조금씩 갚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할수록 은혜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부담이 줄어갈수록 상대적으로 자신의 행함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말하지만 은혜를 전혀 모른 사람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옛날에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하신 단 한번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을 옛날에 있었던 은혜의 사건으로만 생각하고 우린 단지 그 혜택을 받아서 산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에 대해서 큰 부담을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지 나는 아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는 사람들이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장본인이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감히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오늘 은혜를 얼마간 갚았다고 합시다. 내일은 예수님을 죽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은 날마다 죄를 짓고 산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날마다 죄속에 삽니다. 주님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의 중보 덕분에 망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 은혜 갚는다고 해도 죄 때문에 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상태이기 때문에 우린 감히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갚겠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은혜를 갚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 입장에서만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을 때 원망을 했습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진멸을 당해야 했습니다. 또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하고자 했습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또 지금도 역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살려 주신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죄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해결하는 해결사가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 해결사 덕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해결사가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떠받드는 것이지 진노가 사라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해결사의 역할을 한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사십 주야를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 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중보 기도'라고 합니다. 중보 기도란 단지 남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 기도란 말씀을 무너뜨린 쪽의 그 책임을 대신 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중보 기도란 말씀을 멸시하고 무너뜨린 사람들의 책임을 대신 짐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보 기도는 주님의 기도를 말하는 것이지 절대로 내가 남을 위해 하는 기도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지금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너희들이 살아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한 덕분이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살아있는 것은 너희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은혜 때문이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때문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 즉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는 오직 은혜를 아는 자만 살 수 있는 땅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제발 너희들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내고 은혜에만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백성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하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내용의 말씀입니다. 1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고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모세를 산 위로 불러서 계명을 새긴 돌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돌판을 받아서 내려올 때 산밑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돌판을 깨뜨려버립니다. 출애굽기 24: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처음의 돌판은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의 돌판이 깨어지고 다시 계명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돌판을 모세가 준비해서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두 번째 돌판을 만들 때는 모세더러 친히 돌판을 만들어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처음의 돌판이 깨어진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더러운 자들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죄가 깨뜨린 돌판이 산밑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돌판을 깨뜨린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어긴 죄의 책임을 땅에서 누군가가 해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시키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책임지시고 해결하심으로서 은혜가 우리에게 지속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지금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의 행위 속에서 장차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누군가가 책임지고 해결하지 않으면 구원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책임을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담당하시고 죄문제를 다 해결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 모세가 돌판을 만들어서 산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돌판만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무궤도 하나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나무궤의 용도는 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또 5절에 보면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고 한 말씀을 보면 나무궤는 모세가 다시 받은 돌판을 넣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의 돌판은 모세가 직접 들고 내려 왔습니다. 그 결과는 돌판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받은 돌판은 미리 준비한 나무궤에 넣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돌판을 그대로 들고 내려오면 처음과 마찬가지로 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돌판을 들고 올 때의 이스라엘이나 두 번째 돌판을 들고 올 때의 이스라엘이나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즉 여전히 죄인이고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돌판을 그대로 들고 오면 또 다시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돌판을 나무궤에 넣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돌판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판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계명이 그대로 내려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김으로 이미 계명을 무너뜨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 계명이 존재할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에 넣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죄는 말씀을 지킴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인으로서 죄지을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돌판을 나무궤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돌판을 집어넣은 나무궤는 언약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약궤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언약궤의 뚜껑은 속죄소라고 하기도 하고 시은좌라고 하기도 합니다. 즉 죄를 씻어주는 장소이고 은혜의 자리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지성소에 피를 들고 들어가서 언약궤의 뚜껑에 뿌립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 언약궤에 넣은 것은 '이제부터 너희는 말씀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죄를 책임지고 흘려진 피를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를 믿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과연 피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완전히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실천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의 본성을 모릅니다. 사람은 실천하면 하는 것만큼 그것을 자기 의로 여기게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또한 야고보서에서 2:10절에서 율법을 하나만 범해도 모두 범한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이냐 죄인이냐는 것은 피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통해서 결정됩니다. 그리고 피를 믿는 자는 자기의 부족과 악함을 알기 때문에 감히 말씀을 실천해 보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에 실천하지 못해도 피의 은혜가 나를 살리고 있음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신자가 육으로 난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판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은혜 갚겠다고 나서지 말고, 말씀을 실천해 보겠다고 설치지 말고 다만 피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피를 믿는 신자는 결코 자신의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피를 앞세우고 피를 기뻐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은 인간의 희생이 의라는 껍데기를 쓰고 삐쳐 나오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점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너는 네 입장에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장은 말씀을 지킴으로서 신자로서 성공하고자 합니다. 왜 피가 흘려야 했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피를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 피의 의미도 모른 채 믿는다는 말만 남발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입장, 피를 흘리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에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자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챙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입장에서 자기 이익을 챙기고자 할 때 모든 행동은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도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하게 되고, 기도도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하게 되고, 교회에 나오는 것도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나오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에 넣도록 하셨는지 그 이유를 마음에 새기고 돌아가십시오. 돌판을 궤 넣어서 인간이 전혀 손대지 못하도록 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제 인간은 말씀을 지킴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피가 뿌려짐으로서 그 피로 인해서 구원받는 것을 믿고 주님의 피만 높이고 피만 증거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를 높이고 피만 증거하면서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8,9절에 보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들은 땅에 기업이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가 기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식이 기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삶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보여줬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은혜로 사는 것뿐입니다. 피만 높이고 피만 증거하면 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기업으로 알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 입장을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야 할 태도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잊지 말고 살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행위가 나를 살렸음을 잊지 말고 하찮은 우리 행위를 내세우지도 자랑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여러분을 통해서 은혜와 사랑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지금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업으로 알고 주님만 높이고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