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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첨(阿諂)
남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알랑거림 또는 그런 말이나 짓거리를 말한다.
阿 : 언덕 아(阝/5)
諂 : 아첨할 첨(言/8)
출전 : 논어(論語) 팔일편(八佾篇)
당시 법무부 장관격인 대사구(大司寇)를 지낸 공자는 예(禮)를 통한 정치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군주에 대한 예우를 몸소 실천하며 관료사회의 기강 확립에 힘썼다. 하지만 실세 관료들인 삼환(三桓: 맹손씨, 계손씨, 숙손씨)을 비롯한 대다수 관리들은 오히려 군주를 경시하고 무례하게 처신했다.
그리고 이들은 공자의 진정성 있는 행보를 두고 '아첨'이라는 오명을 씌웠다. 권력의 실세들은 자신들의 방자함은 돌아보지 않은 채, 도리어 올바른 예법을 실천하는 이를 비난했다. 공자가 추구한 예(禮)는 단순한 형식이 아닌 인간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질서였다. 그것은 관료제의 본질이자 국가 운영의 기본원리였다.
예법을 따르는 충정을 '아첨'으로 매도하는 세태에 공자의 깊은 탄식이 들린다. 이 성어는 공자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다.
子曰:事君盡禮, 人以為諂也。
공자가 말했다. “군주를 섬김 때에 일체를 예법에 따랐더니 사람들이 아첨이라고 생각하는구나.”
당시에 군주는 약하고 신하는 강해서 군주를 섬기는 것이 대부분 간략하고 예의가 없었다. 이 단락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한 가지는 공자의 사군진례(事君盡禮)에 대해 남들이 아첨이라고 평가한 것이라는 설이고, 다른 한 가지는 사군진례(事君盡禮)도 타인이 한 것이라는 설이다.
黃氏曰:孔子於事君之禮, 非有所加也, 如是而後盡爾. 時人不能, 反以為諂. 故孔子言之, 以明禮之當然也。
황조순(黃祖舜)은 “공자께서 임금을 섬기는 예에 더한 바가 있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첨한다고 여겼으니 공자께서 그것을 말씀하시어 예의 마땅함을 밝히셨다”고 해서 전자로 본다.
程子曰:聖人事君盡禮, 當時以為諂. 若他人言之, 必曰我事君盡禮, 小人以為諂, 而孔子之言止於如此. 聖人道大德宏, 此亦可見。
정이(程頤)는 “만약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반드시‘내가 임금을 섬김에 예를 다하는데 소인들은 그것을 아첨이라 여긴다.’고 했을 것이다. 공자의 말씀이 이 정도에서 그쳤으니 성인의 도가 크고 덕이 넓음을 여기서 볼 수 있다”고 푼다.
而孔子之言止於如此. 聖人道大德宏, 此亦可見.
그러나 공자의 말이 이것과 같음에 그쳤다. 성인의 도가 가 크고 덕이 큼 을, 이것에서 또한 알 수 있다.
(論語集注 卷二)
예를 다하는 것과 아첨하는 별개의 일이다. 인간에게 질서 있는 삶은 아름답다. 공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예의 질서를 아름답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아마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신분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예를 다하여 살았을 것이다.
이 사건을 공자가 살던 특수한 시대 상황과 관련지어서 해석하기도 한다. 소라이는 공자시대의 군주는 후대의 절대군주가 아니었고, 서로 신하와 군주가 서로 예를 다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 노나라는 삼가가 정권을 잡고 군주를 우습게 알고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런 노나라의 상황에서 공자는 군주에게 예를 다하고 군신의 바른 관계를 과시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역사적 상황을 떠나서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준다. 윗사람에게 타당한 논리로 간하거나 득실을 따져서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윗사람을 비판할 때는 예로써 할 줄 알아야 한다. 냉철한 논리를 가지면서도 모든 예의를 가져야 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인 윤기(尹愭)는 그의 저서 무명자집 문고 제10책에서 아첨에 대하여 첨설(諂說)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첨이란 남을 기쁘게 해 주어 자기를 이롭게 하려는 것이다(諂者求悅於人而欲以利於己也). 그러므로 신하가 임금에게 아첨하는 것은 임금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이고, 천한 자가 귀한 자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에게 도움을 받고자 해서이며,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부유함에 의지하고자 해서이다. 이는 모두 아래에서 위에 붙고,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구하는 것이다.
만일 정직하고 방정하여 이욕(利欲)을 초월한 사람이 아니면 상정(常情)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은 이로움을 꾀하고 환난을 면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이한 것은, 남의 아첨을 좋아하며 진정 자신을 사랑한다고 여기고, 남의 직언을 싫어하며 필시 자신을 소원하게 대한다고 여기는 것이다(獨怪夫悅人之諂而以爲眞愛己也, 惡人之直而以爲必疎我也)
남이 높여 주는 말을 해주면 스스로 잘난 체하고, 남이 칭찬하는 모습을 지으면 스스로 현명하다고 여기며, 그른 일인데도 아첨하여 옳다고 하면 여론이 그르다고 하는 줄 모르고, 나쁜 물건인데도 아첨하여 좋다고 하면 공정한 안목이 나쁘다고 하는 줄도 모른다(人口尊之而自大, 人貌譽之而自賢, 事之非而諂以爲是, 則不知正議之以爲非, 物之惡而諂以爲美, 則不知公眼之以爲惡)
송(宋)나라 때 유명한 소동파(蘇東坡; 蘇軾)의 구지필기(仇池筆記)에, “송나라 신종(神宗)때 환관(宦官) 이헌(李憲)이 권력을 얻어 사대부를 노예처럼 부렸는데(李憲用事, 士大夫或奴事之), 팽손(彭孫)이란 자가 이헌의 발을 씻기며 ‘태위(太尉; 옛날, 무관 중 제일 높은 벼슬)의 발은 어찌 이리 향기롭습니까!’ 라고 하자, 이헌이 그의 머리를 밟으며 ‘노(奴)가 어찌 이리 아첨이 심한가!’라고 하였다고 한다(然嘗為李憲濯足, 曰:太尉足何香也. 憲以足踏其頭, 曰; 奴諂不太甚乎. 仇池筆記). (太尉足香 段落)
당나라 때 유명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병이 들어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염조은(閻朝隠)은 소실산(少室山)에 가서 스스로 희생이 되어 제기(祭器) 위에 누워 측천무후의 목숨을 빌었다. 이에 측천무후의 병이 약간 차도가 생겨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렸는데, 나중에 장원일(張元一)이 이 광경을 그린 대희도(代犧圖)를 바치자 측천무후가 크게 웃으며 비루하게 여겼다고 한다(則天後疾, 遍祭神廟。給事中閻朝隱嘗詣少室, 因親撰祝文, 以身代犧, 沐浴伏於俎盤, 令僧道迎至神所。觀者如堵。後病愈, 特加賞賚。張元一乃畫代犧圖以進, 後大笑). (古今談概 古今事文類聚 別集 卷19 性行部 代犧禱疾)
아첨이라고 힐난하더라
子曰 事君盡禮 人以爲諂也
자왈 사군진례 인이위첨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임금 섬기기에 예를 다하는 것을 사람들은 아첨이라 하는구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주를 섬기기를 예를 다하였는데 사람들은 아첨한다고 여기는구나. 공자 시대의 시대적 상황과 연계되어 공자의 자조적 표현인 듯한 내용이다. 실제로 공자는 자신이 노나라를 중심으로 한 춘추의 집성에 기초해, 임금(君)을 모심에 자신의 연구의 중심 분야인 예법에 기초해 궁의 출입이나 걸음걸이 등 제반 행동을 기본에 충실하게 행하려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패권을 위한 세력의 확장에 주력하던 춘추시대 당시의 시대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공자 자신은 사군(事君; 임금을 모시는데)하는데 진례(盡禮; 예를 다함)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아첨이라고 힐난 하더라는 내용으로 이해된다.
관련된 논어의 내용으로, 공자시대의 복잡한 시대상을 등지고 숨어 지내는 은자(隱子)들의 언급이 소개되는데, 헌문편의 미생무(微生畝)가 “구는 어찌하여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가? 말재주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닌가(丘何爲是栖栖者與 구하위시서서자여 無乃爲佞乎 무내위녕호)?”라는 말로 공자를 힐난하는 내용이 그 한 사례가 될 것이다.
또 초나라 광인(楚狂)이 공자의 수레에 다가와 노래를 부르면서 “지금의 정세가 위태로우니 괜히 제후를 찾아다니며 유세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내용(微子編 미자편)이 있고, 장저와 걸닉이 밭을 갈고 있는데, 동행하던 자로(子路)가 나루터가 어딘지를 물어보자 “괜히 답이 없는 공자를 따라 다니지 말고, 자신들과 은거함이 어떠냐?”고 물어보는 내용(微子篇 미자편) 등에서 세상의 사람들이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제후들에게 되지도 않는 정치유세를 하고 다닌다고 바라보는 세간의 비난에 대해 공자가 서운한 속내를 보이는 내용을 볼 수 있다.
黃氏曰 孔子於事君之禮 非有所加也 如是而後盡爾 時人不能 反以爲諂 故 孔子言之 以明禮之當然也
황씨왈 공자어사군지례 비유소가야 여시이후진이 시인불능 반이위첨 고 공자언지 이명예지당연야
황씨가 말하였다. “공자께서 군자를 섬기는 예에 있어 더하는 바가 있지 않고, 이같이 하신 후에 극진히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할 수 없으므로 도리어 아첨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이것을 말씀하셔서 예의 당연함을 밝히신 것이다.”
程子曰 聖人事君盡禮 當時以爲諂 若他人言之 必曰我事君盡禮 小人以爲諂 而孔子之言 止於如此 聖人道大德宏 此亦可見
정자왈 성인사군진례 당시이위첨 약타인언지 필왈아사군진례 소인이위첨 이공자지언 지어여차 성인도대덕굉 차역가견
정자가 말하였다. "성인이 임금을 섬김에 예를 다하였으나 당시에는 아첨이라 여겼다. 다른 사람이 이것을 말할 것 같았으면 반드시 '내가 임금을 섬기기를 예를 극진히 하였는데 소인들이 아첨이라 하는구나' 하겠지만 공자의 말씀은 이와 같음에 그치셨으니, 성인의 도가 크고 덕이 넓음을 여기서 또한 볼 수 있다."
이 장은 공자가 실권을 잃은 노나라 정통 군주들, 이를테면 정공(定公), 소공(昭公), 그리고 애공(哀公) 등에게 고례(古禮)대로 군신(君臣)의 예를 깍듯이 취한 데 대해, 당시 사람들이 '힘없는 군주에게 알랑방귀를 뀐다'고 입을 삐죽거렸던 것이다. 군주에 대한 공자의 경건한 몸짓은 논어에 거듭 나타난다. 이에 대해 공자는 오히려 원칙을 저버리고 시세(時勢)의 변화에 따라 힘 있는 자들에게 붙어서 알랑대는 당시 사람들을 무원칙한 모리배들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임금을 섬김에 예를 다하는 것과 아첨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를 아첨과 혼동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생활에서도 이런 현상은 종종 있다. 어느 조직에서 상사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을 남들은 아첨한다고 욕하는 것이다. 이는 소인배들이 말하는 짓거리이다. 섬김에 예의를 다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다. 그러나 아첨은 근본부터가 다르다.
아첨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비굴하게 나아가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것이다. 역시 상사가 또한 소인배라면 진례와 아첨을 구분 못하고 아첨을 진례 정도로 착각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그 아첨꾼으로 인하여 그 상사는 물론 그 조직도 큰 피해를 입고 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일은 꼭 상사에 대한 진례에서 생기는 것만도 아니다.
어느 조직에서나 어느 구성원 사이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어느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원을 두고 아첨하느라 그렇게 한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이다. 학교에서도 성실히 가르치고 학생을 진정으로 돌보는 교사를 상사에 아첨하느라 그렇게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 것이다. 이를 들으면서도 끝가지 성실히 한다는 게 그리 쉽지를 않다.
품위 있는 아부의 기술 : 생존과 자존의 경계에서
子曰 事君盡禮 人以爲諂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임금을 섬기는 것에 예를 다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걸 보고 아첨한다고 하는구나."
공자의 말은 아부의 불분명한 경계를 말해준다. 내가 하면 존경이고, 남이 하면 아부다. 겸손과 비굴, 아부와 칭찬, 진실과 아부, 평판과 아부, 일도단마의 판별이 쉽지 않다. 보기 나름이다. 눈금 하나만 삐끗해도 순식간에 칭찬 정량을 넘겨 아부가 된다.
누군들 새처럼 고공을 높이 날고 싶지 않았겠는가. 살다보면, 사노라면, 아니 살기 위해 새는 커녕 뱀이 되어 온몸으로 진흙탕 바닥을 박박 기며 온몸으로 상처를 입게 되는 게 사람살이다. 지문이 지워지도록 아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명줄보다 무서운 밥줄 때문에 지문을 지우고, 허리디스크가 걸리도록 허리를 펴지 못하며 굽신거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조금만 더 굽혀서, 숙여서 살 것인가. 그렇지 못해서 부러질 것인가. 인생은 어차피 옳고 그름의 싸움이 아니라 나쁨과 더 나쁨 중의 선택아니던가. 거기에서 조금 더 비빈 들, 지문이 조금 더 없어진 들 그게 대수겠는가.
나는 직장인들의 지워진 지문을 볼 때 그와 비슷한 비굴한 동류의식을 느낀다. 별로 웃기지도 않는데 과장되게 따라 웃는 헛웃음과 잔주름을 볼 때 창자가 투명해지는 묘한 아픔을 느낀다. 자존을 택하면 생존이 울고, 생존을 택하면 자존이 운다. 대부분 생존이 자존을 이기는게 인생살이다.
어차피 인생이 정의 vs 불의의 100대 0의 대결선택이 얼마나 있겠는가. 59대 41의 조금 더 나쁨vs 나쁨, 박빙의 선택 아니던가. 과장, 부장, 사장, 모두 한줄 앞의 완장에게 무력해진다. 가장의 이름으로 조금 더 비빈들 뭐가 그렇게 대수이겠는가. 내가 '김밥을 말지 못해' 물러난들 내 뒤에 올 사람이 나보다 더 강건하고, 그 바람에 리더를 변화시킬 것이란 걸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나름 슬픈 생활형 아부파들의 발언이기도 하다.
①책사형 아부 : 독심술 아부
상사 마음의 향방을 읽는다. 관심술과 관찰술을 병행한다. 일단 아부지능은 관심과 관찰이 기본이다. 상대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바람보다 빨리 읽고, 바람보다 빨리 누워 만족시킨다. 이때 중요한 것은 드러나지 않은 ‘숨은 실세’를 찾는 것이다. 복심이 누구인가를 나비처럼 찾아내 벌같이 쏘는 것이다.
측천무후때의 간신 양재사는 아부지능이 높았다. 군주에게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여도 그는 재빠르게 감지, 비위를 맞췄다. 군주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반드시 그 일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해 반대의견을 표했다. 또 군주가 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칭찬하여 군주의 비위를 맞췄다. 군주가 총애하는 인물을 극진한 아부로 대했다. 양재사는 측천무후에게 아부하기 위해 그가 총애했던 미모의 남자 장창종에게 스리쿠션 아부를 했다. “6랑(장창종)이 연꽃을 닮았다고 하는 것보다는 연꽃이 6랑을 닮았다고 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는 언사다. 측근에 대한 찬사를 통한 스리쿠션 아부는 기본이다.
제나라 재상 정곽군의 이야기다. 그때 왕후가 죽었다. 그 자리에 누구를 세워야 할지 모르자, 그는 절대 아부지능을 발휘한다. 제위왕에게 귀한 옥귀고리를 바친 것이다. 다음날 궁궐에서 그 귀고리를 차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고 왕심을 읽은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왕후 후보로 세게 밀은 것이다. 귀걸이를 선물해 그 귀걸이를 누가 하고 있나 살폈다.
모공공기관 고위간부의 이야기다. 청사 로비에 대형그림을 걸어놓기로 결정이 됐다. 예술작품이 어느 정도 우열이 검증된 유명화가라면 그 다음 단계에선 전적으로 취향이 아닌가. 이 작품, 저 작품 어떤 것을 물어봐도 단체장은 고개를 저었다. 단체장 입장에선 어느 것 하나를 직접 낙점했다간 여러 가지 뒷소문이나 로비설등으로 곤란한 처지에 처할 수 있으니 딱 찍어서 좋다고 말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이때 평소에도 영민(?)하기로 소문난 고위간부가 딱 그림을 찍어 단체장에게 의견을 여쭤봤다. 답은? 한번에 단방에 오케이였다. 비결은? 단체장과 그림 전시회를 가서 그가 제일 오래 서있으며 감상한 그림을 선택, 의견을 물은 것이다. 염화시중, 그것은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촉각 시각 청각 온 감각을 다 동원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필요한 알파내공은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점이다. 오리는 물밑에서 활발히 물질을 한다고... 비록 눈치 코치 품 엄청나게 들였을지라도 짐짓 하나도 힘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치한 것처럼 꾸민다.
②집사형 : 사생활 챙기기 아부
상사의 소소한 사생활을 챙긴다. 아부에서 사생활 챙기기 역시 빠질 수 없다. 보통 사람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이지만, 그렇기에 가장 약발효과는 가장 높다는 것이 동서고금 공통적이다. 기본형이 아닌 특수부가형이라고나 할까. 이런 아부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다. 상관의 생일쯤은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의 이야기냐고? 아니 그리스 때도 이미 있었다.
2000년전 트라야누스 로마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내놓은 표현을 보라. 고대 로마의 문학가이자 법조인이자 자연 철학자인 소플리니우스가 황제를 위해 바친 카드내용이다. "기도하건대 님이시여, 당신께서 이 생신을 기리시어 앞으로도 더 많은 날이 가능한 한 행복하게 찾아오기를, 그리고 평안과 건강을, 아울러 영원한 찬사와 함께, 당신이 겹겹이 새로운 업적을 더한다는 그 찬란하고 영예로운 명성을 드높이시기를" (소 플리니우스 ‘서한집’)
팔로워들이 가장 비루하게 느끼고, 하기 싫어하는게 집사형 아부다. 요즘은 웬만한 강심장 상사 아니면 못시킨다. 언제 인터넷 올라올지 모르지 않은가. 일단 하면 가장 감사를 넘어 의존관계가 형성된다.
모기업의 임원 이야기다. 그는 회장 자녀의 입학, 유학은 물론 진로에 관한 정보를 시시콜콜 다 알아서 제공했다. 유학정보는 물론 기숙사, 심지어 그 지역내 교포 교회정보와 진로 관련 인사 조언과 멘토링까지... 그야말로 A~Z까지 집사, 교사 역할을 모두 했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그는 “상사 부하간 관계도 인간관계다. 인간관계는 쓸데없는 일을 같이 할 때 끈끈해진다.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없는 개인적 케어야말로 가까워지고 서로 신임한다는 확실한 매개”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③용사형 : 상사의 적은 나의 적이다
상사에 대한 비방을 좌시하지 않는다. '논어'를 읽어보면 공자는 자로에게 야단을 가장 많이 친다. 처음 읽을 때는 자로가 가장 덜렁거리고 실수를 많이 해서 그런 것으로 보았다. 자세히 읽어보면 공자의 자로에 대한 야단에는 애정이 담겨있다. 안회는 모범생이긴 하지만 편하게 대하기 어려운 제자였다. 자로는 불량학생(?)이긴 하지만 애정이 가는 편한 제자였다. 신체 경호는 물론 심기경호까지 다했다. 요즘말로 아주 열렬한 공빠였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내가 자로를 제자로 두고부터 욕먹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됐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가 가능하다. 자로에 대한 칭찬으로 볼 수도, 질책으로도 볼 수 있다. 충성의 강도는 상사(조직)의 비난에 대한 반응의 정도이다. 반목의 단계는 같이 욕한다. 중립은 침묵한다. 강한 충성은 비난을 좌시하지 않고 반발한다.
상사(조직)가 있는 자리에선 보호, 없는 자리에선 그의 입장을 강력히 옹호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상사를 공식적인 자리에서든, 비공식적 자리에서든 비난의 멘트를 날리게끔 좌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충성행위는 어떻게든 상사의 귀에 들어가게 돼있다. 3호의 심기경호 아부는 상사의 마음을 든든하게 그를 믿음직하게 여기도록 한다.
친구의 친구는 따뜻하다. 하지만, 적의 적, 같은 적을 가진 관계는 친구를 넘어 동지로 든든하다. 같은 적을 가지고, 상사에 대한 비난을 좌시하지 않는 것은 확실한 아부다. 상사의 적을 같이 적으로 응대, 강력반발하는 것, 그것은 끈끈한 동지애를 형성한다.
임금의 예와 신하의 예
3편 팔일(八佾) 제18장
子曰: 事君盡禮, 人以爲諂也.
공자가 말했다. “임금을 섬기면서 예를 다하는 것을 사람들은 아첨하는 것이라 여긴다.”
임금이 신하를 부릴 때 예를 갖추고(使臣以禮),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事君以忠)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선 다시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는 예를 다해야 한다고 합니다. 임금이 예를 보이면 신하는 충을 보이는 것으로 충분할 터인데 왜 새삼 예를 다해야 한다는 말을 꺼낸 것일까요?
예는 상호적입니다. 임금이 예를 갖추면 신하도 마땅히 예을 갖춰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예를 갖추는 이례(以禮)와 예를 다하는 진례(盡禮)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임금은 적절히 예를 갖추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신하는 그 예를 철저히 실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신하는 임금을 섬길 때 충(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忠은 양심에 부끄러움이 남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에게 예를 갖출 때도 마땅히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盡禮)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생각하는 충은 곧 진례의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자가 “임금에게 인사할 때는 대청 아래서도 하는 것이 예인데, 지금은 대청 위에서만 한다. 이는 교만한 것이니 대다수 사람과 어긋나더라도 나는 대청 아래서도 하는 것을 따르겠다”(9편 ‘자한’ 제3장)고 한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임금에게 인사할 때는 대청 아래서 먼저 일배(一拜)하고 대청 위로 올라가 재배(再拜)하는 것이 진례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나라에서 제후에게 일배만 하는 것은 곧 신하 중 지위가 가장 높았던 삼환에게 일베 하는 것과 동등한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즉 제후나 삼환이나 일배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공자는 이에 동의할 수 없었기에 제후에게 재배하는 진례의 원칙을 고수한 것입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삼환세력이 공자가 노나라 제후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는 것이라 험담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반격은 사실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만한 발언입니다. 임금을 모심에 있어서 예를 다하지 않는 것(不盡禮)은 곧 불충(不忠) 한 것과 같다는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군신관계는 상호적입니다. 그 상호성은 병렬적이거나 조건적일 수 있지만 결코 대등하지는 않습니다. 임금은 신하에게 예를 갖추는 것만으로 그 충을 살 수 있지만 신하는 뭘 하든 진력을 다해야 그에 부응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비대칭성으로 인해 임금에게 아첨을 한다거나 과공비례(過恭非禮)의 비굴함을 보이는 것 또한 신하 된 자가 해선 안 되는 일입니다. 양심의 거울에 비췄을 때 부끄러운 짓이니 결코 충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례’로 임금을 섬겼건만 임금이 ‘이례’를 망각하거나 무시한다면 파기될 수도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진례와 위첨(爲諂)을 분명히 구별하라는 메시지가 공자의 발언 속에 숨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아첨에도 등급이 있다
출전 : 연암집 마장전(馬駔傳)
가령 교묘하게 속이고 아첨하고 아양 떨며 일생 동안 남을 기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비록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꾸미는데 익숙해져 스스로 편하거나 이롭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막고 가린 것이 아주 얇고 좁아 감추려고 할수록 더욱 드러날 뿐이다. 제아무리 애써 봤자 고생스럽기만 할 것이다(假有巧詐諂媚 一生騙人 雖慣於粉餙 自謂便利 然其障蔽於人者甚薄狹 隨遮隨現 極勞苦哉). (이목구심서 3)
교묘하게 속이고 아첨하는 짓에도 최상과 중간과 최하의 등급이 있다. 몸을 가지런히 하고, 얼굴을 다듬고, 말을 얌전하게 하고, 명예나 이익에 초연하고, 상대방과 사귀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척하는 인간 부류는 최상 등급이다. 간곡하게 바른 말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인 다음, 그 틈을 활용해 뜻이 통하도록 하는 인간 따위는 중간 등급이다.
발바닥이 다 닿도록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 돗자리가 다 떨어지도록 뭉개고 앉아 상대방의 입술과 안색을 살피면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좋다고 하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무조건 훌륭하다고 칭찬한다. 이런 아첨은 처음 들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 자꾸 듣다 보며 도리어 싫증이 나는 법이다. 그러면 아첨하는 사람을 비천하고 누추하다고 여기고 끝내는 자신을 갖고 노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게 된다. 이러한 인간들은 최하 등급이다.
박지원이 스무 살 무렵 지은 세태 풍자 전기인 ‘마장전(馬駔傳傳)’에 나오는 말이다.
소인(小人)에도 등급
7세기 당나라 고종 때 활약한 허경종(許敬宗)이란 인물이 있다. 고종의 황후였지만 그의 사후 주나라를 세워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가 되었던 무측천(武則天)의 총신이었다. 그는 중신 중에 무측천이 황후가 되는 걸 최초로 지지한 이의부(李義府)와 더불어 초기 무측천의 양 날개였다. 한데 허경종은 고양이처럼 겉으론 온순하지만 속은 음험하고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있다 해서 '이묘(李猫)'라 불린 이의부와는 달랐다. 심한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무식하거나 무능하지도 않았다.
일찍이 방현령 등 훗날의 명재상들과 나란히 십팔학사가 되어 당 태종의 정치고문 역할을 했으며, 오대사(五代史) 등 역사서 편찬을 총괄했을 만큼 박학다식했다. 요컨대 능력은 뛰어났지만, 인품과 역사가로서의 자질은 형편 없는 소인이었다. 수나라 말에 군사반란이 일어나 부친이 목숨을 잃을 때 죽음이 두려워 구하려 들지 않았고, 뇌물을 준 사람들에 대해서는 미사려구를 동원해 좋게 기술하는 식이었다.
그 허경종이 659년 감찰어사 이소 등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발 사건을 맡았다. 허경종은 규정대로 일을 처리하는 척하면서 원로대신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모반에 가담했다고 꾸며댔다. 고종의 입장에서 보면 선왕의 측근이었던 원로들의 세력을 꺾을 필요가 있었고, 무측천 또한 자신이 황후가 되는 걸 극력 반대했던 인물이었으니 권력자의 입맛에 맞춘 조치였다.
문제는 이소가 자신의 삼촌이었기에 고종은 처벌을 망설였다. 그러자 허경종은 "한 문제의 외삼촌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 문제는 눈물을 머금으려 사형을 내렸지만 오늘날 성군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지금 외척의 간악함을 방치하신다면 장래 더 큰 변란을 맞아 후회가 막급할 것입니다"라고 고종을 설득했다.
결국 고종은 다른 사람을 시켜 따로 사실 확인도 않은 채 장손무기의 관직과 봉읍을 박탈하고 검주로 유배를 보냈다. 이어 몇 달 뒤 허경종은 유배지로 사람을 보내 장손무기의 자백을 받아내고 자결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로써 두 황제의 원로를 지냈으며 30년간 재상으로 국정을 운영했던 일세의 명신이 소인 허경종의 요설로 목숨을 잃었다.
이는 중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이중톈이 '중국 역사를 뒤흔든 5명의 독불장군'의 생애를 다룬 '품인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중톈은 이렇게 평했다. "소인에게는 네 가지 역할이 있다. 바로 조력, 아첨, 맞장구, 악역이다. 이의부는 쓸 만한 능력이 없었으므로 맞장구 역할밖에 할 수 없었지만 허경종은 풍부한 경륜이 있어 악역을 담당했다"고. 능력 있는 소인이 훨씬 위험하고 해악도 크다는 역사적 증거라 할까.
아첨에도 레벨이 있다
간신을 분별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아첨인지 아닌지를 가리면 된다. 상급은 남들이 안 보는 데서 하고 하급은 남들이 다 보는 데서 노골적으로 한다는 차이가 있다. 아첨(阿諂)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아(阿)는 그냥 빌붙는다는 뜻이고 혓바닥을 놀려 살살거리는 것이 첨(諂)이다. ‘諂'은 글자 모양대로 말재주를 부려 군주를 함정에 끌어들인다는 뜻이다.
반면에 미(媚)는 같은 아첨이라도 기교가 다르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아양 떨다’에 가깝다.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윗사람의 점수를 따려 할 때 미열(媚悅)이라고 한다. 윗사람을 도리로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 맘에 맞춰 아양을 떨어 기쁘게 한다는 뜻이다.
무(嫵)는 온몸을 흔들어대며 아첨을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미무(媚嫵)라고 하면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을 비틀어가며 아첨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잘 안 쓰지만 옛날에는 아첨하는 사람을 비판할 때 아유(阿諛)한다고도 했다. 유(諛)는 첨(諂)보다는 조금 강도가 덜해 비위를 맞춘다는 말이다.
한 여당 의원은 산자부 공무원들이 감사원 감사 전날 삭제한 북한 원전 관련 문건이 문제가 되자, “박근혜 정부부터 검토한 내부 자료”라고 변명하고 나섰다가 “추론이었다”고 물러서기도 했다. 전형적인 유(諛)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한 자락 내밀어 후일을 기다려 보겠다는 심산이다. 사실 이런 정도야 누구를 모시게 되면 어쩌다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첨(諂)을 넘어 미열(媚悅)에 이르게 되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 그것이다. 서울시장에 출마한 민주당 한 여성 장관 출신 인사가 ‘문빠’에게 미열(媚悅)하느라 연일 내뱉는 말들이 그야말로 목불인견이다.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이라더니 급기야 “대통령과 같은 대학 동문”이라는 낯 뜨거운 말까지 내질렀다. 서울시장 하겠다는 정도의 인물이 이런 미열꾼이라면 애당초 정치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긴 애당초 군주가 아첨을 싫어한다면 이런 코미디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첨꾼을 사랑한 임금
폐(嬖)란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천한 사람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말이다. 행(幸)은 행(倖)과 같은 글자로 아첨한다는 뜻이다. 그냥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유난을 떤다는 말이다. 두 글자를 합쳐 폐행(嬖幸)이란 말이 만들어졌다. 특별히, 임금에게 아첨하여 총애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임금의 총애는 출세와 권력을 보장했다. 그래서 폐행이 생겨났지만,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정치는 부패하고 백성의 삶은 곤란해졌다.
중국의 환관, 고려의 폐행
'고려사'는 고려시대 폐행들을 모아 열전을 만들고 폐행전(嬖幸傳)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자고로 소인배들은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엿보아 영합하고 조장하였다. 때로는 아첨으로, 때로는 놀이와 여자로, 때로는 매사냥과 개사냥으로, 때로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해서, 때로는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때로는 기예와 술수로써 그렇게 하였다. 모두 임금이 좋아하는 바를 좇아서 그 비위를 맞추고자 하였다. 고려는 나라가 오래되었으므로 간사하고 아첨하는 폐행(嬖幸)도 또한 많았다. 이제 옛 기록에 근거하여 폐행전을 짓는다."
폐행전(嬖幸傳)에는 모두 36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중 대부분은 고려 후기 사람들이다. 고려사를 지은 사람들은 고려 후기에 폐행이 많아져서 정치가 혼란해졌고, 그래서 망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들이 세운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증명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폐행전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항변할 수만은 없는 역사적 진실이 담겨 있다. 고려가 폐행 때문에 망한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임금의 가까운 자리는 본래 환관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궁중에서 임금의 수발을 들면서 임금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임금 가까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도 이들의 무기였다. 환관의 한마디 말이 한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었다. 이들은 임금의 총애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뒤에서 호가호위하며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중국 후한 말의 십상시(十常侍)가 대표적인 예다.
중국 역사에는 십상시 말고도 환관 권력자가 많았다. 진시황 사후 어린 황제를 세우고 권력을 휘두른,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주인공 조고(趙高)는 진나라의 환관이었다. 당나라에서는 현종 때 고력사(高力士)가 환관정치의 문을 열었다. 그는 관리들이 황제에게 올린 글을 중간에서 열어보고 걸러냈다. 명나라에는 희대의 환관 위충현(魏忠賢)이 있었다. 그는 황제 직속 정보기관인 '동창'의 책임자가 되어 황제 다음가는 2인자로 군림했는데, 자신이 나타나면 누구나 엎드려 '구천세'를 부르게 했을 정도다(황제에게는 '만세'를 불렀다). 명나라 말에는 환관이 모두 7만 명이나 되어 관료보다 많았다고 하니, 비단 청나라가 아니었어도 이 나라는 곧 망했을 것이다.
반면 우리 역사에서는 권력을 잡은 환관이 한 사람도 없다. 환관의 발호를 극도로 경계한 결과였다. 고려는 환관을 10명 이내로 제한하고 승진도 7품까지로 제한했으며, 조선은 환관을 천대하고 국정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독했다. 그 대신 고려에서는 폐행이 출현했다. 열전에 올라 있는 최초의 폐행은 제7대 목종 때의 유행간(庾行簡)이다. 그는 남색(男色)으로 총애를 받았는데, 왕명을 내릴 때마다 그에게 먼저 물어봤으므로 사람들이 왕처럼 대우했다고 한다. 그는 문무 관리들에게 턱짓이나 얼굴 표정으로 지시할 정도로 위세를 부리다가 결국 목종이 시해되자 함께 죽음을 당했다.
몽골제국 간섭과 측근 정치 발호
고려의 폐행은 몽골과의 전쟁이 끝난 뒤 유난히 많이 출현했다. 당시 고려는 30년에 걸친 항전 끝에 나라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몽골제국의 정치적 간섭은 피할 수 없었다. 고려 국왕이 몽골에 의해 폐위되는 일이 벌어졌고, 국왕은 늘 폐위의 불안을 안고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의 국왕들은 자신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할 사람을 필요로 했고, 이것은 폐행이 자라날 최적의 환경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몽골어 통역관, 응방(鷹坊)의 매 사육사, 고려 국왕과 혼인한 몽골 공주의 시종 등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폐행으로 등장했다. 모두 몽골과 외교하는 데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통역관은 물론이고, 매 사육사는 매를 사육해서 몽골에 진상했으며, 몽골 공주의 시종들은 몽골의 실력자들과 다리 놓는 역할을 했다. 모두 국왕의 사적인 외교였다. 이 밖에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정치 환관도 다시 출현해서 폐행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의 폐행이 동시에 등장해서 세력을 이룬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측근 정치라 할 만한 정치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측근 정치의 가장 큰 폐해는 권력이 폐행들에게 집중되면서 부패한다는 점이었다. 우선 자신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기 위해 인사 규정을 어기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재산을 늘리기 위해 법을 어기는 것도 다반사였다. 감찰 관리들을 제멋대로 능욕하고 왕에게 모함하여 쫓아냈으니, 말 그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이렇게 되자 관리 가운데 뜻있는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고 소인배들은 폐행에게 아부하여 관직을 구하는 것이 풍조가 되었다. 그러니 유능하고 청렴한 관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었겠는가. 그 피해는 그대로 백성에게 전가되어 권세가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과도한 수탈에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최충헌의 최준문, 우왕의 이인임
밖에서는 외세의 간섭이 강하게 미쳐오고, 안에서는 폐행들이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관료사회는 무너지고 민생은 파탄에 이른, 그래서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나라 같지 않은 나라가 되어버렸다. 그 원인은 국왕이 폐행을 중용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의 원인은 국왕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적으로 총애하는 사람들에게 공적 영역의 정치를 맡겼기 때문이다. 결국 권력의 사유화가 문제였다.
권력이 사유화되면 반드시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난다. 그 예로, 단연 무신정권을 꼽을 수 있다. 최충헌 집권기에 그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는데, 말로 하기 민망하여 사료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최충헌의 여종 동화는 미인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많이 통정했고, 최충헌과도 통정했다. 하루는 최충헌이 장난 삼아 "너는 누구를 지아비로 삼겠느냐?"라고 물으니, 흥해의 공생(貢生)이던 최준문이라고 대답했다. 최충헌이 즉시 최준문을 불러다가 가노로 삼고 대정(隊正)에 임명했다. 최준문은 대장군까지 승진했는데, 나날이 최충헌의 신임이 두터워졌으므로 최충헌에게 청탁할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청탁했다. 그는 최충헌의 집 옆에 큰 집을 짓고 살면서 최충헌의 오른팔이 되었다.
최충헌이 국왕을 능가하는 권력자가 되자 수많은 사람이 그의 오른팔이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최준문은 진정한 오른팔이었다(그는 최충헌이 죽자 바로 최우에게 죽음을 당했다). 최준문이 최충헌의 신임을 얻는 과정은 엽기적이었지만, 당시 관료들이 최충헌에게 청탁할 일이 있으면 그에게 청탁했으므로 그 덕에 권세를 부렸다. 최충헌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서 누리는 지위였다. 그 청탁이란 대개 관직이었을 것이니, 이렇게 해서 고위 관직에 오른 사람을 상관으로 인정해야 했던 문무 관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려시대에 권력이 사유화된 또 하나의 시기는 단연 고려 말 우왕 때였다.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 출생의 석연치 않음 때문에 늘 불안해했다. 게다가 자신을 왕으로 세운 이인임이 정치를 좌우했으므로, 왕은 할 일 없이 노는 게 일이었다. 왕이 정치에 무관심하자 이인임은 자기 친·인척들로 조정을 채우는가 하면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관리들이 권력자의 집을 찾아다니며 관직을 구걸하는 행위를 '분경(奔競)'이라고 하는데, 우왕 때 '분경이 풍속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공공연하게 성행했다. 분경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이인임이 있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은 정치의 공공성을 회복하려 했다. 대표적으로, 정도전은 권력이 국왕에게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왕이 존재하는 한 폐행은 언제나 출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왕을 없애지 못한다면 그 권력을 최소화하고, 청렴하고 유능한 재상이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담당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언관(言官)의 기능을 강화하여 깨끗한 정치가 계속되기를 바랐다. 그의 꿈이 이루어져 조선은 오랫동안 환관은 물론 폐행이 출현하지 않는 역사를 갖게 되었다.
폐행이 성할 때
폐행은 언제나 국왕이 무능하거나 정치에 무관심할 때 출현했다. 그래서 자격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오로지 국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고, 그들의 폭정은 나라를 망치고 국왕도 망쳤다. 실제 중국에서는 환관이 발호할 때마다 왕조가 멸망했다. 고려에서도 폐행이 성할 때마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났고, 결국 고려가 망한 것도 권력의 사유화 때문이었다. 그런 세상에서는 유능한 사람들이 인정받지 못하고, 강직한 사람들은 쓰이지 못하며, 뜻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도 정치는 공공의 것이어야 했다.
▶ 阿(언덕 아, 호칭 옥)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좌부변(阝=阜; 언덕)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휘어 구부러지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可(가, 아)로 이루어졌다. 山(산)의 굽은 곳 또는 언덕의 뜻을 나타내고, 倚(의; 추종의 뜻)와 통하여 아부하다의 뜻으로도 쓰인다. 그래서 阿(아, 옥)는 (1)성(姓)의 하나 (2)아프리카 주 등의 뜻으로 ①언덕, 고개, 구릉 ②물가(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③대답하는 소리 ④모퉁이 ⑤기슭 ⑥집, 가옥(家屋) ⑦처마(지붕이 도리 밖으로 내민 부분), 차양(遮陽: 처마 끝에 덧붙이는 좁은 지붕) ⑧마룻대(용마루 밑에 서까래가 걸리게 된 도리) ⑨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양 ⑩의지하다 ⑪두둔하다, 편들다 ⑫아름답다 ⑬알랑거리다, 영합하다 ⑭한쪽이 높다 그리고 호칭 옥의 경우는 ⓐ호칭(呼稱)(옥)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언덕 구(丘), 언덕 애(厓), 언덕 원(原), 언덕 구(坵), 언덕 파(坡), 언덕 강(堈), 밭두둑 롱(壟), 언덕 안(岸), 언덕 치(峙), 언덕 강(崗), 언덕 애(崖), 언덕 구(邱), 언덕 판(阪), 언덕 릉(陵), 언덕 고(皐), 언덕 부(阜)이다. 용례로는 한쪽이 높은 언덕을 아구(阿丘), 세상에 아첨함을 아세(阿世), 딸이나 또는 여자를 아녀(阿女), 쇠가죽을 진하게 고아 굳힌 것을 아교(阿膠), 남의 마음에 들려고 간사를 부려 비위를 맞추어 알랑거리는 짓을 아첨(阿諂), 돈을 달리 이르는 말을 아도물(阿賭物), 여인이 남편이나 애인을 친근하게 일컫는 애칭을 아랑(阿郞), 자기의 아버지를 아옹(阿翁), 비위를 맞추며 순종함을 아순(阿順),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용납함을 아용(阿容),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아첨하고 두둔함을 아호(阿護), 몹시 아플 때에 내는 소리를 아포(阿謈), 나이가 어린 사람을 이르는 말을 아해(阿孩), 알랑거림을 영아(迎阿), 아첨함을 의아(依阿), 큰 집이라는 뜻으로 국가를 상징하여 이르는 말을 대아(大阿), 며느리를 부아(婦阿), 골짜기의 굽은 곳을 간아(澗阿), 남에게 잘 보이려고 구차스럽게 아첨함을 아유구용(阿諛苟容), 자기의 주견이 없이 남의 말에 아부하며 동조함을 아부뇌동(阿附雷同), 전란이나 그밖의 일로 인하여 큰 혼란 상태에 빠진 곳을 아수라장(阿修羅場),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이라는 아비규환(阿鼻叫喚) 등에 쓰인다.
▶ 諂(아첨할 첨)은 형성문자로 谄(첨)은 간자(簡字), 謟(첨), 讇(첨)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臽(함, 첨)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諂(첨)은 ①아첨(阿諂)하다 ②아양을 떨다 ③비위를 맞추다 ④알랑거리다 ⑤사특(邪慝)하다(요사스럽고 간특하다) ⑥아첨(阿諂)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첨할 미(媚), 아첨할 유(諛)이다. 용례로는 알랑거리며 아첨하는 것을 첨유(諂諛), 몹시 아첨함을 첨녕(諂佞), 아첨하고 업신여김을 첨독(諂瀆), 아첨하며 붙좇음을 첨부(諂附), 아첨하는 말을 첨언(諂言), 자기의 지조를 굽히어 아첨함을 첨곡(諂曲), 아첨하여 웃음을 첨소(諂笑), 아첨하여 아양을 떪을 첨미(諂媚), 남의 마음에 들려고 간사를 부려 비위를 맞추어 알랑거리는 짓을 아첨(阿諂), 올바르지 못하고 아첨함을 사첨(邪諂), 아첨하는 버릇을 첨유지풍(諂諛之風), 겉으로는 알랑거리며 아첨하나 속으로는 해치려 한다는 말을 외첨내소(外諂內疎)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