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새벽 그들은 워커힐을 떠나 그들의 아기가 잠들어 있
는 선산으로 향했다. 세상에 태어나 숨 한번 쉬어 보지 못하고 많
은 사람들의 가슴에 시커먼 멍 자국만 남겨 놓고 간 어린 생명이
한없이 불쌍하고 안타깝고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생기지나 않았더
라면 지금 이렇게 가슴 아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한없
이 미운 생각도 들었다.
야트막한 봉분에 잔디가 벌써 뿌리를 내려 제법 파릇파룻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수빈은 무덤 앞에 엎드려 피눈물을 흘리며 오열
하였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런 죄를 지은 일이 없었
다 우리로 인하여 누가 손해 본 일도 없고 가슴 아파한 일도 없
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러한 엄청난 시련과 고통이 주어지는 이
유가 무엇일까?' 상옥은 하늘의 무심함이 저주스럽고 원망스
러웠다.
수빈이는 실성한 사람처럼 한 마디 말도 없이 주변의 들꽃을
한아름 꺾어다 아기의 무덤을 꽃동산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저녁
노을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서산마루에 걸려 있던 햇님도
이미 숨어 버리고 땅거미가 진 지도 오래였다.
상옥은 모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기 무덤에서 떠나지 않
으려는 수빈이를 거의 강제로 달래어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들
도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뭐라고 위로하고 격려할
말이 있겠는가. 차라리 아무 말 안 하는 게 도와 주는 일이었다.
수빈은 그날 이후로 매일같이 먼동이 터오는 새벽이면 아기의
무덤을 찾아갔다. 오솔길을 오르며 길가에 피어 있는 한아름의 들
꽃을 꺾어 가슴에 안고 올라가곤 했다. 그러고는 식사도 거른 채
하루 종일 아기의 무덤 앞에서 서성거렸다 때로는 아기 무덤을
반쯤이나 헤쳐 놓기도 했다. 말 많은 동네인지라 한의원집 며느리
가 아기 잃고 실성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되었다
상옥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약속을 하고 삽과 괭이, 그리고 미
리 사 두었던 아기 장난감들을 지게에 짊어지고 도시락을 준비하
여 아기의 무덤이 있는 선산으로 올라갔다. 상옥과 수빈이는 아침
부터 해가 거의 질 때까지 무덤 주변을 정리하였다. 주변의 나무
를 베어서 그네도 만들고 미끄럼틀도 만들었다. 자연석을 모아다
가 놀이터도 만들고 꽃동산과 연못도 만들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사립문까지 달아 놓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천사의 동산이 되었다
사립문에는 '천사의 궁전'이라는 현판도 달아 놓았다.
상옥과 수빈은 천사의 궁전 앞에 나란히 앉았다.
"수빈아! 이젠 됐지? 우리 집보다 더 아름답고 멋이 있지? 이
제는 너 혼자만 이곳에 오면 안 되는 거 알지? 가끔 나랑 같이
오는 거야. 수빈아! 네 마음 아픈 거 내가 왜 모르겠니?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 아기를 하늘나라로 일찍 데려간 것은 너랑 나랑
둘이서만 다정하게 살라고 그런 걸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누구보
다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잘 살면 되는 거야! 알겠
지?"
오빠! 우리 둘만 행복하게 잘 살면 된다구요? 그게 아니
라는 거 오빠가 더 잘 알잖아요. 오빠는 가문의 종손이잖아. 그리
고 친정집에도 절손이 되고 말았잖아!"
"수빈아, 우리 집은 괜찮아. 나이는 어리지만 동생이 셋이나 있
쟎아. 다만 장인, 장모님 때문에 가슴이 아프지만 다시 생각해 보
면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런데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네 몸을 추스려 . 알겠지?"
상옥은 여러 가지로 수빈이를 위로하며 마음의 안정을 위하여
애를 썼다. 그러나 수빈은 자신이 아이를 못 낳게 된 것을 자책하
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상옥은 그러한 수빈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만 없었다. 상옥은 수빈을 서울로 데려가 복학을 시켜
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복학하여 학교에 정을 붙이게 되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는 서울에 집을 마련해 주었다. 수빈이 부모님께는 미안
한 마음이 들었으나 매일 부모님과 마주치면 수빈이가 불편해할
것 같아 처가와 가까운 이웃에 집을 마련하였다.
"장인어른, 그 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당
연히 제가 두 분을 모셔야 도리인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은 수빈이의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아 할 수 없이 따로 집을 마
련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부모님 뵙기도 죄송하고 본인 마음
도 잠시 헤어져 사는 것이 조금 나을 것 같아 그리 한 것입니다.
언제고 수빈이의 마음이 안정되면 집으로 들어와 장인, 장모님 편
안히 모시겠습니다. "
"김서방 볼 면목 없네. 내 자식이 실허지를 못혀서 이렇게 된
것 같아 사돈 어른댁에도 죄를 진 것이고. 허지만 워쩔 것인가.
저 불쌍한 것을 자네가 건사해 주지 않으면 누가 건사해 주겠는
가 부탁허네."
'수빈이는 제 아네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수빈이를 불행하
게는 하지 않습니다. "
수빈이 아버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수척
해진 얼굴을 적셨다 상옥이 분가해서 처가를 나오려는 이유가 바
로 이런 데 있었다. 수빈이 역시 어른들과 떨어져 산다면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부담감을 조금이라도 잊어 버리게 될 것이다.
상옥과 수빈이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처가와 근접해 있는 장충
동이었다 그 동안의 어려운 사건들로 인하여 상옥의 학교 생활은
엉망이 되었고 학점은 바닥을 헤매이고 있었다. 유급될 상황이었
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빈이가 조금씩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빈의 복학 문제도 해결되어 수강 신청도 했다. 수빈은 이제
스스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아픈 상처를 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상옥과 수빈이 부부의 단란한 행복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
었다.
내 소원에 그대 결코 귀를 막지 않도록!
그대는 내 꿈꾸는 오아시스 아닌가. 그리고
추억의 술 두고두고 마시는 표주박이 아닌가?
-보들레르 머리카락에서
이별, 이런 이별이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날아든 종이 쪽지 한 장, 그것
은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상옥과 수빈의 행복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는 악마의 예고장과 같은 것이었다.
상옥은 대학 1학년 때 신검을 받았으나 징집 연기의 혜택을 받
아 자원 입대를 하지 않는 한 졸업 후에나 입영통지서가 나올 거
라 믿고 있었다. 전혀 생각 닦의 입영통지서였다. 혹시나 하는 생
각에서 병무청에 찾아가 사유를 알아보았다. 병무청의 대답은 싸
늘했다.
시위에 가담하였거나 그럴 가능성이 보이는 학생들에게는 징집
연기 혜택이 취소되었다는 대답이었다.
위정자들의 소행이 한심하고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으나 그들을
탓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상옥 자신
이었다.
이제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는 수빈이를 남겨 두고 어때
입대할 수 있단 말인가. 상옥이야 언제 가도 한 번은 가야 할 길
이었지만 수빈이가 문제였다. 여기저기 찾아가 사정을 알아보았으
나 달리 빠져나을 방법이 없었다. 상옥으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
었지만 육군 대령인 이모부를 찾아가 사정을 말했다. 이모부는 졸
업할 때까진 연기하도록 해보겠다는 희망적인 말을 들려 주었다.
상옥은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까지도 수빈이는 상옥이 징집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들통이 나고 말았다. 아침 일찍이 상옥
의 아버지가 손수 징집영장을 가지고 상경을 한 것이다
'이모부님 만나셨습니까?"
"오냐, 최선을 다해 보겠다 말씀하셨다 너, 데모 많이 했다면
서?"
많이는 무슨 많이입니까 "
"그것이 문제가 되는구나, 그래 입소 날짜는 언제라고?"
"앞으로 이 주일 남았습니다. "
수빈이가 아니라면 까짓거 미련 없이 입대하고 말겠는데 지금
당장 입대하고 나면 수빈이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 것인가를 생
각하면 도저히 발이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수빈은 그날부터 걱정으로 날을 보냈다. 밤이면 자꾸만 상옥의
품으로 파고들고 조그만 틈이라도 생길세라 안겨드는 것이다
"오빠, 어떻게 군대 안 갈 수가 없을까?"
"안 갈 수도 있지."
"어떻게?"
"둘이서 깊은 산 속으로 숨어 버리고 세상하고 등지고 살
면 되지 "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라도 하고 싶어 .
"그러면 우리는 살아도 산 게 아니야! 깊은 산 속 오지에서 화전
이나 일구면서 살 수밖에
"영원히 죄인이 되는 거야."
"오빠! 그러면 내가 오빠 따라갈게."
수빈의 눈빛이 반짝였다.
'싫어 !"
"오빠 훈련소에서 얼마나 있는데?"
"대충 6주쯤 될 거라던데
'6주 끝나면?"
'자대 배치되겠지
"그럼 되잖아. 오빠가 배치받아 가는 부대 부근에 집을 마련해
서 내가 이사를 가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 토요일마다 면회 가는 거지. 현식이 오
빠면회 갔을때도 외박 나왔잖아요. 1박2일
'너, 연구는 많이 했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아니야, 불가능은 없어. 나는 꼭 해내고 말거야 두고 보
라구
수빈의 마음이 오죽이나 답답하면 저럴까 생각하니 상옥 역시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걱정 안 해도 되는 건데 괜히
'! 이젠 안심이다. "
수빈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개구쟁이처럼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했다.
그들은 내일의 일은 내일에 맡기고 적음을 불태웠다 용암이 끓
어 넘치는 격정의 순간이었다
상옥이 이모부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상옥은 혹시나 하
는 생각에 약속한 장소에 시간보다 일직 나갔다. 약속 장소에는
뜻밖에도 이모부가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상옥 아버지도 함께 있었다.
"어떻게 아버님도 함게 계십니까?"
'어젯밤에 올라왔다. "
상옥은 이모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무언가 숨기는 것 같은 묘
한 표정이었다. 이모부는 상옥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입을 열
었다.
"상옥아 일이 어렵게 되었구나. 여러 채널을 통하여 알아
보았으나 문교당국과 국방부의 갇력한 지시 때문에 금년도 입영
대상자 중에서 운동권 학생들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게 되었다
니 너를 도와 줄 수가 없구나"
할 수 없는 일이죠. 이모부님 입장만 곤란하게 해 드려
제가 죄송합니다. "
상옥은 그 길로 학교에 들러 휴학계를 내고 허탈한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수빈은 아직도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앞으
로 일주일 후면 진록색 푸른 제복의 훈련병이 되어 논산 훈련소
에서 비지땀을 흘리게 될 것이다. 아직도 아이를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잠꼬대까지 하는 수빈이를 홀로 남겨 두고서
다음 날 상옥과 수빈은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아무에게도 간
섭받지 않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 무작정 집을 나선 것
이다. 청량리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눈빛으로 의사를 전달할 뿐이었다. 약속된 3년의 이별이겠
지만 그들에게는 너무나 긴 3년 세월이었다. 두 사람은 불안감을
잊으려고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들은 청량리역에서 춘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일은 내일에 맡기고 오늘은 오늘만 생각하자. 오늘은 오늘에
있는 것에 감사하고 내일 일은 내일에 가서 생각하자.
그들은 설악의 깊은 계곡에 텐트를 치고 여장을 풀었다. 조금이
라도 거리가 생기면 영원한 이별이라도 하는 것처럼 늘 가까이서
몸의 일부분이라도 맞대고 있었다. 탁 탁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모닥불 건너에 숨 죽이고 앉아 있는 수빈의 얼굴이 청아하도록
아름답다
"쑤빈아, 이거 받아."
상옥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예금통장과 도장을 내밀었다. 꾀
나 많은 돈이 예금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선물. "
"그 돈이면 나 제대할 때까지 용돈은 할 수 있을 거야 생
활비와 학비는 아버님이 보내 주실 거니까 이 돈은 네 용돈으로
쓰면 돼.
"오빠, 돈이 너무 많아. 꼭 위자료 받는 것 같아 기분 나빠."
"너, 면회 안 올 거니? 면회 올 때도 돈이 필요하잖아. 그러
니까 아무 말하지 말고 받아둬. 알았지?"
상옥은 한사코 사양하는 수빈이에게 떠맡기듯 통장과 도장을
건네 주었다.
"나 오빠 따라간다는 거 그냥 해보는 소리 아니야!"
"수빈아,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야. 그런 생각하지 말고 장인
장모님 잘 모시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나 제대할 때까지."
아니야 나도 따라갈 거야."
'수빈아, 우리 그런 이야기 다음에 하고 노래 한번 하자."
"무슨 노래?"
"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뽕짝 있잖아."
"으응, 그 노인네 노래!"
'그래, 나 하나의 사랑."
그들은 모닥불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안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람하여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나 혼자만을 그대여 생각해주
나 혼자만을 그대여 사랑해주
나 혼자만을 그대는 믿어주고
영원히 영원히 변함없이 사랑해주
여전히 탁 탁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모닥불이 흐릿하게 보였
다 모닥불에 반사된 눈물이 반짝였다.
수빈아, 다시는 울지 말자! 우리의 눈물은 이것으로 마지막이
다. 3년이 길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살아야 할 많은 세월 중의 일
부분일 뿐 영원한 이별이 아니잖니.
"오빠, 한 가지 약속해 둘 게 있어."
무슨 약속?"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오빠는 월남에 가지 않는다고 약속해."
'그래. 절대 월남에는 가지 않을게."
그들은 낙산의 해변가를 거닐었다 저 멀리 수평선으로 아침 해
가 장엄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찬란한 태양이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수빈은 스산한 심정을 떨쳐 버리려는 듯 상옥
의 품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텅 빈 백사장에서 상옥과 수빈은 모래 속에 손을 넣고 다독거
렸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 집다오
모래 속에서 손을 빼면 움푹한 모래 구멍집이 생겼다 상옥의
구멍집이 무너져 내렸다. 상옥은 수빈이를 등에 업고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해변가 청송나무 그늘로 들어가 내려놓고 깊이깊이 포
옹해 주었다. 그들은 청송나무에다가 글씨를 새겼다. '상옥
LOVE', '나의 영원한 아내 수빈'
"아버님 저희들 왔습니다. "
집에 돌아온 상옥과 수빈이 나란히 아버지 방에 들어갔다.
"오냐, 내일이 입대하는 날이지?"
'네, 그렇습니다. "
"새애기가 많이 섭섭하겠구나. 허나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도리
가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이 애비의 마음도 심란하구나."
상옥은 아버지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뭐라 물어볼 수도 없는 일
이었다. 그는 애써 그 생각을 지우려 했으나 좋지 않은 기분이 자
꾸 들었다. 안방에 상옥의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드디어 입
대하는 날이 왔던 것이다.
"상옥아, 집안 걱정은 하지 말고 네 건강에 각별히 유념하여
라"
상옥이 사랑채를 물러 나오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무척이나 안
타까운 표정을 하고 계신 어머니에 반해 아버지는 태연한 척하면
서도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며칠 동안의 아버님 태도를 종합해 보
면 무엇인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인지 통 알 수가 없었
다.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일까.
인원 점검도 끝나자 호송 책임자를 따라 수원 역으로 나갔다. 역
내 스피커에서 씩씩한 군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역 광장은 입영
자들과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가족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틈에 수빈이와 상옥 역시 헤어짐이 아쉬워 서로
를 부둥켜 안고 있었다
상옥은 호송관의 승차를 재촉하는 호각소리에 손수건으로 얼굴
을 감싸고 있는 수빈이를 뒤로 하고 군용 열차에 몸을 실었다. 겉
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상옥의 속마음은 군용 열차에서 뛰어내리
고 싶은 심정이었다.
입영자들의 승차가 완료되자 열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서 열차를 따라오던 수빈이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열차가 커브를 돌자 수빈이의 모습이 상옥의 시야에서 벗어났
다. 아! 이 애타는 이별, 이 3년 동안의 예정된 이별이 영원한 이
별이 될 줄이야.
입영자들은 예정된 시간표대로 새벽 2시에 연무대 수용연대에
도착했다.
수용연대에 도착하여 배정된 막사에 들어선 상옥은 이제 정말
병사가 되었구나 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상옥은 취침! 기상! 취침! 기상을 수십 차례나 반복하고 나서
야 침상에 누을 수가 있었다. 잠을 청해 보았으나 잠은 안 오고
떠나올 때 눈물짓던 수빈의 얼굴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 수빈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나를 생각하고 눈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옥은 하루 종일 긴장과 불안 속에서
지친 마음과 몸이 피곤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몸을 뒤척이다 막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기상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기상! 기상! 선임하사의 싸늘한 외침 소리에 잠이 깬 신병들은
일대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연병장에 나가 인원 점검하고 잘 알지
도 못하는 군가 한 번 부르고 나니 먼동이 터오며 이름 모를 산
중턱에서 안개와 어둠이 갈라지고 있었다.
어둠이 사라지니 온 대지가 빨갛다. 산도 연병장도 모두 황톳빛
뿐이다 수용연대에서의 첫날 아침 식사가 배식되었다. 밥은 시커
먼 보리밥이었다. 퀴퀴한 보리 냄새가 물씬 풍겼다. 반찬이라고는
썩었다고 해도 좋을 신김치에 갈치와 고구마를 듬성듬성 썰어넣
고 스펀지처럼 퍽퍽한 두부를 넣어 끓인 국이 고작이었다.
무슨 놈의 두부가 씹어도 씹어도 푹신푹신한 게 목구멍을 뱅뱅
돌 뿐 넘어가지를 않았다. 보리 냄새와 갈치 비린내가 어우러져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동작 그만! 식사 끝1"
선임하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배식을 받은 지 몇 분도 되지 않았는데
'너희들은 오늘부터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이다. 이제부터
는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이다. 알겠나?"
"예
"대답 봐라! 아침 굶었나? 알겠나?"
"예엣 !"
"좋아! 지금부터 나의 명령에 따른다. 식기를 모두 비운 놈은
우측 침상으로, 밥알을 한 개라도 남긴 놈은 좌측 침상으로 헤쳐
모인다. 실시 !"
'야. 이 새끼들 동작 봐라!"
선임하사가 침상으로 올라와 무차별적으로 군홧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엉덩이, 정강이할 것 없이 마구 걷어차자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양쪽 침상으로 갈라서니 밥을 모두 먹은 사람보다 먹지 못한
사람이 더욱 많았다.
"우측 침상에 있는 놈 중에 양심 불량한 놈은 없겠지?"
"예 엣."
"우측 침상에 있는 놈들은 조용히 앉는다 실시!"
선임하사는 밥을 다 먹지 못한 좌측 침상으로 올라와서는 또
군홧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한동안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질을 해대던 선임하사도 패느라
고 헐떡였다. 마치 삼복 더위에 혀 빼문 미친 개꼴이 된 선임하사
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시방 느덜 배때기에 기름이 꽉 차 있다
그 기름기가 언제까지 갈 수 있나 두고 보기로 하고, 오늘은 느덜
이 오늘 아침에 먹은 이 밥이 워떻게 혀서 느그덜 입으로 들어가
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설명을 허겄다 이것이다. 느그덜이 방금 처
먹다가 남긴 이 밥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고향에 기신 느그 아부지
어무이가 쎄빠지게 일해 갖고 느그덜 맥이라고 세금 내서 사들인
신성하고 소중한 군량미다 이런 말이여. 이 잡것들아. 그런디 냄
새 좀 나고 비위가 좀 상헌다고 안 처묵어야! 나쁜 놈의 새끼덜.
앞으로 두고 보자 이것이여 느그덜 배때기에 짬밥이 안 들어가고
배기나 말이여
그는 거의 한 시간 동안 신병들을 닦달하였다.
신병들은 그날부터 수용연대에서 정밀 신체검사를 받았다. 상옥
역시 신병들과 함께 신검을 받았다. 내일은 신검을 마치고 군번을
받고 훈련소에 정식으로 입소하는 날이다. 그날 밤은 기합도 없어
편안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신병들이
모두 연병장에 집합하였다. 인원 점검을 마치고 중대장의 간단한
주의 사항이 하달되고 있는데 선임하사가 상옥을 불러내었다. 아
무런 잘못도 없는데 선임하사의 호출을 받으니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 같았다.
"김상옥! 너는 열외다. 막사에 돌아가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
지 대기한다. "
상옥은 선임하사의 명령대로 막사에 돌아와 한 시간을 넘게 기
다렸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왠지 불안했다. 뭐가 잘못된 것
일까?
불안하고 초조하여 막사의 창문을 열고 창 밖을 내다보니 같이
입대한 신병들이 트럭에 실려 훈련소로 떠나가고 있었다. 신체검
사에 불합격된 사람들은 어제 오후 모두 귀가조치 되었고 상옥은
신검에서 모두 갑종 판정을 받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열외될 이
유가 없는 것이다.
첫댓글 보고 갑니다........
잘보고갑니다,
^^
감사히 잘 봤습니다~
잼있어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