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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통공[辛亥通共, 1791(정조 15)년] "어용상인의 특혜가 철폐되다"
시전상인의 상업적 특권, 금난전권(禁難廛權)
금난전권은 조선정부가 시전(市廛)에게 부여한 특정물종의 독점적 유통권으로 일종의 상업적 특권이다. 시전이 금난전권을 가지게 되면, 평시서(平市署)와 한성부(漢城府)의 전안(廛案)에 등록되어 해당 물품을 독점적으로 취급할 수 있었다. 만약 전안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이 물품을 매매하게 되면, 시전은 이들의 행위를 금지시키거나, 소유 물품의 압수 및 거래 물품에 대한 세금 징수까지 가능하였다. 시전의 금난전권은 ‘일물일시(一物一市)’의 원칙에 따라, 하나의 물종에 대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동일한 물종을 여러 시전이 매매하거나, 특정 시전의 취급 물종이 증가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이 같은 금난전권은 정부와 시전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탄생한 것이었다. 정부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재정난 해결을 위해 육의전(六矣廛)과 같은 규모가 큰 시전으로부터 국역(國役)이라는 명목으로 특별세를 징수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가로 금난전권이라는 상업적 특권을 시전상인에게 부여한 것이다. 시전상인 역시 비시전계 상인과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선 금난전권이 필요하였다. 16세기 이후부터 한양(漢陽) 등 대도시에는 상업인구가 급증하여, 극심한 상권경쟁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전상인은 상업적 이윤을 독점하기 위해 정부와 결탁하여 사상(私商)을 규제하고자 하였다.
금난전권(禁難廛權)의 확대와 물가상승
시전의 금난전권은 처음에는 육의전에만 부여하였다. 하지만 금난전권의 적용범위는 점차 확대되어, 일반 군소시전에게도 주어졌다. 이들은 지방의 소도시와 농촌에서 생산되어 한양으로 유입되는 상품을 독점하여 농민과 수공업자의 생산품을 시장에서 차단하고 상업적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처럼 금난전권의 부여대상이 확대되면서 한양의 빈민이나 한양 인근의 영세농 등 소상인들의 독자적인 난전활동이 위축되었다. 소상인들은 군문의 군졸이나 세도가의 하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있었는데, 이들은 상업활동을 위해 시전의 금난전권에 대항할 수 있는 권력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상업행위를 통해 얻은 이윤의 상당부분을 고위관료에게 뇌물로 주는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고위관료는 난전(亂廛)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난전을 단속하는 한성부조차도 난전행위를 모른체 할 정도였다. 시전상인들 역시 세력이 있는 난전상인에게는 금난전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난전활동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권력층이 난전을 보호하는데는 한계가 있었고, 시전과 결탁된 정치세력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난전상인은 상행위의 합법성을 인정받아서 적극적인 상업활동을 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난전상인은 스스로 공인(貢人)이 되거나, 시전상인으로 변모하였다. 이는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상품이 생겨남으로써 시전이나 공계(貢契)(貢契)의 창설이 가능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이로 인해 한양에서는 시전상인과 난전상인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 같은 신전 창설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였다. 정부는 국가재정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새롭게 생겨난 시전과 공계에 국역을 부담지우는 대신, 그들에게도 육의전과 동일한 금난전권을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금난전권을 이용하여 특정 상품을 독점적으로 매점매석하여 상당한 상업적 이익을 얻었다.백성들의 생필품인 소금의 경우 염전인(鹽廛人)(鹽廛人)이 이익을 독점하여 소금상인이 실업할 지경이라든가, 소금가격이 이전보다 7~8배나 올랐다는 이야기는 시전상인의 독점적 매매로 인한 폭리 획득과 그에 따른 폐단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게다가 시전상인은 수공예품의 원료를 매개로 수공업자들을 자신들에게 예속시켜, 수공업자들이 제조한 물품의 판매권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입전(立廛)(立廛)은 휘양을 만들어 팔고 있던 모자장을 고발하였는데, 그 이유가 휘양의 재료에 입전에서 취급하는 비단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자장이 장도를 만들어 팔면 도자전(刀子廛)에서, 총장(驄匠)이 말총제품을 팔면 상전(床廛)(床廛)에서, 야장(冶匠)이 철물을 만들어 팔면 잡철전(雜鐵廛)에서 난전이라 고발하여 그 물건을 독점 판매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이 시전상인의 금난전권 행사는 영세상인 뿐만 아니라, 소비자에게도 큰 문제를 안겨주었다. 도시민의 생필품의 대부분이 시전상인의 독점물품이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매매가 어려웠다. 또한 수공업자의 원료와 생산품도 금난전권으로 인해 시전상인을 통해서만 확보 및 판매가 가능하였다. 이처럼 시전상인에 의해 한양의 상권이 독과점체제가 되면서 물가는 크게 오르게 되었고, 결국 도시민들의 생활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신해통공(辛亥通共)의 시행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이 영세상인, 소상품생산자, 수업업자, 도시민에게 주는 타격이 커 갈수록 이들의 금난전권에 대한 반발이 커져만 갔다. 그 결과 정부는 기존의 금난전권을 제한 또는 폐기하는 정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우선 1724년에 ‘난전속공(亂廛屬公)’의 원칙이 폐지되었다. ‘난전속공’은 난전상인들이 불법적으로 매매하는 상품을 정부에서 몰수하는 처벌이다. 이러한 처벌을 폐지하여, 정부는 난전의 금지정책은 유지하였지만 상품을 몰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1727년에는 시전상인이 직접 난전을 단속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1741년 이보혁(李普赫)(李普赫)은 통공정책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그는 한양에서의 상업의 폐단으로 세도가의 난전과 신설 시전의 지나친 금난전권의 행사로 인한 소상인의 피해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물종의 금난전권을 제외한 소소한 물종의 시전을 폐지하고, 금난전권의 범위를 한양내로 제한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정부의 국역 부담을 지고 있던 시전들을 혁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급격히 발달한 상품경제를 통해 얻어지는 이윤의 일부를 국가재정으로 흡수하는 통로가 시전과 공인인 상황에서, 국가재정이 악화될수록 시전의 중요도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설 시전이 일으키는 폐단이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 영조(英祖)와 정조(조선)(正祖) 연간에 통공정책이 3차례에 걸쳐 실시되기에 이른다.
처음에 실시된 통공정책은 1764년 10월 홍봉한(洪鳳漢)의 건의에 의해서였다. 이 때 시행된 통공정책은 금난전권의 행사범위를 한양 안으로 제한하였고, 특정 시전에게만 금난전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소소한 상품을 매매하는 소상인은 일체 난전이라 칭하여 금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1768년에는 통공정책의 대상을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으로까지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가 있은 후에도 시행명분이었던 물가상승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시전의 반발이 큰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통공정책은 철회되었다.
두 번째 통공정책은 1786년에 시행되었다. 이 때 시행된 통공정책은 시전의 규모와 취급물종의 중요도, 국역부담의 유무를 고려하여 시전의 금난전권 인정 여부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금난정권을 상실한 시전상인의 반발로 인해 1790년 이전에 철회되었다.
세 번째 통공정책은 1791년에 시행된 신해통공이다. 신해통공은 1791년이 신해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채제공(蔡濟恭)(蔡濟恭)은 시전의 금난전권으로 인해 소상인과 소상품생산자가 자유로운 상행위를 할 수 없어 유통구조가 원활하지 못하고, 극심한 물가상승으로 인해 도시민의 생활이 어렵다고 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상품의 자유로운 매매를 위해 30년 이내에 설립된 작은 시전은 폐지하고,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였다.
채제공의 주장에 대해 병조판서 김문순(金文淳), 형조판서 조정진(趙鼎鎭), 한성판윤 이치중(李致中), 행부사직 조심태(趙心太), 훈련도정 서유대(徐有大), 한성좌윤 김시묵(金時黙) 등 조정대신은 시전의 금난전권의 횡포가 심하므로, 시행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통공정책의 시행을 명하였지만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러자 채제공은 10여 일 후에 자신의 주장을 일부 수정하였다. 우선 30년 내에 설립된 작은 시전의 폐지에 대해선, 30년 내에 설립된 시전의 수가 적고,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폐지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자는 것에 대해서도 채소전(菜蔬田)이나 어물전(魚物廛) 같이 백성들의 생활에 긴요한 시전은 혁파하거나, 명칭만 남겨두고 금난전권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1월 통공정책의 시행을 주장한 이후에 생선값 등의 물가가 이전보다 하락했으니, 통공정책을 실시하면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 역시 채제공의 주장은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긴요한 물건을 판매하는 시전의 혁파를 말한 것이고, 금난전권으로 인한 폐단이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에 통공정책에 찬성하였다. 결국 정조와 채제공이 중심이 되어 신행통공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해통공의 영향
1791년 이전에 2차례에 걸쳐 시행된 통공정책과 달리 신해통공은 지속적인 정책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금난전권이 폐지된 시전상인들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해통공에 대한 시전상인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는 시전의 국역부담을 줄여주고자 하였다. 특히 당시 평시서가 시전상인에게 주는 부담이 컸기 때문에, 평시서를 혁파함으로써 시전상인의 부담을 줄여주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정조의 반대 때문에 시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신해통공 시행 이후에도 시전상인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는 조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자 시전상인들은 신해통공에 크게 반발하였고, 정부내에서도 일반 시전 중에서 규모가 큰 시전에 한해 금난전권을 다시 주자는 주장이 제기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신해통공 시행 명분이었던 물가상승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상에 의한 도고(都賈)행위로 신해통공 이전보다 물가는 더 올랐다. 사상은 그동안 축적된 자본력을 활용한 매점매석을 통해 막대한 상업적 이윤을 획득하였다. 그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형성된 영업망을 통하여 상품의 출하와 집산, 물가 변동에 관한 신속한 정보를 확보함으로써 효율적인 상업활동을 하였다. 특히 이현(梨峴)과 칠패(七牌)는 사상의 근거지로, 거래되는 물량이 시전에 비해 10배나 된다고 할 정도였다. 이현과 칠패의 사상은 원산(元山) 등지에서 반입되는 건어물 매점을 위해, 누원점(樓院店)의 도고상인과 결탁하여 물품을 중도에서 매입하고 비싼 가격에 판매하여 폭리를 취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도시민의 생계와 직결된 미곡을 매점하여 쌀값을 의도적으로 올려, 한양의 쌀값은 사상인의 손에 달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이 뿐 아니라 박지원(朴趾源)의 소설 『 허생전(許生傳)』에 등장하는 허생이 매점행위를 통해 백만냥을 벌어들이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사상의 매점행위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사상의 매점행위를 단속하고자 하였다. 채제공은 한강 인근의 부민(富民)들의 땔나무 매점을 단속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채제공은 생강값이 갑자기 올라 백성들이 약재에 사용할 생강을 구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사상의 매점행위를 엄히 단속할 것을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김화진(金華鎭)은 사상의 도고행위를 포도청(捕盜廳)에서 적발하기가 쉽지 않으니, 포도청에서 사상의 차인(差人 : 장사를 돕는 일종의 직원)을 먼저 잡으면 매점행위를 금지시킬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 밖에 개성유수 구상(具庠)은 형조(刑曹)와 한성부에서도 사상의 매점행위를 적극적으로 단속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상이 포교(捕校)들과 결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정대신의 비호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사상의 매점행위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신해통공을 시행하여 자유로운 상품유통의 확대를 통한 물가하락을 겨냥했던 정부의 의도는 사상의 광범위한 매점행위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사상의 매점행위가 심해지자 이들에 대한 반발이 심해졌다. 1833년 서울의 미곡상인들이 한양시내의 미전(米廛)과 결탁하여 미곡을 매점한 결과 쌀값이 폭등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도시의 빈민층은 미곡을 매점한 가옥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불만은 지방으로 확산되어 농촌시장에서 성장하고 있던 소생산자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홍경래의 난(洪景來-亂) 이후 민심 수습을 위해 사상의 매점행위를 혁파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개항 이후 외국상인들의 침탈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기까지 사상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