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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것
신 10:12-22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21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22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신 10:12-22 / [하나님의 본심]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길만 따라서 걸어가며 마음을 다 바치고 정성을 다 쏟아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주님의 명령과 계명에 따라서만 사십시오. 여러분이 그대로만 하면 복을 받아 행복해질 것입니다. 14)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들과 땅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것입니다. 15)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의 조상들만을 사랑하셔서 세계 만민 가운데에서 그들의 후손인 여러분만을 오늘날 이처럼 선민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이제는 거역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육체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마음에도 할례를 받아 순종하십시오. 17)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는 주님이시며 큰일을 많이 하시고 힘이 많으시며 두려우신 분입니다. 주님은 불공평하게 어느 쪽을 편드시는 일도 없고 뇌물을 받으시는 일도 없습니다. 18) 주님은 고아와 과부에게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여러분과 함께 사는 외국인들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십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도 외국인들을 잘 대우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애굽 땅에서 외국인으로 생활하였습니다. 20)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그분만을 섬기고 따르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십시오. 21)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고 섬길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크고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실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모두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22) 여러분의 조상들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에는 겨우 70명이었으나 이제는 주께서 여러분을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12-15)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12-13). 언뜻 보면,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 중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가장 먼저 말씀하신 “하나님을 경외하여”라는 부분은 더욱 하나님 중심의 요구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네 행복을 위하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도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도를 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지켜야 하는 이유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16). 죄와 허물이 많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16-2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기록된 대로 “마음 가죽을 베는 것”입니다(렘 4:4). 사도 바울은 이를 가리켜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으로 구별했습니다(롬 2:28b). 표면적 유대인은 육체에 할례를 행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은 원하는 할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을 원하십니다. 이면적 유대인은 할례를 마음에 합니다. 마음으로 잘라버려야 할 것을 자르고, 마음으로 끊어버려야 할 것을 끊은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목을 곧게 하지 않습니다(16).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그네를 사랑합니다(19).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합니다(20).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런 사람은 한없이 약했던 이스라엘을 한없이 풍성하고 강하게 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22).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행 7:51).
적용: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당신의 행복을 위하여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마음의 할례가 무엇입니까? 이는 법조문이 아닌 영에 의하여 마음에 받는 할례라고 말할 수 있는데(롬 2:29), 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음의 할례는 몸에 가하는 외적 할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된 혼과 마음과 영의 올바른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룩함’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아버지께서 온전한 것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며, 마음과 삶이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으며 이 할례를 받은 자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자요 죽은 자가 되지만 하나님께는 착하고 성실한 종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중대한 증표입니다(마 25:21). 김동환 박사의 ‘풀어쓴 웨슬리 표준설교 44편’중에서
< 설 교 >
애경(愛敬)하는 날
신 10:12-13 / 최성규 목사
설날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로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 인해 행복한 날, 가족끼리 축하하는 날, 후손들에게 가장 귀한 것을 남겨주는 날입니다. 이런 설을 단지 노는 날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설은 효 앤 하모니(Hyo & Harmony) 하는 날입니다. 효 앤 하모니(Hyo & Harmony)란 사랑, 공경, 존경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인생의 기본입니다. 기본이 튼튼할 때, 우리 인생은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설날을 맞아 우리 인생의 기본을 다시 다지므로, 신앙과 신념을 물려주는 믿음의 가문이 됩시다.
첫째, 사랑
사랑이 우리 인생의 기본이자, 신앙의 기초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기적, 사랑 없는 능력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가르칩니다. 사랑할 때, 우리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 받을 때, 우리 인생에 행복이 넘칩니다. 그러나 사랑하되, 아무나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돈입니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사랑할 대상’은 아닙니다(딤전 6:10).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신 10:12)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때, 사랑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때, 자기 자신을 바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에 기쁨이 넘쳐납니다(시 16:11).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고 말씀합니다. 가끔 부모가 밉다는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성장한 어른 중에도 부모에 대한 아픔을 지우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사람은 상처로 가득합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져도 이와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자, 가시와 엉겅퀴뿐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가 깨지면 자기 힘으로 풀 수 없는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살게 됩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영혼이 구원받고, 생활이 구원받습니다. 2010년, 최고의 설 선물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설 명절에 예배부터 드린 성도들은 복 받은 성도입니다. 이런 복을 가족과 이웃도 받게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 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를 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앞으로도 계속 은혜를 주기 원하십니다(롬 8:32).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모든 것을 받아 누립시다. 우리 가정이 작은 천국이 되고, 우리 가문이 믿음의 명문가가 됩니다.
둘째, 공경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른의 말씀을 새겨들으면 실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로 이익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을 공경했습니다. 당시 엘리 제사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했고, 아들들의 잘못 때문에 백성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을 공경했습니다. 이런 사무엘에게 자다가 떡이 생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처음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인지 모르고 엘리에게 뛰어갔습니다(삼상 3:4,5). 그렇게 엘리 제사장에게 세 번을 뛰어갔고, 부를 때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짜증내지도,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엘리는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고, 사무엘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결국, 사무엘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 가운데서 사무엘은 엘리 가문이 망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말씀을 듣고도 사무엘은 여전히 엘리 제사장을 공경했다는 사실입니다(삼상 3:16).
오늘날 많은 사람이 어른을 어른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돈이 있어야 어른 대접 받는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많은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어른을 공경하는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늙었다는 이유로 어른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23:22)고 명령합니다. 어른 공경이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32)고 명령하십니다. 자녀에게 어른 공경을 가르치는 설이 됩시다. 어른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욥 12:12). 어른을 공경하면, 지혜와 명철을 전수받습니다. 우리 모두 자녀를 영악하게 키우지 말고, 영특하게 키웁시다. 자기만 알고 지식만 있는 아이는 영악해지기 쉽지만, 어른을 공경하고 지혜가 있는 아이는 영특해집니다. 어른 공경이 복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복을 우리의 자녀에게 물려줍시다.
셋째, 존경
한 사회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존경심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면 됩니다. 존경심이 있는 사회는 미래가 있습니다. 반대로, 존경심이 사라진 사회는 야만사회입니다. 존경심이란, 인간에 대한 예의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존중입니다. 존경심이 있을 때, 건강해질 수 있고, 정직해질 수 있습니다. 부흥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면, 멋진 장군이 되고 싶어집니다. 김연아 선수를 존경하면, 아름다운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이처럼 존경심은 내 인생의 자양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존경심은 사회를 맑고 밝고 건강하게 하는 사회 에너지입니다. 존경심이 있다는 것은 꿈과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 존경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를 없애려다가 권위까지 없애버렸습니다. 존경심까지 없애버렸습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돌아갑니다. 선생님을 존경하기보다는 욕하고, 미워해보십시오. 친구끼리 존중하기보다는 왕따시켜 보십시오. 그 마음에 상처와 증오만 남습니다.
우리 사회에 존경심이 되살아나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서로 존경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존경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노사가 서로 존경하는 회사가 되어야 합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존경하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여와 야가 서로 존경하는 정치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존경하는 것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건강한 시민의식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 바로 옆에 있는 사람부터 존경합시다. 혹시 가까울수록 가볍게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면서까지 구원하려는 존재입니다. 너무나도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입니다. 이런 귀한 존재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존경합시다. 인간에 대한 존경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입니다. 내가 남을 존경하면, 남도 나를 존경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거룩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서로 존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번 설날에 애경(愛敬)합시다. 떡국 한 그릇 먹었다고 나이 한 살 먹는 것이 아닙니다. 애경(愛敬)할 때, 우리는 영육 간에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됩니다. 우리 가문이 믿음의 가문으로 번창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
신 10;12-13 / 김양인 목사
오늘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당부한 유언과 같은 말씀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으려 합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고별사와 같은데, 구구절절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간곡한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당부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란 표현은, ‘너를 창조하시고 너의 호흡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활동하는 것은 우리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결과입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흡을 거두시면 즉시 죽어 먼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시 104:29).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경외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레’(ארי) 인데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라는 뜻입니다. 경외심은 피조물인 사람이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할 때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할 분으로 알고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단지 강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함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시기를 “1)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 하셨을 때, 지체 없이 순종했습니다. 정든 고향과 아버지와 형제들과 생활의 근거를 다 버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기에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호소하면서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 18:27)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가 티끌 같음을 절감했던 사람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알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 3:8)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담대한 사람들은 왕이나 군인들이 아니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전하라고 명하신 말씀이 축복에 관한 것이든 저주에 관한 것이든 상관치 않고 가감 없이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악한 왕과 권세가들, 심지어는 백성들조차 선지자들을 핍박했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요시아 왕은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을 잘 섬겼으나 그가 죽고 나자 신하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나 아세라 목상과 바알을 섬겼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보내셔서 성전 뜰에 모인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죄를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요시아 왕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도리어 백성을 시켜 성전 뜰에서 스가랴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스가랴는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으므로 돌에 맞아 죽는 것을 겁내지 않고 사명을 다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알 때 모든 시험과 방해를 이기고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 놓고 죄를 짓는 것은 그들 속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니, 망설임 없이 악을 행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소련이나 중국이나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소련이나 중국의 경우에는 수백 명이나 수천 명 정도가 아니라 수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이는 북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고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유명한 캄보디아의 대학살 역시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것입니다. 1970년대 중반에 공산주의자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에 의해 전 국민 8백만 중에 약 250만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공산주의자들이 단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한 것은 그들은 무신론자들로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그들의 사상이 인류에게 수많은 해악을 끼쳐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양심이나 하나님이나 사랑 따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신론 유물사상이므로 사람의 영혼을 인정하지 않고 정신이란 단지 뇌의 작용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적화야욕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언젠가 통일을 이루어야 하지만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주의 통일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살아계시며 인간들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전 12:14). 히브리서 9장 27절에 이르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고,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건강과 힘을 자랑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달리 없습니다. 요즘 백세 시대라고 하면서 마치 백세까지도 살 것처럼 자신하는 사람들 역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결국 죽어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백세를 산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솔로몬은 말씀하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고 했습니다. 이 권면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감으로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기본이지만 이와 더불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와 같습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공경합니다. 그러나 공경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이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당부하기를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6장에서는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있는가 하면, 거짓된 사랑도 있습니다. 진품 사랑이 있고, 모조품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사랑은 마음을 다하는 진실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을 다해 진실되이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하는지는 나 자신이 먼저 압니다. 우리의 폐부를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는 더욱 잘 아십니다. 사실이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신자노릇을 잘할지라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 신자는 명목상 기독교인일 뿐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면서 많은 핑계를 대지만 이유는 한 가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지 않고 반신반의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요 5:40-42).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미신종교와 같이 단지 복을 받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받지만, 복 받는 것이 신앙의 첫째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시며 우리 생명의 주관자시며 우리의 구원자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크고 풍성한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말씀하기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우리 인생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찬송시가 말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머리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우리 편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뿐 아니라 성품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성품’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네페쉬’는 영혼 또는 생명 또는 인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가 생명을 다해 또는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가 8장 6절에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고 했습니다. 유미성 시인의 ‘나보다 먼저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라는 감동적인 시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나보다 먼저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나를 안아주신 사람입니다.
내 눈물 닦아 주시며
가슴으로 함께 울어주신 사람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내 삶 속으로 들어와
작은 등불 하나 밝혀 주신 사람입니다.
눈부신 세상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게 해 주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내 목숨 버려야 해도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나보다 먼저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이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시인은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목숨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같은 사랑을 요구하실 충분한 자격이 있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파격적인 사랑을 베풀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만 하면 누가 강권하지 않더라도 자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할 때에는 강요가 효과를 볼 수도 있지만 사랑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하여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힘’은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힘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시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또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성경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했습니다(요 2:).
공생애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열심이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그만큼 사랑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고 하셨습니다.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헌신합니다. 그러고도 자식을 사랑하니까 힘들어 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데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을 위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순종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지켜 행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4)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선민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그는 주저 없이 즉각적으로 떠났습니다. 백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에도 아내 사라와 상의하지 않고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가진 신자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교회에 나오는 것부터가 순종의 행위입니다. 또한 생활 속에서 기독교인답게 살려고 힘쓰는 것도 순종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순종의 수준입니다.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지냈던 이스라엘 자손은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매일 같이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언제나 성막 위에 빛나는 구름이 머물러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보살펴 주시는 손길을 날마다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힘쓰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시내산 위로 십계명 돌비를 받으러 올라간 사이에 아론을 위협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섬겼습니다. 모압인들의 초청을 받아 우상의 축제에 참석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고 모압 여인들과 더불어 범죄한 적도 있었습니다. 열 정탐꾼의 불신앙의 보고를 듣고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불순종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은 일 년 남짓한 기간이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는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성도님들,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약속하신 복을 받기 원하시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30:9)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노력으로 살아가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살핌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듯이, 우리가 애쓰고 힘쓴다고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수고했으나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가 온갖 수고를 다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으므로 그랄 지방에서 농사를 지었더니 백배나 거두었습니다.
복 받는 비결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켜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육 간에 넘치는 복을 내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할까?’라는 주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성공해야 인생에서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귀히 여기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내려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하여
신명기 10:12-22 / 윤영택 목사(옥스포드 교회)
모세 오경의 다섯번째 책 신명기는 그 이름을 왜 신명기라 부르게 되었을까요? 우리말 성경 한자어 이름을 풀이하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神)의 명령을 기록한 책이란 말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명령을 기록한 책이란 뜻으로 신명기(新命記)일까요? 이 두 가지는 분명히 아닙니다. 어떤 ‘신’자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말 성경의 신명기는 영어성경의 Deuteronomy와 같은 의미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어떤 책의 첫 머리에 나오는 단어나 구절 또는 그 책의 중심 인물의 이름을 따서 책 이름을 짓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통상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은 신명기 17:18에 나오는 ‘이 율법서를 등사(복사)하여’라는 구절을 근거로 이 책의 이름을 ‘듀테로노미온’(Δευτερονόμιον, Deuteronomion)이라 불렀습니다. 이 말은 ‘제2의 율법’또는 ‘율법의 반복’이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어 역본들이 70인역을 따라 Deuteronomy 라 이름하였고 대다수의 서양 번역본들도 70인역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개역 성경 역시 그 명칭을 의역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자세하게 풀어 설명한 책이라는 뜻으로 申命記라 이름하였습니다. 이때 신명기라는 이름에 쓰여진 신(申)은 거듭하다 또는 반복하다는 뜻이니 신명기는 앞선 율법서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기록된 계명들을 반복하거나 자세하게 풀어 재해석하는 책이란 뜻이 됩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언약의 주역들이 40년 세월 동안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사라져간 이후 율법에 익숙하지 않은 신세대가 가나안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을 때 율법을 재교육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가나안 땅이 바라다 보이는 모압 평지에 신세대들을 모아놓고 시내산에서 받았던 율법들을 다시 한 번 자세하게 설명함으로 약속의 땅을 얻을만한 성숙한 백성으로 준비시켰습니다.
신명기에는 모세가 선포한 세편의 설교가 수록되었습니다. 모세는 이 설교에서 첫째, 구세대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을 강조하였고, 둘째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본분이며, 마지막으로 오직 이것만이 복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명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 도리를 설명한 생활지침서이며, 어떻게 하면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가 교훈하는 축복의 안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본문 10:12-22은 모세의 두번째 설교에 나온 내용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신명기 전체에 반복하여 자세하게 펼쳐지고 있는데 오늘 읽은 말씀 속에 그 중심이 잘 담겨있습니다. 12절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함께 나누려는 말씀의 제목이 ‘나의 행복을 위하여’입니다. 본문에서는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시고 잘 지켜 행하라 명령하신 것은 그것으로 우리를 속박하여 노예처럼 살게 하려 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엄한 규정을 내려 고통을 안기고 억압하는 폭군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편안하게 잘 사는 꼴이 보기 싫어 흥을 깨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고 인간다운 삶,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법 테두리 안에서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서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계명을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였을 때 우리가 누릴 행복을 염두에 두고 주신 사랑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는 말을 합니다. 법을 무시하거나 교묘하게 이용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법에 저촉될 일을 하지 않고 일정한 법 테두리 안에서 아무런 불편함 없이 사는 선량한 시민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공공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양심불량자들에게는 법이라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귀찮은 존재가 됩니다.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나쁜짓 저지르려니 얼마나 귀찮고 불편겠습니까? 하지만 남을 배려하며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할 줄도 알고 섬길 줄 아는 사람에게 법이라는 것은 속박의 도구가 아니라 자유와 행복을 보장 받는 유익한 수단이 됩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갑갑하고 불편하다고 자유를 외치며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순간 자유가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물고기에게는 물속이 마음껏 헤엄치고 먹을 양식을 공급받는 자유와 행복의 터전입니다. 도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에게 교통 신호등은 나의 자유를 방해하는 불편한 것이 아니라 나와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안내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질주한다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을 안겨주고 사고를 일으키고 맙니다. 나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법질서를 깨뜨리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혼란과 불행을 가져오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명의 정신이 그러하며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이 곧 나와 우리의 행복을 위함이라고 하신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십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의 율법서에 수 많은 조항들이 있지만 오늘 말씀에 그 내용이 압축되어 간단하게 설명되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들에게 먹을 것과 의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너희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 중에 어떤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요약해주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율법의 중심 주제이며 오늘 읽은 신명기에 언급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신세대들이 가나안에서 누리게 될 행복을 위해 이 두 가지 큰 계명을 잘 지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합니까?
이스라엘이 떠난 애굽은 하나님의 나라와 반대되는 죄악 세상을 상징합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자유인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히브리인들을 종으로 부려 자기들의 편리를 얻어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노동력과 생명을 담보로 자기들의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을 떠난 히브리인들은 더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며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법이 아니라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새로운 백성이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그곳을 떠났으면 다시는 그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그 땅을 향해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 자주자주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불평하며 목이 곧은 백성으로 살았습니까?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 감시와 억압 속에서 감독자의 눈치를 보며 채찍이 두려워 억지로 복종하던 습관이 몸에 배였던 것은 아닐까요? 자발적인 순종과 섬김으로 행복감을 누리는 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히브리인들에게는 이런 노예근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강제와 폭력에 시달리던 비참한 노예들에게 하나님은 너그러운 주인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압제자의 손에서 건져내어 자유를 주셨을 뿐 아니라 자비로운 주인의 보호 아래 자발적인 순종과 섬김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충성스럽게 주인을 섬겨도 여전히 바로의 노예일 뿐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주인이신 하나님은 자발적인 순종에 따르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더 이상 종노릇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출애굽의 정신입니다. 출애굽은 새로운 삶을 향한 출발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사랑하여 만민 중에서 택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사랑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사랑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그들에게 부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의 종노릇 습관을 벗어던지지 못한 이스라엘은 자비로우신 새주인을 신뢰하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죄에게 종노릇하던 옛생활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활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그리워하며 틈만 나면 되돌아갈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자발적인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며 억지로 복종하기 때문에 예배와 섬김이 의무가 되고 즐거움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행복하지 않고 입을 열면 불평과 원망이 습관적으로 터져나옵니다. 몸은 나왔지만 마음과 정신은 아직 애굽의 바로에게 붙들려 있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갑자기 마음의 할례 이야기를 꺼내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할례는 언약의 백성을 상징하는 의식이었으며 몸에 새겨져 겉으로 드러난 표시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율법 준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하십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될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수하여 육신의 할례를 행하며 각종 제사와 의식을 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겉모양을 자랑하고 목이 곧아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질 태도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예배의식이나 세례증서보다 그 마음의 동기가 선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억지 의무감과 남에게 보이려는 마음으로 드리는 천만번의 제사보다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따라나오는 순서가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사랑하는 분이 아니시며, 뇌물을 받고 구원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주셨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행동으로 보이라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제일 순위였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감정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합시다’하고 목소리만 높이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라 댓가를 지불하는 희생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됩니다. 사회의 가장 약자층인 고아와 과부의 사정을 알아주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애굽에 있던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었던 종이었고 나그네에 불과했었습니다. 자유인이 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편안하게 살게 되거든 과거에 나그네로 있던 시절을 기억하며 나그네들을 영접하고 사랑을 베풀라 하십니다. 약자를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는 사랑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자발적인 순종과 섬김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외국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우리에게 실감나는 말씀입니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곳에 사는 나그네들은 늘 불안합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나 불법 체류자들에 대한 우리 국민의 반응은 상당히 냉담한 편입니다. 한국 남성들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들 특히 동남아 지역 출신 아내들이 겪어야 하는 차별의식과 냉대의 아픔은 우리가 영국에서 겪는 어려움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서양 백인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호의적이지만 피부가 검은 사람이나 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은 우리가 보기에도 비인간적인 면이 많습니다. 백인과 동남아인이 각각 서울 강남 도심에서 지도를 들고 길을 묻을 때 백인 관광객에게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서도 기대 이상의 친절을 베풀지만 동남아인의 도움 요청에는 한마디 대꾸도 해주지 않고 귀찮은 듯 피해가는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우리 한국인의 양면성을 보면서 참 부끄러웠고 그 동남아인에게는 많이 미안했습니다. 피부 색깔과 외모 때문에 이유 없이 듣는 욕설과 무시와 차별은 우리 사회에서 하루 속히 사라져야 할 모습입니다.
이방 민족에 대한 편견과 경계심이 유달리 강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외국인들을 부를 때 뒤에 꼭 ‘놈’자를 붙이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우리도 전에 필리핀이나 태국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떨어졌던 시절에 근로자들이 독일과 중동으로 나가 돈을 벌었고 아메리칸 드림을 따라 미국에서 고생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좀 살만한 나라가 되고 보니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 근로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찾아 우리 땅에 와서 생활합니다. 그런데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한 세대 전 우리의 가난했던 시절을 잊고 우리 나라에 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주 최씨 사성공파 30세손 최모씨가 동남아 근로자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것 때문에 각종 사회적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KBS TV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적이 있답니다. 28살 먹은 최씨는 외모 때문에 어딜 가든 사람들에게 반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너 한국말 할 줄 알아?’하며 초등학생들까지 다짜고짜 반말을 하고 심지어 자기가 다녔던 초등학교에 갔는데 아이들이 돌맹이를 던지더랍니다. 최씨가 한국말을 모를거라고 생각한 몰지각한 사람들이 대놓고 ‘너희 나라로 꺼지라’는 욕설을 퍼붓고 길가에서 실수로 서로 부딪히면 ‘재수없다’는 등 쌍욕을 먹어야 한답니다. 이런 비슷한 일을 우리가 영국에서 당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영국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한국에 돌아가면 외국인 근로자들이나 다문화 가정 이웃들에게 따뜻한 마음 나누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이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멋진 예배당에서 품위있게 예배를 드리고 나왔을지라도 길거리에서 만난 나그네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지 못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헛된 겉치레일 뿐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을 떠나온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뭔가 다른 삶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세상의 방식처럼 나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나를 낮추며 섬김으로 얻는 다른 차원의 행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말씀 순종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것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나를 낮추고 희생하여 죄인을 구원하시고 영생을 선물하신 주님의 삶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여러분이 몸 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그런 사랑으로 섬김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통독달력 1월 주제가 ‘섬김’이었습니다. 거기 나온 글을 기억하십니까? ‘섬김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는 이런 섬김으로 이웃에게 행복을 선물하실 뿐 아니라 섬기는 나 자신이 더 큰 행복으로 가득하게 됨을 직접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뇌물을 받고 불의를 눈감아 주며 정의를 굽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공경 받는 분이 아닙니다.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기준으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우리 역시 사람의 외모를 따라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자녀 삼으신 그 사랑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행복은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것보다 크고 풍성하게 됩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 8:22 / 김양인 목사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수십 년 동안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어도 신앙의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로 알려진 것인데, 그 11절에 이르기를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모세 오경을 읽어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얼마나 충성스럽게 지켜 행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만큼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겼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지 하나님께서는 소돔 성을 멸하시기에 앞서 그를 찾아오셔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소돔 거민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고, 그 성 중에 의인 열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않겠노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 18:27)라고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는 자신이 ‘티끌’처럼 한없이 미약함을 절감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마음가짐입니다.
구약시대의 위대한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사야 역시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던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뵙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그때의 일을 이같이 진술합니다. “1)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자신의 부정함을 절감하고 죽게 되었다고 절규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죄의 은총과 함께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이사야는 불신앙의 시대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종으로 충성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 역시 주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고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아침,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가에 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침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는데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였습니다.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셔서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대답하기를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하였더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가 물에 잠길 정도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를 보았을 때, 시몬은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이 단지 훌륭한 선생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깊이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기를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셨고, 그는 그 시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면 신앙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신앙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사상 속에는 하나님이 없으므로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면서 재미를 맛봅니다. 날이 갈수록 인간들은 더 깊이 타락할 것입니다. 심각한 점은, 기독교인 가운데도 세속화되어 가는 신자들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한 것처럼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빌 2:12).
오늘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아울러 가져야 할 또 한 가지 신앙 자세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생활 40년을 마칠 즈음에, 모세는 백성을 불러 모으고 고별 설교를 하며 이같이 당부했습니다.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손바닥과 손등처럼 언제나 함께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든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두 가지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거짓된 것이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서 동시에 부모로서의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동시에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분이면서 동시에 사랑이 한량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자음 받았으므로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은 동식물과 달리 양심이 있어 선악을 분별하고 이성이 있어 사리(事理)를 이해하는데, 이같은 존재는 이 세상에 사람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나 곤충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생명을 누리게 하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의 노력으로 사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와 마시는 물, 먹는 양식, 땅이나 바다에서 채굴하는 천연자원 할 것 없이 어느 것 하나 인간들이 만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것들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렇게 말하면,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제껏 내 힘으로 살아왔습니다” 하고 대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당부를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17)…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 8:)고 했습니다.
한편, 성도들은 지금까지 언급한 것 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구세주로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다름 아닌 사랑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요한일서 4장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같이 언급합니다.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대속의 죽음을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지만, 죄인들을 위해 죽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죄인들 가운데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실에 감격하여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라고 말했습니다. 독생자의 보혈로 죄 사함 받은 것도 감사한데,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주셨으니 이처럼 파격적인 사랑을 어디서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실감나지 않거든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의 실상과 구원받은 이후의 실상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디도서 3장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3)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4)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7)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성경을 열심히 탐구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했어도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이야기는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보아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예배시간에 설교를 들을 때 정신을 집중해서 듣고, 사람의 말이 아니라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설교를 듣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면 그보다 더 큰 은혜는 없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기쁨과 감사가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한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아들은 모든 것이 풍족한 아버지 집에서 지내면서도 행복한 줄 몰랐습니다. 그를 위해 하는 아버지의 말씀이 귀찮은 간섭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눈길이 닿지 않는 먼 나라로 가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졸라 상속재산을 받아내어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한동안 허랑방탕한 생활을 즐기다 보니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기근이 들어 굶어 죽지 않으려고 들에서 돼지 치는 사람으로 취직했으나 무슨 대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돼지들이 막는 쥐염열매를 먹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그나마 배불리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제야 이 아들은 떠나온 아버지 집을 떠올렸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전에는 아버지가 자유를 억압하고 간섭하는 사람인줄 알았으나 이제 생각해 보니 아버지의 언행이 하나 같이 자식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난이 아들의 아집과 편견을 깨뜨려 아버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에 아들이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이 아들로 하여금 염치불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만든 것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이 꼴로 돌아가도 아버지께서는 나를 내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과연 이 아들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였으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그 날 저녁에 아버지 집에서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뻐하는 잔치가 열렸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 아들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지루하고 부담스러운 신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도 그런 심령상태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일을 더 좋아하고 하나님보다 세상일을 더 많이 생각하고 위한다면 이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사는 것이 재미있고 흥미로울지 몰라도 그 영혼은 점점 허무와 절망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끝없이 애쓰지만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자처럼 세상 방법으로 내면의 갈증을 해소하려 하면 매번 실망하고 또다시 목말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은 영혼의 갈증을 완전히 해소하고 만족한 삶을 누립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화답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당부하기를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여러 사랑의 대상 가운데 하나로 여겨 사랑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막 12:29). 사랑은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발성을 생명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고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합니다. 그것도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준행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일까요? 용돈을 많이 드리고 자주 옷이나 맛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실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부모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불순종한 사울 왕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22)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울 왕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가장 큰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씀입니다.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기서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부탁한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마음과 힘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복을 위한 명령
신 10:12-13 / 강민영 목사(은혜교회)
이 시간에 “행복을 위한 명령”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실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얼마나 행복하길 원하실까요? 마13:43에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하셨습니다. 해만큼 달만큼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행복은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본능 중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볼 때 19세기는 한 마디로 자유의 세기였습니다. 자유를 위하여 온 세계가 투쟁하던 시기였습니다. 20세기는 평등의 세기였습니다. 자유를 찾고 나니 더 나가서 평등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 같은 부작용도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나라도 양반 같은 계급이 사라졌습니다. 남녀평등도 회복되었고, 직업의 귀천도 사라졌습니다.
지금 21세기는 어떤 시대일까요? 행복의 세기입니다. 온 세계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 행복한 사람,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말만 들어가도 좋아합니다. 행복학도 발전했고 행복학자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행복학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13절)키라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행복을 위한 명령입니다. 모세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너희들은 들어가서 절대 행복하라는 것입니다.
행복을 위한 명령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12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교회출석에 만족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소요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위해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기 전에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다른 것이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비워두어도 안 됩니다. 비워두면 자기보다 악한 일곱 귀신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면 어둠과 방황과 절망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섬기지 않는 것은 섬기지 않는 것과 결과가 같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듯 하나님을 열심히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가나안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애굽이나 광야나 가나안이나 하나님 백성인 것은 맞지만 경외하는 수준은 다릅니다. 애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하나님께 마음 바치지 못합니다. 고난을 받아도 그것이 훈련이요 징계인 줄도 모릅니다. 광야는 훈련인 줄은 압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마음을 다하지 못해 쓰러집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다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와 싸우고 불신과 싸우고 게으름과 싸우고 온전히 주를 위해 살기를 힘씁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6:4-5에 “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했습니다. 고전 6:19-20에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했습니다. 그것이 행복이요, 인간의 자기완성이기도 합니다.
영국 행복연구소에서 세계 150개 국가 국민들의 행복도를 조사했는데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비참하게 사는 방글라데시였고, 이제 선진국에 들어섰다는 우리나라는 34위였습니다. 태평양을 끼고 사는 18국가 중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왜 행복지수가 낮을까? 추구하는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긴장된 표정으로 쉬지 않고 일하고 여유도 여행도 하지 않습니다. 여행을 해도 무엇이 그리 바쁜지 그건 돌아다니는 것이지 여행이 아닙니다. 일도 좋지만 행복부터 하십시다. 하나님의 일도 좋지만 먼저 행복하십시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말4:2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했습니다. 마음을 치료하시기에 어둠도 고통도 상처도 없습니다. 자유와 기쁨과 행복만이 넘칩니다. 사40:31에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13절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얼른 보면 행복이 목표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그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면 바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행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 되었을 때도 렘29:11-13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셨습니다.
시121:7에는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했습니다. 유치한 질문이지만 돈 들어가고 고통 받으실래요? 아니면 돈도 안 들어가고 고통 받지 않고 사실래요? 면제의 복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람 일생동안 아픈 기간이 남자는 평균 13년 19.4%, 여자는 더 많이 16년 생애의 24%를 아픈 상태로 지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환난을 면제 받으면 믿음에 따라 10% 5% 3% 0%도 가능합니다. 가르쳐 줘도 듣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남들 중환자실에 들어가고 고통 받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사와 지혜로 면제 받아 어려운 고비 와도 넘기면서 무병장수하며 교회 나와 예배하며 평안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적으로 물 위를 걷는 것도 좋지만 다리를 놓는다면 더 좋은 일입니다. 성경에는 기적도 있지만 치유의 비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 짐은 쉽고 가볍다 하셨듯 쉽게 나을 비방들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치유의 은사 받은 지체들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쉬운 방법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최근 싱가포르 보건부에서는 코로나19 치료를 여러 방향에서 해본 결과 아스피린을 최상의 약으로 발표했습니다. 수천 명의 환자들을 아스피린으로 낫게 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아스피린을 썼더니 혈액이 정상으로 돌면서 중증이 즉시 경증으로 변했습니다. 제가 늘 알려드렸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멀리하면 어떤 치유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어리석음이 차지하여 깊이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엔의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2000년에 이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고, 지금은 이미 고령화 사회가 되었고 2030년에는 노인 인구의 폭발로 경제적 부담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인간의 생각입니다. 성경의 약속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노인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대로 하면 노인이 재앙이 되지 않습니다.
요즘 직장에서 은퇴해도 놀기에는 너무나 젊습니다. 100세시대 건강하고 지혜로운 노인들을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특히 하나님을 열심히 경외하도록 돕는다면 이 나라는 인구 비례 세계에 제일가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교회도 능력 있는 노인들 할일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영적 동력을 삼으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국가든 교회든 건강하고 능력이 있으면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합니다.
3. 늘 찬송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21-22절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여기 찬송해야 할 이유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할 일은 우리를 이 복된 곳으로 구원해 주셨다고 감사하고 찬송할 일 외에는 없습니다. 그 자손도 대대로 찬송만 하면 됩니다. 이미 가나안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이미 천국의 백성이기에 날마다 할 일은 늘 감사 찬송하며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될 때도 그랬습니다.
시126:1-3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예수 믿는 복이 꿈꾸는 것과 같은 복입니다. 그 안에서 온갖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옛날부터 그 집안이 잘 되려면 서너 가지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글 읽는 소리, 다음은 절구통 찧는 소리, 다듬이질하는 방망이 소리, 그리고 웃음소리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찬송하는 소리가 나야 합니다. 이 소리가 떠나지 않는 집은 영원 대대로 행복하고 형통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은 소유나 다른 곳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행복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고 그를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행복의 영을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대로 더욱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궁한 행복을 영원히 누리는 가장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
신 10:12-13 / 김원효 목사
동물이나 사람이나 본능적으로 자기 새끼와 자녀가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일단 배가 고프면 새끼는 울게 됩니다. 아- 이때 뭘 좀 먹여야 됩니다. 그래서 부모는 부지런히 먹을 것을 구해옵니다. 그렇게 구해온 먹이를 아구아구 먹는 새끼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부모는 기분이 좋습니다. “애야, 많이 묵어라.”
그러나 새끼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병이 들어 빌빌하면 부모는 마음이 안 좋습니다. “애야, 너는 왜 그렇게 아파서 내 마음을 힘들게 하냐? 애야, 제발 건강해라. 힘을 내라.” 하고 빌어줍니다. 마음이 아주 강퍅하여 하나님을 안 믿는 부모라도 자기 자녀가 병들면 자연히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부모는 자기 자녀가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열심에 열심을 냅니다. 기러기 가족으로 지내면서까지 자녀를 교육시키려고 합니다. 그 자녀가 영어도 배우고 경쟁력이 있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동물의 세계에서도 암수의 구별이 있듯이 사람들에게도 남녀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둘이 짝짓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호르몬 작용을 일으켜 본능적으로 짝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도 아담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보기에 안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짝인 하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짝을 보고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하고 매우 기뻐하고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 시 동물이나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남녀가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으라는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고 합니다. 저도 혼자도 살아보고 결혼하여 같이도 살아보면서 이 말이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래서 연애는 하되 결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 이것 역시 이해가 됩니다. 결혼하면 아내는 남편에게 묶이게 되고, 남편은 아내에게 묶이게 됩니다. 더구나 자녀를 낳게 되면 그 자녀에게 묶이게 됩니다. 아무래도 자기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더구나 애들이 원해서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게 되면 특별히 남편 즉 아빠는 강아지까지 돌보느라 자기 시간이 더욱 줄어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는 것은 배우자가 주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주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아지가 주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모가 나이가 들고 늙어 가는데 자기 자녀가 결혼 시기가 되었음에도 아직까지 혼자 지내는 것을 보면 부모는 마음이 안 좋습니다. 부모는 자기가 죽기 전에 자녀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자녀의 행복이 곧 부모의 행복입니다. 물론 자녀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아- 아무하고나 결혼을 할 수는 없잖아요?” 맞습니다. 마음에 드는 배우자, 이상형의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하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이곳 외국 땅 캘거리에서는 한인 인구가 적습니다. 당연히 자신이 원하는 배우자를 만나기가 확률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일단 남녀가 만나야 결혼이 되든지 뭐가 되든지 하는데 최근에는 COVID-19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만남 자체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인구수가 COVID-19 이전에 비해 그리 늘지 않았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소원과 계획이 반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여기 캘거리에서는 교회들끼리 연합이 잘 되고 있습니다. 원주민 선교나 코스타 행사를 같이 하면서 자연스럽게 믿는 청년들이 만나게 됩니다. 교회 행사도 중요하고, 선교도 중요하지만 종종 이런 만남 속에서 청년들이 서로의 짝을 만나고 결혼하신 분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렇게 해서 짝을 만나고 결혼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아- 그것 좋은 것 같습니다. 암튼 부모는 자기 자녀가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부모인 하나님도 자기 자녀인 우리들이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 보냐?”(마7:11) 즉 하나님은 육적 부모보다 더 우리들이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도 일하시고 있습니다.
옛날 50-60년대 한국에서는 기와집에 살면서 흰 쌀밥을 먹는 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소원이고 행복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생활이 점차 나아지면서 행복의 조건도 변하고 있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요즘 당신의 행복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당신이 이제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미래에 당신이 행복해진다는 희망이 확실히 있습니까? 저의 경우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하나님을 만났던 순간입니다. 제가 군대를 제대한 후 26살 때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약속하고, 성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 음성 속에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도 있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순간마다 외치는 나의 고백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나보다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여러분! 생각해보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이상형의 배우자를 만났습니다. 아- 얼마나 행복합니까? 혹은 우연히 산 복권이 1등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가슴이 콩닥콩닥 뜁니다. 앞으로 펼쳐질 나의 행복한 삶에 한껏 기대가 됩니다.
하물며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행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 분으로부터 아주 좋은 약속도 받았습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오-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 표어가 이겁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 캘거리 순복음 중앙 교회’ 즉 제가 만난 하나님을 여러분들도 만나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저의 바램입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만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행복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그로 인해 저주와 질병과 사망이 따라왔습니다.
기쁨의 에덴동산을 잃고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며 신음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타락하자 세상도 환경도 같이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물의 피곤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몹시 피곤합니다. 모두가 고통 가운데 신음합니다. 그렇게 고통 속에 불행하게 살다가 결국 죄의 심판을 받고 또 다시 영원한 심판의 처소인 지옥에 빠져야만 하는 것이 인간들의 운명이었습니다.
누가 이 고통 속에서, 이 불행 속에서 우리를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오직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이름이 없습니다. 그 분이 너와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심판을 당했습니다. 고로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 사함을 얻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불행에서 행복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들어오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불행했던 사람이 행복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행복의 알파와 오메가요, 행복의 처음과 나중이시오, 행복의 시작과 끝입니다. 예수님을 얻으면 행복을 얻는 것이요, 예수님을 잃으면 행복을 잃는 것입니다.
아- 참! 이상합니다. 신기합니다. 예수님이 없었을 때에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느꼈었는데, 예수님을 얻고 보니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어쩐 일입니까? 분명히 현실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예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불행과 행복을 가르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주위 환경을 보며 “아이고- 내 팔자야! 나는 왜 이리 불행한고?” 하고 탄식을 했었는데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내 마음에 들어오니까 와-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아니- 내가 달라졌습니다. 알고 보니 나는 하나님께 가장 사랑받는 존재이고, 그렇게 내가 하나님께 사랑 받는 모습을 보고 모든 만물들이, 찬사들도 나를 부러워합니다.
아- 내가 이런 귀한 존재구나! 이전에는 내 손에 1억 원이 있어도 너무 적다고 원망 불평을 했었는데, 이제는 내 손에 한 푼도 없어도 감사가 나오고 행복감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옛날 호박국(?) 선지자가 한 고백이 생각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합3:17-18)
마약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마약이 주는 순간의 쾌락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마약은 그 사람을 파멸과 불행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행복은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삶의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고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행복을 얻을 것인가? 세상으로부터 행복을 얻을 것인가? 신명기 33:29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는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즉 하나님을 믿는 자가 가장 행복한 자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2-13)
즉 하나님을 힘껏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살면 어디서든지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그 피조물의 행복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 자녀들이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최대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셨습니다. 고로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행복을 예수님 안에 두셨습니다. 고로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면 불행이고,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여러분! 저는 이제 죽어도 후회가 없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저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고, 앞으로 죽어서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도 주님과 함께 보람된 주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숨을 쉬는 것도 주님과 함께 하고 있고, 자고 깨는 것도 주님과 함께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주님과 함께 하고 있고, 산책을 하는 것도 주님과 함께 합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예배도 드리고,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아- 행복합니다.
그래요. 여러분도 반드시 행복해야 합니다. 엄마도 행복해야 하고 아빠도 행복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도 행복해야 하고, 우리들의 자녀들이, 너와 내가 모두 행복해야 합니다. 부탁합니다. 반드시 행복하십시오.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도 행복하게 하십시오. 아무쪼록 모두가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행복한가?
신 10:12-13
며칠 전 뉴스를 보니 황혼이혼이 10년 만에 6배로 늘었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며칠전 국민배우 최진실씨가 자살하여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화려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남이 알지 못하는 고민과 고통을 안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행복을 원하고 성공을 추구하지만 진정으로 행복과 성공을 얻었다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지식이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영화나 인기 같은 것을 소유한다고 하여 그 사람이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속사정을 알아보면 갖가지 고통을 지니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재산이 많아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도 자녀의 문제나 부부간의 문제나 건강의 문제로 남에게 말 못할 고민과 가슴앓이를 하는 경우가 있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알고 보면 깜짝 놀랄만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행복이란 어떠한 조건이나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요동하지 않고 만족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관계입니다. 아무리 세상것을 많이 소유하였어도 부부관게나 자녀와의 관계가 파괴되어 있다면 그 인생은 불행한 인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과 저주는 영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그 상태가 불행이고 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때 비로소 인간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인간은 행복하게 되어있습니다. 인생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1.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야만 행복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오만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육체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그 후부터 인간은 영이 죽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이 어두움의 죄악 세상으로 쫒겨 나왔습니다. 성경은 이 상태를 저주받은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부터 이 땅에는 질병과 기아와 수고와 슬픔과 이별과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다 곧 떨어져 죽고 화려한 꽃도 자태를 뽐내다가 곧 떨어져 시들어 버리는 것처럼 허무하고 허망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잔칫날을 앞두고 돼지가 잘 먹는다고 행복하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감옥의 사형수가 좋은 음식을 먹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늘어지게 잠만 잔다고 그를 행복하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영원한 심판과 멸망에 처한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인생은 결코 행복해 질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내면에 알지 못하는 불안의 그림자가 있는 것은 죽음과 심판과 형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주받은 인생들이 다시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갈보리의 사랑 그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확신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참 행복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4:9,10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누구든지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모든 불의와 추악 죄에서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어 하나님이 사랑을 누리는 행복한 인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요한일서4:14~16절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의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때 그 사람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에서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미국의 휘튼 대학교의 교수인 <론 사이드>박사는 그의 저서 <가난한 시대의 부요한 그리스도인> 이란 책에서 말하기를 그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침대 옆에 써 붙인 표어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의 인생의 모토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는데 그 글은 이렇습니다. “오직 한 번 뿐인 인생/ 곧 지나가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만이 영원히 남으리” 그는 그의 부모님이 그런 삶을 사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주님을 사랑하였고, 성경을 사랑하여 권위에 순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율법과 계명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지킬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절기나 의식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그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5:2,3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예배드리기를 즐겨할 것이요, 찬송을 부르면 기쁨이 있을 것이요 기도하는 시간이 소중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밤새워 이야기 하여도 지겹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의 방에 밤늦은 시간에 불빛이 새어 나오고 말 소리가 나면 핸드폰으로 전화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핸드폰 요금이 갑자기 몇 배로 나오면 분명히 그 자녀는 연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애하는 남녀는 만나고 또 만나도 다시 보고 싶어 합니다. 어느 연인은 서로 집에 까지 데려다 주다가 밤을 새웠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분을 예배하기를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상의 증거입니다. 인생이 바른 본분은 그분을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2)우리 주 예수님은 최고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13:34,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아프리카 대륙을 변화시킨 리빙스턴의 전기를 쓰던 전기 작가가 리빙스턴이 사역하던 곳을 찾아가 한 추장에게 리빙스턴이 가르친 설교말씀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물었을 때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우리는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증거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4: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리라” ***우리 가정과 교회에 무엇보다 필요한 결심이 있다면 우리 모두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일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일은 헛되고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면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이웃을 치유하게 될 것이고, 우리를 통해 민족이 치유되고 세상이 변화됨을 볼 것입니다. 말틴 루터 킹 목사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자리에서 그는 그의 연설을 이렇게 마무리 했습니다. “아직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사랑하기 위해서 손을 잡아야 합니다.” ***<천국열쇠>를 쓴 크로닌이라는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큰돈을 벌 계획을 세워 병원을 개업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은 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때 마음에 감동으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진실하게 환자들을 사랑하라 환자에게서 돈을 보지 말고 환자를 나의 마음으로 보고 긍휼히 여기며 내가 너에게 파송한자로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하였더니 천국 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주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을 얻어 부귀영화를 누려도 사람을 미워하면 그 마음은 지옥일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명예를 얻고 인기를 얻어도 그 가정에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불행할 것입니다. 신혼부부가 살림집을 마련하고 가구도 새로 넣고 가전제품도 사서 들여놓고 직장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 새 가정에 사랑이 없다면 텅빈 가정이 될 것입니다. 어느 호텔의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삶은 거울과 같다 거울앞에서 웃으면 웃음이 내게로 돌아온다. 거울앞에서 주먹질을 하면 주먹질이 내게로 돌아온다> 그렇습니다. 누가 인격자입니까 누가 좋은 신앙의 사람입니까 성도를 섬기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상도 아닙니다. 사랑은 머릿속이나 마음에 넣어 둘 것이 아닙니다. 종은 울리기까지 종이 아니듯이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내기 까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 귀, 입, 손, 발, 온 몸은 사랑을 하기 위해 주시 도구입니다. 남을 위해 이타적인 삶을 사는 그 사람이 행복자입니다.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의 생명이 꺼져버릴 수 있고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이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눅6:38절) 그러므로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말씀을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주시니 행복합니다. 잠언8:17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요한사도는 불같은 성격을 소유하였지만 언제나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하여 주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요한복음을 보면 자기를 가리켜 표현하기를 <주님이 사랑하시는 그 제자> 라고 하여 언제나 사랑받는 다는 의식 속에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고 사랑의 편지라는 요한일서, 이서, 삼서를 기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14:21절“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3절에는“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은 죄 사함의 확신, 구원의 확신, 치유의 확신, 부요의 확신, 영생천국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니 마음에 불안이 없고 담대하고 언제나 평안하니 풍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그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행복합니다. ***몇 년 전 텔레비전에서 오뚜기 농장 대표인 안재형씨의 말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양을 치다 거지가 되었고, 다시 사업을 하다 친구의 빚 보증을 서주었다가 거지가 되어 두 번이나 거지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겨우 일어서 농장을 운영하던 중 자동차를 몰고 가다 정면충돌하여 큰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턱, 다리뼈등 13조각이 났고, 몸 안의 장기가 터져 소생불능이란 진단을 받고 28일간 혼수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의식 가운데 빛 가운데 한 분이 나타나셨는데 “ 나는 나사렛 예수니라 너는 일어나라” 그 순간 그는 깨어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나운서가 “이제 직접 운전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자 그는 “천만예요 무궁무진하신 분이 나를 잡고 있는데 무슨 염려가 있겠어요. 이젠 걱정이 없어요.” 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여러분 개도 주인의 사랑을 받는 개와 그렇지 않은 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개들은 철망 속에 갇혀 증오의 눈으로 불을 켜고 있어 곧 잡혀 죽지만 주인의 사랑을 받는 개들은 목욕시켜주고 미용시켜 주고 끼니마다 밥을 주고 운동시켜 주고 왠만한 사람 보다 나은 취급을 받고 살아갑니다. 다윗은 잠 못 이루는 고통의 그 밤에 하나님을 묵상하므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내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견딜 수 있었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는 이 확신을 가지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김활란박사, 맥아더원수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날마다 행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릇 하나도 풀 한포기 꽃나무 한그루도 사랑을 받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링컨대통령이 사용하던 것은 지팡이 하나도 귀한 것이 되어 보물처럼 취급 받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당신을 사랑할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도여러분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당신이 진정 행복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예배 성공자가 되고 당신의 가족과 성도와 영혼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행복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복이 당신의 복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신 10:12-15 / 김충식 목사
이스라엘 민족이 사십년의 광야 여정을 마치고 가나안에 입성하기 직전 모압평지에 당도하였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출애굽의 제2세대들에게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 고별설교가 「신명기」입니다. 신명기는 율법서로 잘 알려져 있으며,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실 때에 제일 많이 인용하신 책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설교가 주는 의미를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로,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을 회고합니다.
모세는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비록 40년이라는 긴 세월이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셔서 가나안 직전까지 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는 회고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하나님에게 큰 반역을 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가데스 바네아 사건’입니다.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선정하여 가나안에 정탐을 보내었을 때 두 사람은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고 열사람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너무 실망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을 포기하고 진멸시키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중재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 된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지만 20세 이하의 사람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을 물리쳐 주시고 고난을 극복케 하시므로 결국은 모압평지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지난 한해를 돌이켜보면 다사다난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기되기 직전 다시 회복시켜 주신 은총을 회고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에 금송아지를 만드는 최대의 우상숭배를 행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었던 언약을 파기하려 하셨습니다. 언약을 파기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 돌비을 가지고 내려올 때 금송아지 우상을 보고 돌비를 내던지어 깨트립니다. 돌비가 깨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번에도 모세의 중재를 통하여 다른 돌비를 주시므로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회복하십니다. 언약이 회복되므로 이스라엘은 선민의 유효성이 인정되었고, 영적 축복의 근거가 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치를 높이셨습니다. 우리들도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각종 우상 숭배를 많이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로 말미암아 우리와 맺은 언약을 포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시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율법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을 회고합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장점이 많거나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도 근원은 볼품이 없는 민족 중 하나입니다. 그들의 조상은 강 건너에서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이 무조건 사랑하셔서 선택하셨고 율법의 백성으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나 위대한 요소가 있어서 그리스도인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부르시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분명히 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현실화시켜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가나안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먼 미래가 아닌 멀지않은 날에 가나안을 현실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해주신 일이라고 회고하면서 이스라엘은 이 일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우리도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해주신 일을 발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출애굽 2세대에게 전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성경 본문 12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방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에는 그 사람과의 관계가 있을 때입니다. 길을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자기 가족에게 하듯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남편이기에 아내는 남편에게 요구하며, 아내이기에 남편은 아내에게 요구합니다. 부모이기에 자녀들에게 요구하며, 자녀이기에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더우기 상대방과 깊은 관계일수록 요구의 농도는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십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상이 될 수 있을 때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소가 닭 보듯 하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으면 축복인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큰 불행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반응도 각기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가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를 다 먹어도 좋지만 선악과는 먹지 말라” 는 것입니다. 실상 하나님의 이 요구를 아담이 들어 주기는 쉬운 것이었습니다.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했기에 자신만이 아닌 인류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100살에 얻은 이삭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납득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요구를 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요구를 받아들임으로 인류 구원의 근원이 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데 그 대상이 곧 이스라엘이요, 선택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5가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섯 째,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강한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을 존경한다는 의미입니다. 잠언 1:7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시인 「롱 펠로우」(Longfellow)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록키산맥에서 동서로 흐르는 물이 꼭대기에서 처음 흐를 때에는 간격이 몇 미터 되지 아니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수천 킬로미터의 간격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생의 결과가 이처럼 큰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합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하나님의 길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로 가기를 좋아하고 그 길을 모르는 척 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길을 가라’ 고 강력히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과 행위가 동시에 수반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아주 열렬하면서도 뜨겁게, 격정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합니다.(계2장) 젊은 남녀들이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할 때에는 마음이 뜨겁고, 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고, 매일 같이 함께 하고 싶은 감정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향해 이런 사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되는 모든 일들을 즐기면서 하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거나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골프를 좋아하는 분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간혹 그 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영하 10도, 15도로 기온이 떨어져도 그분들은 필드에 나가는 것입니다. 내일도 골프모임이 있는데 어느 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골프장에 가면 춥지 않습니까?’ 하였더니 ‘춥지 않기는요, 여기보다도 온도가 몇도 더 내려가서 얼굴이며 온 몸이 얼어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같으면 돈을 주면서 가자고 해도 안 갈텐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갑니까?’ 하였더니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아무리 추워도 필드에 나가는 것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대답합니다. 내가 좋고 즐거우니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는 수고의 원리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서비스(Service)를 의미합니다. 봉사를 의미합니다. 영어로 예배라는 말을 할 때 여러 단어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가 서비스입니다. 미국 교회를 가보면 대부분 교회 앞에 예배시간 안내가 있는데 「서비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봉사자로 서 있는 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서비스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의 생활화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아침과 저녁으로 암송하며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부지런히 가르치며 율법을 소중히 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와 같은 요구를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요구를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만 있다면 부족하지만 우리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고, 이적과 기적을 행하셨고, 주리고 목 마를 때에 먹을 것을 주시고 물을 주시고 고기를 주셨기 때문일까요? 이스라엘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기 때문에 조건을 걸으시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이유가 성경 본문 13절에 나와 있는데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었기 때문도 아니고, 네가 나에게 해주는 것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 네 행복을 위해서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는 당신의 백성들의 행복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결코 우리를 속박하기 위함이나 어떤 짐을 짊어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요한1서 5:3을 보면 "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30을 보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귀한 독생자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 분을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셨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리신 분들은 자식 잃은 아픔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장 큰 슬픔은 역시 자녀를 잃은 슬픔일 것입니다. 얼마 전 신종플루로 연예인「이광기」씨가 어린 아들을 잃었습니다. 처절한 모습으로 비통해하는 그를 보면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아들을 잃으셨습니다.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지 하나,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행복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아들까지 죽이신 의미가 물거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 어느 가정을 심방하는데 심방을 갈 때부터 마음이 상당히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심방 받는 권사님은 우리 교회에 나온지 20년 가까이 되신 분인데 사실 부유하게 사신 가정이 아닙니다. 어려운 가정에 속했습니다. 13평 도곡 아파트에서 두 자녀와 함께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그분은 늘 조용하면서도 묵묵히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인정하든지 안 하든지, 알아주든지 아니하든지, 항상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자기의 몫을 지키는 분입니다. 더 좋은 것은 어디에서나 나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이 애찬실 노인방 봉사를 하는데 대부분의 봉사자들은 일년 정도 하면 쉬고 싶어 하는데 이 분은 그것을 주신 사명으로 알고 꾸준히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다 보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대표적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도곡 아파트가 재개발 되었는데 경제적인 이유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근래 그 집을 팔아 일원동에 70평되는 대지에 있는 큰 단독주택을 구입하여 이사를 한 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금년에 대학을 졸업하였는데 공기업인 수자원공사에 들어갔습니다. 딸도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즐겁게 다니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하실까? 생각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요구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행복을 위해서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담을 그릇을 장만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어느 돈 많은 부자가 화랑에 갔다가 예수님의 초상화를 하나 사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신앙생활은 하지만 예수님을 사모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초상화를 산 것이 아니라,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었기에 부가가치를 생각하며 그림을 샀습니다. 집에 와서 그림을 걸려고 하니 어디에다 걸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이튿날 실내장식 전문가를 불러서 ‘이 그림을 좋은 곳에 걸어주시오.’ 했습니다. 전문가가 집안을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이 집에는 이 초상화를 걸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상화가 걸릴 수 있는 가정이 먼저 되십시오’하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담기 위한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송년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이 내 인생 속에 찾아오셔서 하신 일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순종할 때, 하나님이 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해 주신다는 것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이 질문을 되새기는 송년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라
신 10:12-15, 고전 15:47-49 / 이성희 목사
지난 번 제가 가 있던 수도원의 수도사의 모습은 한결같이 온화하고, 부드럽고, 밝았습니다. 그들은 잘 먹지 못하고, 잘 자지 못하고, 잘 입지 못하지만 늘 부요했습니다. 그들의 내면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두 버린 흔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이 땅에 살지만 이들의 삶은 이 땅의 삶이 아닙니다. 이 땅과는 이미 이별하였습니다. 아미엘은 “어린 아이들 틈에서만, 우리는 이 지상에서 천국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의 생활은 고스란히 하늘에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것을 버리고 추구하지 않고 하늘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세상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사람은 어디엔가 소속이 있어야 합니다. 소속감이란 연대의식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 민족은 연대의식이 강합니다. 우선 우리는 “우리”란 말을 많이 씁니다. 나와 조금만 연관이 있어도 금방 가까워집니다. 어떤 외국인은 한국사람은 아는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이 너그럽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이 인색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우리의 연대의식은 동질적인 모임을 많이 만들게 합니다. 초등학교 동창회를 비롯해서 대학 동창회까지, 종친회와 동향회, 군대 안갔다온 사람은 얼만 안되지만 재향군인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해병대, 이런 모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에게는 매임병(stuckititis)이 있다고 합니다. 이 병은 아주 흔한 질병입니다. 사람들은 어디엔가 매여 있어야 편함을 느낍니다. 이런 소속감이 없으면 외롭고 살 수가 없습니다. 집에서도 부부가 서로 매여 있어야 좋은 겁니다. 서로 매여 있는 것이 자유롭고 편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이런 매임이 불편하고 부자유하게 느껴지니 이게 문제입니다. 매임에서 빠져나갈려고 하니 복잡하고, 힘이 듭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는 흙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를 구별합니다. 성경은 첫째 사람은 흙에 속한 자이고 둘째 사람은 하늘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첫째 사람 때문에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둘째 사람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땅에 속한 자는 죄를 가지고 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죄를 해방시킵니다. 땅을 바라보면 두려움과 절망이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희망과 용기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물을 바라볼 때에 물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눈을 어디에 두고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좌우하고 우리의 생명을 죽이기고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땅에서 출세하고, 잘 되는 것 보다 하늘에서 잘 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땅의 형상을 닮으려고 애쓰지 말고 하늘의 형상을 닮으려고 애쓰십시오.
첫째, 땅에 속한 자의 형상이 있습니다.
흙에 속한 자는 첫째 사람 아담입니다. 첫째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땅에 속한 자의 형상은 결국 죄인의 형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첫번째 살인자인 가인의 모습을 보세요. 자기 아우를 쳐 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데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대드는 악한 모습입니다. 노아 시대의 모습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죄가 꽉 찼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생각이 항상 악합니다. 예쁜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땅에 속한 자의 형상입니다. 로마서 1:28-31에 기록한 땅의 사람의 형상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세상에 악한 모습은 죄다 열거하고 있습니다. 못된 것만 골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에 열거한 말씀을 보세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합니다. 말세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등입니다. 이 것이 이 땅의 형상입니다. 요즘 우리 주위의 사건들을 보세요. 사람이 사는 모습이 아니예요. 술김에 어머니를 칼로 난자해서 죽이고, 홧김에 길에 지나가는 사람을 마구 때려 주고, 온갖 술수로 다른 사람을 모함하여 명예를 훼손하고, 대낮에 모텔이 만원인 나라입니다. 어디 하나 맑은 물이 흐르는 것같지 않은 시궁창같은 세상입니다. 시궁창같은 청계천이 복원되어 고기가 노는 개천을 만들면 정말 사람들의 마음에 맑은 물이 흘렀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동물보다 훨씬 못해요. 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동물은 땅을 향해 살고, 사람은 하늘을 향해 삽니다. 동물은 먹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입이 제일 앞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머리가 제일 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으로 살아야 합니다. 땅에 속한 자의 형상은 영이 없습니다. 그래서 땅에 속한 사람들은 동물적으로 삽니다. 지난 번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에 사파리 공원에 가 보았습니다. 맹수들을 방사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 곳에 가서 표범을 안고 사진 찍었어요. 조련사가 표범을 제 무릎에 앉혀주고 한쪽 앞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쳐 주는 거예요. 조련사는 자신 있게 해주지만 저는 왠지 겁이 났습니다.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살그머니 뒤돌아 나왔지요. 아무리 사나운 동물이라도 사람들의 머리에 꼼짝 못해요. 윌리엄 힌슨이란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동물 조련사가 사자가 머무는 동굴에 들어갈 때에 왜 의자를 들고 들어가는지를 설명합니다. 조련사는 회초리와 권총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련사는 의자의 네 다리를 사자를 향하여 들고 들어갑니다. 사자는 의자 네 다리에 동시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일종의 무기력증에 사로잡힙니다. 결국 집중력이 분산되고 온순하고 유약한 사자가 됩니다. 땅의 삶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초점의 삶입니다. 요즘에 다초점 안경이 있니다. 세상에서의 다초점은 잘못하면 무초점이 됩니다. 이 때 무기력증에 사로잡히고, 용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보았던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을 보세요. 이 신상의 머리는 정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넙적다리는 놋, 종아리는 철, 발은 얼마는 철 얼마는 흙이었습니다. 이 신상은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머리는 바벨론입니다. 가슴과 팔은 바사입니다. 배와 넙적다리는 헬라입니다. 종아리는 로마입니다. 발은 동서 로마제국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가 있다고 하더라고 인간의 역사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강대국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진흙으로 된 발에 의지하여 서 있고 보면 결국 조만 간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형상은 그 발이 흙입니다. 금방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하늘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처럼 되셨습니다(빌 2:6-7).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하늘의 형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실증주의자였습니다.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요 14:8-9). 예수님의 모습에는 하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온유, 겸손입니다.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의 형상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형상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이런 형상일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유한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나우면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교회 구내의 사택에 사십니다. 사택 마당에는 개가 여러 마리가 있습니다. 제가 이 교회 사택은 개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마리 개가 어찌나 사나운지 제가 여러 날을 들낙거리는데도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댑니다. 그러니 아예 그 개는 우리 안에 가두고 개고리로 꽉 묶어 두었습니다. 온순한 개들은 풀어놓지만 사나운 개들은 묶어 놓습니다. 사나우면 자기 손해입니다. 사나우면 자신의 자유도 구속받습니다.
히브리어의 ‘아나브’라는 말은 온유와 가난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온유한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십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온유하실 수 있습니다. 헬라어의 온유라는 말은 ‘프라오스’입니다. 이 말은 사람에 대한 선의와 하나님을 높이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온유란 하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높이지 못하는 사람은 성경격 온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칼빈은 온유는 부드러운 태도에 살며, 오해에 쉽사리 노하지 않으며, 보복코자 하지 않으며, 자기에 대한 악의에 대하여 길이 참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온유에 대한 정의는 참 재미 있습니다. “적당한 경우에, 적당한 사람에게, 적당한 순간에, 적당한 기간동안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 ‘야훼’는 “나는 존재한다”는 의미의 ‘하야’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고 모세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9), 선한 목자(10:11, 14), 부활(11:15), 생명, 길, 진리, 생명(14:6), 참 포도나무(15:1, 5)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자신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한결같이 부드럽고 온화합니다. 사납지 않습니다. 나는 태풍이요, 나는 집채만한 바위요, 나는 해일이요, 나는 우뢰와 폭풍이요 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한결같은 그리스도의 형상은 온유, 겸손, 털깎는 자 앞의 어린 양같은 여린 모습입니다. 고린도후서 4:4에는 “그리스도는 하나님 형상이니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1:15에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형상이요”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보았습니까? 말씀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희미하지만 마음으로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하늘의 형상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그 자체가 하늘의 형상입니다. 변화산에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그 모습이 희어져 눈이 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순결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가 계시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하늘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셋째,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땅의 형상을 벗고 하늘의 형상을 입어야 합니다. 세상의 옷을 벗고 하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세상의 형상을 벗어야 하늘의 형상을 입습니다. 회개라는 말의 히브리어인 ‘테슈바’와 헬라어인 ‘메타노이아’는 똑같이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 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회개란 하나님께는 ‘예’하고 세상에 대하여는 ‘아니오’라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6:9에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노아의 치적을 설명합니다. 노아는 성경이 감히 의인이라고 할 만큼 하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욥기 1:8에는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1:1에도 욥에 대한 같은 평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욥을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동일하였습니다. 사람의 눈에만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인정되는 의인이었습니다. 부럽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으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나이 40세가 되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사람으로서 하늘의 형상이 얼굴에 나타나야 합니다. 직장의 동료가 나를 예수 믿는 줄을 모른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아무개도 교회 나간데”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하늘의 형상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하늘의 형상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제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그분의 형상을 이루는 신자를 말합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형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막의 교부들의 경우에 그들이 사막으로 피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 동화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하늘의 형상을 입기 위해 세상과 접촉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늘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19에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냥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해산하는 수고를 동반합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형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이 땅에 태어나기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한 것처럼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같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도한 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전도하신 여러분이 해산의 수고를 하셔야 합니다. 스티브 챈들러의 ‘꿈을 이루게 해주는 특별한 거짓말’이란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어느 잡지의 기자였습니다. 이 책에는 저자가 1976년 아리조나 투산의 한 모텔에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라는 무명 배우와 만나 점심식사를 하면서 인터뷰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저자는 슈왈츠제네거에게 “보디빌딩을 그만 두셨다는데 뭘 할 생각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나는 헐리우드의 최고의 스타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아무리 봐도 오스트리아식 영어를 하고, 근육도 별로 매력이 없는 그가 대스타가 될 것이라고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수로 헐리우드 최고의 배우가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그는 “원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미 다 이룬 것처럼 사는 거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지금쯤 그는 캘리포니아 주 지사가 된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상하고 늘 모방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상상은 중요한 형상입니다. 우리의 형상은 늘 상상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결 론
하늘의 형상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통하여 그형상을 배울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1380-1471)는 독일의 가난한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세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그는 종신 수도사가 되기로 서약을 합니다. 그가 1471년에 세상을 떠나고 다음해인 1472년에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근 500년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다음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 본받으려고 애쓰라고 합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그리스도의 모방’(Imitation of Christ)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모방하십시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유명 연예인을 닮으려고 애쓰고 모창을 하는 야간업소 가수가 있습니다. 너훈아라는 분도 있고, 조용팔이라는 분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자신과 자신이 모방하는 그 연예인을 혼돈한다고 합니다. 늘 모방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이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떤 식사를 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오늘 어떤 옷을 입으실까?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떤 말을 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떤 일을 하실까? 우리의 매일매일 삶이 그리스도를 상상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지배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형상대로 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기에 심히 좋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은 하늘의 형상을 닮은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욥에게처럼 “내 종 아무개를 유의하여 보았느냐?” 하나님이 세상에게 자랑하고 싶어 어쩔줄 몰라 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늘의 형상으로 사는 또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품는 추수감사절
신 10:12-19 / 이근수 목사
서론- “이웃을 품는 추수감사절”이야기
지난 여름 홀란드에서 “하나님께는 감사하고, 이웃에게는 사랑을 주는 추수감사절- “이웃을 품는 추수감사절”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련이 붕괴되고 여러나라가 독립 하면서 경제가 어려워지자 사람들이 서유럽 국가로 취업을 하고 학생들이 유학을 왔습니다. 그들이 타국에서 노동과 공부를 하며 어렵게 살면서 주일에는 유럽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격려하고 돕기 위해 구역에서 사랑의 상자에- 빵, 버터, 치즈, 우유, 햄, 야채, 과일, 국수, 위로가 되는 사랑의 편지를 구역식구들이 쓰고, 복음의 말씀, 약간의 생활비를 넣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동구권 사람들과 가난한 이웃을 추수 감사주일 예배에 초대합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성도들에게 예배시간에 축복과 격려를 받고 예배 후 돌아갈 때 교회는 그들에게 사랑의 상자를 하나씩 받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한달간을 먹는다고 합니다. 교회의 아름다운 소식이 널리 전해져 주일마다 동구권 노동자와 학생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이 몰려 온답니다. 교회는 이들에게 매주 점심을 주어 사랑했고 “사랑의 상자”를 크리스마스에도 전했답니다. 서유럽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유학생은 공부를 마치고, 노동자는 노동계약이 끝나 귀국해서도 계속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소식을 전해온 답니다. 이것이 최근 서유럽 교회들이 동구권을 향한 또 다른 선교라는 보고였습니다. 저는 이 보고를 듣고 참 좋은 아이디어다. 이웃을 품는 성숙한 유럽 교회의 사랑에 감동했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유럽교회가 정말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여 동구권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었구나.'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매주 화요일 마다 우리 교회에 도움을 받기 위해 오는 200 여명의 어려운 이웃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교회는 매년 추수감사절 때 마다 온 교우가 과일과 야채를 하나씩 가지고 와서 감사 예배를 드린후 그것을 양노원, 장애우 시설 등을 찾아가 전달했는데 금년에는 서유럽식으로 이웃을 초청해서 사랑으로 품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회에서는 금년 추수감사예배를 이웃을 품는 추수감사절로 지키기로 했습니다.
본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웃을 사랑하되 힘없고 돈없고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홍성교회는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10월 14-15일은 제23회 사랑의 바자회를 합니다. 이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하는 일입니다. 이웃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변함 없이 금년에도 봉사하는 300여 교우님들, 물건을 기증하고 사주는 교우님들과 동리 주민들, 음료수 음식등을 사서 봉사하는 회원들을 위로 격려하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에게 감사드리고, 봉사하는 모든 종들에게 영육간에 복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화요일- 다시 구제받을 나그네들이 오는 날인데 바자회날과 겹쳤습니다. 그래서 구제부에서는 그분들에게 2000원 짜리 식권을 드려서 음식부에서 무엇이든지 사서 드실 수 있도록 했는데 식품부에서는 음식을 조금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14, 15일에 교회에 꼭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라.(19)
나그네- 외국인, 이방인 우거객(寓居客) 자기 몫의 땅도, 집도, 법적 권리도 없는 약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낮선 사람, 모르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나그네 사랑의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이 나그네 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나그네 사랑 (18)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난 당할 때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애굽에서의 노예생활, 고달펐던 나그네 시절을 생각하여 나그네들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방 민족에게 고난을 당했던 유대 민족들은 선민의식과 함께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그네된 자들을 사랑하라고 특별한 당부를 하셨습니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
18절.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신원하다'- '정의롭게 판단하다', '정당한 권리를 찾아주다'
그당시 고아나 과부는 사회적, 경제적인 약자로서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나 멸시와 천대를 받기 쉬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이들을 위해 신원(伸寃)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힘없고 의지할데 없는 약자들을 간과치 않으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정의로 인도하시고 정당한 권리를 찾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소외 계층을 사랑으로 보살펴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 시요 '과부의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68: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아라고 과부라고 슬퍼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고 과부의 재판장 이십니다. 청년 여러분, 취직이 안된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도하는 자에게 길을 열어 주십니다. 직장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더 좋은 일을 주십니다.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요. 하나님이 좋은 일을 주십니다.
2) 나그네를 사랑하는 사람은[12]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도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계명을 지키며 삽니다. 이는 우리의 자유를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 줍니다(4:40; 5:29; 6:2; 8:2)
3) 성도는 나그네를 사랑해야 합니다 [19]
19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과거 -나그네 시절-을 상기시키며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애굽에서 겪었던 나그네의 설움을 기억하고 나그네를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나그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내국인 나그네는 물론, 외국인 노동자
나그네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인격적이며 인간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때로 악덕 기업인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학대하고 욕하고 구타하고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다는 보도를 들을 때 부끄럽고 안타깝고 슬펐습니다. 요즘 TV에 아시아 아시아란 프로에서 한국에서 일하는 아시아 지역 노동자의 가족을 방송국에서 직접 어렵게 찾아가서 힘들게 수속을 해 데리고 와서 극적으로 만나게 해주는 아름다운 프로가 있습니다. 타국에서 나그네들이 그렇게 그리던 사랑하는 가족을 눈물로 만나는 모습을 볼 때 눈물이 납니다. 우리도 지난날 나그네 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나라를 잃은 나그네였었고 6.25 전쟁 때는 정처없이 떠돌던 나그네 였었고 보리 고개 시절- 우유가루, 밀가루를 배급 받아 먹던 나그네였었고 중동에 오일 달러를 벌러 갔을 때 나그네였었고 독일에 광부로 간호사로 돈벌러 갔을 때 나그네였었고, 월남에 전쟁하러 간 나그네였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그네가 많습니다. 요즘 생활이 어려워 매주 화요일 교회에 와서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이웃이 나그네 입니다. 교회는 이들 나그네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4)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신24:14-22]
14 가난한 품군을 학대하지 말라
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라
17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
19 밭에 곡식 단을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놔두라
20 감람나무를 떤 후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놔두라
21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놔두라
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막14장 7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우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든지 가난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행10:2 고넬료-백성을 많이 구제하더니
나그네를 사랑하는 사람은?
1) 마음에 할례를 하라 (16절)
할례- 잘라 버리다. 떼어 버리다.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더러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성을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생활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나그네를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2) 목을 곧게 하지 말라[16]
'목이 곧다'- (목을 뻣뻣하게 치켜들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다.하나님에게 굽히지 않는다,. 어리석게 고집을 부리다. 교만하다.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 중에도 나그네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그네를 사랑한자 가 받는 복
행10:4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됩니다. 구제를 잘하는 고넬료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달 되었고 기억하신바가 되었다는 것을 복 중의 복 입니다.
신10: 13- 행복하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신 24:1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신10:22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에 내려갈 때 70명 이었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크게 번창하였습니다.
나그네의 복지를 챙겨주는 사람의 복지를 하나님이 챙겨주셔서 행복하게 해주시고 범사에 복을 주시고 행복하게 해주십니다.[13]
결 론: 이웃을 품는 추수 감사절
우리들도 금번 10월 26일 추수감사절에 이웃을 품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 주셔서 구원받게 해주신 것 감사하고, 온식구 건강주신 것 감사하고, 먹고 살게 해주신 것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주변에 어려운 분들이 많습니다. 매주 화요일 마다 200명이 우리교회에 와서 구제를 받습니다. 금번 우리교회도 구역별로 구역예배를 드리며 “이웃을 품는 사랑의 상자”를 만들어 나그네를 초청하여 전달하려고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구역에서 조그만 박스에 - 빵, 우유, 햄, 야채, 과일, 라면, 쌀,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글, 복음과 사랑의 편지를 구역식구들이 쓰고, 전도지, 화장지, 약간의 생활비를 넣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들도 어려운 분이 계십니다. 어려운 분들은 안해도 되세요. 그러나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으신 분은 동참하세요. 구역별로 상자를 두개 준비해서 추수감사절 주일 2부, 3부 예배때 바칩니다. 예배에 초대 받은 이웃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고”예배 후 그분들에게 한 상자씩 선물로 전달합니다. 그날 그분들에게 점심도 대접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쓴 사랑의 편지는 그들이 평생 잊을수 없는 희망의 메시가 되고, 구원의 생명줄이 될 줄 믿습니다. 구역에 속하지 않은 분들은 과일, 야채, 먹을 것 중 한가지씩을 교회로 가지고 오십시요. 선물을 받은 분들이 무엇보다도 금번에 예수 믿고 구원 받기를 기도해 주십시요. 사랑의 상자는 사랑이 없는 살벌한 세상에 사랑의 훈풍이 될 것입니다. 금번 추수감사절에 사랑의 상자를 정성껏 만들어 나그네 된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줍시다.
2003년 추수감사절- 이웃을 품는 추수감절, 하나님께는 감사를, 이웃에게는 사랑을 전하는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10월 26일 추수감사절에 사랑없는 냉냉한 세상에 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의 상자를 주어 영혼을 살리는 홍성교회 온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과 손길을 하나님이 기억하셔서 복주시고 행복하게 해 주실줄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신 10:12-20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 또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이 복된 삶이 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행해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친 내용의 일부입니다. 이 가르침은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12절)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요지는 곧바로 이어지는 대답 속에 요약되어 주어지고 있습니다: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12-13절). 이 압축된 대답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지킬 도리로서 구약성경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것들이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는 것이며, 그를 사랑하는 것이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섬기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 이 다섯 가지는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각각의 의미 속에 이미 들어 있어서 서로 각각의 의미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먼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근본(잠1:7)이고 복 있는 백성이 되는 길(시128:4)입니다.
그 다음 "그의 모든 도를 행하라" 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과 표현의 첫째가 바로 "그의 도를 행하는 것", "그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시편 128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다"(128:1)고 했습니다. 그의 도를 행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가리키고 그의 뜻에 합당한 삶의 방식을 좇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도를 행함이 없이 그를 경외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도를 행하라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삶의 양식을 삼아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는 것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 다음은 "그를 사랑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다섯 가지 도리 중 하나라기보다는 그 전체를 포괄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도를 행하며 그를 섬기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일 속에 다 포함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다 포함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참된 하나님사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도를 행하며 그를 섬기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일 또한 그에 대한 사랑 가운데 행할 때 참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도를 행하며 그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 했는데, 이것은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떤 것을 두려워하거나 의지하거나 동경하고나 추구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일체의 우상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되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행하되 오직 하나님의 도만 행하고, 하나님의 모든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온 맘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되 오직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 했습니다. 이것은 앞선 도리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 일의 구체적인 설명이고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라 하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모든 명령과 규례는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도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행하라는 것도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도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도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14-15절에서는 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도를 행하며 그를 사랑하고 그를 섬기며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주인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그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을 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5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이러한 특별한 은혜를 입고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기에 이스라엘은 다른 백성들과 달라야 하고, 그 다른 표지로서 주신 것이 할례인데 겉으로 만의 할례가 아니라 참된 할례가 이루어진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절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그 앞뒤의 말씀들과 두루 관계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선 14-15절에서처럼 17절도 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도를 행하며 그를 사랑하고 그를 섬기며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고 크고 능하시며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이시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 중의 신이시고 주 가운데 주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이나 주가 있다는 말이 물론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거짓 신들을 믿고 그것들을 주라고 섬기고 있지만 사람들이 믿고 섬기는 그 많은 신들 가운데 참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또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한 16절 말씀과도 연관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겉모양만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속에 숨은 진실을 보는 하나님이시지, 그럴싸한 외모를 보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뇌물은 사실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하여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으로 바로 보시기에 뇌물이 통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 뒤따르는 18절 이하의 말씀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속 진실을 아시는 하나님은 곧 정의로운 심판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시다면 그가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 또한 정의로운 일들이고 따라서 그의 백성이 행할 도리는 정의라는 것입니다. 앞선 12-13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보다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의 도리를 말했다면,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간접적인 관계 즉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8-19절을 봅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요약하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에 그곳에서 의지할 데 없고 외롭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자신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심으로 그의 백성도 마땅히 사랑과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그런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 때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누린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이들은 그 사랑과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나누어주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속에는 이웃사랑과 사회적 책임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백성으로 믿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시며 주신 말씀은 곧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도를 행하는 백성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를 복된 사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 땅, 한반도 삼천리금수강산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요구를 겸손함과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하려고 힘쓰면 하나님께서 이 나라 이 민족을 복된 나라 복 받는 민족으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대통령이 탄핵을 받는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나라, 안전한 나라, 발전하는 나라, 번영하는 나라, 남에게 유익과 기쁨을 주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백성 되는 것, 교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 백성 되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보다 앞서는 신9:1-7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반복해서 일러두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오늘날 우리도 우리가 공의롭고 마음이 정직해서 오늘의 발전을 이룬 것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귀한 피 흘려 믿음을 지키며 목이 메게 기도한 데 대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와 완악함을 늘 깨닫고 항상 겸손하며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잊지 않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나라가 복되고 강성한 나라가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신11:8-16 사이의 말씀을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마지막으로 신 11:26-28을 봅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축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했습니다. 날마다 눈을 감고 복을 달라고 빌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두신 복과 저주 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 바로 보는 여러분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도에서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크고 놀라운 복을 남김없이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그네을 사랑하지 않는 것
신 10:12-22 / 김명혁 목사
지난 두 주일 사사 시대의 죄악상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사사 시대의 죄악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한 것”이었다고 두 주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사사 시대 말기의 죄악상은 한 마디로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한 것”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13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어느 한 시대에 국한하지 않는 보편적인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나그네를 사랑하지 않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명하시면서 나그네를 학대하는 것을 진노 받을 죄라고 말씀했습니다(겔22:31). 예수님은 나그네를 돌아보라고 명하시면서 나그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을 저주 받을 죄라고 말씀했습니다(마25:41).
제가 갑자기 이와 같은 제목을 정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 뉴질랜드로부터 이 메일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최광혁 군으로부터 온 편지였습니다. 북한을 떠나 한국에 와서 그동안 우리와 함께 살던 최광혁군이 한국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한국을 떠났다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간첩으로 오해를 받고 불신을 받고 차별을 받으며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한국을 떠났다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지금 한국 땅에 살고 있는 탈북자들 반 수 이상이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지금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한국에 대한 원망과 증오심을 품고 살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땅에 살고 있는 혼혈인들이 한국사회를 원망하며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상당수의 조선 족들이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를 포기하고 조국을 원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모두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두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혼혈인들이 모두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들이 모두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저들의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과 생활 수준이 우리들의 것과 다른 것 뿐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저들을 차별대우하고 저들을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과 피부 색이 다르고 사고 방식이 다르고 생활 방식이 다르고 생활 수준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기질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이방인들과 나그네들을 멸시하며 정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적인 가치와 문화를 이루지 못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고 유교적 전통과 사색당파의 전통과 집단 이기주의의 전통에 사로잡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대주의적 사고는 강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높이 떠 받들지만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나 몽고 사람들이나 조선족들이나 북한 사람들은 무시하고 짓밟고 있습니다. 가난한 러시아 여성들을 학대하며 짓밟기도 합니다. 돈이 기준의 잣대가 되고 나의 선입견이 판단의 잣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최광혁군의 편지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왜 긴 편지를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립니까? 우리의 불행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최광혁입니다. 주님 안에서 건강하시지요? 지난 주에 뵈었을 때는 많이 수척해 보이시던데요... 아프가니스탄 후유증이 가시질 않으셨나 봐요... 지금 제가 목사님께 드리는 글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저의 생활과 관련한 이야기와 제가 한국에서 살 수 없었던 이야기 입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위해 많이 기도하여 주시고, 저 또한 목사님을 아버님처럼 존경하며 사모하여 왔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제 마음의 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현재 뉴질랜드 훼밀톤에 있습니다. 8월 27일 저녁 9시 비행기로 출국하였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아무런 연고도 없는 뉴질랜드에 도착하여 지금은 백백커의 숙소에 있습니다.
“캐나다 비자는 무조건 거부를 당했습니다. 이유는 ‘탈북 이유를 모르겠다?’ ‘캐나다에 가면 공작활동을 할 수 있다’ ‘북한으로 다시 갈 수 있는 인물이다’ 등등 제가 생각도 하지 않은 질문들을 가지고 딱 잘라 거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정원 간부가 캐나다에 전화를 걸어서 ‘최광혁을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였답니다.
“저는 한국에 왔을 때는 제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조용히 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열심히 공부하며 교회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웃음이 사라져가고, 한국사회에 적응할 의욕을 잃었습니다. 저는 탈북 이유를 남들에게 말하기가 싫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들의 사망때문에 한국에 오게 되었는데, 저보고 그것을 이야기 하라는 것은 부모님들께 2번 죄를 짓는 것만 같았습니다.. 부모님들의 사망 사유를 돈벌이 수단으로 응용하는 것 같아서 싫었어요. 그래서 국정원 사람들에게 강연을 안 다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정원 사람들은 저의 이런 마음을 어떻게 이해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보고 간첩이라고 하면서 ‘니가 돈벌이 수단이 머가 있어?’ ‘그것으로 먹여 살리는 우릴 보고 감사해야지’ 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국정원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였지만 이런 일들을 통하여 우리를 이용하고 언제 죽일지 모를 사람들이구나 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였지만 그것은 하나의 종이 장에 불과할 뿐 저에게는 탈북자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언제까지 왜 탈북했는지를 설명하면서 간첩오해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지 지겹고 지쳤습니다. 이제는 국정원 관계자들과 경찰 관계자들이 증오스럽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오해를 받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저는 결심하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는 한국 땅을 밟을 생각이 없으며, 제 3의 인생을 살 것입니다. 자기의 조국이 없고, 자기의 마음의 정착지는 주님이 가리켜주시는 길로 걸어가며 살겠습니다. 저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고, 주님께 많은 기도를 해주신 강변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 ‘죄송합니다’ 라고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열심히 적응을 잘해서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했지만, 그것은 저의 마음뿐 이였기에 죄송스러울 수 밖에 없어요... 이제는 여기가 주님이 보내신 마지막 정착지라는 것을 명심하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주님이 시키시는 주님 종의 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저는 많이 많이 사랑하였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저를 잘 보살펴 주실 것이라 믿고 잘 살아 갈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저는 이 편지를 받고 충격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가 그리고 우리 강변교회가 우리를 찾아온 인민군 청년 나그네를 따뜻하게 품지 못한 것이 한 없이 슬프고 부끄러웠습니다. 물론 임춘여 권사님, 임수연, 장태가 허영숙 집사님등 여러분들이 광혁군을 잘 돌아보았지만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저는 편지를 받은 다음 날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최광혁군에게, 뜻 밖의 편지를 받고 너무 놀라고 가슴이 아팠다. 그동안 광혁군에게 너무나 많은 괴로움과 아픔이 있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따뜻하게 품어주지도 못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미안하다. 우리 남한 사람들이 너무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적대적이다. 광혁군 말대로 지금 여기는 ‘이데올로기가 심하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사실 나는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의 대결을 해소시켜 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때로는 나까지도 오해를 받곤 한다. 우리 민족은 불행한 민족이다. 나와 다른 생각과 다른 전통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할 줄도 품을 줄도 모르고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려고 하면 '간첩'으로 낙인 찍기도 한다.
“이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 우선 그곳에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하면서 좋은 경험을 쌓기 바란다. 인생은 나그네이다.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기를 바란다. 감사한 것은 광혁군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을 잘 키워가기 바란다. 나도 11살 때부터 부모 고향을 모두 떠났지만 믿음 하나만 가지고 한 평생을 살아왔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나그네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슬픈 자와 약한 자와 가난한자와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 우리 강변교회가 광혁군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 교회 장로님들께서 광혁군의 유학을 위해 이번 9월부터 매달 20 또는 30만원씩 장학금을 보내기로 했다. 어떤 새신자 출신 집사님 부부는 광혁군을 위해 200만원을 그리고 세분 여집사님은 각각 10만원씩 광혁군을 위해서 헌금했다. 그 헌금들을 광혁군이 카나도로 유학 갈 때 주려고 내가 가지고 있다. 카나다로 유학은 가지 못했지만 그곳으로 보내겠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다시 오기 싫은 곳이지만 이곳에 오기 바란다. 남한도 북한도 다 가기 싫은 곳이지만 우리는 가기 싫은 곳도 가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가기 싫은' 이 땅에 오셨고 '가기 싫은' 골고다 언덕에 까지 올라가셨다. 성 프랜시스는 자기를 적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면 언제나 주저말고 부탁하기 바란다. 광혁군은 어려움과 괴로움 중에서도 항상 웃음과 희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살아 온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래서 이 메일 주소도 "스마일 희망"(smilehimang@hanmail.net)으로 한 것도 잘 안다. 항상 웃음과 희망을 가슴에 지니고 살기를 바란다. 주님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와 사랑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린다. 광혁군을 많이 사랑한다. 자주 연락하자. 2003년 8월 2일 김명혁 목사”
너무 편지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이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죄란 무엇인가” “죄란 나그네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합니다. 나그네가 누구입니까? 벧전2:11에 ‘나그네와 행인’이란 말이 나옵니다. 영어 성경에는 ‘aliens and strangers’ 라고 했습니다. Aliens 란 말은 외국인 또는 외계인 이란 말입니다. 영어 사전을 보니까 성질이 다른 사람, 생각따위가 맞지 않는 사람, 용납되지 않는 사람, 따돌림을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Strangers 란 말은 낯선 사람, 모르는 사람, 타국인, 외국인, 생소한 사람, 문외한, 풋나기 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그네란 오늘날 우리 사회로 말하면 탈북자, 외국인 노동자, 혼혈인, 북한 사람, 가출자, 장애인 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대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왜 죄입니까? 왜 우리가 나그네를 사랑해야 합니까? 신10:18,19을 중심으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립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나그네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신10:18을 읽습니다. “여호와는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하나님께서 나그네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나그네를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그네를 멸시하고 학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이 됩니다. 제가 1974년 미국 LA에 있을 때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된 일이 있습니다. 갓 태어난 저의 아들 철원이가 뇌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사의 말이 수술을 하기는 하지만 장애아가 될 확률이 50% 라고 했습니다. 저는 마음에 깊은 고통과 고민을 품게 되었습니다. 만약 나의 아들이 장애아가 된다면 내가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고통과 고민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Yes 란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며칠 기도하는 가운데 Yes 란 답이 나왔습니다. 철원이가 나의 아들이란 이유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나에게 사람들을 보는 안목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나는 신앙이나 인격이나 신체가 좀 모자라는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차별화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은 저들을 어떻게 보실까? 차별하실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런 답이 떠 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좀 모자라는 사람들도 꼭 같이 사랑하실 것이다. 저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 이후부터 좀 모자라는 사람들이나 장애인들을 보는 저의 눈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장애아가 된 저의 아들을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가장 뜨겁게 사랑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다른 장애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왜 나그네를 사랑해야 합니까? 우리가 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다른 나그네들을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나그네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그네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성질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따돌림을 받을만한 나그네들을 사랑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로마 사람 백부장과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수가성 여인과 개 같은 취급을 받던 수로보니게 여인과 사회로부터 버림 받은 죄인인 한 여인을 사랑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 사랑하시고 칭찬하신 이와 같은 나그네들을 멸시하고 정죄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거슬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 나그네를 사랑하지 않고 대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거슬리고 예수님 자신을 거슬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신10:19을 읽습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레19:34을 읽습니다.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은 나그네를 돌아보며 영접하라고 엄하게 명령했습니다. 나그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바로 주님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고 영벌에 들어가게 된다고 엄하게 말씀했습니다. 마25:41이하의 말씀을 읽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신약성경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권면하면서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분부합니다. 특히 목사와 장로와 권사의 자격 중의 하나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딤전3:2을 읽습니다. “감독[목사와 장로]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딤전5:9,10을 읽습니다. “과부[권사]로 명부에 올릴 자는 선한 행실의 증거나 있어 나그네를 대접하며 성도의 발을 씻기며 환난 당한 자를 구제하며 선한 일을 쫓는 자라야 할 것이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나그네를 사랑하고 극진하게 대접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창18:1-5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그네를 자기 집에 영접하고 몸을 굽혀 절하며 나그네의 발을 물로 씻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빌립보의 루디아와 고린도의 브리스길라와 고린도의 가이오가 나그네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고린도의 가이오는 그의 집을 교회와 나그네들의 휴식처로 제공하며 식주의 역할을 했습니다. 요한삼서에 나오는 가이오가 바로 고린도의 가이오와 같은 사람일 수도 있는데 가이오는 나그네 대접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그를 칭송하고 축복하면서 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으니라”(요삼1:5,6). 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들도 나그네 대접을 잘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그랬고 손양원 목사님이 그랬고 이기풍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이기풍 목사님 집에는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윤함애 사모는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왜 나그네를 사랑하지 않고 대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리고 예수님의 명령을 거슬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들이 모두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신10:19을 읽습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라.” 레19:34을 읽습니다. “너희는 타국인을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신약 성경은 우리들 모두가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나그네들에게 편지하노니”(벧전1:1,2).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벧전2:11). 여기에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낯선 사람이고 생소한 사람이고 용납되지 않는 사람이고 따돌림 받는 나그네들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정의했습니다. 경상도 안동사람이 제일 잘난 양반 주인입니까? 전라도 전주 사람이 제일 잘난 양반 주인입니까?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탈북자나 북한 사람들뿐 아니라 경상도 안동 양반도 전라도 전주 양반도 모두 바로 낯선 사람이고 생소한 사람이고 용납되지 않는 사람이고 따돌림 받는 나그네들입니다. 그런데 자기도 꼭 같은 나그네들인데 무어가 잘 나서 다른 나그네들을 무시하고 멸시합니까? 성경은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따돌림을 받을만한 나그네들이기 때문에 다른 나그네들은 사랑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한국 사람들아 들으라 너희도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땅에서 나그네임이니라 너희 인생들은 모두 천국 백성들이 되기에는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다른 따돌림을 받을만한 나그네들임이니라.”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그래도 미국의 조상들은 유럽과 세계 곳곳에서 온 잡다한 나그네 종족들은 다 품에 품었습니다. 그래서 미 합중국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를 찾아온 탈북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품지 못합니까? 참으로 불행한 민족이고 불행한 현실입니다. 평화통일은 우리들에게 불가능합니까? 북진 통일 정복 통일만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오늘 아침 저는 우리의 불행을 해결할만한 방안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설교를 천번 해도 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 신명기 10:18,19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전해 드릴 뿐입니다.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그리고 나그네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집시들의 친구 손영삼 선교사, 가출자들의 친구 임명희 목사, 외국인 노동자들의 친구 김해성 목사와 이선의 목사를 손으로 가리킬 뿐입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북한의 결핵 환자들을 돕는 일과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을 돕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추석에는 광야교회와 외국인노동자교회를 방문하여 가출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조그만 사랑과 위로의 손길을 펴려고 합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의 기쁨
신 10:14 ~ 15, 요삼 11 ~ 12 / 이성희 목사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참일 때에 북군 참모들이 링컨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링컨이 그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우리 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 우리 편이 되어주시기를 기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 편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성경은 여러 번 확인합니다. 시편 118:6-7에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성경의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줄서기는 피곤하지만 잘만 서면 엄청난 덕을 입습니다. 세상의 아무개가 권력을 잡게 되면 서로 눈치 보면서 줄서기를 합니다. 줄을 잘 서면 덕을 보고, 줄을 잘못 서면 해를 입습니다. 하나님께 줄을 서고, 속하여 수지맞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입니다.
요즘 말도 많은 ‘편가르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 편과 마귀 편, 이것만은 갈라야 합니다. 그러나 화합, 통합, 일치, 세계화 시대에 모두가 한 편이며 세계인이 적이 없이 동지이며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연(三緣)을 말합니다. 사회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혈연, 지연, 학연을 말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집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소속감과 연대감이 사회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생활에서도 삼연은 굉장히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래서 반대 경향을 가진 사람을 쉽게 비난합니다. 반대편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벌떼같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회생활하면서 소속된 모임이 얼마나 될까요? 알게 모르게 20개 내지 30개는 다 소속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이상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가입된 모임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속감입니다. “나는 소속되어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소속감은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철수라는 5살배기 아이가 엄마와 지하철을 탔습니다. 지하철 안에서 너무 떠들어 엄마가 “철수야, 엄마가 어떤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지?”라고 했습니다. 그 때 철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빠!”라고 하더랍니다. 요즘 유머에 보면 아빠가 엄마 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죠? 우리 모든 가정에서 아빠가 엄마 편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좋은 가정입니다. 우리는 내 편이기만 해도 괜히 좋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합니다. 내가 응원하는 편이 이기기만 해도 신나는데 하나님이 내 편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선을 행합니다.
11절에는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 속한 자가 선을 행합니까? 왜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뵙지 못합니까? 그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이 아니시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사람은 선인 하나님을 뵙지 못합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100:5에는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본성이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선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내게 행하시옵소서. 당신께서 행하시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라도 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악을 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선함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선하지 않다는 것은 이율배반적 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악인이 없으며, 마귀에게 속한 선인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2:35에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3:11에는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고 하고, 3:12에는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 속한 자는 절대로 악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사람도 별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교회 나오면서도 못된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마저도 예수님을 안 믿어 보세요. 형편없을 사람입니다. 기독교가 아무리 타락하고,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미래학자들은 미래의 사회, 정치, 경제 이 모든 것을 기독교가 이끌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건강이 무엇이라고 정의하는가 하면 조화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몸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정신과 육체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한 것입니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건강을 말할 때 정신 건강, 육체 건강, 사회 건강, 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한 가지 더 첨가하여 영의 건강까지를 건강의 내용으로 말합니다. 영이 건강해야 선합니다. 영이 건강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비행기를 탈 일이 있었습니다. 아동부전국연합회가 경주에서 열렸는데 제가 강의를 한 시간 맡아서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에 옆의 같은 줄에 앉은 외국인이 저보고 먼저 내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아닙니다, 당신이 먼저 내리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분이 다시 저에게 먼저 내리라고 해서 제가 웃으면서 당신의 자리는 30C이고 내 자리는 30D니까 당신이 먼저 내려야 한다고 했더니 그제야 웃으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제 앞서 나갔습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작은 선을 행하고 나오니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려 계단을 내려오는데 어떤 부인이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부인에게 계단 밑에까지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가방을 들고 계단 아래까지 내려갔습니다. 작은 선은 또 다른 선을 불러일으킵니다. 선을 행하면 그 자체가 재미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게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네요. 자신의 속에 악이 있는 자는 악을 행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입니다. 우리 속에 선이 있는 자는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닌 선한 사람으로 꾸미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 선한 존재로 다듬어주시고, 꾸며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선하게 꾸며지게 되고, 선을 행하게 되고, 선한 사람으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선을 행하는 자’ 혹은 ‘악을 행하는 자’는 베드로전서에 많이 말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베드로전서 3:17에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을 두려워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갈라디아서 6:9에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합니다. 선인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악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아세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창세기 4:7에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결은 단지 악을 피하는데 있지 않고 선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컴퓨터 용어 가운데 ‘GIGO’란 말이 있습니다. ‘Garbage In, Garbage Out’란 말입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란 말입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밖에 나올 게 더 있습니까? ‘GIGO’란 이 말을 다른 말로 적용해 보면 이렇습니다. ‘Good In, Good Out’입니다. ‘좋은 것이 들어가면 좋은 것이 나옵니다’. 우리 속에 좋은 것들이 들어가면 우리를 통하여 좋은 것들이 나옵니다. 좋으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면 좋은 것이 나옵니다. 선이 나옵니다. 선을 행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속한 자는 뭇사람과 진리에게 증거를 받습니다.
12절에는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니”라고 합니다. 데메드리오가 누구입니까? 에베소 교인으로 본서를 가지고 간 사람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디오드레베와 한 교회의 교인으로 구제에 힘쓰다가 추방된 사람이란 추측도 있습니다. 어쨌든 디오드레베와 대조적인 선한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의 약칭 혹은 애칭이 데마라고도 합니다. 그의 선한 일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선행은 인정받고 증거를 받습니다.
“속한 자”란 말의 속함이란 ‘에크’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어디에서부터 나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는데 하나님 편 아니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배에서 나온 자녀입니다. 낳았다고 하지만, “내 배에서나 나왔지만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라고 하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들 맞아”라는 말도 합니다. 부모에게 속한 자는 속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7에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교회의 감독은 교회 밖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합니다. 선한 사람을 선한 증거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31에서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모든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증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대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데 누가 우리에 싸움을 걸 수가 있습니까?
여자 연예인이 밖에서 들키지 않고 다니는 방법을 아세요? 화장을 지우면 된답니다. 화장기 없는 ‘쌩얼’이 유행이라니 어디 두고 보면 알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감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의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증거가 되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가 억지로 자기를 증거하려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내가 아닌 내 자신을 보이려니 얼마나 고달픕니까? 내면에 풍성함을 가진 사람들은 짙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자신감이 넘칩니다. 내면이 풍성한데 외모가 그리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근래에 웬 ‘된장녀’가 갑자기 유행합니까? ‘된장녀’는 미니스커트는 기본이랍니다. 명품 핸드백에 외제 커피를 마시고, 전공 서적을 옆에 끼고 다니는 여성을 말합니다. ‘된장녀’는 겉치레에만 치중하는 몰지각한 여성을 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의 품격이 고상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명품을 걸치고 들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명품이 되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무리 ‘루이 뷔똥’ 가방을 들고, ‘빈센트앤코’ 시계를 차도 된장 냄새밖에 더 나겠습니까? ‘된장녀’ 얘기가 나오니까 요즘은 ‘고추장남’ 이야기도 있습디다. ‘된장녀’의 짝꿍인가 봐요. 지난 번 가짜 명품 시계 소동이 났을 때 보니 하나에 1억씩 하는 가짜 명품 시계를 산 연예인들 가운데는 드라마 출연료가 회당 2천만 원이 넘는 연예인도 있었지만 수재의연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답니다. 겉에 아무리 명품을 걸치고 다닌다고 해도 속에 선한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면 명품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최고의 명품인데 무슨 다른 명품이 필요하겠습니까?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 중의 하나가 어디엔가 속하고 싶은 욕구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소속되어 있으면 소속감 그 자체가 안정되게 하고 자랑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알고 보면 소속 자체가 아니라 어디에 소속되어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입니다.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 우리의 욕구가 되고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이 우리는 이미 가장 중요한 욕구를 다 채운 것입니다.
이 세상은 5만 명에 의하여 바뀝니다. 다윗은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진영에 나아가서 싸움을 잘 하는 자 오만 명을 택하였습니다(대상 12:33). 이 세상에는 5만 명까지 필요 없습니다. 7천명만 있어도 바뀝니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놓으셨습니다(왕상19:18). 이 세상은 7천명이 아니라도 300명에 의해 바뀔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가지고 세상을 바꾸었습니다(삿7:7). 700명이 아니라 120명에 의해 세상은 완전히 바뀔 수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이 이 세상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행2:1). 세상은 50명에 의해 바뀔 수도 있습니다. 1917년 로버트 스피어는 회중 가운데 거룩한 기도의 장소를 가지고 하나님께 체험적인 기도의 열정에 사로잡힌 자 50명만 있으면 교회의 역사는 바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10명만 있어도 바뀝니다. 드와이트 무디는 만일 10명의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헌신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2명에 의하여 바뀝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면 들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8:19-20). 하나님께 속한 한 사람은 세상을 바꾸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바랍니다.
결 론
고대 그리스한 번은 하르모디오스 가문의 후손이 정적이었던 이피크라테스에게 천한 구두쟁이 아들 주제에 뭐하느냐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피크라테스는 그 모욕에 대하여 “당신과 나의 차이는 출신 성분이 아니라 내 가문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당신의 가문은 당신에게서 끝난다는 것이다”가고 대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가문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가문이 잘 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베푼 선이 뭇 사람에게서 증거가 되고 인정받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받으시고, 하나님의 선이 인정받고, 하나님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에서 선한 사람을 쫓아내는 디오드레베가 아닌 선한 삶이 인정을 받는 데메드리오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라
신 10:16-22 / 정필도 목사
신약 성경의 히브리서 11장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으며 또 어떻게 일생을 마쳤는지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디를 가든지 자신을 나그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창 23:4).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만 보더라도 그는 본래 [갈대아 우르]라는 지방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가나안으로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지만 이 땅위에 있는 지역적인 본향을 사모하며 산 것이 아니라 특별히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장차 가서 살게 될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도 저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중에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우선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세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1. 아무리 예수 믿기가 힘들고 어려워도 절대로 믿
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2.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3.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통을 당하고 억울한 일
을 당해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게 되며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마 12:36).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게 되든지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영원히 살게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장차 가서 살 내세의 삶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삶의 자세가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14:28-29과 24:19에서도 [매 삼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신 하나님이신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두신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있는 어려움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모두가 다 예수님에게 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나그네를 잘 대접하고 영접하는 것은 주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23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사수하고 말씀 안에 살면서 나그네 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보임으로 해서 교회 앞에서 사랑을 증거했다고 기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환난과 핍박이 있고 생활이 어려워도 성도들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않으므로 해서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고 말씀했습니다(히 13:1-2).
디모데전서 3:2을 보면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교회에서 감독의 자격중의 하나를 나그네 대접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5:9-10에서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는 자라야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 지방 사람들의 인심은 나그네를 얼마나 잘 대접하는가 하는 것을 보고 대강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러 곳을 다니며 집회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을 만나 대접을 잘 받게 되면 그 사람뿐만 아니라 덩달아 그 나라나 그 지방에 대한 인상도 좋게 갖게 되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그 지방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 예전에 대접을 잘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지역 사람들은 너무나 친절하고 참 좋은 사람들이야” 하며 축복의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제가 다녀간 지역으로부터 별로 좋지 않은 대접을 받았을 경우, 그 지방 사람들까지 몽땅 고약한 사람들로 여겨져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들 아주 못된 사람들이야” 하는 저주의 말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인심이 좋은 사람들이 사는 땅은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았습니다. 본래 땅은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땅도 그 지방 인심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심이 사나운 사람들이 사는 땅은 저주를 받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북한이 그렇습니다. 그 땅들이 저주를 받아 곡식이 잘 되지 않는 척박한 토지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저주를 받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김일성 동상을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놓고 주민들이 절하도록 우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셋째로, 반미 반한의 구호를 외치며 못된 저주의 말을 퍼붓고 증오하도록 어려서부터 철저히 교육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벼농사나 밭농사는 물론 심지어 아무 곳에나 심어도 잘 자라는 옥수수조차도 잘되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남한 땅도 홍수와 태풍으로 많은 피해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이 백성들이 얼마나 우상숭배를 많이 하고 악독해지고 음란해지고 죄악이 관영한지, 여기에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너희들도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이처럼 망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사인입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이번 추석에도 시장마다 각종 곡식과 과일을 풍성하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자비를 보게 됩니다. 이는 이 백성들의 죄악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날마다 부르짖는 일 천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축복하시며 긍휼을 베푸십니다.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한 절대로 이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수영로 교회 때문에 부산이 복을 받고 잘 사는 도시가 될 줄 믿습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제 14회 아시안 게임이 이 부산에서 열립니다. 이는 우리 생애에 두 번 다시 올까말까 하는 국제경기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산 발전을 십 년 이상 앞당기는 축복의 기회이며, 일만 명이 넘는 선수와 임원 그리고 그에 따른 관광객들에게 한국과 부산을 알리는 좋은 기회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특별히 회교권 사람들에게 선교를 할 수 있는 더 없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그동안 회교권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에게 들어가는 생활비가 적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전도하는 것을 법으로 철저히 금하고 있다보니 우리 선교사들이 몇 년씩 체류해도 한 명도 구원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솔직히 눈에 보이는 열매가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들이 부산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우리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어서 그들 중에 한 영혼이라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큰 수확이며 축복입니까!
이번 기회야말로 우리가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줄 아시고 저와 여러분이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외국인들에게 전도하는 일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전도법은 사랑을 베풀고 대접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에는 돈을 벌기 위해 들어와 있는 노무자들이 수십만 명이나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사람들도 많지만, 불교와 회교권에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왜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을 굳이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하셨을까요? 단순히 돈을 벌게 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저들 나라에 가서 선교하는 일이 너무나 어렵다보니 차라리 그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마음놓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여 저들을 구원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고 적극적으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전도한다면 우리가 직접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보다 얼마나 경제적이고 효과적이겠습니까.
우리가 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고 도와준다고 하면 거의 가 다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면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들 중에 특별히 성령을 받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단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신학교에 보내고 잘 훈련시켜서 목사안수도 받게 한다면 이들이 자기나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훌륭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능력 받아 자신의 동족들에게 자기나라 말로 전도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교회가 앞으로 5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목표를 세웠지만 과연 이들이 얼마나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을지 미지수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며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라도 우리교회가 한국에 와 있는 몇 십만 명의 외국인들을 상대로 선교정책을 세우고 실천에 옮긴다면 돈도 적게 들고 전도 효과도 극대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좋은 나라로 기억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재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온갖 멸시천대를 받으면서 월급을 착취당하고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동남아에 퍼져있는 반한 감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네팔 사람이 일하다가 사망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유족들에게 보상금을 전해주려고 네팔을 방문했을 때 네팔청년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자신을 향해 욕을 하는데, 그것도 한국말로 아주 심한 욕을 들어야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 사람들이 한국 욕을 하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 뼈에 사무칠 정도로 멸시와 천대를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필리핀의 마닐라 공항에서 공안당국으로부터 매우 불쾌할 정도로 심한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왜 한국 사람들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했을까요?
최소한 우리 자신들은 그렇지 않았다하더라도 그 사람들을 고용했던 일부 중소기업체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억울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들이 돈 때문에 한국에 와서 일한 적이 있지만 그래도 자기나라에서는 대학 출신이고 교사로 근무했던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들 속에 한을 품게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결정적으로 선교를 가로막는 불행한 일입니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제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온 교회 성도들이 앞장서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 한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대접을 잘했습니다. 그는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고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미국 피츠버그의 한 가구점에 클레멘토 스톤이라는 한 젊은이가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가게 문 앞에서 웬 할머니 한 분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뛰쳐나가 할머니에게 날도 추운데 잠깐 들어오셔서 불을 쬐고 계시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를 대신해서 자신이 밖에 나가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아주 멋진 자동차를 탄 신사가 오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신사에게 다가가 혹시 할머니 한 분을 찾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신사는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신사를 가게 안으로 안내했습니다.
그 신사는 할머니의 아들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그 신사는 그 유명한 피츠버그의 강철왕 카네기였습니다. 카네기는 자기 어머니를 따뜻하게 영접한 그 가게의 점원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 가게를 찾은 카네기는 그 점원을 불러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가게를 갖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카네기는 그에게 가구점을 차려주고 회사 사무실마다 가구를 구입할 때는 그 가게의 가구를 구입하게끔 지시했습니다. 그로부터 그의 가게는 카네기의 단골가게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클레멘토 스톤은 돈을 많이 벌게 되어 이름난 사업가로 성공했습니다. 작은 친절이 그에게 엄청난 축복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하는 일에 힘쓴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반드시 축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이번 14회 아시안 게임을 통해서 부산에 있는 교회들이 하나가 되고 전도와 선교에 불이 붙는 계기가 되며, 이를 통해 교회에 대한 부산 시민의 생각이 달라져서 부산성시화가 앞당겨지는 계기가 되는 축복이 오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삶
신 10:17-19, 마 25:40 / 김명혁 목사
오늘은 어렵고 혼란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말씀을 잠시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물론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섬기며 예배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오늘은 이웃과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삶”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웃과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삶”을 귀중하게 보시면서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성부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들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아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 10:17-19).
선지자 이사야도 같은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길게 했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5-17).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성자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 곧 주님 자신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과 꼭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런 착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늘 집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말씀을 아주 길게 하셨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4-40).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충만한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구제와 섬김의 일을 하게 하셨는데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들을 통해서 그리고 안디옥에서는 착한 사람 바나바를 통해서 하게 하셨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행 6:3-6).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 11:22-24).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배님들 중에서도 이웃과 모든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가난과 고난과 청빈의 삶을 사신 귀중한 분들이 여러분들 게셨는데 이기풍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일곱 분 목사님들 중의 한 분으로 안수를 받은 후 윤함애 사모님과 함께 그 당시 이방과도 같은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13년 동안 제주도 복음화에 전력을 다했는데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떼들로 낮에는 나병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들에게는 윤함애 사모님이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제주도의 복음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한국의 무디 라고 불리시던 최고의 부흥사로서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마다 받은 사례비를 자기 개인이나 가족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보다는 작은 교회들과 어려움에 처한 교회들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나중에는 가지고 있던 작은 집까지 팔아서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데 썼다고 합니다. 결국 사모님과 세 명의 딸들은 거지와 같은 가난한 청빈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 자신도 거지와 같은 가난한 삶을 사셨는데 전국 곳곳으로 부흥회를 인도하러 다니실 때 자동차도 없이 소 구루마와 리어카와 자전거 꽁무니에 타고 다니셨는데 때로는 길가에 넘어져서 상처를 입기도 했고 잘 곳이 없어서 소 외양간에서 자기도 했다고 합니다.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지니고 사신 너무너무 귀중하고 보배로운 신앙의 선배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주님 사랑과 나환자 사랑과 원수 사랑에 미쳐서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가난과 고난의 길로 달려가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과 섬김의 노래를 인용합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한경직 목사님은 신의주 제이교회 목회 시절부터 서울 영락교회 목회 시절까지 모든 종류의 불우한 사람들에게 온갖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신 절대적인 사랑과 도움의 삶을 사신 대표적인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신의주에서는 고아원과 보린원을 설립하여 고아들과 노인들을 친히 돌아보았고 나중에는 영락 보린원을 비롯하여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 집, 재가노인 복지상담소 등을 세웠고 월드비전을 창설했고 사랑의 쌀 나누기운동도 펴 나아갔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말이나 지식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이 아니라 사랑과 착함과 가난의 삶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너무너무 귀중하고 보배로운 신앙의 선배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작은 예수라고 불리시던 장기려 박사님은 아시아의 최고 수준의 의사였는데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평생 집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검소하고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그는 이런 소원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의사를 한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삶의 목적은 명예, 행복, 부귀도 아니었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 임명희 목사님과 정경화 사모님을 비롯해서 사길사 회원들 모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라서 그리고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서 여러 종류의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한 평생을 살기 위해서 모이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축복의 손길을 펴시어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수 많은 사람들에게 펴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게 하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
신10:17-19,눅10:33-37,딤전6:18-19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중국 연변 지역의 여섯 곳을 방문하며 도움이 필요한 우리 조선족 동포들과 학생들과 어린이들에게 조그만 사랑의 손길을 펴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지만 지난 9 년 동안 연변 지역에 살고 있는 가장 어려운 우리 조선족 동포들에게 여러분들의 기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전달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큰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중국 연변 지역에는 10여 년 전부터 한국 사람들로부터 사기 피해를 당해서 풍비박산된 조선족 가정이 1만 8천 여 가정이나 있는데, 그런 가정들 중 5 가정을 직접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연변 지역에는 엄마 아빠를 잃고 할머니와 함께 고아로 살아가는 불쌍한 아이들과 학생들이 너무 많은데, 그런 가정들 중 6 가정을 직접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빠는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이고 엄마는 북한에서 탈북한 북한 여자였는데 엄마가 중국 경찰에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 가서 엄마 없이 눈물로 살아가는 불쌍한 어린이들의 가정이 연변 지역에 940여 가정이나 있는데, 그런 가정들 중 9 가정을 직접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연변 지역에는 올 데 갈 데 없는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우리들이 지난 수 년 동안 돕고 있는 노인들 10여명을 직접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고아 학생들이 공부하는 대학교와 소학교를 방문해서 학생들과 담임 선생님들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토끼를 기르고 오리와 닭과 칠면조와 기러기와 게사니를 기르고 물고기를 기르며 자활을 힘있게 하고 있는 농장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4박 5일 동안 하루에 13시간 이상씩 소형 버스를 타고 저들이 살고 있는 골짜기 골짜기를 찾아 다녔습니다. 되도록 많은 가정을 방문하려고 관광이라고는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잠깐 서서 두만강에 발을 담그고 북한 땅을 바라본 일은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연변 지역에 있는 가장 어려운 가정들 120여 가정과 100여명의 학생들을 돕고 있는데, 이번에 가는 곳 마나 저들을 가장 좋은 식당에 초청해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일곱 번 대접하고 돌아왔습니다. 도문에서 40여명에게, 안도에서 40여명에게, 훈춘에서 50여명에게, 연길에서 80여명에게, 지신에서 30여명에게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연변 사범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피자를 처음 먹어본다고 말하면서 피자와 스파게티와 김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제가 가는 곳마다 어린이들에게 스티커를 주곤 했는데 전지연이라는 소학교 학생은 한국에 친척이 있는 친구들이 스티커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스티커를 직접 만져보기는 처음인데 스티커가 이렇게 고울 줄은 몰랐다고 감탄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너무 어렵고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격려의 후원금을 조금씩, 조금씩 전달했는데 이번에 식사비를 포함해서 500여 만원이 들었습니다. 이 돈은 강변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저에게 전해준 사랑의 헌물이었습니다. 이 헌물은 하나님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고 우리 조선족들에게는 따뜻한 사랑의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연변 지역을 방문하게 된 주 목적은 우리가 정기적으로 돕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돌아보는 것과 함께 우리가 정기적으로 돕지 못하는 아주 어려운 학생들 61명에게 '긴급 지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스스로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700만원을 가지고 가서 61명에게 선물과 함께 10만원씩 '긴급 지원금'을 전달했는데 이것이 저들에게 너무나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이 700만원은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500만원 강변교회가 200만원 후원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긴급 지원을 받는 61명 중 몇몇 학생들을 만나보면서 너무 형편이 어려운 것을 보고 금년에 또 한번 ‘긴급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슬픔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첫째, 엄마가 북으로 잡혀간 불쌍한 어린이들의 슬픔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연변 지역에는 북한에서 탈북해서 조선족 아버지와 결혼해서 살면서 자기를 낳아준 엄마가 북으로 잡혀 간 가정이 조사된 것만 940여 가정이나 되고 엄마를 잃은 어린이들은 천 여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엄마가 6,7년 전에 북한으로 잡혀간 어린이들도 있었고 2,3년 전에 북한으로 붙잡혀간 어린이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어린이는 엄마가 중국 경찰에 잡혀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중국과 북한과의 정치적인 관계 때문에 이런 불행한 일이 생겼지만, 또한 한국에서 탈북자들의 북한 실상 폭로가 이와 같은 체포를 자극했다고 현지인들이 말했습니다. 한국교회가 탈북자들을 내 세워 북한의 인권 유린을 폭로할 때마다 북한 여성 체포가 연변 지역 전역에 철저하게 이루어지곤 했다고 말했습니다. 동북아평화연대의 연변 책임자인 배동걸 부장은 이 비극의 책임을 어느 정도 남한과 남한 교회가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엄마가 북으로 잡혀간 소학교 1학년 어린이들이 용정 지신 마을에만 3명이나 살고 있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우리는 미향이, 금화, 선화 어린이들의 집을 모두 방문했습니다. 미향이는 엄마가 보고 싶을 때는 책상에 올라가서 엄마의 결혼 사진에 뽀뽀를 한다고 했습니다. 엄마가 없는 미향이와 금화와 선화의 집은 너무 가난하고 더러웠습니다. 아빠들은 모두 병에 걸려있었고 늙은 할머니들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너무너무 불쌍했습니다. 금화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슬픈 이야기입니다. 같이 동행했던 UBF의 총무 이옥기 목사님은 금화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그 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용정 지신의 강금화 어린이는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이다. 어머니는 탈북 여성이었는데 금화를 낳아서 키우다 이북으로 잡혀갔다. 중국 공안들이 갑자기 들이 닥쳐 집을 에워싸고 금화 어머니를 체포하여 데리고 갔다고 했다. 그 후 금화는 엄마 없이 자라기 시작했다. 아빠는 간이 병들어 얼굴이 검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병을 앓고 있었다. 할머니는 남루한 방바닥을 계속 걸레로 닦고 있었다. 김명혁 목사님은 금화를 옆에 앉히시고 스티커를 선물로 주시고 얼굴에 붙여 주시기도 했다. 또 크레파스를 선물로 주시고, 또 서동요 만화책 세 권도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아버님께 드리도록 후원금도 주셨다. 선물을 받은 금화는 매우 기뻐했다. 주변에서 금화는 노래를 잘하니 한 번 불러 보라고 했다. 금화는 앞으로 나가서 율동을 하면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노래가 하필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 담긴 노래였다. 금화는 몇 구절 부르다가 그만 목이 메어 울기 시작했다. 맑고 티 없는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엄마-’ 하고 부르는 그 목소리에 내 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내 안경이 눈물로 얼룩지고 부옇게 되었다. 내 가슴도 이렇게 아프고 아려오는데 저 어린 아이의 마음은 얼마나 더하랴… 김명혁 목사님은 금화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안아주셨다. 그리고 자신이 11살 때 이북에서 넘어와 어머니 아버지 없이 살아오신 얘기를 해 주시고 금화도 굿굿하고 용기 있고 곱고 멋지게 자라야 한다고 격려해 주셨다. 온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금화를 데리고 손잡고 다니셨다. 그날 저녁에는 함께 지신교회에서 저녁식사를 목사님 곁에서 하게하고 식사 후에는 ‘좋으신 하나님’ 노래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시편 30편 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말씀을 통해 금화와 그곳에 있는 동포들이 슬픔과 어려움이 많지만 슬픔이 변하여 춤을 추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다른 분들도 은혜를 많이 받았겠지만 강금화 어린이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 두고두고 기억되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일행은 금화와 미향이를 바라보면서 너무너무 슬퍼서 가슴에 슬픔과 아픔을 가득히 안고 돌아왔습니다.
이와 같은 슬픔의 이야기는 금화의 이야기로 끝 나는 것은 아닙니다. 용정의 금화와 미향이와 선화도, 연길의 만호와 수영이도, 왕청의 화련이와 룡국이도, 도문의 광일이와 학범이도, 훈춘의 홍실이도 그리고 천여 명의 어린이들이 모두 그런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안고 눈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훈춘의 두만강 변에는 홍실이라는 소학교 학생이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북으로 잡혀간 후부터 아버지는 정신 이상이 되었고 홍실이도 정신이 약간 이상이었습니다. 집은 집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돼지 우리처럼 더럽고 더러운 초가집이었습니다. 우리가 홍실이의 집을 방문했을 때 위에서 비가 새고 있었고 쥐들이 자주 나온다고 했습니다. 너무너무 기가 막혀서 우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저의 집 사람은 불쌍한 아이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곤했는데 홍실이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뜨거운 눈물을 쏟고 있었습니다. ‘긴급 지원비’ 10만원에다 후에 다시 20만원을 더 주고 왔는데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동행했던 황규민 집사님은 이들을 바라보면서 지닌 슬픔과 아픔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사는 광일이와, 훈춘시 외곽에 사는 홍실이, 지신교회 근처에 사는 금화를 보고 온 날 밤에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민족의 비극, 이보다 더 불행할 수 있을까 … 세상은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이라지만 그 헤어짐이 단순한 헤어짐이 아니라, 조선 민족과 교회에 대한 징벌, 바로 '주님의 흩으심'이라면 …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 이상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두만강 가에 발을 담근 채 나는 사랑 없는 외식의 죄를 눈물로 고백하며 생이별한 아이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엄마 노래를 부르다가 기어코 울음보를 터트린 8살 금화의 그 눈물 … 그것은 바로 피눈물이었다. 금화야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네 대신 내가 울어야 하는데 …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이 울어야 하는데 …… 울음 그친 금화가 티없는 얼굴로 김목사님의 손을 붙잡고 “Jesus I love you”노래를 따라 부르던 모습이 지금도 눈가에 아른거린다. 그런 형편 속에서도 밝고 맑게 자라주는 광일이와 홍실이, 그리고 금화가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저는 이들 불쌍한 고아 어린이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이들을 잠깐 둘러보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저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번 연변 지역 방문을 하면서 이런 기도를 자주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건강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필요한 물질도 주시옵소서. 불쌍한 저들을 계속해서 돌아보게 하시옵소서. 저들과 북한 동포들을 눈물과 사랑으로 돌아보게 하시옵소서.”
둘째, 사기피해를 당한 불행한 사람들의 슬픔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연변 지역에는 사기 피해를 당한 조선족 가정이 1만 8천 여 가정이나 되는데 이와 같은 사기 피해는 가정을 풍비박산 나게 했고, 부모가 병들어 죽거나 헤어지게 했고, 그 결과로 아이들이 고아가 되게 했습니다. 사기 피해를 당한 후 빚을 갚지 못해 빚쟁이에게 얻어 맞아 병신이 된 사람들도 있었고 죽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사기 피해를 당해서 죽으려고 하다가 죽음 직전에 도움의 손길을 받아 살아나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옥기 목사님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브로커를 통해 돈을 주고 한국 비자를 받고자 하다가 사기 피해를 당한 경우도 18000여 가정이나 된다. 이로 말미암아 충격을 받고 병든 경우가 허다하고, 어떤 분은 돈을 빌려서 브로커에게 주었는데 사기를 당하자, 돈을 빌려준 사람이 돈 안 갚는다고 때려서 눈알이 빠지고 의눈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어른들이 병들어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고 있는 가정도 많았다. 이렇게 슬프고 아픔 당하는 가정을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에서는 지난 9년 동안 연변에 120여 가정, 러시아에 70여 가정을 후원해 왔다. 동아려 가정은 사기피해 가정인데 어머니는 지난해 루프스를 앓다가 돌아가셨고 현재는 뇌혈전으로 건강이 회복되지 않은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동아려는 지난 3년 동안김 목사님으로부터 학비 보조를 받아 예술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김 목사님을 만나자 아려는 목사님에게 안겼고 아버지는 꿈만 같다고 말하면서 뜨거운 감사를 김 목사님에게 표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동아려가 복음 찬송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를 멋지게 부르기도 했다. 아려는 연변대 음악부 성악 반에 실기시험을 합격하고 이론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아인 렴춘희 학생은 3년 동안 학비 보조를 받아 대학 졸업반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양신복 학생은 대학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양신복의 어머니는 세차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부모도 못 도와주는 아이의 학비를 김 목사님께서 후원해주어서 신복이가 대학 3학년이 되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김 목사님에게 큰 소리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고아인 리예란은 학비를 지원받고 마침내 사범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훈춘의 오금숙씨 같은 경우는 사기 피해를 당한 후 죽고 싶은 생각까지 했는데 한국복음주의 협의회에서 영농자금을 지원해주어서 토끼 농장을 시작했다. 지금은 토끼뿐 아니라 오리, 닭, 칠면조, 양어장까지 갖춘 제법 큰 농장을 경영하게 되었으며 여러 불우한 다른 사람들을 돕고, 북한 탈북자들에게까지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이번에 동행했던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총무인 이현정 목사님의 글도 인용합니다.
“도문에 살고 있는 김광은 18살인데 할머니와 살고 있다. 6살 때 그의 아버지가 2만위엔을 사기 당해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가출을 하였다. 할머니와 함께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할머니는 중풍이시다. 또 김광은 6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쳤다. 안도현의 박청은 소학교 3학년이다. 그의 아버지가 한국에 나오려다가 빚을 내었는데 사기를 당했다. 이 문제로 맞아서 한쪽 눈이 실명되었다. 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데, 할머니는 허리를 다쳐서 온전치 못하다. 왕청현의 김군정은 소학교 1학년이다. 그는 건강한 부모가 계시고 할머니도 계신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한국에 오려다가 6만 위엔을 사기 당해 집을 빼앗기고 할머니가 살던 집에 와서 살고 있다. 부모는 농사일을 열심히 하지만 빚을 갚을 길이 없다. 이영숙 회장의 말에 의하면 이런 사기 피해자가 18,000명이라고 한다. 믿기지 않는 숫자이다. 동족으로서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책임을 느낀다. 피해 가정들을 방문했을 때에는 이들의 어려움에 동참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나눔을 생각할 뿐 아니라, 동족의 허물과 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짊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영숙 회장을 비롯하여 지역 회장들이 대부분 동일한 사기 피해자들이었다고 한다. 왕청현의 한길자 회장이나, 훈춘의 오금숙 회장은 사기 피해 후에 죽으려고 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이분들이 시련을 극복하고 어려움을 당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헌신적으로 결연 사역을 돕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사기피해의 후유증으로 가정이 풍비박산된 가정들이 연변 지역에 수 없이 많습니다. 저들의 슬픔의 이야기는 이어지고 또 이어집니다. 이현정 목사님이 지적한 대로 저들의 불행의 책임을 우리가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저들을 사기 쳤기 때문입니다. 이현정 목사님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동족으로서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책임을 느낀다. 피해 가정들을 방문했을 때에는 이들의 어려움에 동참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나눔을 생각할 뿐 아니라, 동족의 허물과 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짊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셋째, 엄마와 아빠를 잃은 불쌍한 고아들의 슬픔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연변 지역에는 부모를 잃은 불쌍한 고아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홀 부모 아래서 사는 절반 고아들도 너무 많습니다. 저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기도 어렵고 공부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번에 우리들이 정기적으로 돕고 있는 고아학생들과 홀 고아학생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번에 '긴급 지원'을 하게 된 고아들도 만났습니다. 대학생들도 고등학생들도 소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렴춘희도 리예란도 동아려도 량신복이도 그런 아이들입니다. 저는 고아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나도 11살 때부터 한 평생 고아로 살아왔다고 말하면서 저들을 위로하며 격려했습니다. 몇몇 고아 학생들이 식사할 때마다 감사의 편지를 읽었는데 그 편지들을 그대로 읽습니다.
“김명혁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도문시의 조학금을 받는 친구들을 대표하여 저희들을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김명혁 할아버지한테 가장 충심으로 되는 인사를 드립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조학금을 받게 되는 우리는 모두가 엄마가 없거나 혹은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들입니다. 여기에는 가정의 경제곤란으로 하여 엄마, 아빠가 외국으로 가서 4,5년씩 소식이 없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혹은 경제난으로 하여 다투다가 엄마, 아빠가 이혼하고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아 할머니의 손끝에서 자라는 친구들도 있으며, 또 사고로, 병으로 하여 엄마를 일찍 잃고 아빠와 함께 어려운 생활을 보내고 있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김명혁 할아버지께서 엄마다운 사랑과 아빠다운 사랑을 물부으시여 멀리에서 걱정하시고 우리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보내 주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전번에 보내주신 할아버지의 사랑의 조학금으로 우리는 새학기 교재 값과 과외서적 값을 어렵지 않게 해결하였습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의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 가정에서는 새학기 어려운 고비를 쉽게 넘을 수 있었습니다. 우린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담긴 교과서를 들고 열심히 학습할 것입니다. 또한 서로 돕고 아끼는 인간애가 충만된 사랑의 마음을 키워 가는 것으로써 할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려 하며 저희들도 남을 돕는, 남을 생각하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커가겠습니다. 김명혁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007년 5월 15일 도문시조선족실험소학교 조학생대표로부터 박미향”
“김명혁 할아버지를 비롯한 후원님들께. 안녕하십니까? 처음으로 드리는 편지입니다. 내가 2살 때 어머니께서 세상 떴고 뒷이어 아버지께서도 2002년에 병으로 세상을 뜨다 보니 저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사회상의 마음 고운 분들로 하여 나는 혼자가 아니며 나의 주변에는 아직도 마음씨 고운 분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부모님들이 세상을 뜬 후 저는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할머니께서는 년세가 많은 탓으로 병도 많습니다. 여태껏 사회의 방조로 생활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김명혁 할아버지와 후원님들의 방조에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꼭 학습을 잘하여 나를 도와준 모든 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으며 그런 분들과 사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럼 김명혁 할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후원님들의 건강을 기원하고 행복을 축원하고 하는 일마다 순조롭기를 바랍니다. 2007년 5월 16일 안도 4중 3학년 3반 손은화”
“존경하는 김명혁 할아버지: 안녕하십니까? 저는 훈춘시 마천자향중심소학교 4학년 2반에서 공부하는 황해성입니다. 우리 집은 70 고령의 할머니가 계시고 어머니께서도 불구시고 아버지마저 병환에 계시다 보니 하루하루 생활하기가 너무너무 어려웠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공부하는 저한테 3년 전부터 행운이 찾아 들었습니다. 나한테 학용품, 학잡비, 남부럼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바로 할아버지께서 나한테 아버지, 어머니 못지 않는 사랑의 손길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전 아무 근심 없이 학생은 단지 학습만 잘하면 된다는 일념으로 공부만 하면 되었습니다. 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소리쳐 울고 싶었고 마음껏 외치고 싶었습니다. 너무너무 고맙다고. 이렇게 너무너무 행운스러운 나를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보지는 못했지만 난 김명혁 할아버지의 사랑 잊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2005년 전시 ‘백일장’ 작문 경연에서 전시 2등의 영예를 안아왔습니다. 학급에서도 학습 성적이 차한 학생이 있으면 열심히 도와주고 곤란이 있는 학생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면서 형제처럼 사이 좋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난 김명혁 할아버지께서 나한테 주신 사랑의 마음 잊지 않고, 할아버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훌륭한 인재로 되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저도 명실에 부합되는 유용한 인재가 되어 나처럼 생활난으로 공부에 어려운 학생들을, 생활난에 허덕이는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렵니다. 할아버지처럼 사랑을 온 세상에 주면서 살아가렵니다. 김명혁 할아버지, 그리고 제 부모님을 모신 이 자리에서 전 목청껏 웨치렵니다. 존경하는 할아버지,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할아버지의 하늘만큼 땅만큼 한 사랑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황해성”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 있는 고마움의 글들인지 모릅니다. 슬픔이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여주는 귀한 글들입니다. 우리가 지난 9년 동안 편 사랑의 손길은 인도주의적 사랑에 그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고백하게까지 했습니다. 이영숙 회장은 물론 훈춘의 오금숙 회장은 말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높이 드러냈고 여러 학생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저들의 신앙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우리들이 베푼 사랑의 손길이 간접 선교의 역할을 한 것이었습니다. 동아려는 가슴에 뜨거운 신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이번에 연변 지역을 방문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와 사랑과 헌금으로 후원해주신 성도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현지에서 헌신적으로 수고하는 이영숙 회장님과 여러 지역의 회장님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굿굿하게 자라가는 귀엽고 예쁜 연변 지역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신 구약 성경은 우리 믿는 자들을 향해서 도움이 필요한 가난하고 병들고 슬프고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라고 가르칩니다.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슬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강도 만난 자의 슬픔과 아픔의 신음 소리를 직접 들었고 여러분들은 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제 제사장이 될 수도 있고 레위인이 될 수도 있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동행했던 이옥기 목사님은 연변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강도 만난 사람들 같이 보였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조금이라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싶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이번에 연변지역을 다녀보면서 그곳에 있는 많은 분들이 누가복음10:25-37절에 나오는 강도 만난 자와 같다고 생각되었다. 북한에게 엄마를 빼앗긴 어린 아이들이 강도 만난 자들이고, 남한에 오기 위해 빚을 내어 브로커에게 준 돈을 빼앗긴 자들이 강도 만난 자들이 아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뇌출혈로 쓰러진 분, 각종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는 분, 빚을 못 갚는다고 맞아서 눈이 빠지고 실명한 분이 강도 만난 자가 아니겠는가? 누가 이들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 자비를 베푼 자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우리가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그동안 UBF에서도 후원을 해왔지만 이번 현지 방문을 통해 좀 더 후원을 해야 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UBF 이현정 대표님과 상의하는 가운데 몇 가정이라도 더 할 방향을 잡게 되었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이 세상에 더 오래 살지 모릅니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에 누군가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면서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전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연변 지역에 결연 가정을 120 가정에서 170 가정으로 늘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50 가정을 더 늘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사랑의 손길을 펼 수 있도록 필요한 건강과 필요한 물질을 채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꼭 같은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들로 만들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나를 사랑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나를 위로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나를 눈물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나를 소망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나를 기쁨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나를 구원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나를 주님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삶의 주인이신 성령
신 10:17-21 / 이성희 목사
우리 교단 총회가 정한 올해의 주제는 “생명의 성령이여 삶의 주인이 되소서”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주제에 맞추어 “삶의 주인인 성령님과 함께 교회의 영광 회복을”이라는 주제를 정하였습니다. 교회의 영광 회복은 삶의 주인이신 성령님과 함께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주인이 될 만한 분이 주인이셔야 삶이 편안합니다. 주인이 될 자격이 없는 분이 주인이 되면 늘 불안하고 평안하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어떤 귀신이 어떤 집에 있다가 잠시 나갔다 왔습니다. 와보니 집이 잘 청소되어 깨끗해졌습니다. 이 귀신은 나가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형편이 이 전보다 더욱 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귀신이 하나만 있어도 미칠 것인데 일곱이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혼란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인이 잘못 들어오면 이런 고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우리 삶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우리 삶의 문제를 누가 결정합니까? 중요한 결정을 무엇에 근거하여 결정합니까? 내 경험, 내 생각, 내 눈치, 내 지식에 따라 결정하지는 않습니까? 바울의 항해는 결국 파선이라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 결과는 잘못된 결정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말보다 세상 사람들의 말에 의하여 항해를 결정한 것입니다.
우리 배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인생 항해에서 주인은 내가 아니라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주인이신 삶을 사는 우리는 주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생명의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결정하고, 인도하고, 관리하면 가장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이 지배하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려면 의와 평강과 희락이 필요합니다. 한 해 내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처럼 성령님이 지배하시고 주인 되시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물질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물질이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물질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삶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오직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 의로 인정받은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니다. 구원의 확신 있습니까? 여기에 평강이 있습니다. 참 평화는 구원에서만 비롯됩니다. 로마서 5:1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이런 평강이 곧 기쁨입니다. 구원의 기쁨이 넘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이 우리 한 해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의의 삶입니다.
의란 옳음을 뜻합니다. 즉 의는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대로 살면 옳은 것입니다. 의로운 것입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인간과의 질서, 자연과의 질서가 잘 지켜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서들이 파괴되면 무서운 재앙이 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를 보세요. 온통 무질서와 거짓말이 난무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삽니다. 이런 모든 것이 질서가 아닙니다. 의가 아닙니다. 불의한 것입니다. 우리를 불의하게 살게 하는 주인을 물리치고, 의롭게 살게 하는 주인을 모셔야 합니다. 큰 질서를 잘 지켜야 하지만 작은 질서도 잘 지켜야 합니다. 운전을 할 때 교통 신호를 잘 지켜야 합니다. 길을 건널 때 보행자 신호를 잘 지켜야 합니다. 이런 작은 질서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큰 질서를 잘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너무 거짓말이 만연해 있습니다. 너무 쉽게 거짓말을 합니다. 이런 것들도 불의한 것입니다. 신앙이란 인격성을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정도의 거짓말은, 이런 정도의 관행은, 하면서 예사로 질서를 파괴하고 불의를 자행합니다. 고린도전서 13:6에는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불의를 행치 않습니다. 자연을 사랑하면 파괴를 일삼지 않습니다. 조금만 남을 배려하고 작은 나가 아니라 큰 나를 생각한다면 세상은 의롭게 변할 것입니다. 성령님의 내 삶의 주인이 되면 이런 의의 삶을 삽니다.
둘째, 평강의 삶입니다.
성경은 ‘평강’, ‘평화’, ‘평안’, ‘화평’을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헬라어의 ‘에이레네’라는 같은 단어를 의미에 따라 다른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평화는 예수님의 본질이며 별명입니다. 이사야 9:6에는 오실 예수님을 예언하면서 “평강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14에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가로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모든 사람에게 평화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평안할지어다” 혹은 “평안하뇨”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바울의 서신에는 “평강의 하나님”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서 평강을 빼앗아 가는 주인이 누구입니까? 마귀는 평강을 기뻐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조금만 불안하고, 불편하면 금방 평화를 상실합니다. 이런 평강치 못한 삶에서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평화의 왕, 이 분이 주인이 되면 늘 평화롭습니다. 이 분이 주인 아니면 늘 불안하고, 불평이 생깁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입니다. 성령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면 이런 평강의 삶을 삽니다.
셋째, 희락의 삶입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기쁨도 주십니다. 왜 우리에게 기쁨이 없습니까? 기쁨의 근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근원은 예수님입니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라고 우리는 찬송합니다. 우리는 기쁨이 없는 시대에 삽니다. 우리의 가정, 직장, 미래, 북핵문제, 경제여건, 정치 어느 하나 기쁨을 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성령님이 계시면 기쁘지 않을 수 없는데 계시지 않으면 기쁠 수 없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기쁨을 강조합니다. 바울보다 더 비참하고, 더 힘들고, 더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을까요? 그는 지금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하다가 아주 기쁘지 않은 일을 당했습니다. 옥에 갇혀 기쁠 일이 없는 바울이 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무엇이 바울을 기쁘게 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기쁜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있으니까 기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0에는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근심도 기쁨이 되는 비결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6:22에는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기쁨이 빼앗기지 않는 비결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면 이런 기쁨의 삶을 삽니다.
결 론
어느 큰 도시에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부잣집 양쪽에 대장쟁이와 목수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신자였습니다. 그들은 매일 일하면서 망치 소리에 맞춰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부자는 망치소리도 시끄러운데 찬송까지 하니 비위가 상했습니다. 그들을 억지로 보낼 수는 없고 스스로 떠나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장쟁이가 와서 “이사하게 되어서 뵙고 가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자는 내심으로는 기쁘면서도 “섭섭하게 됐네, 식사나 하세” 하면서 그들 방으로 데리고 와서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대장쟁이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식사 중에 목수가 부자 영감을 찾아 왔습니다. “영감님, 집을 옮기렵니다. 그래서 인사차 들렀습니다” 목수 마저 이사를 간다니 부자 영감은 기쁘면서도 “섭섭해서 어쩌나, 둘이 다 떠난다니, 식사나 하세, 마침 대장쟁이도 있으니 들어오게” 하면서 그들을 대접하였습니다. 그들이 떠날 때 부자 영감은 “종종 들리게 편지도 하고” 하고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수는 “섭섭해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 둘이 집을 서로 맞바꾸기로 했습니다”. 부자는 맥이 풀리고 몹시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둘 다 떠나는 줄 알고 괜히 섭섭해했네. 하여간 같이 지나게 됐으니 찬송소리 듣기 싫어도 들어야겠네”라고 하였답니다. 가지고도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가지지 못하고도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에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 인정받아 구원받은 것이 평강이며 기쁨입니다. 이런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내 삶의 주인이 될 때에 내 삶이 보람이 있습니다. 성령님께 내 삶의 주인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가장 편합니다. 가장 부요합니다. 가장 은헤롭습니다. 아무 염려 없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올해 내내 성령님이 주인이신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