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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하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동시대에, 혹은 후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사상가이자 경제학자 칼 마르크스
애덤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말한 이후 수많은 경제학자들의 논리는
직,간접적으로 애덤스미스 경제학의 지배 하에 있었고,
로버트 오웬과 토머스 모어가 꿈꿔오던 '유토피아'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그야말로 '꿈'에서나 존재하는 실체없는 허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의 등장은 말 그대로 '혁명' 그 자체였습니다.
1848년, 마르크스 &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프랑스 2월 혁명과 맞물리며 엄청난 파급력으로 이데올로기 속으로 침투했고,
<공산당 선언>이 번역된 모든 나라들은 마르크스의 수많은 추종자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얇은 책자가 이토록 사람들을 폭발적으로 선동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노동자 중심'의 이론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나라를 돌아가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노동자 계급'은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에 비해 지주와 자본가들의 지배 아래 탄압받고 있었고,
그 어떤 사상과 이념 속에도 그들을 일으킬 수 있는 불씨는 없었습니다.
"자본은 머리 끝에서 땅 끝까지 모든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태어났다" 라는 말 아래 태어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그들을 단단한 응집력으로 단결시킬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마르크스의 역작 <자본론>의 탄생은 그를 단순히 선동가의 이미지에서 '경제학자'로 평가 받을 수 있는 역할을 해주었고,
그가 <자본론>에서 설명하는 사회주의 국가는 '혁명 체제'의 탄탄한 밑거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이 드디어 실체로 다가왔던 건
전혀 예상치 못한 러시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이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등장.
이 새로운 사상이 혁신적이었던 이유는 군부 쿠데타에 의한 정권 전복이나,
윗 세력들의 권력 다툼에 의한 정권교체가 아닌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혁명' 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급속도로 세력을 키워간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그러나
러시아에서 최초로 혁명이 성공할 것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에는 '자본주의의 붕괴'가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대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이 성숙하지 않았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성공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죠.
혁명의 또다른 이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
누군가는 당시 러시아 차르 체제의 불안정성을 보았을 때 혁명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동시대에 반드시 유능한 혁명 지도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를 빼먹은 말이었습니다.
바로 러시아에는 유능한 혁명가 레닌이 있었기에 혁명은 가능한 일이었고,
그리고.. 그의 곁에는 천재적인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실체를 완성시킨 건 레닌이었지만,
그의 곁에 레온 트로츠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레닌과 스탈린 만을 기억합니다.
레온 트로츠키
레닌의 곁에서 세계 최초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성시키는 그 과정에서
스탈린에 의해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 그의 인생 자체는
'혁명가'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가가 됐었을지도 모를 그의 생애는 뜨거운.. 그 무엇을 담고 있습니다
1896년. 당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엄청난 속도로 전세계에 확산되어 있었고,
각국 수많은 마르크스 추종자들은 음지에서 '변혁'의 세상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역시 사회주의 물결 속에 예외가 아니었죠.
당시 17세, 료바(트로츠키의 본명)는 처음으로 사회주의 사상과 만납니다.
원예 모임으로 가장한 사회주의 서클을 통해서 였죠.
마르크스주의자의 열렬한 추종자들로 구성되어 있던 모임원들 중,
알레산드라라는 그의 첫 부인을 처음 만나며, 그 역시 사회주의 사상에 크게 심취합니다.
초등 교육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명석한 두뇌와 사람을 끌어들이는 뛰어난 언변,
그리고, 절대 굴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태도 등 그의 모든 행동과 지식, 선동적인 기질은
17살, 마침내 사회주의 사상과 만나면서 그 자신 속에서 200% 역할을 발휘합니다.
페테르부르크 감옥에 수감 중이던 여대생의 분신 자살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해 지역 주민들은 당시 러시아의 챠르 정권에 대해 분노를 느꼈지만,
그 곳에 거주하던 약 1만 명의 노동자들은 분노를 '어떻게, 어떤 식으로' 표출해야 하는지 몰랐기에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술자리에서, 자신들끼리의 얘기로만, 속으로 삭이며 억지로 가라 앉혀야만 했습니다.
천재적 혁명가의 첫걸음은 여기서 시작 되었습니다.
당시 '진리회'라는 조직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작은 조직이었는데
그들은 <우리의 대의>라는 유인물을 작성해 배포하며 노동자들의 궐기를 독려합니다.
이 유인물의 힘은 생각보다 강해 비록 '변화'시키진 못했지만 꽤 커다란 위력을 보였고,
료바는 이 모습을 보며 '글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17살의 나이에 진리회 활동에 참가한 료바는 어리다고 무시하던 회원들의 태도를
뛰어난 글솜씨와 열정적인 활동으로 단숨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킵니다.
이런 와중에서 당국은 <우리의 결의> 유인물 배포자의 색출 작업에 나서게 되고,
이 과정에서 료바는 도주 중 체포되고 맙니다.
볼셰비키 혁명까지의 트로츠키의 많은 고난 중, 첫번째 시련이었습니다.
체포 후 보내진 유형지에서 료바는 레닌이란 이름을 처음 접합니다.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와 그가 주관하던 반체제 잡지 <이스크라>를
통해 그의 존재를 알게 된 트로츠키는 서서히 이땅에 '혁명의 꽃'이 피고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이후 료바는 부인 알렉산드라를 남겨둔 채,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게 되고,
이 때부터,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트로츠키'란 가명을 사용하며 활동하게 됩니다.
트로츠키의 혁명적 사상이 '실체'로 연결된 건 두말 할 것 없이 레닌과의 만남부터 였습니다.
트로츠키와 레닌의 역사적인 만남은 1902년 10월, 런던에서 이루어집니다.
포용적인 성격의 레닌과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의 트로츠키.
이처럼 전혀 상반된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의 만남은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없는 매력을 발견하며 9살의 나이차이에도 불구, 허물없는 사이가 됩니다.
레닌은 곧 그의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필력, 선동적 기질을 알아차리고,
짧은 시간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스크라>의 편집위원으로 위임합니다.
이 후, 트로츠키는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놀라울 정도로 감격적인 연설을 대중들에게 선보입니다.
특유의 제스츄어와 묘하게 마음을 흔드는 목소리, 그리고 역동적인 연설 내용.
트로츠키의 연설을 듣는 모든 사람은 마법과도 같이 그의 환상적인 언변에 취하게 됩니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연설 전, 트로츠키는 항상 미리 준비된 '원고'를 가지고 올라서지만,
막상 대중들 앞에 서면, 그는 대중의 반응을 보고 즉석에서 연설을 창작하는 놀라운 모습을 매번 보여주었습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관계에 위기는 한 번도 없었을까요?
자주 있지는 않았지만 트로츠키 때문에 '중대한 위기'는 있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조직은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점점 더 성향이 내부에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레닌을 중심으로한 볼셰비키파와 그 반대 세력 맨셰비키파가 그 주인공입니다.
볼셰비키파는 '엄격한 통제'를 통해 더이상 무분별한 당원들의 가입은 제한하지는 방침이었고,
맨셰비키파는 현재로선 '세력을 키우는게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당원들을 더 받아야 한다는 방침이었습니다.
이 내부 분열은 예상외로 긴시간, 심각하게 이어졌고,
맨셰비키파에 있던 트로츠키는 레닌의 자기 중심적인 태도에 화가 나 그에게 등을 돌립니다.
예상치 못한 트로츠키의 태도에 레닌은 당황했고
이후, 레닌은 언제든지 트로츠키를 맞이하도록 문을 열어놓았습니다만
그들이 다시 결합한건 러시아 10월 혁명에서 였습니다.
1905년, 그 해 정초부터 러시아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 병사들은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시민들 역시 챠르 정권의 무능력한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1월.
그 유명한 '피의 일요일'사건이 터집니다.
1000여명 사망, 4000여명 부상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은 이 사건으로 인해
챠르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는 극도로 심화됩니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러시아에서는 곳곳에 봉기들이 발발합니다.
5월 노동자 동맹파업이나 6월 노동자 소비에트 연방의 결성, 10월 노동자 파업 전국적 확대 등등
일련의 일들이 물 흐르듯 이어지고 서서히 혁명의 불씨는 지하에서부터 피어오릅니다.
국내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트로츠키는 국내로 신속히 복귀를 하게 되고,
유럽에서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던 그의 연설은 드디어, 자신의 조국 러시아에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무언가 '기폭제'가 필요했던 러시아 국민들과 노동자들은 러시아 수도 한복판에서 울부짖는 26살,
이 젊은 청년의 피 끓는 감동적인 연설은 군중심리와 맞물려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킵니다.
트로츠키는 이 폭발적인 여세를 몰아 노동자 소비에트 연방을 이끌며 총파업을 결의하고
정부에 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킵니다. 비록 이것은 실패로 끝났지만 1905년 12월에 열린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한 일명 '12월 무장봉기' 는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예견한 일대 전초전이었습니다.
무장봉기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된 트로츠키는 최대 위기를 맞습니다.
그의 명성과 능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던 정부는 그에게 매우 긴 형량을 선고합니다.
감옥에서 한 해를 보내고, 시베리아에 유형지에서 몇년을 보내는 중,
다시 한번 목숨을 건 탈주로 도주에 성공하지만 그에게 기다리는 건 조국을 등진 '망명생활' 뿐이었습니다.
탈주범의 신분으로 러시아에 입국했다간 바로 잡힐게 뻔했기 때문이었죠.
약 9년을 그는 망명지인 비엔나에서 보내야 했고,
드디어 1917년.. 그 역사적인 한 해가 시작됐습니다.
1917년, 러시아 차르 정부의 국가 운영은 무능력에 최악을 보여주며 극심한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낳습니다.
이때문에 전국에서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은 끊이지 않았고,
'먹을 것이 없었던' 시민들의 항의는 차르 정부에 의해 묵살당해버립니다.
이에 시위대의 시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세계대전 속 전장에 있던 니콜라이 2세는 국내에 잔류해있던 병력들에게 시위강경진압을 명합니다.
하지만 시위진입에 참가한 병사들은 도리어 시위대의 편에 서게 되고,
사상 초유의 노동자,시민,군인 연합의 시위대가 결성되어 정부기관을 점거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 연합 시위대는 궁전에 진입,
2월 27일, 황제의 기를 끌어내리고 '붉은 기'를 꽂았습니다.
러시아 2월 혁명이 탄생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혁명은 그렇게 당연하게, 그리고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2월 혁명은 '탄탄한 계획을 바탕으로 한 혁명'이 아니었었기에 당연스럽게도
나라를 통치할 정권을 두고 세력이 나뉘게 됩니다. 혁명국가는 아직 완벽하게 완성된 게 아니었습니다.
이 때, 망명 중인 레닌은 아이러니 하게도 독일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로 입국하게 되고,
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지도자는 곧 권력을 화합시키고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갑니다.
레닌은 당연히 동지가 필요했고, 예나 지금이나 그의 가장 큰 동지는 바로.. 트로츠키 였습니다.
아직까지도 9년 전 감격적인 트로츠키의 연설을 잊지 않고있던 수많은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맞이하였고,
레닌과 트로츠키의 틀어졌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던 그 때, 다시 최상의 형태로 융화됩니다.
레닌에게는 트로츠키에게 없던 카리스마 넘치는 조직 장악력과 흡인력이 있었고,
트로츠키에게는 레닌에게 없는 웅변술과, 선동술, 천부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는걸 비로소 느꼈던 거죠.
레닌-트로츠키 막강한 라인이 형성된 혁명위원회는
1917년 10월 25일, 드디어 임시정부를 파괴시키며,
그 유명한 러시아 10월 혁명이 탄생했습니다.
혁명 당시, 가장 혁혁한 공을 직접적으로 세웠던 인물은 트로츠키 였는데
특유의 선동가적 기질로 도시의 노동자들과 병사들을 탄탄하게 이끌었기에
임시정부를 손쉽게 붕괴시킬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이 말 한마디는 당시 모든 상황을 말해 줍니다.
"임시정부는 폐지되었다.
모든 국가의 권력을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들의 소비에트로 집중시킴을 선언한다."
(페트로그라드란 당시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말합니다)
이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의미'와 '영향력'은 굉장했습니다.
전국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이 실체로 드러난 러시아를 보며
커다란 감동을 받았고, 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을 심어주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에 고취되어 있던 사람들 중, 당시 일제 치하 아래 있던 우리나라의 해외 독립 운동가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에 의해 러시아 혁명은 굉장한 '충격'을 줬고,
나아가 국내 독립 운동의 사상 중 '사회주의'가 가장 강력한 혁명의 각성제로 부각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됩니다. -
러시아는 정식으로 '소비에트 인민위원회'라는 지도부가 창설되었고,
인민위원회 의장에는 레닌이, 외무인민위원에는 트로츠키가,
그리고 아직까진 조용히 숨어있던 스탈린이 민족문제 인민위원회로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다들 아시다시피 전쟁 불개입을 선언하고 독일과 평화협정을 체결합니다.
혁명 정부가 들어선 이후, 트로츠키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습니다.
두 수 앞을 내다보는 전략으로 볼셰비키군을 뒤에서 이끌면서 반혁명세력을 손쉽게 제압했고,
천부적인 수완을 발휘하며 효과적으로 군사력을 강화시켜갑니다.
그가 다다르는 곳마다 사람들은 수없이 모여들었고 그의 연설의 힘은 아직까지 막강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각
그의 등 뒤에서 파란 칼을 들고있는 인물을 그는 몰랐습니다.
이상적일 것만 같았던 혁명정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의 민심을 잃어갔습니다.
지속되는 내전과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기아와 질병 아래 무려 900만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반혁명정부세력이 다시 급부상하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정부는 강력한 국가감시체제를 실시하며 무력탄압을 자행합니다.
이런 어수선한 국내 정서 속에서 레닌은 과로로 쓰러지게 되고,
증상은 점점 더 악화되더니, 도저히 정사를 다루기가 불가능해지면서
후대 의장에 대한 논의가 조심스레 오갑니다.
레닌이 병상에 앉은 그 당시,
남 모르게 세력을 확장시켜가던 스탈린은 점점 더 어둠에서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됩니다.
스탈린을 평소부터 못마땅히 여겼던 레닌이지만 그가 제압하기에 스탈린의 세력은 너무나 커져있었습니다.
레닌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혁명정부의 지도자 역할은 거의 대부분 트로츠키가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흉흉한 민심 속에서도 트로츠키만큼은 국민들의 신뢰를 잃지 않고 있었고,
과감한 결단력이나 은은히 풍기는 카리스마적인 모습은 당원들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권력을 노리는 스탈린에게 이런 트로츠키의 존재는 여간 거슬리는게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트로츠키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당 내부에 흘리며 분열을 꾀하였고,
트로츠키는 그 때 마다 설득력있는 펜과 마법같은 언변으로 그들을 손쉽게 제압하곤 했습니다.
허나 이들의 끈질긴 공격과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코카서스란 지방으로 요양길에 오르고,
3일 뒤, 트로츠키가 코카서스를 향하고 있던 그 시간. 1924년 1월 21일, 레닌은 숨을 거두게 됩니다.
트로츠키에게 의도적으로 레닌의 장례식을 늦게 통보해서
'의장의 장례식에도 참석 하지 않는 의리없는 인간' 이라고 몰아세운 스탈린의 모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당 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탈린의 교묘한 술수에 의해 트로츠키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스탈린의 트로츠키에 대한 계략과 언론, 당내 선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악랄하게, 꾸준히 진행되었고 마침내 트로츠키를 위원직에서 사퇴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아예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그의 계획은 결국 트로츠키를 입국 금지령을 내린 채, 오지로 추방시킵니다.
타지로 추방당한 트로츠키의 가족들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전처 알렉산드라는 시베리아로 추방당했고, 그의 큰 딸은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아들 둘은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수용소 안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큰 아들 또한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독살됩니다.
트로츠키는 우여곡절 끝에 그를 받아주던 유일한 나라, 멕시코로 건너가게 되고,
멕시코 땅에서 제국주의로 변모해버린 스탈린 정책을 비판하며,
다시금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며 멕시코를 기점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갑니다.
그리고.. 이 멕시코 땅에서 트로츠키가 만난 이.. 누군지 아시나요?
바로..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부부였습니다.
평소 유럽의 정치혁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디에고와 프리다는 트로츠키를 반갑게 맞이해주었고,
프라다는 묘한 매력을 풍기는 트로츠키에게, 트로츠키는 젊고 육감적인 프리다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며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자유결혼을 추구했던 프리다 디에고 부부관계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요.
멕시코 땅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다는 트로츠키의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눈이 뒤집힙니다.
당시 트로츠키에 대한 비정상적인 그의 증오심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어서,
조금이라도 트로츠키와 관련된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소련 내에 있던 그의 가족들 역시 모조리 몰살시켜 버렸죠.
그 무렵, 트로츠키는 스탈린 정책에 대한 비판 저서를 특유의 뛰어난 필력으로 써내려가며
전세계적으로 스탈린 정책의 부당성을 폭로했고, 그가 가진 글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결국 스탈린은 최후의 결정을 내립니다.
'트로츠키 암살계획'이 바로 그것이었죠.
이 암살계획은 실로 굉장히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일명 트로츠키 암살전담반은 일단 트로츠키 주의자인 미국계 여성을 포섭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요원 중 라몬이라는 남자를 통해 그녀와 친해진 후, 은밀히 트로츠키에 관해 알아가려는 속셈이었죠.
라몬은 매력적인 외모 + 돈이라는 완벽한 미끼로 실비아를 구슬렸고, 결국 실비아는 그와 사랑에 빠집니다.
자신을 반전론자라고 설명한 라몬의 사상까지도 실비아는 자신과 상통하였기에 너무나 마음에 들었고,
실비아와 더없이 은밀하고 가까운 사이가 된 라몬은 마침내 멕시코로 건너가 트로츠키의 집을 알아내었습니다.
하지만 치밀했던 라몬은 즉시 트로츠키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만에 하나라는 확률을 대비해서였죠.
일단 라몬은 트로츠키 집의 경비원들과 가까워지며 그들의 신뢰를 얻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실비아와 경비원들을 통해서 트로츠키의 집을 자유로이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라몬은 다시 한번 기다립니다.
트로츠키의 집 안에서도 그를 직접 만나진 않으며, 그의 주의를 끌기에 이릅니다.
드디어 거사 당일, 라몬은 자신이 쓴 글을 트로츠키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핑계로 그를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 무렵, 그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통해 그가 위험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던 트로츠키는,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리웠던 트로츠키는 흔쾌히 그와의 만남을 수락합니다.
트로츠키와 라몬은 서로 대면합니다.
여기서.. 라몬은 바로 트로츠키를 죽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사전 정찰 정도의 성격이었던 것이죠.
정말 지독히도 철저한 암살 계획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라몬은 트로츠키에게 원고를 수정해보았다며
그 글을 봐주길 원했고, 트로츠키는 흔쾌히 수락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라몬은 조용히 트로츠키의 등 뒤에 다가가
날카로운 등산 장비로 그의 머리를 힘껏 내려칩니다!
약 2년여의 시간이 걸린 계획이 끝나는 순간임과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의 가장 위대한 제자,
사회주의의 가장 커다란 별이 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국가 러시아.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레닌과 트로츠키
뛰어난 혁명가로 지금까지도 '마르크스레닌주의' 라는 이름 아래 사회주의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레닌과는 달리,
그의 곁에서 혁명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천재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라는 이름은 여전히 뒤에 머물러 있습니다.
엥겔스가 없었다면 <공산당 선언>의 탄생이 불가능했던 것처럼,
트로츠키가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은 없었고,
나아가 사회주의 혁명은 '유토피아'처럼 이론 속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옳고 그름'인지 를 알 수 없던 그때,
그때 즈음해 알았던 레온 트로츠키.
이 붉은 별의 존재는 편협한 생각의 폭을 조금은 넓혀준 계기가 된 것 같아요.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전세계는 미국의 자본 아래 지배됩니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미국은 무자비한 '반공정책'을 펼치며
사회주의 국가들을 '국제적 고립'상태로 만들어 버리지만..
이렇다고 해서 이들이 잘못된 것은 아닌 것이겠죠..
휴... 뭐 어쨌든..!!
한창 혁명가들의 혁명 사상에 심취해 있을 때, 흥미를 끌던 인물 중의 한 명이었는데
간단하게 핵심만 쓴다는게 글이 장난아니게 길어져 버렸네요.. 스크롤 압박이...ㄷㄷ
흥미롭게 읽으셨다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스크랩할께요~~
너무 잘 봤어요~ 책에서 봤던 사람이라 들어와봤는데 삶이 영화같네요..프리다 칼로와까지 만났다니..
잘봤어요. 직접쓰신건가요? ㄷㄷㄷㄷㄷ 이런글을 많이들 봐야하는데 ㅠㅠㅠ
세계사는 배웠는데 이런 인물이 있었는지는 몰랐네요.... 딴소리지만; 사회주의가 알고보면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세계와 제일 흡사한데 정말 이상세계에서 끝나는거 같아요. 인간의 욕심이란게 뭔지;
재미있게 잘 봤어요. 간만에 레방에서 이런 게시물 보니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네요^.^
아..게시물 잘봤어요~ 갑자기 혁명 얘기가 땡긴다긔...내일 도서관 가서 책 빌려봐야지..
읽고 그냥 나갔다가 너무 잘 읽었기에 다시 돌아와서 글 남겨요 ㅎㅎ 떙큐.
나 정말 좋아했었어요 ㅎㅎㅎㅎㅎ
스크랩해가요!!!! 트로츠키 자서전 빌려놓고 읽지도 않고 다시 반납했었는데...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저도 너무 잘읽었어요^^
너무 재밌게 잘봤어요~~~~~
잘읽었어요^^ 평소에 저 러시아혁명사에관해 관심이많은터라.. 천재 트로츠키를 정말 안타깝게 생각했었는데...ㅠㅠ
이때의 러시아 역사는 정말 흥미진진하긔...잘봤어요~
감사히 읽었습니다~
스크랩할께요~
잘 읽었습니다~ 고마워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이런 자료 너무 좋아요
트로츠키 평전 3권으로 되어 있는 예언자 시리즈 읽고 진심으로 반했는데 역사속 인물들에 반하는 경우는 근데 거의 비운의 혁명가들,, ㅠ
러시아라는 나라는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수많은 위대한 문학가와 혁명가가 러시아에서 태동했죠.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심했던 격동의 시기가 그렇게 수많은 사람, 작품, 업적을 낳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나 나름 러시아 정치 배운 사람인데 이름밖에 모르겠네... 잘 읽었어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저 전세계 정치에 도움 안되는 스탈린.......
님 글 빠짐없이 읽고있어요! 정말 다 하나같이 좋은내용이라서 많이 배우고갑니다 감사해요
좋은 자료 고마워요~ 이런 자료 너무 좋아요 ^^
잘 읽었습니다~
정말 잘 읽었어요!! 재밌네요~~ 앞으로도 이런 글 많이 올려주세요
트로츠키 우왕..ㅠㅠ 진정한 혁명가..
와우~ 너무 좋아요. 스크랩 할께요. 언제든지 풀고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주저말고 풀어주세요!
난 트로츠키 열차안에서 도끼로 머리찍혀죽었다고 교양시간에 들었는데...아무튼 스탈린이 아니라 저 사람이 집권했다면 세계정치사는 바뀌었겠죠. 스탈린..느므싫어...ㄱ-;;;;;
트로츠키 정말 안타까운 인물이에요. 스탈린 대신 그가 정권을 잡았다면 과연 현실사회주의가 그렇게 억압적인 형태로 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 말에 따르면 트로츠키였다면 현실사회주의라는 이념은 커녕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가 나치 독일에 먹혔을 거라고 ㅎ 스탈린도 참.. 어떻게 평가해야할 인물인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런 자료 너무 감사드려요
님 글 언제나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새로운 인물에 대해 알아볼래요~ 스크랩이용^^
잘 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