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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가 뉘엿뉘엿 교정 앞동산을 오르고 있었다. 축구골대의 그림자가 소의 혀처럼 늘어졌다. 그 시각, 우리들은 책상 위에 올라 있었다. 올해 아홉수라 유난히 히스테릭한 노처녀 담임은 교탁을 떠나 창가에 서서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노을은 창틀을 넘어 서서히 교실을 붉게 물들이는 중이었다.
"저거 보이나? 홍당무 또 생리한다."
홍당무는 담임의 별명이었다. 평소 얼굴이 자주 붉어져서 아이들이 그렇게 불렀다. 호기는 연신 코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무릎을 꿇고 책상에 올라선 지도 30분 째였다. 이번 벌은 채변봉투를 내지 않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근데 니 채변봉투를 거둬서 어데 쓰는지 아나?"
"그거야 회충약 줄라고 검사하는데 가져가겠지."
"임마. 그 많은 회충약을 공짜로 주는 거 안 이상하나? 우리나라가 돈이 어디 있다고."
"대통령각하가 경제를 살린다 안 하나."
"니 빙시가? 돈 많은데 머 한다고 쌀이나 신문을 거두겠노."
순간 홍당무가 우리 쪽을 째려보았고 호기는 딴청을 피우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아리조나에 먼 일이 일어났는지 알면 니는 뒤로 자빠진다."
"아리조나가 어디 있는 건데?"
"미국에 있다 아이가. 코쟁이들 사는데. 근데 무슨 벌레 같은 게 덥쳤다더라. 그게 어떤 약으로도 안 죽는데 똥냄새로만 죽는 다카네. 그래서 채변봉투를 수입해간단 말이다."
“구라까지 마라. 미쳤다고 똥을 돈 주고 사가나. 코쟁이는 똥 안 싸나.”
“그게 좀 이상하긴 한데, 생각해봐라. 우리가 무슨 똥을 내도 회충약 먹는 놈은 정해져 있다는 게 말이 되나. 애초에 검사고 그런 거 없다니까.”
“그것도 그러네.”
사실이 그랬다. 이상하게도 채변을 거두는 날이 되면 전날부터 똥이 마렵지 않았다. 결국 채변봉투를 준비해오지 못한 많은 아이들이 담임에게 내쳐져 화장실로 갔다. 한 아이의 똥을 나눠서 내곤 했다. 더군다나 준비해 온 아이들도 소똥이나 개똥을 덜어 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늘 회충약을 받는 아이만 받는다. 그러니 호기가 저런 주장을 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만약 호기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거야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일일이 비닐봉투에 담아서 불로 밀봉을 해주니 미국입장에서도 고마울 것이고 그 덕분에 그 많은 회충약을 제공받는 우리나라도 고마운 것이 아니겠는가. 문득 교탁아래에 들어있는 노란 대봉투속의 채변들이 고맙게 느껴졌다. 똥 따위가 한 나라를 구하다니.
“다들 내려와. 그리고 채변 제출 못한 녀석들, 내일까진 무조건 가져온다. 알았어?”
우리들은 기가 죽은 목소리로 예.를 복창하고 책상에서 내려왔다. 이미 다리는 감각이 사라져서 내 것 같지가 않았다. 책상에서 내려오다가 몇몇은 휘청거리며 자빠지기까지 했다.
“급장. 채변 미제출자 명단 적어서 교무실로 가져오고, 오늘 방과 후 골마루 초칠 시켜. 알았어?”
“차려엇.”
“됐어.”
인사를 시키려는 급장에게 손사래를 치며 홍당무는 문을 드르륵 밀고 나갔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아우성의 주범은 채변미제출자들이었다. 골마루 초질 이라니. 나도, 호기도, 그리고 코보도 초칠 대상자에 속했다.
코보는 호기와 마찬가지로 동네에서 자란, 소위 부랄 친구였다. 한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부모님끼리도 아는 사이였다. 같이 구슬과 딱지 따먹기를 하고, 산에서 잡은 메뚜기를 구워먹고 자치기를 했다. 병원놀이를 한답시고 두 해 밑의 여자아이의 바지를 벗겨 잠지에 나무 꼬챙이를 집어넣고, 어머니가 부를 때까지 빈 공터에서 하릴없이 땅바닥을 긁으며 같은 학교에 입학을 했다. 다만 한 가지 달랐다면 입학식 날, 코보는 이름표 밑에 손수건을 달지 않았다는 점이다. 코보의 아버지는 도로공사에 다녔다. 당시 ‘공사’ 딱지를 단 공무원의 끗발은 대단했다. 해서 코보는 영양실조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호기와 나는 달랐다. 호기네 집은 가뜩이나 넉넉지 않은 살림마저 어머니 병수발로 갉아 먹히기만 했다. 그러다가 두해 전, 녀석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호기는 그런 형편이었고, 나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픈 어머니가 없었다 뿐이지 이럭저럭 아버지가 혼자 벌어오는 수입의 대부분이 수재라 소문난 형에게 고스란히 들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작년에 대학에 덜컥 들어가긴 했지만 형은 좋은 데 취직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이상한 동아리라는 곳에 들어가서는 집에 오지 않는 날이 허다했다. 형의 가방에는 늘 이상한 전단지만 가득했다. 요컨대 코보는 근본적으로 우리와 달랐다. 비정상적으로 큰 녀석의 코만 해도 그랬다. 유일하게 비디오를 가진 녀석의 집에서 가끔씩 본 포르노 테이프에서 본 코쟁이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크기였다. 게다가 실제로 녀석의 물건은 거대했다.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에는 7명의 채변저항자들만 남았다. 걸상을 올린 책상을 한쪽으로 밀고 3명은 초칠을 하고 나머지 4명이 걸레질을 하기로 했다. 우리 셋은 초칠을 맡았다. 코보는 초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코가 크면 지능이 떨어지는 걸까. 이따금 녀석의 행동은 저학년 수준에 가까웠다. 우리도 내년이면 이제 졸업인데, 코보가 중학생 교복을 입은 모습은 어쩐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야 코보. 재밌냐?”
호기가 하는 둥 마는 둥 반쯤 닳은 초를 바닥에 문지르며 말했다. 코보는 초칠에 열중하느라 대답이 없었다. 엉거주춤하게 쭈그린 채 초칠을 하는 코보의 엉덩이를 호기가 발로 찼다. 그제야 코보는 고개를 돌리며 히죽 웃었다.
“저거 봐라. 반질하게 칠하니까 파리도 미끄러진다.”
무언가 토를 달 줄 알았지만 호기는 의외의 진지한 표정으로 파리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들고 있던 초를 반으로 분질렀다. 그리곤 4명의 걸레 조를 불렀다.
“야 이리들 온나.”
호기는 나와 코보의 초를 뺏어 토막을 내더니 걸레 조 4명에게 나눠주었다.
“자 이거 갖고 파리가 미끄러지도록 박박 문질러라.”
걸레 조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쉽게 대꾸하지 못했다. 호기는 실상 학교에서 통이었다. 물론 그것은 작년에 폭행사건으로 가꾸목이 퇴학을 당한 후부터였지만 어쨌거나 녀석을 거역할 아이는 없었다. 가꾸목은 별명처럼 싸움에 곧잘 무기를 들곤 했는데 작년에 다른 학교아이들과 시비가 붙은 날 그 진가를 발휘했다. 하필 장소가 공사장이었고 녀석의 주변에 가꾸목이 여럿 널려 있었고 가꾸목에 못이 달려있었다는 게 녀석이 잘릴 운명이었다면 모를까. 녀석은 그 사건 이후로 가꾸목으로 불렸다. 그런 녀석과는 달리 호기는 단지 욕에 능했다. 덩지가 큰 가꾸목과는 반대로, 마른 체구의 호기에게 몇 번 시비를 붙인 애들도 있었지만 인생을 두 번 쯤 살았던 어른들이나 구사할 법한 욕지기와 아이답지 않은 눈빛에 금세 꼬리를 내려 버렸다.
“호, 호기야. 거, 거 걸레질은 어, 어떡하고?”
걸레 조 중 더듬이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평소에도 말을 더듬었지만 호기 앞에선 유독 더듬는 녀석이었다.
“거, 걸레질은 아, 안 할 거다. 아, 아, 알겠냐?”
호기는 더듬이의 말을 흉내 내며 녀석의 질문을 일축해버렸다. 걸레조가 군말 없이 초칠에 열중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호기는 팔짱을 꼈다.
“와 그라는데? 걸레질을 안 하면 우짤라고?”
“니는 보기만 해라. 내가 재미난 구경시켜 줄 끼다.”
2.
호기의 말을 들은 것이 실수였다. 청소확인을 위해 급장을 따라오던 홍당무가 초칠로 광이 난 복도에서 넘어져 버렸다. 홍당무가 뒤로 넘어지면서 치마가 뒤집어졌고 우리의 초칠특공대 7명과 급장은 어마어마한 것을 보아버렸다. 그 때문에 우리는 애꿎은 급장까지 끼워서 교무실로 끌려오게 된 것이다.
“봤나 봤나?”
홍당무의 얼굴은 그야말로 제대로 홍당무가 되어버릴 정도로 화가 나 있는 반면 호기 녀석은 신이 나 있었다. 물론 녀석이 그러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홍당무가 요즘 연애에 빠져 있는데 그 상대가 바로 호기의 아버지라는 거였다. 호기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담임으로써 몇 번 방문을 했다가 그런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호기는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든다는 건지 알 수 없다며 투덜댔다. 뚜렷한 직업도 없이 집에서 글만 써대는 아버지나 깡마른 몸매에 히스테리노처녀인 담임이나 녀석이 보기에는 둘 다 엉망이라는 거다. 어쨌거나 우리는 한 시간이나 손을 든 채 무릎을 꿇고서야 풀려났다. 앞으로 일주일간 화장실 청소를 한다는 벌과 함께. 영문도 모르고 공범이 되어버린 급장은 홍당무에게 인사를 꾸벅 하고 먼저 교무실을 나갔다. 뒤따라 7인의 채변거부특공대가 나갔다.
“참, 호기야. 아버지한테 안부 전해.”
교무실을 빠져나가는 우리의 뒤통수에 홍당무의 말이 박혔다. 호기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오른손을 들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교문을 빠져나올 즈음엔 어둑해져 있었다. 텅 빈 운동장은 더 넓어 보였다. 교무실을 제외하고 불이 꺼진 학교건물은 낯설기마저 했다. 확실히 안에서 보는 학교와 밖에서 보는 학교는 달랐다. 우리는 낯설어진 길을 빠져나와 터벅터벅 걸었다. 걸레 조와 헤어져 우리 셋은 집 쪽으로 말없이 걸었다.
“이왕 늦었는데 만화방 갔다가자.”
침묵을 깬 것은 호기였다.
“너무 늦었다. 집에서 기다릴 긴데. 그라고 할 일도 있고.”
사실 할 일이 있었다. 내일까지 어떻게든 채변을 해결해야 했다.
“와? 채변 때문에 그라나? 내일 화장실에 가서 아무 똥이나 찍어서 내면 된다 아이가. 어차피 회충약은 정해져 있다 안하나.”
“고마 들어갈란다.”
호기의 말처럼 채변은 어떻게든 되겠지만 가급적 내 것을 내고 싶었다. 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조금이나마 진실 되고 싶었다는 게 본심이었다.
“코보는 우짤래?”
“다음에 다 같이 가자.”
우리는 다시 말 없이 걸었다. 만화방엘 따라 가줄까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관두기로 했다. 오늘은 진짜 할 일이 있었다. 한 친구를 구하는 일보다는 한 나라를 구하는 일이 더 우선이니까.
집에 들어가자마자 두 배로 저녁을 먹고 입구 담벼락께의 화장실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읽을 신문을 신중하게 골랐을 테지만 오늘만은 아무 신문이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것은 발밑에 깔릴 것이다. 그리고 내 손엔 형이 중학시절 보던 사회과부도가 들려 있었다. 38, 39쪽에 양면으로 그려진 우리나라 지도를 보기 위해 가끔씩 펼쳤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맨 마지막장에 그려진 세계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아리조나를 찾기 시작했다. 애리조나라고 적힌 그 곳은 뉴멕시코 주와 캘리포니아 주 사이에 끼어 있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 똥이 봉투에 포장되어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상상을 해 보았다. 비행기에 가득한 똥냄새와 아리조나 사막에 공수될 한국산 똥냄새를. 카우보이들이 코를 막으며 말을 달리는 장면도 떠올려 보았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똥이 쑤욱 빠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여자가 아이를 낳듯 거룩한 느낌마저 들었다. 신문지 위에 떨어진 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뒷주머니에서 나무젓가락을 꺼냈다.
3.
5교시는 체육시간이었다. 강당에서 뜀틀 뛰기를 한다고 했다. 추리닝은 일주일에 한번쯤은 뜀틀 뛰기를 시킨다. 어쩌면 그는 뜀틀 뛰기로 체대를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코보는 주번이었고 호기는 배가 아프다며 빠졌다. 아깝게 점심 먹은 걸 그런 걸로 소화시킬 수 없다는 게 호기의 주장이었다. 나도 동참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들 셋은 교실에 남았다. 전날의 채변소동은 어이없게 끝나버렸다. 7명의 특공대 중에서 자기 똥을 가져온 아이는 나뿐이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늘 그랬듯 화장실로 가서 마른 똥을 채집하는 걸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은 책상위에 벗어 던져놓은 옷가지들만 알맹이가 빠진 채 널브려져 있었다. 체육을 마치고 돌아오면 땀 냄새가 장난이 아니어서 미리 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으로 삼월의 상쾌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펄럭거렸다. 우리들은 무료한 시간을 명곡에 대한 이야기로 보내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조용필이 최고 아이가."
"머라카노. 들국화지. 진정한 음악은 밴드음악이다. 연주를 하는 게 진짜 음악가지."
코보의 말에 호기가 발끈했다.
"조용필은 연주 못하나? 기타도 잘 친다카던데."
"마 기타만 치가꼬 밴드가 되나. 혼자 드럼치고 기타치고 우째하노?"
"그것도 그러네."
"니는 우찌 생각하노? 조용필이가 들국화가?"
갑자기 둘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음악이라곤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나로선 당황스러웠다. 작년에 대학입학 선물로 형이 받은 마이마이카세트로 들었던 테이프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건전가요뿐이었다. 그렇다고 건전가요라고 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어.... 나는 명곡이라면 오랜 세월동안 안 질리고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하는데.."
코보와 호기는 내 입을 바라보며 눈을 껌뻑거렸다. 분명 다음 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머릿속엔 '시장에 가면'과 '에헤라 둥기둥기'의 멜로디만 떠올랐다. 한참을 기다리다 지친 호기가 침을 삼키며 입을 뗐다.
"그래 그 음악이 먼데?"
"그러니까... 오랜 세월동안 불리는.... 어머님은혜나 석별의 정 같은 거."
어쩌다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까.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일리가 있네. 아버지가 졸업할 때도, 삼촌이 졸업할 때도 그 노래를 불렀는데 아직도 부르니까."
덩달아 코보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석별의 정을 불렀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야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그때 교실의 뒷문이 드르륵 열렸다. 우리가 동시에 고개를 돌린 그 곳엔 급장이 서 있었다.
"주번만 빼고 강당으로 오란다."
"누가?"
"추리닝이지 누구겠노."
"배 아푸다고 안 하더나. 전달 안했나?"
호기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말했다. 그래도 다 오란다."
미친 추리닝. 이제 한가로운 오후의 교실과 작별할 때였다.
강당에는 추리닝이 아래위로 낡은 추리닝차림으로 서 있었다. 아이들은 왼 편에 줄지어 앉았고 중앙엔 뜀틀이 매트리스 앞에 떡 하니 엎드려 있었다. 체육선생이긴 했지만 옷이 그것뿐인지 매번 추리닝만 입고 다녀서 별명이 추리닝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추리닝은 유독 호기만 괴롭혔다. 아마도 지금 불려 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이 정호기. 배 아푸다더만 잘 걸어오네?"
배를 움켜쥐고 엄살을 피우며 강당으로 들어서는 나와는 달리 호기는 허리를 펴고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아직 아풉니더."
"그럼 뜀틀은 못 뛰겠네. 맞재? 못 뛰재?"
호기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도대체 추리닝의 속셈은 뭘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야 영식이 나와 봐라."
느닷없는 호출에 더듬이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엉거주춤 몸을 세웠다. 더듬이는 평소 겁이 많기로 유명했다. 말을 더듬는 것처럼 매번 뜀틀 앞에만 가면 멈춰 서버리곤 했는데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1미터밖에 안 되니까 넘어봐라."
순간 더듬이의 얼굴이 노랗게 질렸다.
"안 뛰나?"
더듬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 니도 배 아푸재? 그래서 못 뛰는 거가? 됐다. 들어가라."
속이 뻔 한 추리닝의 도발이었다. 영식이 얼굴이 벌개져서 자리로 돌아갔다. 호기가 어떤 녀석인데 그런 뻔 한 수에 넘어갈까봐.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났다.
"뒤면 될 거 아입니꺼."
호기가 소리쳤다. 그 뻔 한 수에 호기가 걸려 들었다. 추리닝은 터져 나오는 미소를 참느라 헛기침을 해댔다.
"그래 이건 얼라들도 뛰는 높이니까 배 아파도 넘어지겠재?"
"급장. 5단 더 높히라."
급장은 호기의 고함에 어쩔 줄 몰라하며 추리닝의 눈치만 살폈다. 추리닝은 고개를 끄덕였고 뜀틀은 호기의 말대로 우리의 키높이만큼 올라갔다. 실로 어마어마한 높이였다.
"니 와그라노? 하지 마라."
호기는 나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풀기 시작했다. 강당 안은 긴장감으로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리고, 호기가 뛰었다.
4.
호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누워 양호실의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추리닝도 죄책감 때문인지 침대 곁에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아니나 다를까 양호실의 문이 열리며 홍당무가 들어왔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를 시작으로 홍당무는 난리를 떨었다.
"그게 저, 뜀틀시간이었는데, 녀석이 높게 뛴다고 호기를 부려서, 최 선생이 가벼운 타박상이라고."
추리닝은 평소엔 해병대 출신답게 미친개가 되면서 왜 홍당무 앞에만 가면 바보가 되는 걸까. 말투만 해도 그렇다. 홍당무야 서울태생이라 표준말을 쓴다지만 담임과 대화하는 추리닝의 말투는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놈의 서울말 흉내 내기 같았다.
"배 아프다는 애를 뜀틀에 세워요? 제 정신이에요?"
추리닝은 벌 받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오른쪽 운동화코를 왼쪽 바짓단에 문질러댔다. 괜히 나까지 무안해져서 파란색 추리닝 바짓단이 까매지는 걸 보고 있었다. 제 정신이 아닌 건 홍당무 같았다. 호기는 홍당무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 눈을 감고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고 누워 버렸다.
"정 선생님..... 이러는 거. 호기 아버님 때문인가요?"
순간 홍당무가 움찔했다. 동시에 돌아누운 호기의 어깨도 움찔했다.
"여기서 호기 아버님이 왜 나와요? 박 선생님 그렇게 안 봤는데..."
"다 아는 사실입니다. 교무실에도 다 알고 있고."
홍당무의 얼굴이 붉어졌다. 추리닝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대체 그 사람. 그 사람의 어디가 좋은 겁니까?"
홍당무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어진 양호실은 너무나 조용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열 배는 크게 들렸다. 그 정적 가운데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툭 하고 떨어졌다. 침을 삼킨 사람은 나였다. 가족들과 티브이를 보다가 야한 장면이 나왔을 때의 상황 같았다. 민망해서 자리를 뜨고 싶은 반면 궁금해서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입장.
"그 사람....."
야한 장면이 이어졌다. 주인공은 홍당무였다.
"그 사람, 상처가 많은 사람이에요....."
홍당무가 입을 머뭇거리며 뭔가 말을 하려다 그대로 양호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때였다. 추리닝을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분명 해병대출신이라는 걸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의 우렁찬 목소리가 홍당무의 뒤통수로 쏟아졌다.
"그럼 저는."
"네...?"
순간 돌아선 홍당무와 고개를 든 추리닝의 눈이 마주쳤다. 만약 이 장면이 티브이에 나왔다면 어머니는 두 말 않고 채널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늘 앞서 가기만 했다. 정작 야한 장면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분위기만 묘해지면 채널을 돌렸다. 지나고 들어보면 야한 장면은 나오지도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른들은 우리나라의 공중파 방송의 수위를 너무 과소평가한다. 그러나 지금은 채널을 돌릴 어른은 이 자리에 없다. 홍당무가 선제공격을 했다. 대단한 어택이다. 추리닝은 휘청거렸다. 과연 해병대 출신의 추리닝은 이대로 무너지고 말 것인가. 드디어 추리닝의 반격이 이어졌다.
"그럼.... 제 상처는 안 보이는 겁니까?"
게임오버였다. 홍당무의 얼굴은 뺨을 양쪽으로 맞은 것처럼 터질 듯이 붉어졌고 더 이상의 어택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교문을 나서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코보도 배를 잡고 웃다가 급기야 눈물까지 흘렸다.
"만화방 안 갈래?"
코보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 아직 환자다."
호기의 투정에 우리는 동시에 대답했다.
"나도 아푸다. 내 상처는 안 보이나?"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배가 빠지도록 웃었다.
5.
6학년이 된 지도 어느덧 2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홍당무는 여전히 호기의 아버지를 만나는 듯 했고 추리닝의 구애는 공개된 이후로 더욱 노골적이었다. 약간의 변화라면 추리닝에게 쌀쌀맞게 굴던 홍당무의 태도가 조금씩 누그러졌다는 것인데 그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게 호기였다. 무슨 이유냐고 물어도 그 때마다 호기는 짜증만 부리는 게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것 외에는 별 다를 게 없는 나날들이었다. 똑같은 길이지만 학교로 가는 길의 두 배는 더 시간이 걸려서 집으로 돌아왔고, 나무가판에 검정고무줄로 진열해놓은 만화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이 터졌다. 나쁜 일은 늘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간밤의 꿈처럼, 혹은 느닷없는 치통처럼.
그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집을 나섰다. 처음엔 학교에 낼 신문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 벌써 반년이 지나 있었다. 배달을 하고 남은 신문은 대개 길에서 절반 값으로 팔았지만 날자가 지나 보급소에 방치된 신문도 더러 있었다. 깨끗한 신문을, 그것도 다른 아이들의 몇 곱절을 가져갈 때마다 돌아오는 칭찬도 칭찬이었지만 그만두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나는 복싱에 빠져 있었다. 정식은 아니었지만 새벽길을 달리고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빈 체육관에서 스파링을 할 때면 무언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길을 열어 준 것은 4살 터울의 형이었다.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는데 그 때문인지 나이보다 곱절은 어른스러웠다. 체육관 청소를 하면서 복싱을 배우는 터라 비상열쇠를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는 관원들이 오기 전의 이른 시간을 마음껏 누렸다. 그런 시간이 벌써 5개월이었다. 배달 일을 끝내고 체육관에 들러 집으로 들어오는 데 웬일인지 대문이 열려 있었다. 마당에는 아버지가 낯선 사람 둘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누군가가 찾아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봄철에 어울리지 않게 두터운 점퍼를 입은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힐끔거렸다. 두 사람 중 머리를 바짝 자른 사람이 곧장 내게로 걸어왔다.
"꼬마야. 네 형 어딨는지 알지?"
대뜸 꼬마라고 부르는 것도, 인상도 좋지 않았다.
"와? 꼬마라 불러서 기분 나뿌나? 아저씨들 나쁜 사람 아니고 경찰이다 경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거 형이 불을 질러서 잡으러 온기다. 방화범이라고 들어봤재? 들어오면 숨길 생각 말고 자수하라 캐라. 숨겼다가는 다 공범으로 콩밥 먹는 거야. 알았재?"
나는 입을 꾹 닫고 노려보았다.
"어른이 물으면 퍼뜩 답을 해야지. 콩밥 먹어볼래?"
깡패같이 생긴 경찰은 내 머리에 알밤을 먹이며 웃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들이 대문 밖으로 나가는 걸 쳐다보기만 했다. 아버지는 대문을 닫고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는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영재는 아부지가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찾을 기다. 얼른 밥 먹고 학교가야재."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파악도 되지 않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기가 죽을 나이였다. 아버지를 따라 현관으로 들어가는데 우리와 교차되어 누나가 가방을 어깨에 메며 신경질적으로 걸어 나왔다.
"짜증나 정말. 무슨 오빠가 원수고."
엄마는, 숙희야 밥은 먹고 가야지. 라며 맨 발로 뛰어 나왔다.
"니 오빠한테 말버릇이 와 그 모양이고?"
누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어깨를 들썩이는 게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맨날 데모나 할 때 알아봤다. 하다하다 인제는 방화범이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누나는 그대로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른 아침에 느꼈던 상쾌함이 빠르게 대문 밖으로 나가버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형은 소식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티브이에 형의 이름이 나왔다. 뉴스에서는 미문화원 방화사건 용의자를 쫒는 중이라며 11명의 신상을 공개했다. 미모의 아나운서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형의 이름을 말했다.
6.
"아직도 소식이 없나?"
호기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벌써 형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14일 째였다. 달력은 4월 달에 접어들었다.
"아부지가 아는 사람한테 물어봤는데 아직 너거 형 안 잡혔다 카더라."
평소 발이 넓은 코보의 아버지가 관할 경찰서에 알아보는 중이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나 때문에 호기와 코보의 발걸음도 무거워 보였다.
"집에 들어갈 거재?"
"너거는?"
"만화방이나 갈라고."
"같이 가자."
사실 집에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집에 있으면 불쑥 형이 돌아올 것만 같았고, 2주 전의 경찰들이 들이닥쳐 형을 잡아갈 것만 같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화책 속에 얼굴을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똥을 피하다가 똥차와 부딪친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만화방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반기는 녀석이 있었다. 가꾸목이었다.
"이게 누고? 오랜만이네. 니 내가 없는 학교에서 대가리 노릇한다카대?"
가꾸목은 호기를 보자마자 빈정거렸다. 가꾸목의 주변에는 양아치들로 보이는 녀석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호기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가꾸목이 돌아왔다.'
순간 우리들의 머릿속엔 그 말만 반복되고 있었다.
가꾸목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호기를 불렀다.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로 쏠렸다. 게 중에는 같은 반 아이도 몇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호기는 운동화코를 땅에 문지르며 제자리에서 뭉그적거렸다.
"마. 안 들리나?"
가꾸목의 옆자리에서 만화책을 보던 녀석이 소릴 질렀다. 코 밑에 거무룩한 수염자국까지 나 있어 우리보다 몇 살은 많아 보였다.
"그라지 마라. 아 놀란다 아이가. 그래도 한 때는 같은 반 아다."
"아다? 아다라시가?"
수염의 말에 가꾸목이 킥킥 거렸고 그것을 시작으로 전염병이라도 걸린 듯 패거리들이 동시에 웃어댔다. 호기의 인상이 구겨졌다. 낮에 뜀틀 앞에서 본 그 표정이었다. 부르르 떨며 주먹을 쥐는 호기의 팔을 잡았다. 호기의 실력으로는 맞장을 떠도 질 게 뻔 한데 패거리까지 있는 한 어림도 없다는 걸 자신도 알고 있었기에 분한 것이리라. 호기의 눈이 붉어졌다. 나와 코보는 호기를 따라 가꾸목의 앞에 섰다.
"너거는 뭐꼬? 호기 꼬봉들이가?"
"친구다."
코보가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멋지네. 이래 든든한 친구들이 있어가꼬 통 잡았나? 됐다 마. 코찔찔이들 다니는 데서 뭘 해묵든 인자 관심도 없고. 어이 강호기."
가꾸목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호기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주먹의 굳은살과 상처가 엄청 크게 보였다.
"요즘 니가 여서 자주 설친다카대. 오늘부터 여기는 내 학교다. 뭔 말인지 알아듣겠나?"
호기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여서 한번만 더 알짱거리면 뒤진다고. 알았나?"
수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릴 질렀다. 여전히 호기는 입을 다문 채였지만 곁에 있는 내 귀에는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 안 하나?"
여차하면 수염이 뛰어 나올 기세였다.
"알겠다......"
"말이 짧네. 내가 너거 학교 다니는 찌찔이로 보이나?"
호기는 긴 한숨 끝에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뱉었다.
"아. 알겠습니더."
"됐다 그만해라. 똑똑한 아이들이라 알아들었을 기다. 바쁠 긴데 그만 가봐라."
빈정거리는 가꾸목을 두고 돌아서는 호기의 몸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이 보였다. 만화방을 나오며 호기의 주먹을 풀었다. 녀석은 아직도 주먹을 꽉 쥔 채였다. 억지로 편 손바닥엔 손톱자국이 깊게 박혀 있었다.
"잘 참았다. 괜히 엮여봤자 저 꼬라지밖에 더 되겠나."
호기는 손등으로 보이지 않게 눈물을 훔치고는 코를 훌쩍였다.
"진짜 그래 생각하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두려웠던 건 가꾸목도, 녀석의 패거리들도 아니었다. 안 그래도 형의 문제로 초상집 같은 분위기인데 나까지 사고를 쳐서 걱정을 더하는 게 신경 쓰였고 학교에서 알게 되어 내려질 처벌이 두려웠다. 그 두려움 때문에 친구는 수치심을 뒤집어 써버렸다. 내일이면 학교에 소문이 퍼질 것이고 어쩌면 졸업할 때까지 그 수치심을 뒤집어쓰고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오늘 먼저 들어갈란다. 내일 학교서 보자."
호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 갔다.
7.
저녁이고 뭐고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덮어쓰고 자고 싶었다. 코보와 헤어져 진흙땅을 걷는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 집은 집대로 난리였다. 아버지는 평소 입지 않던 정장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고 엄마는 부엌에서 음식을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데 가나?"
그제야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아버지는 형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나도 갈란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밤중에 어딜 따라 간다고 난리고. 니는 집에 있어라. 누나도 시험이 코앞이라 안 간다니까 밥 차려 달라 캐라."
엄마는 단칼에 잘랐다.
"나도 간다 안 하나. 갈 거라고."
"야가 거기가 어댄지 알고 이라노. 애들은 경찰서 같은 데 가면 못쓴다."
"됐다 여편네가 오늘따라 와이리 말이 많노."
넥타이를 맨 아버지가 현관에서 구두를 신으며 나섰다.
"수재도 갈래?"
"어."
아버지는 앉은 채로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래. 형도 우리 수재 보고 싶어할 끼다. 같이 가고로 잠바나 걸치고 온나. 밤엔 춥다."
경찰서는 낯설었다. 낯선 사람들이 제복을 입고 낯선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인사를 해도 웃어주지 않는 어른을 본 건 처음이었다. 코보의 아버지가 손을 쓴 덕에 잠깐의 면회가 가능한 거라고 했다. 형은 경찰서의 뒤편, 철창이 쳐진 낯선 곳에 낯선 사람들 틈에 앉아 있었다. 경찰이 문을 열고 데려 온 형의 손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엄마는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경찰의 안내로 작고 낡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영재야. 괜찮나?"
"괜찮심더. 여기보다 바깥이 더 무서운 세상 아입니꺼."
아버지는 형의 두 손을 꼭 쥐었다.
"너무 걱정말거라. 내 힘이 없어도 니 하나 못 빼내겠나."
"수키는 안 보이네예?"
형은 숙희 누나를 항상 수키라고 불렀다.
"고3 아이가. 대학 갈 끼라고 늘 바뿌다. 여자가 대학 같은 데 가가 뭐 한다고 그라는지."
"뭐 보여서 좋을 것도 없는데.... 우리 수재 왔나?"
형은 말끝을 흐리더니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순간 울음이 왈칵 쏟아질 뻔 했다.
"형아야. 미안하다. 다 나 때문이다."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뭐가 니 때문이고?"
"내가. 내가 똥을 가져가가꼬. 다 나 때문이다."
"야가 무슨 말을 하노. 안 그래도 걱정이 많을 긴데 쓸데없는 소리.."
핀잔을 주는 엄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울먹이며 소릴 질렀다.
"나도 다 안다. 내가 아리조나를 구해서 그런 거 아이가. 형아는 미국 코쟁이들하고 싸운다고 잡혔는데."
목소리가 컸는지 경찰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렸다. 아버지는 소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엄마와 싸 가지고 온 음식들을 들고 일어났다.
"이야 우리 수재 인자 다 컸네."
형은 나와 둘 만 남게 되자 묶인 두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아 와 그랬노?"
"뭐가?"
"감방에 가면 겁나는 사람들도 많다던데..... 겁 안나나?"
형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그러나 형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한쪽 입 꼬리만 올라가는 이상한 미소였다.
"와 겁이 안 나겠노. 그래도 할 건 해야지. 기억나나? 니 2학년 때, 학교 가다가 울면서 돌아온 거."
"2학년 때?"
"비오는 날인데 학교 가는 길에 사마귀 떼가 있어서 못 간다고 내보고 같이 가자고 안 했었나."
그랬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사마귀를 유독 무서워 한다. 결국 그 날, 형의 손을 잡고서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만약에 니가 학교 가는 길에 맨날 사마귀가 나온 다카면 니는 어짤끼고? 빙 둘러서 가면 되기야 되겠지만 가만 생각해보니까 기분이 나쁜 기라. 사마귀 때문에 내가 길을 둘러가야 한다는 기. 그런 기다. 형은 그게 참을 수 없었던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참을 수 없어서 그랬다는 건 이해가 갔다. 나는 아까 호기에게서 그 기회를 뺏어버린 것이다. 면회시간이 끝날 때까지 형은 기죽지 않고 당당했다. 경찰의 손에 잡혀 다시 철창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에서야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아버지 어머니를 부탁한다고 외쳤다. 경찰서를 나오면서 갑자기 키가 작아진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와 엄마를 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만큼은 누가 달려들어도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8.
형의 방화사건이 있은 지 14일 만에 주범과 공모자들이 잡혔다는 뉴스가 나왔다. 애인 사이인 주범 두 명이 자수를 했고, 그로 인해 나머지 방화범 3명과 전단살포범 3명. 그리고 의식화 학습을 같이 한 3명을 포함한 11명이 전원 검거되었다고 했다. 형은 전단살포범 3명에 포함되었다.
아버지는 형의 재판 때문에 몇 번이나 공사장 일을 빼서 외출을 했고 누나는 여전히 책상에만 앉아 있었으며 엄마는 밥을 지을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런 변화에도 이전처럼 똑같이 학교를 가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꾸목 사건 이후에도 학교는 똑 같았다. 그러나 호기는 말 수가 줄었다. 호기와 나, 코보는 여전히 같이 다녔지만 만화방을 갈 수 없는 우리는 집으로 일찍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결국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신문배달을 이틀이나 가지 않았다. 사흘 째 얼굴을 들이 민 나를 기다린 건 복싱을 가르쳐 준 형이었다. 나는 형을 '담배형'이라고 불렀다. 배달을 끝내고 체육관으로 가는 길에 늘 담배를 피웠는데 그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다. 그 뒤로 나는 늘 담배형이라고 불렀다. 무슨 일 있냐. 고 물어오는 담배형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다. 담배형은 아무 말 없이 체육관으로 앞 장 섰다.
"자 힘껏 때려봐라."
담배형은 샌드백을 잡고 말했다. 영문을 몰라 머뭇거리는 내게 담배형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가꾸목의 빈정거리는 얼굴과 그 수염 난 양아치를 떠 올리는 동시에 주먹이 나갔다. 한번 시작한 주먹질은 분이 풀릴 때까지 계속 되었다.
"어떻노?"
주먹질이 끝나고 숨을 헐떡이는 내게 담배형은 물었다.
"니가 걱정하는 기 뭐고?"
나는 형이 부탁한 부모님의 얼굴을 떠 올렸다. 그러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잘못되면 학교에서 잘릴 수도 있는데..."
"그래. 그라모 니가 걱정하는 거는 니 책상하고 걸상이네? 그걸 잃는 게 무서운 거재?"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내년이면 싫든 좋든 니 책, 걸상하고는 바이바이 하는 거 아이가?"
"그거랑은 다르다. 졸업을 못 하면 중학교도 못 간다."
"수재야...."
담배형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담배를 꺼냈다.
"내가 와 복싱을 하는지 아나? 내한테 고아라고 놀리는 새끼들 패 줄라고 배우는 거 같나? 하기야 첨엔 엄청 쌈도 하고 다녔다. 그래서 학교도 잘렸지만 지금은 검정고시로 작년에 중학교 졸업장도 땄다. 지금은 고등학교도 준비 중이고. 수재야. 내는 달리는 게 좋다. 숨이 차고 힘들어서 멈추고 싶을 때도 와 없겠노. 쉽고 편하게 갈 수도 있는데 안 그랄라고. 안 피하고 살라고. 내는 그래서 달리는 기다."
연기를 내뿜는 담배형의 모습이 빛났다.
9.
수업이 마치고 우리는 교문을 나섰다. 여느 때와 같았지만 다르기도 한 날이었다. 늘 가던 곳을 뺏겨버린 우리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셋 중 호기가 더욱 그랬다. 어느새 우리는 만화방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 오랜만에 갔다가 가자."
나는 만화방을 가르켰다. 호기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속 편하게 사는 코보는 옆에서 들떠 난리였다.
"참을라 했더만 너무 심심해서 안 되겠네. 니는 안 그렇나?"
그제야 호기는 씨익 웃었다. 만화방으로 가는 우리들의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는 낮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끝>
첫댓글 옛날에 - 옥이 이모 - 라고, 추억의 드라마가 있었는데요, 어렸을때 본거라 잘은 기억이 안나지만 뭔가 비슷한 느낌이 나면서도 .. 조금은 생각하게 만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원래 긴 분량을 줄여서 올리다보니 감정선이 좀 무너졌는데 그런 느낌이라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잘 읽고 갑니다~~이런 성장 소설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