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리옹의 도살자'로 불리던 나치 전범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 1991년 9월 5일 77세로 옥중 사망)가 프랑스 법원에서 인류애에 반하는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지 38년이 되는 주이다. 영국 BBC의 오래 전 기사를 찾아서 그 의미를 곱씹어 보는 'In History'는 30일(현지시간) 바르비가 종신형을 선고받기 4년 전인 1983년 프랑스인들이 바르비 단죄를 통해 흑역사가 드러나는 데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 돌아봐 눈길을 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리옹의 게슈타포 수장으로서 바르비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분쇄하고 독일이 점령한 이 도시에서 유대인을 몰아내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손수 수감자들을 고문하고 살해함으로써 잔인함과 새디스트 성향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가 집단수용소로 보낸 프랑스 유대인들과 레지스탕스 투사들은 7500명에 이르며 4000명 이상을 처형했다.
종전했을 때 프랑스 당국은 끔찍한 전쟁범죄로 그를 수배했지만 미국 첩보기관들이 공산주의자 네트워크를 밝혀내기 위한 정보원으로 쓰겠다며 그를 고용했다. 미국은 그가 가짜 신분증으로 점령지 독일의 미국 조계지에서 살도록 보호했다. 처형이 두려웠던 바르비는 미국이 종전 후 유럽에서 나치들을 빼돌리기 위해 만든 밧줄 사다리의 디딤줄(the Ratline)을 통해 남아메리카로 달아났다. 그는 나치 사냥꾼 커플 세르주 클라르스펠트(Serge Klarsfeld)와 베아테(Beate)에게 추적당하기 전까지 수십년 동안 볼리비아에서 얼굴을 드러내놓고 살았다. 1983년 프랑스는 끝내 바르비를 인도 받아 심판대에 세웠다.
그러나 바르비 단죄는 프랑스의 당장 관심사가 아니었다. 되레 나치의 귀환은 죄책감과 공범 의식에 대한 의문을 낳았다. 독일 점령 아래 살던 국민들이 어떤 선택을 했어야 하느냐가 주된 관심사로 떠올랐디. 이런 상황에 버나드 포크(Bernard Falk) BBC 기자가 리옹으로 가 "게슈타포 사령관의 야만성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사람들에게 물었고, 다가오는 바르비 재판이 복잡하면서도 고통스러운 문제를 다시 드러내고 있다고 보도한 것이다.
포크는 "클라우스 바르비가 프랑스 영토에 다시 나타난 것은 오랜 기억들, 40년 전의 악령을 되살릴지 모른다는 진짜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면서 "프랑스인이 프랑스인을 배신했고, 온 나라가 독일과 싸우겠다는 레지스탕스와 독일에 협력하겠다는 부역자들로 분열되고, 인구의 대다수는 수굿이 독일의 주둔을 받아들인 때였다"고 말했다.
레지스탕스 요원이었던 레이몽 바셋(Raymond Basset)은 "리옹이 해방됐을 때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한 이들은 6000명쯤 됐다. 그 뒤 사흘 만에 11만명이 됐다. 그 일은 오늘 프랑스적인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줄지 모른다. 왜? 그들은 더 이상 위험이 따라붙지 않을 때만 애국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 뿐"이라고 말했다.
고통받은 어르신들에게 바르비는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 버나드 포크
프랑스가 1940년 6월 독일에 포위 당하자 리옹 시는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바셋과 무전 요원 마르셸 비도(Marcel Bidault)는 나치 점령에 맞서기 위해 초기에 합류한 젊은이들이이었다. 포크는 "바셋은 격추 당한 연합군 공수부대원들을 피레네 산맥을 통해 빼돌리는 임무를 맡은 레지스탕스 그룹을 운영했다. 영국과 미국, 커먼웰스(영연방) 공수부대원 4000명이 바셋 부대를 이용해 목숨을 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치에 실제 저항한 것은 아니었으며, 더 많은 이들은 계속 살아남길 바라며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반면 나치를 쌍수 들어 반기고, 심지어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기 위해 의용부대를 조직하는 이도 있었다. 바셋은 체포돼 이를 모두 뽑히는 가혹한 고문을 받으며 처절히 깨달았다.
비도는 "바셋은 결국 도와준 이들의 이름을 실토했는데 그를 고문한 두 남자 모두 동포였다"면서 "의용부대 동포들이 게슈타포에 넘기기 전에 그는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44년 프랑스가 해방되자 사람들은 부역자들이 모두 검거됐다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공공장소에서 모욕을 당했다. 독일 병사들과 정을 나눈 여성들은 삭발을 당하거나 옷이 벗겨지거나 기름 칠갑을 당했다. 게슈타포에 협조한 이들은 거리에서 얻어 맞았으며 바셋을 고문한 남자들을 비롯해 몇몇은 손발이 묶인 채 총살됐다. 1983년에 75세였던 바셋은 "난 그들을 죽였다. 물론, 우리는 해방됐을 때 그들을 죽였다. 그들의 이름을 알 필요가 없었다"먼서 "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훔친 막대한 돈을 갖고 은퇴한 상태였다"고 털어놓았다.
부역자들의 이름을 대는 것
전쟁이 끝난 뒤 수십 년이 훌쩍 지났지만, 독일 점령이 프랑스 사회에 남긴 상흔은 잊히지 않았다. 리옹의 많은 주민들은 여전히 그 시기에 일어난 일들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통 받은 어르신들에게 바르비는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여기 있다. 레지스탕스가 점령 독일군과 맞섰던 전장이 이 오래 된 도시의 골목길, 같은 거리들, 같은 건물들에 걸쳐 있다."
'리옹의 도살자'가 재판 때문에 이 나라에 돌아오자 바셋은 프랑스가 자신의 공을 인정하고 과거를 청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게슈타포 수장이 단죄를 피하려면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인들의 이름을 실토해야 한다고 BBC에 털어놓았다. 바셋은 "난 바르비를 심문하면 그와 함께 일을 꾸민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보복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나아가 그는 바비를 직접 신문해 당한 만큼 되갚아주고 싶다고 했다.
특히, 생존자들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존경 받았으며 리옹에서 제보 끝에 체포된 장 물랭(Jean Moulin)을 배신한 인물의 이름을 알고 싶어했다. 물랭은 전쟁 기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레지스탕스 자원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그 역시 바르비에게 직접 고문을 받아 다쳤는데 1943년 7월 8일 독일로 이송되는 열차 안에서 숨을 거뒀다.
바셋이 포크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점령 기간, 프랑스인 중 많은 수가 맞서 싸웠지만, 대다수는 먹을 것을 찾는 데 시간을 보냈다. 지금 바르비가 여기 있다. 사람들은 온갖 이유로 그를 데려오고 싶어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은 장 물랭을 배신한 자의 이름을 알아내는 일 뿐이다. 그 일이 끝나면, 그는 베드버그처럼 짓눌러져야 한다. 그는 살아있는 일이 허용돼선 안되는 더러운 짐승(filthy animal)이다. 증오라고 해도 좋다. 이런 것이 증오다."
바르비는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자신의 끔찍한 죄과를 뉘우치지 않았다. 몇몇은 나치는 진실을 절대 말할 수 없으며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만 재판을 이용할 것이라고 느꼈다. 레지스탕스 대원이었던 이들의 가족으로서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리옹의 왕립영국공군 (RAF)협회를 이끄는 제레미 니클린 회장은 "바르비 재판을 연다는 것은 그가 입을 열 마음만 먹는다면 이름들이 줄줄이 나와 많은 이들을 끔찍한 것들로 더럽힐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극적"이라고 지적했다.
서구 정부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한 일이 바르비와 다른 나치 간부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니클린은 "그가 어떤 이름들을 이용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살짝 커닝을 했으면, 어떤 이름이라도 써먹을 수 있었다. 진흙이 묻을 것이며,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잃을 것이 없어서 많은 진흙을 묻힐 수 있다는 두려움에 약간 떨었다"고 말했다.
비도도 나치의 진술이 전혀 믿을 만하지 않다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재판이 시작되니 증거들이 제시되는 것을 보고 정의가 구현되는 것을 지켜보면 될 일이었다. "난 그가 죽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40년은 긴 시간이다. 그가 무엇을 말할 것인지, 그가 책임을 돌릴 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누가 바르비가 옳다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35년 전이라면 내 손으로 그를 죽였을 것이다. 지금 이 남자를 처리하는 것은 사법부 몫이다. 내 일이 아니다."
국가적 각성
그 재판은 프랑스에게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것이었다. 바르비가 초래한 상흔과 나치들은 생생한 기억 속에 있었다. 앙드레 시놀(Andre Signol)은 부친 미셸이 레지스탕스 가담 혐의로 체포됐을 때 일곱 살이었다. 포크는 "미셸은 소채찍으로 맞았다. 얼음물로 가득 찬 욕조에서 반쯤 익사됐다. 바르비는 손가락과 발톱들을 뽑았다. 나흘 갇혀 있으면서 미셸은 묵비권을 행사해 동지들 이름을 불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셸은 레종 도뇌르를 추서받았다.
그 재판이 암울함을 불러오고 자신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지만 시놀은 바르비를 법정에 세운 일이 젊은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시놀의 말이다. "클라우스 바르비가 어떻게 나오건, 난 이 남자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자신의 행동에 대해 뉘우치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인생을 즐기며 희망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완전 정상이 아니었다. 그 재판은 젊은 세대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르치는 데 절대 필요했다."
1950년대 바르비는 프랑스에서 전범 혐의로 두 차례나 궐석 상태 재판을 받아 사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1983년 그가 프랑스로 돌아오자 두 차례 판결 모두 없던 일로 하고 1987년 새 재판을 시작해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바르비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고 살아남은 이들의 진술이 이어졌고, 희생된 이들의 친척들이 증언대에 섰다. 끝내 바르비는 물랭을 배신한 자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그가 직접 가담한 폭력의 실체와 그가 책임져야 하는 수천 명의 죽음, 특히 44명의 유대 어린이들을 농장에 가둬 죽음에 이르게 한 만행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프랑스가 점령 나치에 당하지만 않고 레지스탕스로 항거했으며, 서구 정부들이 제 욕심을 챙기느라 바르비를 비롯한 나치 지도자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 지낼 수 있었다는 점도 많은 이들이 알게 됐다. 서구 정부들은 정작 민간인 피해나 인권 침해에는 별다른 관심조차 없이 지정학적 계산에 따라 바르비 같은 인간이 남미에 정착해 잘 살 수 있게 협조하기까지 했다.
이 어두운 시간들은 영원히 우리 역사를 더럽히고 우리의 과거와 전통을 모욕한다- 자크 시라크
바르비는 인류애에 반하는 범죄 341가지에 대해 유죄가 인정됐다. 명령에 따른 것이라 해도 법적으로는 모든 행동 각각에 대해 개인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1983년 미국은 바르비를 고용해 그가 빠져나갈 수 있게 한 데 대해 공식 사과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1995년 프랑스 정부가 유대인 추방에 책임이 있음을 공식 인정했다. 그는 위 말을 남겼다.
'리옹의 도살자' 단죄는 전쟁범죄와 인류애에 반하는 범죄를 처벌함으로써 국제법 분야에서 가장 무게 나가는 이정표를 남겼다. 이 재판 성과에 힘입어 전직 각료 모리스 파퐁(Maurice Papon)과 전직 경찰서장 르네 부스케(Rene Bousquet) 단죄로 이어졌다. 바르비의 유죄 판결은 글로벌 커뮤니티에 전쟁 기간 일어난 잔학 행위를 수십 년이 걸려서라도 인정하고 가해자를 단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울 것이라고 방송은 결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