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16세기 종교개혁의 큰 논쟁들과 투쟁 그리고 새로운 형식의 교회 생활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 왔다.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성(城) 교회당 문에 95개조를 갖다 붙인 극적인 사건 이후 수세기 동안, 개신교회는 '이신칭의'와 '만인제사장직' 그리고 '오직 성경' 같은 위대한 주장들을 종교개혁의 유산으로서 강조하고 소중히 여겨 왔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의 위대한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은 과제'를 남겨 놓았다. 그 종교개혁의 남겨진 과제 중에는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긴급하게 요구하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모든 신자의 사역'(the ministry of all believers)이라는 주제이다.
로베르타 헤스테네스는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가 평신도이든지 아니면 안수 받은 목회자이든지, 남성이든지 아니면 여성이든지 간에, 종교개혁자들이 인정하는 대로, 만일 제사장직이 더 이상 소수의 성직자들에게 제한되지 않으며, 모든 신자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의 작정으로 의도된 것이라면, 기독교적 사역 혹은 봉사와 관련하여 그 상태는 무엇을 뜻하는가? 게다가 사역이 모든 신자에게 속하는데, 현대 교회의 구조와 패턴이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를 사실상 막고 있는 이러한 현실이 가능한 일인가?"
"지난 20여년 동안, 전통적인 미국 교회 안에서 심각한 긴장의 징후들은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비록 미국 기독교의 여러 부분에서 영적 생명력과 성장의 증거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미국의 주요 교파들은 거의 1/4이나 되는 회중을 잃어버렸다. 참으로 많은 교회들의 경우, 과로와 스트레스에 찌든 목회자들은 대부분의 교인들이 꼼짝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현실을 걱정하고 있다. 이런 교인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교회가 봉사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이 규칙적으로 봉사하며 헌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비록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지만,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많은 급성장하는 교회들과 보다 젊은 교파들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성장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그들이 중요한 사역들을 평신도에게 위임하였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직분[사역]( ministry by the grace of God)'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사역이 누구에게 주어지는가?"(로베르타 헤스테네스/ 펜실바니아주 세인트 데이비즈 소재 이스턴 칼리지 학장)
첫째 마당/ 끝나지 않은 과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우리가 사용하는 렌즈에 따라 매우 다르게 보인다. '제도'의 렌즈를 통해 보는 교회의 모습은 뒤틀려져 있다. 반면에 '유기체'의 렌즈를 통해 교회를 바라보면 그 모습이 명확해진다. 이 렌즈로 교회를 바라볼 때 우리는 새로운 발견에 놀라게 된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끝나지 않은 과제가 드디어 성취될 수 있는 세대에 살고 있다. 약 5백년 전에 마틴 루터와 존 칼빈 그리고 다른 개혁자들은 '만인 제사장직'(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라는 가르침)을 재발견함으로써 교회를 성직계급의 정치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약속하는 하나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그 약속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Greg Ogden, The New Reformation)
루터는 "세례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이미 사제와 주교 또는 교황으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그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사실을 확신하고 그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사제들이며 우리 가운데 전혀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월레이스 앨스톤은 서로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을 대표하는 제사장적 역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인 제사장직은 단지 각 사람이 그의 혹은 그녀의 제사장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매우 개인적인 표현으로, 그것은 목사가 당신의 제사장이며 당신이 목사의 제사장이라는 것을, 당신이 나의 제사장이며 내가 당신의 제사장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 대해 하나님의 대표들이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의 대표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서로 말해야 하고, 회개와 신앙에로 서로를 불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 대해 하나님께 말하며 서로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복을 구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 대해 점점 더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돌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실제적이고 건설적인 도움을 서로에게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종교개혁은 모든 신자들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며, 이로써 신자들이 그들 자신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중요한 통로로 여기게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들과 세상에 전해 주시는 통로인 것이다.
Ogden이 1973년 미국에서 가장 큰 초교파적 신학교를 졸업했을 때, 목회학석사(M. Div.) 과정에서 공부한 350명 중 여성은 네 명뿐이었다. 오늘날 그 신학교 학생의 약 40퍼센트가 여성이다. 이러한 놀랄 만한 변화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사역자들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데 있다.
둘째 마당 / 유기체로서의 교회
유기체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그 본질상 '예수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므로 그 안에 생명이 넘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많은 성경적 묘사들이 이것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교회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신부, 그리고 성령의 사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생동적인 표현을 96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지배하며 이 모든 표현의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이미지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묘사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성 요한 장로교회의 모습에서 몇 장면을 살펴보자. 그 교회의 표어는 유기체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숙한 제자들이 되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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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표어는 사람들이 사역을 위해 자유로워지기 위해 과거의 상처에 대한 치유와 죄로부터의 해방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상담실에서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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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성장하기 위해 다른 두 사람을 초대할 때 이 3인조는 유기체적 성격을 반영한다. 기독교적 삶의 본질들을 공부할 때 이 세 사람은 책임감과 친밀함 가운데 삶을 나눈다.
. 사람들이 서로 포옹하고, 고개 숙여 기도하며, 주님을 향한 공동의 관심사를 나눌 때, 교회는 유기체적 공동체이다.
.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그들의 삶을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는 소그룹으로 모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도록 서로 도울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으로서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일차적으로 유기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에 질서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기체에는 반드시 구조가 있어야 한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제도의 위치를 보려고 하며, 왜 종교개혁의 교회 이해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사역을 전달하는 환경을 제공하지 못했는지를 볼 것이다.
셋째 마당/ 제도의 덫에 걸린 교회
헨드릭 하트(Hendrik Hart)는 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 "비록 개신교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진지하게 로마 가톨릭의 전통적 교회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으로부터 생성된 전통은 이러한 단절을 이루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종교개혁이 공격하고 변화시키려고 시도하였던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도존중주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계급 조직적이고 성직자 중심적인 교회에 맞섰다.
종교개혁의 복음 이해는 사제의 사제 제도적 역할을 제거하였다. 개혁자들이 볼 때, 미사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반복적으로 계속된다는 생각은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며, 계속해서 희생 제물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목사의 제사장적 역할은 제거된다.
루터는 '보다 고상한 소명'으로서의 수도원 생활을 추구하는 자들과 세상적 사고방식에 오염된 것으로 간주되는 보통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생겨난 질적인 격차로 인해 마음 고생을 크게 했다. 루터는 이러한 계급적 차등을 두는 소명관을 공격했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거룩하게 하신 보다 고상한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말하기를, 복음 때문에 하나님의 소명은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임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수사처럼 살지 않고 사회적 교제 가운데 함께 살고 사람들 가운데서 믿음의 일들과 실천을 행하도록, 그의 교회에 수많은 사업과 소명을 주시어 세상 가운데 두시었다.
비록 복음의 재발견이 로마 가톨릭의 사역 개념을 바꾸어 놓을 것을 약속하였고 원리상 그 기초를 놓았지만, 실현된 것은 극히 드물었다.
데이비드 왓슨도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들은 로마 가톨릭처럼 성직자가 행세를 하여 왔다. 목사나 교구 목사가 모든 진행 절차를 주관하여 왔다. 바꾸어 말하면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는 구분은 종교개혁 이전 시대처럼 거의 비슷하게 계속되었고, 영적 은사와 몸의 사역에 관한 교리는 대부분 무시되었다.
"종교개혁은 만인제사장직의 풍부함을 결코 온전히 깨달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은 이 유기체적 교리를 제도적 교회론과 결부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Greg Ogden).
사역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되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밑에서 위로 향하는 교회관을 가져야 한다. 제임스 던은 우리의 방법론을 버리고 새로운 출발점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넷째 마당/ 하나의 백성 , 하나의 사역
종교개혁은 급진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을 시작하였으나, 그 변화가 약속하는 바를 충분히 성취하지 못했다. 만인 제사장직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사역'을 되돌려 주는 소망을 보여주었으나, 종교개혁은 그 일을 이룰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유기체로서의 교회론이 교회의 제도적 신학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유기체의 관점에서 교회론을 인식할 때에 우리는 온전한 '만인제사장직'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자신의 사역에 온전히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우리는 오직 하나의 백성과 하나의 사역이 있다는 인식에 이르러야만 한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두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견해는 결국 두 종류의 사역이 있다는 생각을 낳는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를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렌즈의 종류는 우리가 세우는 교회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교회는 모르는 사이에 제도적 교회관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두 백성/두 사역의 구조를 갖게 되었다. 성직자/평신도간의 간격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철저한 제도존중주의와 인습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 백성에게 적용되는 성경적 단어들을 가졌으나, '제도'의 관점으로 그 단어의 의미를 제한하여 오직 선택된 사람들의 집단, 특히 성직자들에게 적용하였다.
로버트 멍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의 갱신과 성장에 있어서 가장 큰 유일한 장애는 성직자와 평신도간에 그 역할들을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 구분의 결과는 성직자가 중요한 책임을 맡은 평신도를 신뢰하기를 주저하는 것이요, 또한 평신도 쪽에서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역자들로 신뢰하기를 꺼리는 것이다.
제도적 교회 모델을 따르면 우리는 두 백성과 두 가지 사역이 있는 분기점에 서게 된다. 리차드 러브레이스는 신(新)종교개혁이 제시하는 바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성직자와 평신도의 마음속에 있는 교회 생활의 모델에 의하면, 목사는 기독교 공동체의 영적인 문제에 전문가인 탁월한 목회의 슈퍼스타인 반면, 평신도는 구경꾼이고 비평가이며 목회적 돌봄을 받는 자이고, 목사가 그 나라의 사업을 돌보고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새로운 비전이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살아 있는 유기체에 관하여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라오스)은 사역에로 부르심을 받고 있다. 여기서 사역이란 하나님의 백성이 서로에 대해 그리고 망가진 세상을 향해 제사장으로서 그들의 역할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오직 하나의 백성이 있고 따라서 하나의 사역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유로워질 것이다.
다섯째 마당/ 한 백성, 한 사역의 의미
우리는 유기체적 사역의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발견하였다:
* 유기체적 교회는 밑에서 위로 향하는 관점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 전체로 정의한다.
* 성경적 관점을 통해서 우리는 '사역'을 정의하는 출발점을 바꾼다. 즉 안수 받은 목사 중심의 제도적 관점에서 유기체적 공동체의 관점으로 바뀐다.
* 하나님의 백성의 사역은 목회자의 사역의 부속물로 종속될 수 없다. 목회자의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그 자리를 발견해야 한다.
* 따라서 하나의 사역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한 백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그 백성의 사역이다.
성직자-평신도의 분기점이 "교회의 갱신과 성장을 막는 가장 큰 유일한 장해물"이라는 로보트 멍어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착수해야만 한다. 존 스토트의 진술은 더 직접적이다: "나는 특권 계급이나 교회계급구조의 관점에서 교회를 해석하는 것이 신약의 교회관을 파괴하는 일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한 백성/한 사역의 신약 교회를 지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그것은 회개이다. 성경에서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회개는 우리의 첫 번째 생각을 바로잡는 두 번째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제 정신으로 분별하면서 우리의 모습 그대로 우리 자신을 보고, 우리의 행동 방식을 바꾸게 될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회개는 "우리가 적을 만났는데 그들은 바로 우리들이다"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Ogden)
만일 우리가 제사장적 역할을 선택된 사람들로부터 신자들의 전공동체로 옮기지 않으면,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되돌아갈 수 없다. 신약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임재를 중재하는 특별한 직능의 사람들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그 초점은 거룩하게 구별된 목사에게가 아니라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두고 있다.
여섯 째 마당/ 신종교개혁의 길을 여는 열쇠- 목사의 자세 변화
신종교개혁의 길을 여는 열쇠는 목사의 자세 변화에 달려 있다. 회중은 목사의 개성과 태도와 접근 방식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고, 거울에 비친 상(像)처럼 그 정체감을 반영한다. 목사와 회중 사이는 상호 역동적인 관계이다. 예를 들면 만일 목사가 회중에게 접근할 때 학자와 교사처럼 다가간다면 회중은 학생이나 배우는 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만약 목사가 교회와 자신의 역할을 사회적 활동가로서 본다면 교인들도 정의의 나팔을 부는 중심지가 될 것이다.
만약 목사가 부모의 상을 구상하면 교인들은 그들 스스로를 의존적인 자녀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교회가 사역의 공동체가 되려면, 목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온전히 봉사할 수 있도록 능력을 구비시켜 주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만약 사역이 "그리스도의 삶을 나누어 갖도록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목사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과거에는 목사는 바퀴의 축과 같은 존재였고 교회의 성도들은 그 중심에서 뻗어 나온 살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목사의 그런 정체성이 더이상 받아지지 않는 시기가 되었다. 이런 신 종교개혁의 시대에 목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트루브러드(Trueblood)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최고의 답을 하고 있다:" 사역은 그리스도의 삶을 함께 나누기 위해 부르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목사는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자신들에게 맡기워진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특별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다." 달리 말하자면 목사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구비시켜 주고 준비시켜 주기 위해서이다.
헬라어 '카타르티스모스(katartismos)'는 '구비시키다(equip,RSV)','온전케하다(perfect,KJV)', '준비시키다(prepare,NIV)'와같이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카타르티스모스'와 이와 관련된 동족의 단어들을 성경에서 살펴본다면, 우리는 구비시키는 사역의 범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구비시키는 목사가 지역 교회에서 개발해야 할 환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아르티오스(Artios)- 잘 알려진 '카타르티스모스(katartismos)'의 어근인 이 단어는 술어 형용사("he is complete")로 번역될 수 있다. '아리토스'는 개인적 훈련을 위해서 또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구비시키는 일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이 단어는 '알맞은', '완전한', '불룩하게 하는', '적절하게 움직이는', '요구 사항을 채우는', '특정한 상황에 응하는', '할 수 있는', '건전한'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망라한다. 이 용어는 디모데후서 3:17에 한 번 나온다.
2. 카타르티조(Katartizo)- 이 단어는 셉투아진트('70인역'이라고도 하는 구약 성경의 헬라어 역본)와 신약 성경에서 단연 흔히 나타나는 동사이다. 이 동사는 구약 성경에서 19회 나타나고 적어도 7개의 다른 히브리어 동사를 번역한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이 동사는 다양한 문맥에서 13회 사용되고 있다.
3. 카타르티스모스(Katartismos)- 잘 알려진 이 분사는 오직 에베소서 4:12에서만 사용되며, "준비시키다", "구비시키다"로 번역될 수 있다.
4. 카타르티시스(Katartisis)- 고린도후서 13:9에서 바울은 교회의 '향상'을 위해 기도한다. 그 말은 '회복', '완성' 혹은 '적절한 질서 가운데 두다'로도 번역될 수 있다.
5. 에크사르티조(Exartizo)- 디모데후서 3:17의 아르티오스(artios)의 보기 드문 사용과 함께 단 한 번 사용되는 이 동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채우고 끝마치고 완성하고 또는 구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비시키다'가 지닌 다양한 의미를 살펴 보자.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삼기 위해 부르셨을 때, 그들은 그물을 깁고(수선하고, mending) 있었다(마 4:21; 막 1:19). 제자는 그가 스승을 닮을 때 온전케 될(fully taught) 것이다(눅 6:40).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의 대상이 되는 그릇들을 예비하셨다(prepare beforehand, 롬 9:23).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꾸짖으면서, 회중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united)"고 촉구하였다(고전 1:10).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improvement)'을 기도하였고, 그들이 그들의 방식을 고칠 것을 권면하였다(고후 13:9, 11).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한 심령으로 범죄한 자를 바로잡음으로써 그들의 삶에 개재해야 한다(갈 6:1).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가서 그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to supply what is lacking in their faith) 하기를 희망했다(살전 3:10).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히브리서 10:5는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prepared)"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was created, 히 11:3). 그리스도는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equip us, 히 13:21), 시련 후에
우리를 믿음 가운데 온전케 하시기에(establish, 벧전 5:10) 충분하다.
성경 시대의 세속 헬라 사회에서 '구비시키다'라는 말은 의료 용어로 사용되었다. 팔이나 발이 부러졌을 때, 의사는 부러진 뼈를 바르게 접골시킴으로써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에게 필요한 것을 '갖추어 주었다(equipped)'. 탈골(奪骨)된 팔다리는 제자리로 돌아가 구비됨으로써 적절한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 세속적 의미는 부러진 것을 회복시키고 제자리를 벗어난 것을 바로잡음으로써 그것이 본래 갖고 있던 기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맺는 말
구비시키는 사역의 고침과 회복의 측면은 지역 교회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가? 교회는 치유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상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장소이다.
폴 스티븐스은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원제: Liberating the Laity, IVP 역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 지도자[인간으로서의 구비시키는 자들]의 주된 역할은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각 지체가 머리와 스스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구비시키는 일의 목표는 사람들을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로 하여금 인간 지도자들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는 강한 지도력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요구된다...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미래를 발견할 수 있게 구비시키고 지도하는 것은 지도자들에게 실제적으로 가장 크게 요구되는 사항이다.
스티븐스는 말하기를, "머리는 손을 통해서 발에게 지시하지 않는다. 머리는 발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지체는 계속 머리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모든 지체는 각각 올바르게 기능을 하는 데 대해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구비시키는 자들의 역할은 머리와의 연결이 잘 이루어지도록 격려하는 것이요, 그 결과 교회 공동체의 나머지 지체들과의 관계도 잘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트루브러드는 '선수 코치'라는 이해하기 쉬운 현대적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구비시키는 자로서의 목사의 역할을 보자고 제안하였다. 이 이미지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한 팀이 있고, 목사는 신자들이 그 팀에서의 위치를 알고 발전시키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트루브러드는 말하기를, "코치의 영광은 다른 사람의 능력을 발견하는 자와 개발하는 자 그리고 훈련시키는 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코치로서 그는 큰 소리로 지시만 내리면서 방관자로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선수 코치'로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싸움과 소동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다.
존 스토트은 에베소서 4:11-12의 중요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약 성경이 말하는 목사는 욕심에 찬 나머지 모든 사역을 자기 손에 움켜쥐고는 평신도의 주도권을 모두 성공적으로 억누르는 자가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들의 은사를 발견하고 발전시키고 활용하도록 돕고 격려하는 자이다. 목사의 가르침과 훈련시킴은 이런 목적,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소외와 고통의 세상에서 자신들의 은사에 따라 적극적으로 그러나 겸손하게 사역하면서 사람들을 섬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모든 사역들을 자기 혼자 독점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여러 사람에게 분배해야 한다.
첫댓글 독제권력에 맛을 본 환각의 필로폰 멋사가 자기 십자가를 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이 힘들 것인데 걱정이네요.....
이광호 목사님의 만인제사장 이론과 비교하며 읽으면 재미(?)있을것 같네여.
고럼요 마져요 올려주세여~~~~
대영가스님,이광호목사님의 만인제사장설에 대한 이해는 실로암교회홈페이지[Lectures]논문중 21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