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라고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증거되어 있는 말씀에서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듯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강 물가에 잠기자 그 시기에 항상 언덕 위에 넘쳤던 요단 강물이 그쳐서 실제로 한 곳에 쌓이게 되었는데..
그러한 이적에 있어 오늘날로 치면 우리들이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응답 받게 되는 것과 근본적으로는 다를 수 없는 것이고, 직접적, 경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인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인 것이며, 근원적으로는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실상 아담과 하와 때부터 모든 인생들은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짐과 함께 완전히 단절케 된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말씀을 잃어버린 것이고, 영적으로는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노예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기에 어떤 식으로든 구주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곧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고 중보자이시며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공의와 형평과 질서의 하나님 또한 아니실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으로 인한 신령한 힘과 은혜를 누리는 것도, 의지하고 간구함으로 인해 세상이 주지 못할 놀라운 응답과 역사들을 누리는 것도 원론적으로는 애초부터 불가능인 실정과 현실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
진정 구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 때부터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여자의 후손에 대한 계시, 여러 모양의 피 제사와 희생 제물들, 유월절 어린 양, 모세를 통한 장대 위의 놋뱀, 제사장, 선지자, 제사장과 선지자 역할을 했던 믿음의 선조들 등과 같은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면서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었던 것일 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이 순간순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그 이름을 의지하듯이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는 동일하게 죄악들과 싸우고 범한 죄악들에서는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살아 있는 말씀의 신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친히 주신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 판이 들어 있는 법궤는 그 자체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구주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특히 그러한 법궤가 중심인 회막이나 성전이야 말로 참 성전이시고 근본적인 성전이시며 절대적인 성전이신 것이면서 사실 사람의 손을 통해 지어진 이 세상의 성전에 있어서의 완전한 원형이시고 실체이시며 본체이신 예수님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와 계시들 중 하나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리고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라고 증거되어 있는 말씀에서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듯이 구주 예수님의 공생에 사역에 있어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과 같은 모든 구원의 일들, 하나님 나라의 사건들에 있어서 직접적, 실질적인 측면에 있어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들이 됨과 함께 현실적, 경험적인 누림과 성취들이 되게 하신 성령님께서 아래 본문에서와 같은 여호수아 때에 있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요단 강물이 한 곳에 쌓이게 된 사건과 이적에 있어서도 어떤 식으로든 구주 예수님과 함께 직접적, 경험적인 측면에서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가 되고 누림과 경험이 될 수 있게 하신 분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의 역사들에 있어서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이며,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과 약속과 말씀들을 다 실행하시고 특히 그 한가운데 계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모두 실제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위치와 역할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근원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러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의 역사들에 있어서 그 삼위일체라는 존재와 개념 자체가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일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며 완전히 하나되어 한 뜻을 이루는 의미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바로 그러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말씀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며 다 이루시는 분인 것이기에 아래 본문 및 성경의 모든 부분들에서와 같이 값없이 누리는 그 어떤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에 있어서라도 다름 아니라 말씀, 말씀대로의 역사,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이 모든 전제와 기준, 관건과 방법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인데 어쨌든 그러한 사실과 이치와 원리와 실제야 말로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대략 2000년이나 지났고 엄청난 공간의 차이도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단지 말씀에 약속되고 계시된 대로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되고 마치 목욕하듯 하나님의 것이 되며, 직접적, 실질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정말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고 본질적으로는 더 이상 아담과 하와 때부터의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가 아닌 말씀이신 하나님의 것, 말씀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되는 등과 같은 이신칭의의 구원이 실제로 가능할 수 있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구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특히 사도 바울과 같이 순간순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죄악들과 싸우고 범한 죄악들에서는 즉시로 자복하며 참회하고 돌이키면서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사모하고 가까이 함과 함께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믿음이 될 수 있게 함에 있어서도, 그와 함께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을 풍성하게 누리게 됨에 있어서도, 더군다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한 기도에 있어서의 응답이 정말 실제와 누림이 됨에 있어서도, 더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과 약속과 섭리대로 세상 끝 날의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이 강렬한 실제와 누림이 됨에 있어서도, 심지어는 태초의 무에서 유로의 천지만물의 창조와 같은 일반적인 은총에 있어서의 생생한 실제와 누림에 있어서까지도 정말 가능할 수 있게 하고 합당할 수 있게 하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여호수아3:14~17)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8월 29일(목)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