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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리라고 맹세한 땅
신 11:8-17
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10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3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신 11:8-17 / [순종과 복된 미래] 그러므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주님의 모든 명령을 정성껏 지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이제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하고자 하는 땅으로 들어가 그곳을 정복하도록 주께서 여러분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9) 또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그들과 그 후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여러분이 오래오래 살 것입니다. 10) 여러분이 이제 들어가서 차지할 땅은 여러분이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않습니다. 애굽에서는 여러분이 곡식의 씨를 뿌리고 물을 대기 위하여 몹시 수고하였습니다. 그런 수고는 보통 채소밭에서나 합니다. 11) 여러분이 이제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많아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비를 직접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12) 거기서는 농사가 잘되도록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돌보아주시고 일년 내내 눈을 떼지 않고 보살펴 주시는 땅입니다. 13)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주님의 명령을 여러분이 분명하게 듣고 지켜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마음을 다 쏟고 정성을 다 기울여 주님을 섬기면 14) 주께서 여러분의 농경지에 봄비와 가을비를 철따라 내려 주셔서 여러분이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을 수확하게 되고 15) 가축들은 들녘에서 넉넉히 풀을 뜯어먹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항상 배불리 먹고살 것입니다. 16) [순종해야 강대국이 된다] 여러분은 유혹에 빠져 주님을 버리고 떠나서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것들에게 절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17) 조심하여 삼가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진노하셔서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농경지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자라지 않을 것이고 결국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주실 그 좋은 땅에서 바로 멸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한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게 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땅을 차지하리라(8-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임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8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내용이 나옵니다.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땅과 전혀 다른 땅입니다. 애굽 땅은 ‘발로 물 대기’를 해야 하는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땅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은 그렇지 않습니다.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자연적으로 수로와 관계시설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합니다(12).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연초부터 연말까지 일 년 내내 하나님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 관심과 사랑과 보살핌을 의미합니다. 환경적으로나 생태학적으로 비옥한 땅이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면 거룩한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13-17)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십니다. 이른 비는 오늘날로 말하면 가을비를 의미합니다. 이때 팔레스타인 지역은 파종을 합니다. 또한 늦은 비는 봄비입니다. 이때 팔레스타인 지역은 추수를 합니다. 농작물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비입니다. 당시 농사가 주력 산업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농사의 성패는 시시 때때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성도들의 삶이 형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 경계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긴다면 하나님이 하늘 문을 닫으십니다. 그런 날이 오래된다면 자칫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17).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3년 반의 극한 가뭄 역시 하나님이 하늘 문을 닫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용: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늘 문이 열립니다. 하늘 문이 열리기 위한 조건을 본문에서 찾아 나누어 봅시다.
내가 가진 지혜와 기술, 노력을 기반으로 저장하고 비축하고 쌓아 놓는 삶의 중심에는 내가 있고 오직 믿고 의지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 설 교 >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
신 11:8-15 / 피종진 목사
오늘도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이 시간 예비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시며 과거를 돌보신 하나님께서 미래도 보장해 주실 줄 믿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온 국민의 관심사인 아시안컵 축구를 시청했습니다. 온국민들이 국내외에서 뜨겁게 응원하면서 애국심에 다시 불을 붙였습니다.
여기에서 깨달은 것은 1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어떻게 보면 항상 여러 종목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와 같습니다. 전쟁에서는 최전선 육탄전 용사처럼, 유격대 기동부대 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승자와 패자는 우리 노력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인데 오늘도 귀중한 시간을 일분 일각이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 은혜 가운데 사는 우리 성도들이 되신 것을 우리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잠시라도 헛되이 보내지 말고 회의(懷疑)하지 말며, 게으르지 말고 항상 내 생(生)에는 ‘일분 일각이 바로 승패가 좌우되는 나의 소중한 시간이고 나의 삶이다.’ 라는 정신으로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명령」이라는 말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행하라, 준행하라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 ‘명령’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명령이라는 말은 대단히 의미가 큽니다. 법령적인 선포요, 법률적인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고 꼭 지켜야 됩니다. 히브리어 ‘다바르’는 법령적인 공지사항 담화문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모세율법(모세5경)은 하나님의 명령을 의미합니다. 명령을 기록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소유하게 될 약속의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행복을 누리려면 이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율법에 대해 그들의 말씀 준행에 따라 축복받을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고 자세히 말씀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4:2) 아멘.
많은 사람이 성경을 현세에 맞추어서, 인간에게 맞추어서, 자기 환경에 맞추어서 성경을 왜곡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명령입니다. 어떤 이론을 붙여서도 안됩니다. 그대로 명하는 것이 법령이고 명령인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신5:32) 아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가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고 축복받을 수 있고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평생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의 생활을 천로역정(天路歷程)에 잘 풀이 해 놓았습니다. 천국을 목전에 둔 기독도에게 최후로 도전해 온 주변의 강력한 사단의 도전은 두려움과 포기, 의심과 좌절의 늪으로 몰아가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간절한 기도는 지혜를 주시고 영의 눈이 떠지며, 신령한 귀를 열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보게 하며 깨닫게 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은길로 천국 문에 도달합니다. 삼가 행하여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고 똑바로 가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어떤 축복이 임하게 됩니까?
첫째, 강성한 사람이 됩니다 (8절상)
‘강성’이라는 것은 힘이 꽉 차서 넘치게 된 상태 곧 파워플(powerful)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은 강성하게 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히브리어 ‘코아트’는 세력과 권세, 활력과 능력을 다 포함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약속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약속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강성함을 약속했고 무엇이든지 하는 길을 예비해 놓았고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그리고 언제든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역사하시고 이끌어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절대로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폐품이 있어도 믿음 속에는 폐품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진리이고 신앙입니다. 신앙은 폐품이 없습니다. 진리에도 폐품이 없습니다. 정의도 폐품이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법칙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호와 명령을 지키는 자는 꼭 강성하게 해 주십니다.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앞세우며 항상 붙잡고 나아가면 아무리 약한 자도 강하게 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약해도 좌절하지 말고 강하신 하나님 붙잡으면 됩니다. 그 약속을 믿으면 됩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임합니다. 믿는 대로, 심는 대로 거두고 응답함을 알게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대상11:9) 아멘. 성군(聖君)다윗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점점 강성해 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날 모든 성도님에게도 함께 해 주신 말씀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축복과 삶의 날이 장구하게 됩니다 (9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는 오래오래 장수하고 지속될 것을 의미합니다. 건강과 기쁨의 신앙도 장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믿음을 잘 지키고 있는가? 지금도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가? 그 믿음이 변치 않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장구해야 되고 마음의 기쁨도 장구해야 되고 하나님의 축복도 장구해지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장구하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고 약속이고 만고불변(萬古 不變)의 진리이며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시고 일구이언(一口二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명령만 지키면 더 행복한 삶을, 아름다운 삶을, 더 큰 축복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여러분과 함께하실줄 믿으시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돌보아 주심을 보장받게 됩니다 (12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돌보아주심을 보장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면 절대로 넘어지지 않고, 망하지 않고 연초부터 연말까지, 시작부터 끝까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안전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도 돌보심으로 아름답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착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신11:14,15) 아멘. 이는 하나님의 약속된 세밀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약속된 복 곧 강성함과 장구함과 돌보심의 축복이 자손만대로 이어지는 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젖과 꿀이 흐르는 교회
신 11:8-12 / 박상훈 목사
금년도에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게 주신 표어는 젖과 꿀이 흐르는 교회입니다. 신11:9의 말씀입니다. 금년 한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우리 모두의 삶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있는 신명기 말씀은 모세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야흐로 가나안 땅의 문턱에 와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요단강을 건너기만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모세는 그 땅을 내려다보면서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이제 곧 그 땅의 주역이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어떠한 땅인지 우리가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고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거짓말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맹세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돋구시기 위한 표현입니다. 말씀만 하셔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맹세까지 하셨으니까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금년도에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을 우리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은 친히 이루어가시지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했습니다. 종노릇하던 애굽 땅에서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서 전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도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광야의 장애물만 바라보았습니다. 불평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길이 나쁘다고 불평하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그들은 가나안 땅, 축복의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힘있게 전진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학문 중에 성공학이 상당히 인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을 하는가?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Attitude and goal." 우선 어떠한 태도로 나아가느냐? 그리고 푯대가 바르게 세워져 있는가? 이 두 가지에 따라서 성공이 판가름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한 단어로 줄여서 기독교적인 용어로 바꾸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약속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히11:1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한 쪽에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한 쪽에 실상, 곧 성취된 것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또 이쪽에는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쪽에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금년 한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삶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모습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풍요로운 삶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생각만 해도 젖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풍성함이 머리에 연상이 됩니다. 실제로 약속의 땅은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사람씩, 모두 열두 명의 정탐꾼을 택해서 가나안땅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40일 동안 가나안땅을 두루 탐지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그 땅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보이기 위해서 포도 한 송이를 들고 왔습니다. 그들이 포도 한 송이를 어떻게 들고 왔습니까? 한 손으로 들고 왔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포도 한 송이를 꺽었습니다. 얼마나 큰지 두 정탐꾼이 포도 한 송이를 막대기에 꿰어 어깨에 메고 왔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정탐꾼들을 보낼 때 어린아이들을 보냈겠습니까? 힘도 없는 노인들을 보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007영화에 나오는 제임스 본드처럼 스파이는 몸이 날렵하고 건장한 장정들입니다. 두 장정이 포도 한 송이를 꿰어서 어깨에 메고 올만큼 포도 한 송이가 컸습니다. 그러니 그 포도송이의 열매 한 알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아마 토마토, 참외, 호박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축복의 땅이 얼마나 풍요로운 땅이었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년 한해 하나님의 축복의 젖과 꿀이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강단에서는 시간마다 말씀과 은혜의 젖과 꿀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각 가정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의 젖과 꿀이 넘쳐나는 풍성한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젖과 꿀이 흐는 땅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입니다.
모세는 10절 이하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특이하게 설명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 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애굽 땅에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큰 강이 있습니다. 나일강입니다. 나일강 옆에는 비옥한 평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에서 종살이 할 때 그들은 나일강 옆의 비옥한 땅에 밭을 개간했습니다. 채소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발로 물을 댔습니다. 수차를 만들어서 계속해서 그곳에다 물을 퍼 올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그렇지 않습니다. 11절 말씀을 봅니다.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그곳은 나일강처럼 큰 강이 없습니다. 저수지도 없습니다. 수로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차를 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천수답이라고 합니다. 전적으로 하늘에만 의지하는 땅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좀 불안합니다. 열심히 토지를 개간하고 씨앗을 뿌렸는데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해 농사를 망치는 것입니다.
그런 땅이 어떻게 축복의 땅이 됩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 말씀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권고"라는 말은 take care, 곧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시고 책임지시는 땅이 곧 축복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적절한 때, 적당한 양의 비가 하늘에서 내려준다면 그만큼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책임지시고 해주십니다. 그래서 그 땅은 축복의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그러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인간의 노력,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삶의 결과가 결정되어지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삶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금년 한해 우리의 힘, 우리의 노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좀 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모세는 13∼17절에서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축복의 땅은 온도계와 같습니다. 날씨가 따뜻하면 수은주가 올라갑니다. 날씨가 추우면 수은주가 내려갑니다. 그렇습니다.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지는 땅이 축복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면 하나님께서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 내려주십니다. 풍성한 삶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닫아 버리십니다. 그러면 그 땅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아합 왕 때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김에 따라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닫아 버리셨습니다. 3년 동안 흉년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엘리야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다시금 비가 내렸습니다.
이처럼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다스리시고, 책임지시고, 섭리하시는 손길을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축복의 삶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금년 한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힘, 우리의 의지를 앞세우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그리함으로써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영국의 한 귀족이 인도의 영주에게 밭을 가는 트랙터 한 대를 선물을 했습니다. 며칠 뒤에 영국의 귀족이 인도의 영주가 트랙터를 잘 사용하고 있는지 가서 보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인도의 영주가 트랙터의 운전대 위에 올라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는 소 네 마리를 트랙터 앞에 걸고서는 힘들게 밭을 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귀족은 인도의 영주에게 내리라고 했습니다. 소를 풀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대신 트랙터 위에 올라앉았습니다. 그는 시동을 켰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네 마리의 소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십 마리가 달라붙어서 갈 수 있는 밭의 면적을 다 갈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권고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금년 한해 우리를 하나님보다도 앞선 삶을 살지 말고 금년 한해 전적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십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어떠한 삶입니까? 1)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믿음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지식을, 권세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믿음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믿음이 큰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적은 자는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합시다. 2)젖과 꿀이 흐르는 삶은 풍성한 삶입니다. 풍요로운 삶입니다. 3)젖과 꿀이 흐르는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금년 한해 하나님의 손 붙들고 하나님 전적으로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새해를 여는 시 한 수를 인용하고 마치겠습니다.
또 다른 해가 밝아오니
프란시스 해버갈의 시
"또 다른 해가 밝아오니
사랑하는 아버지
일할 때나 기다릴 때에나 이 해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해가 되게 하소서
전진하는 새해, 찬양하는 새해, 증거하는 새해, 하나님의 임재가 늘 함께 하는 날들이 되게 하소서.
긍휼의 한해, 신실함의 한해, 은혜의 한해, 기쁨의 한해, 하나님의 얼굴에 영광이 드리우는 한해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자애로운 가슴에 기대는 한해, 신뢰의 한해, 평안의 한해, 행복한 안식의 한해가 되게 하소서.
섬기는 한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한해, 위에 있는 더 거룩한 일을 위해 훈련받는 한해가 되게 하소서.
또 다른 해가 밝아오니
사랑하는 아버지
이 땅에서나 또한 하늘에서도 이 해는 하나님을 위한 한해가 되게 하소서"
여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한해가 되게 하소서"를 덧붙여 봅니다.
광야신앙
신 11:8-12 / 박지온 목사
사도행전 7장에 보시면 스데반 집사가 이 모세의 생애를 40년 간격으로, 세 부분으로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애굽의 왕자로서의 40년 생활,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생활, 그리고 마지막 한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 영도자로서의 40년! 이렇게 해서 총 세 부분으로, 이렇게 40년 간격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언제 그를 부르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판단했을 때는 이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에, 다시 말하면 '아주 좋은 환경, 또 힘있고 권력이 있을 때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이 애굽의 왕자로 있다는 말은 엄청난 힘과 권력이 그 속에 집중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응당히 좋은 환경, 좋은 위치 이런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때에 제대로 쓰임을 받지 않겠느냐? 그런 인간적인 판단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 그렇습니다. 좀 초라하고 부족한 사람보다는 능력 있고, 실력 있고, 또 가진 것도 있고 좋은 위치에 있는 이런 사람들을 뭔가 좀 쓰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이 사람을 쓸 때하고 또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시면, 다윗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이런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들을 쭉 읽어보시면 참 재미있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이제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기 위해서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새의 집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 만난 인물이 누구입니까? 이새의 첫째 아들 엘리압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좀 속된말로 이 엘리압을 딱 보는 순간에 사무엘이 홀딱 반했습니다. 왜냐하면, 키가 컸습니다. 아주 잘 생겼습니다. 또 너무 용맹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무엘이 엘리압을 딱 보는 순간에 '야, 이 사람 정도면 이스라엘 왕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겠다! 아주 좋은 사람이다!' 그런 판단을 가지고 다짜고짜로 그 머리 위에 기름을 부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 왕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머리에 기름을 부어야 되었습니다. 어쨌든 엘리압의 머리에 기름을 딱 부으려고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그 손을 막았습니다. '아니다! 그 사람이 아니니까 더 기다리라!'
두 번째 나타난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이 누구냐 하면 아비나답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아비나답을 보는 순간에도 사무엘이 반했습니다. '저 사람 같으면 이스라엘 왕으로서 손색이 없겠다!' 그렇게 해서 이 아비나답의 머리 위에 또 기름을 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또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들이 왔습니다. 그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이 삼마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머리 위에 기름을 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이제 지나가시는데...
그런데 사무엘상 16장 7절에 보시면 중요한 말씀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무엇을 보신다 구요? "중심을 보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그 기준하고, 사람이 보는 그 기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의 외모를 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느냐?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느냐?' 그 사람의 인간적인 어떤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쓰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그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 사람이 보는 기준! 전혀 그 방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애굽에 있는 화려한 모세를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하던 너무 초라하고 너무 부족한 그 모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뒤에 '무디'라는 사람은 이 모세를 두고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모세는 처음 40년 동안에 자기 자신이 아주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40년 동안에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로 알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40년 동안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들어 쓰시면 권능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애굽에 왕자로 있을 때는 자기 자신이 아주 대단한 존재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이 왕자라는 자리는 왕 다음가는, 또 더 나아가서는 왕이 죽고 나면 그 대권을 이어갈 수 있는 너무나도 중요한 그런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미디안 광야로 쫓겨나서 40년 동안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왕궁이라는 이 현실하고 미디안 광야라는 이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 왕궁이라는 현실이 어떻습니까? 손만 벌리면 아무것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최고로 높은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마음먹은 데로, 자기가 생각했던 데로 무엇이든지 손만 벌리면 모든 일들이 착착 진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신하들, 수많은 백성들이 모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너무 좋은 그런 환경입니다. 여기에 반해서 미디안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황량합니다. 쓸쓸합니다. 답답합니다. 불편합니다. 그리고 전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런 양들이 우글거리는 그런 현실... 상대적으로 너무 빈약하고 답답한 그런 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모세가 이러한 미디안 광야로 쫓겨났습니까? 아니 좀 더 정확히 말씀을 드리면,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러한 미디안 광야로 몰아 넣었겠습니까? 아무런 부족함도 없이, 그리고 풍족하게, 그리고 화려하게 잘 살고있는 모세를 왜 광야로 이렇게 집어넣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또 다른 교육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물론 애굽의 정치도 필요했습니다. 애굽의 병법, 법률, 모든 지식이 다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모세에게 광야 교육도 함께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는 광야 40년 이 교육을 통해서 온전한 자로 세워졌습니다. 언 듯 보면 광야 40년 생활이 모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실패한 그런 생애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애굽의 환경은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얼마나 화려하고 손만 벌리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그런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애굽에 살 때는 '야, 성공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미디안 광야로 쫓겨났을 때에 '야, 모세의 인생도 끝났구나! 저렇게 황량한 곳, 그렇게 쓸쓸하고 답답한 곳에서 무슨 인생을 살수 있겠느냐?' 그래서 드러난 이런 상태를 봤을 때는 뭔가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쫓겨났을 때에, '야, 실패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세는 이 광야 40년 동안 철저하게 하나님 바라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신명기 32장 10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여러분 보십시오. 모세가 왕궁에서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어디서 만났습니까? 광야에서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했습니다. 신명기 32장 10절에 보시면, '광야에서 그를 만나시고' 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만나고 온전한 자로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이 어떻습니까? 사울의 왕궁에 살았을 때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수시로 죽이려고 하니까요. 우리가 언 듯 보면, '야, 다윗이 왕궁에 살았을 때에 참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의 왕궁에 살 때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틈만 나면 창을 들어서 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어쨌든 이런 환경 속에서 다윗이 내어 쫓겼던 장소가 뭐냐하면, 그게 유대 광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유대 광야에서 다윗이 중요한 것을 체험합니다. 순간, 순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입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면서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왜냐?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이 비록 유대 광야로 내어 쫓겼습니다 만은, 그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촉박하고 쓸쓸하고 외롭고 답답한 그런 환경이 광야라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 광야에서 임마누엘이라는 최고의 축복을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이 야곱이 형의 눈을 피해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도망가다가 엎드려서 기도한 곳이 바로 그때 당시에 유대 광야입니다. 그 유대 광야는 사나운 맹수들이 우글거립니다. 사람들이 나타나서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그런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런 힘들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야곱도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런 중요한 축복의 역사가 따라 왔다는 것입니다. 비록 쓸쓸하고, 황량하고, 답답한 벌판이지만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게 되는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내어쫓긴 후에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의 현실은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왕궁 안에서는 손만 벌리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명령만 하면 착착 진행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막상 이 광야에 들어와서 보니 모든 것이 다 불편합니다. 인간적으로 쓸쓸하고 외롭고 답답합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그런 양들과 함께 무려 40년, 긴 세월을 살았습니다. 더 이상 바라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모세가 조금씩, 조금씩 깨달았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구나!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절대로 내 힘으로는 되지 않는구나!' 처음에는 자기 힘으로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애굽의 왕궁에 살 때는 자기의 권력 자기 힘을 가지고 얼마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자기 동족이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주먹을 가지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만 해도 얼마든지 자기의 힘이나 완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 들어오면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깨닫습니다. '이 세상은 절대로 내 힘으로 살아갈 수가 없구나! 하나님 바라보지 못하면 절대로 실패하게 되어 있구나!' 이 사실을 광야에서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는 이 광야에서 하나님 바라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애굽의 왕궁에서는 자기의 힘만으로 살아 왔지만, 이 광야에 들어와서 배운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세상을 이길 수 없구나! 절대로 세상 속에 내가 살아갈 수 없구나!'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 중요한 원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상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고, 지식을 쌓아가고, 권력을 얻으면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그렇게 말들 합니다. 심지어는 우리 교회 안에 우리 성도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세상의 삶이 내가 사업에 성공했다고 다 되었습니까? 물질을 많이 얻었다고 성공을 했습니까? 높은 위치 권력을 얻었으면 그게 진짜 성공입니까?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 만나지 못한 인생!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기 없느니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 결국에는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성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바벨탑 사건을 잘 압니다. 이 바벨탑 시대를 보십시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주장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과 대를 쌓아 가지고 높이 한번 올라가 보자!' 그 말은 '하나님의 권위에 한번 도전해 보자!' 더 궁극 적으로는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래가지고 그들의 쌓았던 성이 뭡니까? 그게 바벨탑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성공이 참된 성공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그들이 쌓는 성을 한번 보자!' 그러면서 그들에게 강림하셨더라! 쉽게 말하면 '그래 잘하는구나! 그래 한번 높이 올라와 봐라!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후∼' 하고 입김 한번을 불고 나니까, 그 높이 쌓아 올라갔던 바벨탑! 일순간에, 순식간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땅에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되어지는 경우도 사실은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문제가 오고, 결국에는 무너져 내려앉는 이런 현실이 찾아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이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서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났습니까? 광야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철저하게 하나님 바라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런 모세에게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축복이 찾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광야라는 곳이 그러면 늘 쓸쓸하고, 늘 답답하고, 늘 부정한 곳입니까? 우리의 인간적으로 광야다! 그것은 '외롭겠다. 쓸쓸하겠다. 참 불편하겠다.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알고 보면 이 광야라는 현실이 그렇게 부정한 곳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생활이 어떠했습니까? 그야말로 풍성한 그런 축복을 누렸습니다. 불기둥을 체험하고, 구름기둥을 체험하고,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를 먹고, 생수를 먹었던 곳이 어디입니까? 그게 광야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갔을 때에 밤에 너무 추웠습니다. 일교차가 심하기 때문에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고, 그리고 낮에는 막 영상 40도 50도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춥고 덥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밤에 추웠을 때는 하나님께서 불기둥을 세웁니다. 따뜻하게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또 낮에 태양이 막 내리쬐면 하나님께서는 구름 기둥으로 쭉 덮어놓습니다. 그러면 시원하게 그렇게 또 그들이 인도를 받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을 때에,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내려주었습니다. '하나님 과자가 먹고싶습니다!' 그때에 만나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이 마를 때는, 반석만 치면 생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불기둥, 구름기둥, 만나, 메추라기, 반석! 이 모든 것들이 광야 속에서 진행이 된 엄청난 축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만나를 보십시오. 이 만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는 먹지를 못했습니다. 기름지고, 달고, 맛있는 이 과자 그토록 먹고 싶었던 이 만나는 보십시오. 이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 시점에서 완전히 중단! STOP이 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맛있는 과자는 어디서 먹었습니까? 광야에서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세 절기 있죠.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 모든 절기들이 광야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애굽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맥추절은 뭡니까?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저놈들 우리 땅에서 벗어나서 광야로 들어서는 순간에 다 굶어 죽을 것이다! 맛 좀 봐라!'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서서 다 죽었습니까? 그 광야 40년 동안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보리를 거두어서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 보리를 거두어서 저장까지 했습니다. 이게 수장절입니다. 그러니까 맥추절, 수장절! 이런 엄청난 절기를 경험했던 그 현장이 어디냐? 그게 광야라는 현실입니다. 단적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만 제대로 바라보면 가장 풍성한 곳이 그게 광야라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살았습니다. 좀 현실적으로 뭔가 풍성하고, 또 일들이 잘되고 그러면 우리 신앙생활이 다 잘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 모세처럼 광야교육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광야교육에 제일 큰 주제가 뭡니까? '하나님 제대로 바라봐라! 그러면 가장 풍성한 삶이 될 것이다!' 그게 광야라는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그 축복들이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 만나, 메추라기, 이 생수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가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만 제대로 바라보면 가장 풍성한 축복이 광야라는 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광야와 같은 세상이라고 합니다. 때로는 물도 없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추위가 닥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더울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을 때에 자꾸만 원망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인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그런 일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승리하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만 제대로 바라본다면 여기에는 모든 축복이 함께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이 땅의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그리고 사단이 아무리 악날하게 역사를 해도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바라보는 그 성도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자꾸 우리 성도들이 세상 바라보고, 육신 바라보고, 내 자신 바라보고, 육신 바라보고, 이 엉뚱한 것을 바라봐서 문제죠. 제대로 하나님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전혀 염려가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게 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원리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물질 때문에 그리스도 바라보기가 힘드십니까? 자녀들 때문에 그리스도 바라보는 힘이 자꾸만 떨어지십니까? 어떤 분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지금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에 언제까지 하나님 바라봅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구요.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이 세상에 언제까지 하나님만 쳐다봐야 됩니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언 듯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늘 바라보지 말고 그냥 열심히 일을 해 가지고 먹고살아야 안 되느냐! 얼마든지 인간적인 그런 판단이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먹고살기가 힘들수록 하나님 바라보십시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우리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방으로 아무리 빽빽이 둘려 쌓여도 우리가 바라볼 것은 하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로 볼 때에 여기에 모든 문제는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핑계대지 마십시오. 하나님만 제대로 바라보신다면, 그리스도만 제대로 바라보신다면 여기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큰 능력과 큰 축복이 여러분 속에 반드시 임하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이제 송현교회 온지 만 10년째 들어섰습니다. 그때에 이제 처음 들어오면서요. 저희집사람하고 같이 이제 중요한 결단을 하나 했더랬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여기에 들어오면서 전임 교역자로 왔으니까, 본격적으로 이제 교역자 생활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뭔가 하나님 좀 제대로 바라보고 뭔가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려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 중심이 서더라 구요. 그래서 이제 집사람 불러놓고 '당신 당장에 병원 근무 사표 내라!'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영대 병원에 이제 간호사로 뭐 오랬동안 그렇게 근무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것 다 치우고 자꾸 우리가 물질 때문에 거기 매여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이 복음은 전하는 일에 좀 해가 된다면 그것도 잘못 되었다! 그래서 결단하자!' 이래가지고 사표를 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표를 쓰는 과정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간호사로 있으니까 아주 그 수입이 많더라 구요. 저는 그걸 몰랐는데 나중에 결혼을 해 가지고 경력이 쭉 쌓이고 하니까, 한 달에 집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돈이 거의 뭐 한 200만원 가까이 되더라 구요. 10년 전에 아주 많은 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른 동기들에 비해 가지고 좀 풍족하게 썼습니다. 친구들하고 이제 같이 식사를 하러 가면요. '야, 너희 마누라 돈 많이 버니까, 네가 내라!' 그래가지고 밥도 제가 사고 이래가지고 또 어쨌든 뭐 그런 좋은 환경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물질가지고 자꾸만 내가 생각을 하고 염두에 두면 이 제대로 사역을 못하겠더라 구요. 그래서 '아무리 답답해도 한번 끊어보자!' 이래가지고 사표를 쓰도록 해 가지고 결단을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송합니다! 처음에 제가 왔을 때에, 처음 사례 받았을 때에 50만원 받았습니다. 50만원 받았을 때에 그때에 이제 김균태 목사님 계실 때에 물어봤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서는 교역자들 어떻게 헌금 생활을 합니까? 한번 물어봤거든요. 대뜸 하신다는 말씀이 '십에 삼조하면 되지!' 이러고 한마디로 끝나요.
그래가지고 '그런 갚다!' 싶어 가지고 50만원 받아 가지고 5만원 십일조, 5만원 십에 이조, 5만원 감사헌금 15만원 떼었습니다. 그리고 5만원은 '내가 책은 사봐야 된다!' 그래가지고 또 5만원 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30만원 가지고 그렇게 이제 집안 생활을 쭉 꾸려 나가는데, 이 네 식구가 그게 이제 됩니까! 아무리 계산을 해도 계산이 제대로 안 나옵니다. 그런데 저는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든든하게 서 있습니다. 지금은 뭐 너무 풍족하게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어쨌든 하나님 바라보는 이 훈련만 바로 되어지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절대로 굶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광야로 들어서면서 이제는 굶어 죽었다. 이제는 우리의 인생도 완전히 끝났구나 그렇게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로 들어가는 순간에 애굽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최고의 풍성한 삶이 그들에게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이 광야 같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뭘 체험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체험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은 인간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진짜로 내 삶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만을 정확히 바라볼 때에 거기에 모든 삶에 원동력이 여기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번도 굶은 적이 없습니다. 순간, 순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순간, 순간 물질로도 하나님이 축복을 해 주시더라 구요. 그렇다면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삶을 인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보고 믿고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옛날에 연속극 보니까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런 제목이 있는데요 성도는 무엇으로 삽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모든 삶에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바라볼 때에 여기에 온전한 축복의 역사가 우리 속에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 바라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땅에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로 이 사실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십시오. 이 본문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그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설명을 합니다. 특별히 9절에 보시면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는 땅 가나안땅입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을 뭐라고 설명했느냐 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 했습니다. 그 말은 너무 좋은 땅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그런데 정말로 그렇습니까? 유대 사람들이 살았던 그 땅,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그 땅이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까? 아닙니다. 너무 척박 지고, 곡식도 제대로 되지 않고, 물도 제대로 없는 그런 땅인데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향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이유를 11절, 12절에서 설명을 합니다.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신 11: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분명히 말씀을 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더 중요한 사실은 12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땅이요. 더 나아가서는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그 땅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을 바로 바라볼 때에 살아갈 수 있는 땅이 가나안 땅입니다. 이 원리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광야라는 현실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현장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기억을 하셔야 됩니다. 이 땅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습니다. 광야같이 쓸쓸하고 외롭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만 제대로 바라볼 때에 이 광야는 최고의 축복의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 광야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그 첫 번째는 뭐냐하면, 이 광야에서 기다림을 배웠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의 제일 큰 특징이 뭡니까? 제일 큰 영적 문제! 조급합니다. 절대로 잘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신호등이 이렇게 있으면요. 이 막 불이 깜빡, 깜빡 하는데도 막 달려가고, 또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막 후다닥 뛰어가고, 어쨌든 제일 기다리지 못하는 그 민족이 누구입니까? 그게 우리나라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오늘 모세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줍니다.
모세가 광야에 들어갔을 때에 얼마나 조급합니까!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무려 40년입니다. 그 긴 세월동안 홀로 쓸쓸하게 지냅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치워버려라! 뛰어나가자!' 이래가지고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가 그 속에서 계속해서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이루어 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 광야에서 기다려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 기다리지 못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몇 사람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 아브라함이죠. 하나님께서 분명히 네게 아들은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디서 난다고 했습니까? 사라의 몸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사라!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나오지 않네요! 그래서 기다림에 지친 이 아브라함이 무슨 편법을 사용합니까? 하갈을 불러들이고 그 하갈과 동침하고 그래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물론 아들은 얻었습니다. 아들은 얻기는 얻었습니다 만은, 이삭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언약하신 아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조급해서 기다리지 못했다가 영원한 언약의 아들인 이삭을 낳아야 되는데 이스마엘을 놓습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중동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이 시간표를 제대로 기다리지 못하면 반드시 문제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한사람 있죠. 야곱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야곱이 출생할 때에 분명한 예언을 했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겠다!' 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원리에 따르면 야곱은 가만히 있어도 장자의 기업, 모든 축복이 함께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기다리지를 못했습니다. 빨리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은 그런 조급함 때문에 결국에는 기다리지 못했다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얼마나 고통을 겪습니까!
모세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만나 주실 때까지 조용하게 기다렸습니다. 이게 축복을 받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일은 진행하실 때에 조급할 수가 있습니다. 빨리 성공하게 싶습니다. 빨리 무슨 일을 이루어 놓고 싶은 그런 충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보고 기다리십시오.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모세가 광야에서 뭘 배웠습니까? 묵상의 비밀을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의 비밀입니다. 이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뭘 했겠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런 척박한 땅에 보냈습니까! 하나님 나는 쓸쓸합니다. 답답합니다. 불편합니다. 왜, 나를 이곳으로 집어넣었습니까!' 처음에는 하나님께 원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모세가 무엇으로 들어갑니까? 묵상 속에 들어갑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기도하는 그 기도의 현장 속에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결국에는 이런 기다리고 기도했던 모세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그 속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광야입니다. 때로는 갈등도 옵니다. 때로는 문제도 옵니다. 심지어는 밥도 먹기 힘든 그런 형편이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법만 제대로 배운다면 이 광야는 충분히 풍성한 그런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모세는 실수 투성이였습니다. 모순덩어리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가라고 했을 때에, '하나님 나는 말도 못하고 입도 뻣뻣하고 혀도 둔합니다!' 말 그대로 말더듬이였습니다. 또 얼마나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죽어도 안 가겠다는 것입니다. '아론을 붙여줄 테니까 그래도 가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못 갑니다. 얼마나 부정적인 그런 인물이 모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런 모세에게 출애굽이라는 이런 역사를 감당시켰습니까? 모세의 중심 속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언약을 잡고 기도하는 이 실제가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들어서 출애굽이라는 큰 역사를 감당케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지금 어렵습니까? 사업이 어렵습니까? 이런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볼 때에 여기에 모든 축복들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모든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께로부터 내게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우리 자신들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이 능력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능력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사실을 믿고 나갈 때에 여기에 풍성한 삶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광야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승리를 했습니다. 오늘 마찬가지로 여기 앉아 계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 오직 그리스도 바라보십시오. 능력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여기에 이 땅에서의 모든 승리의 비결과 엄청난 축복이 여러분 속에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야신앙
신 11:8-12 / 박지온 목사
사도행전 7장에 보시면 스데반 집사가 이 모세의 생애를 40년 간격으로, 세 부분으로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애굽의 왕자로서의 40년 생활,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생활, 그리고 마지막 한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 영도자로서의 40년! 이렇게 해서 총 세 부분으로, 이렇게 40년 간격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언제 그를 부르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판단했을 때는 이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에, 다시 말하면 '아주 좋은 환경, 또 힘있고 권력이 있을 때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이 애굽의 왕자로 있다는 말은 엄청난 힘과 권력이 그 속에 집중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응당히 좋은 환경, 좋은 위치 이런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때에 제대로 쓰임을 받지 않겠느냐? 그런 인간적인 판단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 그렇습니다. 좀 초라하고 부족한 사람보다는 능력 있고, 실력 있고, 또 가진 것도 있고 좋은 위치에 있는 이런 사람들을 뭔가 좀 쓰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이 사람을 쓸 때하고 또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시면, 다윗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이런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들을 쭉 읽어보시면 참 재미있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이제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기 위해서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새의 집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 만난 인물이 누구입니까? 이새의 첫째 아들 엘리압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좀 속된말로 이 엘리압을 딱 보는 순간에 사무엘이 홀딱 반했습니다. 왜냐하면, 키가 컸습니다. 아주 잘 생겼습니다. 또 너무 용맹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무엘이 엘리압을 딱 보는 순간에 '야, 이 사람 정도면 이스라엘 왕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겠다! 아주 좋은 사람이다!' 그런 판단을 가지고 다짜고짜로 그 머리 위에 기름을 부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 왕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머리에 기름을 부어야 되었습니다. 어쨌든 엘리압의 머리에 기름을 딱 부으려고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그 손을 막았습니다. '아니다! 그 사람이 아니니까 더 기다리라!'
두 번째 나타난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이 누구냐 하면 아비나답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아비나답을 보는 순간에도 사무엘이 반했습니다. '저 사람 같으면 이스라엘 왕으로서 손색이 없겠다!' 그렇게 해서 이 아비나답의 머리 위에 또 기름을 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또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들이 왔습니다. 그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이 삼마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머리 위에 기름을 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이제 지나가시는데...
그런데 사무엘상 16장 7절에 보시면 중요한 말씀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무엇을 보신다 구요? "중심을 보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그 기준하고, 사람이 보는 그 기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의 외모를 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느냐?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느냐?' 그 사람의 인간적인 어떤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쓰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그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 사람이 보는 기준! 전혀 그 방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애굽에 있는 화려한 모세를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하던 너무 초라하고 너무 부족한 그 모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뒤에 '무디'라는 사람은 이 모세를 두고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모세는 처음 40년 동안에 자기 자신이 아주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40년 동안에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로 알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40년 동안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들어 쓰시면 권능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애굽에 왕자로 있을 때는 자기 자신이 아주 대단한 존재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이 왕자라는 자리는 왕 다음가는, 또 더 나아가서는 왕이 죽고 나면 그 대권을 이어갈 수 있는 너무나도 중요한 그런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미디안 광야로 쫓겨나서 40년 동안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왕궁이라는 이 현실하고 미디안 광야라는 이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 왕궁이라는 현실이 어떻습니까? 손만 벌리면 아무것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최고로 높은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마음먹은 데로, 자기가 생각했던 데로 무엇이든지 손만 벌리면 모든 일들이 착착 진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신하들, 수많은 백성들이 모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너무 좋은 그런 환경입니다. 여기에 반해서 미디안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황량합니다. 쓸쓸합니다. 답답합니다. 불편합니다. 그리고 전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런 양들이 우글거리는 그런 현실... 상대적으로 너무 빈약하고 답답한 그런 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모세가 이러한 미디안 광야로 쫓겨났습니까? 아니 좀 더 정확히 말씀을 드리면,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러한 미디안 광야로 몰아 넣었겠습니까? 아무런 부족함도 없이, 그리고 풍족하게, 그리고 화려하게 잘 살고있는 모세를 왜 광야로 이렇게 집어넣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또 다른 교육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물론 애굽의 정치도 필요했습니다. 애굽의 병법, 법률, 모든 지식이 다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모세에게 광야 교육도 함께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는 광야 40년 이 교육을 통해서 온전한 자로 세워졌습니다. 언 듯 보면 광야 40년 생활이 모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실패한 그런 생애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애굽의 환경은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얼마나 화려하고 손만 벌리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그런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애굽에 살 때는 '야, 성공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미디안 광야로 쫓겨났을 때에 '야, 모세의 인생도 끝났구나! 저렇게 황량한 곳, 그렇게 쓸쓸하고 답답한 곳에서 무슨 인생을 살수 있겠느냐?' 그래서 드러난 이런 상태를 봤을 때는 뭔가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쫓겨났을 때에, '야, 실패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세는 이 광야 40년 동안 철저하게 하나님 바라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신명기 32장 10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여러분 보십시오. 모세가 왕궁에서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어디서 만났습니까? 광야에서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했습니다. 신명기 32장 10절에 보시면, '광야에서 그를 만나시고' 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만나고 온전한 자로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이 어떻습니까? 사울의 왕궁에 살았을 때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수시로 죽이려고 하니까요. 우리가 언 듯 보면, '야, 다윗이 왕궁에 살았을 때에 참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의 왕궁에 살 때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틈만 나면 창을 들어서 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어쨌든 이런 환경 속에서 다윗이 내어 쫓겼던 장소가 뭐냐하면, 그게 유대 광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유대 광야에서 다윗이 중요한 것을 체험합니다. 순간, 순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입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면서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왜냐?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이 비록 유대 광야로 내어 쫓겼습니다 만은, 그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촉박하고 쓸쓸하고 외롭고 답답한 그런 환경이 광야라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 광야에서 임마누엘이라는 최고의 축복을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이 야곱이 형의 눈을 피해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도망가다가 엎드려서 기도한 곳이 바로 그때 당시에 유대 광야입니다. 그 유대 광야는 사나운 맹수들이 우글거립니다. 사람들이 나타나서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그런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런 힘들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야곱도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런 중요한 축복의 역사가 따라 왔다는 것입니다. 비록 쓸쓸하고, 황량하고, 답답한 벌판이지만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게 되는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내어쫓긴 후에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의 현실은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왕궁 안에서는 손만 벌리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명령만 하면 착착 진행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막상 이 광야에 들어와서 보니 모든 것이 다 불편합니다. 인간적으로 쓸쓸하고 외롭고 답답합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그런 양들과 함께 무려 40년, 긴 세월을 살았습니다. 더 이상 바라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모세가 조금씩, 조금씩 깨달았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구나!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절대로 내 힘으로는 되지 않는구나!' 처음에는 자기 힘으로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애굽의 왕궁에 살 때는 자기의 권력 자기 힘을 가지고 얼마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자기 동족이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주먹을 가지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만 해도 얼마든지 자기의 힘이나 완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 들어오면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깨닫습니다. '이 세상은 절대로 내 힘으로 살아갈 수가 없구나! 하나님 바라보지 못하면 절대로 실패하게 되어 있구나!' 이 사실을 광야에서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는 이 광야에서 하나님 바라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애굽의 왕궁에서는 자기의 힘만으로 살아 왔지만, 이 광야에 들어와서 배운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세상을 이길 수 없구나! 절대로 세상 속에 내가 살아갈 수 없구나!'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 중요한 원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상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고, 지식을 쌓아가고, 권력을 얻으면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그렇게 말들 합니다. 심지어는 우리 교회 안에 우리 성도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세상의 삶이 내가 사업에 성공했다고 다 되었습니까? 물질을 많이 얻었다고 성공을 했습니까? 높은 위치 권력을 얻었으면 그게 진짜 성공입니까?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 만나지 못한 인생!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기 없느니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 결국에는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성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바벨탑 사건을 잘 압니다. 이 바벨탑 시대를 보십시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주장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과 대를 쌓아 가지고 높이 한번 올라가 보자!' 그 말은 '하나님의 권위에 한번 도전해 보자!' 더 궁극 적으로는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래가지고 그들의 쌓았던 성이 뭡니까? 그게 바벨탑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성공이 참된 성공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그들이 쌓는 성을 한번 보자!' 그러면서 그들에게 강림하셨더라! 쉽게 말하면 '그래 잘하는구나! 그래 한번 높이 올라와 봐라!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후∼' 하고 입김 한번을 불고 나니까, 그 높이 쌓아 올라갔던 바벨탑! 일순간에, 순식간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땅에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되어지는 경우도 사실은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문제가 오고, 결국에는 무너져 내려앉는 이런 현실이 찾아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이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서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났습니까? 광야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철저하게 하나님 바라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런 모세에게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축복이 찾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광야라는 곳이 그러면 늘 쓸쓸하고, 늘 답답하고, 늘 부정한 곳입니까? 우리의 인간적으로 광야다! 그것은 '외롭겠다. 쓸쓸하겠다. 참 불편하겠다.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알고 보면 이 광야라는 현실이 그렇게 부정한 곳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생활이 어떠했습니까? 그야말로 풍성한 그런 축복을 누렸습니다. 불기둥을 체험하고, 구름기둥을 체험하고,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를 먹고, 생수를 먹었던 곳이 어디입니까? 그게 광야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갔을 때에 밤에 너무 추웠습니다. 일교차가 심하기 때문에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고, 그리고 낮에는 막 영상 40도 50도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춥고 덥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밤에 추웠을 때는 하나님께서 불기둥을 세웁니다. 따뜻하게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또 낮에 태양이 막 내리쬐면 하나님께서는 구름 기둥으로 쭉 덮어놓습니다. 그러면 시원하게 그렇게 또 그들이 인도를 받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을 때에,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내려주었습니다. '하나님 과자가 먹고싶습니다!' 그때에 만나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이 마를 때는, 반석만 치면 생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불기둥, 구름기둥, 만나, 메추라기, 반석! 이 모든 것들이 광야 속에서 진행이 된 엄청난 축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만나를 보십시오. 이 만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는 먹지를 못했습니다. 기름지고, 달고, 맛있는 이 과자 그토록 먹고 싶었던 이 만나는 보십시오. 이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 시점에서 완전히 중단! STOP이 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맛있는 과자는 어디서 먹었습니까? 광야에서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세 절기 있죠.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 모든 절기들이 광야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애굽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맥추절은 뭡니까?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저놈들 우리 땅에서 벗어나서 광야로 들어서는 순간에 다 굶어 죽을 것이다! 맛 좀 봐라!'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서서 다 죽었습니까? 그 광야 40년 동안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보리를 거두어서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 보리를 거두어서 저장까지 했습니다. 이게 수장절입니다. 그러니까 맥추절, 수장절! 이런 엄청난 절기를 경험했던 그 현장이 어디냐? 그게 광야라는 현실입니다. 단적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만 제대로 바라보면 가장 풍성한 곳이 그게 광야라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살았습니다. 좀 현실적으로 뭔가 풍성하고, 또 일들이 잘되고 그러면 우리 신앙생활이 다 잘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 모세처럼 광야교육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광야교육에 제일 큰 주제가 뭡니까? '하나님 제대로 바라봐라! 그러면 가장 풍성한 삶이 될 것이다!' 그게 광야라는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그 축복들이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 만나, 메추라기, 이 생수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가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만 제대로 바라보면 가장 풍성한 축복이 광야라는 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광야와 같은 세상이라고 합니다. 때로는 물도 없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추위가 닥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더울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을 때에 자꾸만 원망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인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그런 일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승리하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만 제대로 바라본다면 여기에는 모든 축복이 함께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이 땅의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그리고 사단이 아무리 악날하게 역사를 해도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바라보는 그 성도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자꾸 우리 성도들이 세상 바라보고, 육신 바라보고, 내 자신 바라보고, 육신 바라보고, 이 엉뚱한 것을 바라봐서 문제죠. 제대로 하나님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전혀 염려가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게 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원리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물질 때문에 그리스도 바라보기가 힘드십니까? 자녀들 때문에 그리스도 바라보는 힘이 자꾸만 떨어지십니까? 어떤 분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지금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에 언제까지 하나님 바라봅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구요.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이 세상에 언제까지 하나님만 쳐다봐야 됩니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언 듯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늘 바라보지 말고 그냥 열심히 일을 해 가지고 먹고살아야 안 되느냐! 얼마든지 인간적인 그런 판단이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먹고살기가 힘들수록 하나님 바라보십시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우리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방으로 아무리 빽빽이 둘려 쌓여도 우리가 바라볼 것은 하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로 볼 때에 여기에 모든 문제는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핑계대지 마십시오. 하나님만 제대로 바라보신다면, 그리스도만 제대로 바라보신다면 여기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큰 능력과 큰 축복이 여러분 속에 반드시 임하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이제 송현교회 온지 만 10년째 들어섰습니다. 그때에 이제 처음 들어오면서요. 저희집사람하고 같이 이제 중요한 결단을 하나 했더랬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여기에 들어오면서 전임 교역자로 왔으니까, 본격적으로 이제 교역자 생활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뭔가 하나님 좀 제대로 바라보고 뭔가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려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 중심이 서더라 구요. 그래서 이제 집사람 불러놓고 '당신 당장에 병원 근무 사표 내라!'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영대 병원에 이제 간호사로 뭐 오랬동안 그렇게 근무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것 다 치우고 자꾸 우리가 물질 때문에 거기 매여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이 복음은 전하는 일에 좀 해가 된다면 그것도 잘못 되었다! 그래서 결단하자!' 이래가지고 사표를 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표를 쓰는 과정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간호사로 있으니까 아주 그 수입이 많더라구요. 저는 그걸 몰랐는데 나중에 결혼을 해 가지고 경력이 쭉 쌓이고 하니까, 한 달에 집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돈이 거의 뭐 한 200만원 가까이 되더라구요. 10년 전에 아주 많은 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른 동기들에 비해 가지고 좀 풍족하게 썼습니다. 친구들하고 이제 같이 식사를 하러 가면요. '야, 너희 마누라 돈 많이 버니까, 네가 내라!' 그래가지고 밥도 제가 사고 이래가지고 또 어쨌든 뭐 그런 좋은 환경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물질가지고 자꾸만 내가 생각을 하고 염두에 두면 이 제대로 사역을 못하겠더라 구요. 그래서 '아무리 답답해도 한번 끊어보자!' 이래가지고 사표를 쓰도록 해 가지고 결단을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송합니다! 처음에 제가 왔을 때에, 처음 사례 받았을 때에 50만원 받았습니다. 50만원 받았을 때에 그때에 이제 김균태 목사님 계실 때에 물어봤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서는 교역자들 어떻게 헌금 생활을 합니까? 한번 물어봤거든요. 대뜸 하신다는 말씀이 '십에 삼조하면 되지!' 이러고 한마디로 끝나요.
그래가지고 '그런 갚다!' 싶어 가지고 50만원 받아 가지고 5만원 십일조, 5만원 십에 이조, 5만원 감사헌금 15만원 떼었습니다. 그리고 5만원은 '내가 책은 사봐야 된다!' 그래가지고 또 5만원 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30만원 가지고 그렇게 이제 집안 생활을 쭉 꾸려 나가는데, 이 네 식구가 그게 이제 됩니까! 아무리 계산을 해도 계산이 제대로 안 나옵니다. 그런데 저는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든든하게 서 있습니다. 지금은 뭐 너무 풍족하게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어쨌든 하나님 바라보는 이 훈련만 바로 되어지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절대로 굶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광야로 들어서면서 이제는 굶어 죽었다. 이제는 우리의 인생도 완전히 끝났구나 그렇게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로 들어가는 순간에 애굽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최고의 풍성한 삶이 그들에게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이 광야 같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뭘 체험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체험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은 인간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진짜로 내 삶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만을 정확히 바라볼 때에 거기에 모든 삶에 원동력이 여기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번도 굶은 적이 없습니다. 순간, 순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순간, 순간 물질로도 하나님이 축복을 해 주시더라 구요. 그렇다면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삶을 인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보고 믿고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옛날에 연속극 보니까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런 제목이 있는데요 성도는 무엇으로 삽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모든 삶에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바라볼 때에 여기에 온전한 축복의 역사가 우리 속에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 바라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땅에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로 이 사실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십시오. 이 본문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그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설명을 합니다. 특별히 9절에 보시면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는 땅 가나안땅입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을 뭐라고 설명했느냐 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 했습니다. 그 말은 너무 좋은 땅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그런데 정말로 그렇습니까? 유대 사람들이 살았던 그 땅,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그 땅이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까? 아닙니다. 너무 척박 지고, 곡식도 제대로 되지 않고, 물도 제대로 없는 그런 땅인데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향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이유를 11절, 12절에서 설명을 합니다.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신 11: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분명히 말씀을 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더 중요한 사실은 12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땅이요. 더 나아가서는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그 땅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을 바로 바라볼 때에 살아갈 수 있는 땅이 가나안 땅입니다. 이 원리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광야라는 현실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현장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기억을 하셔야 됩니다. 이 땅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습니다. 광야같이 쓸쓸하고 외롭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만 제대로 바라볼 때에 이 광야는 최고의 축복의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 광야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그 첫 번째는 뭐냐하면, 이 광야에서 기다림을 배웠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의 제일 큰 특징이 뭡니까? 제일 큰 영적 문제! 조급합니다. 절대로 잘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신호등이 이렇게 있으면요. 이 막 불이 깜빡, 깜빡 하는데도 막 달려가고, 또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막 후다닥 뛰어가고, 어쨌든 제일 기다리지 못하는 그 민족이 누구입니까? 그게 우리나라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오늘 모세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줍니다.
모세가 광야에 들어갔을 때에 얼마나 조급합니까!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무려 40년입니다. 그 긴 세월동안 홀로 쓸쓸하게 지냅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치워버려라! 뛰어나가자!' 이래가지고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가 그 속에서 계속해서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이루어 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 광야에서 기다려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 기다리지 못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몇 사람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 아브라함이죠. 하나님께서 분명히 네게 아들은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디서 난다고 했습니까? 사라의 몸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사라!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나오지 않네요! 그래서 기다림에 지친 이 아브라함이 무슨 편법을 사용합니까? 하갈을 불러들이고 그 하갈과 동침하고 그래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물론 아들은 얻었습니다. 아들은 얻기는 얻었습니다 만은, 이삭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언약하신 아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조급해서 기다리지 못했다가 영원한 언약의 아들인 이삭을 낳아야 되는데 이스마엘을 놓습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중동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이 시간표를 제대로 기다리지 못하면 반드시 문제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한사람 있죠. 야곱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야곱이 출생할 때에 분명한 예언을 했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겠다!' 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원리에 따르면 야곱은 가만히 있어도 장자의 기업, 모든 축복이 함께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기다리지를 못했습니다. 빨리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은 그런 조급함 때문에 결국에는 기다리지 못했다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얼마나 고통을 겪습니까!
모세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만나 주실 때까지 조용하게 기다렸습니다. 이게 축복을 받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일은 진행하실 때에 조급할 수가 있습니다. 빨리 성공하게 싶습니다. 빨리 무슨 일을 이루어 놓고 싶은 그런 충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보고 기다리십시오.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모세가 광야에서 뭘 배웠습니까? 묵상의 비밀을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의 비밀입니다. 이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뭘 했겠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런 척박한 땅에 보냈습니까! 하나님 나는 쓸쓸합니다. 답답합니다. 불편합니다. 왜, 나를 이곳으로 집어넣었습니까!' 처음에는 하나님께 원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모세가 무엇으로 들어갑니까? 묵상 속에 들어갑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기도하는 그 기도의 현장 속에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결국에는 이런 기다리고 기도했던 모세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그 속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광야입니다. 때로는 갈등도 옵니다. 때로는 문제도 옵니다. 심지어는 밥도 먹기 힘든 그런 형편이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법만 제대로 배운다면 이 광야는 충분히 풍성한 그런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모세는 실수 투성이였습니다. 모순덩어리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가라고 했을 때에, '하나님 나는 말도 못하고 입도 뻣뻣하고 혀도 둔합니다!' 말 그대로 말더듬이였습니다. 또 얼마나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죽어도 안 가겠다는 것입니다. '아론을 붙여줄 테니까 그래도 가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못 갑니다. 얼마나 부정적인 그런 인물이 모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런 모세에게 출애굽이라는 이런 역사를 감당시켰습니까? 모세의 중심 속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언약을 잡고 기도하는 이 실제가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들어서 출애굽이라는 큰 역사를 감당케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지금 어렵습니까? 사업이 어렵습니까? 이런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볼 때에 여기에 모든 축복들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모든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께로부터 내게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우리 자신들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이 능력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능력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사실을 믿고 나갈 때에 여기에 풍성한 삶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광야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승리를 했습니다. 오늘 마찬가지로 여기 앉아 계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 오직 그리스도 바라보십시오. 능력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여기에 이 땅에서의 모든 승리의 비결과 엄청난 축복이 여러분 속에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풍성한 삶을 누리는 축복된 인생
신 11:8-17 / 이명규 목사
[인조병]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자기 스스로 병을 만들어 병자가 되는 것을 보고하는 말입니다. 성인병의 대부분이 잘못된 생활 습관에서 온다고 합니다. 그런 생활을 거듭하다 보니까 그 지경이 된 것입니다. 건강은 약이나 의술로만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의학자 히포크라테스가 말하기를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는 말을 했습니다. 건강은 약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몸 만들기"라는 말을 합니다. 언젠가 유명한 탤런트 [박철]씨가 몇 달을 몇 시간씩 운동하여 날씬한 몸으로 만들어서 델레비젼에 방영이 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축복된 삶을 살려면 자기를 개발하고 단련하고 절제하면서 복된 인생을 위해 분투 노력해야 합니다.
복된 인생은 농사와 같습니다. 농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지 모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수고한대로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된 인생,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축복의 씨를 심어야 하고 수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존경하는 인물들 중에서 8년 동안 일곱 번이나 1위를 차지한 [삐에르 신부]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 공동체]를 창설한 분입니다. 현재 나이 90세입니다. 그 신부님의 비망록 중에서 "단순한 기쁨"이라고 하는 그런 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나오는 그의 경험담이 있습니다. 한 청년 신사가 자실 직전에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문을 구하게 됩니다. 자살하려고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가정적인 문제, 경제의 파탄, 사회적인 지위…… 모든 상황으로 나는 지금 죽을 수밖에 없다 하는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깊은 동정과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있구먼요.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살수가 없겠습니다. 자살해야 되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하고 나서 "그리고,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시고 그리고 죽으면 안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도록 하지요." 합의 하에서 그 요청을 수락합니다. 그리고 집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집을 짓는 그 신부님이 하고 있는 일을 옆에서 같이 돕게 됩니다. 얼마 후에 이 사람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내게 돈을 주었든지, 내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던지, 이렇게 베풀었더라면 나는 다시 자살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과 같이 내가 일을 하면서 섬기면서 이제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찾았고, 이제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합니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청년, 장년, 노년, 주부, 직장인, 고용인, 고용주, 너나할것없이 우리 모두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법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삶을 풍요롭게 행복하게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삶의 풍요로움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살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풍요롭게 그리고 의미 있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약 40년 동안 인도해서 이제 가나안 땅 맞은 편 땅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중재자로 삼아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다른 백성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영토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여리고 맞은 편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이제 곧 들어가서 차지할 하나님의 백성의 영토에 대해서 말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운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은 비옥하고 풍성한 땅이라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거하였던 이집트도 민16:13에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애굽 땅과 다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축복으로 주시는 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애굽은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일강이 애굽의 젖줄입니다. 이 나일 강물은 중앙아시아의 눈 덮인 산부터 물이 흐르기 시작해 그것이 풍성하게 수량을 이루면서 흘러갑니다. 그리고 이 나일강이 범람하게 되면 이 부근에 옥토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강물이 흘러 넘칠 때에 저수지에 저장했다가 그것을 수로를 통해서 농토로 운반을 합니다. 그렇게 운반을 할 때에 '샤두프'라는 기계를 사용하는데 이 '샤두프'를 통해서 한 쪽에 있는 물을 다른 쪽으로 끌어올려서 옮기는 것입니다. 그 때 발을 사용합니다. 나일강에서 물을 얻어 가지고 사람의 발로 물을 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11절에 보시면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애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거하였던 고센땅과 같이 평야가 아닙니다. 산들과 골짜기들이 많습니다. 가나안은 '샤두프'를 통해서 나일 강물을 공급받는 것처럼 인간의 노력으로 공급받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인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흡수한다는 말이 비유적으로 표현되고 시적으로 표현되어서 마시는 땅,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비를 마시는 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이 닫히면 끝나는 땅입니다. 하늘이 열리면 풍성해지고 비옥해집니다. 그것이 가나안 땅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12절 말씀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땅이고, 세초부터 세말까지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머물러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땅이고 하나님이 지키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관심을 가지시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사랑의 눈이 항상 함께 하여 구체적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복을 주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축복되고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의 품으로 안으시고, 항상 그 눈을 우리의 삶 위에 두시고 우리를 간섭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약속된 축복된 삶을 풍요롭게 누리며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같이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풍요롭게 누리며 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약속하신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1. 하나님 말씀을 청종 할 때 가능합니다.(13절)
청종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킨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시기를 바랍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여셔서 비를 내리시는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을부터 봄까지가 우기입니다. 그런데 '이른 비라고 하는 것은 10-11월에 내리는 비입니다. '늦은 비'라는 것은 3-4월에 내리는 비입니다. 이른 비는 여름동안 하얗게 가물던 땅을 촉촉하게 적셔 주어 그 땅을 개간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거기에 씨를 뿌릴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또 늦은 비는 봄비를 가리키는데 이 봄비는 마지막 추수하기 전에 곡물들이 열매를 맺게 힘을 주는 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셔서 땅을 비옥하게 하시고 이 비옥해진 땅에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먹고 배부를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풍요로운 가나안 땅을 약속하였지만 풍성하게 준비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순종한 사람들 이였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3:18-19절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그러나 16-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하늘 문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왕상 18장 - 엘리야 시대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받은 여인이 있습니다. 누가복음1:28절에서 이 여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1:30절에서도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마리아가 평범한 여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축복된 여인이 될 수 있었던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37-38절을 보십시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자기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또 그 말씀이 증거한 메시야가 자기를 통해서 탄생하게 되리라는 사실도 믿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수락일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순종입니다. "원하시면 저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그 말씀 앞에 순종하겠습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굉장히 값비싼 대가를 치를 각오를 수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말씀에 순종하여 잉태를 하게 됨으로써 받아야 했던 그 많은 수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 법에 의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종은 죽음까지도 각오한 순종인 것입니다. 순종의 대가가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쁘게 순종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를 성경은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은혜 받은 자여, 만세에 복 있는 자여,"
하나님의 예비된 축복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순종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앎에도 불구하고 대가를 지불하기 싫어서 아직도 순종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히3:15절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죽음까지도 각오한다 할찌라도 순종할 때 하나님의 예비된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까?)
2.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13절)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 354∼430)는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욕심과 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불법과 비리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풍요로운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39절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에 대한 계명이 큰 계명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축복 받는 사랑을 하려면, 사랑에도 세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 ‘관심의 단계’입니다. 둘째, ‘헌신의 단계’입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시간을 바쳐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 ‘희생의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그저 막연한 관심의 단계’입니까? 아니면 헌신의 단계’,‘희생의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축복 받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기만 사랑합니다.
시편91:14-16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5가지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높여주시고, 세 번째는 기도에 응답하시고, 네 번째는 저와 함께 하시고, 다섯 번째는 장수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 다섯 가지 축복이 나타납니다.
시편 91편에서‘사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솨크’라고 하는데, 그 뜻은 '달라붙다’, ‘애착을 가지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갓난아이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꽉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갓난아이는 엄마를 떨어지기만 하면 울고 난리가 납니다. 어떻게 하든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붙들고 발버둥을 칩니다. ‘하솨크’는 바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의지하고 매달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꼭 붙잡힌 바 되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시는 역사, 기도응답의 역사가 나타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꼭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매달립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합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노력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기도응답을 주십니다. 풍성한 삶을 주십니다.
시편 145편 20절에 다윗 왕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영국의 국회의원 중에 [헨리 파우세트](Henry Fawcet)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국회의원은 맹인이었습니다. 어떻게 맹인이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이 되었는가하면 [헨리 파우세트]가 20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실수로 총이 오발되는 바람에 그만 총알이 그의 얼굴에 맞고 말았습니다. 목숨은 건졌으나 그는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고로 아버지도 충격을 받고 아들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내가 내 아들 장래를 망쳤구나.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라고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나는 이제 앞을 못 보니 책도 못 보고 살아서 뭐 하겠는가? 죽어버리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부자(父子)가 다 이렇게 죽을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는 누군가 심하게 통곡하며 흐느껴 우는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보니까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우는소리를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울지 마세요. 아직도 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도와주시면 나도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도와주실 거예요”
“어떻게 너를 도와주면 되겠니?”
“아버지, 나를 위해서 책을 읽어 주세요. 아버지가 나에게 책을 읽어 주시면, 내가 아버지를 통해서 책을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점자도 배워서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날 좀 도와주세요.”
“그래, 내가 널 도와주마.”
아버지는 아들을 도와 열심히 책을 읽어주고, 아들은 점자를 배워서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 맹인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하면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눈이먼 헨리에게도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청춘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없는 것만 생각하고, 불평과 원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믿음이 있고 건강이 있고 소망이 있고 지혜가 있고 생각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고, 남은 것을 가지고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누릴 예비된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성을 뜁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나도 소중히 여기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내가 똑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도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잃은 양을 찾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땅 끝까지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해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둘째, 높여주시고, 셋째, 기도를 응답하시고, 넷째, 우리와 함께 하시고, 다섯째, 장수케 해 주십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하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가능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3. 하나님을 섬길 때 가능합니다.(13절)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3-4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목숨을 다해 교회를 섬겼습니다.
마가복음 14장에 나오는 평범한 사람 이였던 마리아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고 의미 있게 우리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가진 향유로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섬기되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섬깁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피아노 실력의 80퍼센트는 연습으로 됩니다. 그러나 100퍼센트가 되기 위해서는 피아노를 사랑해야 합니다. "
모든 예술도 그렇고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일등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철저히 사랑하지 않으면 80퍼센트 이상 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다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큰 일꾼이 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 보나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사랑이 확인되면 너는 진정으로 내 수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능력을 구하지 말고, 헌신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일등으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면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캐나다에 O. Smith가 세운 아주 훌륭한 교회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교회요, 캐나다에서 가장 뜨겁게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찬양대 반주자가 머리가 하얀 남자여서 사람들이 종종물어 봅니다. "당신은 이 교회에서 몇 년이나 피아니스트로 봉사하고 계신가요?"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올해로 28년째 입니다. 그래서 지휘자한테도 물어봅니다. 당신은 얼마나 되셨습니까? 그는 25년째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당신은 몇 년째입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렇게 봉사하며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느 한 부서에서만, 그 자리를 지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복지부동이 아닙니다 교사를 하다가 찬양대를 할 수도 있고, 찬양대를 하다가 교사할 수도 있고, 새 가족 부원으로 안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평생 초지일관한 마음으로 꾸준히 헌신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위인들은 하나같이 시종일관하게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갈렙은 85세가 되어서도 결코 지치지 않는 열정을 품고 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세는 120세가 되기까지, 여호수아 는 110세까지, 다윗은 80세까지, 다니엘은 93세까지 결코 식지 않는 뜨거운 열정으로 헌신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짧은 인생을 통하여 초지일관 꾸준하게 섬기고 일하는 그 봉사를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사로 받아주실 줄 믿습니다. 섬기되 희생적으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돈이 많아서 바울의 선교사역을 꾸준하게 후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알 수 있듯이 돈이 있다고 헌금하는 것도 아니요, 시간이 많아야 봉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빌립보교회는 사실 생활이 굉장히 어려웠었습니다. 그런데도 힘을 다해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2절을 보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오히려 넘치는 기쁨으로 후원했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힘이 닿는대로 했을 뿐 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헌금을 했던 것입니다(3절). 더 나아가서 그들은 단순히 돈으로 헌금하는 선교를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헌신하였던 것입니다(5절).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희생적 헌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봉사라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풍성한 가나안 땅을 축복으로 예비해 놓았습니다. 어떻게 그 축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청종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섬길 때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송 가운데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소서
신 11:8-17 / 박금호 목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늦은 비와 이른 비를 적당히 주신다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때를 따라 하나님이 영적인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복을 주신다.. 이렇게 표현해 말씀하시는 곳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실 이번 성회를 기대하고 또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단비는 하나님 은혜의 말씀으로 상징되기도 합니다. 단비를 내려주신다고 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허락해 주신다.. 이렇게 쓰여 졌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55장 10절 이하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되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어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케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내려 주시어서 곡식을 주신 것처럼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신다.. 이렇게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땅이 건조할 때 메말라 가물어 있었을 때 그때 적당한 비를 내리는 것, 얼마나 반갑고 얼마나 귀한 것인지 우리가 농사짓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런 추억들이 모두 있으실 것입니다. 가을에는 대체로 비가 많이 오지 않습니다. 가을 걸이를 잘 하고 나서 옛날 보리를 많이 심을 때는 보리씨를 열심히 뿌려놓고 비가 오지 아니하면 보리 싹이 나지를 않아요. 그래서 초겨울 비가 촉촉이 내리고 어느 날 들에 나가보면 하룻밤 사이에 보리 싹이 트이기 시작하고 하룻밤이 지나면 제법 보리 촉이 자라다가 며칠이 지나면 보리고랑이 제법 푸르러져 있는 것을 기억하시지요? 가물어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이 굳어집니다. 그리고 파종을 해도 싹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땅이 부드러워지고 촉이 나고 자라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단비를 내려 주시면 그 단비가 하나님 은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임하게 될 때 우리의 굳은 심령이 녹아지고 강팍하고 완악한 심령이 깨뜨려지고 길바닥 돌짝 같은 밭이 기경되어서 싹이 나고 자라고 결실을 할 수 있게 되더라.. 하는 말씀입니다. 시편119:70 말씀에 ‘저희 마음은 살쪄서 지방 같으나.. 즐거워하나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온갖 것 다 섭취해서 그 마음이 지방질로 그냥 비만해져있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영혼이 즐거워하겠다.. 시편기자는 말씀합니다. 시편 기자는 또 말씀하기를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내게 단지요. 꿀 송이보다 더 달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지킴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인지 모르지만 내 심령이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내 마음이 점점 상막해지고 공허해지고 필요 없이 짜증스럽고 영적으로 갈증을 느낀다고 생각을 혹 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 말씀에 은혜의 단비가 내게 때를 따라 적절하게 임하고 있는지, 그 말씀의 단비를 내가 적절하게 수용하고 있는지.. 여러분 자신을 깊이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은혜의 말씀만이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서 이른 비, 늦은 비로 우리에게 임하신다고 하는 말씀은 때를 따라 하나님이 말씀의 은혜를 허락해 주신다.. 오늘 그 말씀의 은혜를 받는 시간 되시고 여러분이 한 주간 동안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삶으로 심령이 더욱더 윤택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번 성회를 위해서 준비하고 기도하면서 이런 특별한 기회를 갖는 것은 이런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전에 받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은혜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허락해 주심을 믿고 여러분이 사모하시고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심령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실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이 단비는 영적인 축복을 상징할 때 쓰여 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오늘 말씀에도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절히 주실 때 곡식이 익을 수도 있고 초장의 풀이 풍성해서 목축을 잘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현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심으로 주시는 축복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때를 따라서 말씀의 단비를 주심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주시는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 이것을 상징하더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금주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묵상할 때에 저는 어렸을 때에 보리농사를 많이 지었습니다. 한 들을 개간해서 그저 밭이 많이 있어서 보리를 많이 심었던 때를 생각하고, 가물어가지고 보리씨를 열심히 뿌려놔도 비가 오지 않으면 촉이 나지를 않고 그냥 있다가 하루 저녁 비가 온 후 들에 나가보면 촉이 나서 하루 이틀 만에 금방금방 자라나는 것, 그 생각이 머리 속에 있습니다. 단비를 통해서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이 머리 속에 있습니다. 제가 임실에 있으면서 그쪽이 낙농을 많이 했습니다. 저희 처가에서도 그쪽에 목장을 하나 구해가지고 처남을 결혼시켜서 거기 분가를 시켰는데 제가 거기 있으면서 그 목장 운영하는 것을 관계를 하고 열심히 돌봤던 때가 있습니다. 목초지에 풀이 잘 자라면 적절한 시기에 풀을 잘 깍아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풀이 가라앉고 썩습니다. 잘 베어서 말려서 건초를 만들어놓고 그 다음날 초지에 가보면 하루 저녁 만에 아마 약 5미리나 1센티미터 가깝게 풀이 이렇게 연하게 연녹색으로 베인 자리에서 자라납니다. 그러다가 갑자가 소나기라도 오면 금방 그 다음은 초지가 푸르러있습니다. 신통합니다. 자라나는 것이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하룻밤 이틀 사이에 벤 자리가 금방 연녹색이 진녹색으로 변하면서 그저 한 일주일 지나면 언제 풀 깎았는가 싶게 파랗게 초지가 우거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단비를 주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 축복으로 임하는 현상과도 같구나..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깨닫고 있습니다. 그 초지를 갈아 엎어버리고 뿌리채 캐버리면 그것은 황폐해 집니다. 그러나 때를 따라서 풀을 적절하게 깍아 내면 어쩌면 풀이 깍기울 때는 아플는지 모르지만 풀을 베어오는 자리에 다시 새 움이 솟고 푸르른 대지가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서 우리에게 사랑의 징계를 하실 때도 있고 사랑의 채찍을 하실 때도 있지만 그 징계와 채찍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복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과정이고 방편일 뿐이고 오히려 베인 자리가 하루 이틀 일주일 만에 아무 흠이 없이 다시 푸르게 자라나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의 단비가 임할 때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심령에 은혜가 임하고 말씀의 단비를 통해서 여러분 영육 간에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는 것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복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요4장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그 황폐한 여인,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상대도 해 주지 않았던 그 여인, 예수 만나고 나서 새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수 만나고 나서 그는 놀라운 인생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예수 만나고 예수로부터 주시는 말씀의 단비를 얻을 때 우리에게도 임하게 될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인스턴트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속전속결입니다. 빨리빨리 입니다. 우리 신앙도 빨리빨리, 기도 응답도 빨리빨리, 축복도 빨리빨리, 그저 즉석에서 해결이 안 되면 하나님은 듣지 아니하시는가? 하나님은 나와 무관하시는가? 우리가 이렇게 영적인 삶도 조급하게 살아갈 때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시간을 참고 기다리면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서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우리에게 축복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만나 하나님께로부터 주시는 놀라은 은혜와 축복을 받을 때 예수님의 평강이 여러분에게 넘칠 것입니다. 예수의 기쁨이 넘치고 예수의 변화가 생기고 새 삶이 생기고 참으로 행복한 축복의 생활이 저와 여러분 앞에 전개될 것을 믿으시고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단비를 맞고 나면 이런 놀라운 축복이 임한다는 것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 희년을 선포하던 첫 주일, 저는 선포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늘 붙잡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희년에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이 희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것이다. 이 희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희년, 기쁨의 해가 되게 하실 것이다. 저는 그렇게 선포하고 그날 그 은혜가 우리 광천 교회 위에 임하지만 내 자신에게서부터 임하게 될 줄로 분명히 믿고 사모하고 선포하고 지금 이 은혜가 임하고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임하시는 줄 저는 믿습니다. 이런 은혜가 이 희년에 시작해서 여러분 날마다 날마다 해마다 해마다 여러분 자녀 손들까지 계속해서 이런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특별히 이 희년의 대 성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비하신 은혜로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 희년 성회를 통해서 전에 없었던 놀라운 영적인 은혜를 체험하고 변화를 체험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바르게 세울 때 이 구원의 성회를 통해서 희년에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복을 내려 주실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여러분, 행여라도 오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는 필요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니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아니 되고 어려운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입니다. 영적인 관계가 바르게 되어지면 풍성한 사람도 기도하고 건강한 사람도 기도하고 높은 사람도 기도하고 부자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할 것이 없다. 나는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혹 여러분 생각하고 계시는 분 계십니까? 그것은 매우 두렵고 위험한 생각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바른 관계를 이룩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성회에 이런 놀라운 은혜가 임하기를 나는 간절히 소원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주시기를 저는 소원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의 제목이 은혜의 단비를 내게 주시옵소서. 하나님 오늘 약속한대로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는데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임하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속에서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것을 여러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드릴 말씀은, 비는 여기 단비라고 말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큰 비는 홍수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될 때도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를 다 아시지요? 예수님 마태복음 7장 27절 이하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그 집이 무너짐이 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고 든든히 서는 집이 있는데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운 집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집이 모래 위에 세운 집입니까. 어느 집이 반석 위에 세운 집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반석위에 세운 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떠한 심판의 홍수가 임해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큰 비는 심판의 도구로 쓰이지만 말씀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때가 공적이 나타나는 때이고 상을 받는 때고 은혜의 때가 되고 영광의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심판이라고 하는 용어 자체를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믿음 있는 사람, 말씀 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그때가 은혜의 때고 축복의 때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큰 비가 심판을 상징한다고 말씀할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때야말로 내가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행여 라도 그때가 두려움의 때고, 어두움의 날이고, 공포의 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심판이 없으시다면 공의와 정의는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심판이 없으시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살 가치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때를 따라서 개인과 가문과 한 시대 한 역사 한 국가를 심판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말의 때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조차 강림하시리니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선과 악이, 불의와 의가, 신앙과 불신앙이 심판의 날에 분명히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알곡과 죽정이가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기억을 하셔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마지막에 심판을 불의 심판으로 말씀하시면서 나무나 짚과 풀로 엮어 지은 것은 다 불타 공적이 없어지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된 것은 그 공적이 나타난다고 하고 계십니다. 심판을 견디고 났을 때에라야 온전한 자리에 이르게 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전개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바라보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지혜가 있어야 할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저는 다시 말씀 드리거니와 이번 성회는 특별한 의미와 기대를 두고 있습니다. 희년에, 새 성전을 봉헌하면서, 특별한 영적인 대성회를 개최하면서 우리가 말씀 기초 위에 든든히 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단비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말씀의 단비는 때를 따라 준비된 자에게 하나님의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런가하면 큰 비는 하나님 공의의 심판을 내리시기도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준비해야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세이레동안 24시간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기도해 갑니다. 이 기도의 열기가 계속해서 뜨거워지고 영그러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 기도에 동참하실 분들이 더 많이 일어나시고 혹은 감동되는 시간에 여러분의 가족이든지 구역식구든지 혹은 같이 있는 친구든지 성전에 나와서 기도할 그룹 기도실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24시간 기도실이 끊이지 않고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받은 사람들이 성전에 나와서 그룹으로 기도할 방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소리가 끊이지 아니할 때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은혜와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또 한 가지 준비할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이 은혜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구역식구, 믿음이 약한 사람, 믿다가 혹시 낙심 중에 있는 사람, 이번에 함께 은혜 받을 짝꿍을 작정하셔야 합니다. 이미 여러분에게 카드로 나눠드렸습니다. 그 이름을 쓰고 성경에 그 이름을 놔두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미리미리 전화하고 미리미리 찾아가고.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열어 주시게 하고 이번 집회에 참석하게 하고. 그래서 그가 나와 함께 똑같은 은혜를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 일을 이렇게 애태워하는 것입니까. 천국과 지옥을 분명히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심히 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우리는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듣고 이 은혜를 함께 받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번 희년의 대 성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주님이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신 11:13-17 / 홍문수 목사
벌써 오래된 일입니다만, 『TIME』지에 감동적인 사진 한 장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폴로 13호’의 사진이었습니다. 달을 향해 가던 ‘아폴로 13호’가 지구로부터 2만 마일 우주 공간에서 고장이 났습니다. 산소 탱크가 폭발해서 타고 있던 우주비행사 3명의 목숨이 위협 받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봉착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4일간의 사투 끝의 ‘무사귀환’이었습니다. 비행선이 태평양 해상에 떨어졌는데, 거기서 내리는 우주비행사가 대기하고 있던 군목(軍牧)과 손을 마주잡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라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비행사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대통령 각하와 국민 여러분이 기도해 주셔서 무사귀환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본인들의 집념과 노력, 우주항공국 NASA 본부 요원들의 헌신도 귀한 것이었지만, 대통령과 전 국민이 시간을 정해놓고 함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집념과 노력의 위대성, 과학의 위대함 등입니다. 그러나 놓쳐서 안 될 것은 인간의 한계와 과학의 불완전성,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役事) 등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과학만능주의, 인본주의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머리를 써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생에 대해 진지하고 최선을 다하는 성실성은 분명히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하나님 없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만 성공할 수 없습니다. 아니, 생존할 수조차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신 분입니다. 자존자(自存者)입니다. 인간이 없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의존자(依存者)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고백하며 사는 게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인생에서 성공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본문 성경의 주제가 바로 그겁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점점하고 참 신앙으로 반드시 성공하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에 출애굽해서 광야 40년의 여정을 거의 마쳐가는 때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당부한 말씀입니다. 그는 이미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이제 비장한 마음으로 말씀을 다시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에 함께 들어갈 수 없음을 통보받았기 때문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40년 동안 인도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어서 여호수아에게 백성들을 맡기고 떠나는 그 심정이 어떠할지! 그러므로 우리는 신명기를 대할 때 모세의 그 비장한 마음을 헤아리며 읽어야 합니다.
[1] 축복의 원천 : 하나님
본문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모든 축복의 원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14절~15절.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말이 ‘여호와께서’입니다.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고,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는 농경 시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주로 농사나 목축과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축복의 원천임을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이 복을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노력한다고 복이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릴 사명을 주실 때 먼저 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약1:17에도 보면 하나님이 축복의 원천임을 강조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 ”
[2]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 :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인간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본래부터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을 기울이고 애를 써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헛것입니다. 시127:1~2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 ”
본문 14절에서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임을 증거합니다. 이스라엘이 들어갈 가나안 땅 즉 팔레스틴 지방은 우리와 전혀 다른 기후입니다. 우리는 4계절이 뚜렷하지만, 그곳은 우기와 건기로 나눠집니다. 우기가 있다 하더라도 연평균 강우량은 600mm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양이 충분히 내리고, 시기적절하게 내리면 얼마든지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있어 비는 문자 그대로 단비요, 축복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비 중에서도 ‘이른 비’와 ‘늦은 비’(14절)가 중요합니다. 이런 비가 내려야 농사가 잘 되고 복을 받게 됩니다. 이른 비는 건기가 끝날 무렵 내리는 비입니다. 양력으로 9월말~10월경에 내리는 비로, 땅을 촉촉이 적시는 비입니다. 건기 내내 땅은 메마르고 갈라지게 됩니다. 거기에다 그냥 씨를 뿌리면 다 죽어버립니다. 파종기에 정말 요긴한 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늦은 비는 우기가 끝날 무렵 내리는 비입니다. 양력으로 3월~4월경에 내리는 비로 땅을 흠뻑 적시는 소낙비입니다. 늦은 비는 마지막 결실기에 낟알을 영글게 해 주는 비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충분히, 그리고 시기적절하게 내려주셔야 그 해 가 풍년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여지없이 흉년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 절대 의존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아니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우리의 삶을 위해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시기적절하게 주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듯이 우리에게 충분한 은혜를 시기적절하게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3]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 : 말씀에 청종하는 삶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지만 우리 편에서는 받을 자세를 준비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효과적으로 은혜를 받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충분히 시기적절하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13절.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 ” 여기서 ‘나의 명령’은 곧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셔서 농사가 잘 되게 하고, 복된 삶을 보장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말씀에 청종하고, 말씀에 청종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임을 감안하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 청종’이 핵심적인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축복된 삶의 원리요 법칙입니다.
신명기 28장(축복과 저주의 장)을 보면 말씀에 청종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신28:1~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 보면 말씀에 청종하는 것은 두 가지가 포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삼가 잘 듣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 ...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 ” 영어성경(KJV)을 보면 더욱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임한다는 말은 come on(뒤에서 따라오다)으로, 미친다는 말은 overtake(뒤따라가 붙잡다, 덮치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축복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치 복이 뒤좇아 가서 붙잡듯이 복이 확실하게 부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또 순종한다는 헬라어 단어를 잘 분석해 보면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휘파쿠오’(υπακουω)인데, 이 단어는 ‘~아래에서’(under)라는 뜻의 ‘휘포’(υπο)와 ‘듣다’(listen)라는 뜻의 ‘아쿠오’(ακουω)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말씀 아래에서 겸손히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말은 순종한다고 하지만, 자주 말씀 위에 서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듣고 내가 옳다 그르다 하면 이미 내가 말씀 위에서 심판자가 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에게 손해가 될 것 같으니까 무시하면 이미 내가 말씀 위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지나가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말씀 위에 서서 판단하고 취사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지켜야 합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게 순종하는 겁니다.
「평화의 기도」로 유명한 프란체스코의 일화입니다. 수도원에서 농사일을 보고 있는데, 마침 두 청년이 왔습니다. 수도사가 되고 싶으니 받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가 그 말에 가타부타 하지 않고 배추를 주면서 뿌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심으라고 말하고 가버립니다. 두 청년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배추를 심으면 죽을 게 뻔한데 그럴 수도 없고, 안 그럴 수도 없고 ... 한 청년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뿌리를 땅 속에 심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청년은 원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했습니다. 프란체스코가 한참 후에 와서 한 청년은 받아주고 한 청년은 돌려보냈습니다. 누구를 받아줬겠습니까? 이치에 맞지 않아도 프란체스코의 인격을 믿고 순종한 청년이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요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또한 ‘즉시’ 해야 됩니다. 만일 말씀을 듣고도 꾸물거리면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거역하는 것만 불순종이 아니라 순종을 지체하는 것도 불순종입니다.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뒤뜰에서 놀고 있는데 그 선교사가 옆으로 지나가다가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얘! 빨리 땅에 엎드려!” 그 아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즉시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또 외칩니다. “빨리 기어서 아빠한테 와!” 아이는 계속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선교사가 말합니다. “이젠 일어나서 아빠한테 달려와라!” 아이가 달려오자 선교사는 와락 안고 한숨을 내쉽니다. 사연인즉슨 아이가 놀고 있는 바로 위 나뭇가지에 독사가 매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아빠의 말에 아이가 대꾸하면서 지체했다면 큰일 났을 겁니다. ‘즉시’ 순종하지 않았다면 ‘즉사’했을 겁니다.
렘7:23 보면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잘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소리, 즉 말씀을 잘 들으면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미 그들의 하나님이신 것은 사실이지만, 말씀에 불순종하면 그 순간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역사해 주시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유념할 게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도 그 결과가 쉽게 나타나지 않을 때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유용한 도구로 기도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기도해도 즉각적으로 안 될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더불어 인내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며 인내하고, 인내하며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약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 약5:16~18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그러므로 순종하며 기도하면 걱정할 게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당장 무엇이 이뤄지기를 소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좋은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를 맞추기 위해 지연시킬 때도 있습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가 말씀에 불순종하는 게 걱정이지,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면 다른 것은 걱정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4] 경고의 말씀 : 하나님을 떠나지 말 것
한 가지 우리가 조심할 사항이 있습니다. 말씀에 청종하되 혹시라도 태만해지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16절 보면 스스로 삼가고,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영적인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미혹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16절.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 ” 여기서 ‘미혹’이란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혹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파타’인데, 본래의 뜻은 ‘공간이 넓다’ ‘열어놓다’ 등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태만하게 열어놓을 때 마귀의 유혹과 죄악에 미혹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엡4:27에서는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생쥐와 비슷합니다. 조금만 틈이 있으면 비집고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죄에게 틈을 보이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대번에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17절.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신28:16~24 참조)
미혹을 받아 불순종하는 게 얼마나 나쁜 건지 모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봅니다. 제가 어린 시절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 말씀에 불순종하다 어려움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아침에 등교할 때 날씨가 흐리면 어머니가 우산을 갖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가방도 엄청 무겁고, 우산도 얼마나 길고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귀찮다며 그냥 가버립니다. 그러는 날이면 영락없이 하교 길에 비가 쏟아집니다. 비를 맞고 생쥐 모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가 안쓰러우면서도 말을 듣지 않은 데 대해 은근히 꾸중하시던 말이 있습니다. “거 봐라! 내가 뭐라 하든 ... ” 마치 이 말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거 봐라! 내가 뭐라 하든 ...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신11:22~23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하면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얻을 것인즉 ... ” 여기서 부종(附從)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어로 ‘다바크’인데 접착제로 붙인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말씀에 청종하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야 사는 ‘의존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충분하고도 시기적절한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비로소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모쪼록 하나님을 늘 가까이 하시고, 말씀에 청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축복의 생애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신 11:13-21 / 윤영택 목사
변덕스런 영국의 봄 날씨입니다. 지난 한 주간 하루에도 몇 차례 일기가 오락가락하였습니다. 어제는 맑고 따뜻하여 봄다운 날씨를 즐길 수 있어 좋았습니다. 주간 일기예보에 의하면 주초에는 비의 연속입니다. 이제 서서히 낮이 길어지고 햇볕이 풍성한 계절이 시작되었지만 영국의 4월은 아직 믿을 만한 날씨가 못 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리는 비가 그리 반갑지 않은 듯 보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충분히 내리는 비가 있어서 들판은 늘 푸르고 새 봄의 나뭇가지들은 새 잎을 내어 날로 푸르러 갑니다.
비가 안 왔으면 할 때 하늘이 뚫린 듯 쉬지 않고 내리던가 비가 좀 와주길 애타게 기다릴 때 하늘이 문을 닫고 있으면 그것처럼 속이 타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늘의 비를 받아 농사를 짓는 농부들로부터 모든 생축들이 비가 적절하게 내려주어야 물이 풍족해서 생활에 어려움이 없는데 시도 때도 없이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그야말로 온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고 재앙을 초래합니다. 그만큼 적기에 내리는 비는 자연만물에 내리는 생명의 물이고 은혜입니다. 고대 사회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의지하여 농경사회였습니다. 오늘날처럼 큰 저수지나 댐을 건설할 수도 없고 큰 강도 없었던 고대 이스라엘 지역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의지하여 농사와 목축을 하였습니다.
신명기 11장을 보면, 모세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들어가서 얻을 가나안 땅을 소개할 때 그 땅은 애굽과 달라 하늘의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에는 큰 강이 있어서 강물을 밭으로 끌어들여 식물에게 물을 충분히 줄 수 있었지만, 가나안 땅은 큰 강도 없고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비가 내리면 그 즉시 비를 빨아들이는 땅이라 비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한 그 땅에 하나님이 눈이 항상 그 위에 머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애굽은 비가 오지 않아도 나일강으로부터 물을 끌어올 수 있는 평지이지만 가나안은 그럴만한 환경이 아니므로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비를 의존하여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고, 짐승들을 위하여는 들에 풀이 자라게 하심으로 너희가 이 모든 것들로 인하여 먹고 배부를 것이라 하였습니다. 각종 과실이 꿀처럼 달고 양떼들이 초장에서 풀을 뜯는 이런 가나안 땅을 가리켜 성경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그 곳에 들어가 살면서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을 떠나고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하늘의 문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실 것이라 경고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땅이 식물을 내지 않아 하나님이 주신 그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할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비가 없는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 아니라 죽음과 고통이 있는 저주의 땅이 되고 말리라는 경고입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건기와 우기로 뚜렷하게 구분이 되는 지중해성 기후입니다. 겨울에 비가 내리고 여름은 메마른 계절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농사는 우리 나라와는 달리 주로 가을부터 봄까지 이루어집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여름에는 동쪽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 뜨겁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와 온 땅이 마르고 풀들이 죽어 누렇게 변합니다. 저는 8월 한 여름에 이스라엘을 갔었는데 정말 온 들판이 누렇게 말랐고 길거리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뜨겁고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바짝 말라붙은 엉겅퀴 가시가 샌들을 신고 반 바지 입은 종아리에 상처를 주고 금방 목이 마르는 매력이 없는 광야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10월이 되고 가을이 시작되면 서쪽 지중해로부터 바람이 불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여름 내내 메말랐던 대지가 촉촉히 적셔지고 죽은 듯 하던 생물들이 되살아나는데 이렇게 12월까지 내리는 비를 가리켜 성경은 ‘이른 비’라고 하였습니다. 이른 비가 내리면 메마른 땅이 생명을 얻고 언덕과 들판이 새 싹을 내어 색깔을 바꾸고 땅은 비를 빨아들여 농사짓기에 알맞게 부드러운 상태로 준비됩니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가을에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부릅니다. 이 비는 죽었던 온 땅의 생명을 회복시키는 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월과 4월에 또 한 차례의 비가 내리는 데 이것을 ‘늦은 비’라고 부릅니다. 늦은 비는 들의 식물들의 열매가 충실하게 자라도록 도와주는 비입니다. 이 비를 받아 먹는 온갖 식물들, 과일들은 추수를 앞두고 마음껏 영양분을 빨아들여 튼실한 열매가 됩니다. 영국 슈퍼마켓 과일코너에서 이스라엘산 감, 석류 등 과일을 흔히 보는데 그 맛이 아주 달고 좋습니다. 이스라엘의 호텔에서 식사 때마다 나오는 과일들 맛이 참 달고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른 비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비이며, 늦은 비는 열매를 맺게 하는 비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당한 시기에 그리고 알맞게 내리면 그 땅에 풍년이 듭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살던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알맞은 때에 내리는 비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생각하였고 필요한 것들을 적절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하게 주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신명기 11장에서 모세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 바로 이런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당부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들에게 은혜를 풍성히 베푸시지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면 그들의 삶에 가장 중요한 하늘의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심으로 징계하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면 가나안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그 땅의 신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될 것을 알고 이런 말씀을 분명하게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잊기 잘하는 그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너희 마음에 새기고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너희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여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그 말씀을 보면서 순종하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 살면서 모세가 우려했던 대로 얼마 가지 못하여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신 바알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가나안 사람들은 하늘의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은 바알이라고 생각하고 나무를 깎아 바알 신상을 만들어 집집마다 모셔두고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하늘이나 땅이나 바다에 있는 그 어떤 것의 모양을 따라 우상을 만들거나 거기 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 살면서 그 땅 사람들이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그 우상들에게 매력을 느끼고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처럼 기름진 땅에서 풍성한 식물을 먹고 사는 것은 그들을 보호하는 바알의 은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주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가나안의 신 바알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주의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주 버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면 자신들에게 더 많은 복이 있으리라 여겼을 것입니다. 모세가 그토록 우려하였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숭배가 이렇게 이스라엘 사회 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직전에 광야에서 경고하신 대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백성들에게 그때마다 하늘의 문을 닫아 고통 가운데 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북쪽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합 왕은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드리면서 그 땅의 신 바알을 함께 섬겼습니다. 사마리아에 바알의 사당을 세우고 제단을 쌓으며 그 이전 모든 왕들보다 더 하나님의 마음을 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불러 아합 왕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앞으로 수 년 동안 이 땅에 우로가 있지 아니할 것이다’ 결국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 땅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들은 물이 없어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아합을 만나게 하셨다. 아합을 만난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이제 비를 주실 것이니 그 전에 먼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들을 다 모아 갈멜산으로 나오라 하였습니다. 산 위에 바알 선지자들은 바알을 위하여 엘리야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각각 제단을 쌓고 거기에 송아지를 잡아 올린 후 과연 누구의 단에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불태우는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사람이 불을 피우지 않고 하늘로부터 온 불로 태우게 하는 신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임을 증명하도록 하자는 제안에 아합은 동의하고 드디어 갈멜산에서 참 신을 가리는 대결이 벌여졌습니다. 바알을 번개와 불의 신이라 믿었던 바알의 450명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춤추고 부르짖으며 자신들의 몸을 칼로 상처내면서 하늘의 불이 내리기를 구했지만 아무도 그들의 기도를 듣는 자는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들의 다음 순서로 하나님의 단을 쌓았습니다. 그 동안 무시하고 방치하였던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다시 쌓은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응답하소서. 이 백성으로 하여금 주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분임을 알게 하옵소서’ 하며 기도할 때 여호와의 불이 내려 그 제단을 태웠습니다. 이 광경을 본 백성들이 그제서야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고백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엘리야는 그 자리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모두 잡아 기손 시냇가로 데려가 사형을 시켜 우상 숭배를 뿌리 채 뽑아버리는 일을 시행하였습니다. 갈멜산 언덕에 올라가면 칼을 들고 바알 선지자들을 치는 엘리야의 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합 왕에게 ‘이제는 궁으로 돌아가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습니다’ 하고 알린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고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날로부터 하늘을 열어 그 땅에 비를 주셨습니다. 기도하던 엘리야가 사환에게 ‘(지중해)바다 쪽을 바라보라 비의 소식이 있느냐’ 물을 때 ‘아직 없습니다’ 하는 그에게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하니 일곱 번째에 흥분되어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납니다’ 하던 사환의 외침 장면이 참으로 인상 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3년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하늘의 문을 닫으셨다가 갈멜산에서 누가 참 하나님이신가를 확실하게 증명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엘리야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 (왕상 18:21) 하였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깁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역사 가운데 이런 실패를 수도 없이 거듭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탄식했던 글을 봅시다.
예레미야 5:23-24, ‘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패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자연현상으로 일어나는 당연한 것 또는 우연한 산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소외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닫으시니 하나님께로부터 오던 좋은 것을 스스로 막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바알 숭배는 사람들 사이에 여전합니다. 가나안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집집마다 모셔두고 섬기던 나무 우상은 아니지만 사람들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고 있는 우상들 앞에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립니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앞세우는 그 모든 것들을 우상이라 부릅니다. 하나님도 섬기지만 세상의 즐거움과 매력적인 것들도 버릴 수 없다는 두 마음의 소유자들은 둘 사이에 발을 담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를 오가며 머뭇머뭇하는 모습은 언제나 바르게 정리될까요?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적당한 때에 여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생존할 수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삶이 편해지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즉시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 또는 자기들의 노력의 대가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출애굽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하루도 견딜 수 없었고, 요단강을 건너며 가나안을 정복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안정되게 정착하는 날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죄악의 자리를 떠나 구원을 얻을 때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광야와 같은 삶에서 항상 머물러야 하는 은혜입니다. 은혜로 구원 얻었으니 이제부터는 우리 힘으로 스스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 비가 죽었던 땅을 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른 비 은혜는 우리를 죽었던 자리에서 일으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은혜, 곧 생명 주심이고 늦은 비의 은혜는 우리의 영혼이 날마다 자라가고 건강하게 살찌도록 열매를 맺도록 도우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단비로 표현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께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찾아오십니다. 그 말씀이 곧 우리에게 임하시는 은혜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며 삽시다. 옥스포드에 오기까지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지금은 내 능력과 노력으로 살아간다고 생각됩니까? 반대로, 여기까지는 내 힘이었고 이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지난 날에도 그리고 지금과 내일도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기억합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4:15-16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은혜의 단비처럼 임하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따라 적재적소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공급하시는 주께 거리낌이 없는 성도로 나아갑시다. 그분은 우리의 형편과 생각을 아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떠나 있던 마음과 생각을 돌이켜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복된 관계를 날마다 유지합시다.
요엘 선지자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백성에게 임하실 하나님의 성령과 그의 은혜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요엘2:21-27을 함께 읽음으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땅이여 두려워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들짐승들아 두려워 말찌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