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부
< 31 >
영수는 대학 도서관에서 취직시험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6월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대학구내에 빽빽이 들어찬 수목은 짙푸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우거지고 있었다.
그는 하던 일을 잠시 쉬면서 중얼거렸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구만.
세월이란 참 빠르단 말여.
그러나 저러나 벌써 6월이 저물어 가고 있는디 큰일이네.
공대 졸업반 얘들은 상당수가 벌써 취직이 확정됐다고 허는디,
내 전공은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졸업이 이제 반 년 남었는디, 어떻게 혀야 될지 모르겄네.
윤숙이가 대준 등록금도 어떻게든 갚어야 헐 거고.
제기럴!
결국은 결혼허게 될 틴디 갚긴 멀 갚아?
세상일이 다 그런 거지 뭐.“
영수는 요사이 부쩍 마음이 다급해졌다.
꿈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나 머릿속에 들어있는 실력이 빈약했다.
복학 후,
줄곧 돈벌며 학교 다니느라 사실 공부에 힘쓸 겨를이 없었다.
졸업 후 꽤 규모가 큰 섬유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직한
윤숙의 도움으로 등록금은 그럭저럭 해결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순전히 혼자 힘으로 다니는 대학 생활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하향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5급 행정직 공무원 수험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영수는 다시 책 속에 파묻혔다.
열심히 책을 뒤적이던 중, 어디선가 진한 화장품 냄새가 풍겨왔다.
바로 옆자리의 한 아가씨가 얼굴의 화장을 열심히 고치고 있었다.
갑자기 화장품 냄새를 맡아서인지 기분이 약간 이상해졌다.
한참 동안 공들여 화장을 마친 아가씨는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걸어왔다.
“실례지만 여기 제 책 좀 봐 주시겠어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영수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무심코
아가씨의 책들을 살펴보았다.
일본어로 된 생소한 책들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겨보던 중,
아가씨가 돌아왔다.
그는 약간 겸연쩍은 기색을 하며 몇 마디 물었다.
“아가씨, 전공이 일본어지요?
내가 알고 있는 일본말은,
사요나라, 구루마, 구리무, 조또가 전부인디.
아! 두 가지 더 있군요. 오끼나와, 호까이도···.”
아가씨는 갑자기 꿇어앉아 뱃살을 쥐고 웃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영수는 도서관에서 아가씨와 있었던 일을 깡그리 잊고 있었다.
어느 무더운 칠월 중순쯤이었다.
영수는 자취방에서 오전 10시쯤 나와 도서관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걷고 있었다.
등 뒤에서 ‘빵 빵’ 하고 들리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자꾸 들려왔지만,
별스런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빨간색 포드 승용차 한 대가 저속으로 따라오며 차창이 자동으로 열렸다.
“안녕하세요.
어서 타시지요.”
반갑게 인사하던 아가씨를 첫눈에 기억할 수 없었다.
영수는 잠깐 주저주저하다, 자신도 모르게 일단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계속 웃으며 재잘댔다.
“도서관에 가시는 길이지요?
이렇게 만나서 보니까 참 잘 생기셨네요.”
영수는 그녀를 자세히 훔쳐보았다.
도서관에서 언젠가 폭소를 터뜨리던 그 아가씨였다.
영수는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얘~ 도서관에 갑니다.
차가 포드네요.
나도 면허증을 따긴 따야 허는디, 그렇게 맘 같이 쉽진 않구먼요.”
차는 일부러 도서관 앞 까지 직행하여 영수를 내려주었다.
그녀가 끼고 있던 짙은 밤색 선글라스와 입고 있던 원피스 색깔도
예전과는 달라 금방 알아볼 수 없었다.
갑작스런 돌발사건에 정신이 멍해진 영수는
넋을 놓고 도서관 책상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 아가씨 엄청나게 돈 많은 부잣집 딸인가 벼.
우리 대학교 총장님보다 더 좋은 고급차를 몰고 대니다니·······.“
그는 천천히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머릿속이 뒤숭숭하여 책장을 넘길 의욕마저 잃어갔다.
그 순간, 영수는 자신의 속마음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걸 보고 소위 에덴동산의 유혹이라고 허는가 벼.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헷갈리는지 모르겄네“
그의 머릿속에 몇 초 동안의 윤숙과 그 아가씨 사이에
저울질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세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빙긋 웃으며 후회하기 시작했다.
“젠장! 윤숙이를 모욕허다니···········.
천벌 받을 일이지······.
이런 경우 인간이란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라니까.“
그에겐 윤숙이 이 세상에서 최고였음이 다시 증명된 셈이었다.
영수는 모든 잡념을 잊고 날이 어두울 때 까지 도서관을 떠나지 않았다.
오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요사이 그는 거의 침식을 잊어가며 자취방과 학교 도서관을
오가며 세월을 보냈다.
밖에 나오자,
날씨는 찌는 듯이 무더웠다.
영수는 중얼거리며 학교 체육관 앞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디 날씨가 왜 이렇게 푹푹 찌며 더웁댜?
5급 시험에 어떻게 혀서라도 붙어야 헌단 말여.
우선 면서기라도 허면서,
윤숙이 체면을 좀 세워줘야 헌당게.
갸 집에서 불알만 차고 있는 나 같은 백수헌티 딸을 주겄냔 말여?
지금은 내 자신의 분수를 알고 날뛸 때 랑게.
증말 윤숙이를 놓쳐서는 안 될 일이란 말여.“
그는 비장한 결의를 다시 보이며 새마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
성냥을 찾고 있었다.
강한 헤드라이트를 켜고 뒤따라오던 자동차 한 대가
그의 바로 옆에 살며시 멎었다.
아침에 만났던 그 아가씨가 반갑게 말하며 차에서
토끼처럼 뛰쳐나왔다.
“오늘은 두 차례나 만나게 되는군요.
영광입니다.
어서 타시지요.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영수는은 어떨 결에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묻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종숙이라고 해요.”
영수는 그녀의 손을 꽉 쥐며 씩씩한 말투로 말했다.
“정영수입니다. 월남까지 갔다 온 역전의 용사입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표준말을 써가며 자신의 초라함을 감추려 애썼다.
그녀와 악수를 나눈 후 손을 떼기도 전에
“아! 손이 아파요!”하는 비명 비슷한 소리가 나왔다.
종숙은 악수에서 해방된 오른손을 오므렸다 폈다하며 연방 미소 지었다.
자동차는 미끄러지듯 학교 정문을 빠져나갔다.
종숙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직 저녁식사 안 하셨죠? ”
저는 전주에서 4년째 살면서 그 유명하다는 전주비빔밥을
몇 번 못 먹어 봤다니깐요.
비빔밥을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
연인도 아닌 두 사람은--- 서로 서먹서먹하긴 했지만 --- 어느 한식집에 도착했다.
종숙은 비빔밥을 절반 정도 먹다 말고,
자신이 먹던 수저로 남은 밥을 푹푹 퍼서 인국의 밥 대접에 옮겨 담으며 말했다.
“저는 음식을 많이 먹지 않거든요.
반 대접이면 충분해요.”
영수는 그녀의 다정다감한 말투와 친절한 행동이
어쩐지 고맙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무심결에 새마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종숙은 그의 손에서 성냥갑을 슬며시 뺏듯이 가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영수의 수중엔 돈 한 푼 없었다.
비빔밥을 실컷 먹고 밀려오던 시장기는 면했으나,
계산대에 서있던 자신이 어쩐지 초라하고 부끄러운 심정이었다.
음식점을 출발한 그녀의 승용차는 어느 조그마한
가게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종숙은 시중에서 제일 비싼 ‘신탄진’ 담배 한 보루를
손에 들고 다시 운전석에 앉으며 말했다.
“이거 피워보세요.
사람들 말이, 담배는 고급으로 피우고 술은 싸구려로 마셔야 한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 방면에 문외한이라 잘 모릅니다.”
영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그녀가 주는 것만 받아들였다.
그는 종숙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참새처럼 작은 키와 몸집에 새카만 눈동자와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어린티를 갓 벗어난 제비처럼 깔끔한 옷차림과 활달한 성품이 마음에 들었다.
영수에겐 참으로 어이없게 보낸 저녁 시간이었다.
마치 도깨비에게 홀렸던 것처럼 정신이 몽롱하고
온 몸의 힘이 쭉 빠져왔다.
자취방에 돌아와 방바닥에 벌렁 누워 신탄진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길게 들이마신 후 내뿜자,
새마을 담배와는 생판 다른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참! 돈이 좋은 거군.
담배 맛이 이렇게 차이가 있을까?
이걸 늘상 피워대는 놈들은 상팔자를 타고난 거여.“
그는 하루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한번 더듬어 보았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희한하고 어처구니없는 하루였다.
갑자기 윤숙이에 대한 죄책감이 엄습해왔다.
그는 다시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혀서 내가 종숙이란 여자를 사랑허는 것은 아니란 말여.
나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끌려대닌 것 뿐이랑게.
인자 다시 만나면, 모질게 모른 척 혀야겄고만.
윤숙아~ 미안 허다. 잠깐 전깃불이 꺼졌던 거여.“
그러나 영수는 날이 갈수록 종숙에게 서서히
말려들기 시작했다.
이슬비도 종일 내리면 결국 대지를 흠뻑 적시듯,
영수는 그녀를 향한--- 확실하게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면,
종숙은 종종 그를 데리러 왔다.
그는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어떤 때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찾다가도,
막상 종숙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면 결심이 자신도 모르게 사그라졌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딱히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어느덧 7월이 다 지나고 있었다.
9월부터 졸업반 학생들의 등교횟수는 현저히 줄어든다.
한편,
종숙은 날이 가면 갈수록 인국을 향한 관심의 열정이 깊어만 갔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영수는 빼어난 용모의 소유자였다.
종숙이 아마 그의 훤한 인물이 탐이 나서 그러는지,
혹은 아직 그녀에게 확실히 파악되지도 않은 그의 내면적인
인간성에 반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7월의 마지막 하루를 앞두고,
종숙이 도서관으로 영수를 찾아왔다.
머리도 식힐 겸 하루 정도 변산반도에 다녀오자는 내용이었다.
영수는 자신도 모르게 즉석에서 승낙하고 말았다.
그의 결심이 혹시라도 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종숙은 그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총총걸음으로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정신을 가다듬고 신중하게 생각해보니 후회막심이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만일의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복잡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추측이 앞섰다.
그가 걱정하던 추측이란 바로 윤숙이에 대한 배반 행위였다.
그러나 종숙이 지금까지 자신에게 베풀어온 친절을 고려해보면,
이런 경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기로 작정하고, 다시 하던 공부를 계속했다.
그날 밤, 영수는 밤늦도록 자신을 질책하다 잠이 들었다.
꿈결에서 백운스님이 나타나 그를 와불사 감나무 아래
평상으로 데리고 갔다.
그가 어릴 때 뒹굴던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스님은 예전과 같이 자상하고 웃는 얼굴 표정이 아니었다.
평상에 앉자마자 그를 호되게 나무랐다.
“네놈의 속마음을 바르게 잡아야 헐 순간이 온 거여.
사람은 사상이 옳아야 허는 거여.
네놈이 지금 키우고 있는 진돗개가 늙고 병들었다 하여,
그냥 산속에 버리려고 허는 속셈을 내가 다 알고 있단 말여.
그 진돗개가 얼매나 영리허고 말귀를 잘 알아들었는지
네놈은 잘 알 거여.
잠도 안자고 절 동네 집을 잘 지켜주었고,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렸을 때는,
꿩이며 퇴끼도 많이 물어왔잖여?
네놈은 진돗개가 잡아 온 꿩 괴기와 퇴끼 괴기를 그렇게도 맛있게 먹드니만,
이제 와서는 말 못 허는 짐승 이라고 혀서 산 채로 버리려고 허다니······.
만일 그렇게 헌다면,
부처님을 욕되게 허는 일이란 말여.
그리고 죽음을 향하여 끌려가는 진돗개의 심정을
다시 한번 마음속 깊이 새겨봐야 헌단 말여.
중생은 자고로 일생동안 영원히 씻지 못헐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된단 말여.
그런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 지금 당장이랑게.
모든 것은 네놈 스스로 내리는 판단에 달려 있단 말여.
망설이지 말고 내말을 들어야 헐거고만··············.”
꿈에서 잠깐 깨어난 영수는 별스런 관심 없이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연이어 꿈이 줄을 이었다.
그는 자동차를 사서 마음대로 전국을 누비고 다니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평생을 두고 꼭 자신의 소망을 이루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자신이 직접 자동차를 몰고 아름다운 제주도를
한바퀴 돌고 다니게 되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부러워하며 바라보았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뽐냈다.
“이렇게 자동차가 귀한 세상에 당신들의 능력으론
어림도 없는 일 일거여?
돈 없는 한탄은 부처님도 모른 척 헌단 말여.“
그는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씨부렁대며 자기만족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좋았던 순간도 한 때였다.
자유스럽고 평화롭게 거닐던 한 마리의 조랑말이 순식간에
광포한 야생마로 변하여 달리던 그의 차에 뛰어들었다.
급히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오른쪽 절벽 아래에는 푸른 바닷물이 넘실대며
어서 내려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나,
종숙이가 사줬던 신탄진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어두운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내일 아침 종숙이를 만났을 때 빠져나갈
구실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와 함께 하는 하루는 악몽과 같을 거라고 단정했다.
난데없이,
윤숙이의 다정히 웃는 모습이 천장에 나타났다.
그녀는 그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사랑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자길 얼매나 사랑허고 있는지 알고는 있겠지?
자기는 날 영원히 사랑헐 자신 있지?
순간적인 어떤 생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해서는 안 되겠지?
우리 둘은 태양과 달이 우주를 떠날 때까지 서로 사랑해야 해.
그런 참다운 사랑은 아름다운 거야.
자기! 당신은 꿈이 너무 많아 탈이라니까.
지발 꿈과 현실을 혼동하지 말아 줘.
꿈이란 때로는 실현성이 없는 헛생각일 수도 있다니까.
이룰 수 없는 꿈은 빨리 잊는 게 상책이야.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은 이미 무르익었어.
사랑의 후퇴는 절대 허락할 수 없단 말야.
익은 과일은 떨어지기 전에 거두어야 허는 법이거든.
희망찬 수확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어.
언제까지나 기다릴께························.“
영수는 결국 예정된 내일의 약속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단호한 결단을 내리며 중얼댔다.
“윤숙이 말이 백번 옳았어.
이렇게 맘 편헌 걸 가지고 밤새껏 꿈만 꾸며 잠도 못 잤네.
그런 말도 안 되는 허황한 생각은 그만 두고 인자 잠 좀 자야겄고만.”
윤숙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리며 나타났다.
마치 갓 결혼한 신부처럼 밥도 짓고 빨래도 하며 부산한 모습이었다.
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려~ 종숙인가 뭔가 허는 여자는 흘러가는 한쪼각의 구름과 같을 뿐이여.”
아침 8시 30분이 다 되었을 때,
영수는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잠결에 들리는 듯 하여 눈을 떴다.
혹시 종숙이가 문밖에 서있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생각은 그의 예감일 뿐 확실하게 단정 지은
판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느낌은 적중했다.
영수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하늘색 원피스에
곱게 단장한 긴 머리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거기에다 모나리자와 흡사한 잔잔한 미소가
곁들여 있었다.
종숙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어젯밤 늦게까지 공부한 모양이지요?
어서 준비하고 나오세요.
저는 아직 방에 들어갈 자격이 없으니까,
여기 밖에서 기다리겠어요.”
영수는 너저분하고 퀴퀴하게 냄새나는 자신의 방안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뒤숭숭한 심정으로 서둘러 대강 방안을 치우고 부리나케 세수를 마친 후,
대기하던 그녀의 차안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허망한 일이었다.
어젯밤 고심 끝에 준비해 뒀던 핑계거리는
아무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 어떻게 하여 종숙의 차안에 타고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자동차는 변산반도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김제 읍내에 도착할 즈음까지 두 사람은 별 말이 없었다.
종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믿고 있는 종교가 있는지요?
그저 한 번 물어보는 겁니다.”
영수는 “없는디요”라고 대답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마침 영수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는 듯,
아름다운 눈동자를 굴리며 다시 말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고 있어요.
어머니는 부처님 말씀대로 사시는 분이죠.
사윗감을 고를 때 불교를 믿는지의 여부가 두 번째
중요하다고 하시더군요.
첫 번째는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고요.”
그녀는 한 때 입을 쉬지 않고 종알대고 있었다.
그러나 영수는 당장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내키지 않던 나들이였고,
자신의 머릿속에는 항상 윤숙의 모습이 떠올라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겨우 말을 꺼냈다.
“날씨가 잔뜩 찌뿌려서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모양인디,
놀러가기가 좀 그러네요.
비 오면 운전도 더 힘들티고.”
그러자 종숙은 환하게 웃으며 재치 있게 대답했다.
“빗속의 여행은 표현하기 힘든 어떤 운치가 있어 좋다니깐요.
그리고 연인들에겐 잊지 못할 영원한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겠죠?
행복과 낭만을 싣고 빗속을 달리는 사랑 열차를 상상해 보셔요.”
부안을 지나 변산 해수욕장 부근에 거의 도착할 무렵,
한 두 방울씩 내리던 비는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당장 다시 돌아갈 의향이 전혀 없는 눈치였다.
종숙은 비 때문에 채석강 구경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아마 그녀는 그곳 신비로운 풍경과 확 트인 바다를 벗 삼아,
영수와 함께 기억에 남을 만한 하루를 보낼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못내 아쉬워하던 표정을 고치고,
다시 명랑한 모습으로 말하고 웃으며 수선 떨기 시작했다.
포드 차는 그가 생전 처음 가보는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초조한 심정으로 자신의 마음속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장대비 속에서 나들이 데이트를
꼭 혀야만 허는 거여?
아무래도 내가 오늘 귀신헌티 홀린 것은 아닌지 모르겄네.
그렇다면 이 년이 혹시 내 신세를 망쳐 놀 어떤 죽은 처녀의
혼령인지도 모르겄구만.
그런디 요년이 무슨 이유로 날 빗속에서 끌고 다니지?
아침 산책길에 개 끌고 활보허듯 지 맘대로 천방지축 휘젓고 대니는구만.“
종숙은 차 안에서 많은 얘기를 하였다.
그녀는 서울 토박이였다.
전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이유는,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의 고향인 전주에 절을 세우고 난 후,
줄곧 그곳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사가 없어 고민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를 후처로 삼았다고 했다.
자신만을 달랑 하나 낳고 더 이상 후손이 없어,
모든 재산은 그녀의 어머니와 자신의 명의로 상속이 끝난 상태라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위암으로 고생하다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현재 서울에 있는 두 곳의 남자 사립 중 고등학교에
그녀의 어머니가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라고 했다.
또한 그녀의 어머니는 불교용품 판매 사업을 벌여오고 있으며,
지금 자신이 타고 다니는 포드 자동차 역시 그녀의 어머니
소유라고 했다.
어느덧 자동차는 ‘곰소’라는 곳에 도착했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소금밭 풍경이 보기에 무척 아름답고 이채로웠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어디 갈 곳도 마땅치 않아 약간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얼큰한 생선탕 맛은 일품이었다.
영수는 배가 너무 고파 허기진 상태였다.
“인자는 배가 찼으니 종숙이 허는 말을 귀담어 들어야겄구만.”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발걸음에 이끌려
인근 다방으로 들어갔다.
세차게 퍼붓던 비는 잠시 주춤 하기 시작했다.
종숙은 커피를 홀짝이며 다시 말을 걸어왔다.
“저는 말이지요. 여권 만들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지금 세상에,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들을 다녀왔지요.
특히 노르웨이의 피요르드 뱃길은 정말 장관이었어요.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니깐요.
모든 게 돌아가신 아버님 빽이었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영수는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하는 말마다,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내용이 부지기수였다.
그의 현재 처지로는 거의 상상조차 못할 꿈같은 얘기였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곰곰이 생각했다.
“저것이 지금 나를 분명히 좋아허고 있는 모양인디,
골치가 아퍼지는구만.
그건 그렇다치고,
어쩌서 입만 벌리면 내 자존심을 꺾는 헛소리만 허냔 말여?
어쩌겄다는 거여?
나를 공짜로 미국 구경이라도 시켜 주겠다는 거여?
제깐년이 부자면 그만이지 왜 이렇게 푼수처럼 설치냔 말여? “
영수의 심사는 점점 광포해지며 참을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
강하게 그의 뇌리를 스치는 음흉한 계략이 떠올랐다.
“응~ 맞았어!
바로 그거여!
저년에게 내 눈도장은 필요없당게.
과감허게 피도장을 찍는 거여.
저 년이 내 앞에서 발발 기게 맨들어야겠어.
즈 어매가 맡고 있다는 학교 이사장직을 내가 차지허는 거랑게.
쓰러져가는 토담집을 때려 부시고, 어매헌티 멋있는 양옥집도
한 채 지어주는 거여.
그리고 아버지의 소원인 논도 몇 필지 사주는 거랑게.
어매가 무척 좋아허실 거고만.
그까짓 면서기 혀봤자 어느 천 년에 기와집 짓겠어?
예수꾼들은 여자를 음흉허게 쳐다보기만 혀도
이미 간음헌거나 마찬가지라고 허는디, 이런 경우는 다르단 말여.
내가 데리고 살면 간음이 아닌 거여.
쇠뿔은 단 김에 빼라는 말과 같이 당장 해치워야겄어 !“
영수는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이성을 잃었기에,
인간 이하의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정다감한 태도를 보이며 능청을 떨기 시작했다.
“종숙 씨!
오늘 입고 온 하늘색 원피스가 증말로 잘 어울리네요.
하늘색은 내가 제일 좋아허는 색깔이고만요.
그리고 저 쌔카만 긴 머리가 아주 인상적이랑게요.”
갑작스런 그의 칭찬을 듣고 종숙은 얼굴이 빨개지며 너무 좋아했다.
영수의 심정은 더욱 다급해지며 머릿속에 못 된 행동만
생각하고 있었다.
“종숙 씨~ 이제 그만 나갑시다.
비도 오니까 천천히 운전하며 돌아갑시다.”
그는 갑자기 힘들여 표준말을 쓰려고 노력하였다.
다방에서 나오자,
비는 다시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종숙은 그의 비장한 각오를 눈치 채지 못한 듯, 마냥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들이 타고 있던 승용차는 빗속을 헤치며 다시
부안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종숙은 다시 무어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수의 귀에 그녀가 하고 있던 말은
모두 가당찮은 말로만 들렸다.
이번에는 바람까지 거세지며,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지금 이 때가 자신이 품었던 비장한 결심을
실행으로 옮길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을 내렸다.
“종숙 씨!
소변 좀 봐야 겄는디,
차를 저쪽 공터에 잠깐 주차시켜야 겄네요.
길바닥에 세워두면 앞도 잘 안 보이는디,
지내대니는 차허고 사고 날 염려도 있고···.”
그녀의 자동차는 영수의 말대로 도로변 후미진
공터로 진입했다.
영수는 우산을 받쳐 들고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잠시
소변보는 척 하다 돌아왔다.
이번에는 포드차 뒷좌석의 문을 열고 들어가며 태연하게 말했다.
“종숙 씨~ 비가 억수같이 앞도 안보이게 퍼붓고 있는디,
좀 뜸혀질 때까지 기다리며 얘기나 헙시다.”
그러자 종숙은 얼씨구나 좋아하며 일어나 앞문을 열고 나가는가 싶더니,
금세 뒷문을 열고 들어와 그의 옆에 바싹 다가와 앉았다.
영수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에 흥건히 젖어있던
빗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종숙의 얼굴이 서서히 벌겋게 닳아 오르는 모습이
영수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 때다 싶어 돌연히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강제로 키스를 퍼부어댔다.
그녀가 당황하여 꼼짝 못하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그의 왼손은 이미 그녀의 속 팬티를 벗겨 앞좌석 쪽으로 내던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뜻밖의 일이었다.
종숙은 있는 힘을 다하여 저항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숨이 막혀 헉헉대다가 나중에는 “켁 켁”하는 소리를 냈다.
종숙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엄마!
나죽네!
나 정말로 죽어!
참말로 죽는다니까!
난 인제 어떻게 해········.“
그러나 영수는 여전히 그녀를 껴안고 사정없이 눌러댔다.
그녀의 포드 차 역시 장대같이 퍼붓던 폭우에 무참하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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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소설
문 학
이런저런 꿈 이야기 ( 31회 )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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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13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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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포드차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