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澥逅)
차은량
12월의 운두령 고갯마루엔 거침없는 바람과 함께 성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지난 봄 빗길에 잠시 들러 당귀차를 마시던 주막은 굳게 닫혀 있고 치
마를 두른 듯 유백색 안개자락이 산허리를 두텁게 휘감고 있을 뿐, 무거
운 정적속에 멀리 검은 산봉우리만 점점이 찍혀 있다.
휘돌아친 고갯길이 끝나갈 즈음 왼쪽 언덕바지에 “감자꽃 필 무렵”이라
는 찻집의 허름한 입간판이 반가웠다. 지난 5월, 초록빛 안개비속으로 오
대산 상원사를 향하던 길에 커피를 마시러 우연히 들렸던 그 집에서 벽난
로의 정취에 흠씬 취하여 적지않은 시간을 지체했었다.
그 때 구렛나룻이 잘 어울리는 주인은 내가 청주에서 왔다고 하자 며칠
전에도 청주에서 여류작가 한 분이 다녀갔노라고 알려 주며 그 분의 이름
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미안해하는 듯한 긴 설명에서 금방 K선생님
임을 직감했었다.
얼마전 K선생님의 글에서 공후를 켜는 비천의 모습이 새겨진 동종을
보러 상원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곳을 들르셨다는 내용을 읽었다.
장작이 타오르는 벽난로의 정취는 5월 우중에도 좋았지만 12월 스산한
겨울속을 여행하는 나그네에겐 더 없는 정감을 주었다.
친절했던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커피를 마시고 다시 봉평으로 향하는
길엔 한창 도로공사가 벌어져 태산준령들이 벌건 속살을 드러내며 신음하
고 있었다. 그렇게 산이 잘려 나가고 길이 뚫린 덕에 나귀를 몰고 앞서
길 떠난 얼금뱅이 허생원을 따라 봉평 장거리를 승용차를 몰고 내리 달리
는 분에 넘치는 호사를 하면서도 잘 다듬어진 일직선의 도로가 도통 고맙
지가 않았다.
산허리를 휘돌아 물소리 자글자글한 계곡을 옆으로 끼고 비포장 자갈길
을 돌아돌아 가는 멋을 고속으로 달리는 차 속에서 어찌 느껴볼 것인가.
오후 3시경이 되어서야 잔설위로 게으른 햇살이 번졌다.
도로가 양편에 즐비한 입간판들이 여기가 봉평임을 서로 다투듯 말해
주고 있었다.
스키타운이 조성된 봉평엔 가든“허생원과 동이”, 모텔“메밀꽃 필 무렵”,
이와 유사한 이름의 카페와 스키대여점이 끝간 곳이 없다.
“메밀꽃 필 무렵”을 파는 서점이라도 한 곳 있으면 좋으련만.
이효석 생가로 꺾어지는 갈림길에서 방향을 돌렸다.
한국 문학의 대표적 단편으로 일컬어지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
산(可山) 이효석의 생가에서 감자떡에 막걸리를 팔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
었다.
갈림길에서 300여M 반대편 마을에 머언 사돈댁이 살고 있어 예정에도
없이 그 곳을 방문하였다. 마침 도토리묵과 두부를 만들었다며 푸짐하게
내오는 상차림에 체면을 차릴 겨를도 없이 수저를 들었다.
양념장에 찍어 입에 넣으면 혀에 척척 감기는 뜨끈한 두부와 이제 막
맛이 들기 시작한 김치와 동치미, 지하실에서 꺼내 온 돌배술로 이효석
생가에 대한 미련을 떨구었다.
사돈댁이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이곳 저곳을 가르키며 때묻지 않은
사투리로 봉평의 근황을 설명하여 목을 길게 빼고 둘러보니 그제사 왼손
에 채찍을 든 동이와 나귀를 앞세우고 대화장으로 향하던 허생원의 숨결
이 느껴져 왔다.
“저기, 저기 보이는 냇둑위로 커다란 봇짐을 맨 장꾼들이 줄을 이었더
랬어요.”하는 설명에 봉평장에서 대화장으로, 또 제천장으로 향하던 장꾼
들의 질펀한 육담과 딸랑딸랑 나귀 방울소리에 출렁거리던 달빛이 눈앞에
연상되었다.
시속 2KM의 저속으로 밀리는 영동고속도로에 들어서면서 저마다 부의
상징처럼 과시하듯 차머리에 이고 가는 스키장비들을 보며 내내 못마땅했
다. 우리의 문화는 어쩌자고 이리도 한 쪽으로 쏠리고 있는 것인가.
이효석의 봉평엔 소금을 뿌린듯한 메밀밭도, 숨이 막힐 듯 흐뭇한 달빛
도 없었다.
나무 한 그루, 야외테이블 하나 없는 “가든”이라는 이름의 식당들이 메
밀꽃만큼이나 지천인 봉평 장거리. 멋없는 궤짝처럼 급조된 조립식상가
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비애에 젖었다.
허생원이 다시 살아난다 한들 헤푼 웃음을 파는 작부처럼 되어버린 봉
평을 다시 찾을 것인가. 허생원의 고향이 청주일진데 청주에서 충주를
지나 제천을 거쳐 봉평장으로, 대화장에서 진부장으로 이어지던 그 아름
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을 터이다.
주차장이 되어버린 고속도로에서 가다가 서고 서다가 다시 가며 나는
성서방네 처녀가 되었다.
가난을 죄로 팔려가듯 가는 시집이 가기 싫어 달빛 쏟아지는 물방앗간
에서 울고 있을 때 개울로 목욕 나온 허생원이 달빛과 함께 어두운 물방
앗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1998.
첫댓글 나무 한 그루, 야외테이블 하나 없는 “가든”이라는 이름의 식당들이 메밀꽃만큼이나 지천인 봉평 장거리. 멋없는 궤짝처럼 급조된 조립식상가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비애에 젖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