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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2022년 아마존 올해의 책
출간 즉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20세기의 황혼기를 유쾌하고 영리하게 풀어낸
X세대 문화 연대기의 결정판
90년대에 대한 향수는 강력하다. 밀레니얼 세대는 빈티지 록 티셔츠와 통 넓은 바지를 입는다. ‘올드 스쿨 힙합’과 ‘얼터너티브 록’, ‘시티팝’ 스타일의 음악을 찾아 듣는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현상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오늘날 90년대에 대한 향수는 조금 특별하다. 여러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90년대를 주목하는 건 고유한 특성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척 클로스터만은 90년대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가로지르고 재구성하며 그 시대를 규정하는 핵심 정서를 드러낸다.
독자들은 익숙한 이야기들을 보며 향수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향수에 젖어 들기에는 너무 야심차게 쓰였지만 말이다. 이 책은 문화적 맥락을 치밀하게 밝히며 우리를 90년대로 안내한다. 우리에게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어떻게 한 시대가 그토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빠르게 사라졌고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지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정형화된 블록버스터가 양산되던 80년대의 흐름이 어떻게 끊겼는지, 스포츠에서는 미국 사회에서 야구의 지위가 왜 바뀔 수밖에 없었는지, 인터넷이라는 막강한 기술이 당시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기 시작했는지가 이 책에 모두 담겨 있다. 20세기 황혼기로의 여행을 하다 보면 90년대가 다른 시대와 확연히 구분된다고 느낄 것이다. 물론 빈티지 티셔츠와 통 넓은 바지를 찾아 입는 밀레니얼 세대에게도 훌륭한 가이드가 되겠다.
👨🏫 저자 소개
척 클로스터만
8권의 논픽션과 2권의 소설을 쓴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다.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GQ》, 《에스콰이어》, 《스핀》, 《가디언》, 《빌보드》, 《빌리버》, 《A.V. 클럽》, ESPN에 글을 기고했다.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서 3년간 근무했고 ESPN 산하의 블로그 <그랜트랜드>를 설립하기도 했다. 노스다코타주의 시골에서 자랐고, 지금은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거주 중이다.
2002년에는 음악 평론으로 미국 작곡가.작가.출판인 협회(ASCAP)에서 선정하는 딤스 테일러상(Deems Taylor Awards)을 받았다. 이번 책에서는 음악뿐 아니라 영화, 스포츠, TV, 정치, 인종과 계급, 섹슈얼리티에 관한 변화, 오프라 윈프리와 앨런 그린스펀의 음과 양 등 90년대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다.
“현재의 프리즘을 통해 과거를 바라보면 실제 경험이 왜곡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지금 보면 비현실적인 현상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 분석한다. 그 분석을 위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은 문화적 맥락이다. 이로써 “살아남는 것이 놀랍도록 쉬웠던 시절”로 기억되는 90년대가 실제로 어떤 시절이었는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빈티지 티셔츠를 찾아 입는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완벽한 가이드다. 단언컨대 X세대 문화연대기의 결정판이자, 20세기의 황혼기를 유쾌하고 영리하게 풀어낸 작품이며, 다음 세대들에게 영감을 줄 다차원적인 걸작이다.
📜 목차
들어가는 글
1장_쿨함이 세상의 전부였을 때
자의식 과잉의 기원
2장_모두가 회의주의에 빠졌다
모퉁이를 돌면 죽음
3장_19%의 지지율이 향한 곳
불만은 착실하게 쌓여가고
4장_중심에서 바라보는 가장자리
당신들도 한때는 이런 거 좋아했잖아
5장_영화적인, 너무나 영화적인
낭만이 있었던 대학 미식축구
6장_CTRL+ALT+DELETE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7장_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일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성공
8장_모든 가능성이 펼쳐지는 극장
너무 형편없어서 마음에 들어요
9장_평범해 보이는 것이 사랑받는다
〈스타워즈〉는 어떻게 팬을 배신했는가
10장_2차원적 4차원
감정과 무감정의 전쟁
11장_이해한다고요, 곧 잊어버리겠지만
지금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12장_90년대의 끝, 세기의 끝
참고 문헌
📖 책 속으로
이 시기의 정서는 자기도취(narcissism)보다 자기중심주의(solipsism)가 대세였다. 도덕성을 판단하거나 생활 방식을 트집 잡아 생면부지의 남을 비판하는 것은 주제넘고 무례하다고 인식되었다. 대신 스스로 불행하다 싶은 사람은 그저 어깨 한 번 으쓱하고 자신의 불행을 체념하듯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모호한 좌절감은 썩 나쁘지 않았다.
--- p.25 「1장_쿨함이 세상의 전부였을 때」중에서
록의 표현 방식에 반항, 계시, 나아가 혁신을 통해 변혁을 일으킬 힘이 있다는 가능성은 논외로 밀려났다. 이러한 특성은 여전히 특정 아티스트(그게 너바나가 됐든, 다른 뮤지션이 됐든)들에게서 엿볼 수 있었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작품 자체와 결부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훌륭한 노래라도 록 음악에는 더 이상 특별할 게 없었다. 소위 록스타가 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록스타로 행세하는 것은 더욱 나빴다. 이는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 p.81 「2장_모두가 회의주의에 빠졌다」중에서
92년 대선은 대체로 유권자들이 현재 상태와 다른 뭔가를 원했던 “변화의 선거”였다. 그들에게 그 변화의 방향이 중요했을까? 최악의 결과는 무엇이 될지 생각해 봤을까? 그동안 직무 수행 능력이 좋은 대통령도 있었고 안 좋은 대통령도 있었지만, 순수한 차이는 1991년 영화 〈슬래커〉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사람의 지문을 묘사한 대사에 비유할 수 있었다. “유사점에 비해 차이점은 미미하죠.”
--- p.117 「3장_19%의 지지율이 향한 곳」중에서
개념적으로 〈키즈〉와 〈남성 전용 회사〉는 90년대 중반 대부분 관객이 충분히 속뜻을 파악하고 감상하기에는 너무 앞서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기호, 즉 자극적인 대사는 어땠을까? 그것은 하등의 문제도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언어들을 즐겼다. 특히 공감을 사기 어려운 대사일수록 관객들은 쾌감을 얻었다. 충격을 받거나 충격을 받은 척하는 데서 재미를 찾기도 했고, 자신이 무던한 사람이라고 증명하듯 충격을 받지 않는 척하는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말에 담긴 개념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 한, 언어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 p.156 「4장_중심에서 바라보는 가장자리」중에서
영화를 선택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아무 목적 없이 비디오 가게를 돌아다니다가 몇 개의 비디오 박스를 꺼내 앞면을 슬쩍 훑고, 뒷면에 간략히 설명된 줄거리를 읽은 후,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고르는 것이었다. 어떤 체계나 논리도 없이 단순했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 제작에 미친 영향은 단순하지 않았다. 비디오 가게는 새로운 종류의 독립 영화 감독을 상당수 양산했는데, 모두 공통된 이미지가 있었다. 바로 금전적으로는 쪼들리고, 비디오 가게에서의 경험을 통해 해박하고, 비정통적이며, 허세 찌든 영화적 세계관을 구축한, 멋이라고는 없이 요란하기만 한 놈(그들은 언제나 남자였다)이라는 것이었다.
--- p.180 「5장_영화적인, 너무나 영화적인」중에서
90년대 중반 웹의 얼리 어답터들은 영토 확장에 미쳐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처럼 인터넷에 낙관적이었다. 냉소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시대였음을 고려한다면 인터넷에 대한 긍정적이고도 거의 복음주의에 가까운 믿음이 생겨났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이제 인터넷에서 재창조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 p.227 「6장_CTRL+ALT+DELETE」중에서
90년대 스테로이드 사건의 양면성은 대중이 뭔가를 명백히 그럴 리 없다고 인식해서 부정한 경우가 아니었다. 대중은 뭔가가 믿기 어려웠지만 입수 가능한 최선의 증거를 바탕으로 믿기로한 것이었다. 어처구니없긴 했지만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 심히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 p.285 「7장_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일들」중에서
사회가 “신뢰성”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거의 항상 당시 경제적 지배층에 속하는 인구 집단이 정한 기준에 따라 좌우된다. 90년대 초반에 뉴에이지 교리가 그나마 가장 진지하게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뉴에이지 사상에 가장 깊이 빠져 있던 사람들이 그 사상을 사회에 도입할 충분한 사회적, 경제적 힘을 행사한 유일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 p.312 「8장_모든 가능성이 펼쳐지는 극장」중에서
〈타이타닉〉의 엄청난 성공은 돌이켜 보건대 90년대를 설명하는 방식이 대부분 간헐적으로만 적용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타이타닉〉이라는 대작의 특성은 90년대에 광범위하게 퍼진 고정관념과 모순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고정 관념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언제든 무시될 수 있고, 개인의 야망에 따라 구애받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 p.363 「9장_평범해 보이는 것이 사랑받는다」중에서
콜럼바인 총기 난사 같은 끔찍한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이를 설명할 결정적 논거를 찾고 싶어 한다. 통상적으로는 진실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진실을 알고 보니 아무 의미가 없었고, 그래서 잘못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섬뜩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이 밝혀져도 믿기를 거부했다.
--- p.412 「10장_2차원적 4차원」중에서
클린턴은 사람들이 MTV 쇼를 보면서 비록 한편으로는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의심하긴 해도, 이 역시 엄연한 삶의 간접 경험 중 하나라고 믿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실제로 대통령이 이해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익숙한 언어와 매체를 통해 자기네 고통을 느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원했다. 현실에서 공감의 기대치는 높지 않았고, 클린턴은 공감의 표본이었다.
--- p.446 「11장_이해한다고요, 곧 잊어버리겠지만」중에서
경기를 생중계로 보지 않은 팬들로서는 통상 알고 있는 스포츠에 대한 상식과 어긋나는 이 일을 전해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회로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타이슨이 상상 가능한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라고 인식했지만, 상상의 범위에도 한계는 있었다. 거기에 상대의 귀를 물어뜯는 건 포함되지 않았다.
--- p.470 (12장_90년대의 끝, 20세기의 끝」중에서
🖋 출판사 서평
“이제는 까마득하지만 참 좋은 시절이었다”
90년대의 질감을 되살리다
호황은 정점을 찍었다. 냉전은 종식됐다. 집에서 비디오로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일상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이 싹텄고 TV와 영화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황금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전화 접속 모뎀으로 인터넷의 문이 열리고 아날로그 시대는 저물었다.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며 국제 정세는 혼란스러워졌다. 90년대는 빠르게 잊혔다.
빠르게 잊혔다는 사실은 그리 멀지 않은 90년대를 까마득한 과거로 느끼게 한다. 그때는 거실에 놓인 전화번호부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집 주소까지 찾을 수 있었다. 대통령은 섹스 스캔들을 일으키고 탄핵 소추되었다가 그 직후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3연패를 달성하고 야구로 전향했다가 이듬해 코트로 복귀해 다시 3연패를 달성했다. 힙합 아이콘 투팍과 노토리어스 B.I.G는 총에 맞아 사망했다.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은 경기 도중 에반더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었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다.
저자는 “현재의 프리즘을 통해 과거를 바라보면 실제 경험이 왜곡될 수 있다”라며 그 시대의 질감을 되살리는 데 집중한다. 90년대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의 맥락을 들여다보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당시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그때는 세상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것처럼 보여도 구제가 불능할 만큼은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지만 인간이 통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존의 규칙에 결함이 있다고 인식되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규칙을 따랐다. “이제는 까마득하지만 참 좋은 시절”인 이유다.
“모두가 무심해지려 애썼다”
역사상 가장 아이러니한 시대로의 여행
90년대는 유튜브 영상으로 접하는 사람들에게 “살아남는 것이 놀랍도록 쉬웠던 시절”로 기억된다. 미국의 90년대가 호황이었던 건 맞다. 당시 젊은이들이 그 결실을 누리지 못했던 것뿐이다. 대신 그들은 베이비 붐 세대의 이데올로기에는 혐오감을, 도처에서 침투하는 시장주의에는 두려움을 느꼈다. 무력감에 그들이 선택한 건 자기중심주의(solipsism)였다. 모호한 좌절감은 나쁘지 않았다. 인생에 야망 같은 건 없었다. 쿨함이 세상의 전부였다. X세대가 탄생했다.
이 세대의 회의주의적 정서는 어떤 사건이나 인물보다 90년대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인생이 별것 없다는 사고방식은 별것 이상의 화력을 몰고 왔다. 아이러니의 시대였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유명해지고 싶지 않음”으로써 유명해졌고, 문화 전반에서 현대적 감각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하위문화가 주류로 떠오르는 사례가 늘어났다. X세대의 교과서 격인 영화 〈청춘 스케치〉에서 에단 호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라는 어떤 명령도 따르지 않아.”
여느 시대처럼 기성세대는 ‘신인류’의 가치관이 못마땅했다. [타임]은 1990년 기사에서 “지금 20대는 노동, 결혼, 베이비 붐 세대의 가치관에 시큰둥하다. 요즘 젊은이들은 왜 이렇게 회의적일까?”라고 비판한다. 오늘날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묘사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비판의 당사자들이 그다지 괘념치 않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쿨함이 세상의 전부였다. 모두가 무심해지려 애썼다.
마음 편하고 신경 쓸 일이 적었던
덧없이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며
90년대의 젊은이들에게도 향수가 있었다. 직전인 80년대는 잘 짜인 각본같이 느껴졌다. 정형화된 록스타들이 탄생했고, 여름이면 으레 블록버스터가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공식이 있었고 상상력이 설 자리는 없었다. 문화가 우연히 탄생할 수 있다는 상상은 80년대 들어 사라져 버렸다. X세대는 70년대를 그리워했다.
영화 〈청춘 스케치〉의 주인공들은 70년대의 히트곡에 맞춰 춤을 추고 애정 행각을 벌인다. 제목을 제외하면 70년대와 전혀 상관없는 스매싱 펌킨스의 〈1979〉는 90년대를 대표하는 곡 중 하나다. 시트콤 〈70년대 쇼〉에는 온갖 유치하고 소소한 소재가 등장해 향수를 자극한다. 저자는 이렇게 70년대를 그리워했던 이유가 마음 편하고 신경 쓸 일이 적었던 과거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많은 것들이 생겨났지만 덧없이 지나갔던 시기였다.
이건 지금 우리가 90년대를 그리워하는 진짜 이유와 같아 보인다. 저자는 90년대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만 해도 세상은 끝없는 망망대해 같았고, 미국도 광활하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각자 하찮은 생각을 품고 자신의 하찮은 삶을 살아가는 일개 개인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