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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은 사대부가의 어엿한 양반 신분이지만
상대 남성의 신분은 따지지 않았고,
오직 건장하고 미남이기만 하면
양반이든 천민이든 가리지 않았다.
당시 여성은 남성의 선택으로 관계가 이루어지지만
어우동은 자신이 스스로 남성을 선택하여
관계를 이루었다.
어우동의 수많은 상대 남성들 중에는,
변복하고 궁궐을 빠져나와 기생집을 전전 했던 성종도
그 중 한 사람이었음이 야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성종과 어우동의 불꽃 튀는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이유는 어우동의 자유분방한 행각이
조정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당시의 미풍양속을 크게 어그러트린 어우동에 대해
극형을 처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여인의 남성들 중에 임금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날에는
임금은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성종은 어우동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급하게 왕명을 내렸고,
어우동은 자유부인으로서 아낌없는 삶을 살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성종은 자신의 부끄러운 사랑 행로가
시정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모처럼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 아까운
한 여인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⑤성종의 마지막 여인 소춘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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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편력에 끊임이 없었던 성종은
전국에서 미모가 빼어나고
가무의 자질이 뛰어난 기생들을
한양으로 뽑아 올렸는데
이렇게 뽑혀 올라 온 기생을
선상기(選上妓)라고 하였다.
이중에는 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한 여인인 소춘풍이 있었다.
풍자와 해학과 기지가 뛰어난
함경도 영흥 기생 소춘풍에 대한 소문이
널리 한량과 양반들 사이에 퍼졌는데
이 소문은 성종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고,
성종은 소춘풍을 선상기생으로 지목하여
한양으로 불러 올리게 하였다.
한양에 뽑혀와 거처를 마련한 소춘풍은
그때부터 임금이 주재하는 궁중연회에 참석하여
성종과 대신들을 상대하며 이름을 떨쳤는데,
연회 중 좌중을 사로잡는 소춘풍의 해학과 기지는
성종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모든 대신들도 그녀의 뛰어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한양에 온지 10여 일 후,
늦은 밤에 어떤 한량이 소춘풍을 찾아왔다.
그는 변복을 한 성종이었다.
그날 밤 성종과 소춘풍은 군주와 천기로서의 신분이 아니라,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의 신분으로 밤새는 줄 모르는
사랑을 불태웠다.
소춘풍이 후궁이 되어 입궐하면
큰 재물을 하사하겠다는 성종의 간곡한 요구에 대해
소춘풍은 후궁이 되어 속박된 생활을 하는 것을
완강히 거절하였고,
이후 성종과 소춘풍은 두 사람만의 정염을 불태우며
꿀맛 같은 4년여의 세월을 흘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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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음(荒淫)의 끝은 어딘가?
그러는 동안 성종은 30대 중반을 넘어섰고,
과도한 황음으로 몸이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어느 날
병석에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37세 되던 추운 겨울날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성종의 성(性) 도착적 여성 편력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단축하는 독주(毒酒)가 되고 말았다.
제9대 성종 가계도
덕종- 소혜왕후 한씨
제 9대 성종 | 차남 : 자을산군(1457-1494) | 재위기간 : 1469.1-1494.12(25년 1개월) | 부인 : 12명 / 자녀 : 16남 12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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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원군 | 회산군 | 와성군 | 익앙군 | 경명군 | 운천군 | 양원군 | 혜숙옹주 | 정순옹주 | 정숙옹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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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37세 요절했는데도 12명의 부인과 16남 12녀 28남매 를 두었다니 참으로 놀랍네요.
틈만 나면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