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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일제의 러일전쟁 도발과 식민지화 과정에서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자들은 국망을 전후하여 만주와 러시아지역에 망명, 그곳에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며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이미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을 선도하던 저명한 문인학자가 적잖게 포함되었다. 항일언론으로 성명을 떨치던 장지연을 비롯하여 박은식·신채호 등도 솔선하여 국내를 떠나 민족 옛땅故地인 만주와 러시아지역으로 망명하여 항일민족운동을 계속한 것이다.
장지연은 이미 망명 전에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보완 수정한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를 편찬 간행하여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간도와 만주지역이 고조선 이래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가면서 한민족의 활동영역이었음을 강조한 국학자이다. 또한 박은식은 국치에 즈음하여 “국체國體는 수망雖亡이나 국혼國魂이 불멸하면 부활이 가능하다”라는 ‘국혼론國魂論’을 제기하여 민족주의 역사정립을 조국독립운동의 선결과제로 내세우면서 서간도 민족고지에 망명하였다. 또한 신채호도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새로운 ‘조선사’의 정립을 시도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고 국치를 목전에 두고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망명하여 연해주와 남북만주의 민족고지를 답사하며 민족주의사학 정립에 심혈을 쏟았다.
헤이그사행 이후 미국을 거쳐 연해주로 망명한 이상설은 미주에서 『양의사합전兩義士合傳』을 지어 해도간海島間과 국내에까지 광포한 문인이다. 을미의병 이래 전국의병을 선도하던 유인석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간도와 연해주에 항일기지 건설에 앞장서며 십삼도의군의 중요 문건인 「의병규칙義兵規則」과 「관일약貫一約」을 저술, 최후의 구국항전을 선창하던 유학자이다. 정미의병 시기에 관북지방에서 연해주 의병과 연합전을 벌이던 유학자 김정규金鼎奎도 1909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새로운 항전기지를 개척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한 내용을 기록한 방대한 실기實記인 『야사野史』를 남겼다. 북만주 밀산密山에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솔선한 이승희李承熙와 신민회의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헌신한 이상룡李相龍 등도 영남학파의 저명한 유학자였다. 양명학자 이건승李建昇은 강화도에서 구국교육에 종사하다가 서간도에 망명한 뒤 희귀한 항일문집인 『해경당수초海耕堂收草』를 저술하였다. 국내에서 신민회를 중심으로 최후의 구국교육에 솔선하던 이동휘와 그의 지기이며 국학자인 계봉우桂奉瑀 등도 국치를 맞아 해도간에서 조국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두드러진 행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관련 중요 저술을 적지않게 남겼다. 함북 경원 출신의 망사望士 김노규金魯奎도 그의 문하생 최상민崔相敏·오재영吳在英 등과 함께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민족고지인 서북간도의 현지를 답사하며 한청간의 관련문헌을 모아 『북여요선北輿要選』을 편찬하였다.
이들 외에도 미주에서 『공립신보』와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아 항일언론을 폈던 이강과 정재관, 국내의 상동청년회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폈던 정순만 등도 잇달아 연해주지역에 망명하여 항일문자를 남겼다.
망명 문인학자들의 가장 소중한 저술은 조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을 제시하며 이를 역사적 사실로 실증하는 사서와 사론 및 관련 역사지지 등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박은식과 신채호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민족주의사학 정립에 집중되는 사서를 저술하고 여러 가지 사론을 썼다.
국치를 전후하여 광문회光文會에서 역대의 고전을 탐구하고 있던 박은식은 1911년 4월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의 회인현懷仁縣으로 첫 망명지를 택하였다. 그곳에서는 독실한 대종교 시교사로 후에 대종교 제3세 교주가 되는 윤세복尹世復이 회인성 내에 대종교 시교당을 마련하고 있어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곳은 고구려의 건국전설이 얽혀있던 국도였으며, 또한 인근이 발해의 서경西京인 압록부鴨綠府의 고지故地였다. 박은식은 여기서 대종교 신자가 되었고 註23), 민족발달사의 연원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그가 대종교를 믿은 까닭은 민족정신의 연원을 찾으려면 단군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한편 원근 각지에 흩어진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조사하고 고전과 사서를 연구하여 ‘6~7종’ 註24)의 사서를 저술하였다.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을 비롯하여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단조사고檀祖事攷』를 합치면 7종이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현존하는 저술은
『대동고대사론』·『몽배금태조』·『천개소문전』·『발해태조건국지』·『명림답부전』등 5건을 비롯해 최근 박은식의 저술, 혹은 김교헌金敎獻과의 공저로 확인할 수 있는 『단조사고』이고, 나머지 『동명성왕실기』는 아직도 실물을 찾지 못한 산질본이다.
다행히도 『동명성왕실기』는 박은식보다 한발 앞서 그곳에 망명한 양명학자 이건승의 『해경당수초』에 “백암은 동명사론東明史論을 저술하였고 동명왕의 사적이 대단히 자세하다”라고 주기된, 「제박백암동명왕실기사론題朴白庵東明王實記史論」이라는 시제의 다음과 같은 장시에 그 윤곽만은 전하고 있다. 註25)
一 큰 뱃속 가득히 오거서五車書를 넣어서는
백암의 사필史筆 부여扶餘를 징험했도다
주周가 쇠할 때 오히려 윤희尹喜 같은 이 있어
좇아 청우靑牛를 얻어 새로 저술을 남겼도다
二 압록강 서쪽 혼수渾水 북쪽은
동명왕께서 기업基業을 닦아 천황天荒을 연 곳
2천 년 후 텅 비어 쓸쓸하더니
후손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줄 어찌 알았으랴
三 사지史誌가 잔결殘缺되어 늘 빠진 것을 의심했더니
이곳 서간도에 와서야 호문사好文辭를 읽게 되었도다
붓 끝에서 쏴쏴 변풍邊風이 일어나
동명왕께서 무용 떨치던 때를 생각하게 된다
四 패수浿水가 혹시 압록강변 아닌가 의심하면서
어느 곳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노라
사론史論은 부사父師의 뜻을 바로 얻어서
인자仁者는 남의 땅을 빼앗아 갖지 않는 것이라고
五 취몽醉夢에 깊이 빠진 우리들 불러일으키는
우렁찬 목탁소리 계림鷄林을 진동시켜
붓 끝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목 안의 피라
누가 사옹斯翁 홀로 고심함을 알리요
이건승은 먼저 제1련에서 박은식의 사론史論을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을 얻어 『윤관자尹關子』를 지은 윤희의 것에 견주어 논찬하고 있다. 이 사실은 동국東國역사에 한습嫺習한 박은식이 회인성내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머물면서 자세한 ‘동명사東明史’를 저술한 것을 높이 칭예한 것이다. 제2련에서는 동명왕이 기업을 닦은 압록강 서쪽, 혼강 북쪽의 만주벌 옛땅에 2천 년 후에 그 후손이 다시 돌아와 경영하게 되었다는 것을 읊었고, 제3련에서는 특히 박은식의 탁월한 저술로 동명왕의 무용武勇을 상견想見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4련에서는 박은식의 견해 중에는 그동안 의심했던 중국에서 도래한 기자의 도읍지가 단군 후예들의 도읍지인 평양이 아니고 요동 근지近地로 올바른 비정을 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 제5련에서는 박은식이 ‘피를 쏟으며 저술한 고심苦心’으로 취몽에 깊이 빠진 민족의 혼을 각성시킬 것이라고 송찬訟贊한 것이다. 마치 고려 때 이규보李奎報가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어서 저상하던 민족정신을 일깨웠던 고사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박은식의 이와 같은 고대사 연구의 현실적 목적은 그가 ‘대동大東’이라고 표현한 간도를 비롯한 만주와 요동평야가 모두 ‘대동민족大東民族’이라고 개념한 한민족의 고대 활동지였음을 규명하는 데 있었다. 이와 아울러 그곳에서 민족문화를 처음으로 이룩하고 발전시켰던 사실을 실증하여 그곳을 민족운동의 새로운 기지로 건설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민족독립운동의 이념과 논리를 정립하려 했던 것이다. 註26)
박은식은 이후 신해혁명을 맞아 1912년 3월 서간도를 떠나 심양을 거쳐 4월 북경으로 가서 잠시 머무르며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 후 천진·상해·남경·홍콩 등지를 편력하고 다시 상해로 갔다. 그는 상해에서 『안중근전』을 간행 광포하는 한편 서간도 망명 때
부터 숙원이던 중요한 저술들을 저술 간행하였다. 『한국통사韓國痛史』를 비롯하여 『이충무순신전李忠武舜臣傳』·『성세소설 영웅루醒世小說 英雄淚』 등이 그것이다.
이미 서간도 애양靉陽에서부터 계획하였던, 註27) 『한국통사』에서 박은식은 개화와 보수, 침략과 저항, 분열과 통합, 민중과 지배층으로 혼돈되어 급기야 일제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민족수난사를 확고한 민족사관에 입각해서 기술하였다. 여기서 그가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은 한민족이 일시 이민족 일제의 강권지배 밑에 놓이게 되었으나, 주체성이 강하여 민족주의의 각성을 통해 반드시 강력한 항일운동과 그 결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국혼론’을 바탕으로 이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한편 『안중근전』은 1914년 ‘창해노방실槍海老紡室’이라는 필명으로 간행한 것이다. 박은식은 이러한 저술을 끝낼 무렵 『대동민족사大東民族史』를 집필하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註28)
그뒤 볼셰비키혁명을 맞이한 연해주지역 한민들의 초빙을 받고 박은식은 연해주로 갔다. 그리하여 그는 1918년 6월경 한족중앙총회에서 간행하던 『한족공보』의 주필이 되었다. 또한 그곳에서 『이준전李儁傳』을 저술하고 『금사金史』와 『발해사渤海史』를 한글로 역술하였다. 註29)
이듬해 10월 박은식은 상해로 다시 가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필에 취임하여 항일언론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다수의 사론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사료편찬회에
서 편찬한 일제 식민지통치를 규탄하는 역사물인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3·1운동을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하였다.
박은식의 ‘대동민족大東民族’의 역사인식 체계는 우리나라 역사의 큰 흐름을 한만韓滿에 걸친 2천년의 단군조선을 이어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신라와 백제 3국의 정립시대를 거쳐 발해와 통일신라 300년의 남북조시대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註30)
박은식은 특히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에 대해 주목하였다. 즉 한무제漢武帝가 대군을 거느리고 고조선을 침략하여 단군 이래 2천년 동안 면연히 계승하여 발전한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강역에 한漢의 4군郡을 설치함으로써 나라를 잃은 대동민족이 한漢에 의하여 혹독한 수난을 겪을 때, 졸본부여卒本夫餘에서 동래한 동명성왕이 망국민을 이끌고 고조선의 국혼을 환기시키면서 태백산太白山 줄기인 혼강渾江 유역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여 우리나라 4천년 역사 중에서도 가장 ‘자주독립의 상무기상尙武氣像’을 띤 고구려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註31) 그러나 그후 700년을 내려온 고구려도 내부에서 천남생泉男生 남건男健 등의 내란內亂을 겪는 틈을 타 증원을 지배하던 당唐이 침구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강권통치를 함으로써 대동민족의 역사는 다시 단절의 비운을 맞고 이민족 지배의 시련을 당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참담한 시기에 고구려의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은 민족혼이 충만한 고구려 유민의 염원을 안고 대당혈전對唐血戰을 벌여 고구려 구강을 회복한 끝에 5천리 대국의 ‘대진국大震國’이라고 첫 국호를 칭하던 발해를 건국하였다는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 이와 같은 발해의 건국사는
곧 백두산하 ‘단군 구강의 회복’이고 단군조선을 이어 ‘고구려의 부흥’을 이룩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는 이후 발해와 신라가 멸망한 후 그를 아울러 계승해야 할 고려가 한반도 내에서 10세기 초에 건국되었으나 겨우 삼국시대의 신라 영역인 후삼국 통일에 그쳤을 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영역과 그 유민을 통일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국가부흥과 민족회생의 정신을 담아주는 발해의 역사마저 방기하고 고려는 승국勝國의 역사를 편찬하지 않아 고려 이후 우리나라의 국력이 부진하게 되었다고 통탄하고 있다. 註32) 그러므로 박은식은 ‘잔결불유殘缺不有’한 자료이지만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현장에서 『동명성왕실기』와 『발해태조건국지』를 저술하여 앞으로 조국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청소년의 민족주의 교육자료로 이바지하려 한다고 하였다. 註33)
신채호는 1910년 4월 국망을 앞두고 신민회 동지와 전후하여 망명길에 올라, 그해 6월 청도회담을 거쳐 국치일 전후 러시아 연해주에 첫 망명지를 정하였다. 그는 현지 한인사회의 뜻을 모아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를 계승한 『대양보』의 주필을 맡았다. 이어 권업회 창설에 가담하여 언론부장으로 『권업신문』의 주필을 맡아 국외에서 민족언론을 주도하였다. 3년 남짓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신채호는 1913년 여름 신규식의 초청에 따라 북만주를 거쳐 중국 상해로 활동지를 옮겼다. 그 사이 연해주와 만주지역 유적지를 폭넓게 답사하였다. 그 후 그는 여순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4반세기 동안의 망명생
활을 상해와 북경을 중심으로, 때로는 고구려와 발해의 고지故地인 서간도지방을 왕래하면서 조국광복투쟁의 최전선에서 헌신하였다.
신채호는 3·1운동 이전에는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해 활동하면서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청소년 교육에 종사하였다. 이어 1914년에는 윤세복의 초청으로 고구려의 흥기지인 서간도 회인懷仁에 가서 대종교에 입교도 하고 『조선사』를 지어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1년 남짓 머문 그곳에서 원근의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등을 비롯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 실측하고 백두산에 올라 고대사의 영광을 성찰하기도 하였다.
그후 북경에 돌아온 신채호는 『중화신보中華新報』와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여 호구하면서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비롯한 관련 고문헌을 폭넓게 탐방하여 국사 연구에 전심하였다. 그는 또한 조국광복을 위한 망국민의 애국심을 분발시키기 위해 중편소설 『꿈하늘夢天』, 『용과 용의 대격전』 등을 비롯하여 망명 전 국내에서 발표한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의 뜻을 이어가는 애국 문예작품을 적지 않게 창작하였다.
이와 같은 격동과 혈투의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망명지에서 신채호의 민족주의사학의 소중한 저술과 웅혼한 역사문학의 작품들이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진 것이다. 더욱이 망명 직후부터 항상 뒤따른 신병과 궁핍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민족주의사상의 정립을 위한 남다른 각고 속에 이룩한 연구와 창작의 결정들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1924~5년에 『동아일보』에 연재된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를 비롯한 일련의 연구 논술인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와 1931~2년에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및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등은 그의 민족주의사학의 대표작으로 논찬되고 있다. 이들 저술의 원고는 거의 1910년대, 늦어도 1925년 이전에 집필된 것이다. 註34) 또한 문예작품 면에서도 1916년에 창작한 항일독립의식을 형상화한 『꿈하늘』을 이어 1928년에 이르면
민중혁명의 꿈과 이념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용과 용의 대격전』이란 우화적 사상소설을 창작, ‘문호文豪’ 위상을 보였다.
신채호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열악한 조건의 옥중에서도 역사 연구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다. 그리하여 『조선사연구초』 등 국내신문 연재물의 보완 수정을 기약하였고, 그 때까지 기술하지 못한 『대가야천국고大伽倻遷國考』와 『정인홍공략전鄭仁弘公略傳』 등의 복고腹藁도 간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신채호의 민족주의사학의 기저는 세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자주적인 근대정신을 찾으려는 의도에서 일제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식민지근대화론에 항쟁하는 독립운동의 실천이라 하겠다. 둘째는 한국의 역사와 전통문화가 갖고 있는 잠재적 문화능력과 자주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자신이겠고, 셋째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역사에 대한 강렬한 비판정신이라 하겠다. 얼핏보면 둘째와 셋째는 상호 모순되는 것 같지만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한 신뢰 없이 가하는 비판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한국의 전통을 말살하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구 노릇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비판정신의 확립 없이 전통의 고수만을 주장하는 태도는 창조성이 결여된 문화적 무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여러 민족주의 역사가 중에서도 이 세 가지를 확실히 갖춘 인물은 신채호일 것 같다. 그밖의 역사가들은 표면적으로는 널리 알려졌고 혹은 높이 평가되는 경우도 있으나, 정신적인 측면에서 신채호에 비하면 미치지 못함이 너무 크고 멀다. 예를 들면 최남선 같은 이는 독립운동을 계속하지 못하고 중도에 변절했던 까닭에 민족주의의 포기와 함께 그 속에서 싹트고 있던 자주적인 근대정신이 쓰러지고 조선조 후기
의 실학자들과 같이 백과전서파적인 박식博識으로 돌아가 정신적으로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신채호의 한국사학을 계승한 정인보鄭寅普 등의 경우도 중세문화에 대한 근대적 비판정신이 강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활동에서 창조성이 넓지 못하고 말았다. 그밖에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기틀을 세웠던 박은식조차 전통문화에 대한 근대적 비판정신이 신채호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까닭에서 신채호에 대한 평이 “단재의 일념은 첫째 조국의 씩씩한 재건이었고, 둘째 그것이 미처 못될진대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 두고 그 자유 독립을 꿰뚫는 날을 기다리게 하자 함이었다”라는 등으로 허다하게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신채호 자신은 역사물을 저술할 때에도 본문 일절에서 “서적을 수집, 땅속의 유물을 발굴, 참고 문인학자를 모아 십년, 백년 힘을 다하여 대규모의 진정한 조선사를 장만할지니 성誠과 학력學力을 갖추어 가진 사람에게 기다릴 바이니라”라고 하였다. 또한 그의 원고가 국내에 들어와 『조선일보』에 격찬리에 연재될 때 그 소식을 옥중에서 듣고 “내가 만일 10년의 고역苦役을 무사히 마치고 나가게 된다면 정정訂正하여 발표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면서 원고의 반송을 요청하는 학문적 엄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신채호의 사학은 오늘의 시점에서 누구나 그 사학사적인 평가를 높이는 경향이 짙으나 아직 구체적 업적은 비과학적이란 평을 다 벗지 못하고 역사학계에서 그 저술이 넓게 인용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학은 그의 소신대로 한국사의 자주성과 전통문화의 생명이 있는 한 불후할 것이다. “역사를 배우게 하되 어릴 때부터 배우게 할 것이며, 남자 뿐만 아니라 여자도 배우게 하며, 지배계급 뿐만 아니라 피지배계급도 배우게 할 것이다”라고 한 신채호의 한국사에 대한 무한한 긍정은 민족주의사학의 염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신채호는 사실 고증을 역사학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여기고 그 방법을 여러 가지로 찾았다. 정인보에 의하면 신채호는 “유리방랑의 반생半生을 대개 고조선 발상의 유허遺墟와 전벌戰伐의 고지故地와 천종왕래遷從往來의 황성荒城에서 보내니 만큼 이르는 곳마다 도적圖籍을 가지고 혹 산천을 묻기도 하고 혹 습속習俗을 살피어 고사古史와 비교도 하고 혹 금석金石의 단훼斷毁한 잔편殘片과 초지礎址의 멸몰滅沒한 여흔餘痕을 찾아다니면서 궁수窮搜 또 광채廣採하여 이에 조고비금弔古悲今의 감격을 회복함을 고사姑捨하고 전인前人 미발未發의 사료를 얻은 것이 점점 쌓일뿐더러 이와 홀로서 고견孤見을 품고도 그 연부然否를 거정遽定치 못하던 것이 목도신경目覩身經하는 가운데 드디어 확립함을 보고는 스스로 환희를 느끼기도 하였을 것이다” 註35)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채호는 고증방법으로 유증類證·호증互證·추증追證·반증反證·변증辨證 등의 여러 유형을 들고 있다. 게다가 그 방법은 사실의 입증에 활용할 뿐만 아니라 언어학적 방법과 지명이동설 등에도 적용하고 있다. 또한 역사 서술에서 종합성과 객관성 사실성 등이 체계화되어야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계통系統과 회통會統을 구해야 했고 더욱이 편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심습心習에 빠지지 말고 역사 본연과 본색을 찾아 사실 그대로의 서술을 강조하고 있다. 註36)
신채호는 이와 같은 방법론이 이념을 앞세운 민족주의사학이 빠지기 쉬운 교조적인 역사서술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근대사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신채호의 이와 같은 방법론은 한국사 연구에서 근대 민족주의와 접맥시키면서도 근대과학으로 전진시키는 힘이 되었다. 거기에는 유교적 전통론이나 대의명분론, 의리론
등과 분리시키는 한편 근대사학으로서의 ‘민족주의사학’을 정립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우北愚 계봉우1876~1957는 북간도와 러시아 여러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 항일독립운동가이며 국학자이다. 그는 국어학·국문학 분야 연구에 매진하여 『국어문법』을 비롯해 『통속문학집通俗文學集』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사도 깊이 연구하여 『조선역사朝鮮歷史』와 『동학당폭동東學黨暴動』을 비롯하여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도 20여 종에 달하는 여러 저술을 남겼다. 註37) 그 중 1910년대와 1920년대 초까지 북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저술한 것만 들더라도 다음과 같이 10종에 달한다.
1. 『신한독립사新韓獨立史』, 등사판, 1912, 길동기독학당吉東基督學堂 교재 註38)
2. 『조선역사朝鮮歷史』, 등사판, 1912, 중등학교 교과서 註39)
3. 『최신동국사最新東國史』, 하얼빈 보문사, 등사판, 1917, 영신永新·덕흥德興 학교 교과서 註40)
4. 『오수불망吾讎不忘』, 등사판, 1912, 소학교 수신 교과서 註41)
5. 『안중근전安重根傳』, 미완원고본, 1916, 북간도 하마탕 註42)
6. 「북간도北墾島 그 과거過去와 현재現在」, 1920년 註43)
7. 「아령실기俄領實記」, 1920년 註44)
8. 「金알렉산드리아小傳」, 1920년 註45)
9. 「의병전義兵傳」, 1920년 註46)
10. 「新撰주신史」, 등사판, 초등학교용, 1920년대 註47)
망명 직후 계봉우의 역사 저술은 북간도 길동기독학당吉東基督學堂의 역사교재로 편찬된 『신한독립사』에서 비롯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1912년 북간도에서 민족주의교육에 전념하면서 중등학교 교과서로 『조선역사』와 초등학교 수신 교과서로 역사적 내용을 주로 담은 『오수불망』 등을 편찬하였고, 이들 교재는 등사판으로 간행되어 각급 민족주의 교육기관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식민지사관에 의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등의 한국사 변작變作을 폭로하고 일제의 동화정책에 맞서 청소년들에게 조국사상을 고무시키는 데 당면 목적이 있었다. 이들 교과서는 1917년 하얼빈 보문사普文社에서 간행한 『최신국사』로 개찬되어 북간도 전역에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신국사』의 실물이 전래되지 않아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후 계봉우는 연해주에 소비에트정권이 확립된 후 이만에서 초등학교용 『신찬주신사』를 편찬, 역시 등사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교과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그 한 가지는 교과서의 제목에서 ‘주신’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고대 이래로 조선을 “우왈숙신虞曰肅愼 하왈주신夏曰州愼 주왈조선周曰朝鮮 금왈주리신金曰珠里申 청왈주신淸曰州申”으로 칭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곧 ‘주신’은 조선보다 오랜 ‘조선’의 원어源語이며, 또한 금·청대까지 불리던 호칭이었다는 논지이다. 이런 연고로 조선사를 ‘주신사’라 하였던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그가 공산주의 수용 이후에 역사의 흐름을 경제의 변천에서 추구하는 유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기술하였다고 스스로 강조한 점이다. 계봉우는 이미 이동휘를 따라 1920년에 들어서면서 공산주의를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인물이므로, 유물사관에 입각한 그의 조선사 재구성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다. 그 자신도 『신찬주신사』가 유물사관에 입각해 편찬된 최초의 저작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흐름의 사실면에서 보면 민
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과 큰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註48)
계봉우는 『신찬주신사』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사 연구를 계속하여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던 봄에 시작하여 3년의 적공積功을 들인 끝에 현재 원고본으로 전하여 오는 『조선역사』총 3권를 저술, 전 시대사를 체계화하였다. 유사 이전부터 시작하여 ‘한일합병’까지 총 6편으로 구성된 이 저술은 종래의 ‘조선사’ 개설과는 판이한 사서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조선역사』의 서언敍言에서 그는
3년의 적년積年으로 조선역사朝鮮歷史 제1, 제2의 양권을 완성하였다. 그 내용 대개를 들어 말하면 역사 있기 전으로부터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두 권에 나누어 기입하였다.
라고 밝히고 있다.
한편 계봉우는 앞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연해주에서 다시 북간도 하마탕에 은거하던 무렵 『안중근전』을 마저 편찬 간행하려 하였다. 『안중근전』편찬은 이미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신문』 기자로 활동할 때부터 추진하던 중요과제였다. 그는 그해 8월 10일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安定根으로부터 안의사 전기에 관련된 자료를 교부받기도 하였고, 그보다도 ‘단선檀仙’이란 필명으로 『권업신문』에 「만고의사 안중근전」이란 제목으로 그 일부를 10회에 걸쳐 연재한 일도 있다.
『의병전義兵傳』은 일제에 의한 민족수난을 극복하기 위해 반세기에 걸쳐 항일민족운동을 선도한 한말 의병의 희귀한 활동실기이다. 특히 『의병전』은 후기에 내려올수록 국내뿐 아니라 북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에서 활동한 의병까지도 포함시켰고, 중요한 의병장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전후 20년간에 걸친 활동을 한국측 입장에서 이만큼 체계적으로 개관하면서 그 의의를 논술한 저작은 찾기 어렵다.
계봉우가 1920년 초까지 발표한 『신찬주신사』 이전의 한국사 관련 저작물은 다같이 연해주에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중심으로 펼쳐진 초기 공산주의활동을 목도한 뒤 발표된 저술이지만, 계봉우 자신은 아직 공산주의를 수용하거나 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입장에서 기술된 역사물이다. 특히 그는 연공이 쌓일수록 역사 연구의 목적이 뚜렷해져 분명한 민족사관을 세워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논술은 근대 사학사에서 박은식과 신채호의 일련의 역사물을 이어 민족주의사학의 범주 속에 들어갈 대표적 저술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만년까지 적공을 들여 완성한 『조선역사』는 계봉우로서는 망명지에서 성취한 한국사 체계화의 ‘결정’이라 하겠다. 한편 이와 같은 저술을 포함하여 고려어라고 부르던 국어와 국문학, 그리고 조국역사에 대한 계봉우의 전후 50여 년간에 걸친 각고 속에 더러는 삭막한 망명지에서 나온 여러 연구 저술은 제국주의에 의한 한민족 수난기에 기구한 역사를 전개시킨 러시아지역 한인사회를 상징하는 ‘국학’이라 할 수 있다.
함북 경성鏡城 출신의 유학자 용연龍淵 김정규金鼎奎, 1881~1953는 한국 역사 전체를 개관한 『대한사大韓史』를 초하고 사론史論을 달았다. 그는 국망 직전인 1910년 3월부터 그 다음해 말까지 1년여를 두고 찬술, 그의 방대한 일기인 『야사野史』에 수록하였다. 註49) 그는 우리나라의 사서史書가 상
고사로부터 전래된 것이 적을 뿐 아니라 그보다도,
우리 한인은 남의 나라의 역사를 말하기를 좋아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 본국의 사승史乘은 버려두고 탐구하지 않으니 존군애국尊君愛國의 뜻에 어긋난다. 근래에 이르러 사회에서 더러 역사를 찬술한 것이 있으나 각기 그 내용이 단장斷章되고 취지取旨와 문의文義가 서로 떨어져 맞지 않으니 가히 한탄하고 또 한탄할 일이다. 註50)
라고 하여 제대로 된 한국사 저술이 없음을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좁은 식견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자기대로의 견문을 수집하여 『대한사』를 찬술, 뒷날의 참정參訂을 기다린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김정규의 역사 기술은 최초의 국명인 ‘조선’의 칭호 문제부터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조선의 ‘조선’이란 연원과 뜻을 우리의 『동사고기東史古記』와 중국 고서古書인 『관자管子』·『전국책戰國策』·『사기史記』 등을 인증·해석하였다. 그는 단군檀君을
우리나라의 수출지군首出之君은 단군이고 단군의 사적은 중국 『위서魏書』에 처음 보인다. 거기에서 말하기를 지금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중국의 요堯와 같은 때라 말하였다. 『위서』는 곧 중국 삼국시대에 기술한 것이다. 비록 본국사는 아니나 그 시대가 가장 오래인 것이고, 반드시 증거를 갖고 이를 썼을 것이다. 『동사고기東史古記』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상부相符하는 것이니 크게 의심할 것 없다. 註51)
라고 하여 최초의 임금으로 실존시實存視 하였다. 또한 단군과 단군조선에 관한 것은 비교적 상세히 논급하였다. 즉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고기古記』, 홍만영洪萬榮의 『동사총목東史總目』 정약용丁若鏞의 『역易』 등의 기록을 인용 논증하고, 그 무렵 새로 나온 장지연張志淵과 현채玄采의 신론新論까지 거론하며,
대개 단군은 우리나라의 수출지군首出之君이니 반드시 성덕聖德이 있으므로 국인國人이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註52)
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단군기록 중 웅녀熊女 탄생설은 황탄荒誕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또한 단군이 일본 고신대古神代 소전명존素戔鳴尊의 아들인 오십맹五十猛이라는 일본인의 주장에 대해서는 “실로 허탄虛誕한 것이므로 더욱 변박할 것도 없다” 註53)고 일축하였다. 그리고 그는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塹城檀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의 단군유적까지 논급하였다. 註54) 김정규의 고조선 기술은 이와 같은 단군조선에 이어 기자箕子와 위만衛滿도 논술하였고 한사군漢四郡의 침략까지 첨가하였다. 註55)
단군조선 다음에는 한강 이남의 마한·진한·변한의 삼한 변천과 그 안에 각 소국의 흥기 성쇄를 『삼국고三國考』와 『국조잡지國朝雜誌』 등을 고증하여 기술하였다. 註56) 또한 조선고지朝鮮故地에 부여·예맥·옥저 등을 『후한서』 등의 문헌을 찾아 논증하고 여진과 말갈, 그리고 발해의 역사까지 되도록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시켜 기술하였다. 註57) 특히 부여는
단군의 후손이 북으로 옮겨가 건국하고 옥토가 2천 리에 미쳐 그 경계가 동쪽은 읍루, 남쪽은 고구려, 서쪽은 선비鮮卑에 연접한다고 고증하였다. 註58)
삼국시대에 내려와서는 신라의 전신인 서야벌西耶伐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신라·고구려·백제의 순으로 그 흥기 발전을 논술하고, 통일신라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다음 고려시대의 역사는 기술의 누락이 있었는지 분량이 적은 편이고, 조선시대의 역사로 내려왔다. 조선시대의 역사는 특히 여말선초 이성계의 건국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였다. 註59) 이와 같이 『대한사』는 유학자 출신의 의병장의 저술이지만 개화·계몽사상을 수용한 근대사조에 따른 저술로 간주될 사서로 지목될 수 있다.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국외 항일독립운동은 1911년 1월 5일 결행한 서간도 망명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국치 이후 폐문사객閉門辭客하고 만한지도滿韓地圖를 종람縱覽하면서 민족의 광복대도光復大道와 방략을 구상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10년 11월 서울에서 온 신민회의 사자使者 주진수朱鎭壽와 황도영黃道英을 만나 그가 생각하는 광복방안과 신민회의 사업이 동일함을 알고 그에 찬동하여 만주 망명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신민회는 국권상실을 눈앞에 두고 원대한 계획하에 광복운동의 국외기지를 한민족이 고대 이래 부여·고구려·발해를 연면하면서 활동하던 고지故地인 서간도에 설치하려는 사업을 전국 13도의 유지와 연락하여 추진하고 이상룡에게 참여해 주기를 청했던 것이다.
이상룡은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인아친척姻婭親戚과 그와 친숙한 영남의 유지를 모아 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주진수朱鎭壽·김창환金昌煥 등과 같이 솔선해서 서간도西間島로 이주하여 이와 같은 운동을 선두에서 영도하였다.
이상룡은 서간도 회인현懷仁縣 영춘원永春源에 첫 정착지를 정하고 이후 통화通化·유하柳河·해룡海龍·반석盤石·서란舒蘭 등 서간도 전역을 전거轉居하면서 오로지 한족의 자치와 광복운동에 신명을 받쳤다. 그는 서간도 이주 직후인 1911년 4월에 이시영·이동녕·이회영과 같이 민족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유하현 삼원포三源浦에 경학사耕學社를 설치하고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후 경학사는 1914년 부민단扶民團으로 발전되었고 나아가 1919년 3·1운동 전후에는 한족회韓族會로 그의 주도하에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상룡은 때로 재정이 궁핍하여 경학사나 부민단을 운영하지 못하더라도 독립군 간부 양성소인 신흥학교新興學校와 길남사吉南社라는 청년연무단체靑年鍊武團體의 경영은 일시도 쉬지 않고 정성을 들였던 것이다. 註60)
이상룡의 학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국치 전후부터 고대 민족발달사에 관해 집중적으로 연구를 진행했던 것이다. 그는 부여·고구려·발해사 등을 강조하였고, 기자의 한반도 동래설 등을 부인하는 입장이었다. 한국사 이해에 대한 그의 입장은 박은식·신채호 등의 민족주의 사가의 방향과 일치하였으며, 그것은 한민족의 주체적 역사를 찾아 광복운동의 정신적 바탕을 세우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와 같은 구체적인 표현으로 그들이 광복운동의 기지로 생각하여 활동한 서북간도가 모두 상고 이래 적어도 고구려·발해까지는 우리 민족의 활동지요 한문화韓文化의 요람지였음을 강조하여 독립운동의 신흥기지로서의 의식을
굳히려 한 것이라 믿어진다. 그가 저술한 『서도록西徒錄』에 의하면 서간도의 첫 정착지인 영춘원永春源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항도천恒道川의 임시숙사에 있으면서도 매일같이 틈만 있으면 한서·신구당서·진서晋書·만주원류滿洲源流·만주지지滿洲地誌·요사遼史 등을 탐독하여 부여·고구려·발해 등은 물론 숙신사肅愼史나 백제·신라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재인식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기 속에 부여의 사방 강역을 고증하고 또한 숙신肅愼의 역사는 만주사의 시초이나 부여의 신속관계臣屬關係라고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인정하던 종래 사가史家의 오해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크게 왜곡시켰다고 하여 기자의 한반도 동래설을 강하게 부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고대 한민족발달사의 지리적인 중심을 그가 광복운동을 전개하는 서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에 두고 재구성하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또한 부여와 고구려의 정통은 발해로 이어지고 신라와 백제의 정통은 삼한三韓에서 이어진다는 견해를 제시하여 종래 우리 나라 고대사古代史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註61) 그의 이 같은 학문적인 한국사 인식을 체계적으로 저술한 흔적은 없으나 그가 쓴 『대동역사大東歷史』를 신흥학교 국사교과서로 사용했다 한다.
영남 출신의 유학자 이승희李承熙는 헤이그특사로 사행하였던 이상설과 제휴하여 1909년 가을부터 북만주와 러시아령 접경지대에 자리잡은 흥개호興凱湖 주변에 북만주 최초의 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고 한인의 민족주의 교육기관을 세워 ‘한민학교韓民學校’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한민학교의 교제로 썼다.
이승희는 을미사변 이래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상소와 배일운동을 벌여온 인물이다. 註62) 특히 1907년 ‘헤이그사건’을 계기로 해서는 성주에서 민중대회를 열어 강력한 배일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일경에 붙잡혀 곤욕을 당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종초의 영남유학자로 명성을 떨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아들로, 곽종석郭鍾錫과 더불어 그 학문적 체통을 이은 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70권에 달하는 방대한 문집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註63) 이러한 이승희는 1908년 5월에 국운이 기울어가던 상황에서 ‘왜의 노예로는 살 수 없다’고 결심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왔던 것이다.
이 무렵 이상설은 이승희를 찾아가 자신의 독립운동 경륜을 말하고, 북만주 밀산부의 기지 마련에 앞장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승희는 한인 이주단과 함께 봉밀산 밑의 기름진 터전을 골라 우선 45방方의 토지를 사들이고 중요한 독립운동기지로서 한흥동을 건설하는 데 힘썼던 것이다. 註64) 100여 가구의 한인을 이주시키면서 이승희가 그곳을 한흥동이라 명명한 것은 ‘한국을 부흥하는 마을’이란 뜻에서였다. 또한 학교를 세워 한민학교라고 하였다. 이승희는 이때부터 조국광복을 꾀한다는 뜻에서 강재剛齋라는 호를 한계韓溪로 고치고 이름까지도 대하大夏라고 개명하였다. 그후 이승희는 한흥동에 4년 동안 머물면서 그곳을 한인의 터전으로 만드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여기서 『동국사략』을 지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쳤고, ‘민약民約’을 제정하여 한인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장지연의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註65)와 김노규金魯奎, ?~1905의 『북여요선北輿要選』 註66)의 편찬 간행은 민족주의 사서류의 저술과 함께 국외 독립운동의 중요한 무대로 부상한 서북간도와 연해주지역 한인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 제고에 이바지한 중요 문헌이 되었다.
위암 장지연은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 역사지리서로 평가되는 『대한강역고』를 1903년 편찬 간행하였다. 실학자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원고原考로 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의 북방강역의 역사지리를 보편補編 수정한 것이다. 이 저작은 김노규가 지은 『북여요선』의 내용과도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이었다.
『북여요선』은 간도 감계문제와 관련하여 북방영토 문제에 관계되는 대표적 전거典據 문헌으로 간주되었다. 이 책은 함북 경원 출신의 유생인 학음鶴陰 김노규가 그의 문하생들인 최상민崔相敏·오재영吳在英 등과 함께 편찬한, 간도의 경계문제와 연관된 종합적 문헌이다.
1902년 간도시찰사間島視察使로 임명된 이범윤은 간도 이주 한인의 보호와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그 역사적 정당성을 실증하는 전거가 필요하였고, 이러한 문헌정리 작업을 김노규에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마침 김노규가 두만강 변경지대에 거주하며 국경문제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게다가 현지답사도 병행하면서 이에 관한 자료를 수집 탐구하고 있던 터였다. 註67)
1903년 초에 상·하 2권으로 편집이 완성된 『북여요선』은 1904년 서울에서 1책으로 100부를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여기에는 내부대신 이건하李乾夏와 공부대신 김가진金嘉鎭 등의 서문과 간도시찰사 이범윤의 휘하에서 활동한 ‘간도수약위원墾島修約委員 이병순李秉純의 발문이 붙어 있다. 이때 초간된 『북여요선』은 그뒤 20여 년이 지난 1925년에 증보 현토본懸吐本으로 개간改刊되기도 하였다. 『북여요선』은 그뒤 1927년 박용만朴容萬의 주도하에 『대한북여요선大韓北輿要選』이라는 제명으로 박은식이 지은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그리고 박용만이 기술한 『제창조선문화일이어提倡朝鮮文化一二語』와 합편되어 중국 북경의 대조선독립단 지부에서 중간重刊되었다. 註68)
『북여요선』 상권은 「백두고적고白頭古蹟攷」·「백두구강고白頭舊疆攷」·「백두도본고白頭圖本攷」·「백두비기고白頭碑記攷」 등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
다. 그 가운데 「백두고적고」는 『문헌비고文獻備考』와 청인 오조건吳兆騫의 「장백산부長白山賦」등 여러 자료를 이용해서 백두산에 관련된 역사적 연고와 백두산에 연원을 둔 여러 강들을 서술하였다. 더욱이 두만강 좌안 일대에 산재한 한인의 고적들을 밝힘으로써 이곳에 대한 한국의 역사적 연고권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또한 「백두구강고」에서는 백두산 일대가 고구려의 고토였음을 밝히고, 고려 때에도 윤관尹瓘의 정벌로 인하여 이 지역이 고려의 판도에 편입된 사실을 지적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의 건국과 관련된 유적이 이 일대에 산재한 사실도 언급하였다. 이어 「백두도본고」에서는 백두산 일대의 자연지리에 주목하면서 이곳의 지형을 기술하였다. 나아가 이곳 백두산에 관한 지도 중 여러 이본異本들을 매거하면서 새로운 지도 작성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특히 「백두비기고」에서는 1712년에 건립된 정계비의 건립 전말을 논술하면서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土門江은 두만강豆滿江과는 다른 별개의 강임을 명백히 밝히고자 하였다.
『북여요선』 하권은 『탐계공문고探界公文攷』를 비롯하여 「감계공문고勘界公文攷」·「찰계공문고察界公文攷」·「사계공문고査界公文攷」 등 네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탐계공문고』는 1882년 간도 감계문제의 발생 이후, 이에 대해 어윤중魚允中이 대처한 기록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감계공문고」는 1885년 을유감계시乙酉勘界時에 이중하李重夏와 청국측 관헌 사이에 왕래된 공문을 첨부시키고 있다. 또한 「찰계공문고」는 1897년 함북관찰사 조존우趙存禹가 수습한 1885년 이래의 자료들을 정리해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사계공문고」에서는 내부대신 이건하의 명으로 관찰사 이종관李鐘觀이 사람을 보내어 정계비 일대의 지형을 조사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장지연은 이러한 『북여요선』 중에서도 북방강역문제와 관련되는 핵심내용을 선별 축약하고 이를 다시 편집하여 「백두산정계비고」로 완성한 것이다. 註69) 그러나 「백두산정계비고」는 『북여요선』과는 체제를 달리하여 편명을 달지 않고 내용을 기준으로 모두 11개 조목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북여요선』 2권 총 11편의 본문과 그에 따른 주석의 기록을 장지연은 자신의 기준대로 조정하고 각 본문 주석의 말미에 자신의 견해를 표방한 논평인 ‘연안淵案’을 덧붙여 『백두산정계비고』를 완성한 것이다. 「백두산정계비고」의 본문 11개 조목의 내용과 『북여요선』 8개 편과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유사하고 밀접하다.
① 1712년의 정계비 건립 전말은 『북여요선』의 「백두도본고」와 「백두비기고」의 각 일부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뒤 장지연 자신의 논평 두 가지를 첨록한 것이다.
② 1882~1883년의 국경문제 관련기록은 『북여요선』의 「탐계공문고」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③ 1885년 국경 감계기록은 『북여요선』의 「감계공문고」을 수용한 것이다.
④ 1897년 정계비 조사기록은 『북여요선』의 「찰계공문고」, 1898년의 국경조사 기록은 『북여요선』 「사계공문고」의 각각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한편 간도 거주 한인이 한국정부에 대해 청의 가혹한 압제를 막아줄 것을 호소하고 이에 따라 이범윤이 간도 시찰 관리사로 파견되어 활동
하던 1902년부터 1903년간에 걸친 기록인 3개 조목은 장지연이 독자적으로 자료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백두산정계비고」의 말미 항목인 조선왕조 발상지로서의 역사적 연고지 간도에 대한 논급 대목은 『북여요선』의 수편首編인 「백두고적고」의 내용을 양분하여 발췌 정리한 것이다. 또한 한국정부에서 간도관리사를 임명하여 현지에 파견하고 간도 한인 보호에 노력하고 있지만, 긴요한 양국간의 감계문제는 여전히 타결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을 장지연이 스스로 정리하여 강조한 것이다.
요컨대 장지연이 「백두산정계비고」를 정리한 것은 한민족이 간도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과 사실적 영유권 양자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한극 정부가 보다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확보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간도 감계문제에 대해 결론적으로 “그 구역이 두만강 북쪽에서 토문강의 동남쪽으로 이르게 된다면 그 경계는 확연하고 강역은 소상할 것이다.” 註70)라고 하여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광활한 간도 땅에 대한 영유권이 한국에 있음을 사실적으로 구명 기술하였다. 그러나 장지연에게는 정계비 문자만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의 강역에 포함되어야 하는 흑룡강 이남의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된 현실적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여 그는 현실적 상황을 감안하여 오직 분계강分界江 이남의 간도만이라도 즉시 영토로 편입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강력히 주장하였다.
분수령 동쪽으로부터 토문강土門江을 따라 하류에 이르러 송화강에 유입되고, 강가의 평평한 땅에 장령長嶺·북증산北甑山·하반령下畔嶺 등이 있어서 모두
겹겹의 멧부리와 첩첩 산으로 구역이 뚜렷하다. 다만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들어가 흑룡강과 합류하는데, 그 동남쪽 1천여 리의 땅이 지금 모두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은즉 가히 그 구강舊疆을 전부 회복하는 일을 갑자기 논의하는 것은 불가하다. 다만 분계강 이남 간도의 땅으로 경계를 삼아 영토로 편입하는 것은 실로 그만둘 수 없는 일인에도 우리 정부는 오직 그대로 미루는 것만 일삼고 있으니 이것을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註71)
그리하여 장지연은 간도 감계문제와 영유권 주장에 대해 미온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던 정부측의 처사에 대해 격분한 어조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음 대목이 그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지금 다른 나라의 토지를 오히려 강점하여 영토로 삼는 자도 있는데, 이 땅간도은 경계가 분명하고 구역이 소상昭詳한 즉 마땅히 한번 담판을 열어 각자 관원을 파견하여 정계定界를 조사해야 하거늘 무엇이 불가한 것이 있어 그대로 숨겨서 도외로 두어 십만의 생명이 탐학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백성을 구덩이에다 버리고 앉아서 강토를 잃는 것이니, 개탄하고 개탄할 일이다. 註72)
즉 장지연은 한국 정부가 여러 가지 증거로 비추어 정계定界가 분명한 간도의 영유권을 중국측에 명확하게 제시하여 정리하지 않고 그 처리를 지연시킴으로써 결국 간도 이주 한인들이 청의 압제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끝내 ‘백성을 구덩이에다 버리고 앉아서 강토를 잃어버리게 한棄民於溝壑 而坐失疆土’대한제국 정부의 처사를 강하게 성토한 것이다. 註73) 이와 같은 주장의 저변에는 일제
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던 현실에서 한민족의 자주권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국권을 회복함으로써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의식이 내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봉우가 연해주에서 『권업신문』에 「만고의사 안중근전」 註74)을 연재하던 무렵 서간도에 망명한 이건승도 「안중근전安重根傳」과 의병장 이진룡李鎭龍의 전기인 「이석대전李碩大傳」을 지어 그의 자필 문집인 『해경당수초海耕堂收草』에 수록하였다. 註75)
강화 출신의 해경당海耕堂 이건승1858~1924은 그의 형 이건창李建昌과 아울러 조선후기 양명학을 전승한 강화학파 최후의 학행을 보여 주었던 인물이다. 그는 1910년 국치를 당하게 되자 서간도 회인懷仁에 망명하여 최후의 자정自靖을 기도하였다. 이때 그와 같이 망명하였던 인물이 바로 원임판서 정원하鄭元夏와 홍승현洪承憲이었다. 이 양인은 이건승 형제와 당색이 같은 소론이었고 더욱이 학문적 지취志趣가 동일하여 서로 형제같이 교류하였다.
이건승은 「안중근전」 서두에서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사람이며 그의 선조는 본래 순흥인으로 중도에 해주로 이사하여 대대로 주리州吏를 지냈다.”라고 하여 여타 안중근 전기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지방관아의 ‘주리’라고 가계의 신분을 밝혔다. 사실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사서史書에서 직필을 생명으로 하는 유학자의 진면들이 드러난다. 또한 그는 안의사
가 진과眞鍋 여순법원장 등이 “당신안의사은 지금 죽게 되었다. 만약 이등공伊藤公이 한국에서 시행한 모든 시책이 한국백성의 행복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한 짓이라고 한다면 살려주겠다.”라는 회유에 대하여 “내가 잘못 알았다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살기를 바랐다면 하필이면 이런 거사를 하였겠는가.”라고 질타하여 회유를 권하던 사람으로 하여금 얼굴빛이 변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註76)
또한 1912년 서간도 회인의 최초 망명지를 떠나 중국 대륙으로 옮겨 가던 박은식은 북경에서 중국 여러 명인들의 칭송을 받은 『안중근安重根』을 저술하여 상해에서 창해노방실이란 필명으로 내외에 광포하였다. 註77)
한편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간행한 최초의 한글신문인 『해조신문』의 주필에 초빙되어 항일언론을 폈던 장지연은 그곳에서 헤이그평화회의 특사의 한 사람인 이위종李瑋鍾을 만나, 『이상설일기초李相卨日記抄』 註78) 등 사행의 문건과 증언 등을 견문하고 최초로 『이준전李儁傳』을 지어 의열투쟁
사적과 의의를 부각시켰다. 註79) 박은식도 이를 이어 1918년 연해주에서 대동민족사大東民族史의 일부인 『금사金史』와 『발해사渤海史』를 역술하는 한편 『이준전李儁傳』을 저술, 그 의의를 높였다. 註80) 또한 헤이그사행 후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상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스티븐스 처단의거의 주역인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전기인 『양의사합전』을 저술, 연해주와 국내외에까지 유포시켰다.
이와 전후하여 계봉우는 「의병전義兵傳」을 지어 『독립신문』에 연재하였다. 註81) 특히 「의병전」은 일제침략에 의한 민족수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반세기에 걸쳐 항일민족운동을 선도한 한말 의병항전의 사실을 최초로 종합적으로 개관 저술한 의병실기義兵實記이다. 특히 이 의병실기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북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에서 활동한 의병사적까지도 포함되었고, 중요 의병장 중심으로 서술된 점이 주목된다. 여기에는 을미의병을 선도한 유인석과 이강년 등을 비롯하여 국치 전후에 이르도록 근 200명의 의병장이 논급되어 있다. 따라서 「의병전」의 기록 가운데는 여타 자료보다 자세하고 정확한 인적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의병전」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는 이런 면에 국한되지 않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밀어닥친 광포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피로 얼룩진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을 선도한 의병항쟁사를 한국측 입장에서 최초로 평론한 사론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註82)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인신보사에서는 1917년에 『애국혼愛國魂』이라 표제한 순국선열 추모 저술이 간행되었다. 註83) 『애국혼』의 편서자編書者
는 한인신보사의 주필 김하구金河球로 추정되는 ‘옥사玉史’라는 필명인이고, 발행자는 한인신보사 사장 한용헌韓容憲이라고 판권에 명시하였다. 그러나 『애국혼』 본문 말미에는 편술자에 대해 1917년 겨울 흥개호興凱湖에서 ‘단옥이 기술하였다檀玉述’라고 밝히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옥사玉史’와 ‘단옥檀玉’이 동일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상하 양권으로 구성된 『애국혼』은 안중근을 비롯하여 민영환·조병세·최익현·이준·이범진·이재명·안명근 등 순국선열의 약전과 행적을 편술한 것이다.
한편 『애국혼』은 그 간행을 예고하는 1917년 10월 28일자 『한인신보韓人新報』에는 발행인을 김병흡, 편집인을 한용헌, 글 쓴 사람은 ‘옥사玉史’, 발행소를 한인신보사라고 밝히면서 “이 책은 우리가 한 권씩 책상위에 두고 아니 볼 수 없는 것이요. 이 책은 각 역사와 신문에서 추려서 순국문으로 저술한 것이요”라고 보도하고 있다. 또한 『애국혼』은 본문을 마치면서 “이 책의 이름은 애국혼이니 곧 나라를 사랑하여 몸을 바치고 죽은 혼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라도 손에 떼일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역사와 전기에서 조금씩 추려내어 간단하게 두 권을 만들었으니 무릇 우리 형제들은 책상머리에 두고 밤낮 애국혼을 부를지어다”라고 간행의 의의를 천명하였다.
특히 하권에 수록된 안의사의 약전인 「만고의사 안 근젼」은 박은식이 상해에서 한문으로 저술한 『안중근』을 순한글로 초역 수록한 것이고, 거기에 덧붙여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하는 우덕순의 저명한 「거의가擧義歌」와 당시 연해주지역에서 유행하던 10절의 「안의사 추도가」를 모두에 수록하는 등 이채를 띠었다.
『애국혼』은 1917년 12월 초판이 간행되고 이어 이듬해 7월 재판이 간행되었다. 일제 정보기록에는 1917년 초판시 800부를 간행하여 보급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의병에 관한 중요 문자는 이와 같은 전기류에 한하지 않고 의병의 이념과 방략을 비롯하여 의병의 규칙편제와 전술 등을 논술한 문자가 더러 전래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유인석이 연해주에서 십삼도의군의 편성 및 운용과 관련하여 1908년 10월에 지은 「의병규칙義兵規則」과 「관일약貫一約」 두 가지 저술이다. 註84) 「의병규칙」은 십삼도의군의 조직과 운영 및 전술 등을 36개 항으로 나누어 상술한 것이고, 「관일약」은 ‘전고미증유의 국망國亡·족망族亡·도망道亡의 대변고’를 맞아 국
내외 모든 장정이 단일군단인 십삼도의군에 한 마음으로 단합 참가하여 최후의 구국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지도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1910년대 만주와 러시아지역에 망명한 문인 학자들은 고난에 찬 한인의 이주 개척과 그를 이은 항일민족운동의 실기實記를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기술하였으며, 그와 같은 실기를 문학으로 승화시켜 항일가사로 남기기도 하였다. 계봉우의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아령실기俄領實記』를 비롯하여 김정규의 『야사野史』, 장지연의 『해항일기海港日記』, 장석영의 『요좌기행遼左紀行』, 이상룡의 『서사록西徙錄』, 이건승의 『서행별곡西行別曲』, 김대락의 「분통가憤痛歌」, 이동휘의 「갑인가甲寅歌」 등이 그것이다.
『아령실기』와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를 쓴 계봉우의 국학 연구와 저술은 북간도 망명 직전부터 시작하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작고할 때까지 근 반세기에 걸쳤다. 그것도 국내의 적절한 연구환경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망국인으로 조국을 떠나 언어와 풍속, 그리고 지리 풍토가 다를 뿐 아니라 이념과 체제가 급변하는 북간도를 비롯한 중국대륙, 러시아 연해주,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전전하는 불안과 격동 속에서 진행된 것이다.
항일민족운동 내지 공산주의운동과 깊이 관련된 계봉우의 기구한 생애는 다음과 같이 나라는 물론, 언어와 풍속이 다른 4개의 생활권을 유전하면서 계속되었다. 제1기는 나라가 일제에 의하여 유린되던 한말 국내에서 생장, 구국계몽운동에 참여하던 시기1879~1910이며, 제2기는 나라를 잃고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조국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주로 민
족주의 교육에 현신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 유배되던 시기1911~1919이다. 제3기는 1919년 3·1운동 직후 국내를 벗어나 볼세비키혁명의 와중에 휩싸인 연해주로 다시 망명,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를 중심으로 때로는 상해를 오가며 공산주의운동과 그를 이어 국학연구와 교육에 투신하던 시기1919~1937이고, 제4기는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 크즐오르다 등지에서 말년을 보내면서도 사라져가는 모국어와 역사연구를 계속하던 시기1937~1957이다.
계봉우의 연구와 저술 분야는 국어와 국문학, 그리고 국사 분야가 위주였다. 그리고 그는 북간도에서 월간지 『대진大震』1912의 주필, 연해주에서 『권업신문』1913~1914의 기자, 상해에서 『구국일보救國日報』1920의 기자,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 기관지 『자유종自由鍾』1920과 한글잡지 『새사람』1921의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논설과 시문을 썼다. 註85)
계봉우는 특히 한인의 국외 이주와 민족운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져 이 분야에 중요한 몇편의 논술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이러한 논술들은 그가 이동휘를 따라 상해에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북간도 대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던 무렵에 『독립신문』에 연재물로 발표한 것이다. 그 가운데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와 『아령실기』는 북간도와 연해주지역 한인의 이주개척과 항일민족운동의 희귀하고 중요한 내용을 담은 저술이다. 또한 『김알렉산드라소전』은 초기 공산주의 운동의 한 핵심인물인 김알렉산드라의 간략한 생애와 활동을 기술한 것으로, 이 논술을 통해 볼셰비키혁명 전후 연해주 한인사회의 동향을 이해할 수가 있기도 하다.
『아령실기』는 시기적으로 1860년대 한인의 연해주 이주개척 배경부터 시작하여 1919년 러시아지역에서의 3·1운동의 전개와 독립군 편성
까지 기술하였다. 취급 범위도 광범위하여 한인의 이주와 그 원인에 이어서 연해주내 각지의 한인촌과 한인사회의 성립, 풍속, 그리고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노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직업 등도 상세히 기술하였다. 또한 그들의 전통적 고질인 사환욕仕宦欲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해주 각지에 한인사회가 들어설 수 있었던 여러가지 요인도 예시하였고, 이주 한인의 종교와 교육도 논급하였다. 특히 3·1운동 이후 독립군의 편성활동을 기술하고 끝을 맺었다. 이와 같이 『아령실기』는 연해주지역 한인의 역사와 문화를 여러 분야에서 예증하며 논술한 것이다. 더욱이 이 저술은 이주 한인의 입장에서 다른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실을 적잖게 담고 있다. 요컨대 『아령실기』는 초기 연해주 한인의 이주개척의 역사이며, 항일민족운동을 한인의 입장에서 개관한 희귀한 사론이라 할 수 있다. 註86)
김정규는 전후 15년 동안에 걸쳐 매일같이 『야사』라고도 하는 일기를 쓴 인물로, 관북지방에서 경원 출신의 유학자 김노규金魯奎와 병칭되는 학자로도 꼽혔다. 김노규는 구한말 조·청간 간도 관계의 기준자료
가 된 『북여요선』을 지은 학자로 이종영李鍾嶸·최상민崔相敏·오재영吳在瑩과 같은 학자가 그 문하에서 나왔다. 註87)
한학자였던 김정규는 학문정진과 후진양성을 오래 계속할 수 없었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계기로 광무황제가 퇴위되고 나라의 간성인 군대가 해산되었다. 이를 계기로 을사5조약 전후부터 재기항전을 전개하던 항일의병이 전국적 구국의병으로 발전하였다. 함경도에서도 홍범도와 차도선 등이 북청·삼수·갑산 등지를 무대로 항일전을 전개한 것을 필두로 관북 6진 각지에서도 의진이 결성되어 항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규는 1908년에 들어서면서 사우동지들과 함께 경성·명천의 관북의진을 결성하여 항전하게 되었다. 이 의진은 그후 연해주에서 건너온, 관리군管理軍이라도 부르던 강동의진江東義陣과 합진하여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정규는 이때 참모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 연합의진도 1908년 12월 전후에 패산하는 비운을 맞게 되고, 그는 잠시 은둔하여 시국을 관망하게 되었다.
이후 김정규의 기구한 국외 망명생활은 1909년 7월에 의병동지들과 전후하여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망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간도에 망명, 현지를 답사하고 러시아 연해주와 관북 6진, 그리고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삼각으로 연접한 요충지 간도지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일투쟁의 최적지로 평가하였다.
가위 십승지지十勝之地이다. 하물며 수십년간 풍년이 들어 곡식이 많으니 거의擧義하는 일을 이곳에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일찍이 듣건대 한국 백성으로 西江간도에 이주한 호수가 수만호를 헤아린다고 하니 한 집에서 한 사람씩을 부양한다면 수만명의 의병을 기를 수가 있다. 註88)
그리하여 김정규는 간도지방을 의병 재기항전의 근거지로 구축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벌였다. 그는 서북간도와 연해주를 망라하는 유학자와 의병세력을 배경으로 간도내 의병세력을 규합, 간도 의병진의 결성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제의 군사·외교적 압력을 받은 중국관헌의 제재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연해주에서 유인석·이상설·이범윤·홍범도 등이 주축이 되어 십삼도의군이 편성되자, 그는 이 의군의 장의군壯義軍 종사從事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의군도 일제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 관헌의 탄압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펴지 못하고 해체당하게 되어 재기의 기회를 기다려야 하였다.
김정규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민족의 ‘기사회생’의 기회로 환희하였다. 그러나 용정에서의 3·13운동 때와 같이 희생자만 속출하였다. 그 무렵 그는 서북간도와 연해주에서의 ‘독립전쟁론’을 구현하려는 독립군의 편성과 활동에 호응하여 다시 무장항쟁에 나섰다. 특히 그는 과거 의병 동지와 연락, 1910년 전후에 관북과 간도지방에서 활동하던 항일무장세력 및 십삼도의군 세력을 규합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의군부 지방정위대地方正衛隊 편성과 활동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 의군부를 뒷받침하기 위한 대한민단화령총부大韓民團華領總部의 조직과 활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마지막 거의擧義 무장항쟁도 일제의 독립군 탄압을 위한 간도침공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승첩과 그해 10월 청산리대첩으로 이어지는 간도 독립군항쟁도 일제 침략군에게 쫓겨 나자구羅子溝 밀산密山 방면으로 북상하게 되고, 그런 속에서 일제 침략군에 의해 간도 한인이 참혹한 학살 수난을 당한 ‘경신참변’이 연출되었다. 물론 대한의군부 정위대도 일부는 북상하고 나머지는 풍지박
산이 되고 말았다.
김정규의 주저라 할 『야사』는 이와 같은 항전 속에서도 간단없이 기록된 의병 내지 항일민족운동과 관련된 진귀한 역사물이다. 기술형식이 일반적인 일기를 따랐으나 범인의 예사 일기가 아니고 김정규가 활동한 민족수난기 민족사의 일부를 실증하려는 사서로 기술된 것이다.
이 저술이 일반적 일기가 아니고 ‘야사’라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김정규는 『야사』 제6권을 시작하는 1911년 음 4월 18일자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매일같이 기록하는 것은 수문隨聞하는데 따라 그 실상을 기록하는 것이요, 나라에는 국사國史가 있고 민간에는 야사野史가 있는데 내가 기록하는 것은 야사에서 시작하여 간간히 국사를 취하려는 것이다. 註89)
공교한 단필의 모필로 기록된 김정규의 『야사』는 시기적으로 대한제국의 명운이 다해가던 광무황제 퇴위와 군대해산 직전인 1907년 3월 29일음 2월 16일부터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이 큰 시련기에 접어든 경신참변을 지나 자유시사변 직후인 1921년 11월 16일음 10월 17일까지 장장 15년 동안에 걸쳐 있다. 전체 분량은 17권 18책, 총 2,044면에 달하는 거질의 문헌이다.
이와 같은 『야사』를 중요 내용별로 살펴보면, 첫째, 상술한 바와 같이 항일투쟁을 위한 거의擧義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특히 1910년 전후의 의병과 3·1운동 이후의 대한의군부의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것 등은 그가 직접 관여한 것뿐만 아니라 관북을 비롯해 간도와 연해주를 연결한 국외의병 및 독립군의 관련사실까지 폭넓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된다.
둘째, 전술한 바와 같이 한민족의 전 시대를 개관하여 역사서로 저술한 『대한사』를 수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10년 나라가 망한 뒤 망명지에서 각종 사서를 탐구하여 『대한사』를 짓고 사론을 달았다. 그 속에서 그는 한인의 자국사에 대한 이해가 결핍된 점을 지적 한탄하면서 ‘충군애국’을 제고하는 역사의식을 강조하였다.
셋째, 한민족의 운명과 관련이 깊은 국내외의 정세변화를 주의깊게 관망하여 관련 문헌과 함께 기술하였다. 예컨대 1910년 일제의 조국 병탄은 물론,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 그리고 1914~18년 제1차 세계대전 등에 대한 견문기록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넷째, 의병과 독립군의 무장항일투쟁 외에도 국내외에서 전개된 크고작은 각종 항일운동을 그가 아는 범위내에서 적절히 기술하였다는 점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19년 용정에서 일어난 3·13운동이다. 국내외에서 전개된 3·1운동 중 가장 큰 규모로 전개되고 또한 현장의 살상 희생자도 적지 않았던 이 운동의 내용과 의의 등을 밝힐 수 있는 실증 자료라 할 것이다.
다섯째, 안중근의거를 비롯한 국내외 의열투쟁을 기술·칭예하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하얼빈의거에 대해서는 그 의의와 국내외에 미친 영향까지 논술해 놓았다. 또한 이준·최익현·민영환 등의 의열義烈에서는 강개한 시를 엮어 수록하였다.
여섯째, 일제에 의한 민족수난을 극복하려고 신명을 돌보지 않고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중요 의병장과 민족운동자의 동향과 행적을 밝히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1910년 국치 이후에 십삼도의군의 도총재로 추대된 유인석을 비롯하여 조맹선趙孟善·이남기李南基·이범윤李範允·조상갑趙尙甲 등 서북간도와 연해주의 저명한 의병장, 성명회와 권업회를 주도한 이상설, 기독교를 통한 민족운동을 주도한 이동휘, 대종교 지도
자 현천묵玄天默默, 언론과 계몽운동을 선도한 양기탁, 독립군사령관 최명록崔明錄 등이다.
김정규의 『야사』는 이밖에도 친일파와 일진회원을 비롯한 많은 민족반역자의 친일사실과 관련 문자를 수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야사』에는 간도 한인사회의 정치·경제상황에 대한 체험과 견문을 폭넓게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김정규의 『야사』는 매일같이 기술하는 일기 형식을 취하였으나 저술자의 의도와 내용으로 보아 ‘애국지사 김정규의 역사의식’이 뚜렷이 부각된 사서이고, 그의 구국항일의 활동기를 실증하는 귀중한 한 시정기時政記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야사』 속에 포함된 250수가 넘는 애국시와 그밖에 격조있는 많은 율律·서書·사詞의 문자도 예사 문인의 문집자료라기보다는 그와 같은 범주에서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 같다. 註90)
『해항일기』 註91)는 언론인으로서는 최초로 연해주 『해조신문』의 주필을 맡아 활동하던 장지연의 망명일기이다. 이 일기는 1908년 1월부터 그해 8월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의 기록이지만, 연해주 한인사회의 동향과 민족운동의 내용이 진솔하게 기술되어 있다. 국망은 목전에 둔 시기에 러일간의 대결과 연계 속에서 전개되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험난한 항일운동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적지 않다. 특히 연해주지역 민족운동이 시작되던 초기의 양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담고 있다.
한계 이승희와 병칭되던 유학자 장석영張錫英은 1912년 서간도를 중심으로 망명지를 찾기 위하여 남북만주와 연해주를 답사하고 『요좌기행遼左紀行』 註92)
이라는 견문기를 저술하였다. 조선 말기 영남 성리학의 거맥이라 지칭되던 한주 이진상의 많은 제자 중에 특히 유명한 인물이 학문적 명망에 의하여 포의로 의정부참찬에 발탁되었던 곽종석郭鍾錫과 한주의 외아들로 그의 학통을 이은 이승희였고, 이 양인과 병칭되어 3인의 제자로 예거되던 인물이 장석영이었다. 이러한 3인은 연령도 비슷하여 서로가 평생 동안 자별하게 지내며 학문을 절차탁마하고 항일독립운동에서도 대개 비슷한 노선을 취하였다.
국운이 기울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하는 비운이 겹치자 이들 가운데 이승희가 먼저 해외 망명길에 올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장석영이 1912년에 기록한 『요좌기행』은 일면 먼저 망명한 이승희를 만나 그의 망명을 논의하자는 의도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장석영의 기행紀行은 그해 음력 1월 19일에 경북 칠곡漆谷의 석진石津에 있던 자택을 떠나 동년 4월 29일 귀가할 때까지 전후 130일 동안에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를 시발점으로 안동·봉천·하얼빈을 거쳐 교계交界에서 시베리아 땅에 들어서고 다시 홍토애紅土涯 밀산부密山府를 돌아오는 주행周行 15,000리에 달하는 먼 행정行程이었다. 언어도 불통하고 61세의 회갑 연세이지만 학자적 식견으로 그가 답사한 일대의 지리를 비롯하여 인물·풍속·산물·학문·역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관찰을 거의 일지 형태로 기술하였다. 특히 그의 여행 목적이 망명지 선정에 있었기 때문에 현지 이주한인의 생활과 동태를 중점적으로 살폈고 그들의 장래 문제에 대해서까지도 깊은 고뇌를 담았다. 註93)
그러므로 『요좌기행』이 가지고 있는 자료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예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 기록을 통해 국치 전후 한인의 활발한 이주개척과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비참했던 악조건하에서 고난사苦難史를 여실히 인식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국내 농촌경제의 파탄으로 급격히 늘어나던 만주와 러시아지역 한인이주는 문자 그대로 망국민의 수난사를 상징하는 것 같다. 장석영은 그러한 상황을 유려하고도 간결한 문체로 이 책 여러 대목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특히 서간도지방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고지故地이며 토지가 비옥하여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고 광복군을 양성하여 광복대계光復大計를 세울 땅이라고 알려져 매일같이 동포가 줄을 이어 이주하는데 그 정착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나아가 비참한 처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절실하게 지적하였던 것이다.
둘째, 『요좌기행』은 이미 이주한 한인의 생활도 남북만주·연해주 어느 곳에서나 국내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어렵게 이루어져 동포들이 말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있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한인의 유지와 우국지사들이 조국광복의 대계를 위하여 헌신하는 모습을 목도한대로 기술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 의식을 엿보게 한다.
셋째는 이 기록에서는 여행지 가운데 한인이 교거僑居하여 살 수 있는 곳은 압록강 대안의 요동遼東 좌편이 되는 서간도지방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장석영은 이미 밀산부密山府에서 이상설과 같이 한흥동을 건설하여 해외독립운동기지를 닦던 이승희를 만나 망명지를 서간도로 옮기도록 설득력 있는 조언을 하였던 것이다. 註94)
이와 같이 『요좌기행』은 성리학자로 후일 국내에서 항일독립운동에도 솔선한 장석영이 한국독립운동의 중요한 해외무대로 부상한 남북만주
와 연해주지방을 직접 답사 목도한 사실을 기록한 희귀한 저술인 것이다.
한편 국치 후 서간도에 망명한 이상룡은 장석영의 『요좌기행』보다 앞서 망명일기인 『서사록西徙錄』을 기술하였다. 註95) 전문에는 신민회의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 취지에 찬동하여 서간도에 망명하는 배경과 심희를 설명하고, 이어 1911년 1월 5일부터 동년 4월 13일까지 그가 견문하고 체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이상룡 자신과 일가친척, 그리고 각지 망명 동지들이 독립운동 사업을 위하여 고향을 등지고 남부여대하는 곤경을 겪으며 서간도 유하현 횡도천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양명학자 이건승이 지은 『서행별곡』 註96)은 자신의 망명을 소재로 한 일종의 가사라 할 수 있다. 1910년 국치 직후 조국을 등지고 서간도로 망명하는 동안의 비통한 심희를 전통적 국문 장가 체제에 맞추어 지은 별곡別曲 141장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작품은 통속적으로 망국의 통분을 표현한 데 그치지 않고, 그 속에는 처절한 ‘망국의 참상’과 ‘망국노의 통분’이 문학으로 승화되었고, 나아가 조국광복을 기약하는 민족의식이 충일하고 있다.
『서행별곡』은 이건승이 서간도 항도촌恒道村 망명 직후인 1911년 3월에 완성된 작품이다. 이건승이 서간도로 망명길에 오른 것은 가까운 벗이며 애국시인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者人’이란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 순국하자 그를 조문하고 돌아온 직후인 1910년 9월 22일이었다. 이후 1911년 3월 항도촌에 자기의 망명 우거처를 마련하기까지 사이에 전개된 사실을 차례로
엮어간 것이다. 이런 면만 보아도 『서행별곡』은 이건승의 망명 심사心事를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 되고 아울러 그의 학문사상을 인식하는 자료로서 귀중함을 입증할 수 있을 것 같다.
『서행별곡』의 사료적 가치는 여러모로 검토될 수 있으나 그 중에도 첫째, 조선의 전통적 유학에 바탕을 둔 한말 지식인의 민족국가관이나 주체의식을 살필 수 있다. 이 작품의 전편에 흐르는 일관된 신념이 비록 근대사조에 뿌리를 둔 민족주의라고 할 수 없지만 오직 타율에 의한 자주 상실을 거부하고 죽음에도 초월한 주체의식·민족의식에 집결되었음을 간취할 수 있다. 註97)
둘째, 한인의 서간도 이주개척과 그 역사적 의의를 밝혔다. 민족운동자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같이 이건승도 서간도는 고대 이래 고구려·발해로 내려오는 역사적 고지이며 그곳이 민족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따라서 그곳을 민족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아 한인을 교육하고 광복군을 훈련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나아가 항일독립의 날을 맞이하자는 경륜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나타냈다.
셋째, 이건승은 양명학 학풍의 대표적 학자로도 지목될 수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시문에 탁월하여 명문을 적지않게 남긴 문인이기도 하다. 그가 말년 망명지에서 간추려 편집하고 자필 정서한 『해경당수초』 2책이 그 증좌이기도 하다. 『서행별곡』과 자매를 이루는 한시가 이 저술 속에는 10여 편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서행별곡』은 전통적 장가長歌 형식의 별곡으로도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밖에도 이건승의 『서행별곡』과 유사한 작품이 이상룡과 동행하여 서간도에 망명한 김대락金大洛이 지은 「분통가憤痛歌」 註98)로, 김대락의 망명
일기인 『백하일록白下日錄』속에 수록 전래되고 있다. 「분통가」는 망국민의 분통과 회환을 여실히 담고 있으며, 그러한 가운데 조국광복의 큰 꿈을 안고 서간도 황무지에 망명하여 새로운 민족운동을 펴는 굳은 결의를 전통시가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註99)
또 다른 항일가사류로는 전술한 박은식의 『몽배금태조』와 『발해태조건국지』 말미에 합록된 「역사가歷史歌」 註100)를 거론할 수 있다. 이 시가는 백두산을 중심한 남북만주가 모두 우리민족의 역사적 고지이므로 그곳에 광복운동의 터전을 닦아 망국노의 치욕을 씻으며 조국광복의 대업을 이룩하자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는 작품인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과 함께 국치 후 해도간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한 이동휘의 「갑인가」도 병론할 수 있다. 註101) 이동휘는 1914년, 즉 갑인년에 들어서면서 독립전쟁의 결행을 뜻하는 다음과 같은 「갑인가」를 지어, ‘갑인호甲寅虎’가 ‘왜구倭狗’를 잡아먹는 풍자화를 표제로 하여 연해주 한인사회와 각급 학교에 보급하기도 하였다. 註102)
갑인가甲寅歌
돌아왔다 돌아왔다 우리 갑인년 기다리던 갑인년 이제야 돌아왔다
독립의 동목 木이 자유종을 치면서 대한 반도강산에 돌아왔다
갑자甲字 뜻은 동방이고 우리나라이며 인자寅字 뜻은 우리의 기백이다
동반도에 잠자던 맹호가 포효하고 일어남에 세계가 진동한다
갑자 뜻은 갑주甲胄로 우리 행장行裝이고 인자 뜻은 사람으로 우리 몸통이다
철갑철창鐵甲鐵槍이 비호처럼 맥진驀進하며 원수놈들 박멸하도다
갑자 인자 모두가 동방을 가르키고 동방은 만물이 회생하는 곳이로다
갑인년 갑인방甲寅方에 둥근 원이 펄럭이니 이것이 무엇이니 태극기로다
장백산에 잠자는 이 모두 깨어나 두만 압록강을 건널 날은 오늘이로다
반도강산에 함성이 울려 넘치고 대한의 독립권이 회복하도다 후렴 생략
이동휘는 망명 후 일관하여 자신의 지론이기도 한 ‘독립전쟁론’의 구현을 위해 ‘광복군’ 양성과 그를 지휘할 ‘광복군정부’의 건립을 위하여 분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14년 8월 한국독립운동사상 최초의 망명정부라고도 할 대한광복군정부의 정도령正都領에 선임되고 독립전쟁 결행을 교계較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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