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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 十一月 日 全琫準, 宋斗浩, 鄭鍾赫, 宋大化, 金道三, 宋柱玉, 宋柱晟, 黃洪模, 崔興烈, 李鳳根, 黃贊五, 金應七, 黃彩五, 李文炯, 宋國燮, 李成夏, 孫如玉, 崔景善, 林魯鴻, 宋寅浩
이이집 좌 各里里執綱1) 座下 우 여 격문 방 비전 물논 정비 일 右와 如히 檄文를 四方에 飛傳니 物論2)이 鼎沸3)얏다. 每日 亂亡를 구 민중 처처 이 謳歌4)던 民衆드른 處處에 모여서 말되 「낫네 낫서 亂離 낫서」, 백성 「에이 참 되얏지 그양 이로 지서야 百姓이 사이 머 기일 잇겟」며 期日이 오기 기다리더. 도인 선후 토의결정 위 고부 서부면 죽산이 이 에 道人드른 善後策5)을 討議決定기 爲야 古阜 西部面 竹山里 송두호 도소 정 일 운집 서 결정 결의 宋斗浩家에 都所를 定고 每日 雲集야 次序를 決定니 그 決議된 내용 좌 여 內容은 左와 如. 고부성 격 군수 조병갑 효수 사 一. 古阜城을 擊破고 郡守 趙秉甲을 梟首6) 事. 군기 화약고 점영 一. 軍器倉7)과 火藥庫를 占領 事. 군수 아유 인민 침어 이 격징 一. 郡守에게 阿諛야 人民을 侵漁8) 貪吏를 擊懲 事. 전주영 경 직 一. 全州營을 陷落고 京師9)로 直向 事. 우 여 결의 군략 능 서 민활 영도 右와 如히 決議 되고 서 軍略에 能고 庶事에 敏活 領導者될 장 將 · · · · · ·(이하 판독 불능)
각리의 리집강들은 받으시오. 오른쪽(위)과 같은 격문을 사방에 보내니 세상 여론이 들끓었다. 매일 나라의 어지러움과 망함을 칭송하며 노래 부르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들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하며 기일이 오기를 기다리더라. 이 때에 도인(동학교도)들은 뒷갈망할 대책을 토의하여 결정하기 위해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현 정읍군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의 송두호 집에 모이는 장소로 정하고 매일 구름처럼 모여서 일의 순서를 결정하니, 그 때 결정된 내용은 왼쪽(아래)과 같다.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1.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1. 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의 재산을 빼앗은 탐관오리를 공격하여 징계 할 것. 1.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경사(서울)로 곧바로 향할 것. 오른쪽(위)과 같이 결의 되었고 따라서 군사 전략에 능하고 모든 일을 민첩하고 활발하게 처리하여 영도자가 될 장군(?)·····(여기부터 누락됨) |
동경대전 포덕문 일부_ 是故 我國 惡疾滿世 民無四時之安 是亦 傷害之數也 西洋 戰勝攻取 無事不成而 天下盡滅 亦不無脣亡之歎 輔國安民 計將安出 이러므로 우리나라는 악질이 세상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언제나 편안할 때가 없으니,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좋지 않은 운수요 ,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천하가 다 멸망하면 또한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듯이, 중국이 서양의 침공에 허물어지면 우리나라도 위험에 떨어야 되는 현실이라.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 |
◉ 보은집회
1893년(고종 30) 3월 11일부터 4월 2일까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기치로 보은 장내리(帳內里)에서 열린 동학집회.
이 집회를 전기로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은 사회개혁과 반외세투쟁으로 전개된다. 1892년 11월 삼례집회와 1893년 2월의 복합상소(伏閤上疏)가 성과 없이 끝나고 동학에 대한 지방 관아의 탄압이 계속되자, 3월 10일 교주 최제우의 제례를 위해 간부들이 모인 청산군 포전리 김연국의 집에서 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해 동학교도들을 보은 장내리에 집결시키는 통유문을 보냈다. 이때 통문을 발함과 동시에 각 접주(接主) 중에서 유력한 자를 골라 각 포(包)의 대접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포명을 주어 교구의 구분과 연락을 원활히 하도록 했다. 장내리는 이 해 초부터 교주가 대도소를 두고 주재함에 따라 각 처의 교도들이 찾아오게 되어 잘 알려진 장소였고, 관헌의 지목과 추적에 쫓긴 교도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일단 집결 지시가 떨어지자, 동학교도들은 매일 각처에서 각각 수백 명 단위로 몰려와서 며칠 만에 수만 명에 달했다. 각처에서 온 핵심 간부들은 교주와 함께 주요방침을 의논하여 결정했다. 당시 동학교도들은 장내리뿐 아니라 전라도의 금구(金溝)·원평(院坪)에도 집결했다.
3월 11일 보은 관아에 붙인 격문은 종교문제를 떠나 왜양(倭洋)과 맞서려는 자세가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보은군수는 우선 조정에 그 실상을 알린 뒤 향리를 시켜 동학 지도자들을 만나게 하고 자신도 직접 가서 자세한 사정을 조사했다. 장내리는 집들이 옥녀봉 기슭을 둘러싸듯 들어차 있었는데, 그중 큰 기와집에 동학 도소가 설치되었다. 동학교도들은 각기 긴 장대에 깃발을 만들어 걸고, 자갈을 모아서 성을 만들었으며, 낮에는 천변에 모였다가 밤이 되면 부근 마을에서 흩어져 잤다. 돌성 안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쳤는데, 이러한 종교의식은 각지에서 모인 교도들을 단결시켰다. 또 관군이 와서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각 조직은 군사편제처럼 움직였으며, 북산과 남산에 깃발을 꽂고 40~50명이 지켰다. 집결한 교도의 수는 기록마다 다른데, 1명당 돈 1푼씩 걷어서 모두 230냥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2만 3,000명 이상이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양식은 각기 직접 며칠 분씩 가지고 와서 해결하기도 했고 또 교단에서 식량조달을 책임진 사람들이 준비하기도 했다.
보은 관아와 감영 그리고 정부에서는 동학교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으로 하여금 보은에 관군을 주둔시키게 하는 한편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와 선무사로 임명하여 수습하게 했다. 어윤중은 동학교도들의 대표와 만나 척양척왜 항목을 중심으로 집회의 의도에 대해서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외세배척의 주장을 고종에게 상달하겠다고 약속하고 해산을 종용했다. 고종도 윤음을 거듭 내려 해산을 명했다. 이와 함께 장위영 군대 600명이 동학교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3월 30일 청주에 도착했다. 동학교단의 지도부가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해산을 결정하자, 동학교도들은 4월 2일 장내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20일간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지쳐 있던 동학교도들은 각기 고향을 향해 출발했고, 교주 최시형도 상주 방면을 향해 떠났다. _인터넷 자료 발췌
◉ 동학
-19세기 후반 서양 세력의 침투와 조선 사회의 내재적 위기 속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우면서 등장
-당시의 유교는 성리학적 명분주의에 빠져 변화하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불교 역시 조선시대 500여 년 간 정책적으로 탄압받아왔으므로 새로운 사회를 주도할 자체의 역량이 부족
-또한 서양의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사회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
-최제우는 이러한 서학의 침투에 대항하는 한편, 새로운 이상세계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1860년 창건
동경대전(동학경전) 논학문 일부 轉至辛酉 四方賢士 進我而問曰 今天靈降臨先生 何爲其然也 曰受其無往不復之理 曰然則何道以名之 曰天道也 曰與洋道無異者乎 曰洋學如斯而有異 如呪而無實 然而運則一 也 道則同也 理則非也 신유년에 이르러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이 나에게 와서 묻기를 「지금 천령이 선생 님께 강림하였다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대답하기를 「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를 받은 것이니라.」묻기를 「그러면 무슨 도라고 이름 합니까.」대답하기를 「천도이니라.」묻기를 「양도와 다른 것이 없습니까.」대답하기를 「양학은 우리 도와 같은 듯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 느니라. 그러나 운인 즉 하나요 도인 즉 같으나 이치인 즉 아니니라.」 曰同道言之則 名其西學也 曰不然 吾亦生於東 受於東 道雖天道 學則東學 況地分東西 西何謂東 東何謂西 孔子生於魯 風於鄒 鄒魯之風 傳遺於斯世 吾道受於斯布於斯 豈可謂以西名之者乎 묻기를 「도가 같다고 말하면 서학이라고 이름 합니까.」 대답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나 학인 즉 동학이라.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르겠는가. 공자는 노나라에 나시어 추나라에 도를 폈기 때문에 추로의 풍화가 이 세상에 전해 온 것이어늘 우리 도는 이 땅에서 받아 이 땅에서 폈으니 어찌 가히 서라고 이름하겠 는가.」 |
□ 개설
동학은 그 교지(敎旨)가 시천주(侍天主) 신앙에 기초하면서도 보국안민(保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이다. ‘동학’이란 교조 최제우가 서교(西敎:천주교)의 도래에 대항하여 동쪽 나라인 우리 나라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에는 손병희(孫秉熙)에 의하여 천도교(天道敎)로 개칭되었다.
창도 당시 동학은 한울에 대한 공경인 경천과 시천주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이 내 몸에 천주(한울님)를 모시는 입신(入信)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경천사상에 바탕한 나라 구제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에 이르러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事人如天].’는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되고,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의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한울에 내재한 것으로 보는 물물천 사사천(物物天事事天)의 범천론적 사상(汎天論的思想)이 널리 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손병희는 더 나아가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을 동학의 종지(宗旨)로 선포하였다. 동학의 사회사적 의의는 양반사회의 해체기에 농민대중의 종교가 된 점에 있다. 동학사상과 동학운동은 서민층의 반왕조적인 사회개혁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최제우의 창도단계에서는 서민층에 널리 유포된 신앙형태이었으나,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통해 민중의 집단적 시위운동으로 전환되면서 탐관오리의 혁파, 외세 배척 등 정치적 요인이 끼어들어 사회운동의 요인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동학농민운동에 와서는 동학의 종교운동이 쌓아 올린 만민평등의 이념과 그 교문조직이 기반이 되어 농민운동의 집대성인 사회개혁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동학군이 표어로 내세운 ‘제폭구민(除暴救民)·축멸왜이(逐滅倭夷)·진멸권귀(盡滅權貴)’는 이미 동학운동이 혁명적인 사회개혁운동으로 전환되었음을 말해 준다.
개항·개화기에 동학운동은 단발령에 대한 지지세력이 되어 개화운동 편에 서서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켰고, 1905년 천도교 선포 이후에도 개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흥학회운동(興學會運動)에 공명하여 보성학교와 동덕학교 등 많은 학교경영을 통하여 신교육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천도교운동은 신민회운동(新民會運動)과 더불어 널리 서민층에 뿌리를 내려, 3·1운동에 나타난 자주독립의 민족주의 역량을 키운 민족운동 세력으로 근대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 최시형의 동학운동과 사상
최제우가 순교한 뒤 교통을 이어받은 최시형은 지하에 숨어 다니면서 포교에 힘쓰는 한편, ≪동경대전≫을 간행하는 등 교리를 확립하였고, 조직을 강화하여 동학의 완성을 이룩하였다. 그의 시대에 이르러 보편자인 천·천주는 더욱 세속화되어 ‘만인과 만물이 천이다.’라는 범천론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왕조사회의 신분질서에서 오는 차별제도도 최시형의 ‘물물천 사사천’의 사상에서는 그 차별의 근거가 사라지고, “사람을 한울처럼 섬긴다.”는 인간존엄의 가르침이 더욱 뚜렷해진다. 인간을 대할 때 상민도 양반이나 다름없이 한울처럼 섬긴다는 가르침은 양반사회의 신분 차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는 “성·경 두 자를 잘 지키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한울 공경, 사람 공경, 사물 공경의 3경을 강조하였다. 이 3경설에서 ‘경’의 대상을 ‘천’과 ‘인’에서 ‘만물’로까지 확대한 점에 유의할 때 자연보호와 환경윤리의 선각을 인정할 수가 있다.
‘경물’이란 동물을 애호하고 새소리도 한울의 소리로 들으라는 그의 가르침에서 자연보호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에까지 시천(侍天)을 인정한 것이다.
특히, 최시형의 범천론은 양반사회에서 천시당했던 노동과, 일반 세속사 전반에 대하여 천주를 위하는 덕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에 대하여 그는 “사람이 그저 놀고 있으면 한울님이 싫어하시니라.”고 한 점에서 세속적 근로와 직업을 신성화한 근대적 세속윤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천이 천을 먹는다[以天食天].”의 설법은 인간의 식생활 행위도 ‘천이 천을 먹는’ 행위로 신성화하였고, 일상생활의 규범을 범천론적으로 재정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세속윤리는 부녀자에게 보낸 ≪내수도문 內修道文≫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양천주의 설법 역시 온갖 탐욕을 물리치고 도덕적 인격을 닦는 일이 내 몸에 모신 천주를 양(養)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온갖 욕망을 자제하고 마음을 정(定)하면, 그것이 양천주가 되고, 양천주로 한울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고 설파하여, 선민들도 양천주하면 성인이나 군자가 된다고 하였다. 최시형의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주장은 그의 ‘인즉천’사상의 극단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제사상을 놓을 때 신위를 향하여 향벽설위(向壁設位)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가 제안한 ‘향아설위’는 천주를 모신 나 자신을 향하여 젯상을 놓자는 것이다.
조상이나 스승에게 제사를 지낼 때, 부모님의 정령은 자손에게 전해 왔고, 스승님의 정령은 제자에게 옮아 왔으므로 그 제사를 위해서는 자아를 향하여 설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었다. 이 설법에서 최시형은 “사람이 천령(天靈)을 모셨으니 신이 곧 내 마음이요, 예(禮)는 내 마음의 기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최시형은 동학사상의 실천에서 종교적 포교와 교문의 확대, 교의 공인, 교조의 신원에만 전념하였으나, 동학사상의 전파는 당시의 사회상으로 보아 필연적으로 농민운동에 들어가 혁명을 잉태하게 되어 제폭구민과 척양왜(斥洋倭)의 정치적·사회적 개혁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조직
동학 교문은 1860년 창도 당시 교조 주위에 자연발생적으로 신자조직이 생겼다. 이 종교집단은 주로 글을 아는 잔반(殘班)의 식자층과 널리 서민층으로 구성되고, 민간신앙의 전파 통로로 신앙적 결집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최제우는 창도 3년 만에 많은 입신자를 얻어 각처에 접소(接所)를 두고, 그 지방의 유지를 접주(接主)로 삼아 교세를 늘려 나갔다. 동학의 포교는 경주를 비롯하여 영덕·고성·영일·단양 등 경상도 산간지방에 번져 나갔다.
최시형 시대에 접어들어 교세는 더욱 늘어나 전라도·경상도·충청도·강원도 등 삼남 각지로 번져, 접포(接包)의 교단조직이 생겼다. 즉, 각처에 접소가 있고 접주가 그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지방의 읍단위에는 대접주를 두었고, 일종의 교구제와 같은 포(包)를 두어 대접주로 하여금 포주를 삼아 예하의 접주를 감독하게 하였다.
포에는 행정기구를 이루는 6임제라 하여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의 여섯 가지 부서를 두었다. 교단을 총괄하는 중앙기관으로 충주에 법소(法所)를 두었고, 각 지방에 도소(都所)를 두어 도접주가 있는 곳도 있었다.
접과 포의 차이에 대해서는 접은 교화적인 것이고, 포는 행정적인 조직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접이 모여 포가 이룩된다는 견해도 있다.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조직을 총동원한 것을 기포(起包)라고 하였는데, 포 조직을 총동원하였다는 뜻이 된다.
동학의 조직원리는 연원제(淵源制)이다. 도통연원(道統淵源)이라 하여 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가 연원주가 되고, 그에 의하여 포교된 신자들을 자기의 연원으로 간주한다.
유교에서의 사제지간이 같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급문(及門)의 제자들이 연원이 되는 것과 같이, 동학의 조직에서도 1에서 3, 3에서 10, 10에서 50 등으로 나뭇가지처럼 연원의 점조직이 문어발 모양을 이룬다.
예를 들어 누구인가가 아래로 여러 사람에게 동학의 심법(心法)을 전수하여 연원이 되고, 그 입신자들이 각기 연원주가 되어 다시 입신자를 만들었을 때, 위의 연원주는 접주가 된다.
이러한 접들을 이번에는 지역별로 크게 묶어서 포를 이루니 이것이 설포(設包)이다. 농민혁명 때에는 이 교구조직이 동학군의 부대편제로 그대로 이용된 것인데, 대접주들의 부대의 군단을 포라고 지칭하였다. _인터넷에서 발췌
무위당소식지 생명의 글⓶_보은취회, 한국 최초ㆍ최고의 평화적인 민중집회/장소정(편집위원)
보은취회, 한국 최초ㆍ최고의 평화적인 민중집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93년 봄, 전국의 동학도들이 충북 보은의 장내리로 향했다. 보은에 집결하라는 교주 최시형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장내리는 옥녀봉 아래 자리한 작은 산골 마을이었으나, 동학의 본부 격인 대도소가 위치해 있었고 “각처로 통하는 길이 있어” 동학도들이 모이기 좋은 장소였다. 이때 모인 인원에 대한 기록은 2만 명부터 8만 명까지 제각각이나, 한 명당 1푼씩 거두었더니 모두 230여 냥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2만 3,000명 이상이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최소 2만여 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원이, 20일 간이나 불편한 들살이를 하며 시위를 계속 했다. 농사철인 봄에 농사꾼이 시위하기 위해 길을 떠난 까닭은 무엇일까? 농사짓는 데 꼭 필요한 “소를 팔고 밭을 팔아” 여비를 마련할 정도였다면 그 이유는 무척이나 절박한 것이었을 테다.
보은에 모인 동학도들의 간절한 염원
보은집회를 해산시키라는 임무를 맡고 장내리를 찾아온 정부 측 대표, 어윤중의 장계에는 집회 현장에서 목격한 것과 동학 대표자와 나눈 문답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윤중의 기록(『동학농민전쟁자료총서』 2권, 「취어」, 64-71쪽)을 통해 보은취회에 모인 동학도들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추적해보자.
또 그들이 이르기를, 전 충청감사와 전 영장 윤영기가 결탁하여 무고한 백성을 함부로 살해하여 백성의 재물을 가로채는 일이 심했기 때문에 이번 모임이 빚어지게 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동학도들은 살기 위해 모였다. 아니 모일 수밖에 없었다. 위의 인용문에서 말하는 ‘무고한 백성’은 동학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희생당한 동학교도를 가리킨다. 신학자인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일부 부패관리는 사도를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동학교도들의 사유재산을 박탈하여 착복”하였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교인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사도’라는 딱지를 떼어버려야 했고, 이를 위해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 이런 억울한 일이 비단 동학도들에게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부패한 관리들은 온갖 이유를 갖다 붙여 백성을 수탈했고 안 그래도 가난한 백성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빼앗기고 당해도 의지할 데 없는 민초들이 동학에 들어오니, 당시 동학교도의 수가 빠른 속도로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그들의 명분은 한 나라의 서울에서 오랑캐들과 뒤섞여 우리의 이권을 축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일이므로 온 나라의 의려(義旅)들과 더불어 협력해서 물리치자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습니다.
동학도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 적힌 깃발이 내걸고 모였다. 외국세력을 물리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이다. 어윤중과의 담판에서 동학대표자가 내세운 명분도 바로 그것이다. ‘일본놈들 물러가라’, ‘외국세력 물러가라’는 외침은 십분 이해된다. 이는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으로 나가는 쌀 때문에 조선에는 쌀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는 사례만 봐도 분명하다. 그러니 외국 상인들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겠는가. 한편 동학의 집회에서 반외세를 구호로 내건 것은 보은취회가 처음이기 때문에 이를 기점으로 동학이 종교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탈바꿈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의 평가이다.
또 말하기를 이 모임은 작은 병기도 휴대하지 않았으니 이는 곧 민회(民會)라고 하며 일찍이 각국에서도 민회가 있다고 들었는데, 나라의 정책이나 법령이 국민에게 불편함이 있으면 회의를 열어 논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근자의 사례인데 어찌하여 비류(匪類)로 조치해 버리는가 하였습니다.
우선 보은취회에 모인 동학도들은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비폭력적인 민중이었다. 어윤중은 이들이 “글을 보내오면 글로서 대접하고 무력을 써오면 무력으로 대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으니, “성급하게 군대의 힘으로 처리하려”하지 말라고 임금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충북지역의 역사학자 김양식의 서술을 빌자면 “보은취회 이전에 있었던 민중봉기는 대부분 폭력적”이었으며, “비폭력 민중투쟁은 사실상 보은취회가 효시”이다.
어윤중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동학 측에서는 자신들의 모임이 ‘비류(폭도)’가 아니라 ‘민회’임을 강조하고 있다. ‘민회’라는 개념은 보은취회를 정의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것이다. ‘민회’에는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모여 의논해서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주인의식이 담겨있다. 다시 김양식의 표현을 빌자면, 보은취회는 “역사 무대에서 대중의 힘과 가치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120년 전 보은땅을 가득 메운 동학도들의 염원은 21세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용산참사 유가족들, 강정마을 주민들의 염원과 다르지 않다. 모두가 하늘이니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달라는 것이고, 그때나 지금이나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에게만 유리한 정치를 바로잡아 보자는 것이다. 억울하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싸울 수밖에 없는 민중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 당시에 이런 말들이 오가지 않았을까. “아따 우리도 똑같은 사람인데, 매양 당하고만 살 수는 없잖은가. 재물이나 챙기려는 탐욕스런 놈들은 처벌해 달라 하고, 잘못된 법은 고쳐달라고 해보세. 안 들어주면 우리 더 많이 모여서 조선팔도를 들썩거리게 해보세. 무기도 들지 않았는데 우리를 싹 다 죽일 수야 없지 않겠는가.”
보은취회 속에 숨어있는 미래가치
역사학자인 김양식은 「한국 근대 대중집회의 선구인 보은집회」라는 글에서 현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보은취회의 ‘미래가치’로 민주성, 대중성, 자주성, 혁명성, 조직성, 비폭력성, 생명사상과 평등의 가지지향성의 7가지를 꼽고 있다. 글의 서론에는 역사에 대한 통찰력 있는 제안이 들어있다.
“역사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미완성 가치개념이다. 특히 보은취회처럼 그 가치가 잠재되어 있거나 훼손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보은취회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자산을 정확히 재인식하고 그 속에 숨어 있는 미래 가치를 찾아내 현재화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은취회의 역사적 가치가 저평가되고 있다는 지적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우리는 ‘동학’하면 녹두장군 전봉준과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를 먼저 떠올린다. 교과서가 그리 되어 있어서 그렇다. 프랑스 혁명의 구호나 될 법한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가르침이 조선땅에서 나와, 고통받는 민중들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희망이 되었다는 것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나는 없다. 동학 안에 근대의 촛불집회라 할 만한 평화적인 대중집회의 씨앗이 들어있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다. 그러니 보은취회, 나아가 동학이라는 역사적 자산은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채 묻혀 있다고 하는 것이 맞다.
한살림선언 속에 들어있는 ‘한살림의 동학’은 김양식이 말한 “역사적 자산을 정확히 재인식하고 그 속에 숨어 있는 미래 가치를 찾아내 현재화”한 좋은 예이다. 장일순 선생은 동학이라고 하면 동학혁명을 떠올릴 때 수운과 해월에 주목하고 “그 본래의 생각을 오늘의 상황에 맞춰 바르게 이야기하는 일이 필요(『나락 한알 속의 우주』, 146쪽)”하다고 했다. 그리고 “산업문명으로 세계가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수운과 해월의 이야기는 시의적절한 약(위의 책, 146쪽)”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장일순 선생은 동학이라는 사상을 모으고 흩고, 다시 모으면서 지금 우리 문명의 문제를 해결할 ‘생명사상’으로 새롭게 창조해냈다. 이렇게 역사를 새롭게 읽고 창조해낼 힘이 있다면, 역사는 우리의 삶과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해답을 내어줄 수도 있다.
보은취회 120주년 기념행사
보은취회가 있은 지 올해로 꼭 120년이다. 60갑자로 세월을 헤아리는 한국문화에서 120주년은 60갑자가 2번 순환한 것이기에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행사를 준비하는 측에서도 이를 의식해서 예년보다 큰 정성을 들이고 있다. 보은 지역의 여러 단체들(장안동학농민회, 북실청년회, 삶결두레 아사달)이 힘을 합쳤고, 동학을 좋아하는 개인과 단체가 전국에서 합류했다.
진행과정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주최 측에서 행사를 기획하고 그에 맞춰 섭외를 하는 것이 보통의 방법인데, 여기는 거꾸로다. 먼저 아사달 카페와 페이스북을 통해 참여할 개인과 단체를 모집했다. 참여의사를 밝힌 쪽에서 각자가 무얼 어떻게 할 건지 알아서 기획하고 준비해서 알려준다. 자발적으로 기획된 것들을 짜맞춰서 전체 행사의 윤곽을 잡은 것은 16년째 동학 기념행사를 해온 단체 아사달이다. 아사달은 현지 네트워크를 이용해 각각의 행사를 적당한 시간과 공간에 배치하고 지역민을 묶어내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마련된 보은취회 120주년 기념행사 ‘다시 하늘 여는 길’의 일정표를 첨부한다. 4월 26일(금)부터 5월 4일(토)까지 9일 간 보은에 가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121동학보은취회<사람이하늘이니>
동학, 소풍가는 길
120년전!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꿈꾸는
척양척왜 보국안민 깃발 아래
스스로 죽창이 되어 방방골골 골짜기 마다
진달래로 피어났으니
오늘 우리
그 고운 진달래꽃을 찾아
소풍을 간다
민들레, 진달래, 맨드라미, 쑥부쟁이,
강아지풀, 개망초, 참나리, 초롱꽃
어우러진 들판을 찾아
소풍을 간다
풀빛숨결 꽃내음 바람결 따라
소풍을 간다.
121동학보은취회<사람이하늘이니> 동학, 소풍가는길
■ 121동학보은취회의 의의
○ 보은집회는 19세기 말 외세에 민족의 자주권이 침탈당하고 탐관오리의 폭정이 이어질 때 1893년 3월11일(음) 이 땅의 동학민중이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깃발을 내걸고 열었던 집회임.
○ 또한, 보은집회는 그 동안의 민란적 성격과는 다르게 확실한 조직과 이념을 가지고 사회변혁의 깃발을 높이 든 민족사 최초⦁최대의 민주⦁민중집회로서 동학민중혁명의 모태로 한국 근대 민족⦁민중운동의 벼리임.
○ 보은 북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전투가 일어난 곳으로 이 땅의 해방을 위해 산화한 동학민중의 넋이 깃들어 있는 곳임.
○ 혁명 당시 대도주 해월 최시형선생의 대동원 기포령은 의견을 달리 했던 두 세력이 외세에 맞서 민족대단결로 전쟁을 선포한 것으로 오늘날 남북관계에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큼.
○ 2014년 올해는 동학민중혁명 120돌을 맞아 동학민중혁명을 기림과 동시에 새로운 변혁의 물꼬를 틈.
■ 과 녘
‘사람이하늘’이라는 우리 민중의 참된 얼을 되살리기 위하여 그 얼이 깃든 보은집회와 동학민중혁명의 뜻을 기리며 나와 관계 맺은 모든 것들을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심과 섬김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늘•땅•사람이 더불어 행복한 생명살림의 두레세상을 일구어내고자 함.
■ 외 침
❍하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모여보세!
❍하나, 새로운 몸짓으로 즐겁게 놀아보세!
❍하나, 새로운 기운으로 힘차게 살아보세!
■ 밑 흐 름
○ 동학보은취회는 열린마당으로 함께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각자 스스로 일을 꾸미고 꾸리며 즐긴다.
○ 보은취회는 '생명살림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서로의 마음이 맞닿아 있다.
○ 내안의 할숨이 하늘과 맞닿고 다른 이와 맞닿아 새로운 할숨꽃을 피운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은취회는 '늘어짐'과 '열림' '하지 않음'으로 반역한다.
■ 추진방향
○ 동학민중혁명 120돌을 기리고 새로운 변혁의 방법을 모색.
○ 청소년 락樂풍류마당을 번지르르하게 하여 청소년을 통한 취회와 혁명의 계승방법을 모색.
○ 함께 할 수 있는 여러 행사와 연대하여 취회판의 분위기를 살리고 폭을 넓힘.
■ 취회숨결
○ 보은취회는 '생명살림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서로의 마음이 맞닿아 있음(기원)
○ 내안의 생명이 하늘과 맞닿고 다른 이와 맞닿아 새로운 공동체의 생명꽃을 피움 (신명)
○ 경쟁의 사회에서 보은취회는 '늘어짐'과 '열려짐' '하지 않음'으로 뒤집음 (전복)
■ 사업대강
○ 들살이기간 : 2014. 05. 30(금) ~ 06. 08(일)【10일간】
○ 주요행사기간 : 2014. 06. 05(목) ~ 06. 08(일)【4일간】
○ 장소 :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보은일대(보은뱃뜰공원,장안취회지등)
○ 주최 : 보은취회접주모임,
○ 주관 : 121동학보은취회추진위원회, 락樂풍류마당추진위원회, 삶결두레 아사달, 들밥풀이당, 극단 꼭두광대.
○ 함께하는이 : 개벽신문,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예술마당 솔, 천도교대학생단총동문회,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 통일세상 수요모임 준비위원회,(살림연대, 충북녹색당. 기대리 선애빌마을, 보은귀농취촌협의회, 한울연대.충북민예총, 민극협 한살림 괴산, 한살림 대전, 한살림 부산, 한살림 청주, 충북NGO센터, 생명평화결사,)
○ 판거리 : 들살이, 청소년 락樂풍류마당, 들밥정지간, 동학주막, 답사, 사람책, 맞이마당, 역사맞이굿, 전시마당, 체험마당, 붓사위퍼포먼스 등.
■ 121동학보은취회 추진위원
○ 공동추진위원장 : 연오랑 김현식, 김용우
○ 사무국장 : 봄길 하혜영 (간사: 박찬희)
○ 연대협력국장 : 아시반 박달한
○ 실행국장 : 기지개 기만서
○ 추진위원 : 빛살 김재형, 바우솔 김진호, 리산 권은숙, 여천 박한용, 쥐똥 이광호, 팔공 이상환, 산딸 이순익, 복실이 이윤복, 장철기, 설화제 최우
■ 121동학보은취회 판거리(안)
판거리 |
속 알 |
진행단위 |
담당접주 |
진행기간 |
맞이마당 |
참가자들의 자유로운 인사 이어가기 |
추진위원회 |
복실이 이윤복 |
06.05 |
들살이 |
산책, 명상, 답사등 기타 자유로운 들살이 |
보은취회접주모임 |
팔공 이상환, 설화제 최우 |
05.30~06.08 |
청소년 락樂풍류마당 |
청소년 대상의 공연, 체험, 교육 |
락樂풍류마당 추진위원회 |
빛살 김재형 |
06.05~06.07 |
들밥정지간 |
보은취회시 들밥들풀쌈 체험 |
들밥풀이당 |
산딸 이순익 |
06.05~06.08 |
동학주막 |
주막체험 |
들밥풀이당 |
산딸 이순익 |
06.05~06.08 |
역사맞이굿-1894, 그날의 함성 |
기념공원 전체를 무대로 한 역사맞이굿 |
삶결두레 아사달 극단 꼭두광대 |
장철기 |
06.06 |
사람책 |
사람이 책이 되어 책을 만나고자하는 하는 참가자와 교류하는 장 |
추진위원회 |
||
전시마당 |
스마트폰사진전시, 참가자 개인전시 등 |
추진위원회 |
05.30~06.08 | |
체험마당 |
드림캐쳐만들기, 새끼꼬기, 붓글씨쓰기 등 |
추진위원회 |
쥐똥 이광호 |
06.05~06.08 |
붓사위퍼포먼스 |
추진위원회 |
바우솔 김진호 |
||
우리마을 1894 |
지역학생들이 지역의 역사를 체험 |
삶결두레 아사달 |
아시반 박달한 |
|
민회마당 |
지역발전 토론회 등 |
보은귀농귀촌협의회 |
제안 |
|
답사 |
해월발자취 답사 월 1회 |
예술마당 솔 |
확정 |
3월~6월 |
동학초막 |
취회초막, 한데부엌설치, 체험 |
(사)국제온돌학회 |
협의중 |
05.30~06.08 |
생명평화야단법석 |
생명평화를 지향하는 단체 및 사람들의 교류 |
생명평화결사 |
제안 |
06.06~06.07 |
지역사회활동가대회 |
충북지역 사회활동가 대회 |
충북NGO센터 |
제안 |
|
동학120주년생명평화보은북실굿 |
민족극한마당 |
극단 꼭두광대 (사)한국민족극운동협회 |
협의중 |
06.05~06.08 |
■ 참가신청
○ 참가자격
- 보은취회의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이나 단체
- 생명살림의 삶을 꿈꾸는 사람이나 단체
- 할 일 없이 지 멋대로 놀고 싶은 사람이나 단체
○ 참가문의
- 신청내용 :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하고자하는 일
- 다음카페 : 삶결두레 아사달 http://cafe.daum.net/asadala
- 페이스북 : 동학보은취회(http://www.facebook.com/#!/groups/249595975125489/)
- 손전화 : 박찬희 010-4712-9419/ 봄길하혜영 010-4859-1993
○ 참가비 : 개인 12,000원
(접주: 보은취회의 뜻을 함께하며 생명살림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
■ 보은취회 <사람이하늘이니> 발자취
1998. |
11.21 |
4331솟대장승굿<하늘이열리고-이땅에지킴이가서다> |
1999. |
11.13 |
4332보은동학굿<북실진달래-동학으로가는길> |
2000. |
10.22~10.29 |
4333보은동학굿<사람이하늘이니_동학농민혁명만세> |
2001. |
01.11 |
4334북실기림굿 |
|
10.26 |
4334보은동학굿<사람이하늘이니-서로살림> |
2002. |
01.29 |
4335북실기림굿 |
|
08.31 |
임오년 보은취회_우리쌀지키기 |
|
10.25 |
4335보은동학굿<사람이하늘이니-사람섬김> |
2003. |
04.11~04.13 |
4336보은동학굿<사람이하늘이니-다시하는보은취회"쌀"> |
2004. |
04.24~04.25 |
4337보은동학굿<사람이하늘이니-보은동학학교> |
|
08.27~08.30 |
4337동몽접장학교 |
2005. |
01.25 |
4338북실기림굿 |
|
04.16~04.17 |
4338보은동학굿 <사람이하늘이니-아이들이자라나는것은 생명이 피어나는것이다> |
|
10.22~10.23 |
4338사람하늘굿<사람이하늘이니-살림살이하늘이어라> |
2006. |
01.14 |
4339북실기림굿<진달래고운꽃잎으로 다시피어나소서> |
|
04.08~04.09 |
4339보은동학굿<사람이하늘이니-춤추며놀자> |
2007. |
04.14~04.15 |
4340보은동학굿<사람이하늘이니-생명평화보은취회> |
2008. |
04.26~04.27 |
4341보은동학굿<사람이하늘이니-춤추며놀자> |
2009. |
04.11~04.12 |
4342보은동학굿<사람이하늘이니-진달래숨결따라> |
2010. |
04.09~04.10 |
4343보은동학굿,사람이하늘이니-보은동학학교> |
2010. |
07.29~12.30 |
보은동학길 조성사업 |
2010. |
10.16 |
보은동학 한일 시민교류 |
2011. |
04.08~04.16 |
4344보은동학굿<사람이하늘이니-아이들이 걸어가는 보은동학> |
2011. |
11.03 |
보은동학 한일 시민교류 |
2012. |
04.13~04.21 |
4345임진년 보은취회 |
07.11 |
4345보은동학 기림굿 | |
11.04 |
120돌보은취회워크숍<남도끝자락순천에서 120돌보은취회 길을묻다> | |
12.01~12.02 |
120돌보은취회맞이 동학100일순례 토론회 | |
2013. |
04.26~05.04 |
120돌 동학보은취회<사람이하늘이니-다시하늘여는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