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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영토 위에......
'민들레의 영토'라는 말이 그냥 좋았습니다.
함께 지내다 돌아가신 수녀님의 신발을 보며 다시 작별인사를 하기도 하고
슬쩍 가져다가 신는다는 말이 남아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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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과 기도의 시
-이해인 (시인, 수녀)
부끄러움 없는 맑고 밝은 삶을 향해
일군의 평론가들에 따르면, 문학사 안에서 시인들을 '대시인(major poet)'과 '소시인(minor poet)'으로 분류하기도 하더군요. 단테 타고르 등 이름 앞에 시성(詩聖) 칭호가 붙은 시인들은 대시인일 것이며, 대부분의 평범한 시인들은 소시인에 속할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저는 소시인 중의 소시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저는 감히 시인이라 부르기보다는 늘 다른 이들의 좋은 글들을 즐겨 찾아 읽는 독자의 입장에 서고자 했습니다. 저를 지칭할 때 꼭 따라다니는 수녀시인 또는 시인수녀라는 말이 저는 듣기 좋습니다.
이 강좌를 준비하면서 헤아려 보았더니, 지난 24년 동안(1976-2000) 여섯 권의 시집과 한 권의 동시집을 통해서 약 500편의 시를, 그리고 세 권의 산문집을 통하여 약 200편의 산문을 발표한 셈이더군요. 이렇게 700여 편의 작품을 세상을 향해 내보낸 셈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천 명이 한 번 읽고 마는 시보다는 한 명이 천 번을 즐겨 읽을 수 있는 시를 쓰길 바란다"고 당부한 적이 있는데, 제가 낳은 500여 편의 시들 중에서 과연 몇 편이나 쓸모가 있을까 생각하면 부끄러워집니다.
윤동주의 [서시(序詩)]는 한결같이 한국인의 애송시로 빛나는 있습니다만, 저 역시 서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죽은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고 노래한 첫줄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주었던 감이 로운 기억은 지금도 새롭습니다. 돌아보면 부끄러움 없는 맑고 밝은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의무감이 제 십대 시절을 많이 지배했습니다. 한편의 좋은 시는 이렇듯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히 국민시인인 윤동주와 저를 비교할 순 없지만, 1976년 첫 시집을 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십수 년 동안 제 시집은 요란한 광고를 하지 않고도 놀라우리만큼 꾸준하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독자들의 사랑과 함께 {민들레의 영토}를 비롯한 제 시집들은 판을 거듭해 왔습니다. 또한 제가 속한 수도원에는 제법 톡톡한 인세(印稅)로 재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같이 수도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때로 등록금 등이 내기 어려우니 무이자로 몇백만 원만 꾸어달라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합니다. 그런 편지를 받을 때면 마음이 퍽 안 좋을 때가 많습니다. 개인통장이 없는 무소유의 삶을 그분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저를 난감하게 만들곤 합니다.
1980년대 초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상재에 즈음하여서는 종로서적과 교보문고 등에서 제 시집들이 계속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 있을 때는 저를 여간 힘들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훌륭한 시를 쓰는 다른 시인들께 죄송하고 민망한 나머지 '주님, 제발 제 책이 좀 안 팔리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는 기도를 한 적도 있습니다. 중세의 수도자들이 이른바 '언노운(unknown)', 즉 익명으로 글을 냈는지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름이 알려짐으로 해서 빚어지는 일들, 영화를 만들겠다고 찾아오는 등 번거로운 일들이 저의 수도생활을 힘들게 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책이 크게 베스트셀러가 되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자 일부 평론가들은 신문에 [잘 팔리는 시인] 따위의 제목으로 칼럼을 싣기도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면서, 솔직히 저는 조금은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이 제 글을 읽는 독자들은 다 소녀 취향적이며 감성적이라는 식의 해석으로 몰아붙이는 듯해서 저는 제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미안했고, 시집을 출간한 것을 후회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저는 시 공부도 본격적으로 안했고 이름 있는 지면을 통해 등단한 것도 아니며 시를 쓸 적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익히 알고 있어서 스스로 썩 훌륭한 시인으로 자처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형편없는 시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전엔 겸양의 뜻으로 그런 표현을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만...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숲의 나무들, 정원의 꽃들이 제각기 다른 고유의 모습으로 아름답듯 이 시를 노래할 때 저만이 할 수 있는 몫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부모님께 물려받은 표현의 능력이 뒷받침 해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꽃밭에는 해바라기도 있고, 제비꽃도 있고, 민들레도 코스모스도 있는 것처럼, 나만의 음성과 색깔을 지닌 개성 있는 시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여 년간 제 시를 읽고 보내오는 독자들의 편지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거의 다 '수녀님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다', '내 영혼이 치유되는 것 같다', '나를 기도하고 싶게 만들고, 실망해서 멀어졌던 교회와 하느님께로 가고 싶다', '읽으면 괜히 마음이 편안해지고 내가 쓴 것 같다' 등의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대개 맑고 순결한 시, 마음이 부대낄 때 읽으면 위로와 기도가 되는 시, 그리 어렵지 않게 친숙하고 편안하게 읽히는 시-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수녀원을 방문한 어떤 중년신사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시가 있어 꼭 지은이 앞에서 외우고 싶다면서, 제가 쓴 [파도의 말]이라는 시를 큰 소리로 읊어 주었습니다.
울고 싶어도/못 우는 너를 위해/내가 대신 울어줄게/마음놓고 울어줄게//
오랜 나날/네가 그토록/사랑하고 사랑 받은/모든 기억들/행복했던 순간들//
푸르게 푸르게/내가 대신 노래 해 줄게//일상이 메마르고/무디어질 땐/
새로움의 포말로/무작정 달려올게
다른 이의 목소리를 통해 이 시를 들으니 매우 새로웠고, 한 사람의 수도자로서 이 시대를 산다는 것은 마음놓고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주는 것, 기쁠 때 대신 웃어주는 것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시라는 것이 나름대로 치유와 위로의 역할, 천사의 역할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시의 힘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으로, 편지로, 방문으로… 요즘 저에겐 시를 읽고 시키는 다양한 독자들의 다양한 심부름들이 하도 많아 도우미가 필요할 정도입니다. 때로는 좀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시가 많은 인연을 맺어주고 좋은 일들, 때로는 치유와 위로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시의 숨은 힘이랄까요. 날개 달린 천사로 시가 날아다니며 기쁜 이들, 슬픈 이들, 외로운 이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것이지요. 어린 시절 저는 외교관의 부인(우리 시대 소녀들의 희망사항?)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요즘 생각하면 어떻게 시보다 더 좋은 외교를 할까 싶습니다.
시는 구체적 삶의 체험에서 얻어지는 열매
저의 문학에 대한 관심은 초등 학교 시절 책읽기에서 시작되었고 거의 매일 헌책방에서 책을 빌려 다 읽곤 문학적인 상상의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벌써 이 때 조금씩 습작을 해보거나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대하소설을 친구와 더불어 공동으로 구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여주인공 이름이 옥란이?)가끔 백일장에서 입상을 한 것, 국어시간에 늘 성적이 좋았던 것, 음악시간에 노래는 가사 전달이 중요하다면서 음악선생님께서 노랫말 낭송을 단골로 제게 시켰던 것(그 때 라이벌로 같이 시를 낭송한 40년 전의 친구도 이 자리에 왔습니다)들이 자연히 문학을 더욱 가까이 하게 만들었고,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좋은 글들을 읽고 오려서 스크랩북 만드는 것이 즐거운 취미였습니다. 지금도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주제별로 가려뽑은 시들을 읽히고 애송시문집을 만들게 하면서, 저는 시를 읽는 행복을 만끽합니다. 제 남은 생애를 '누구에게나 시 읽어주는 여자(어머니)'로 살아야지 하면서 시를 소리내어 읽던 어린시절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며칠 전에도 어느 시각장애인이 자기들 전용사서함에 제 목소리로 시를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걸 듣고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수도생활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으실 텐데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후에 우리집 홈페이지(www.osboliv.or.kr)를 열어 보셔도 됩니다. 저희의 날질서는 새벽 5시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기도하고 일하는 삶이고 이 모두가 사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더 많이 하는 곳도 있으나 저희는 적어도 하루에 다섯 번 함께 모여 성무일도라 부르는 공동기도를 하는데, 이 기도 내용은 구약의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수도생활이야말로 잘만 하면 가장 시적인 삶이구나 하고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시는 관념이나 추상적인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체험에서 얻어지는 열매임을 새롭게 기억하면서 저는, '당신을 위한 나의 기도가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당신 안에 숨쉬는 나의 매일이 읽을수록 맛드는/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때로는 아까운 말도 용기 있게 버려서 더욱 빛나는/한 편의 시처럼 살게 하소서…'라고 노래해 본 적이 있습니다.
기도, 묵상, 식사, 수업, 청소, 설거지, 풀뽑기, 수놓기, 편지 쓰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원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수도생활의 묘미를 저는 요즘 더욱 체험하고 있습니다. 수도생활 초기에는 맛보지 못했던 깊은 고요와 담백한 평상심으로 삶 그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고 할까요. 세상에서 물러나 있으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관심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신문도 열심히 읽고 손님들의 이야기에도 귀기울이면서 마음의 창문을 열어둡니다. 신문을 읽다가 기도가 필요한 기사는 제가 오려서 수도가족들이 함께 보는 게시판에 붙여두곤 합니다.
수도생활을 하면서 언제 시를 쓰고 어떻게 다듬느냐고 묻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요. 요즘은 시작을 거의 못하고 지냅니다만, 그래도 혹시 시상이 떠오르면 김장김치 만들 듯 익혀서 되도록 기다리는 시간을 오래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문득 떠오른 단편적인 시상의 일부를 주머니 속 메모지에 적어두고, 오며가며 그것을 발전시키고 익혀서 하나의 시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지면 침대 밑에 둔 연습장에 다 잠들기 전에 적어둡니다. 그리고 한 동안 잊어버렸다가 다시 꺼내 고치고…. 이상한 버릇은 깨끗한 종이보다는 허름한 종이에 써야 잘 써진다는 것입니다. (예전엔 주사약 설명서 요즘은 신문 사이에 끼어진 이면지를 자주 사용합니다) 특별한 기념시 외엔 원고청탁을 받고 시를 쓰는 일이 드물고 대개는 김치처럼 미리 담그었다가 필요할 적에 꺼내 다시 마무리하지요.
수도원의 규칙적인 생활에서 길러진 습관인지 시를 쓸 때는 특히 첫연과 끝연에 마음을 많이 쓰는데 이는 예전에 문예반 지도선생님의 주의사항이 마음에 깊이 새겨진 영향인 듯 싶습니다. 이미 이 자리를 다녀가신 다른 작가들께서 시의 중요성, 시를 쓰는 법, 시의 역할 등에 대해서 좋은 말씀을 많이 들려주셨기에 저는 그 동안 제가 쓴 시집들에서 임의로 몇 개를 골라 여러분과 나누고 이 시에 담긴 제 삶의 지표나 상징들을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해바라기 연가(1975/{민들레의 영토}):
내 생애가 한 번뿐이듯/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나의 임금이여/폭포처럼 쏟아져오는 그리움에 목메어/죽을 것만 같은 열병(熱病)을 앓습니다//당신 아닌 누구도/치유할 수 없는/내 불치(不治)의 병은 사랑//이 가슴 안에서 올올이 뽑은 고운 실로/당신의 비단 옷을 짜겠습니다//빛나는 얼굴/눈부시어 고개 숙이면/속으로 타서 익는 까만 꽃씨/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하나가 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나의 임금이여/드릴 것은 상처뿐이어도/어둠에 숨지지 않고/섬겨 살기 원이옵니다.
이 시는 많은 독자들, 특히 젊은층의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연시인데, 저의 경우엔 제가 선택한 수도자의 길을 한마음으로 한결같이 살겠다는 사랑과 믿음의 의지를 해바라기꽃의 입을 통해 뜨거운 마음으로 고백해 본 기도의 노래입니다. 신께 드릴 비단옷을 마음 바꾸어 인간의 옷으로 돌려서 짜지 않은 것, 드릴 것은 상처뿐인 허물투성이의 부족한 사람이지만 이 어둠에 숨지지 않고 섬겨 살아온 긴 세월들에 스스로 흐뭇하고 대견해져서 이 시를 고마운 마음으로 가끔 읽어봅니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신께 대한 헌신과 찬미의 노래 {기탄잘리}를 읽고 황홀했던 한 소녀가 드디어 타고르가 노래한 님의 갈피리를 조금은 닮게 되었다는 기쁨을 몇 년 전 타고르가 {기탄잘리}를 쓴 장소에 가서 구체적으로 느끼며 행복했습니다. 이 시는 아마도 저의 최초의 {기탄잘리}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합니다.
2)우산이 되어(1978/{내 혼에 불을 놓아}):
우산도 받지 않은 쓸쓸한 사랑이/문 밖에 울고 있다//누구의 설움이 비되어 오나/피해도 젖어 오는 무수한 빗방울//땅 위에 떨어지는 구름의 선물로/죄를 씻고 싶은/비오는 날은 젖은 사랑//수많은 나의 너와/젖은 손 악수하며/이 세상 큰 거리를/한없이 쏘다니리//우산을 펴주고 싶어 누구에게나/우산이 되리/모두를 위해
이 시는 생활성가 가수 김정식씨가 노래로도 만들었는데, 참으로 catholic(보편적)적인 넓은 마음으로 문을 열고 누구에게나 좋은 이웃이 되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습니다. 인도에서 직접 만난 일이 있는 마더 데레사처럼 제가 빈민가에서 직접적인 봉사는 못하고 있지만, 때로는 저 혼자 감당하기 힘들만큼 '수많은 나의 너'를 만나게 되고 갖가지 사연으로 비 맞고 있는 그들에게 씌워 줄 우산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정신적 육체적 장애인, 교도소의 수인들, 자기가 만든 퇴폐적인 삶을 스스로 괴로워하며 도움을 청하는 청소년들, 그리고 가정불화로 상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시간 없다고 외면하지 않도록, 요즘은 다른 이와 연결해서 작은 도움이라고 주는 심부름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우산을 씌워 주어야 할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생기는 것 같아 자다가도 문득 눈물이 나는 요즘입니다.
어쩌다 외부에서 특강을 하면 제게 무슨 힘이 있다고 가족상황을 자세히 써주며 기도를 청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사인을 해드릴 때면 꼭 삶에 힘이 되는 좋은 말을 써달라고 부탁해오곤 합니다. 든든한 빽으로 제가 믿는 하느님이 큰 우산이 되어주셔야, 저도 작은 우산 노릇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수녀2 (1983/{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크고 작은 독 속에/남모르게 익어가는/간장 된장 고추장//때가 될 때까진 갑갑해도/숨어살 줄 아네//수도원은/하나의 커다란 장독대//너도 나도 조용히/독 속에 내뿜는/저마다의 냄새와 빛//더러는 탄식하며/더러는 노래하며//제 맛을 낼 때까진/어둠 속에 익고 있네/즐겁게 기다리네
제가 사는 부산 광안리 수녀원에서 여름엔 저녁에 겨울엔 낮에 기도 후 식사 전에 음악을 틀어놓고 다 함께 체조를 합니다. 바다가 잘 보이는 베란다에서 체조를 하다 보면 장독대가 보이는데, 어느날 문득 수백 개의 항아리 속에서 부글부글 끓으며 냄새를 피우며 익어가고 있을 간장 된장 고추장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써 본 시입니다.
사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 생활은 그 자체가 커다란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하바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인 현각스님의 스승으로 더욱 유명해진 숭산스님의 서한집 {오직 모를 뿐}이라는 책을 보면 여럿이 함께가 아니고 늘 혼자만 지내기를 즐기는 수행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감자를 씻을 때 커다란 물통에 넣고 막대기로 저어 함께 부딪치며 깨끗해지는, 예를 들어 수도자는 함께 살면서 함께 정화되는 연습을 잘해야 참된 도에 이를 수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이 글을 읽고 깊이 공감한 저는 저와 함께 사는 이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설령 마음에 안드는 냄새가 나더라도 그것은 자신 안에도 지니고 있는 냄새임을 알아들으며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합니다. 다른이의 냄새가 싫다고 지금의 자리를 비켜가면 또 다른 냄새가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 듯 합니다. 일반 가정에서건 수도원에서건 우리가 세상에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의 냄새를 싸우지 말고 평화적으로(?)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옆에서 떠난 후에야 후회하지 말고 현재 함께 있을 적에 진심으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면 우리의 삶이 훨씬 더 풍요롭고 아름다워지리라 믿습니다. 사랑은 가벼운 감상이 아니라 선을 향한 싸움이어서 때로 힘들고 무겁기도 하다는 것을 저도 새롭게 배웁니다.
4)낡은 구두(1989/{시간의 얼굴}):
내가 걸어다닌 수많은 장소를/그는 알고 있겠지/내가 만나 본 수많은 이들의 모습도/아마 기억하고 있겠지//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던 그는/내가 쓴 시간의 증인/비스듬히 닳아버린 뒤축처럼/고르지 못해 부끄럽던 나의 날들도/그는 알고 있겠지//언제나 편안하고 참을성 많던/한 켤레의 낡은 구두/이제는 더 신을 수 없게 되었어도/선뜻 내다버릴 수가 없다//몇 년 동안 나와 함께 다니며/슬픔에도 기쁨에도 정들었던 친구/묵묵히 나의 삶을 받쳐준 고마운 그를
수도원에서는 다른 물건도 마찬가지이지만 신발을 아주 오래 신는 편인데, 어느날 제가 낡은 신발을 버리려다 왠지 서운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비스듬히 닳아버린 뒤축이 부끄럽기도 하고 정겹기도 하면서 제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해주는 한 사물을 만난 것이지요. 주위의 사물에 대해서도 늘 진실하고 고맙게 따뜻한 마음을 지니면 이렇게 시를 낳아줍니다. 제가 즐겨 읽는 권영상님의 동시집에서 '나와 헤어지기 싫어 내 몸에 꼭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 이라는 표현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느낀 일이 있습니다. 옷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보고 저는 한 번도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한 적이 없었거든요.
이렇게 긍정적이고 따뜻한 마음에서 따뜻한 시가 빚어지는 것일 테지요. 아무리 실내가 어두워도 자기 신발은 잘도 찾아 신는 모습을 볼 적마다 신기한 느낌이 듭니다. 함께 살던 수녀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저는 꼭 그분이 쓰던 방에 가서 그가 마지막까지 신었던 신발을 눈여겨보며 다시 작별 인사를 고하고 때로는 슬쩍 가져다가 신기도 합니다.
5) 1. 별을 보며(1992/동시집 {엄마와 분꽃}):
고개가 아프도록/별을 올려다 본 날은/꿈에도 별을 봅니다/반짝이는 별을 보면/반짝이는 기쁨이/내 마음의 하늘에도/쏟아져 내립니다/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혼자일 줄 아는 별/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는 별/나도 별처럼 살고 싶습니다/얼굴은 작게 보여도/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먼데까지 많은 이를 비추어주는/나의 하늘 친구 별/나도 날마다 별처럼 고운 마음/반짝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2. 달을 닮아({엄마의 분꽃})
박꽃에 스미는 달빛/달맞이꽃에 스미는 달빛/그대로/내 마음에 스며드네/밤새/달빛 안고/잠을 자다/아침에 일어나면/나는 달을 닮아/마음도 고요하고/부드러워지겠네/햇빛 또한 잘 받겠네
별과 달은 저의 시에도 무척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입니다. '별을 보며'는 어느 날 밤 꿈 꾼 이야기를 그대로 적은 것인데, 후에 초등학교 국어(읽기) 교과서에 실리게 되어 어린이들이 낭송하는 걸 여러 번 듣고 반가웠습니다. '홀로' 이면서도 '함께' 하며 성숙해 가는 인간의 아름다운 의무를 별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 것이고 반짝이는 고운 마음, 다른 존재를 늘 배려할 수 있는 넓고 큰 마음은 매일 새롭게 키워가야 되는 것임을 형상화 시켰다고 봅니다(교과서에는 이 시에 대한 몇 가지 구체적 물음이 있었는데... 저는 대답을 잘 못했습니다) 해와 별과 달은 문학이나 종교학에서 자주 아름다움과 거룩함의 상징으로 등장하듯이 카톨릭전통 안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별과 달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제 어머니가 저를 낳으실 때 달 속의 선녀를 보았다고 어찌나 시적으로 이야기하시던지 저는 은연중에 저를 달빛소녀, 달빛수녀로 생각하면서 달의 고요함과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날마다 새롭게 본받으려 애써왔습니다. '보름달'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라는 시에서도 그런 마음을 노래하였고 중학교 2학년 때 제일 처음 써서 교지에 실린 시 제목도 [달밤의 소녀]였습니다. 부산 광안리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달빛이 출렁이는 바다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마음이 부드럽고 온유해야만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할 여백이 생긴다는 것을 저는 '나는 달을 닮아 마음도 고요하고 부드러워지겠네/햇빛 또한 잘 받겠네' 라고 표현해 보았습니다.
6)쌀 노래(1997/{외딴 마을의 빈 집이 되고 싶다}):
나는 듣고 있네/내 안에 들어와/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는/한 톨의 쌀의 노래/그가 춤추는 소리를//쌀의 고운 웃음 가득히 흔들리는/우리의 겸허한 들판은/꿈에서도 잊을 수 없네//하얀 쌀을 씻어/밥을 안치는 엄마의 마음으로/날마다 새롭게/희망을 안쳐야지//적은 양의 쌀이 불어/많은 양의 밥이 되듯/적은 분량의 사랑으로도/나눌수록 넘쳐나는 사랑의 기쁨//갈수록 살기 힘들어도 절망하지 말아야지/밥을 뜸들이는 기다림으로/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희망으로/내일의 식탁을 준비해야지
매일 매일 우리의 주식인 밥을 먹으며 오늘까지 생명을 이어왔다고 생각하니 새삼 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가득해서 표현해 본 시입니다. 어쩌다 해외에 나가면 얼마나 더 우리의 쌀로 지은 밥이 그립든지 참기 힘듦을 여러번 경험하였습니다. 쌀이야말로 생명과 희망과 기쁨의 상징임을 요즘은 더욱 새롭게 알아듣게 됩니다. IMF체제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작은 규모로 시작한 무료급식소에 가서 일하다 보면, 사람들이 식사시간에 자기 몫의 음식을 받아 갈 때 반찬은 적어도 좋으니 '밥만 많이 달라' 고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외치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저는 쌀에 대한 묵상을 더 많이 하게 되었고 쌀이나 밥이라는 단어가 예사롭게 들리질 않습니다. 적은 양의 쌀로 많은 양의 밥이 되듯 나날의 삶 속에서 우리 서로 작지만 따뜻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도하면서 이 시를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바다, 별과 꽃과 구름에 대한 노래를 저도 시에서 상징언어로 많이 읊어왔지만 낭만적으로만 자연예찬을 하기엔 지금 우리에게 처해진 현실이 너무 절박함을 느낍니다. 날마다 생계 걱정을 해야하는 이들을 기억하면 시를 쓰는 일마저 사치로 여겨져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의 이미지도 좀 더 일상생활 안의 어느 것에서 찾아야될 것 같은 의무감을 갖게 됩니다.
'통째로 삶은 감자를 한 개만 먹어도/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넉넉해지네/고구마처럼 달지도 않고/호박이나 가지처럼 무르지도 않으면서/싱겁지는 않은/담담하고 차분한 중용의 맛/화가 날 때는/감자를 먹으면서/모난 마음을 달래야겠다'고 쓰기도 했지요. 제가 써온 서정시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가능하면 앞으로는 이웃이 겪는 삶의 아픔을 대신 노래해주는 시를 더 많이 쓸 수 있기를 저 스스로에게 기대해 봅니다.
7)새(1999/{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아침마다/나를 깨우는 부지런한 새들//가끔은 편지 대신/이슬 묻은 깃털 한 개/나의 창가에 두고 가는 새들//단순함, 투명함, 간결함으로/나의 삶을 떠받쳐준/고마운 새들//새는 늘 떠날 준비를 하고/나는 늘 남아서/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사랑할 땐 별이 되고}라는 산문집에도 제가 소개를 했지만 세상의 모든 새가 다 자기 아이라고 하면서 새를 돌보는 일본의 와키다 가즈요 여사(제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로 알게 된)와의 친교로 인해 저도 새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고, 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 글에도 새가 자주 등장합니다. 일부러 철새 도래지에도 가보고 이름을 알고 싶어 조류도감(鳥類圖鑑)도 자주 들여다보는데 우리 수녀원에도 꽤 많은 새들이 놀러옵니다. 잔디밭이나 언덕이나 제 방 창가에 새들이 떨어뜨리고 간 깃털을 보면 왜 그리 마음이 아련한지요. 바닷가에 나갔다가 모래 위에 찍힌 물새 발자국을 볼 때도 그렇구요. 흔히 새는 자유의 상징으로 표현되지만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얼마나 절제하고 고독해야 하는지…. 그런 걸 생각하면 문득 눈물겨울 때가 있습니다.
저도 피곤하면 종종 늦잠을 자기도 하지만 수녀원의 종소리 못지 않게 새소리에 잠을 깰 적도 많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언니가 계시는 가르멜 수녀원에 놀러 갔다가 숲속의 새소리를 듣고 너무도 황홀해서 순간적으로 천국을 맛 본 일이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다 길이 되고 축소된 한 생애라고 할 때, 가벼운 새들은 무거운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기쁨과 희망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오늘밖엔 없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라고 새들이 떠나면서 일러주는 말을 저는 여러 번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비가 내리면 새들의 소리를 듣기가 쉽질 않아 '고운 새는 어디에 숨었을까?' 하는 구절을 어는 산문에 쓴 것이 그대로 책 제목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고운 새, 행복한 새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시의 학교 학생이 되어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필요한 만큼만 둥지를 틀며/욕심을 부리지 않는 새처럼/당신의 하늘을 날게 해 주십시오/가진 것 없어도 맑고 밝은 웃음으로/기쁨의 깃을 치며/오늘을 날게 해 주십시오/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먼 길을 떠나는 철새의 당당함으로/텅 빈 하늘을 나는/고독과 자유를 맛보게 해 주십시오'로 이어지는 '가난한 새의 기도' 라는 시가 있는데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줌마가 이 시를 커다란 색종이에 써서 붙여놓고 일한다는 이야길 전해 듣고 기뻤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진행하는 수업의 제목이 '생활 속의 시와 영성' 인데 제가 쓴 시도 이젠 시장 속으로 들어갔구나 싶어 뿌듯한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시를 쓰는 것도 예술이지만 시를 찾아 읽는 것 또한 아름다운 예술이라구요. 그래서 우리 모두 정다운 모국어로 많은 시인들이 써놓은 아름다운 시들을 더 열심히 찾아 읽고 나누는 시 읽기의 명수들이 되자고, 한 편의 시처럼 절제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자고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 시 읽기 학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입학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뜻이 통하는 이들과 함께 시작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꾸준히 계속할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겠지요.
'나는 나의 가슴속에 수백 년을 기다릴 참을성을 갖고 나의 짧은 시간을 영원한 듯이 살겠습니다. 산만함에서 정신을 집중하겠으며 성급한 응용을 버리고 내 것을 다시 불러 올 것이며 그것들을 비축하겠습니다. 사물들이 내게 말을 건네옵니다. 인간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경험합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조용히, 보다 큰 정직성을 갖고 관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수련이 모자랍니다' 라고 고백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구절로 오늘의 제 이야기를 끝맺고자 합니다. 진정 릴케의 말대로 기다림, 참을성, 정직성, 겸손함을 지니고 종이에뿐 아니라 삶에다 시를 쓰는 한 사람의 구도자로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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