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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성소와 제사 제도
신 12:1-14
1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2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3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4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5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8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9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주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
11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12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13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14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신 12:1-14 / [약속의 땅에서 지킬 ㄱ) 계명] 나는 이제 여러분의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셔서 점령하게 하실 땅에서 여러분이 꼭 지켜야 할 계명과 규정들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 땅에 사는 동안 언제까지나 유효한 법입니다. (ㄱ. 12-16장이 본래 독립된 신명기 법전이라고 한다) 2) [기본법] 여러분이 이제 쫓아내게 될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던 곳들, 곧 높은 산과 언덕과 푸른 나무들 밑에 만들어 놓은 그들의 제사처들을 모조리 허물어 버리십시오. 3) 그들의 제단들은 허물어 버리고 돌기둥 남신상을 깨뜨리고 나무기둥 아세라 여신상을 불태우고 모든 신상들을 찍어 버리십시오. 그 땅에서 더 이상 원주민들의 신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4) 여러분은 그 땅의 원주민들을 본받아 그런 제사처들을 만들어서도 안 되고 그들이 우상을 섬기던 곳에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서도 안 됩니다. 5) 오직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 가운데에서 성소로 지정하신 바로 그 한 곳으로만 찾아가야 합니다. 주께서는 그곳에서만 여러분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6) 여러분은 모든 제물을 그곳으로만 가져다가 바쳐야 합니다. 완전히 불살라 바치는 온전한 번제물, 제사 뒤에 제물의 고기를 공동으로 나누어 먹는 화목제물, 모든 농산물의 십일조, 기부금이나 기증물, 맹세로써 약속한 제물, 소와 양을 비롯한 모든 가축의 첫 새끼를 바칠 때, 7) 여러분은 바로 그곳으로 가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공동 식사를 하고 여러분이 수고한 모든 일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복 주신 것을 기뻐하십시오. 8) 우리가 오늘 여기서는 저마다 자기 소견대로 하였으나 거기에 가서는 그렇게 하지마십시오. 거기에서는 아무데서나 자기 생각대로 제물을 바쳐서는 안 됩니다. 9) 여러분이 아직까지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셔서 편안히 쉬게 하실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분의 소견대로 할 수가 있었습니다. 10) 그러나 여러분이 이제 요단강을 건너가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실 땅을 차지하고 여러분이 주님의 도우심으로 사방의 원수들을 모두 정복하여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때에 11) 그때에는 다른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그때에는 오직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그 한 곳으로만 내가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모든 제물, 곧 번제물과 화목제물과 십일조와 기부금이나 기증물과 고르고 골라서 여호와께 바치기로 서원한 예물을 가져가서 주께 바치고 12)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여러분의 자녀와 남녀 종들과 함께 기쁜 잔치를 벌이십시오. 여러분의 성읍에 사는 레위 사람들도 그 잔치에 함께 참여시키십시오. 그들은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가진 토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13) [짐승의 도살 규정] 여러분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 아무 곳에서나 제물을 바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14)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지파들 가운데에서 선택하여 주님의 성소로 지정하실 바로 그 한 곳으로만 찾아가서 주께 번제물도 바치고 내가 여러분에게 지시한 모든 예물도 바치며 거기서 잔치를 벌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 땅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규례와 율법을 알려주십니다. 출애굽기와 비교해서 더 포괄적인 사회생활의 율법 규정을 제사법 관련 규정 및 일상생활의 정결법을 함께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전 가나안 원주민들은 자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상징물을 사용해서 우상을 섬겼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유혹하는 일이었습니다.
산당과 우상 파멸(1-3)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를 알려주시기 전에 먼저 그 땅의 우상들을 완전히 제거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할 땅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될 땅입니다. 그곳의 어떤 것도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경작하고 가꾸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창 2:15).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의 터전으로 허락하신 것은 상급이 아닌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의 소유는 철저한 순종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4-8)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만 행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시내 산에서 제사 규례와 율법을 받았지만, 광야에서 그 규례가 온전히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를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더불어 제물의 종류와 제물을 드리는 방법, 드릴 때를 정하신 것은 완전한 인격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수고한 모든 것에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안식과 기업(9-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가나안 땅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하시는 기업은 그들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신뢰만 필요합니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며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차별이 없는 공평한 것입니다(12). 구별하신 레위인에게 분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그들 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 전체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지만 하나님을 섬길 유일한 장소를 지정하셨습니다. 이에는 이스라엘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며 섬김의 처소를 한 곳으로 지정하셔서 신앙으로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적용: 매일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순종하고 실천하고 있는지 당신의 삶을 점검하고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질문한다면 “예배드리는 삶”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는 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처럼 예배는 우리 신앙생활에 매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드리는 일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공동체와 함께 예배드려야 하며 진실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성전 중심의 삶
신 12:1-8 / 박기완 목사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성전 중심의 삶'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영광 거두시고 우리에게는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아버지의 집 주변에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성도의 가장 첫 번째는 성전 중심의 삶입니다.
성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성전이라고 해서 다른 건물에 비해 특별한 재료를 쓴 것은 아닙니다. 성전도 보통 건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교회의 건물을 가리켜 '성전', '거룩한 집' 또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집이라고 구별하여 부르는 이유는 세상의 다른 건물과 용도와 목적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건물들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지어졌고 사용되어지지만... 성전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요, 하나님께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은혜와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전에서 만나주시고 성전을 통하여 축복해 주신다고 말씀하시므로... 성전은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하신... 매우 소중한 곳입니다.
출애굽기 29:43절에 보면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그랬습니다.
구약시대는 회막인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너희들과 만나겠다 그랬습니다. 회막은 나중에 성전이요...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로 나뉘어 지죠.... 보이는 건물의 교회도 교회라고 부르지만, 진정한 교회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교회입니다.
주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만나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8: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정한 성전에 모이기를 힘쓸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축복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히1025).
뿐만 아니라, 성전은 하나님께서 먼저 택하여 그 분의 이름을 두신 곳이기에 특별한 곳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곳을 찾아갑니다. 높은 산이나 큰 나무, 큰 바위 등을 찾아가서 그곳에 신당을 세우고 복을 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은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정하셨습니다.
신명기 12:5절에 보면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그랬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풍수지리를 따지고... 어디가 명당인가를 찾아서 정하지만... 그러나 예루살렘성전을 세울 때 하나님은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그러셨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성별한 것입니다. 거룩히 구별했습니다.
그러므로 열왕기하 21:7절 말씀에 보면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살펴보면 온통 성전 중심으로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구별하신 곳... 하나님을 만나는 곳,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곳... 그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러면 성전 중심의 삶은 어떤 삶일까?..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1. 하나님이 택하신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첫째로, 성전 중심의 삶이란 하나님이 택하신 곳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2:5절을 보면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그랬습니다.
또 신명기 12:11절에서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 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해 이름을 두신 곳으로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몸을 드려서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어떤 분은 멀리 서울에서 산본성광교회까지 오십니다. 장위동에서 상계동에서... 수원에서 안산에서 안양에서... 오금동에서... 이렇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라!' 그러셨는데... 그 뜻은 구체적으로 섬기는 귀한 행위를 말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제사하는 것입니다.
왜 꼭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제사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무 곳에서나 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곳이 특별한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니예요...
하나님이 택하신 곳이 중요한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택하신 곳이 어디냐를 알려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 있느냐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 그곳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0:24절에 보면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그랬습니다.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란... 바로 제사가 드려지는 곳을 말합니다.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되고 이것이 신약시대이후에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로 인하여 천국을 잃어버리고 생명도 잃어 버려서... 저주와 사망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이 천국의 열쇠로 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생명과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 천국의 열쇠를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고 고백했는데, 주님은 그 믿음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마태복음 16:18∼19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랬습니다.
인생의 문제를 어디를 가도 해결할 수 없으나... 교회에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열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성전을 사모하고 성전을 기뻐해야 합니다.
몸을 가지고 시간과 정성을 드려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 나오고... 신앙을 가지고 섬김의 자리에 이를 때 천국이 열립니다.
마음이 열리면 열려진 천국에서 열린 만큼 채워집니다. 그러므로 크게 열어야 합니다. 큰 그릇, 큰 믿음을 가질 때 많이 담을 수 있습니다.
시편 81:10절 말씀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그랬습니다.
교회를 드물게 나오면, 그만큼 천국은 닫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교회와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엎어져도 교회에서 엎어져야 합니다.
싸워도 교회에 다녀온 후에 싸워야 돼요... 싸웠다고 안가면 그만큼 천국은 닫히는 것입니다. 다녀온 후에 싸우게 되면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에 싸울 수가 없게 되죠...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 나가는 일을 제일 우선으로 삼으면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신령한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둘째로, 성전 중심의 삶은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명기 12:11절에 보면, 명하는 것을 드리되 '아름다운 것을 드리라' 그랬습니다. 아름다운 것이란 정성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헌금을 드릴 때, 새 돈을 드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정성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저도 어릴 때 돈을 다리미로 다려서 헌금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고르고 골라서 제일 새 돈으로...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새 돈을 드린다고 해서 만원이 이 만원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는 거예요...
또 양복을 처음 사서 입을 때라든지 어떤 새 옷을 사서 입을 때... 제일 먼저 교회에 나갈 때부터 그 옷을 입고, 신발을 사도 교회에 제일 처음 신고 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정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명기 12:5∼6절에 보면 구약시대에는 번제, 십일조, 거제, 서원제, 낙헌 예물 등을 드렸습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헌금이 있죠... 그 중에서 하나님은 처음 것을 좋아하십니다. 물질의 첫 것은 십일조요, 날의 십일조는 주일 성수입니다.
다시 말하면... 최고의 것, 가장 좋은 것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4:26절을 보면... 첫 것, 처음 열매를 드리되 '익은 열매를 드리라!' 그랬습니다.
"너의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그랬어요...
여기서 익은 것을 드리라는 말씀은 온전한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과일도 익은 것을 먹어야지 기한이 되지 않은 것, 설익은 것을 먹으면 안 되는 것처럼... 십일조를 드려도 온전한 것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100만원의 십일조를 드려야 되는데 70만원을 드린다든지 50만원을 드린다든지 그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 익은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드려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주일성수를 하는데 주일을 온전히 드려야지 오전만 예배드리는 것은 설익은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 앞에 가장 좋은 것을 온전하게... 익은 것을 드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성전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셋째로, 성전 중심의 삶은 성전에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2:7절 말씀에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그랬습니다.
12절 말씀에서도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할 것이요..." 그랬습니다.
자녀들이 나가서 놀다가 집에 들어 와서 인상을 쓰고 있다면 좋아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나?... 어디 아픈 데가 없나?" 걱정이 됩니다. 집에 들어오면 깔깔대며 웃고 즐거워해야 좋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집에 와서 기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안아주고 위해주고... 축배의 잔을 들며 기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언성을 높이거나 싸우고 그러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큰일이죠... 하나님 앞에 축복을 가로막는 일이요... 엄히 징계를 받으며 심판 받을 일입니다.
마태복음 2:32절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그랬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앞으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엄히 다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내 집이 아니예요.. 내 집에서는 마음대로 해도 되죠... 옷을 벗어도 되고 쇼파에 기대어서 다리를 탁자에 올려놓고 가장 편한 자세로 TV를 봐도 되고... 쉬어도 됩니다.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러도 되고 신문을 보고 책을 보고...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큰 소리로 싸워도 누가 말리는 사람 없어요... 자기 집이니까...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는 곳이예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성전인 것입니다.
오늘 주보 1면에 '성전을 위한 기도'를 실었습니다만,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자마다 복을 받고... 의자에 앉은 자마다 은혜가 충만케 되고... 제단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마다 위로와 용서를 받으며... 성전에 앉아 귀를 기울이는 자마다 힘을 얻고 염려와 걱정에서 해방되는 복된 전이 되어야 합니다.
슬픔의 상복을 입고 들어왔던 자가 기쁨의 옷으로 갈아입는 곳이요, 무거운 짐에 눌려 들어온 자가... 독수리의 날개를 받아 돌아가는 복된 장소... 이 성전이야말로 하나님이 복 주시마 약속하신 복된 장소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은혜가 넘치는 복된 성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성전에 가는 것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시편 122:1절 말씀에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그랬습니다.
시편 84편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그랬습니다(시84:1, 2, 4).
얼마나 마음과 육체로 성전을 사모했는지 쇠약했다고 그랬습니다.
또 10절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하는 것보다 '어디서 살았느냐?' 하는 장소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아담을 향하여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개야... 어디에 있었느냐?"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서 '악인의 장막'은 하나님이 없는 곳을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주인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의 문지기가 더 좋다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런 고백과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레위인을 져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넷째로, 성전 중심의 삶은 레위인을 져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사람입니다. 신약시대에도 성전에서 일하는 일에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업을 주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토지를 분배할 때 이들은 기업을 받지 않았습니다(신10:9). 생업이 없이 하나님을 위한 봉사만 맡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그들에게 맡기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보살피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면 그 축복이 그대로 임하도록 축복권을 주셨습니다(겔44:30,약5:14).
신명기 10:8절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9절에 보면 "내가 그의 기업이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신명기 12:12절에 보면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찌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그랬습니다.
"너희들만 그러지 말고... 레위인과도 그리하라..." 그랬어요...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즐거워 하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연인들은 어떻습니까?... 맛있는 거 있으면 그가 생각나고 좋은게 있으면 그가 생각나고... 좋은 영화가 있으면 같이 보고싶죠... 자꾸 뭔갈 사주고 싶고, 같이 먹고 싶고,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즐거움을 같이 하는 겁니다.
여기서 레위인은 단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고 택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임을 말합니다. 즉,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를 말합니다.
'져버리지 말라'는 것은 내버려두지 말라...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꼭 저와 관계된 것 같아서 거북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축복의 통로로 삼으셨으니 전해 드리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대접한 것이 되어... 오랜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너희 집에 아들이 없지?... 그러나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정말 1년 후에...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았으며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창18:1∼14).
데살로니가전서 5:12∼13절에서는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랬습니다(시84:5).
무슨 죄가 그 가운데 가로막혀 있거나... 섭섭함이 가로막혀 있으면 안돼요...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려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 교회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모든 축복의 말씀들이... 여러분들은 물론이요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모든 기업 위에 그대로 임하는 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세속화되지 말라는 것이다.
다섯째로, 성전 중심의 삶은 세속화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2:16절에 보면,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것이며" 그랬는데, 정결의 규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2:30절에서는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위하였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성별하라는 것이다. 즉, 성도는 세상사람과 달라야 된다는 겁니다.
장사를 해도 믿는 사람은 뭔가 다르고... 사업을 해도 뭔가 다르고...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안 믿는 사람들과 뭔가 달라야 합니다. 이것이 세속화되지 않은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어느 젊은 집사 부부가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저녁 먹을 시간인데 부인이 화가 나서 밥도 안짓고 건너 방으로 가서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저녁도 못 얻어먹고... 따분한 남편과 아이들이 문 앞에 가서 문 좀 열어 달라고 아무리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때 남편이... 문뜩 자기 아내가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성경 구절을 암송하던 것이 생각나서... 문 앞에 입을 대고 나지막한 소리로 성경 구절을 낭독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시록 3장 20절 말씀!.." 그랬더니.... 잠시 후에 그 성경 말씀에 대한 답신으로... 방 안에서 흘러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15:5절 말씀인데...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더래요...
이 부부는 말씀을 통해서 웃음을 터뜨리고... 그리고 나와서 밥을 짓고 얼른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싸움을 해도 뭔가 달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술을 마셔도 "주여!..." 하고 마셨답니다. 그래도 이런 사람은 그냥 마시는 사람보다는 뭔가 다르죠... 왜냐하면 언젠가는 술을 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도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첫 번째 단계는 먼저 자신의 부족과 죄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 그랬는데, 거기서 나는 쏙 빠집니다. 모든 이란 말씀 가운데 나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내가' 중요해요... "오늘 말씀은 아무개 집사가 들어야 하는데..." 아니예요... 모든 말씀은 바로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빠지면 안돼요...
교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 덜 배운 사람... 부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성격이 좋은 사람, 유별난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 적은 사람 등등... 많은 분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내 맘에 안드는 사람도 있고 보기 싫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저 천성을 향하여...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못난 나 자신을 십자가에 쳐서 복종시키고.. 더 깎고 다듬고.. 좀더 갈고 닦아서.... 성결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건축으로 말하자면 공사중이라 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창문을 설치하기 위해서 엉성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무슨 집이 저러냐?" 할지 모르지만 공사 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아름다운 집이 완성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터만 닦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뼈대만 올라갔습니다. 줄도 삐뚤삐뚤하고 균형도 잘 안 맞아서... 보기에 흉하고 엉성해 보이기가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흉을 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신앙의 아름다운 집이 완성될 것입니다.
공사 기간이 길면 길수록 공사비가 많이 투자된 거대하고... 아름답고 훌륭한 집이 완성될 것입니다. 누구든... 완전한 사람은 없어요. 공사 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전 중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축복의 반열에 서서 주님 앞에 귀하게 붙들린바 되어... 넘치는 복을 받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 어느 한 마을에 낡은 건물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장마철이면 교회 진입로에 물이 괴어 통행에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진입로에 20장의 벽돌이 깔렸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도... 그 다음 주일에도... 20장의 벽돌이 깔립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은 "누가 이런 좋은 일을 하는가?..." 궁금해서 새벽 일찍 교회로 가서 살펴봤습니다. 그랬더니... 새벽 시간에 어둠을 뚫고 교회로 향하는 발길이 있었습니다.
한 어린 소년이 달구지에 벽돌을 싣고 교회로 와서 콧노래를 부르며 벽돌을 깔고 있었습니다.그 소년은 열두 살의 '존 워너메이커' 라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벽돌공장에서 일을 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는 교회 진입로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고... 벽돌공장에서 받은 급여로 자신이 따로 벽돌을 사서 남모르게 교회 계단을 깔았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 날 설교 때... 어린 소년 존 워너메이커의 선행을 공개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어린 소년의 선행에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건축헌금을 하기로 작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낡은 교회는 헐리고 그곳에 아름다운 예배당이 건축됐습니다. 교회를 사랑한 한 소년으로 인하여 아름다운 교회가 건축된 것입니다.
새벽에 벽돌을 싣고 온 이 소년의 이야기는... 바로 훗날에 백화점 왕이 된 존 워너메이커 회장의 일화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성전을 사랑하고... 봉사와 섬김을 실천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늘의 보상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성전 중심의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주의 권속들은..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으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신 12:1-7 / 권오서 목사
주일 아침, 한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허둥지둥 예배에 들어갔습니다. 자리를 잡았을 때는 이미 예배가 시작된 지 오 분 이상 지난 후였습니다. 그날도 주일예배는 지난주와 다름없이 정해진 순서를 따라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주보에 적힌 별 모양의 표시를 따라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예배순서를 따라갔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표기도에 이어 성경봉독과 찬양대의 성가로 이어졌습니다. 이윽고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서론도 채 끝나기 전에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눈꺼풀에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졸음을 쫓기 위해 가끔 고개를 흔들어보고 허벅지를 꼬집고 떨어트린 성경책을 다시 주워보지만 졸음의 위력은 너무도 컸습니다.
부부는 설교 드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고개를 숙이고 깊은 묵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부모가 다 고개를 꾸벅이고 있는 사이 아이는 주보로 비행기를 접어보기도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습니다. 너무 지루해진 아이는 졸고 있는 엄마의 옆구리를 고사리 손으로 툭 쳐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근엄한 톤으로 말하고 있는 아저씨(목사님)의 연설은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몸을 비틀고 요동을 치다 인내가 한계점에 달한 이 아이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저 아저씨한테 빨리 요금 주고 집에 가자!”(이재기, 회복의 은혜, 132-133)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시 이 아이의 부모에게 볼 수 있었던 모습은 아닙니까? 혹시 우리 아이들이 우리가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는 “엄마 저 아저씨한테 빨리 요금 주고 집에 가자!”라고 말하지는 않을까요?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와 예배의 자리를 지킨다고 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가 분명 예배의 자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⑴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4절 말씀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이 말씀에서 ‘그처럼’이라고 할 때, ‘그’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가나안 사람들 -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위해서 쫓아내야 할 가나안 지역에 살고 있는 이방민족들을 뜻합니다. 그러면 ‘이들처럼 행하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들이 무슨 일을 했기에 그들처럼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2절과 3절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2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3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 둘째, 이들이 믿는 신은 사람의 손에 의해서 조각된 것, 셋째, 우상을 섬기는 장소를 자기들 편의대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우상을 만들고,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곳을 택해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무슨 뜻입니까? 가나안의 이방민족들이, 우상을 섬기는 방식대로 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 우상 숭배가 뭐냐 하면, “내”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이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렇기에 불교를 믿어야만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어떠한 신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연말연시에 새해의 운세를 점치기 위해 이곳저곳 다녀야만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굿을 해야만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가 중심이 되면 우상숭배자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사고의 틀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면, 그 사람 역시 우상숭배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배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 되기는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누구를 위하여 지었습니까? 하나님. 무엇 때문에요?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 이렇게 말씀드리면 성도들 중에는 “‘예배 성공, 인생 승리’라는 우리 교회는 잘못된 것 아닙니까?”라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의 표어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 성공, 인생 승리”라는 표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진리입니다. 첫째, 예배에 성공하자는 것은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온전히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진리입니다. 둘째, 예배 성공을 통한 인생의 승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진리입니다. ‘인생승리’라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명예를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유명인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드라마를 아시죠? 지난 해 한창 인기몰이를 했던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금순이’역할을 한 연예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혜진. 한혜진 씨는 독실한 크리스챤입니다. 그녀의 미니홈피를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독실한 크리스챤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한혜진씨는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일류스타가 되었는데, 사실 이 드라마가 처음 방영되었을 때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도 받았습니다. ‘금순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고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도 과하다’는 등 많은 비난이 쏟아졌었습니다. 아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본래 ‘금순이’ 역할은 한혜진 씨가 맡게 될 역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연예인이 맡아야 했었는데, 섭외가 순조롭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한혜진 씨가 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 얼마나 실망스러웠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도 9개월 간의 장정을 잘 소화해낼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났는지 아십니까?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미 많이 지친 상태에서 상상도 못할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시간을 내어 주일 청년부 모임(예배)에 나갔는데, 그때마다 일주일을 살아갈 위로와 여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에 가서 이렇게 글을 맺습니다. “다음 작품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요즘, 가끔은 나의 생각이 앞서 염려가 밀려올 때도 있다. 그러나 나의 앞길에 무엇이 펼쳐지든 나는 그저 기대하고 기뻐하고 감사리라 열심히 다짐해 본다. 늘 내 곁에서 ‘굳세어라 혜진아’하고 외쳐 주시는 그분이 계시기에.”(가이드 포스트, 2006년 1월호, 40-41)
성도 여러분, 한혜진 씨에게 진정한 승리는 무엇입니까? 인기있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유명인이 된 것입니까? 힘들게 살던 그녀의 가정이 한혜진 씨 덕분에 집을 사게 되었는데, 그것인 진정한 승리입니까? 물론, 이런 것들도 인생 승리의 한 부분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고백대로 “‘굳세어라 혜진아’하고 외쳐 주시는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된 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한혜진 씨 역시 “하나님을 더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바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할 때,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 될 때, 그런 예배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이자, 우리를 축복해주실 밖에 없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예배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⑵ 하나님께서는 드림이 있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6절 말씀입니다. “6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성도 여러분, 예배에는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만 드려서는 안 됩니다. 마음도 드려야 하겠지만, 그 마음을 담아 예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번제, 희생, 십일조, 거제, 서원제, 낙헌 예물,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드릴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배는 드림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은혜도 받아야 하겠지만, 먼저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은혜를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드림이 아니라 지불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려고 하면 물건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값을 지불해야만 물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기 위해서 드린다면, 은혜는 우리가 거기에 합당한 값을 지불해서 얻는 것이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린 아이의 말이 생각나십니까? “엄마 저 아저씨한테 빨리 요금 주고 집에 가자!” 비록 풍자한 이야기이지만,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일까요? 왜 이 아이는 헌금을 요금이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무엇인가를 받았다고 생각해서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요금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헌금은 요금이 아닙니다. 헌금을 드려야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입장료가 아닙니다. 헌금 많이 드리면 이 앞자리에 서 있고, 헌금 적게 드리면 저 뒷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헌금이 드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무엇보다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헌금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헌금을 많이 드리면 좋은 자리에 앉고, 적게 드리면 나쁜 자리에 앉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입니다.
마가복음 12장 41절 이하에 보면, 어느 과부가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습니다. 두 렙돈이 얼마 정도 되냐면, 노동자의 일당을 60,000원이라고 할 때, 한 렙돈이 500원도 채 안 되는 돈이니까, 두 렙돈이라 해도 1000원도 안 되는 아주 적은 돈입니다. 그런데 이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가리켜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십니다. 여러분, 정말 그곳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 과부보다 많이 드린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는 부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체면치레 정도로만 드려도 이 과부보다 훨씬 많이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이 가장 많이 드렸다고 하는 것은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와는 정반대의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한 사건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의 값이 얼마짜리였습니까? 300데나리온.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할 때, 적어도 1500만에서 2000만원에 달하는 고가의 향유였음을 뜻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 여인도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다는 것 때문에 칭찬을 받게 되는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칭찬한 이유가 고가의 향유를 부었기 때문입니까?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이 여인은 몸을 팔던 여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가지고 있던 고가의 향유는 몸을 팔아서 구입한 것일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여인이 자신의 몸을 팔아 구입한 향유를 여러분의 몸에 붓는다면,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좋아하겠습니까? 더욱이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인 통념으로 볼 때, 아무리 고가의 향유라 할지라도 부정한 방법에 의해서 벌어들인 것을 가지고 이런 일에 사용한다면 좋아했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행동을 칭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마음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를 기쁜 마음으로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성도 여러분, 헌금은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는 둘 중에 한 여인만을 칭찬했어야 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발아래 향유를 부은 여인을 칭찬했어야 했습니다.
지금 제가 ‘헌금은 마음의 문제, 믿음의 문제’라고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헌금을 적게 드려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헌금이 마음의 문제, 믿음의 문제’라는 말은 때로 헌금이 부담이 되더라도 드릴 수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보세요. 그녀에게 있어서 두 렙돈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였기 때문에, 두 렙돈을 드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부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향유의 부인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도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전재산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드린다는 것은 분명 부담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드렸다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드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헌금 생활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분명 경제적으로는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담이 될 정도로 헌금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할 때, 돈에 의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돈 때문에 시험 들지 마세요. 돈을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습니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돈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재물도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시지 않으면 있다가도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정성껏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면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7절 말씀입니다.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찌니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에 복을 주시고,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축복해주시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속에는 언제나 불평이 감사로, 슬픔이 기쁨으로, 저주가 축복으로, 부족함이 풍부함으로, 답답한 일이 속 시원한 일로, 눈물이 웃음으로, 고통이 능력으로 변화되는 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을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숨어계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뭔가 뚜렷한 대책이 없을 때,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저버리고 어디론가 숨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숨어있는 듯한 하나님도 예배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미 테니(Tommy Tenney)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을 발견하는 관건은 우리의 예배이다.”(토미 테니, 갓 캐처스, 49)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위력이자, 이것이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 중의 특권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예배의 특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스코틀랜드의 맥체인(R.M. McChenyne)은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분으로, 어느 날 헌신자들과 함께 선교 여행 중 사막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맥체인 목사님을 비롯한 일행들이 이집트의 발틴이라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물이 떨어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그날이 주일이었는데, 그들을 안내하던 아랍인이 날씨가 용광로처럼 뜨겁고 먹을 양식도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여행하기를 고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맥체인 목사는 분노하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주일의 안식은 이 같은 광야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사람이 없다면 우리라도 이 적막한 땅을 이 주일에 찬양의 노래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이 아니냐? 이 주일에 좋으신 하나님을 즐거워할 나의 특권을 빼앗지 말라.”(이재기, 회복의 은혜, 146-147)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질병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물질 때문에 어려우십니까? 바쁘고 힘든 일상 때문에 마음 편안한 날이 없습니까? 가족들 간의 남모르는 갈등으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십니까? 그렇다면, 분명 여러분은 광야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광야 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예배만은 빼앗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우리가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면서도 꼭 지켜야 할 축복의 자리요, 위로의 자리요, 회복의 자리요, 능력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통해서 삶의 즐거움을, 기쁨을, 능력을, 위로를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 리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입니다. 우리의 편의대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예배는 모두 우상숭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드림이 있는 예배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하겠지만, 은혜 받는 것에만 주안점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없는 많은 예물보다, 마음이 담긴 최선의 예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입니다. 드림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즐겁게 하십니다. 기쁘게 하십니다. 예배의 특권을 빼앗기지 말고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022년 모든 예배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제로의 삶
신 12:1-32 / 양인국 목사
1. 본문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평생에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들을 말해 주고 있다.
그것들은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사를 드리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즐거이 먹으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언어들은 “먹으라” “즐거워하라”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 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축제로의 삶”과 관련된 언어들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삶은 축제로의 삶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들에게 기쁨과 평안과 그리고 생기를 주심으로 이와 같은 삶은 그 자체가 축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시간 우리는 어째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평생에 지키도록 주신 규례와 법도들을 지킬 때 우리의 삶이 축제가 되는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평생에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로서 주신 말씀들 가운데 무엇보다 우선하여 주신 말씀은 우상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12:1-4). 이것을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언제든지 우상숭배에 대한 유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파멸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높은 산” “작은 산” “푸른 나무 아래” 등과 같은 표현들은 우상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모든 곳에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유혹하는 우상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우상 숭배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그 땅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도록 이렇게 명하셨다.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12:2,3)”
여기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금하신 것은 적극적인 의미로는 하나님만 섬기는 즉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이고, 소극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을 형상화함으로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왜곡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삶은 축제로 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빛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중심이 되실 때 우리 안에는 어둠이 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 축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 사람들 가운데서 공동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환경을 초월하여 언제나 기뻐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권고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해 준다. 그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권고했고, 동일한 권고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도 했다. “항상 기뻐하라(살전5:16)” 이와 같은 권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삶을 축제로 만들 수 있는 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동일한 사실을 시편에서도 볼 수 있다. 특별히 시편에 언급된 시인들이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된 모든 어려움들을 기쁨으로 승화 시켜 자신들의 삶을 축제로 만들 것 역시 그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가까이 할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더 삶을 축제로의 삶으로 세워져간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평생에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로서 주신 말씀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 명하신 제사들과 예물을 드리라는 것이다(5-1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12:5-14)”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정하신 방법으로 제사들과 예물들을 드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도록 하려하심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에 따라 제사와 예물들을 드릴 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해 주는 은혜의 수단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드리는 제사와 예물들을 기뻐 받으시고 그들을 축복하셨다. 물론 이 축복은 “드린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하심이다.
여기 중요한 교훈은 예배를 통해서만 임하는 은혜와 축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응답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누구도 누릴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자들만 체험할 수 있는 축복이다. 그리고 이 축복은 예배드리는 자들의 심령을 새롭게 해 주고 또한 회복의 은혜를 가져다줌으로 이 축복 자체가 또 하나의 축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곳마다 그곳이 축제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실례로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성막을 완성하고 첫 번째 드린 제사 가운데 이와 같은 축제가 있었고(출40:34-38),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첫 번째 드린 제사 가운데서도 동일한 축제가 있었다(왕상8:62-66). 그리고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한 이스라엘이 성전을 재건하고 첫 번째 제사를 드렸을 때도 그곳에 축제가 있었다(에스라6:16-22). 이외에도 우리는 선지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드린 제사에서, 신약 시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드린 예배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 역사 가운데 찾아볼 수 있는 수많은 영적 부흥에서도 동일한 축제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바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삶 가운데 예배는 우선순위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임하는 축복들과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이 가장 강건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가운데 예배가 생활화 될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축제로의 삶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평생에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로서 주신 것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 노비를 포함한 모든 가족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고(12:7), 또한 그들이 원하는 때 각성에서 가축을 잡아서 정한 자와 부정한 자를 구별하지 말고 모두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을 말씀하셨다(12:15). 이것은 우리의 삶을 축제가 되게 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 제사를 드린 후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고 제사 드린 자들에게 주시는 복을 함께 나누며 즐거워하라는 의미다. 여기에 진정한 축제제가 성립된다. 특별히 우리는 12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고 권고하실 때마다 반복하여 주시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주목해야 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을 주심을 인하여(12: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12:10)”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12: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에 따라(12:15)” 등. 이와 같은 말씀들은 우리의 삶을 축제가 되게 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을 말해 준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 먹을 것이 있고 함께 할 사람들이 있고 또한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우리가 함께 그 축복을 누리기 원하신다. 여기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리라는 의미다. 그래서 가족들과 나누도록 말씀하셨을 때 가족들 가운데 그들의 노비를 포함시켜 주셨고 이웃들과 나누도록 말씀하셨을 때에도 그들 가운데 정한 자와 부정한 자 모두를 포함시켜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축제의 삶은 나눔으로 완성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신 복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축제로의 삶으로 변할 것이다.
오늘 말씀은 탐욕과 불신과 갈등으로 황폐해 가는 세상을 축제의 장으로 변화 시킬 수 있는 길을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고 예배를 생활화하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들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바로 그곳에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신 말씀에 따라 산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축제로의 삶으로 변화 될 것이고 또한 우리로 인하여 이웃과 함께 살고 있는 사회는 축제의 장으로 변화 될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평생에 주신 말씀에 따라 삶으로 인하여 죄로 인하여 황폐해 가는 세상을 축제의 장으로 변화시키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신명기 강해 33
신 12:1-14 / 푸른교회
본문은 1절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이 이제 곧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 평생 지키고 살아야 할 규례와 법도를 일러주신 말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먼저 알려준 것은 2-3절입니다. “[2]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3]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모든 우상의 제단을 헐라는 겁니다. 아예 그 이름을 멸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과제입니다. 가나안 정복에 앞서서 하나님이 가장 경계한 것은 이방신과 우상의 제단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한 사람도 살려두지 말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 짐승까지도 멸절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섬기던 이방신 우상 문화가 하나님 신앙을 왜곡하거나 약화시키고, 우상숭배에 빠질까봐 우려하셔서 극단한 조처를 취하신 겁니다. 누구나 우상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우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상의 제단을 헐어야 합니다.
실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분부대로 행했습니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도 다 처단하지 못했고, 그들의 우상도 완전하게 척결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이 오랜 세월 가나안 원주민들의 우상에 유혹을 당했고,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한번은 이스라엘 백성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여호수아 24장 15절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우상숭배는 직접적인 하나님 배신을 의미하기에 치명적인 죄악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가장 먼저 우상척결을 외쳤습니다. 우상의 제단을 허는 데서부터 신앙생활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파괴하라, 헐라, 깨뜨리라, 불사르라, 찍어라, 멸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씨를 말리라는 겁니다.
다음으로는 구별된 장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합니다. 5절입니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11절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13-14절입니다. “[13]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14]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물론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예배를 해도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시고, 예물을 흠향하십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아무 데서나 하나님을 예배하지 말라고 합니다. 명령한 처소에서 번제와 예물을 드리라는 겁니다. 구별된 처소, 구별된 성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기 위해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우리도 때 묻은 일상에서 하나님을 뵈려고 할 것이 아니라 구별된 성소에서 하나님을 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를 처음 부르실 때 “여기는 거룩하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별된 분, 거룩한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도 구별된 처소인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게 맞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게 맞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하나님을 예우하는 겁니다. 우리가 굳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은 예배당이라는 구별된 처소에서 교제하고 예배하는 게 옳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집에서 기도하고 예배해도 하나님은 그 예배와 기도를 받으십니다만, 구별된 장소에서 예배와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십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구별된 장소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13-14절을 다시 보십시오. “[13]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14]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이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원리는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6절입니다.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구별된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고 거기에서 각종 예물을 드리라는 겁니다. 11절도 마찬가집니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번제와 제물입니다. 즉 예배와 예물입니다. 구약시대 때는 제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물을 다른 말로 희생이라고 합니다. 짐승을 희생시켜 바친다는 뜻도 있지만, 예배자가 희생적으로 바치는 예물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어떻게 이런 제물을 제사 때마다 바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희생 아닌 제사는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제물이나 예물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그 사람의 믿음, 사랑, 소망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찾을 때 선물을 들고 갑니다. 그러면 부모님은 그 선물보다는 거기에 담긴 자녀의 마음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도 같습니다. 부모님의 심정을 생각해서 하나님께 나올 때는 희생을 챙겨야 합니다. 번제와 예물이 예배의 구성요소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께 번제와 예물을 바치고 더욱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온 가족이 더욱 즐거워하라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절대 너희의 소견대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8절입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기호, 소견, 입맛대로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제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명령,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와 세상 사람의 분수령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삶입니다. 모세가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소견이 아니라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라는 겁니다. 우리가 내 소견대로 살 것인가,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 것인가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답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주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내 소견대로 살면 행복할 것 같아도 주님의 뜻이 아니면 우리 의지를 꺾어야 합니다. 주님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내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에 들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분부한 것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최후의 승리도 얻고, 주 안에서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택하신 곳
신 12:1-14
지난 시간에는 애굽과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방식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애굽은 자기의 수고와 노력으로 살아가는 땅이지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서는 수고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식물을 얻어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식물을 얻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바탕으로 한 수고와 노력은 자신의 능력과 힘을 바탕으로 한 수고와 노력과는 전혀 다릅니다. 자기를 바탕으로 한 수고와 노력에는 결과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즉 자신이 목적하고 원하는 결과를 스스로 얻어내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입니다. 따라서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은혜를 언급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원하는 결과가 달성되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바탕으로 한 수고와 노력은 결코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어떤 수고와 노력을 했다 하더라도 결과를 자신이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수고와 노력에 대한 결과가 어떤 형태와 분량으로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수고와 노력은 자기가 했지만 주신 분은 여호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며 은혜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합니다. 스스로 인생의 목표를 세워놓은 채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평생을 삽니다. 무엇 때문에 평안을 잃어버립니까? 인생 목표를 자신이 세우고 달성 또한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목표가 달성됐다 하더라도 잠시 행복을 맛볼 뿐 또 다시 더 높은 목표를 정하고 더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인생입니다. 스스로 평안과 행복을 파괴하고 있으면서도 누군가가 자기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목표를 정하고 살아갈 수는 있지만 책임지는 분은 여호와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목표가 달성되지 않은 책임을 여호와께 따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든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의 수고와 노력의 대가가 얼마가 주어지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는 것이 은혜로 사는 신자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인생의 지혜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은 평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대부분이 현재의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합니다. 직장에 대해서든, 자식에 대해서든,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든, 환경에 대해서든 모든 부분에 있어서 '이렇게 말고 이렇게 되었으면'하는 환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으면'하는 환상이 현재의 삶에 대해서 불만을 일으키게 되고, 그 불만으로 인해서 평안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었으면'하는 것은 현재에 대한 불만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은혜의 바탕 위에 서있지 못하는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행복과 평안은 결코 주어지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 통로가 막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욕심이 행복을 멀리 쫓아 버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의 통로가 막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 통로를 뚫어보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하고 기도하는 종교 행위 역시 복의 통로를 뚫어보기 위한 인간의 열성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을 다른 차원에서 구분한다면 애굽 땅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사는 땅이지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는 내 이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있습니다. 내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이름이 높아지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름을 높여주는 신은 우상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우상을 멸하라는 차원으로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3절 마지막에 보면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고 합니다. 즉 이름과 이름의 싸웁니다. 우상의 이름은 멸하고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는 곳, 그 곳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느 곳이든 단을 헐고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상을 불사르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우상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용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상을 만들고 그 이름을 높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가장 먼저 이름을 가집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그 이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의 전부입니다.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고 이름이 낮아지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천대받고 무시 받는 이름으로 전락된다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으로 여깁니다. 오직 내 이름만 높이기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하는 곳, 그곳이 바로 애굽입니다. 그리고 내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의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든지 그 우상을 멸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어느 곳에서든지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땅에서 살아가는 신자가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나아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5,6절을 보면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제사하는 것입니다. 왜 꼭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제사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무 곳에서나 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곳이 특별한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모두 아닙니다. 택하신 곳이 중요한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택하신 곳이 어디냐를 알려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 있느냐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 곳에서나 제사하지 못하고 택하신 곳에서만 할 수 있었다면 이것은 오늘날도 같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아무 곳에서나 예배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바로 이점을 알고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출 20:24절에 보면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말합니다.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란 제사가 행해지는 곳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것은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제사란 흠없고 죄없는 제물이 죽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일이란 자기 희생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란 법궤 위에 피가 뿌려지는 일이 행해지는 성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장소에 솔로몬이 날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성전이 세워지게 되고 지금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일을 하신 주님이 곧 성전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져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가 오늘날의 택하신 곳이란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이라는 장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것이 곧 택하신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리스도안에서 예배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우상을 깨뜨리고 불사르는 것은 우상의 이름을 멸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높임 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소원을 간직한 채 나온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우상 섬기듯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장소에서는 흠없는 제물이 희생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희생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희생할 수밖에 없는 일을 보여주는 장소에서 인간이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희생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희생을 진심으로 아는 신자라면 자기 이름은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이름이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을 보면서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택하신 곳에서만 예배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이 없는 예배는 예배로 여기시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택하신 곳에서의 인간의 자기 자랑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랑이란 자기에게 가치를 두는 것인데, 자신에게 가치를 두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희생의 의미를 알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란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른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택하신 곳, 그곳에서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안에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이란 내 이름은 높여지지 않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일만 높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희생 앞에 내 이름은 아무런 가치도 없음을 철저하게 인식이고 내 이름은 무너지고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 그 자리가 오늘날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신 택하신 곳, 즉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하고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불법을 행하는 것으로 단정하셨습니다(마 7:22,23). 행위 자체가 불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법칙에서 어긋나는 모든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4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가나안 사람들처럼 여기저기서 자기들 마음대로 신을 섬길 장소를 찾아서 신을 섬기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생각대로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에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즉 광야에서는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였지만 가나안 땅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택하신 곳에서만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마음대로 생각하고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서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복이 주어집니다. 복은 주어지는 통로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출 20:24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 복이 강림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복이란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는 그 자리에 강림하는 것이지 인간이 선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강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가 복의 통로가 되지 못한다면 자기 행위에 대해서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두려고 합니다. 이 행위 때문에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은 자기의 행위를 통해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행위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신자는 자기 이름을 포기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만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인간은 결국 모두가 헛됨으로 끝나게 됩니다. 내 이름이 부서지고 내 이름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복이 강림합니다. 그러나 그 복도 역시 우리의 이름을 높여주는 복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복이 주어질 때 내 이름이 높아질 것을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애당초부터 자기 이름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께 나온 자입니다. 아예 자기 이름에 기대를 두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것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주어진 것으로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이고 그것이 곧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나 때문에 하나님이 희생하셨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십자가 밑이고 내가 죽어지고 없어진 자리입니다. 이 마음이 없이 예배한다고 나서는 것은 예배도 아니며 여기저기서 자기 마음대로 예배하는, 즉 우상을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이 자리에 모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여지는가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인간의 이름을 높이고 인간의 이름에 가치를 두면서 모인다면 그 어떤 장엄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는 십자가를 믿는 그 자리가 복이 주어지는 장소입니다. 자기 이름이 있는 곳에는 복이 주어지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이름이 있는 곳에는 피흘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모두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죽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사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그런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이름이 포기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울 때 그때 '주여라고 부르는 그 자리가 복이 강림하는 자리일 것입니다.
애굽은 인간의 욕망으로 사는 장소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자기를 위한 우상을 만들어 낼뿐입니다. 이시간 여러분 스스로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애굽 방식이 아닌지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기 욕망 성취가 아니라 오히려 포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헛됨이고 썩어짐이며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임을 알기 때문에 여호와를 신앙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으로 인해서 어떤 득이 주어질 것을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가장 큰 득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만 산다면 무엇을 잃어도 괜찮은 것이 신앙입니다. 이미 복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신 12:1-14 / 윤석준 목사 / 유은교회 [부산시, 하단동] http://cafe.daum.net/sola-gratia/
신명기 12장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행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 중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들이 펼쳐집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구절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의 삶들”에 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우리의 삶을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이후의 역사에 비유를 하자면, 성경에서 “애굽을 탈출하는 것”이 “옛 생활, 즉 구원받기 이전의 삶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으로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애굽에서의 삶은 “죄에 대하여 종노릇하던...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이전의 우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고, 광야생활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삶, 특별히 우리가 지난번에 언급한대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결혼언약을 맺은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난 이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는 이러이러하게 살라”고 명령하시는 내용은 “성도가 되기 위해 거치는 과정들”이 아니라, “이미 백성이 된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관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바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중앙성소
오늘 본문인 12장 앞부분의 말씀은 특별히 “중앙성소”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즉, 너희는 하나님을 섬길 때에...아무 곳에서나 그렇게 하지 말고....반드시 내가 지정한 곳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이것이 중앙성소 규례입니다.
십계명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련된 계명들이 가장 먼저 위치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생활과 삶의 모든 문제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고 마시는 문제 모두가 “예배와 제사의 맥락”에서 이해되었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우리가 먹고 마시고, 직장을 다니고, 학교를 가고, 생활을 하는 모든 문제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맥락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신자의 삶 중 어떠한 부분도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까지도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말미암아 정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관하여 중요한 지침이 주어졌는데, 바로 그것이 “중앙성소 규례”입니다. 신자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들 중 하나라면,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섬기는 지침을 주신 것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떠어떠하게 섬겨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신자의 삶 전체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중요하고, 우리가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의 문맥
먼저, 우리가 이 중앙성소의 규례를 살피는데 있어서, 문맥 안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면, 즉 하나님께서 이 중앙성소 규례를 주실 때에 그것을 “그렇게 하지 말라”의 문맥에서 주셨다는 데에 먼저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 보도록 합시다.
12장 말씀을 보면, 오늘 말씀의 주제인 중앙성소 규례가 5절과 11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5절에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나아가 예배하라”는 내용이 나오고, 11절에 다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한 곳으로 가서 예배들 드리라”는 명령이 나타납니다. 그런데....이 두 명령 모두, “그처럼 하지 말라”는 말씀이 그 앞에 전제로 붙어 있습니다.
5절의 명령 앞에는 4절 말씀이 전제로 붙어 있습니다. 5절에서 말씀은 우리에게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6절 너희 번제와 희생과 십일조와 서원제와 낙헌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4절 말씀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가 붙어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너희는 이러이러하게 하지 말고 중앙성소 규례를 지켜야 한다”.....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면 이러이러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2절과 3절 말씀이죠. 즉, 너희가 중앙성소 규례 즉,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은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높은 산에서, 작은 산에서,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단을 쌓고 주상을 만들고 아세라 상을 만들어 섬겼던 것”...... 그것처럼 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라!
이렇게 본문의 전반부의 중앙성소 규례는 “너희는 이방인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라!” 하면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특정 지역(여호와의 이름을 두실 곳)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섬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1절에서도 말씀은 9절과 10절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그 때 11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가서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찌니라”.... 즉 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9절 이후에 “너희가 앞으로 얻을 땅에 들어가거든, 그렇게 하지 말고 중앙성소에 가서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본문의 후반부에서도 중앙성소 규례는 “너희는 각자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지 말고,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라!” 하면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특정 지역(여호와의 이름을 두실 곳)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섬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중앙성소 규례는 “그렇게 하지 말라”가 전제된 명령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의 구절에서는 “가나안 땅의 족속들처럼” 하지 않는 것이고, 뒤의 구절에서는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입니다. 우리는 “각기 소견대로 행한다”는 것이 사사시대를 떠올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정리하자면....중앙성소 규례가 전제하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처럼”, “하나님 없이 내 맘대로 행하는 사사시대처럼”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너희는 반드시 하나님을 섬길 때 “중앙성소 규례를 따라”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 훈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이미 된 자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관하여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문맥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있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을 때에....그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 자체가” 이방인들의 그것과는, 우리 자연인의 그것과는, 같아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가나안 사람들이 높은 산, 낮은 산, 푸른 나무 아래에서 그들의 섬기는 신들의 상을 만들고 섬겼던 것처럼...그렇게 섬겨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의 자연인이 “자기의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방식대로”...즉 자기 소견에 옳은 방식대로 예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하나님을 섬길 때 여호와께서 이름을 두실 곳, 거기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이방인들이 자기 신들을 섬기는 것들과 “같지 아니한” 방식으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예배하는 방식과 같지 아니한 방식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실 곳으로 나아가 예배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과 그 섬기는 방식에 있어서부터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때 끊임없이 이 사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이방인들이 자신을 섬기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의 전통 무속신앙이 새벽에 정안수를 떠놓고 하늘을 향해 빌면서 “정성을 드리면 하늘이 감읍하여 반드시 내 소원을 이뤄주신다”는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방인들의 이러한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여호와께서 이름을 두신 곳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의 자연인이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자연인은 더 화려하고 더 거창한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혹시 그런 것들에 미혹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연인은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듯이, 빨간색 극장좌석에서 푹신한 등받이에 기대고 편안히 앉아, 프로젝터가 띄워주는 재미있는 화면들과 연극과 패션쇼와 각종 무대장치들로 이루어져 있는 유쾌한 한 편의 버라이어티쇼를 감상하듯이 예배와 설교를 감상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거기에는 우리의 생명이 담보된, 즉 그 언약의 말씀에 우리의 피흘림이 걸려 있는 중대한 언약의 갱신을 기대하십니다. 우리는 어느 편을 택하고 싶습니까? 우리는 편안하고 안락한 버라이어티 예배를 기대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거든 이렇게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문맥이....“너희는 이렇게 하지 말고...”의 입장에서 말씀되었다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너희는 세상과 다르다” 아니...“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하나님을 예배하는 본질과 형식과 태도 모두에 있어서 세상과, 그리고 자연인인 나와 다르게 나아갈 수 있는 우리 유은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그리고 이어서 이제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예배할 때 “여호와께서 지정하신 곳”으로 나아가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해 보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다르게, 자기 소견에 따라 행하는 것과 다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을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한 곳”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정의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특정한 장소를 지정하여 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하신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의도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중앙성소의 의미
여기 사용된 이 표현 즉,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실 곳”이라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핵심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표현은 매우 명백하게 예루살렘과 성전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이 용어는 성경에 매우 많이 나옵니다.
- 열왕기상 14장 21절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사십일 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빼신 성 예루살렘에서 십칠 년을 치리하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명확하게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빼신 성은 ‘예루살렘’입니다.
- 사무엘하 7장 13절은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이외에도 열왕기와 역대기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실 곳인 성전에 관한 이야기가 수십 차례 나타나 있습니다.
[왕상5:5]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위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대상22:10]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지라 저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저의 아비가 되어 그 나라 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대하6:7] 내 부친 다윗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대하6:8]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대하6:9] 그러나 너는 그 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
이 구절들 모두에서 공통적인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실 곳이란 다름 아닌 ‘성전’을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신명기 말씀에서 “장차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실 곳에서 너희가 반드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이방인이나 자연인이 어떤 신들을 섬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 백성의 독특한 하나님 섬김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 곳을 통하여 펼치려고 하신 하나님의 뜻
이 말씀의 궁극적 의미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을 통하여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보통 잘 알고 있는 것으로는 두 가지 의미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에의 지침으로서입니다. 말씀의 표현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통하여서만 예배할 수 있다”고 하심으로써, 우리의 예배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정하신 대로여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그 방식에 있어서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대로 예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에서는 자주 들은 말씀이고 우리가 유념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것이 좀 더 확장되어서 “성전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시다”라는 관점에서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성전의 궁극적인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성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넣어서 이 명령을 이해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은 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되겠습니다.
즉, 오늘 말씀의 주제인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성전을 통하여서만 예배해야 한다”는 중앙성소의 규례는 작게는 “예배의 지침”이요, 크게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이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하나님께서 중앙성소인 성전에 나아와 예배케 하신 이 명령을 통하여 펼치려고 하신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피면서 오늘 말씀의 두 번째 주제를 정리하도록 합시다.
오늘 말씀 6절과 7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 나아와 하나님께 각양 제사를 드리는 것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성전에 나아와 예배, 곧 제사를 드리는 일은 동시에 “여호와 앞에서 먹고, 그들이 손으로 수고한 일에 하나님께서 복 주심을 인해 그 가족들이 다 함께 즐거워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은 단순히 “희생제사를 통하여 자신의 죄악을 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동물들이 죽임 당하는 희생제사를 통해 단순히 죄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악이 씻겨져 나가게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즉, 제사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죄씻음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모두 성전에 나아와 내게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이 거기에 참여하여 얻는 것은 죄씻음의 기쁨입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은 자신의 죄악이 더 이상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음을 제사를 통해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제사와 함께 더하여 “즐거움”도 누렸습니다. 우리가 70장로에 대해 배울 때 함께 배웠지만, 여기에 “여호와 앞에서 먹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분명한 “언약적 식사” 즉, “샬롬의 식사”입니다. 이들은 성전에 나아와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의 비참한 죄를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가 씻어졌고,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사이에 샬롬, 즉 평화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더 나아가 가족들이 함께 즐거워했음을 이야기합니다. 온 가족이 다 이 즐거움에 참여했습니다. 언약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씻음을 받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언약공동체로서의 샬롬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제사가 보여주는 첫 번째 이상은 이것입니다. 제사와 죄씻음, 샬롬의 식사와 가족의 즐거워함...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2. 사방의 대적을 이기고 안식이 임할 때에
그리고 10절 말씀에 두 번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를 보시면, 그들이 그 “여호와께서 지정하신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가는 시점이 언제인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고 안식을 얻게 되는 때”입니다. 즉, 그들이 성전에서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때는 그들을 괴롭히던 모든 적들이 사라지고, 그들이 참된 안식에 거하게 되는 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전예배를 통하여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신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참된 안식을 얻기를 바라셨습니다. 죄악의 고통과 그들을 괴롭히는 악한 세력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때, 그들은 참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 대적들의 모든 영향력을 벗어나 참 안식을 얻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와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실 곳”을 통하여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신 두 번째의 이상은 이것입니다. 참된 안식을 얻은 후에 누리는 하나님과의 교제. 이것은 성전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성전이 되셔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출하셨고, 우리의 대적 사탄은 패배하였으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안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예배의 지향점은 이 참된 안식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 만남입니다.
3. 솔로몬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이 이상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는 이방인들처럼 나를 섬겨서는 안된다”, “너희는 너희 소견에 옳은대로 나를 섬겨서는 안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여호와께서 이름을 두실 특별한 곳” 즉, 성전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섬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중앙성소 규례는 한편으로는 제사와 죄씻음을 통한 샬롬의 식사와 가족의 즐거워함을 위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죄로부터 벗어나 참된 안식을 누리게끔하기 위해 말씀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성전의 이상은 이 “여호와께서 이름을 두실 곳”이 지어졌을 때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였을 때! 그 때 실제로 그 솔로몬의 기도에서 이 이상은 현실화되어 드러났습니다. 열왕기상 8장의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합시다.
좀 길지만, 27절부터 저와 함께 같이 읽어보도록 합시다.
성전을 다 지은 다음, 솔로몬이 한 이 기도에서 나타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치 아니하고, 악행을 행하여 언약적 저주 가운데 놓였을지라도, 이 성전을 향하여 비올 때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는 다르게 성전을 향하여 나아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성전을 향할 때 거기에 죄사함이 있고, 그래서 참된 샬롬과 기쁨이 있게 되고, 그래서 거기에 참된 안식이 있게 된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예배 행위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명령하신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이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기억합시다. 이 모든 솔로몬의 기도가 누구에게서 성취되었습니까? 우리의 모든 악행과 언약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 죽음에서 우리가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할 이 성전은 누구입니까?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일한 한 길”을 주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이 기도한, “우리가 비록 범죄하였을지라도, 우리가 비록 악행으로 인해 언약적 저주 가운데 빠져 있을지라도,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지 않을지라도.....우리가 이 곳 성전을 향해 서서 기도하거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를 반드시 돌아보옵소서!”라고 했을 때의 바로 그 성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주님께 참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됩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쁜예배
신 12:1-14 / 이강평 목사
예배는 히브리어, 헬라어의 뜻으로는 ‘찾는다, 구한다, 엎드린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worship, 즉 가치성이라는 뜻입니다. 예배는 먼저 준비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 의존적인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면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는 그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물을 드리면서, 기쁜 마음으로 예배드려야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은혜 받을 수 있음을 생각해보고 은혜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 있음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신명기 12~27장은 모세의 고별 설교의 후반부로써 가나안 사람들이 숭배하던 신당을 파괴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한 곳에서만 하나님께 제사하라고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일 중앙 성소에서의 제사 명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순수 신앙을 보존하도록 하는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6:16 이하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는 주님께서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예수사랑교회! 새 생명이 탄생되고, 이 세상에서 복 받아 기쁨과 소망이 있고 영생이 있는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기쁨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마치 어머니의 가슴에 안기는 것과 같은 행복감을 우리 예수사랑교회에 오셔서 맛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배를 통하여 우리들이 드리는 예물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께 의무적으로 드려야 할 예물이 있습니다. 이 중에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의무적인 예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14:20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의 영접을 받고 그에게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바친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십일조는 성도가 자신이 하나님의 권속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하나의 증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땅히 구별하여 드릴 예물을 온전히 구별하여 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라기 3:8-9에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18:21-32에 보면, 십일조는 레위인들과 가나안 백성을 위하여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헌물입니다. 또한 창세기14:17-20에 십일조의 기원은 모세 이전의 아브라함이 실행했고, 창세기 28:22에 야곱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린도후서 9:10-12에 보면, 오늘날에는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헌금은 성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교회의 각종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납부금으로 여깁니다.‘헌금’이라는 말은 말 자체가 ‘순수하다, 혼합되지 아니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헌금이라도 한 가지 뜻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구속하여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감사 외에 다른 의미가 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드릴 때,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드려야 할 것을 명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즐겁게 예배드려야 함을 생각해보겠습니다.
7절,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이 수고한 일에 여호와께서 복 주셨음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처럼,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고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게 된 사실과 우리의 수고하는 일에 복 주신 일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 이 위대한 진리를 개인적으로 체험하게 하신 성령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신명기 33:29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구원되어 이 자리에 앉는 것, 아무나 얻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것,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까? 예수사랑교회, 부활의 교회, 영생을 얻은 교회, 우리교회에서 기쁨으로 예배드립시다. 교회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기쁨으로 성도와 교제하고 헤어져 돌아가면 다시 만나고 싶어 주일이 기다려지는, 서로에게 기쁨과 위로와 평안과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은 영원한 우리의 안식처입니다. 이 땅의 삶은 끝도 없는 메마른 땅을 걷는 것처럼 피곤한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삶을 걷고 있는 성도들에게 궁극적인 안식의 땅인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안식의 땅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비록 메마른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 성전입니다. 축복의 근원지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고 인생의 가치관이 변해도 결단코 변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주신 말씀대로 교회 찾아 나아와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감사함으로 예물 드리며, 기쁨으로 예배드리는 우리 예수사랑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