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랩레터 #022. 대파 파동의 진정한 의미
대파가 세상을 이리 흔들 줄 누가 알았을까요. 발단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8일 서울 양재동 하나로마트에 가서 파 한 단을 들고 "저도 시장을 많이 봐 봐서 대파 875원이면 그냥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이 되고…"라고 말한 것이었죠. 이후 여야 정치권에서 여러 말들이 얹어지면서 대파 발언은 뜨거운 정치적 사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제는 '대파 파동의 정치적 영향'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건은 당장의 영향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매우 징후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저는 대파 파동을 '2024년이 기후위기로 인한 인플레이션 원년임을 각인시킨 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아 맞다, 아직 각인이 되진 않았네요. 이 글로 각인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해외에선 이미 기후변화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가능성을 주목하고, 여러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는데요. 우리는 언제 이런 논의를 할 수 있을지, 참 답답해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계기가 마련됐네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이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먼저 아래 이미지부터 살펴보시죠. 소비자물가지수 품목별 동향입니다.
글씨가 작아서 잘 안보일까요? 이 링크로 들어가면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핵심은 과실, 채소, 곡물의 물가 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각각 40.6%, 12.2%, 7.9%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아래 이미지를 보면 전체 물가 상승률이 2월 3.2%로 지난해 10월 이후 진정되던 국면이 바뀌었습니다.
한발짝 물러서서 여러 시점의 주요 품목의 가격을 돌아봐도, 최근의 과실, 채소, 곡물 가격은 이례적인 수준입니다. 대통령실에서 과거 대파 가격의 추이를 공개하며 문재인 정부 시절에 대파 가격이 더 비쌌다는 자료를 공개하기도 했는데요. 한 품목의 가격이 아닌, 과실류나 채소류 전반의 가격이 이 정도로 상승한 시기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2020년의 물가지수를 100으로 상정할 때 2024년 2월 품목별 물가지수가 과실 162.9, 채소 132.0입니다. 과일은 계절의 편차가 있어 때때로 이 지수가 120을 넘을 때가 있었어도, 이 정도로 치솟은 적은 드물었습니다. 그나마 비슷한 숫자는 2년여 전인 2022년 7월 석유류가 기록한 158.3이죠. 정확한 통계를 찾고픈 분들은 통계청 KOSIS 자료를 보시면 됩니다. 이 자료에서 '조회설정'으로 시점과 품목들을 바꿔가며 조회하면 최근 50여년간의 물가 자료를 모두 확인할 수 있습니다.
2년 여전 물가 상승을 수요 견인보단 공급쪽에 영향이 있단 의미에서 '공급발 인플레이션' 혹은 직접적인 가격 인상 항목을 꼽아 '원자재발 인플레이션'이라고도 불렀는데요. 그렇다면 지금의 인플레이션을 '기후위기발 인플레이션'이라고 불러도 무리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아직 이런 표현이 국내에선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2년 전만 해도 거꾸로 '기후위기 대응이 인플레이션을 조장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죠. (물론 과일, 채소 정도 가격 올랐다고 전체 물가에 얼마나 영향 미치냐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실제 과일 채소가 전체 물가지수 산정시 반영되는 '가중치'가 26.1/1000으로 높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과일, 채소 가격은 다른 농축수산물과 가공식품 가격에 반영되고, 지금 정도의 높은 상승률은 물가 전반에도 영향을 준다고 봅니다)
그런데 시야를 넓혀보니 이미 해외에선 기후위기가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상당한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과학 학술지 네이처(nature)에는 발행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보고서도 있습니다. 네이처 리서치 저널의 지구·환경과학 전문 저널인 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에 지난 21일 게재된 '인플레이션 압력을 상승시키는 지구 온난화와 폭염'(Global warming and heat extremes to enhance inflationary pressures)에 따르면 평균기온 상승으로 인한 2035년 물가가 식량 분야 최대 3.2%p, 전체 물가엔 1.18%p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연구는 1996~2021년 121개국의 27,000개의 가격지수(CPI)와 날씨 등의 데이터를 통해 수행됐습니다. 이전의 연구도 상당수 있습니다. 유럽중앙은행, IMF의 보고서 뿐 아니라, 중국 학자들이 26개국의 데이터로 기후변화가 물가에 미친 영향을 연구한 논문도 있습니다.
그럼 이제 정리해보겠습니다. 이번 대파 파동의 진정한 의미는 '기후위기발 인플레이션의 시작'입니다. 기후위기가 이상기후 뿐 아니라 농수산물 생산량의 변화, 물가 등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이런 추세는 내년과 후년엔 더욱 심화될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할까요. 이번에 정부는 과일, 채소 가격에 놀라 1500억원의 자금을 풀어 납품업체 단가 지원(755억원), 농수산물 할인쿠폰 지원(450억원), 과일 직수입(100억원), 축산물 할인(195억원) 등에 쓰고 있습니다. 덕분에 반짝 할인의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판도가 바뀌는데 대증적 요법만 쓰는 셈이죠. 의미있는 대응을 하려면 이제라도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바뀐 기후에 맞게 농업 전략을 리뉴얼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죠. 바로 기후위기 대응입니다. 산업, 발전, 교통, 냉난방 등 모든 부문에 있어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합니다.
총선이 불과 2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이런 얘기를 하기가 너무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대파 파동'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2024년 대파가 쏘아올린 공이 일파만파 퍼져 '기후위기발 인플레이션', '농업의 전환 전략'과 '기후위기 대응의 절박성'을 논하는 국면이 열리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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