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800 연안호,
북한 장전항에 예인
2009년 7월 29일 출항한 29t급 오징어
채낚기 어선인 ‘800 연안호’(선장 박광
선.54.거진 선적)가 30일 GPS 고장으로
NLL 북쪽 수역 11.2km까지 올라간 후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나포되었다.
통일부는 연안호가 예인된 직후 해사당
국간 통신을 통해 귀환을 촉구했으나 북
한은 다음날인 31일 동해지구 군사실무
책임자 명의의 대남 전통문을 보내“현재
연안호에 대해 북측 해당 기관에서 구체
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조사 결
과에 따라 선원들과 연안호 문제가 처리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통일부는 매일 해사당국간 통신을
통해 연안호 조사 상황을 문의했으나 그
때마다 돌아오는 북측은 ‘조사중’이라는
답변만 보내와 연안호의 송환은 비관적
이었다.
그러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다음달
인 8월 10일 평양을 방문, 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면서 연안호 석방
에 대한 긍정적 답변를 받아왔으며, 서
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해 8월
21일 서울을 방문한 김기남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는 “연안호는 문제 없을
것”이라는 말로 석방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후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일정이 확정
된 28일 석방을 통보받은 연안호와 선원
4명은 29일 무사히 속초항에 도착했다.
연안호와 선원 4명은 이날 오후 5시 고성
군 저진 북동방 16마일 지점(북위 38도
37분, 동경 128도 44분) NLL 상에서 북
측으로부터 해경 경비정에 인계됐으며
오후 8시25분께 속초항으로 귀환했다.
▶2009년 인도 마지막 왕비
갸야트리 데비 타계
갸야트리 데비 왕비.
▶2007년 미국 하원은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
▶2004년 배우 출신 오기 지카게,
일본 여성 최초 참의원 의장 선출
일본 여성 최초 참의원 의장에 선출된 오기 지카게.
2004년 7월 30일 오기 지카게(扇千景) 전 국토교통상이 일본의 상원에 해당하는 참의원 의장으로 내정됐다. 하원인 중의원의 경우 전(前) 사회당 당수였던 도이 다카코 전 의원이 의장으로 취임한 일이 있었으나, 참의원 의장에 여성의원이 선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기 의원은 시원시원한 이미지의 정치인으로 한때 여성 총리설이 나왔을 정도의 여걸이다. 195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극단 다카라즈카(寶塚)에 입단, 이후 연극·영화 배우를 거쳐 TV사회자로서도 큰 활약을 한 연예인 출신 의원이다. 연예인들의 정계 진출이 활발하던 1977년, 당시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총리 등 자민당의 거물의원들이 직접 스카우트에 나설 정도로 지명도 있는 인물이다.
본명은 하야시 히로코(林寬子)로, ‘오기 지카게’라는 이름은 출신지인 고베(神戶)항의 별명인 오기(扇)와 존경하는 배우인 아와시마 지카게(淡島千景)에서 따온 예명이다.
건설교통상 재임시 ‘주부감각’을 내세운 정책을 표방, 밤 시간 이용이 어려운 나리타(成田)공항 대신 하네다(羽田)공항에 국제선 정기편 취항이 가능하도록 했다. 탈당경력이 약점으로 지적됐으나 경쟁자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의 아들인 히로부미(弘文·58)씨가 경쟁파벌의 견제 등으로 탈락하며, 결국 의장에 내정됐다.
▶2003년 빌 뮬러 미국 야구 사상 최초
로 한 경기서 좌우 연타석 만루홈런 기록
보스턴 레드삭스의 빌 뮬러가 2003년
7월 30일 열린 텍사스 레이저스전서
8회 두번째 만루홈런을 치고 있다.
▶2002년 콩고민주공화국-르완다
평화 협정 서명
▶2001년 가수 황금심씨 별세
▶2000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재선
▶1998년 오부치 게이조 일본
제84대 총리에 선출
▶1994년 영국의 추리 소설가
로빈 쿡 암으로 사망
▶1991년 IBMㆍ모토로라ㆍ
애플 3사 ‘파워PC동맹’ 체결
▶1983년 미국-중국, 무역분쟁 종식
▶1981년 감비아 좌익 군사쿠데타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발표
국보위의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
방안’ 발표 후 학생들이 불법과외 금지에
관한 게시물을 보고 있다.
▶1978년 비동맹회의,
베오그라드선언 채택
▶1978년 알바니아 단원(斷援)에
반발 중국 비난
▶1977년 7월 30일 백건우ㆍ
윤정희 부부 피랍 중 탈출
▶1975년 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 헬싱
키서 개막 1971년 7월 30일 서울외곽
에 그린벨트 첫 지정
▶1965년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사망
▶1963년 필리핀-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3개국 수뇌회담
▶1961년 신문윤리 실천요강 채택
▶1959년 대법원,
조봉암 재심청구 기각 결정
▶1958년 아이슬란드 영해
12마일 확대 선언
▶1953년 미국 상원,
한국부흥비 2억불 사용 승인
▶1953년 역도산,
일본프로레슬링협회 결성
▶1952년 국제적십자총회
세균전 금지협약 가결
▶1946년 전국학생연맹 결성.
위원장 이철승
▶1940년 범미상회담,
공동방위결의를 채택(아바나선언)
▶1938년 랑군서 불교도와
회교도 충돌. 사상 3000여명
▶1935년 문고본 대명사
‘펭귄북스’ 출간
1935년 최초로 선보인 펭귄북스 10권.
ㆍ6펜스로 이룬 ‘페이퍼백 혁명’
1935년 오늘 문고본의 대명사인 ‘펭귄북스’가 영국에서 첫선을 보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아가사 크리스티의 <스타일즈 저택의 미스터리> 등 10권이 첫 시리즈로 나왔다. 가격은 당시 담배 한 갑 가격이던 6펜스였다.
펭귄북스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페이퍼백’(Paperback·종이 표지에다 본문도 중질지 이하의 용지를 쓰는 보급판)의 시초로 꼽힌다. 당시 좋은 책을 읽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고가의 고급 양장본을 사든지 도서관을 찾는 것이었다. 가격이 싼 페이퍼백이 있었지만 저급한 통속소설이 대부분이었다.
펭귄북스의 등장은 이 같은 책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당시 보들리헤드 출판사의 편집장이었던 앨런 레인은 아가사 크리스티를 만나고 돌아오던 기차역 가판대에 읽을 만한 책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펭귄북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가격이 싸면서도 양질의 현대문학 작품을 일반 서점뿐 아니라 기차역이나 구멍가게에서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타 페이퍼백의 저속한 표지 대신 세 개의 가로선이 그어진 백색 표지 중앙에 제목과 작가 이름이 산세리프체로 인쇄된 산뜻한 장정을 택했다. 새 출판사의 상징으로는 ‘기품이 있되 경망스러운’ 펭귄이 낙점됐다.
펭귄북스는 첫선을 보인 지 1년 만에 300만부가 팔리면서 ‘페이퍼백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펭귄북스의 인기에 힘입어 37년에는 자매서인 펠리컨북스가 나왔다. 미국에서는 39년 포켓북스가, 프랑스에서는 41년 크세주문고가 뒤를 이었다.
페이퍼백은 우리나라에서는 ‘문고본’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국 문고본의 전성시대는 60·70년대다. 당시 젊은이들은 저렴한 가격에 휴대하기 편한 문고본을 통해 동서고금의 명작들을 접했다. 을유문고, 삼중당문고 등이 문고본의 황금시대를 이뤄냈다. 80년대 이후 침체기에 빠져든 문고본은 2000년대 들어 ‘책세상문고’ ‘살림지식총서’ ‘태학산문선’ 등이 출간되면서 새로운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문고본이 출판시장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영미권이나 일본 등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1934년 부민관 기공
▶1932년 조만식 등 평양에서
건중회 설립
▶1932년 제10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개막
마라톤의 김은배, 권태하, 권투의 황을선 선수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참가하였습니다. 나라없는 LA의 동포들이 태극기를 걸고 세선수를 위해 만찬을 열어주었습니다. 어린 세선수들은 이 만찬장에서 태극기를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1928년 미국 조지 이스트먼
최초의 칼라영화 공개
▶1921년 소련-터어키 평화조약 성립
▶1920년 조선물산장려회(평양)
발기대회
▶1913년 독일, 대군비(大軍備)
확장안 제정
▶1912년 메이지(明治) 일왕 사망
▶1909년 한국 최초의 한자전
(漢字典) 발간
▶1909년 `파킨슨 법칙` 만들어 낸
영국의 역사가 파킨슨 출생
▶1907년 제1차 러일협약 조인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
회 대회서 맨셰비키와 볼셰비키로 분열
▶1900년 영국, 광산법 제정
소년의 지하노동 금지
▶ 1898년 독일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사망
▶ 1893년 프랑스 샴조약 체결(프랑스 메콩강 동안 획득)
▶ 1863년 미국 자동차왕 헨리 포드 출생
포드 [Ford, Henry, 1863.7.30~1947.4.7]
포드는 자동차산업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미국의 실업가이다. 농촌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기계에 관심을 가졌다. 16세 때부터 기계제작소의 도제, 기계수리공 등을 거쳐 1888년부터 약 10년간 에디슨조명회사의 기술자로 일했다. 1903년 포드자동차회사를 설립했고, 1908년에는 이후 20년 가까이 전세계 차량 생산의 절반을 차지한 T형 포드를 선보였다. 1910년대초부터 부품의 표준화 및 일관작업공정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어 판매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타사의 2배로 하는 동시에 작업 시간을 줄여 생산비용을 낮추고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높였다. 자동차문화를 일반화하는 데 기여했으나 1920년대말부터는 완고한 경영방침으로 시장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노동조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어려움을 겪었다. 1936년 포드 재단을 설립해 자선활동에도 힘썼다. /브리태니커
"돈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업이란 한심한 사업이다." - 헨리 포드
▶ 1818년 영국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 출생
▶ 1771년 영국 시인 그레이 사망
▶ 1718년 식민지 개척자이자 종교운동가, 윌리엄 펜 사망
https://youtu.be/8c9aPhqys9Q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