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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소운 목사
일본 여류 역사학자로서 많은 일본고대사를 저술한 고바야시 야스꼬(小林惠子)1) 여사는 그의《日本古代史》에서, 일본의 제40대 왕 천무천황(天武天皇)은 고구려의 연개소문이라 주장하여 일본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2)
1) 고바야시 여사는 일본의 성자라는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의 전도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신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이와무라다교회(岩忖田敎會, 1895년 창립)에서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2) 小林氏は天武を高句麗の高官である泉蓋蘇文と主張….
고바야시의 절친한 친구이며, 일본어로 일본 고대 시가집《망요슈(万葉集》의 재해석에 의한 일본 고대사를 여러 권 출간한, 이영희(李寧熙, 1931~ ) 씨가 고바야시 여사의 학설을 지지하는 글을 써 일본 학계에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영희 씨는 일본 동경에서 태어난, 일본어로「에도꼬(江戶子)」다. 해방 직전에 고국에 돌아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내가 기독교 가정잡지《새가정》편집장으로 재직할 때, 어린이 잡지《새벗》편집장으로 부임, 한동안 한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한국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있다가, 육영수 여사에게 발탁되어 유정회국회의원을 지낸바 있는 이영희 씨는, 그의 저서《천무와 지통》(天武と持統, 1993, 文春文庫, 東京) 51쪽 이하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여 일본 사학계를 경악하게 하였다. 이를 그대로 번역 인용한다.
고바야시의 절친한 친구이며, 일본어로 일본 고대 시가집《망요슈(万葉集》의 재해석에 의한 일본 고대사를 여러 권 출간한, 이영희(李寧熙, 1931~ ) 씨가 고바야시 여사의 학설을 지지하는 글을 써 일본 학계에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영희 씨는 일본 동경에서 태어난, 일본어로「에도꼬(江戶子)」다. 해방 직전에 고국에 돌아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내가 기독교 가정잡지《새가정》편집장으로 재직할 때, 어린이 잡지《새벗》편집장으로 부임, 한동안 한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한국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있다가, 육영수 여사에게 발탁되어 유정회국회의원을 지낸바 있는 이영희 씨는, 그의 저서《천무와 지통》(天武と持統, 1993, 文春文庫, 東京) 51쪽 이하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여 일본 사학계를 경악하게 하였다. 이를 그대로 번역 인용한다.
천무천황(天武天皇)은 생애를 통하여 철저한 친 고구려파 사람이었습니다. 고바야시 야스꼬(小林惠子) 선생은 그의《日本古代史》에서, 천무천황의 출신에 대하여 쇼킹한 신설(新說)을 발표하였습니다.「천무는, 668년에 멸망한 고구려 말기의 장군이며 수상(首相, 대막리지)이었던 연개소문(泉盖蘇文 또는 蓋金 이라고도 한다)일 가능성이 아주 강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天武は高句麗から來た。《別冊文藝春秋》1990年夏號).
연개소문은「고려국(고구려)의 오오끼오미 이리까스미(おおきおみ いりかすみ、大臣伊梨柯須?」라는 이름으로,《書記》(日本書紀의 줄임말, 역자 주)의 황극천황(皇極天皇, 第35代, 642~645 재위, 역자 주) 원년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나서 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다른 왕을 추대하고, 스스로 수상「대막리지」의 자리에 앉은 사건의 기술입니다. 이「이리까스미」인 연개소문이 천무천황이라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연개소문에 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일본인에게는 낯선 이 장군도, 한국인에게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치 유명한 맹장입니다. 일본의 노부나가(信長, 오다 노부나가, 역자 주)와 같다고 할까요?《국사대사전》(李弘稙 編)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3. 연개소문(淵蓋蘇文, ? ~ 666, 寶藏王 25)
고구려 말기의 재상. 별명은 개금, 성은 연.《일본서기》에는「이리가스미」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음에 가까운 것 같다. 부친의 대를 이어 동부(또는 서부)의 대가(大加 : 부족의 어른) 및 대대로(大對蘆 : 중앙정부 수상)이 되었다.
628년(영류왕 營留王 11년) 왕명에 의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다. 성격이 호방하고 안하무인의 기풍이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고 왕과 계획을 세웠지만, 사전에 이를 안 연개소문이 642년 (보장왕 1년) 유리왕 이하 반데파 중신들 100여명을 살해하고, 보장왕 (유리왕의 조카)을 추대한 후, 자기 자신은 막리지가 되어 전권을 장악하였다.
643년 (보장왕 2년) 당나라의 숙달(叔達) 등을 초청 도교(道敎)를 전파하였다.
수시로 신라를 침공하였으므로, 당나라는 고구려 신라 양국의 국교를 조정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냈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하고 도리어 당나라 사신을 구속하였으므로, 당 태종은 격분, 스스로 장량(張亮), 이세적(李世勣)을 이끌고, 644년 (보장왕 3년) 내침하여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하였지만, 실패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여러 차례 공격해 왔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 남생이 막리지가 되었는데, 아우 남건, 남산과의 세력 다툼으로 남생은 당나라로 도망, 당은 이세적을 보내어 668년 (보장왕 27년) 고구려를 공격, 마침내 멸망시켰다.
중국의 낙양(洛陽)에서 발굴된 장남 남생의 묘비명(墓碑銘)에 의하면, 그가 부친의 관직「막리지(莫離支)」를 계승한 것은 664년으로 씌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연개소문의 사망은 664년인 것 같습니다.《書記》의 연개소문 몰년(沒年)도 664년 10월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기(書記)》는 연개소문의 유언(遺言)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 3형제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물고기 같이 사이좋게 지내고, 권력다툼을 하지 말거라. 만약 그리하면, 이웃나라의 웃음거리가 되리라.」운운.
고바야시(小林) 선생은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지적을 합니다.
「…분명히 고구려와 일본은 연합국이었다. 그런데 본국의 사서(史書)에도 없는 대신의 유언까지《서기(書記)》가 기재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연게소문의 몰년(沒年)에 대해서도 한국의《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만 666년이라고 기록하였는데,《서기(書記)》 는 앞서 가록한 대로「664년 10월」이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 연개소문은 일본으로 망명한 것일까요? 664년이라면, 고구려 멸망 4년 전입니다.《서기(書記)》에 의하면, 천무천황(天武天皇)은「천문(天文)과 둔갑(遁甲)을 잘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점성술(占星術), 오행술(五行術)에 조예가 깊고, 기문둔갑술(奇門遁甲術)에도 탁월한 무예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연개소문은 또한, 도사(道士)를 당나라에서 불러와 도교와 방술(方術)을 열심히 배우는 한편, 울던 애도 울음을 그치게 하는 두려운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제미 있는 것은 이「대막리지(大莫離支)」라는 관직명과, 천무천황 즉위 전의 이름「대해인(大海人)」이라는 이름의 뜻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대막리지(大莫離支)」와「대해인(大海人)」모두 큰대 자로 시작하는 이름입니다.「막(莫)」은 한국식으로 읽으면,「모, 막, 맥」으로 읽습니다. 이 가운데「맥」의 종성 기역 음을 지우면「매」가 됩니다. 買도 매로 읽습니다만, 莫과 買 는 한국 고대어로는「물」을 나타내는 이두(吏讀) 표기로 썼습니다. 고어에서 물과 바다는 동의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따라서「莫=海」가 되는 것입니다.
「離支」는「이지」또는「아지」로도 읽는데, 귀인(貴人), 왕(王)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로써,「대막리지(大莫離支)」는「大水王」또는「大海貴人」으로서「大海人」과 같은 뜻이 되는 것입니다. 莫離支는 「마리지」또는「머리지」즉 우두머리의 뜻을 가진 최고 권력자를 일컫는 관직명인 것입니다.
천무천황(天武天皇)은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던 것일까요?
천지(天智)는 백제계 천황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조정은 백제계 일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한반도 정세의 변화는 심각한 정치구도의 동요를 가져왔으리라 짐작됩니다. 천지의 왕위도 위태위태하지 않았을까요? 고구려계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절호의 찬스였을 것입니다.
천무(天武)가「구마(くま)」였음은 능(陵) 이름에서도 추정됩니다.
아스까(飛鳥)에는 天武, 持統의 합장능(合葬陵)이라는 무덤이 있습니다.「히노구마 오오우치노 미사사기」(ひのくまおおうちのみささぎ、檜猥大內陵)가 바로 그 능입니다.
히노구마(ひのくま)란「日の貊」즉,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계 맥(貊) 족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火の金」즉 불을 다룰 줄 아는 김(金)씨 (철물을 다룰 줄 아는 감씨)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맥족(貊族)의 주류가 고구려인이었기 때문에,「구마」는 고구려인 혹은 고구려를 나타내는 말로 씌었던 것입니다. 천무천황은「철물을 다룰 줄 아는 가계(家系)」사람이었기 때문에「火の金」「ひのくま」라고 불리었던 것입니다. (중략).
천무천황과 연개소문이 동일 인물로 보게 하는 또 다른 자료가 있으므로, 이를 요약하여 첨가합니다. 이것 또한 고바야시 선생의「발굴」에 의한 것입니다. 그의 글을 추려서 인용합니다.
-? 천무(天武)는 이세신궁(伊世神宮)을「황조신(皇祖神)께 제사하는 국가봉제(奉祭)의 신궁」으로써 클로즈업시킨 천황이다.
-? 이세신궁에 관한 시료에「어기전본기(御氣前本記)라는 책이 있는데, 그 원 사료(史料)로 되어있는「왕대희유기(往代希有記)의 부제(副題)로「인무천황어대 풍수신궁신립 어기본전기」(仁武天皇御代 豊受神宮新立 御記本殿記) 라는 게 있다. 그러나, 인무(仁武)라는 천황은 없다.
-?《삼국사기》《신당서》《자치통감》등에, 고구려의 보장왕 6년 왕의 차남 막리지(莫離支) 임무(任武)가 입당(入唐), 당에게 반항한 것을 사죄했다는 기술이 있는데, 당시의 고구려에서 최고 권력자인「莫離支」직에 있던 사람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 한 사람 뿐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막리지(莫離支) 임무(任武)」는「莫離支 淵蓋蘇文」이라 추정된다.
-? 「任武」와 「仁武」의「任 」과「仁」은 둘 다 「닌, にん」으로 읽는다. 그리고 한자의 원음의 경우 두 글자 모두「jen」으로 읽는다. 이로써 연개소문의 본 이름은「任武」이며, 연개소문으로 생각되는 天武는 생전「任武」와 같은 음인「仁武」로 불리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 天武 곧 연개소문은, 고구려에 있을 때부터「任武」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일본에 와서는 仁武天皇이 되었으며, 별세 후「天武天皇」이라 시호를 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이어서 이영희 씨는 천무가 읊었다는「이아령(耳我嶺의 노래)」(耳我嶺の歌) 라는 고대 시를 우리말 이두로 풀어 일본인들의 해석을 뒤집고는, 그 시 제목은 연개소문의 본디 이름인「任武」란 이름을 이두로 쓴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둔갑술에 능하였음도 그의 시에서 증명한 후 이렇게 결론짓는다.
-? 천무가 연개소문이고, 그 연개소문은 고구려의「任武」였다고 주장하는 고바야시(小林) 설은, 이로써 한층 강하게 입증되는 것입니다. 천무천황의 본디 이름이「任武」였다고 하면「耳我嶺の歌」는 기문둔갑(奇門遁甲)의 방술(方術)에다가 천무 자신의 이름을 짜 넣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무 자신의 작품인지, 아니면 측근의 대작(代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참으로 기발하고 멋진 노래라고 생각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任」이라는 글자에서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됩니다.
「任 」자를 분해하면,「壬」과「人」이 됩니다. 고대 중국의 사주(四柱)에서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볼 때「壬」은「양수(陽の水)」에 속하고, 이것은「大海」를 가리키는 것입니다.「壬」은「大海」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大海」에다 사람인 자를 더하면「大海人」곧 천지천황의 즉위 전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이하생략).
이영희와 고바야시 두 한일 양국 여류 학자들은 서로 협력하여, 일본에서 왜곡되고 있는 고대사 바로잡기에 앞장 서 있다. 그들의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는「뿌리 찾기 여행」으로 한국의 경주와 부여의 백제 무령왕릉을 참배하고, 자기네 조상이 한국인이었음을 확인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하 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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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blog.daum.net/osowny/13947721>
첫댓글 연개소문 도 고대의 사만 중 하나 입니다
연개소문과 천무천왕의 관계를 처음 언급한 것은 '이영희'님이 아니고 일본인인 '고바야시 야스꼬'라는 인물입니다.. 한국인이 의문을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윗글은 이두문자의 풀이방법으로 해석을 한 듯 합니다만... 고대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혀야 합니다... 같은 부여족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지역의 유적과 지형에서도 의문이 가는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고대 일본서기 및 천왕의 계보도에서도 백제와 고구려의 흔적이 혼재된다는 것은, 이 의문을 풀수 있는 중대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한국과 백제가 관련이 있지 않나요? 우리역사에는 엄현히 백제를 우리선조들이 경영했던 고대국가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데요... 그 위치가 어디냐의 문제이지요...일본의 천황의 계보에서도 백제계의 뿌리라는 증거들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윗글의 요점은 그 일본의 천황계에서 백제계만 쭉 이어져 왔느냐? 아니면, 고구려와 신라계도 섞였었느냐?의 논점이죠..... 근데, 어떤 기록에서는 천무천황시대에 백제계의 세력이 몰락했었다라는 기록이 나오니까, 의심이 가는겁니다.. 그 와중에, 천무가 고구려인이었던 연개소문 이라는 주장이 있으니, 다시 집중해서 볼 수 있는거 아닙니까?.... 일본인들이 말하는 일본사가 한국인들의 선조국가로 알려진 고구려,백제,신라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되죠.... 그렇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도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는 님이 이해가 안갑니다. 삼국과 고려의 역사의 규명이 없이 조선의 역사가 규명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현재의 대한민국은 삼국과 고려와 조선을 모두 역사책에 담고 있습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역사가 아니라는 뜻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