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강론>
(2024. 11. 20. 수)(루카 19,11ㄴ-28)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루카 19,20-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1) 루카복음의 ‘미나의 비유’는 마태오복음의
‘탈렌트의 비유’와 같은 비유이고, 같은 가르침입니다.
‘미나’(탈렌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의
은총’이고, 미나를 활용해서 더 많은 미나를 벌어들이는 것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받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종의 죄는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죄’,
또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 라는 말에서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부자는 라자로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큰 죄’입니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과 ‘개들까지 와서’ 라는
말은, 그 부자가 오며가며, 마치 개들에게 던져 주듯이
라자로에게 음식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고,
라자로를 모욕한 일이기도 합니다.
부자 자신은 “나는 라자로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나는 최선을 다 했다.”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선자들의 모습입니다.
누가 보아도 선행이 아닌데, 자기 혼자서만 선행을
실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선이고, 어리석음이고,
교만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 자체가 죄입니다.
2) 루카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그것도 분명히 ‘큰 죄’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나는 강도짓에 가담하지 않았다.
나는 강도당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다.” 라고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악한 짓에 가담하지 않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악을 막거나 물리치고, 적극적으로 선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실천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3) ‘주인님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세 번째 종의 변명은 글자 그대로 어설픈 변명일 뿐입니다.
그리고 “잘못한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다.” 라고
주인을 비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도 아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도 아닙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고 싶어도 두려워서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귀찮고 힘들고 재미없는 일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못하는 것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두려워서 못하는 경우에는 정상참작의 가능성이 있지만,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4)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세 번째 종을
‘쓸모없는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마태 25,30).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나
하느님을 위해서나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소금’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결과를 요구하시지 않고, 최선을
다 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결과보다 과정이,
즉 얼마나 노력했느냐가 중요한 생활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구원’이라는
큰 은총을 받게 되고”이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처음에 받은 은총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다.”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결과를 요구하시지 않고,
최선을 다 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결과보다 과정이,
즉 얼마나 노력했느냐가 중요한 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