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스페인에 페르디난드라는 어린 황소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다 달리고 뛰어오르고 서로 머리를 받으며 지냈지만 그는 그저 코르크나무 그늘에 조용히 앉아서 종일토록 꽃향기 맡는 것을 좋아했죠. 그런 페르디난드가 혼자서 외롭지 않을까 가끔 걱정도 됐지만, 엄마 소는 꽃향기 맡으며 행복해하는 아들을 존중하며 이해해 주었답니다. 세월이 흘러 페르디난드는 몸집이 아주 크고 멋진 황소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드리드에서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옵니다. 투우 시합에 나갈 힘세고 거친 황소를 뽑기 위해서였죠, 다른 황소들은 투우 경기에 나가고 싶어 서로 머리를 받고 뿔로 찌르며 안달이었지만, 페르디난드는 그런 일엔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늘 하던 대로 꽃향기나 맡을 심산으로 풀밭에 엉덩이를 붙이려 했죠. 그런데 하필 풀밭 위 꽃잎에 앉아 있던 뒝벌 한 마리가 그만 페르디난드의 엉덩이를 호되게 쏘아붙였지 뭡니까.
바로 그 순간을 한번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이제 믿어지십니까? 벌이 소를 살짝 들어 올려 소가 꽃 위에 잠깐 뜨고, 그 바람에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할 수 있다는 것을. 스페인의 들판이든 나주의 들판에서든 꽃이 소를 웃기고 울릴 수 있다는 것도.
더 중요한 것은 그다음 이야기. 벌에 쏘인 페르디난드는 콧김을 뿜으며 펄쩍 뛰어올라 미친 듯이 씩씩거리며 달리고 박치기를 하고 땅을 긁어대며 뛰어다닙니다. 마드리드에서 온 사람들이 고대하던 바로 그 성난 황소의 모습 그대로 말이죠. 이로 인해 페르디난드는 투우로 스카우트되어 마드리드 투우장으로 실려 가게 됩니다.
결전의 그날, '공포의 페르디난드'로 소문난 그를 보기 위해 관중들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투우장은 열기와 함성으로 가득합니다. 드디어 투우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웬걸, 정작 페르디난드는 예의 그 모습대로 투우장 복판에 조용히 앉아 관중석 아가씨들의 머리에 꽂힌 꽃을 보며 꽃향기만 맡을 뿐입니다. 작살을 꽂는 반데리예로banderillero, 창으로 찌르는 피카도르picador, 마지막 숨통을 끊는 빨간 망토의 마타도르matador들이 무슨 짓을 하든, 아무리 어르고 별러도, 페르디난드는 전혀 싸우려 들지 않습니다. 성조차 내지 않습니다.
그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요? 이쯤 되면 보통 우리는 페르디난드가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여 마침내 훌륭한 투우로 자라나는 성공담을 기대합니다만, 동화의 마무리는 싱겁기 그지없습니다. 그리하여 페르디난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져서 자신이 좋아하던 그 코르크나무 아래 앉아 꽃향기를 맡으며 살았노라고 말이지요.
어떠세요? 허탈한가요? 아니요, 이게 해피엔딩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 페르디난드가 최우수 투우로 성공을 해야 해피엔딩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투우로 성공했다면, 오히려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반데리예로의 작살, 피카도르의 창, 마타도르의 칼이었을 테니까요. 황소가 투우를 위해 태어난 건 아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