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명문 사립대를 나와 외국계 IT 기업의 상무였다.
서울 강남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
외제 고급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그는
친구들에게 잘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3년 전에 실직했다.
아파트를 담보로 5억 원을 대출해 살았다.
부모는 아들에게 빚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자녀들은 아빠가 실직한 것을 몰랐다.
여전히 남들에게는 잘나 보이고 싶었던 그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살았기 때문이다.
고시원으로 출근하면서 공부한 주식에
투자를 했지만 크게 손실을 보았다.
더 이상 남들에게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실직한 것과 빚이 있다는 것도
부모나 자녀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죽기로...
아내와 두 딸은 죽였지만
스스로 죽을 용기는 없었던 그는
결국 경찰에 살인죄로 구속되었다.
그는 희망이 없었다고 말했다.
손에 가진 현금 1억 3,000만 원을 포함해
남은 재산이 7억여 원이나 되면서도
그는 희망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어떤 희망이 없었을까?
더 이상 잘나 보일 희망이 아닐까?
언제나 잘나 보이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자신이 실직 상태라는 것 빚도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숨길 희망이 없지 않았을까?
내실을 든든하게 다지려고 하지 않고
외형만 화려하게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는 자존감을 가지지 않고
남에게 존중받으려는 자존심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 스스로 잘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남에게 잘나 보이는 사람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에게 더 이상 잘나 보일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희망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았는지
진지하게 질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존감이 높은 잘난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자존심이 강한 잘나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명품을 찾으려면
희망을 잃을 수 있지만, 스스로 명품이 되려고 한다면
언제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잘났으면 상대방은 더 잘났다는
아주 쉬운 평범한 진리를 망각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잘났으면
상대방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나보다 더 잘났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도 항상 남들보다 더 아는 척, 잘난 척한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깔아보고 과신하며
잘나 보이는 사람이 되기 위한 우월감에
함부로 무시하고 가르치려 드니 문제다.
사람은 나잇값을 하고 살아야 한다.
나잇값을 못하는 어른은 어른이 아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고
몇 살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만큼 나이 값을 하며 올바르게 살고
곱게 늙어 가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더욱 애써야 한다.
우리는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가?
아니면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는가?
나는 잘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가?
아니면 잘나 보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