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중국 여행을 계약해 놓고 마치 수학 여행을 앞둔 초등학생 처럼 기대에 들떠 있었는데
뜻 하지 않는 세월호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온 나라가 초상집처럼 침체된 분위기에 젖어 있는데
우리만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죄지은 것 같아 여행 가방을 끌며 골목을 나오면서도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눈치가 보였다.
고속 터미널에서 일행을 만나 김해 공항으로 출발했다. 밤 10시 30분에 김해공항을 이륙해
새벽 1시 30분에 시안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컴컴한 외곽 도로를 따라 버스로 한참을
달린 끝에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수리 중인지 로비가 깨끗하지 않고 여러 가지 공구들로 어수선 했다.
밤이 늦은 탓이라 이내 짐을 풀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7시에 식사를 했는데 밥도 없고 죽도 멀건 죽이어서 만두와 채소만 먹었다.
호텔에 화장지도 없었다. 호텔치곤 써비스가 실망스러워서 봉사료 1달러 주기도 참 아까웠다.
9시 반 경,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와 거처했다던 별궁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도시 전체가
회색빛 안개와 뿌연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낮인데도 해드라이트를 켜고 차들이 운행되고 있었다.
시안은 원래 주나라 문왕 때부터 한나라,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천여년 동안 국도로 번성한
역사적 도시로서 그 동안 장안이란 이름으로 불려 왔다고 한다. 면적은 서울의 16배나 되고,
현재 우리 나라 삼성전자가 진출해 있으며 얼마 전 박대통령께서도 다녀가신 도시이다.
당나라 별궁에 입장했다.
뒷산이 엄청 높고 궁궐 앞에 큰 연못이 있으며 양귀비상을 돌로 조각해 놓았는데 그리 미인인 것 같지는
않고 통통한 육체미를 자랑했다. 그 당시는 미인이였다고 하나 요즘 잣대로 보면 약간 비만형이다.
궁궐 안에는 왕 내외가 사용하던 온천이 있었고 광장에는 지금도 온천수가 방출되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 진시황 병마용갱을 관람했다. 넓디 넓은 정원엔 잎이 넓은 클로버와 쑥이 자라고 있었으며
꽃을 심어 잘 장식해 놓았다.
작은 차로 병마용갱까지 이동했다. 병마용갱 안에는 수 많은 전사와 말을 흙으로 빚어 전투 출발 형태로
도열해 놓았다.지형으로 보아선 지하수가 비칠법도 한데 도열 된 엄청난 넓이의 광장엔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고 황토층 바닥에는 벽돌이 깔려 있었다.
병사들의 크기는 실물 크기와 같고 갑옷이며 머리 모양, 표정, 손가락 동작도 각각이었다. 신분에 따라
갑옷의 형태, 무기들도 각기 다름을 별도 전시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머리가 날아간 것, 부서진채
널부러져 있는 것, 다 앞으로 보고 있는데 간혹 옆으로 보고 있는 것 등 다양한 모습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옆을 보고 있는 병사는 행진 도중 소변을 보고 있는 모습이라 했다. 얼마나 사실적인가?
규모가 얼마나 큰지 일총, 이총, 삼총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아직도 발굴 작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 역사로 치면 고조선 시대 때인데 벌써 저런 훌륭한 문화 유적을 남겼다고 생각하니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도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발달한 문화를 영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참 불가사의한 일이다.
한편으로 황제 한 사람의 사후를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그러나 진시황이란 한 독재자의 광적인 행동으로 인해 남겨진 유물과 유적은 귀중한 문화재로서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음은 물론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들여 오늘날 그 후손들이
먹고 사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니 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진시황릉에 입장했다. 병마용갱에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왕릉인지 산인지 분간이 안 된다.
숲이 우거진 커다란 산봉우리가 왕릉이란다. 정면에 웅장한 묘비가 왕릉임을 알려준다.
왕릉 후면은 병풍처럼 높은 산맥으로 빙 둘러싸여 있고 전면은 눈이 모자랄 만큼 광활한 대평원이
펼쳐져 있어 풍수를 모르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아도 천하를 호령할 명당임을 잠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천하 제일의 명지관을 불러다 자리를 보았을 것이다.
저녁 식사 후 고속 열차를 타고 정주로 이동했다. 열차가 너무 깨끗하고 편안했으나 속도감이
없고 자주 정지하는 것 같다. 8시 30분쯤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12시가 다 되어갔다.
정주 호텔에 투숙했다. 역시 호텔에 물이 잘 나오지 않고 찔끔 거렸다. 호텔 규모에 비해 내부
환경은 우리 나라 장급 여관에 불과하다. 12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6시에 기상해서 짐을 들고 호텔 로비에 두고 7시에 식사를 했다. 8시에 출발했으나
교통이 매우 혼잡했다. 러시아워는 한국과 비슷했다. 건전지로 달리는 오토바이로
거리가 넘쳐났다. 거리 공원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춤인지 무술인지 모를 운동을 하고 있었다.
동양에서 제일 높다는 중원 복탑에 도착했다. 388m나 되는 높이로 파리의 에펠탑 보다도 높다고 한다.
꼭데기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니 정주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헌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도시로 바꾸기 위해 대형 트럭이 꼬리를 물고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때문에 시내 전체가 흙먼지로 인해 안개가 낀 것처럼 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4층에는 탑 둘레를 따라 둥글게 그림으로 중국의 과거,현재, 미래를 파노라마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어찌나 그림이 정교하고 사실적인지 꼭 실물을 보는 것 같았다.
관람을 마치고 만선산을 향해 출발했다. 넓고 곧은 고속도로를 따라 시원하게 달렸다.
고속도로 양편으로 포플러 가로수가 울창하고, 가로수 뒤로 밀밭이 초록색 융단을 펼친 것처럼
끝없이 계속 되었다. 마을도 안 보이고 일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은 채 세 시간 이상 달려도 도무지
산이라고는 눈에 띄지 않는데 산에 간다고 하니 참 이상했다. 도중에 조그만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중국산 고량주 한 병 시켜 먹었는데 맛이 꼭 우리 나라 중국 식당 빼갈 맛과 비슷했다.
된장국이 메뉴로 나왔는데 모처럼 고향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잘 먹었다.
식사 후 고속도로에서 내려 좁은 길로 한참 달리니 드디어 산이 나왔다. 온통 바위 투성이고
울퉁불퉁한 바위 틈 사이로 쪽곧은 향나무가 듬성 듬성 자라고 있었다. 밭가에 군데 군데 무덤이
있는데 잔디도 없고 맨 흙 무더기에 비닐 조각만 펄럭일 뿐 우리 나라 산소와는 전혀 달랐다.
그냥 거름 무더기 처럼 널려 있었다.농가는 꼭 우리 나라 시골과 비슷했으나 쟁반처럼 작은 기왓장을
오밀조밀하게 덮어 놓았고, 벽은 모두 붉은 벽돌이다. 주로 밭농사 위주로 밀을 재배하고
있었으며 경지 정리가 반듯하게 잘 되어 있었다.밭둑은 모양이 일정한 돌로 반듯하게 잘 쌓아 놓아서
밭둑이라기 보다는 작은 성을 보는 것 처럼 정교하게 쌓여져 있었다.
드디어 만선산 입구에 들어섰다. 퇴적암 층으로 구성 되어 있는데 너무나 크고 웅장하여 위압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칼로 잘라 놓은 것 처럼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절벽 밑 좁고 구부러진 길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달려가니 절벽 끝쪽에서 사람의 힘으로
쪼아서 만들었다는 터널이 나왔다. 터널을 지나니 그 유명한 곽량촌이 나왔다. 옹기종기 붙어있는
조마한 기와집들이 중국 무술 영화에서 보던 그 장면과 비슷하다.고대 중국의 촌락 모습을 그데로
간직하고 있기때문에 여기서 중국 영화를 많이 촬영했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깎아지른 절벽 뿐이었다. 골짜기에는 오동나무 군락이 있어 봄바람을 타고
향긋한 꽃내음이 코 끝을 간지려 기분이 상쾌했다. 내려올 때는 반대편 길로 내려오는데 절벽
중간으로 길을 내어서 내려다보면 오줌을 지릴 정도로 아슬 아슬한 절벽으로 되어있다.
손에 땀을 쥐며 내려오는데 올라오는 차가 있어 교차할 땐 진짜 소름이 쫘악 돋았다.
저녁 식사 후 임주 호텔에서 짐을 풀었다.
짐을 풀고 전신 마사지를 받았다. 하루종일 지친 몸이 화악 풀렸다. 모처럼 고스톱으로 11시 30분까지
놀다가 12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7시에 기상하여 짐을 들고 호텔 로비에서 열쇠를 반납하고 식당에 입장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손님이 몰려 식사할 자리가 없었다. 겨우 남이 먹고간 어지러운 빈자리도
다행으로 여기고 식사를 했다. 이번 여행은 눈은 호강을 하는데 입은 영 푸대접이다.
식사 후 태항산 대협곡으로 출발하였다.
산의 모양이 꼭 어제 본 만선산과 비슷했다. 웅장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퇴적암이 우리를
짓누를 것 같은 위세로 맞이하고 있었다. 터널을 지나자 드디어 협곡이 나타났다. 오늘은
노동절이라 근로자들도 노는 날이라서 좁은 골짜기는 온통 관광객과 차들로 넘쳐났다.
주택은 모두 현지에서 생산된 돌로 쌓아 올렸고 지붕도 구들장 처럼 생긴 얇은 돌을 사각으로 잘라 덮었다.
칼로 자른 듯한 좁은 절벽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고, 개울을 건너는 곳엔 유리를 덮어 길을 내었으며
,경사진 곳은 바위를 파서 계단을 만들었다.절벽을 가로 지르는 통로는 사람 하나 겨우 다닐 정도의 좁은
길을 파내어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키큰 사람은 이마받이 할만큼 아슬아슬하고, 잘못 디디면 개울로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좁은 골짜기 사이로 아내를 끌고 다니느라 등줄기에 땀이 후줄건히 베어나왔다.
고도차가 큰 곳엔 어김 없이 폭포가 쏟아진다. 이렇게 단단한 바위 산에 어디서 이런 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면 끝 없이 이어지는 가물가물한 절벽이
금세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데도 수천년 동안 이렇게 버텨 왔으니 자연의 위력이 참 대단하다.
아내는 다리가 아파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내려올 때 합류하려고 벤치에 앉아 버렸다.
그러나 이 길로 오는게 아니라 절벽의 종점에서 차를 타고 다른 길로 온다는 가이드의 말에
할 수 없이 팔을 잡고 끌어 올리고 등을 밀어가며 억지로 기어 올랐다. 중간 휴게소에서 간단한
간식을 했다. 거기서 파는 산 사과가 모양은 작았지만 맛은 달고 아삭아삭 씹는 맛이 괜찮았다.
이렇게 험한 골짜기에도 군데 군데 현지 상인들이 손바닥만한 좌판을 벌여 놓고 나물이며 술안주며
음료수를 팔고 있었다. 산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포천 막걸리를
팔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드디어 고생스러운 트레킹이 끝나고 산 중턱에 도착하니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산 중허리를 달리는데 금방 낸 길이라서 좁고 구불구불하고 포장이 안되어
먼지가 많이 났다. 거기서 내려다보니 올라온 길이 까마득하고 골찌기를 기어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개미떼가 이동하는 것처럼 가물거린다.
그래서 여기를 중국의 콜로라도 협곡이라고 하는 것 같아 실감이 났다.
이렇게 험한 절벽 끝에도 계단 식으로 밭을 쪼아 농사를 짓고 있었다.
발만 헛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지만 그래도 손바닥만한 땅에서도
아슬아슬하게 농사를 짓고 있었다.
푸른 숲이 너무 좋아 차 안에서 '청산에 살리라' 는 가곡 한 가락을 뽑았다.
오던 길을 되돌아 나오니 어느덧 점심 때가 되었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섭섭하지만 이제는 귀국 길에 올라야 했다.
어제 오던 길을 되돌아 가는 것이다. 다시 보아도 너무 넓고 쭈욱 곧은 고속도로, 가로수와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들판이 너무 부러웠다. 교량도 없고 터널도 없고 농가도 보이지 않지만
곡식은 잘 자라고 있었다. 오는 길에 강이라고는 황하강 상류 한 군데만 눈에 띄었다.
말 그대로 누런 황토빛 물이 흐르고 있었다. 정주에서 저녁을 먹고 고속 열차로 왔는데
속도는 평균 시속 300km를 넘게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주나 시안이나 역사가 엄청 크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김해 국제 공항처럼 그 규모가 엄청 크고 검색 또한 대단했다.
공항 검색 할 때와 꼭 같은 방법으로 검색하고 있었다. 12시가 넘어서야 시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비로소 중국 시안 여행이 끝났다. 몸은 비록 피곤 했지만 너무 좋은 구경을 하고 왔다.
특히 불가능 할 것 같았던 아내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 험한 곳을 무사히 다녀왔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처음에는 여행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이던 사람이 내년에도 가자는데 별로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또 하나 느낀 것이 중국이 앞으로 G2를 제치고 세계를 지배할 날이 금방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국토가 넓은데다, 인구가 많고, 자원도 풍부하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데다 정치마저 공산당 일당
체제니 모든 일을 능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국가가 하고자 하면 무엇이나 거칠게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곳곳에 건설 사업이 힘차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차별적인 국토 개발로 인해 공기가 대단히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염된 공기가 편서풍을 타고 우리 나라까지 날아온다니 기가 찰 일이다.
그래서 요즘 우리 나라는 시도 때도 없이 황사에다 미세 먼지 경보까지 발령되곤 한다.
김해에 도착했을 때 맑은 공기를 마시니 드디어 고향에 온 것 같다. 아무리 중국이 넓다해도 우리 나라
보다는 못하다.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우리 나라 풍경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아늑하고 오밀조밀하여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첫댓글 혹시 중국 여행에 참고가 될까하여 몇해 전 여행기를 올려 보았습니다.
여행 일정에 따른 감동적인 글, 잘 읽고 갑니다.
역시 만능!
중국을 여행코자 하면 둘러볼 곳이 너무 많지만 씨안(서안)과 그주변을 관광하는 것은 중국 역사의 한 면을 음미하게 된다. 운 좋게 나도 '한중수교'의 첫해(1991년도)에 베이징을 거쳐 그곳에 가보았지만 귀하의 여행기를 읽으니 25년전의 일들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 같군. 잘 읽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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