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은 독특한 우리 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돼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된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큰사진보기
▲ 왕곡마을 전경 왕곡마을은 동해바다를 코앞에 두고 있어도 바닷가마을이라 하지 않는다. 다섯 개 산, 오봉에 푹 안겨 있는 모습이 어느 산골마을 같다.(2016.12 사진)
금강산을 찍고 설악으로 내달린 백두대간은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五峰里)에 와서 숨을 골랐다. 무지막지하게 패인 협곡도, 사람을 해칠 만한 기암절벽도 없다. 둥근 다섯 봉우리, 오봉(五峰)이 감싸안은 함지땅으로, 그 끝은 송지호에 닿아 있다. 사람도, 짐승도, 바람도 쉬어갈 만한 아늑하고 포근한 곳이다. 왕곡(旺谷)마을은 그 안에 있다.
마을을 둘러싼 산은 우리가 보았던 산이요, 마을 안 잔잔한 물도 별반 다를 게 없는 물이다. 적어도 산 설고 물 선 곳은 아니다.
마을은 달랐다. 모든 게 낯설다. 덧댄 지붕모양도, 항아리를 이고 있는 굴뚝도 낯설다. 마당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도 낯설다. '고성(固城)'을 쌓듯 견고하게 쌓은 뒷담도 낯설다. 호남에나 있을 법한 '동학의 빛 왕곡마을' 비도 낯설다. 낯섦은 눈에 익지 않거나 몰이해에서 오는 것. 낯섦은 알면 익숙함으로 바뀐다. 낯섦을 떨치려 왕곡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은둔, 은신, 피난의 명당
큰사진보기
▲ 왕곡마을 큰상나말집 왕곡마을 집은 거의 큰상나말집과 같은 구조다. 한 지붕 아래 방, 고방, 마루, 부엌, 외양간이 통으로 들어간 양통집이다. 대문 없이 앞마당이 훤히 트여있는 것도 낯설게 보인다
큰사진보기
▲ 왕곡마을 굴뚝 왕곡마을 굴뚝은 크기도 클뿐더러 너무나 독특하여 굴뚝마을이라 불리어도 이상하지 않다. 굴뚝위에 항아리를 엎어놓은 모양이 재미있다.(2016.12 사진)
왕곡마을은 모든 것을 앗아간 6.25전쟁에서도 살아났다. 치열한 전투 끝에 허리가 동강 난 분단군(分斷郡), 고성 고을에서 살아남았으니 천운을 타고난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운으로 돌리지 않는다. 길지 중의 길지에 자리잡아 화를 면한 거라 입을 모은다. 전쟁 난 것도 모른 채 살다가 전쟁 난 사실을 어느 피난민에게 들었다는 '동막골' 같은 얘기도 떠돈다.
마을이 생긴 지는 벌써 600년이 넘었다. 조선이 들어설 무렵, 이를 반대한 고려 충신 함부열은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과 끝까지 함께하다 공양왕이 살해되자,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로 들어와 은둔했다. 그 후 아들과 손자, 후손이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했다.
은둔자에게는 최고의 은둔처요, 피난민에게는 피난처요, 혁명가에게는 몸을 맡길만한 적지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1827~1898)은 1889년 이곳에서 몇 달간 은거하며 민중을 교화하고 포교활동을 벌였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에는 동학군이 함일순집에 10여 일간 은거하며 전력을 가다듬었다. 마을 어귀의 동학비는 이런 사연으로 건립된 것이다.
양근함씨 함부열의 자손은 윗마을에 자리잡고 약 100년 뒤에 들어온 강릉최씨는 아랫마을에 살았다. 아랫마을, 윗마을 함께 붙어살다 보니 자연스레 혼담이 오갔다. 서로 시집가고 장가들어 두 씨족 간에 사돈이 되고 어머니 본가(외갓집)가 되고 처가가 됐다.
세상에 나가 나라를 구하거나 벼슬길에 올라 마을을 크게 빛내거나 수완이 좋아 큰돈을 번 집안은 없어도, 효심을 마을을 지탱한 근간으로 삼아 서로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오순도순 살아 왔다. 효자비를 둘씩이나 갖고 있는 점은 마을의 자랑이라면 자랑거리다.
추위를 막으려는 선조의 지혜
큰사진보기
▲ 왕곡마을 초가 지붕만 초가로 얹었을 뿐 집 구조나 크기는 다른 집과 비슷하다. 뒷담은 우악스럽게 높게 쌓지 않았어도 뒤꼍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 김정봉
큰사진보기
▲ 왕곡마을 굴뚝과 뒷담 산 쪽으로 노출된 집 뒤편은 담을 견고히 쌓아 찬바람을 막았다. 굴뚝도 추운지방 굴뚝답게 크고 높게 지었다
명당 중의 명당, 천혜의 요새, 왕곡마을도 임진왜란만은 피해 가지 못했다. 왜란으로 집이 거의 소실됐다. 지금 남아 있는 집은 19세기 전후에 지어진 것이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한데 어울려 있다. 기와집이라 해서 신분이 높거나 대단한 부잣집은 아니다. 형편이 좀 나으면 이웃마을, 구성리 가마터에서 어렵게 기와를 구해 기와집을 지었다.
집 이름은 함정균가옥 빼고는 ○○가옥이나 ○○고택이라 하지 않고 안주인의 고향이나 이사 온 마을을 따서 지었다. 성천집, 큰상나말집, 큰백촌집, 작은백촌집, 석문집, 한고개집, 이런 식이다. 추위는 집모양, 담모양, 굴뚝모양을 바꿔놓았다. 추위를 이기려는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왕곡마을 집은 한 지붕 아래 안방과 사랑방, 대청, 고방이 앞 뒤 두 겹, '전(田)'자 모양으로 꽉 들어차 있고 그 옆에 부엌과 외양간이 딸린 양통집이다.
부엌은 일상의 중심으로 크게 지었다. 집 안팎을 오가는 현관 역할을 하고 방과 대청은 물론 뒤꼍까지 부엌을 통해 드나들었다. 외양간도 부엌 옆에 두어 사람과 가축이 공생하려 했다. 외양간 위에는 본채 지붕에 덧댄 가적지붕을 얹었다. 왕곡마을 집이 대체로 'ㄱ'자 모양인 것은 이 가적지붕 때문이다.
앞마당은 훤하게 트여 있다. 담이 없으니 대문도 없다. 왕곡의 집들이 실내 중심적인 이유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물론 해를 향해 앞마당을 최대한 열어 복사열을 높이려는 이유도 있다. 반면 뒷담은 두둑하게 쌓았다. 찬 북서풍을 막고 주변 시선을 막아 뒤꼍을 아늑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유희열도 놀랐다, 왕곡마을 굴뚝
큰사진보기
▲ 석문집 원통형굴뚝 담에 끼어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는 굴뚝은 대개 원통형이다.
큰사진보기
▲ 성천집 굴뚝 굴뚝이 담의 한 부분을 이뤄 담인지 굴뚝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항아리로 굴뚝인지 안다.(사진은 2016.12 사진으로 현재 굴뚝 일부가 무너진 상태임) ⓒ
큰사진보기
▲ 왕곡마을 화려한 굴뚝 이집 굴뚝은 꽃담 쌓듯 몸에 화려한 장식을 하였다
가장 낯선 풍경은 굴뚝이다. 추운 지역이라 굴뚝을 크고 높게 지었다. 굴뚝 위에 독(항아리)을 품고 있는 점이 재미있다.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수 유희열도 이 굴뚝을 보고 깜짝 놀라는 장면이 있었다. 연기를 항아리 안에서 한 바퀴 돌아 나가게 해서 열을 오래 머물게 하고 불티를 항아리 안에 가두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굴뚝이 높으면 열이 잘 전달되지만 열을 빨리 빼앗기기 쉽다. 항아리는 이를 보완하기 위한 보완책으로도 보인다.
애초에 기능을 중시해 '항아리 굴뚝'을 만들었는지 몰라도 이제 왕곡의 항아리 굴뚝은 마을을 대표하는 조형미술품이 됐다. 신줏단지 모시듯 늘 가까이 두고 아끼고 쓰다듬고 매만져온 항아리를 연가(煙家)로 기꺼이 내놓아 멋을 낸 것이다.
"난 모르겠고, 그저 조상들이 하던 대로 전통을 지키려 했드레유"라며 무심하게 말하는 이도 있지만, 마을 사람들의 굴뚝에 대한 감정과 생각은 남달라 보였다. 조형미를 넘어선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해야 할까.
큰사진보기
▲ 왕곡마을 우람한 굴뚝 왕곡마을 굴뚝은 우람하다. 마치 성벽 같아 연기구멍은 성곽의 총안 같다.
큰사진보기
▲ 한과집 굴뚝 한과를 만드는 집 굴뚝답게 이 마을에서 키가 제일 크다.
굴뚝은 따로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담 중간에 낀 경우가 많다. 따로 떨어져 있는 굴뚝은 아래가 굵고 위로 갈수록 얇아지는 원통형이 많다. 담에 낀 굴뚝 중에 성천집 굴뚝은 담인지 굴뚝인지 분간이 안 되고, 함희석효자비 옆집 굴뚝은 성벽같이 엄청나게 크다. 한과 만드는 한과집 굴뚝은 왕곡에서 키가 제일 크고 마을회관 뒷집 굴뚝은 장식이 많아 가장 화려하다.
가장 정 많은 굴뚝은 한고개집 굴뚝이다. 한고개집은 19세기 말, 강릉최씨가 현재 북한 강원도 고산군 신현리 살구나무고개마을에 살던 여자와 결혼해 살던 집이라 한다. 그런 내력을 알고 나니 집 모퉁이에 있는 두 굴뚝이 더 다정해 뵌다.
큰사진보기
▲ 왕곡마을 굴뚝 연기 사랑방 군불연기가 따뜻해 보인다. 이렇게 풍성한 재래식 옛집 굴뚝연기를 언제까지 구경할 수 있을까?
오후 4시다. 성천집 옆집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다. 고성 산골마을에 저녁을 알리는 사랑방 군불연기다. 몇 년간 굴뚝 보러 다녀봤지만 이처럼 풍성한 살림집 굴뚝연기는 몇 번 못 보았다.
살림집 굴뚝연기가 낯설게 보였다. 마을의 겉모습이 익숙해질 무렵, 과거에 익숙했던 일상이 다시 낯설게 보인 것이다. 집, 굴뚝, 담, 마당 등 피상(皮相)의 낯섦은 낯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군불연기를 보고 깨달았다. 군불연기는 이제 과거에 익숙했던 마지막 일상인 것 같다. 이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난 변해가는 일상의 끝에서 낯섦을 떨치려 아등바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