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구나. 네멋에 빠져, 이곳 사람들에 빠져, 간신히 이번 학기를 버텨내고
약간의 미열에 방안에서 밍기적거리면서 모니터의 퍼석거리는 글자들과 상대하다
덕삼형의 번개 소식을 들은 때 였다.
고장난 몸을 이끌고 가야하나..
어머니 병원비 걱정이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계실 형이. 공지한 번개에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되어서 가야하나..
예전같지 않은 망설임과 주저함에 주섬주섬 옷을 꿰어입고 나갔고, 그날은 유난히 많이 들뜬채로 보냈었다..
1차 2차 술자리를 가열차게 보내고, 노래방에서 시체마냥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 감자탕집, 찜질방으로 이어졌고 다음 날 아침 느즈막히. 찜질방을 같이 나선 봉석형, 네오니와 함께 설렁탕을 비우고 나서, 후식으로 빙수를 먹으러 가자고 우겼다..
나른한 겨울날 주말 오전에 차가운 빙수를 마른 기침을 참아가며 떠먹는 기분이란.
제법 살을 에는 바람을 헤치고 들어간 손님드문 그곳에서 세명의 사내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을 안주삼아 키득거리며 농담을 주고받았고 소박한 행복감에 아랫배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흑백 영사기가 돌아갔고, 귀가 희미해졌다..
부산에 살던 집은 기찻길 옆의 창고같은 단칸방이었지만 마당을 갖고 살수 있어서 참 좋았었다. 좀처럼 눈구경 하기가 힘든 그 동네에 간만에 폭설이 쏟아진 적이 있었다. 눈이 온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마당이랑 대문 앞에 눈 좀 쓸어내라고 성화지만, 뽀얀 눈밭이 아까워 차마 발자국을 내기 주저하던 기억이 있다.
팥빙수 그릇을 받아 들 때마다 그 비슷한 갈등을 겪는다. 얇게 갈아서 하얀 눈처럼 만든 얼음송이 위에 뽀얀 크림과 미숫가루,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얹고 그 위에 검붉은 단팥과 캔디, 젤리, 혹은 달콤하게 조려진 깡통 과일 몇 조각이 흘러내리듯이 뿌려진 팥빙수.
이 유리그릇을 받자 마자 뒤섞어 비벼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무지막지하다. 그래서 조금은 망설여지고 몇 스푼은 이것 저것 거두며 조심스레 떠먹는다. 그러다 이내 한목에 몰아 섞어버리게 되었을 때 눈송이 같던 얼음가루는 벌써 녹아 단팥과 미숫가루를 이리저리 뒤섞어버리고, 웬지 눈온 뒤 풀린 날 오후 처마 밑으로 흘러 흙탕물이 되어 질척거리는 눈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을 테니, 벌써 꽤 시간이 흘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당신들 힘만으로 작지 않은 밭에 고추와 옥수수를 기르며 살았다.
방학이면 내가 잠깐씩 내려가 일손을 돕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의 기특한 효성이었다기보다는 그렇게 대타를 써서라도 면피를 해보려는 부모님의 궁여책이었을 것 같다. 사람에 부대끼는데에 막연한 공포심을 갖고 있던 나에게 조용한 산골마을인 그곳은 바둑판 도시에서 아무리 헤메어도 찾을수 없었던 기분좋은 투박한 곡선의 이상향이었다. 그 해도 방학을 맞아 시골로 내려가는 날이었다.
그래도 머리가 조금 굵어진 손주가 내려가면서 노인네들 입맛 다실 거라도 조금 사들고 가야 체면이 설 것 같아 어머니와 의논을 했다. 지난 번에 들고간 빵이랑 과자도 별로 안 드시는 것 같고, 과일은 사들고 가 봐야 동네 과수원 것이 더 좋을테고.. 그 때 어머니가 별로 어렵지 않게 내놓은 의견이 팥빙수였다.
사람이 늙으면 단 걸 찾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또 대개 찬 것은 싫어하시기 마련인지라 노인이 팥빙수를 즐기리라는 생각을 해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팥빙수라니,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팥빙수를 잘 드실려고?"
"왜, 달콤하고, 괜찮을걸? 단팥이랑 떡이랑.. 좋아하시는 것도 많이 들었잖아."
"그래도.. 잘 드실려고?"
어쨌건 나도 별다른 뾰족한 수도 없었기에 봉화에 내리는대로 터미널 앞 제과점에 들러 팥빙수 두 개를 갈았다. 거기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이십 분 걸려서 시골집에 도착했을때, 스티로폼 그릇에 포장된 팥빙수는 적당히 녹아있었다. 웬만큼 삭은 얼음결이 비벼먹기에는 좋았지만, 이곳 저곳 허물어져 내리고, 포장 뚜껑에 꼭대기마저 뭉개진 모양이 좀 민망하긴 했다.
"이게 뭐냐?"
"이게.. 팥빙순데요. 글쎄 입에 맞으실 지 모르겠어요. 엄마가 잘 드실거라고 하길래."
나는 벌써 공연히 움츠러들며 어머니 탓이나 끌어들여볼까 하던 참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부담스러웠다. 꼭 맞는 것 같지는 않지만, '부담스럽다'는 애매한 표현을 쓰는 이유가 있다.
사실 할아버지는 당신의 8남매,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를 비롯한 삼촌과 고모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대상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부장의 권력이 가장 막강했다 할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관통하는 4, 50년대에 자식 여덟을 거느린 남자의 조건이 일단 그랬고, 남양군도 징용자중 백분의 일의 확률로 살아 돌아온 억센 생명력에다가 경상도 봉화 태생의 무뚝뚝함까지 겹쳐, 나의 할아버지는 강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젊었을 때 길을 걷다보면 갑자기 힘을 주체할 수 없어 나무를 붙들고 한참씩 흔들다 지나갔었다는 얘기를 하시며, 내 자식들은 다 왜 이런지 몰러.. 하시는 소리를 들으면 김동리 소설에 나오는 무슨 장사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들리는 얘기로, 하루는 밭일 마친 할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대문을 들어서는데
돌이 막 지난 막내 고모가 마루에 앉아 빽빽 울고 있었다 한다.
"네 이년 그치거라, 네 이년 그치거라." 말로 타일러 안되자 무지막지한 이 아비는 지게작대기로 막내 딸 앉은 마루 옆을 냅다 후려쳤고, 불쌍한 막내고모는 파랗게 질려 딸꾹질도 못하고 울음을 그치더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호랑이같은 사내였다. 그렇지만 내가 할아버지를 두려워할 수는 없었다. 양가가 모두 반대했던 결혼을 무릅쓰고 직장도 다 팽개친채 부산으로 도망쳐 억척스레 해변가 포장마차 장사를 하며 시위하듯 낳아서 당신들이 우리 부모님에게 백기를 들수밖에 없었던 빌미의 장본인인 손주에게 보여준 그 분의 행동은 항상 나름대로는 파격이고 충격이었기 때문이다.어느 겨울에는 밥투정하는 손자먹일 전지분유를 사러 시커먼 짐자전거를 타고 눈쌓인 산길을 넘어 북지리 장터를 다녀온 것도 내 할아버지였다.
어쨌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공포심으로 형성되는 안개같은 카리스마, 그리고 그것은 그의 '살갑지 않음' 과 겹쳐 내가 그 분을 '부담스럽다.', 혹은 '어렵다.'고 표현할수 밖에 없는 관계로 만들었던 것이다.
"얘, 이거 하나는 너 먹어라. 우리는 이거 하나 같이 먹으면 된다."
역시나 뜸한 목소리로 할아버지는 팥빙수 한 그릇을 내밀었다. 그리고 스푼으로 허연 얼음 한 덩이를 떠올려서 조금 살피시더니 황당하다는 듯 내려놓고 팥알 몇 개를 집어들었다.
"이거.. 얼음이구나."
나는 할아버지는 제쳐두고, 역시 옆에서 생소해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호소하기로 했다. 이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할아버지야 "에이, 저리 치워라." 하실 분이지만, 할머니는 대충 "괜찮다." 고 얼버무릴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이건 이렇게 섞어서 먹는 거예요."
나는 스푼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같이 잡고 허둥거리는 팥빙수 그릇을 푹푹 휘저어 드렸다. 그리고 내 것도 마저 휘저어 얼음가루와 단팥, 떡조각과 과일까지 두루 한 수저에 떠서 모델삼아 한 입 떠 물었다. 그리고는 지레 글렀다 싶어 내거라도 비우자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자칫하다 얼음물 두 그릇 치울 일 생기겠다 싶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제법 몇 숟가락 뜨신다 싶기도 했지만 더 기대는 안했다.
"어 시원하다. 맛있네, 맛있어."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도 들렸지만, 워낙에 치레말을 잘하는 분이라 그저 한 번 쓱 웃었다. "그렇죠? 시원하시죠?"
그런데 문득 할아버지 목소리가 이어졌다.
"얘, 장터에서 이거 먹을래면 뭐 달라고 그래야 되니?"
일흔 넘도록 동네 사내들이 범접하지 못했던 이 호랑이같은 사내가 여든줄을 넘어서면서 빠져버린 앞니를 씩 내보이며 바보스럽도록 순진한 웃음을 지으며, 이 경박한 음식의 이름을 물은 것이다.
"예, 예.. 팥빙수예요, 팥빙수. 터미널 옆에 미화당이라고 빵집 있죠? 거기서 팔아요. 팥빙수"
내가 팥빙수 세일즈 맨도 아니고, 내 손수 만든 음식도 아니건만 나는 목이 메이도록 감격스러워서 팥빙수 홍보를 했다. "한 그릇에 이천원쯤 하구요.. 이렇게 포장 안하고 직접 거기서 먹으면 더 맛있어요.."
"응, 팥빙수, 이거 여름에 입맛 없을 때는 요기도 되겠구나."
심지어 이런 가당찮은 칭찬까지 이 처음 맛보는 음식물에 퍼부으시며 그렇게 순진하게 웃는 이빨 빠진 호랑이.
그 뒤로 할아버지가 장터 제과점에 앉아 팥빙수를 드셨는 지는 모르겠다. 그 뒤로도 다섯번의 여름을 더 지나 할아버지는 다시 뵐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 그 날은 막내고모도 많이 울었다.
아버지란, 그래서 할아버지란 하나의 벽 같은 것이리라. 그래서 제일 단단하고 강하게 그 안의 것들을 지켜주지만, 또 반대로 그걸 넘어 밖으로 나가자면 부딪치고 긁히고 떨어지게 마련인 모양이다. 그래서 난 아버지 안에서 자라나 그것을 원망하고 넘어서기를 꿈꾸다가, 문득 옛 고향집 그리워하듯 돌이켜 그리워하기도 하고, 비슷한 울을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팥빙수 한 그릇은 그 벽과 대화했던 한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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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